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헌법발포약도.[1]

1. 개요
2. 조선에 미친 영향
3.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차이
3.1. 개혁 세력의 집권과 의지
3.1.1. 일본
3.1.2. 조선
3.2. 근대화 기반 마련
3.2.1. 일본
3.2.2. 조선
3.3. 외국어 통번역
3.3.1. 일본
3.3.2. 조선
3.4. 정치 구조
3.4.1. 일본
3.4.2. 조선
3.5. 시기적인 행운
3.5.1. 일본
3.5.2. 조선
3.6. 국부(國富)
3.6.1. 일본
3.6.2. 조선
4. 관련 문서
4.1. 시대적 사건
4.2. 조직
4.3. 사상
4.4. 인물

1. 개요

일본의 기존 정치, 경제, 사회를 서구식으로 갈아엎은 혁명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 Meiji Restoration)은 19세기 말 일본에도 막부가 서양의 개항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쿠로후네 사건으로 조약을 체결하자, 이에 반발한 막부 타도 세력과 왕정 복고 세력에 의해 막부가 무너지고(1867년의 대정봉환) 덴노 중심의 국가로 복고된 대사건을 말한다. 대개 개시 시기는 메이지 연호가 시작된 1868년으로 본다.

한국에선 한자음 그대로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도 부르며, 일본에선 그냥 유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메이지 유신이라는 말은 현대에서 쓰이는 역사 용어[2]로, 당시에는 '어일신(御一新, 고잇신)' 등으로 불렸다.[3]

유신 3걸(사이고 타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로 대표되는 신흥 세력에 의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와쿠라 토모미는 그 중에서 최강의 흑막. 물론 그 배후에는 또 조슈 번요시다 쇼인이 있었고, 그의 제자들이 에도 막부를 타도하고 개국을 추진하게 되니 가장 큰 공로자는 요시다 쇼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4]

단 확실히 해둬야 할 것은 기존 이들의 의도 자체는 서구식 개혁이 아니었다는 점. 원래 메이지 유신을 시작한 세력들의 의도는 그냥 나라의 지도자를 막부에서 고메이 덴노로 바꾸고 쇄국은 이어가자는 순수하게 존왕양이의 사상이었지만 사쓰마의 코마츠 타테와키삿쵸 동맹에서 삿토 맹약으로 마지막으로 사카모토 료마의 신정부강령팔책에 따른 도쿠가와 막부 타도 직후에 갑자기 전면 개국이라는 결론이 되어버렸다.

대강만 보면 이해가 힘들겠지만 일단 여러 상황들을 다 살펴보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걸 알 수 있는데 이 당시 정변을 주도했던 지역이 사쓰마조슈 두 번이었고 그 중에서 막부와의 공무합체(公武合体)를 추구하는 집단으로 잔류 중이던 사쓰마 번 소속의 무사가 사소한 무례를 이유로 영국인을 살해한 것이 계기로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 그 이후로는 반막부 세력(신정부군)과 영국 상인들만으로의 무구(武具), 조선(造船) 통상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개군(改軍) 현상을 돋보였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비교적 적은 사건으로 끝난 사쓰마와 달리 조슈는 도막(막부 토벌) 정신으로만 일관하면서 존왕양이 의식을 일으키고 1864년에는 아예 시모노세키를 항해하는 4개 외국 양선(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에 발포하기까지 했으나, 곧 조슈도 열강의 보복으로 국력의 격차를 실감하고 도막 정책으로 항거하는 개국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전면 개항을 한 것도 이때의 경험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일본도 막부 체제 하에서 어느 정도 서양화가 이뤄졌지만, 화혼양재라는 명목 하에 그다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에 일본은 서양에 이와쿠라 토모미, 이토 히로부미 등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여 직접 견학하고 많은 걸 배워왔고 이런 배움 속에서 이들이 내린 결론은 전면 개방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일본은 폐번치현, 신분제 폐지, 국민개병제 등 전면적인 서양화에 착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급격한 변화로 어느 정도 피해가 나오긴 했지만 그 급격한 변화를 거부한 청나라나 조선이 반 식민지 종속국이나 일제강점기를 거친 것을 보면 이 당시 동양으로선 그냥 초반에 약간 피해보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게 제대로 살아남는 길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일본에서도 반발이 없을 리가 없고 사가 번 → 히고(구마모토) 번 → 아키쓰키 번 → 조슈 번 순으로의 사족 반란이 들이닥쳤다. 그 이후로도 정한론 무산 결과와 산발탈도령(단발령+폐도령)에 항거한 사쓰마 번 무사들은 특권 계급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뭉쳤고, 이들이 일으킨 반란이 바로 서남전쟁(현재까지의 일본 열도의 마지막 내전)이었지만 결국 진압되고 개항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2. 조선에 미친 영향

이때 국서(서계)의 발신자가 쇼군에서 덴노(천황)로 바뀌게 되었는데, 일본이 이렇게 개항을 결정하던 사이 청나라는 한창 마약 하나를 빌미로 서양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고 삥 뜯기던 시절을 겪으며 차차 개항해나간 덕에 그냥 서양과 직접적으로 근대적 외교 관례에 맞춘 조약을 체결해서 아편전쟁만 빼면 개항 과정 실패 이후 그리 큰 피해는 없었다.

