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사드

המוסד
모사드
Mossad

설립

1949년 12월 13일

설립목적

나치에게서 생존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

본부

텔아비브

대표

요셉 (요시) 코헨

상급기관

이스라엘 총리실

원훈

בְּאֵין תַּחְבֻּלוֹת, יִפָּל-עָם; וּתְשׁוּעָה, בְּרֹב יוֹעֵץ.
지도력이 없으면 백성이 쓰러지고 조언자가 많으면 안전하다.[1]

웹사이트

공식 웹사이트

1. 개요
2. 역사
3. 알려진 주요 행적
3.1. 암살
3.1.1. 2010년 암살
3.2. 납치
3.3. 첩보 수집 및 분석
3.4. 기타
4. 직제, 조직문화
5. 대한민국
6. 대중매체

1. 개요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이다.

놀라운 정보수집능력을 자랑한다. 주요 목표는 이스라엘 정부의 주적[2]을 감시하고 암살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북한에도 독자적으로 공작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 다만, 북미정상회담 이후에는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는 의견이 많다.

2. 역사

1948년 6월 초대 책임자를 레우벤 실로아흐로 하여 외무부 산하 정치국으로 출범하고, 이후 1949년 12월 13일에 정치국을 확대개편하여 정보조정연구소(the Institute for Coordination)로 재출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사드'는 히브리어로 '기관 (institute)'이라는 뜻이다.

정식명칭은 '중앙공안정보기관(Central Institute for Intelligence and Security, המוסד למודיעין ולתפקידים מיוחדים)'으로, 제2차 세계대전나치의 집단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에 이주시키기 위해서 1949년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의 제안으로 설립되었다. 초대 의장은 레우벤 실로아흐(ראובן שילוח). 이후 1951년에는 총리 직속기구로 재편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모사드의 창설연도를 1951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휘하에 현장투입 및 암살팀인 '키돈'과, 통신감청 전문기술팀 '야호로민', 해당 공작 지역에서 모사드를 도와주는 유대인들인 '캇차'와 '사얀'/'사야님', 그리고 도처에서 운용하고 있는 각국 국적의 모사드 정보원들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953년에 취임한 2대 의장 이세르 하렐(Isser Harel)이 전문가 조직으로 발전시켰으며, 외국에서의 첩보활동·정보수집·비밀정치공작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중동전쟁에서 큰 공을 쌓은 이스라엘 스파이 엘리 코헨의 형 모리스 코헨도 모사드 요원이었다. 하지만 아우가 시리아에서 교수형당하는 걸 그저 TV화면으로 바라봐야 했다.

모사드는 1979년 이전까지는 베일에 싸여있던 기관이었다. 일반인들은 모사드가 존재하는지 조차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정체가 1979년 드러나게 되는데 그 과정이 좀 골때린다. 1979년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일어나는데 대사관 직원들은 인질로 잡히기 전에 기밀 문서를 파쇄기에 넣고 모두 파기했다. 하지만 대사관 내의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할 일이 없던(?) 인질범들은 파쇄기에 갈아넣은 문서들을 하나하나 맞추어 복원해냈다. 여기서 모사드의 존재가 밝혀지게 된다.

1980년대 말~1990년 대 중반은 모사드에게 암울한 기간이었다. 벌여 놓은 각종 작전이 실패해 언론에 알려져 망신을 당해 국장이 여러차례 교체되기도 했다. 높으신 분이 개인적인 욕심으로 정보기관을 휘두르면 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

그러다 2002년 메이어 다간이 국장으로 취임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취임사는 '적의 뇌를 삼켜라.'

"나는 레바논에 참전했을 때 가문끼리의 싸움이 초래한 비참한 결과를 본 적이 있다. 한 족장의 머리가 깨져서 뇌가 거리에 흩어져 있었다. 주변에는 족장의 부인과 어린아이들의 시체가 있었다. 이때 살아남은 한 아이가 족장의 뇌수를 한 움큼 쥐더니 집어삼켰다. 이것이 레바논 사람들이 가문끼리의 싸움에서 하는 행동이다.

뇌를 먹어 삼켜라.

그렇게 힘의 근원을 취하라. 나는 여러분의 뇌가 다른 자들에게 먹히기를 절대 바라지 않는다.

뇌를 먹는 사람은 여러분이어야 한다."

-모사드 10대 국장 메이어 다간의 취임사-

모사드는 해외에서 주로 활동하다보니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졌지, 이스라엘 내 첩보를 주로 맡는 신 베트(Shin bet)는 미국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첩보기관이다. 어느 나라든 그렇지만 모사드와 신 베트는 은근히 사이가 나쁘다고 한다. 그렇긴 해도 같은 이스라엘 첩보기관으로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땐 돕긴 하지만. 2012년에 만들어진 이스라엘 다큐멘터리 영화 게이트키퍼즈에 나온 전직 신 베트 국장들의 증언을 봐도 모사드가 마치 자신들이 우위인양 설쳐댄다고 마구 화를 내며 털어놓는 게 나와서 이를 본 모사드 출신 국장들도 불쾌하게 반론하던 적이 있다. 이 외에도 이스라엘은 정보기관이 꽤 많은 편이다.

