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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의 말갈

靺鞨

1. 개요
2. 말갈족의 역사
3. 말갈에서 여진족으로
4. 후금, 청나라를 거쳐 만주족으로
5. 한국과의 관계

1. 개요

만주러시아 아무르 지방 일대에 거주했던, 계통상 현재 만주족으로 계보가 이어진다고 여겨지고 있는 종족.

말갈의 최초 조상은 진시황진나라 이전 기록에 나오는 숙신이다. 숙신은 진시황의 진나라 이전의 종족이고 이들이 한나라 시대에는 읍루였고, 남북조시대 후위에는 물길 그리고 , 당나라 시대에는 말갈이다. 이 말갈은 발해가 멸망하고 송나라부터는 여진이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들 종족명의 공통점은 모두 기록자 중심으로, 스스로 부른 종족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말갈이란 스스로가 자칭했던 종족명이 아니라 당이나 고구려 중앙에서 도성중심의 시각으로 고구려 변방인들을 멸시해서 이민족으로 부른 종족명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한 당이 발해를 말갈이라 하였던 것은 중국측의 신당서에 대조영을 속말말갈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조시대의 국가관은 주로 수도중심이었다. 평양 수도사람의 입장에서 시골사람들을 이민족처럼 말갈로 불렀다는 견해이다. 요즘 말로 하면 말갈은 레드넥촌놈과 같은 뜻이었다고 보면 된다. 현재 우리가 시골 사람들을 비하하는 뜻으로 촌놈이라 부르는 걸 고구려 시대엔 말갈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대조영이 속말말갈이란 것도 그가 고구려 속말부[1] 출신 촌놈이란 뜻이다.

결국 말갈로 불리는 이들도 고구려인이었고 발해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종족적인 측면에서 기록상의 말갈로 불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구려와 발해인을 의미하며 고구려와 다른 전통적인 말갈이란 흑수말갈을 의미한다. 그런데 송화강 일대에 거주한 집단음 물질문화상 흑수말갈과 동류이다

말갈의 용법을 종합하자면 말갈이란 첫째로 흑수말갈을 가리키는 종족명, 둘째로 삼국등 왕조 변방의 불특정의 반독립적 세력을 지칭하기도 하였는가 하면, 셋째로 남만주지역의 주민을 넓게 통칭하기도 하였고, 넷째로 발해국을 낮추어 부르는 왕조명이기도 하였다.

2. 말갈족의 역사

최초 사료에 등장하는 이름은 '숙신'이다. 식신 혹은 직신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는데, 이후 전한시대때는 읍루로 불리다가 수당시기에는 말갈로 불렸다. 말갈족은 7개의 유력한 부족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부족 두 개를 꼽으라면 일찍이 고구려화된 예맥계인 속말말갈과 끝까지 동화되지 않고 예맥인들과 대립한 흑수부 말갈을 꼽을 수 있다.

우선 주로 길림성 일대에서 거주한 속말말갈과 백산부 말갈이 있다. 이들은 생활 방식이 고구려랑 부여와 비슷한데, 애초에 거주하는 지역 자체가 고구려와 부여처럼 반농반목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니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백산말갈이나 속말말갈은 환경 자체가 예맥인들과 똑같기에 동화속도가 빨랐고, 심지어 속말부 말갈은 아예 주도적으로 고구려를 재건하기까지 했다. 이는 이후 흑수말갈의 후신인 완안부가 고구려와는 전혀 상관없는 금나라라는 새로운 여진족의 제국을 세운 것과는 매우 비교되는 사례로서, 이미 이 두 부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말갈인'이 아닌 '고구려인'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사료에 나오는 발해의 말갈 부락들은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퉁구스계 말갈들일 가능성이 높으며, 발해 건국의 주체 세력들은 대부분 서쪽의 길림성 지방 출신인 속말말갈인들과 토착 고구려인들이다.

흑수말갈을 비롯한 기타 퉁구스계 말갈족들은 연해주~아무르강 일대에서 거주하던 민족으로 위의 두 말갈 부족과는 매우 이질적인 부족이었다. 아무르강 혹은 흑룡강 일대는 환경 자체가 남쪽의 길림성과는 판이하게 다르고 척박한 지역이므로 매우 거칠고 유목민족의 특성을 강하게 지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고구려와 발해에게 정복되거나 복속되었을지언정 끝까지 이질적인 존재로 남아서, 속말부나 백산부처럼 동화되지는 않았다. 고구려때도 반 복속상태로 있었고, 발해때도 흑수부말갈이 당나라의 지원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견제를 했지만 발해 선왕시기에 결국 모두 제압당하고 복속되게 된다. 그러나 이후 발해가 요나라에 의해 허무하게 멸망하면서, 발해 유민들을 몰아내거나 흡수시켜서 점차 만주의 주인이 되어 여진족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재탄생이라는 말 자체가 어폐가 있을 수 있지만, 기존의 말갈이 크게 예맥화된 말갈과 그렇지 않은 말갈로 나뉜 것과 달리 예맥계 국가가 만주에서 사라지면서 집단의 성격 자체가 변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2]

3. 말갈에서 여진족으로

(금나라의 초기 수도인 상경회령부 궁성 모형) 문이 부서진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이다

발해의 멸망 후 여진족으로 명칭이 바뀌어서 거란에 복속한 숙(熟)여진과 그렇지 않은 생(生)여진으로 구분되어 죽어지냈다. 그러나 거란의 요나라는 요동과 만주 지역에 대해 완전한 지배 관계를 형성하진 못했고, 11세기 후반 ~ 12세기 초 영가, 우야소 등의 추장이 등장하여 부족 국가를 통합해가면서 주변국과 긴장 구도를 이루었다.