문제는 아직 통상 수교를 거부하고 있던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조선.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이번에 새로 만든 도장을 사용한 점과 천황, 황조 등 청나라나 사용할 수 있는 황칙의 용어를 일본이 스스로 쓴 것(즉 위계상 일본>조선)에 심히 불쾌해 하며 국서(서계)의 접수 자체를 거부해버렸다. 186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국서 거부 사건(서계 거부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후 일본은 다시 조약을 맺자고 제의했지만 흥선대원군은 또 거부했다.[5]

1872년 당시엔 점점 골이 깊어지다가 소요 사태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정식으로 국교가 단절되기까지 했으며 그전에 이미 조선 통신사가 50년간 없었다는 점에서 근세 조-일 관계가 유명무실화된 시점이었던지라, 이에 더욱 격노한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힘을 일시적으로 얻었지만 척화파인 흥선대원군과 정한론 강경파가 양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실각하며 두 나라 모두 다시금 협상을 시도했지만 수뇌부만 어느 정도 잘렸을 뿐이지 양국 모두 그 당시엔 척화파/정한론이 주 파벌이었기에 협상도 의미 없이 계속 결렬되고 그 와중 운요호 사건까지 터지면서 돌이킬수 없는 선을 건너버렸다.[6]

그리고 이때 가지게 된 악감정의 영향으로 '일본은 상국, 조선은 하국'이란 인식이 일본 내에 퍼지면서 고종명성황후 민씨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왕'과 '민비'가 등장했다. 당시와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했을 동안엔 이런 메이지 유신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8.15 광복이 온 이후 건국된 대한민국에서 의외의 부분에서 은근히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는데 영향을 줬다고 한다.

3.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차이

감정적 요소를 배제하고 보면, 메이지 유신은 한국의 학자들 입장에서 보아 일본이 분명한 명분, 방향성, 추진력을 지니고 개혁을 시도한 반면, 조선은 그 당시에도 꽉 막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뒤늦게 크게 당하고서야 엄청 불리한 조건으로 개항을 시도한 것이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고 보는 의견이 강하다.

물론 조선과 일본을 단순히 19세기 말 서양으로의 개방과 개항의 시기 차이로 인해 국력에 차이가 나게 된 것으로 이해하는 건 무리다. 왜냐하면 일본의 에도는 인구숫자가 100만에 육박하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으며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집권 이후로 19세기까지 문을 닫아왔었으나 오래 전부터 네덜란드 등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단순히 몇몇 사치품을 들여오는 수준이 아니라 정밀한 인체골격도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했으며 역으로 일본의 문화예술이 유럽으로 건너가 자포네스크를 유행시키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메이지 유신 이전에 말이다.

조선은 그에비하면 서양과의 교류는 아예 전무했으며 조정은 외척에 의해 시달려 제기능을 하지 못했고 사회적으론 빈곤과 삼정의 문란에 의한 반란, 신분계층의 동요가 지속되어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의 사회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도 일찍 문을 열었으면..."하고 아쉬워 하지만 그냥 문 연다고 근대화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문을 여는 순간 쏟아져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대격변을 견뎌낼 수 있는 내공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서구 열강이 각종 문물을 공짜로 베푸는 것도 전혀 아니다. 당장 일본만 해도 인구가 조선의 거의 2배에 달하고 상공업의 발달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격차가 벌어져 있었음에도 에조 공화국과 내전을 치르고 러일전쟁으로 파산위기에 처했다 1차 대전으로 구사일생 하고 연이어 벌어지는 칼부림과 암살 등 내/외부적인 위기가 엄청나게 많았다. 조선보다 훨씬 강했던 일본도 근대화 과정에서 몇 번이나 고꾸라질 뻔하다 겨우 성공했으며 사실 그 성공조차 도로 포장률만 비교해봐도 기존 열강에 비하면 아직 멀은 수준이었음을 생각하면 조선이 과연 문을 일찍 열었다고 해서 근대화에 성공했을지 의문이다. 실제로 일본보다도 일찍 문을 열고 조선보다 상태 좋은 나라들이 있었지만 근대화에 성공해 열강으로 발돋움한 예가 없다.

3.1. 개혁 세력의 집권과 의지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요인. 즉, 집권자들이 개혁 의지가 있었는가의 문제이다.