모사드와 협력적인 국가/적대적인 국가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외교 문서 참조바람

3. 알려진 주요 행적

주요 공작으로는 다음이 알려져 있다.

3.1. 암살

모사드는 암살에 대해 가능한 한 긍정도 하지 않고 부정도 하지 않는다.

주변 국가의 핵무기 개발에 관여된 사람들을 암살했다.

  • 야하 엘 메스하드(Yayha El Meshad) 암살 (1980) : 이라크의 핵물리학자.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방에서 살해되었다.
  • 제럴드 불 (1990.3.22) : 캐나다인 대포 개발자로 이라크에 협력하다가 총격으로 암살당했다. 암살 전부터 누군가 미행하는 것 같다든지 집에 돌아와보면 가구 배치가 바뀌어 있다든지 등의 반응으로 박사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이것을 모사드의 경고로 해석하기도 한다. 문서 참조.
  • 무하마드 슐레이만 암살 (2008.8.1.): 시리아군 준장. 시리아 바시르 알 아사드 정권에서 대통령 군사보좌관, 북한과의 핵 프로그램 협력 연락 담당자, 핵시설 보안 책임자로 있었다. 시리아 연안 도시의 휴양지에서 삼엄한 경호 속에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중 별장 앞바다를 지나가던 요트에서 발사된 총탄에 맞아 즉사했다. 경호원들은 아무도 총성을 듣지 못 했다. 모사드와 이스라엘 해군 특수부대 '제13전단'의 공동작전으로 추정된다.
  • 2012년 이란의 핵개발 관련 과학자 4명이 연속으로 암살당했다. 참고 반이란 단체 및 망명 단체들이 모사드에 협조하는 것도 많다고 한다. 과거 팔레비 왕조 시절 비밀경찰 샤바크가 모사드와 동맹으로 서로 정보를 주고 받았는데 호메이니 정부에게 샤바크는 철저하게 숙청당했고 일부 샤바크 관계자는 해외로 이민가서 지금까지도 반이란 활동에 나서고 있기에 이들이 모사드와 은밀히 협력했다는 주장도 많다.
와사르 즈와이테르, 마흐무드 함샤리, 후세인 알 바시르 등 아래에 서술하는 뮌헨 올림픽 참사(1972)에 대한 보복 암살 작전을 벌였다. 검은 9월단에 의한 뮌헨 올림픽 테러가 발생하자 모사드는 검은 9월단 일원 13명을 9년동안 추적하여 암살하였다. 영화 '뮌헨' 이 이 '신의 분노 작전'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 와사르 즈와이테르(Wael Zwaiter) 암살 (1972.10.16) : 이탈리아 로마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으로, 아라파트의 조카이기도 하다. 직업은 번역가이고, 저녁 먹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모사드 요원들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 즈와이테르의 지지자는 '검은9월단과 관계없는 죄없는 지식인을 암살'했다고 비난하지만, 이스라엘은 그가 검은 9월단의 사령관이라고 주장한다.
  • 마흐무드 함샤리 암살 (1972.12) : PLO의 프랑스 대표. 파리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모사드 요원이 이탈리아 언론인으로 위장해 아파트 내에 폭파팀이 잠입할 수 있게 함샤리를 속였다. 전화기가 있는 책상 밑에 폭탄을 설치한 후 함샤리에게 전화를 걸어 함샤리가 전화를 받는 걸 확인하자마자 부비트랩 폭탄을 터뜨렸다. 함샤리는 치명상을 입은 뒤 프랑스 경찰에게 사건의 전모에 대해 진술했고 몇 주 후 사망했다. 이스라엘은 그가 검은 9월단의 프랑스 총책이라고 주장한다.
  • 후세인 알 바시르 암살 (1973.1.24): 요르단인. 키프로스의 파타흐 (Fatah) 당 대표. 호텔 방에 들어와서 불을 끄자 원격 폭탄이 폭발해서 폭사했다. 이스라엘은 그가 검은 9월단의 키프로스 총책이라고 주장한다.
  • 바시르 알 쿠바이시 암살 (1973.4.6):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의 법학 교수. 파리에서 저녁 먹고 집에 가던 중 2명의 모사드 요원에게 12발의 총격을 맞고 사망했다. 이스라엘은 그가 검은 9월단의 무기를 운송했다고 주장한다.
  • 모하메드 유스프 알 나자르, 카말 아드완, 카말 나세르 암살 (1973.4.9): 모하메드 유스프 알 나자르는 검은 9월단의 작전대장, 카말 아드완은 PLO의 작전대장, 카말 나세르는 PLO 최고위원회 위원이자 대변인.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쉽사리 암살할 수 없었다. 'Spring of Youth' 작전을 통해 특공대를 보내 대규모 습격을 벌여 살해했다. 특공대는 민간인 복장을 하고 이스라엘 해군의 미사일 고속정에서 내린 조디악 모터보트를 통해 레바논 해안에 상륙했다. 모사드 요원들이 차를 렌트해서 특공대를 운송했다. 나자르의 부인, 이탈리아 민간인, 레바논 경찰 2명이 습격에 휘말려 함께 사망했다.
  • 자이아드 무차시 암살 (1973.4.11): 키프로스에서 후세인 알 바시르의 후임자. 호텔 방에서 침대 밑의 폭탄으로 인해 폭사했다.
  • 아브델 하미드 시비, 아브델 하디 나카 암살 (1973): 로마에서 차량 폭탄으로 인해 치명상을 입었다.
  • 모하메드 부디아 암살 (1973.6.28): 알제리 출신. 프랑스의 검은 9월단 작전대장. 변장과 여장에 능했다. 카시트 밑에 너트와 볼트를 이용한 압력식 폭탄에 의해 사망했다.
  • 알리 하산 살라메 암살 (1979) : 검은 9월단의 지도자 중 1명인 알리 하산 살라메는 1973년 7월에 모사드의 암살을 간신히 피했다. 그 이후 CIA의 보호를 받아 모사드의 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1973년 11월 3일 CIA 부국장 '버넌 월터스'는 수단 주재 미국대사 암살 이후 아라파트를 만나 'PLO가 미국인에 대해 테러를 하지 않는다'라는 비밀 약속을 했다. PLO는 중동지역 테러 정보를 CIA에 제공해서 미국인들이 좀 더 안전하게 중동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아라파트는 CIA와의 연락책으로 알리 하산 살라메를 지명했고, 그는 미국 CIA 본부 건물에 초청받아 드나들었다. 모사드는 CIA에게 알리 하산 살라메와의 연락을 끊으라고 요구했으나 CIA는 정보적 가치가 높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알리 하산 살라메는 결국 1979년 베이루트에서 폭탄으로 모사드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모사드의 책임자는 '라피 에이탄'으로, 전설적인 공작 책임자였다고 한다. 레바논 민간인 8명이 주변에서 함께 사망했다. 모사드와 CIA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 아브 다우드 암살 (1981.8.1): 검은 9월단의 수장이며 PLO의 유력한 지도자. 바르샤바에서 저격당했다. 당시에는 모사드의 관여 만 나돌았지만, 결국엔 모사드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4]