이에 윤관척준경 등이 별무반을 중심으로 이들을 토벌하고 동북9성을 확보하기도 하였으나, 1115년 정월 완안아골타 아래 규합하여 금나라를 일구어낸 후 신속하게 요를 갈아마시고 화북 지방까지 차지하였다. 그 뒤로는 고려이자겸의 주도하에 이들의 조공 체계에 편입되었다.

이후 한동안 잘 나갔지만 어느 날 웬 인간병기들이 몰려와서 망했어요.(...) 이후 분열되어 원나라 붕괴 후엔 조선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부족 세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4. 후금, 청나라를 거쳐 만주족으로

조선명나라 두 나라의 힘이 약해진 16세기 말~17세기 초가 되자 여진족들은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후금을 자칭하며 세력을 규합하였고, 이후 청나라를 세워 만주족으로 종족의 이름을 바꾼다. 이후 중국 대륙의 내전을 틈타 명나라 잔존 세력을 몰아내고 중원의 지배 세력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한족에 대한 개방 정책을 펴면서 서서히 고유 문화를 잃어갔고, 청이 멸망하고 만주에 대한 주도권도 많이 빼앗긴 현대에 와서는 종족(만주족)과 언어(만주어)의 존망을 논해야 할 단계에 처해 있다.

만주족 외에는 러시아 극동의 소수민족인 우데게족(Удэгейцы)과 나나이족(Нанайцы)이 이들의 후손으로 여겨지고 있다. EBS의 '발해여말갈'이란 다큐멘터리에선 나나이족 인물이 등장해 발해와 말갈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3], 아무리 봐도 본인의 지식에 기반하여 뱉은 소리로 보이진 않는다.(...)

5. 한국과의 관계

백제온조왕[4] 신라혁거세거서간지마 이사금, 일성 이사금 때부터 내물 마립간 때까지 말갈의 침략 기록이 다수 나타나는데[5] 여기서 나오는 말갈은 동예일 확률이 높다. 이후에는 고구려의 남진과 더불어 함께 나타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만주에 살던 말갈족을 고구려가 징병해서 남진에 동원했을 가능성도 있다. 비슷하게 예인(동예)을 백제와의 싸움에 동원하기도 했다(독산성 전투). 심지어 의자왕 때도 여-제의 신라 공동 공격에 말갈이 가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고구려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고구려 멸망 후 일부는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신라로 흘러들어가기도 하였다. 후기신라수도권을 방어하는 9서당 중 흑금서당은 말갈인으로 구성된 부대로 편입된 사례에서 이를 추측할 수 있다. 심지어 아예 고구려화된 말갈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 복원을 내세우며 고구려를 재건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는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 논쟁이 많은데, 사실 대조영이나 발해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외국 학자들은 고구려화된 말갈인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다. 반면에 아무르강과 연해주 일대에 살던 흑수말갈을 비롯한 상당수 다른 말갈 부족들은 복속과 이탈을 계속 반복한 것으로 보아 끝끝내 동화되지는 않은 듯 하다. 즉, 말갈족들은 의식적으로 고구려인에 일부 동화된 말갈 부족(속말부, 백산부)들과 생활방식이 많이 달라 동화되지 않은 말갈(흑수부, 철리부, 월희부 등) 부족들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1. [1] 송화강 북쪽 지류인 속말수 일대에 있었던 곳으로 지금의 헤이룽장 성 치치하얼 일대를 말한다.
  2. [2] 사실 이 말 자체도 어폐가 있을 수밖에 없는게, '말갈'이라는 것은 자칭이 아니라 타칭적 성격의 집단명이다. 말갈7부라고 해서 같은 말갈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오류를 내포할 가능성도 있다. 말갈 7부라고 하더라도 서로간에는 같은 동류의 집단이라고 인식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을 것이다. 같은 몽골일지라도 외몽골 할하족과 내몽골의 차하르족은 원수지간이며 거의 다른 민족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애초에 고구려 건국에 합류한 속말말갈은 처음부터 다른 말갈족들과 동류의 집단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말갈'이라고 퉁쳐서 묶은 다음 거기서 분류해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이들 집단의 성격을 잘못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발해가 고구려인의 국가가 아니라 여진족의 국가라고 하는 논리적 오류가 최근까지도 제대로 극복이 안되는 것일 수도 있다.
  3. [3] 발해시조 고왕(대조영)에게 제사를 지낸다고도 한다.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4. [4] 초기 마한과의 갈등 과정에서 마한의 편을 들면서 맨날 당하는 역할로 구수왕 때까지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고이왕 때부터 말갈은 백제에게 확고히 조공을 바치게 된다. 이후 말갈의 침략은 기록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때를 기점으로 백제의 확고한 우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5. [5] 단, 혁거세 때의 기록은 흔히 후대의 윤색으로 본다. 국경이 접하지 않는 건 물론 국력이 넘사벽이었을 마한과도 상당히 대등한 관계고, 그 맥락에서 말갈도 등장하기 때문에.. 그래서 말갈의 신라 침략은 대략 신라가 동해안으로 진출하면서부터를 기점으로 본다. 좀 더 나중에 있었던 지마, 일성 때의 말갈 관련 밀고 밀리는 기록은 혁거세 때보다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사건이 설명돼있긴 하지만, 이 역시 신라의 확장이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별로 안 되는 시점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좀 더 나중에 있었던 일인데 이전 시대로 끌어올려졌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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