3.1.1. 일본

일본인들은 적어도 서구의 기술적 문명이 자신들보다 고등하다는 현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일본이나 조선이나 서민이 무지몽매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일본의 집권층은 국제정세를 직시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17세기 에도 시대부터 막부는 네덜란드와의 정기적 교역과 네덜란드와의 무역항구인 데지마의 상관을 통해 서구의 정세와 기술, 문화에 대해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다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 빠르고 정확한 서구의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했다.

일본의 경우 어설픈 개방으로 서양의 침탈을 가속화시켜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 가던 막부를 사쓰마, 조슈 등의 네 개 번의 실력자들과 하급 무사들이 저지하는 데 성공, 구체제 자체를 갈아엎었다. 이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막부라는 구체제를 갈아엎으면서도 훨씬 더 구체제의 유산인 덴노를 전면에 내세웠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메이지 덴노가 서구화에 우호적이지 않아서 잘못하면 개혁의 속도가 지지부진해질 수도 있었지만 신정부는 현명하게도 덴노의 권위를 인정하는 반면 정작 권력은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력은 유신을 이끈 신정부의 실력자들이 그대로 가졌고, 이들은 당연히 신정부가 제대로 자리를 잡은 뒤 작정하고 총체적인 서구화를 진행시켰다. 덴노라는 민심 장악 수단과 실제 성과가 잇다르면서 불만도 거의 없었고, 그나마 이 당시 대표적 보수파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입장도 너무 급한 개혁과 사무라이들의 집단 실권만 막자는 입장이었지 적극적 개혁 자체는 찬성하는 경우였다.

3.1.2. 조선

"미리견(미국)이란 나라에는 작은 부락만 있으며, 화성돈(워싱턴)이란 촌장이 나와서 영길리(영국)와 교섭하면서 성지(城池: 성곽과 연못)를 개척하고 기지를 만든 촌락으로…이들은 바다를 왕래할 때 약탈하는 습성이 있고, 해적과 다를 바 없습니다…."

고종의 질문에 대해, 영의정 김병학이 답한 내용.

조선에서는, 세도정치기의 문벌 가문들은 국제 정세에 대해에 대해 별반 지식, 관심, 대책이 없었고, 이들의 대외관은 중국으로부터 물려받은, 역외 문화를 전부 오랑캐 문화로 보는 그것이었다. 이는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을 '명나라의 우월한 한족문화를 계승한 유일한 국가'라는 '소중화(小中華)'론의 대두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당대 조선인의 공통적인 치졸한 견문이 본능적 양이(攘夷)를 북돋은 것이 크다고 하겠다.[7] 그리고 이들의 끔찍한 어리석음은 한국 역사상 최악의 결과를 불러온다.

또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각종 개혁을 시행하며 내치에는 힘을 썼지만 권력의 중앙집권화에 너무 신경을 쓰느라 서양에는 거부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흥선대원군은 척화만이 아니라 경복궁 중건으로 노동력이나 돈을 반강제로 걷거나 서원을 철폐하는 등 오로지 중앙집권화를 위한 행동을 위주로 했다. 물론, 근대화에는 강력한 중앙집권 권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중앙집권화 자체에만 신경썼지 더 나아가 근대화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서원 철폐등 백성에게 이득이 된 정책도 없지는 않았지만, 경복궁 중건을 시행한 것처럼 애초에 민심을 신경쓰는 입장도 아니었고 서원 철폐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원칙대로 시행한 정책이었을 뿐이다.

흥선대원군 실각 후에도 고종을 위시한 조정은 반강제로 개화의 삽을 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강제로 시작한만큼 명분도 목적도 없었고 나아갈 의지도 없이 발을 뗀 직후 바로 멈춰있던 상황이었다. 그나마 김옥균 같은 일부 인물들이 조선 안에 살면서도 세계의 현실을 깨닫긴 했지만 이들도 스스로 주도하기보단 일본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인 시점에서 한계는 명백했고 애초에 제대로 된 세력을 이루지도, 성공을 하지도 못했다. 당시 근대화를 이끌어갈만한, 이른바 개화파라 부를만한 인사는 당시 조정에는 박규수가 유일했고 민영익, 김홍집, 김옥균처럼 훗날 이름을 날렸던 개화파 인사들은 1870년대쯤에나 막 30대에 관직에 오르기 시작했던 사람들이다.

3.2. 근대화 기반 마련

3.2.1. 일본

단기적인 배경을 떠나 근본적인 측면을 살펴 볼때 서구화에 대해 일본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준비가 상당히 잘 되어 있었다. 16세기인 전국시대 때부터 지방/중앙 정부 차원에서 유럽과 직접 교류를 해오며 가톨릭을 받아들이거나 조총과 같은 근대식 기술을 도입하였고 전국적으로 쇄국했던 에도 막부시절에도 네덜란드와는 여전히 교류하면서 주기적으로 들어오던 국제정세에 관한 최신 정보(오란다 풍설서)와 난학[8]을 통해 지식인층 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도 서양의 사상과 문물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주입되었다. 개혁자체가 급했을 뿐이지 그것을 보고 적응할 정도의 준비는 이미 이루어졌었다는 것.