이런저런 팔레스타인 지도자 암살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 칼릴 왈 아지르. (1988) : PLO 군사지도자. '아부 지하드' (성전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핵심 인물. 튀니지에서 집에 있다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총격으로 살해당했다. 30명의 암살자가 작은 보트에 타고 튀니지 해안을 통해 침투했다. 일부는 관광객으로 가장해 알 와지르의 집을 포위했고, 일부는 튀니지군 군복을 입고 거리를 봉쇄했다. 이스라엘 공군은 보잉 707 전자전기를 띄워 모든 통신을 방해했다. 이 작전은 모사드가 실행한 암살 작전 중에서도 대규모인 것으로 평가된다.
  • 파트히 샤카키 (1995) :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이슬람 지하드' 간부. 몰타에서 암살당했다. 암살자들은 두 달 전 현지에서 오토바이를 훔친 뒤 그 오토바이를 타고 샤카키의 머리에 3발의 총격을 가했다.
  • 야햐 아이야시 (1996) : 하마스의 폭탄 제조자. 가자지구에서 휴대폰을 사용하다가 전화에 장치된 부비트랩에 의해 사망. 당시 그의 먼 친척을 자칭하는 19살 청년이 아이야시의 집을 방문한 뒤 집에 전화하겠다며 휴대폰을 빌렸는데 이 때 폭탄을 심은 것으로 알려졌다. 모사드가 휴대폰 폭탄을 사용한 최초의 암살이었다.
  •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 (2004) : 하마스의 창시자이자 간부. 과거에 이스라엘이 체포해서 투옥시켰다가 1997년 칼리드 마샬 암살 실패 당시 협상에 의해 석방하였다. 그러나 2004년 이스라엘에 의해 폭탄으로 암살당했다.
  • 엘 딘 셰이크 칼릴 (2004.9.26.) : 하마스 소속. 가자 지구 등에서 발생한 폭탄테러의 배후 인물로 지목을 받아왔다.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SUV 승용차에 시동을 걸자 폭탄이 터져 사망했다.
  • 이마드 무그니예 (2008.2.12.): 1983년 베이루트 주둔 미 해병대에 대한 테러 공격 및 외국인 납치 혐의로 미국 정부에 의해 50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리고 25년간 추적당했다. 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 ‘이란 이슬람 혁명 29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했다가 주차장에 세워놓은 자신의 SUV (파제로)에 탑승했는데 운전석 쿠션에 설치된 폭탄이 터져 사망했다.
  • 마무드 마부 (2010) : 하마스 지도자. 두바이의 한 호텔에 투숙하고 있을 때 호텔 객실에 침입해 베개로 질식사시켰다. 하단 문단 참조.