이러한 일본의 사상적 변화는 에도 시대 중·후기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들에게 큰 위화감으로 작용했을 정도로 지대했다.## 일반적으로 막부가 서양화를 거부하고 4번이나 거부한 끝에 개방했다는 인상이 짙지만 실상 막부 역시 서양화를 꾸준히 추진했다. 단지 중국의 중체서용, 조선의 동도서기와 비슷한 화혼양재가 기준이었을 뿐이다.

3.2.2. 조선

외세와의 교류에 있어 조선은 서양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진 못하고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는 양상이 더 짙었다. 동시대 조선과 일본에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도착한 양인들의 수가 크게 차이 나며, 일본까지 가는 항로가 개척된 이후에도 조선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직접적으로 양인들과 교류하는 선택을 할 수도 없었고 선택하지도 선택할 의지도 여전히 없었다.

벨테브레헨드릭 하멜 일행의 표류와 같은 기회가 있었지만 비슷한 사례가 있던 일본과 비교해보면 조선은 그들로부터 서양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거나 다른 서양인들과의 대화 창구로 사용하지 못했고 그들로 인해 서양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일도 없었다.[9]

또한 일본에서는 각 지방들이 서로 나뉘어 서양과의 교류나 근대화에 관한 경쟁을 벌였지만, 명분상으로나마 중앙집권체제였던 조선에서는 지방의 세력들은 서로 손잡아 재산이나 불리기 바빴지 성장이나 대외교류 따위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다.[10] 일본은 사츠마 같은 일개 '지방'[11]도 증기선을 20척 가까이 보유했던 데에 비해 조선은 대한제국 시대에야 짐배에 포얹은 양무호광제호가 전부였다.

3.3. 외국어 통번역

3.3.1. 일본

외국어 통번역문화가 발달했다는 점도 상당히 중요한 점인데, 비록 막부가 쇄국 정책을 유지했을지언정 에도 시대 중후기에 이르면 수많은 난학숙(네덜란드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이 설립되어 민간인이 네덜란드어 의학서나 백과사전을 완역하거나 네덜란드 상인들의 거류지인 데지마에서 흘러나오는 소식들을 통해 세상 물정을 어느정도 접할 정도였고, 또 대대로 네덜란드어를 통번역하는 가문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

덤으로 영국, 미국, 프랑스 등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사람들과 교류할 때도 영어프랑스어를 네덜란드어를 거쳐 간단하게 의사소통할수도 있었다.

3.3.2. 조선

조선은 서양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 항상 청나라를 통해야만 했고 청나라에서 번역된 문서가 오기까지 엄청난 시일이 걸렸기 때문에 교류는커녕 자체적으로 의미 있는 의사소통을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12]

이러한 실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바로 유명한 헨드릭 하멜의 표류이다. 조선은 그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조차 몰라서 그저 "남만인(南蠻人)"이라고만 부르고[13][14] 별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13년 뒤 하멜 일행이 조선을 탈출해 일본 나가사키에 이르렀을 때 나가사키의 '총독(부교)'은 네덜란드어 → 포르투갈어[15] → 일본어 통역을 통해 그들을 심문한 결과 금방 그들의 정체 및 표류, 억류, 탈출 과정 전부와, 덤으로 당시 조선의 내부 사정(!)까지 상당히 세세한 수준으로 캐냈다. 즉, 일개 무역도시의 행정관이 일국의 국왕보다도 정보력이 앞섰다는 뜻.

3.4. 정치 구조

3.4.1. 일본

서구에 대한 접촉이나 학문적 이해도 면에서 결코 일본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떨어지지 않았던 중국의 경우도 전면적 개화에 실패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사회적 구조적인 측면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경우는 막부라는 이원정부가 통치하는 불안정한 체계였을 뿐 아니라, 막부가 그나마 중앙집권단체에 해당하긴 했지만 일본 전국시대나 도쿠가와막부로 바뀐 상황등을 보면 일본의 막부라는 존재는 제일 강한 집단의 의미가 강했을 뿐이었다. 이는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임진왜란탓에 여러 유력자들이 힘을 잃는 동안 힘을 아끼던 도쿠가와가 그대로 막부를 꿀꺽한 시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중앙집권단체는 힘과 타이밍이 중요할 뿐이지 중국이나 한반도의 나라처럼 명분자체를 그리 중요하게 보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러한 체계를 정당화하는 철학적 근거도 미약했고, 무력적 우위를 바탕으로 각종 지방세력들을 굴복시켰던 막부가 크게 쇠퇴해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막부의 실정에 대해 반기를 들 수 있는 지방세력들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으며 이들이 개화를 (물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들의 캐치프레이즈로 내걸 수 있었던 것이다. 단적으로 일본이 명치유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동아시아의 정치체제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던 영향이 컸다.

3.4.2. 조선

중국과 한국의 경우 역사적으로 오래전부터 중앙집권화를 완성하였으며, 철학적(이데올로기)으로 뒷받침되는 체계적이고 탄탄한 정부 제도 및 관료제 하에 안정적인 정치체계를 이루었다. 기존의 정치체계가 이론적으로는 근거가 탄탄하고 대단히 안정적, 효율적(?)으로 운영되었고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권력이 대대로 상속되며 고착화 속된말로 고인물이 되어버리며 웬만한 사회적 충격으로는 이를 뒤바꿀 만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이를 일거에 변혁시킬 정치세력도 생성되기 어려웠다.

덤으로 일본이 했던 개혁은 중국, 한국에선 이미 예전부터 비슷하게 실행되고 있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체계적인 관청도 6조로 어느 정도 있었다. 고종이 통리기문아문을 세웠음에도 근대관제로 바꾸지 않은 것도 갑오개혁을 보듯 궁내부, 외부를 제외하곤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6조는 각각 인사, 재정, 교육, 군사, 외교, 법집행, 공공공사를 담당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양과학을 학습하기도 하기도 했기 때문에(열린연단 문중양 편 참조) 역설적으로 동도서기의 이념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다(<탐스러운 동아시아사 9강>, <우리역사넷>).

3.5. 시기적인 행운

앞서 언급한 개혁세력의 집권과 의지가 내부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면, 이 시기적인 행운은 외부적으로 가장 큰 요인.

당시 무굴제국과 청제국이 영국 하나에게만 어떠한 꼴을 당했는지 생각해본다면 이는 엄청나게 큰 요인이다.

3.5.1. 일본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일본의 각 번들이 서로 대립하고 여기에 막부와 토막파까지 대립하는 분열 양상을 보였다. 이 때 서구 열강이 개입해서 더욱 분열을 조장했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까마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진전쟁 등 일본의 분열이 극에 달한 1860년대 무렵의 시기는, 하필이면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주요 서구 열강들이 모두 일본에 신경을 쓸 수 없던 시기였다. 미국은 남북전쟁이 한창이었고, 영국은 세포이 항쟁애로호 사건으로 인한 제2차 아편전쟁, 태평청국 운동 등으로 인해 인도와 중국에 눈길이 가 있었다. 프랑스는 멕시코 내전 개입, 베트남 침략,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인한 중부 유럽 정세의 변화 등으로 바쁜 상태였다. 러시아 역시 이제 막 연해주를 차지한 상태인데다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영국과의 대립 상황으로 인해 아직 일본에 관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사실 각종 서구 열강들이 제대로 침략의 손아귀를 뻗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이런 천금 같은 시기에 개항한 나라는 동양 각국에서 사실상 일본이 유일하다.

이렇게 일본이 천재일우의 기회 속에 개항할 수 있었던 상황은 미국에 의해서 유발되었는데, 당시 미국은 초강대국이 아니라 아직도 노예제를 운영하며 농산품과 원자재를 유럽 공업국들에 수출하는 게 주요 산업이던 국가로, 먼로 독트린이 나온지 불과 40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시기었으며 유럽 각국들에 비하면 열강에 포함시키기도 어려운 정도의 나라였다. 그러던 중 19세기 중반 영국 등 서구열강들의 세력이 동남아시아를 넘어 중국으로 본격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하자, 이렇게 되면 미국 입장에서 어물쩡대다간 태평양 너머에서는 자국의 지분을 하나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에 미국의 국력이 아직 태평양 너머 본격적으로 세력을 뻗어나가기에는 한참 미치지 못함에도[16] 일단 태평양 너머에 자국의 지분을 확보해 두기 위해 먼저 일본을 강제 개항시키기로 1853년 매튜 페리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출동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을 강제로 개항 시킨 미국은 정작 얼마 못 가서 곧바로 남북전쟁에 빠져들며 자국 내부상황을 수습하기 바빠 일본에 신경 쓸 상황이 되지 못했고 강제개항이라는 악재가 남북전쟁이라는 바다건너의 사건탓에 일본이 20년간 문제 없이 개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유례없는 행운이 되어준 것.