암살에 실패한 적도 있다.

  • 알리 하산 살라메 암살 실패 (1973.7) : 모사드는 노르웨이의 릴레함메르[5]에서 모로코인 웨이터 '아흐메드 부치키'를 검은 9월단의 지도자 중 하나인 알리 하산 살라메로 착각해서 살해했다. 알리 하산 살라메는 그 도시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숨어 지내고 있었다가 모사드의 암살 시도를 간신히 모면했다. 모사드 요원들은 아흐메드 부치키를 임신한 노르웨이인 아내가 보는 앞에서 총으로 쏘아 죽였다.
살해한 요원 중 6명(남성 4 여성 2)이 작전에 사용했던 자동차를 버리지 않고 그 차로 공항으로 가다가 노르웨이 당국에 살인죄로 체포당했다. 이 사건에서 체포당한 요원들이 활동내용을 자백하는 바람에 모사드의 유럽 내 활동에 큰 타격을 입었다. 모사드가 힘을 써서 2년만에 전부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유럽 내 안전가옥을 비롯한 비밀공작 인프라를 거의 상실했고, 유럽 내 활동은 이후 몇 년간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리고 여성 요원 중 '실비아 라파엘'은 자신을 담당하던 현지 변호사와 사랑에 빠져 출옥 후 결혼했고, 1992년 남편의 출생지인 남아공으로 이주했다.이 사건은 이라크로부터 당시 최신형 소련제 미그기를 탈취하는 작전 이래로 그간 비교적 승승장구하며 꽤 주목할 만한 첩보계의 플레이어로 주목받던 모사드에 타격을 준, 이른바 릴레함메르의 실패라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작전목표 달성 실패는 물론 이 때문에 유럽 내 공작망이 붕괴되어 다시 재구축할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이후 모사드의 요원 훈련 교범 및 코스에서 주 교훈으로 삼는 실패 사례가 되었다고. 1996년 이스라엘 정부는 사죄하며 유족에게 배상금을 지불했다. 비록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알리 하산 살라메는 결국 1979년 폭탄으로 암살당했다.
  • 알로이스 브루너: 나치 전범으로 시리아 정부의 국빈으로 보호받으며 첩보 교육을 했다. 모사드에서 1961년, 1980년 두 번 폭탄 편지를 보냈지만 목숨에 지장이 없었고 한 눈과 손가락 1개를 잃는 데 그쳤다. 2010년 시리아에서 88세로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다.
  • 칼리드 마샬 암살 실패 (1997.9.25.) : 하마스의 간부. 벤야민 네타냐후 총리가 지시하여 캐나다 여권을 소지하고 요르단으로 여러 명의 요원이 입국해 칼리드 마샬의 귀에 독극물을 주입했다. 경호원이 암살단 중 2명을 현장에서 붙잡았다. 요르단 국왕이 격분해 '이스라엘이 해독제를 넘겨주고 요르단과 3년간의 평화협정을 맺어야 요원들을 풀어주겠다'라고 조건을 제시했다. 캐나다가 여권을 도용당해 항의를 했고,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당시 중동 평화 협상을 이끌던 중이라 모사드에 불만을 표했기 때문에 모사드는 해독제를 보내주었으며 투옥중이었던 하마스 지도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을 포함해 하마스 조직원 22명을 석방했다. 칼리드 마샬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하마스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요르단 역시 모사드 요원 2명을 풀어주었다. 당시 모사드의 최고책임자였던 다니 야톰 국장[6]은 욕을 엄청나게 먹어야 했다. 다만, 이 때 풀려난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은 2004년 폭탄으로 암살당했다.
  • 하산 나즈랄라 (2006) : 레바논의 반이스라엘 무장단체인 헤즈볼라의 대표로 2006년 헤즈볼라와의 전쟁중 그의 집을 미리알아내 급습했지만 나즈랄라가 이미 눈치채고 도망가서 암살에 실패하였다. 당연히 현재 모사드 암살 0순위로 공식적인 신분노출은 헤즈볼라의 프로파간다 방송의 알-마너로만 신분을 들어내고 있다.

Simon Reeve(사이먼 리브)의 책에 따르면 모사드에서 15명짜리 암살팀을 보내면 구성이 5가지로 쪼개진다고 한다. 2명(알레프)은 암살자다. 2명(벳)은 암살자를 비밀리에 따라다니는 경호원이다. 2명(헷)은 호텔 예약, 아파트 임대, 차량 임대 등 지원 담당이다. 6~8명(아인)은 목표물을 미행하고 알레프 및 벳의 도주경로를 확보한다. 2명(퀍)은 통신 전문가들로 도청 담당이다.

목표가 자살한 것으로 위장할 수도 있지만 모사드는 휴대폰에 폭탄을 설치하거나 차량을 폭발시키는 등 누가 봐도 암살임이 분명하게 행동한다. 이것은 모사드의 적들에게 공포를 주기 위한 심리전이다. 특히 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물들을 이용하는데 이는 '언제 어디서든 모사드의 공격이 있을 수 있다'라는 공포를 주기 위한 것이다.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비망록'[7]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 간부들이 등장하는데 언제 암살당할지 모르므로 잠도 정상적으로 자지 못한다. 침대 밑에 부비트랩이 있을지 모르므로 잠은 의자에 앉아서 자고, 잠자는 장소는 매일 바꾼다. 이렇게 조심조심해도 자주 암살당한다.

3.1.1. 2010년 암살

2010년 1월 20일에 두바이에서 일어난 하마스의 지도자 '마무드 마부'(50) 암살사건의 배후로 추궁당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다면 본 기사기사를 참조.

6번, 8번,10번 아담 마커스 ,15번 게일 폴리어드, 16번 21번[A] 위 22명 외에도 바니 가브리엘라[A], 니콜 산드라 등 4명의 범인이 더 있었다. 이 암살팀 중의 1명이 아래에 나오는 호주 이중간첩 '죄수 X'였다.

26명의 범인이 5개 국적의 위조여권을 이용해 4곳의 공항에서 입국해서 19시간만에 암살을 저지른 뒤 7곳의 공항으로 탈출했다. 서로간의 연계점이 없게 보이기 위해 택시도 모두 따로 타고, 호텔도 각각 다른 곳에 투숙했다. 신분 추적이 안 되게 하려고 위조여권, 선불제 휴대폰 7개, 다른 사람의 명의로 발급받은 신용카드 17개를 사용했다. 암살 용의자 중 8명은 1년전부터 4차례 이상 두바이를 들락거렸다.

공항 대기조, 호텔 정찰조 여러 팀, 암살 실행조 등 여러 팀으로 나누어 임무를 수행했다. 테니스복 차림에 테니스 라켓을 든 남성 2명이 알 마부를 미행해 객실 번호를 알아냈다. 이후 남녀 2인 (아래의 '게일 폴리어드' 포함)이 객실 내에 실제로 그가 있는지 알아냈다. 이후 게일 폴리어드와 함께 건장한 체구의 남성 4명이 방으로 들어가 20분만에 알 마부를 암살하였다. [9] 방법은 전기쇼크로 일단 기절시킨 뒤 썩시닐콜린[10]를 투여해 깨어나도 저항을 하지 못하게 조치한 다음 베개로 질식시켰다.현장 요원들이 몇몇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감전에 의한 쇼크사로 오인될 뻔 했다.

호텔 CCTV에 수차례 인물들이 드나드는 장면이 포착되었는데, CCTV에 사진이 찍힐 때마다 용모와 복장을 지속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전혀 수상해 보이지 않았다. 밝은 미소를 띄면서 사회성 좋게 호텔 직원들과 이야기했기 때문에 전혀 음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암살단은 범행이 이뤄진 호텔 이외에도 알마브후흐가 두바이에서 머물 때 자주 이용했던 호텔에도 여러 명의 요원을 배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상황에 따라 제2, 제3의 작전 시나리오까지 준비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마부 역시 암살에 대비해 이런저런 조치를 취했다. 독극물을 두려워해 확실한 음식 외에는 절대 음식물을 먹지 않았고, 자신이 어느 나라에 가는지 최대한 알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모사드의 행동은 그의 대비보다 훨씬 치밀했다.

여권위조를 비롯한 여러 국제법 위반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묶인 사건이라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초법적 처형'이 많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영국 중대조직범죄청(SOCA)이 이스라엘에 수사관을 보내 위조 여권 사용경위를 조사하여 밝혀진 위조수법은 이스라엘에 영국인들이 입국할 때 이스라엘 공항직원들이 영국인의 여권을 체크한다면서 가져갔다가 복사하여 개인정보를 빼낸 뒤 20분 후 돌려주는 방식이었다. 이건 뭐 나라가 범죄조직도 아니고 2010년 3월 영국이 국내주재 중인 모사드 관련 이스라엘 외교관을 추방하였는데, 영국에 입국할 때 모사드 암살요원들이 소지한 영국 위조여권이 모사드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

게일 폴리어드 (가명)는 이 암살의 주요 실행범 중 하나이다. 게일은 복도에서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와 통화하는 척 하면서 목표물이 방에 들어가는지, 다른 투숙객이 지나가지는 않는지 감시했다. 게일은 호텔 직원을 가장해 목표물이 거부감 없이 방문을 열도록 유도했다. 살해 후에는 빠져나가면서 방문에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표식을 걸어놓기도 했다.