3.5.2. 조선

조선이 개항할 당시에는 이미 서구 열강들의 관심도는 중국을 넘어 한국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정한론이 대두된 일본뿐만 아니라 청나라 역시 조선에 대해 기존의 자주국 체제하의 조공 관계가 아닌 근대적 종속 체제의 형태로 영향력을 뻗으려고 시도하는 상태였으며 러시아 또한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에 대단히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었고 영국 등은 이러한 러시아를 막는다는 구실 하에 거문도를 무단 점거하는 등, 온갖 서구 열강들이 맞부닥치고 침탈하려고 달려드는 상황 아래 이를 막아내며 개화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운명의 차이에는 이러한 차이도 상당히 작용했다.

3.6. 국부(國富)

3.6.1. 일본

이미 당대의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엄연한 국력차가 존재했다. 물론 동남아시아 각국은 물론이고 인도나 청나라를 보면 국력의 문제는 개항과 개화(서구화) 자체에는 그다지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힘들고, 그 뒤의 식민 침탈과정 정도에 영향을 주는 요소이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비록 조선이 '본인들만의' 문화적 우월감(유경(儒經), 유도(儒道)에 정통한 정도.) 및 윤리적 측면이 뒤떨어져 보이는 각종 풍습 등을 이유로 일본을 왜적이니 오랑캐니 하면서 무시했으나, 동양의 전통 사상이나 전통 문화의 고도화 등 정신적 측면이 아닌 경제규모나 총생산 면에서는 일본이 전국이 분열되었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 정부를 이룬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하여 조선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애초에 인구도 일본이 조선의 1.5~2배 정도 많았는데,[17] 한국보다 덥고 습한 기후 탓에 넓은 지역에서 2모작이 가능한 농업 조건도 일본이 더 좋은 편이었다 . 또 일본은 특이하게도 연교차가 크면서도 강수량은 고른 기후(대신 그 습도 때문에 한여름에는 정말 답이 없다.)라서 농사 짓기가 대체로 수월한 편이다. 반면 한국은 겨울이 일본보다 길고 건조해서 농사짓기에 매우 불리했다.

상공업의 측면에서도, 전국시대 이래 꾸준히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지방에 할거하는 영주들이 전략적으로 도시를 거점화하면서 도시화율도 더 높았고,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대외 무역도 활발했다.

3.6.2. 조선

애초에 건국부터 민본주의 사상을 건국이념으로 삼고 세종대왕 시절 전분 6등법 등으로 구체화한 조선의 세율은 10%(공식적인 세금 5%+잡세 등)에 불과하였다. 조선 말기 세도정치 시절 삼정의 문란이 급격화되지만, 이건 정부에 들어가는 세수가 폭증한 게 아니라, 자주농이 몰락하고 소작농화 하면서 생긴 농민에 대한 지주의 소작료 착취 및 지방 세무관들의 세금 착복 문제이다. 반면 일본은 통상 35%[18]였던 바 정부 재정에서 큰 차이가 발생했다.

또한 18세기 이전까지는 중계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획득했던 조선은 18세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환금작물이던 인삼의 대외 수요 급감과 조선을 거치지 않은 직계무역 활성화 등으로 오히려 대외무역이 위축되었다.

일본의 경우 에도 막부의 캐치프레이즈가 농민은 '살려만' 둔다일 정도로 처음부터 강한 세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조선의 경우 정부가 (겉으로나마) 백성(농민)들을 나라의 근본으로 명시하고 이들의 생활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여 세금을 최대한 덜 걷어 운용하는 것은 전근대 사회 단계에선 가장 선진적인 국가라 할 수 있었다라지만....실제로는 완전 거짓.

실제로는 조선의 세금은 엄청나게 가혹하고 무거웠다. 토지에서 나오는 곡식을 내는 전정과 사람의 노동력을 대상으로하는 부역, 그리고 지방의 토산물을 바치는 공납이 있었으며 10분의 1만 냈다는 것은 전정만의 이야기이고 의도적으로 부역과 공납을 쏙 뺀 채 이야기 한 것이다. 조선은 정말 다채롭고 어마어마한 종류의 세금을 걷어들인 국가였다. 훈련도감의 병사들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세금이라 하여 삼수미를 걷고, 세금 걷는 관리들이 고생한다며 이를 위로하기 위해 인정미를 걷었으며, 세금을 운반하는 와중에 부패나 재해로 손실이 발생할테니 손실분 예상치까지 미리 걷는 곡상미, 항구에서 조운선에 실린 곡식을 하역하는 인부들의 임금을 주기 위해 걷어들이는 하선입창미, 조세행정에 쓰이는 종이값을 백성들에게 전가시키는 창작지미 등등 정말 별의별 세금을 다 운용한 나라다. 전정(田政)의 세율이 10분의 1에 불과해봤자 전정(田政)은 조선 농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오만가지 세금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정(田政)의 세율 가지고 조선이 농민을 아끼고 사랑한 나라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날조에 불과하다. 사실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자 이런 겉명분은 어지간한 나라마다 다 있다. 유럽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이슬람권이든 죄다 궁중의 제왕학에서는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자고 가르친다. 백성을 수탈하자 그래도 된다 이딴걸 국가이념으로 삼거나 제왕학으로 가르친 나라따위는 존재한 적도 없다. 한 마디로 백성을 사랑하고 어쩌고 입으로만 나불대는건 동서고금의 국가들 죄다 그랬지 조선만 유독 강조한 이념도 아니었고 결국 중요한건 실제로 시행되는 정책이나 제도다. 정말로 조선이 그렇게 백성을 아끼고 사랑했으면 평안도와 삼남지방 등을 중심으로 대규모 농민반란이 터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한양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조선인들은 열심히 일해봤자 어짜피 모두 빼았기기 때문에 의욕을 잃고 한없이 게을러져 버렸다" "조선인들은 먹을 것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모조리 먹어치우는 대식가들인데 이렇게 된 이유는 양반들이 모조리 빼았기 때문에 그 전에 먹어버리려는 것이다" 따위의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여러 종류의 세금은 중앙정부 즉 조정에서 걷는 세금만 늘어놓은 것이며 지방세는 더욱 더 가관인데 곡식의 품질이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기 위해 미리 쌀 몇 섬 챙겨놔야겠다며 간색미를 걷어들이는 기록을 보자면 실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조선에는 유럽의 부르주아나 일본의 조닌처럼 기존의 지배계층과 맞먹으며 새로운 기류를 형성하는 신흥 상인집단이 끝끝내 나타나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뭘지 한 번 생각해보자.