마치 외국인 관광객을 방불케 하는 평범한 옷차림.

마부가 암살당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2008년 가자 전쟁에서 하마스는 이란제 다연장로켓을 사용했다. 이스라엘 군부는 이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 이란에서 무기를 반입한 인물이 누구인지를 추적한 결과, 알 마부인 것으로 추측되었다. 하마스 지도부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그의 활동을 알고 있었다. 2010년 초 알 마부는 가자지구에 있는 친척에게 휴대폰으로 '두바이에 간다'라고 무심결에 얘기했다. 인터넷으로 자신이 숙박할 호텔을 예약하기도 했다. 모사드는 사실 확인을 위해 팔레스타인에서 하마스의 앙숙인 파타당 협력자들로부터 추가정보까지 입수했다.

이만큼 자세하게 사건의 경위가 알려지고, 현장에 전혀 출입하지 않은 요원들의 위조여권까지 발각된 것은 암살인 것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게일 폴리어드 (가명)가 CCTV를 보고 윙크를 했고아니 대체 비밀요원이 그딴 짓을 왜해?, 암살 직후 요원들이 우르르 몰려서 호텔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되었다. 그러자 두바이 경찰이 엄청난 양의 CCTV 데이터를 분석해서 모든 상황을 추적하였다.

3.2. 납치

나치 잔당을 색출해 납치하여 자국에서 재판을 했다. 이미 사망했을 경우 사망 사실이라도 확인하기 위해 노력했다. 모사드는 나치 독일SS 중령이었던 오토 슈코르체니를 포섭하여 나치 잔당 사냥을 함께 하기도 했다.[11]

  • 아돌프 아이히만 : 유대인 강제수용소 설치와 학살을 지휘했던 주역이다. 15년 동안 추적해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잠복해 있던 것을 찾아냈다. 국제법을 무시하고 납치해서는 국내법을 고쳐가며 사형을 시켰다. 물론 이스라엘로 압송한 뒤 재판 자체는 정상적으로 하긴 했지만 납치 자체가 문제. 이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임에도 불구하고[12] 당시 세계 언론들은 "아이히만이 나쁘다"라는 보도만 줄기차게 해댔다고 한다. 다만 공소시효가 없는 반인륜 범죄자였고 어차피 연합국에 잡혔어도 사형 아니면 최소 무기징역이라 살아서 감옥을 나갈 가능성은 없었다.
  • 요제프 멩겔레: 생체 실험의 주역이었다. 시체가 확인될 때까지 40여 년을 쫓아다녔는데 결국 잡지는 못했지만 죽을 때까지 악몽에 시달리게 했다고 한다. 멩겔레는 자신이 붙잡혀서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교수형에 처해질 것을 굉장히 무서워해서 집 주변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깜짝 놀라 밖을 내다보았으며,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여러 가지 정신병적인 행태를 보였다고 한다.
  • 모르데카이 바누누 : 내부고발자. 이스라엘인이지만 자국의 핵무기 보유 여부를 폭로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도 독립할 자격이 있다고 하여 이스라엘 정부를 빡치게 만들었다. 직장에서도 이 때문에 해고당한 바누누는 그래서 영국으로 망명했는데, 1986년 9월 모사드 공작원의 미인계에 유혹당해 이탈리아에서 납치된 뒤[13] 온갖 가혹행위를 당하며 심문을 받았고[14] 결국 간첩죄[15]로 그냥 징역도 아닌 무기징역형이 선고됐다. 내부 고발자에게 내린 형벌이니까 소위 양심선언 하면 이렇게 된다고 그야말로 시범케이스로 당한 셈. 다만 당시 이스라엘 법제상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이 불가능했기에 무기형으로 복역했다. 시범케이스 아니랄까봐 18년간 2004년 출소할 때까지 법적으로 가능한 처우를 최대한 가혹하게 했다.[16] 18년 복역기간 중 무려 12년간 독방에 감금됐고[17] 창문 없는 좁은 방에서 24시간 전등이 켜진 채로 지내다가 2년 반이 지나서야 교도소 측이 밤에는 전등을 꺼줘서 낮과 밤을 구별할 수 있었다. 다른 수감자에게는 허용되는 신문, 라디오, TV도 상당히 오랜 기간 위험인물이라는 이유로 금지됐으며 면회도 기밀유출 가능성 핑계로 직계가족과 변호사에게만 허용됐다.[18] 이스라엘 보수파들과 하레디들은 반역자이니 이렇게 당해도 싸다고 한다. 그나마 인권단체의 정부 비난 등에 힘입어 형기를 다 채우지는 않고 중간에 가석방이 되긴 했지만 출소 후에도 해외로의 이민이 금지당하며 가택 연금되어 있다. 전화와 인터넷은 이스라엘 정부에서 감시받고 있으며 외국인과의 접촉도 금지하고 있다. 이렇게 접촉을 차단을 해도 어떻게든 계속 양심선언을 하면서 버티고 있고 이스라엘 정부도 유명한 내부고발자라 팔레스타인 간부들처럼 대놓고 죽일 수도 없기 때문에 통제하는 것도 지쳤는지 노르웨이 이민을 허용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거꾸로 대놓고 납치할 지도 모른다.

3.3. 첩보 수집 및 분석

  •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당시, 모사드는 이집트군의 레이더 기지 근무자들의 신상정보와 교대시간 심지어 식사시간까지 입수하여, 이들이 교대시간에 레이더 화면을 잘 안 본다는 사실을 이용, 프로펠러 폭격기에 연료를 최대한 싣고 각 레이더 기지의 교대 시간을 틈타 저공으로 침투하는 식으로, 후방에 있는 이집트군 공군기지 기습을 성공시켰다.
  • 1981년 6월 이스라엘 공군이 이라크의 오시라크 원자로를 폭격하였다. 모사드에 의한 상세한 사전조사가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암살 미수사건 진상 파악에 관여했다. CIA는 배후를 KGB로 추측하였으나, 모사드는 친 이란계 테러조직에 의한 사건임을 밝혀내고 교황청에 은밀하게 보고했다.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의 반기독교적 행동으로 냉각되었던 이스라엘에 대한 교황의 태도는 현격히 순화됐고, 이스라엘과 바티칸의 수교를 허용했다. 신문기사
  • 2007년 9월 5일 이스라엘은 시리아가 북한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건설중이던 핵시설을 폭격, 파괴했다. 이 작전의 결정적 단서는 모사드가 제공했다. 모사드는 런던의 한 호텔에 투숙중이던 시리아 고위 관료의 노트북컴퓨터에서 시리아 핵시설 정보를 빼냈다. 호텔 방에 몰래 침투해 노트북에 해킹 장치를 설치했던 것이다. 신문기사
  • 2018년 1월 적국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의 슈러버드 지역의 비밀창고를 2년간 감시해오다 한번에 급습하여 CD 183장과 문서 5만 5000여 쪽을 슬쩍했다. 이 자료들은 4월 30일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직접 TV 연설에서 이란의 비밀 핵무기 개발 계획이라며 방송했고,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한테도 전달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은 핵협정 지키기 않을 거라는 내 말이 맞다고 말했다고.[19]

실패한 사례도 몇 몇 있다.

  • 크피르의 도면을 빼돌릴 때에도 이웃 주민에게 걸렸다.
  • 1964년, 모로코 출생의 이스라엘 이중간첩 'Josef Dahan'이 붙잡혀 이집트로 압송되던 중 로마 세관에 의해 구출된 적이 있다. 로마에 있는 이집트대사관 명의로 외교행낭 상자에 넣어서 이집트로 우편 배송하려 시도했다. 외교행낭은 국제법적으로 개봉이 엄금되어 있으나 세관원들이 사람의 신음소리를 듣고 강제로 개봉해서 구출했다. 그는 마취당한 채 묶여서 발견되었다.
  •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의 발발 예측에 실패한 것은 모사드의 큰 잘못이었다. 이는 첩보 부족 탓이 아니라 첩보 해석을 둘러싸고 군사정보기관 '아만'과 총리 직속기구인 '모사드' 사이에서 의견이 대립하다가 정부가 아무 조처를 취하지 못한 문제였다.
  • 스위스 베른(1998.1.19)에서 전화도청 장비를 설치하다 옆집 아줌마의 신고로 경찰에 1명이 체포당했으며 도청 장비도 압수당했다.
  • 2005년 3월에 뉴질랜드에서 모사드 요원들로 추정되는 2명의 인물들이 체포되어 6개월형과 미국달러로 $32,500의 벌금을 뇌성마비환자들을 위한 기부금으로 내라는 판결을 받았다.BBC 영어기사 이스라엘 출신인 Uriel Zosha Kelman와 Eli Cara는 모사드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다. 내무부에서 이 둘의 입국심사과정에서 이상한 점을 알아낸 후 전화를 도청하는 등의 감시를 한 후에 체포하였다. 이 둘은 위조여권을 통해 입국한 뒤 범죄조직들과 일한 적 있음이 밝혀졌다고…. 이후 각각 2개월, 3개월 뒤에 이스라엘로 추방됐다고 한다. 당시 헬렌 클락 정부는 이스라엘 대사의 입국을 취소시켰고 사과를 요구해 정식으로 이스라엘 정부의 사과를 받아냈다.
  • 2010년에 일어난 크라이스트처치 대지진 때 타고있던 승합차가 돌에 깔려 사망한 이스라엘 여행객에게서 5개의 위조여권이 발견되고, 혼잡한 틈에 12시간도 안 되어 이스라엘 대사와 몇몇 이스라엘 여행객들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복구작업을 위해 투입된 뉴질랜드 SAS가 이들의 흔적을 조사했다고 한다(물론 공식발표는 이들의 뛰어난 구급조치와 인명구조능력 때문에 생존자 구출을 위해 투입되었다고 한다.). Stuff 뉴질랜드 (영어)
  • 모사드의 내부 배신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중 하나로, 2013년 초, 2010년 이스라엘의 비밀 감옥에 수감 중 사망한 '죄수 X'라는 죄수가 호주 출신의 모사드 요원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요원이 2010년 2월의 하마스 지도자 '마무드 마부' 암살 작전에 참가했었는데, 민감한 정보를 출신국인 호주 정보부에 넘기는 등 이중간첩 행위를 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당하고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 한편으로는 모사드조차 이런 일을 겪을 정도로 이중간첩이 무서운 존재라는 것이 드러난 셈이기도 하다.
  • 2015년 12월에는 독일에 주문한 돌핀급 잠수함(209급 잠수함의 파생형)을 독일 영내에서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작전에 사용한 승용차가 독일 북부의 킬 운하 근처 습지에 빠져 버렸다. 이웃 주민의 신고로 지역 소방서에서 출동했으나 소방차마저도 갇혀 버렸고, 결국 다른 주민이 트랙터를 끌고 와서 차를 빼내는 데 성공했다. 이 지역 당국에서는 소방대 출동 비용을 주 독일 이스라엘 대사관에 청구했다. Times of Israel (영어)