요약하자면, 명목상 세율은 낮았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갈수록 부실한 토지 조사와 부정부패로 낮아지는 세수, 회계와 재정관리 능력부족으로 비효율적으로 운용되던 재정, 그것을 매꾸기 위해 각종 잡세의 남발, 지방에 대한 통제능력이 부실해지고, 행정체계가 무너져 폭등하는 지방세 등등의 이유로 실질적 세율은 미쳐돌아갔지만 정작 정부에서 운용 가능한 재정은 세종시절보다 떨어지는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4. 관련 문서

4.1. 시대적 사건

4.2. 조직

4.3. 사상

4.4. 인물


  1. [1] 대정봉환 당시의 그림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로부터 22년 뒤인 제국 헌법 제정(1889년)을 묘사한 그림이다. 엄밀히 말해 메이지 유신 이전 에도막부 말까지만 해도 저런 서양식 제복을 입은 일본 관료는 없었다고 보면 된다. 다만, 메이지 유신이 특정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 일련의 '과정'이므로 저 그림이 메이지 유신을 묘사한 그림이라는 사실은 변함 없다.
  2. [2] 단군이 통치했던 국가도 그냥 조선이지만 현대에선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부르는 것처럼 생각하면 쉽다. 아니면 서로마가 망하고 살아남은 동로마를 비잔티움이라고 부른다던가.
  3. [3]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드라마)에서 메이지 유신이 아닌, '어일신'이라 부르는 등 고증에 충실하는 모습을 보인다.
  4. [4] SBS 그것이 알고싶다 931회 "조슈 번의 후예들 - 왜 안중근을 죽이는가" 편(2014년 3월 15일 방송) 참고.
  5. [5] 이에 대해 중계지점인 쓰시마 섬의 책임자가 독단으로 국서(서계)를 먼저 읽고 양국이 불편한말한 단어 등은 살짝 고쳐서 보낸 일이 있었기에 그게 빌미라고 하지만 쓰시마 섬 책임자가 바보도 아니고 발신자를 바꿔적으며 일부 수정을 거쳤다는 사실은 양국에 확실히 밝혔다. 애초에 조사하면 다 나올 일이었으니 그 당시로선 양국의 중계지점일뿐인 쓰시마 섬으로선 그런 독단을 똥배짱으로 밀어붙이는 건 무리였다. 즉 중계지점인 쓰시마 섬 측의 독단은 큰 의미가 없었고 문제는 양국의 외교에 대한 태도였는데 외교문서이니만큼 일본 측은 정부가 바뀐 만큼 따라서 바뀌는 관례가 있으면 먼저 조선 측에 알려줬어야 했지만 알리지 않았고 조선 측도 그나마 서계를 받은 이후라도 일본 측에 제의를 하던지 해서 합의보면 될 것을 건방지다고 올바르지 않은 관례 운운하면서 일체의 타협도 보지 않아 서로 간의 골이 깊어진 게 문제였다.
  6. [6] 애초에 강경파가 실각당했을 뿐이지 지금 당장이 아니라 조금 뒤에 하자는 일단 정한론 자체는 긍정하는 비교적 온건파가 대다수인 시점이었는데, 해외 식민지 건설과 몰락 사무라이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어디서 많이 본 계기를 주장하며 조선 침략은 수단이나 기간만 안 정해져서 그렇지 일본 내에선 사실상 정해진 사항이었다. 일본 측 관점에선 그나마 운요호는 이런 일본 측 나름의 마지막 배려였던 셈이었지만 그게 그대로 터지면서 선도발을 당했던 셈.
  7. [7] 하지만 조선의 경우 서구문물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고, 그마저도 청나라나 일본을 통해서 걸러들어야 했다는걸 알아야한다.
  8. [8] 사실 난학보다는 국학을 근대 일본의 기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더군다나 난학은 애초에 널리 퍼진 것도 아닌 일부만 연구하던 학문이었다.
  9. [9] 다만 1609년에 바타비아 총독이 일본에 조선과의 직교역을 신청한 것(물론 일본은 중계무역으로 이익을 보고 있던 터라, 반려되었다.) 등을 보면 서양인들이 조선을 아예 몰랐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
  10. [10] 이는 일본은 봉건제, 조선은 중앙집권제였기 때문이다. 일본 다이묘의 경우, 강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 자신의 영지의 힘과 경제력은 즉 자신의 영향력을 의미한 반면, 조선은 지방 세력이라고 해봐야 사병따위 엄두도 못내는 지방 양반이나, 국가에서 파견한 지방관 정도였다. 동기부여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11. [11] 단, 사츠마가 세력과 영향력이 강하고 재정도 튼튼했던 소위 '웅번(雄藩)'이기는 했다.
  12. [12] 에도 막부도 초창기엔 알파벳을 외우고 십여 개의 단어를 암기하는 수준에 불과하였으나 1811년에 외국어 전문번역기관이 설립되고 나서 해결되었다.
  13. [13] 아마 벨테브레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의사소통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14. [14] 나중에야 일본 측이 알려줘서 그들이 '화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5. [15] 현장에 직역이 가능한 통역사가 없었다고 한다.
  16. [16] 실제로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화할 수 있었던 것도 1896년에나 가서였다.
  17. [17] 이전 기술에는 영토도 이정도 차이났다고 되어 있었으나, 1869년 홋카이도가 일본 행정구역으로 편입되기 전까지는 간도를 제외한 압록강-두만강 이남 한국영토에 비해 1.3배 정도의 면적이었다. 일본의 경우 소수의 수렵채집 원주민을 제외하고는 무주공산이던 홋카이도를 영토로 편입하는 데 장애물이나 방해요인이 거의 없다시피 하였으나, 조선 후기부터 개척되기 시작한 간도는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현재 한국영토가 아니다. 애초에 일본족이 혼슈 북쪽까지 확장하는데 들인 수고조차 한민족이 북쪽 영토를 확보, 사수하기 위해 여진족(9성, 4군 6진 등), 거란족(강동 6주, 대거란전)등과 전면전에 가까운 사투를 벌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니...
  18. [18] 원칙적으로는 4공 6민 내지 5공 5민으로 4~50%이나 실제 과세 기준액이 하향되었다..여기서 눈치챌 수 있지만, 현대에도 일본의 세율은 꽤 큰 편이며 유럽처럼 세금에 기댄 복지 시스템도 일찍 발달했다. '생활보호'라 하여 실업자나 니트들에게 꽤 많은 보조금을 줘서 사회문제까지 될 정도다.
  19. [19] 사쓰마 번 무사들이 서로 칼부림을 한 사건
  20. [20] 번에서 쫓겨난 타카스기 신사쿠가 번의 정책을 막부 토벌로 되돌리기 위해 벌인 쿠데타
  21. [21] 삿쵸동맹 이후로 막부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포박하기 위해 급습했던 사건
  22. [22] 주일 영국 공사로서 에도막부를 지원하고 있던 프랑스와 경쟁해 조슈와 사쓰마 등 웅번 연합을 지원하였다.
  23. [23] 해리 파크 휘하의 영국 외교관, 항목참조
  24. [24] 당시 동아시아 무역을 주름잡던 Jardine & Matheson Co.란 영국 상사의 직원으로 일본에 와서 무기 밀수를 포함한 다양한 밀무역을 활성화 시켰다. 글로버는 회사의 자본과 네트워크를 동원해 사쓰마와 조슈에 최신 무기를 넘겨주는 한편, 당시 그 어떤 일본인도 에도막부의 승인 없이 국외에 나갈 수 없었음에도 사쓰마와 조슈의 청년 인재들을 영국에 몰래 보내주기도 하고(이토 히로부미가 그 중 한 명이었다.) 무역에 특혜도 주었다. 일본 제국이 성립된 이후 일본 정부는 그에게 제국 해군을 위한 첫 증기선 군함의 사업권을 주어 호의를 갚았다. 이후에도 계속 일본에 남아 오늘날에도 일본 최대의 기업집단이 되는 미쓰비시의 설립에 관여하는 등 산업화에 기여해 훈장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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