3.4. 기타

주변 중동국가에 대한 군사작전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 이라크의 MiG-21 파일럿 귀순 : 제3차 중동전쟁 직전에 미인계이라크 파일럿을 유혹해 MiG-21과 함께 귀순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해당 파일럿은 이라크의 소수 민족 아시리아인으로 아시리아인들은 3세기부터 기독교도였다. 그 때문에 19세기에는 심한 핍박을 받았으나 1960년대 시점에선 사담 후세인바트당 치하에서 비교적 우대를 받았다. 이는 바트당의 사상적 기반 구축에 아랍 민족주의자들과 더불어 바로 아시리아 기독교도들이 초기 정당 구성원 및 지도자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때문이다. 이 아시리아인들은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자마자 곧바로 핍박받기 시작한다. 참고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이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도 있다. 망명을 선택하기 까지의 이라크 파일럿의 심정변화 등을 잘 그린 편.

미국 FBI 요원에 따르면 냉전 시절 모사드의 미국 내 활동은 소련 다음으로 활발했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로 FBI의 대이스라엘 첩보 부서의 규모가 소련 데스크 다음으로 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위험에 처한 유대인 및 자국민 구출
    • 엔테베 작전 (1976) : 독일과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테러범들에 의해 공중납치되어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인질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 여객기 승객들을 구출하는 작전이었다. 군사작전 자체는 이스라엘군 특수부대가 시행했다. 모사드는 이륙한 비행기가 케냐에서 급유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등 지원활동을 수행했다. 당시 케냐와 우간다는 적대국가였고, 그래서 비교적 쉽게 영공 통과/의료 지원팀 대기/나이로비 국제공항 급유 허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1992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유대인 수백 명을 구출했다.

게다가 모사드는 중국 국가안전부 MSS와 매우 독특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지난 50년 동안 모사드는 MSS와 함께 공작활동을 벌여왔는데, 사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중국과 함께 공작활동을 벌인 것이 아니었다. 1964년 MSS가 아프리카로 요원들을 보내 아랍 테러리스트를 지원하며 이스라엘을 공격하라고 부추겨 시비를 걸었는데, 빡친 모사드는 케냐, 가나, 콩고, 잠비아 등 곳곳에서 차량 폭파, 총기 암살, 약물주사 후 사자와 악어에게 먹이로 던져주는 식으로 MSS 요원들을 마구잡이로 암살했다. 그 때 당시 MSS는 수십 만 명의 인력과 구 소련 KGB에 맞먹는 예산을 갖고 있었지만, 악명 높기로 유명한 모사드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심지어 아프리카로 갔던 MSS 요원들이 속속 죽어나갔으며, 시신도 못 찾을 정도였다. 예를 들자면,

  • MSS 요원이 모사드 요원을 칼로 난자해 암살하면
  • 빡친 모사드는 그 MSS 요원을 잡아서 총으로 쏴 죽이거나 썰어서 악어 밥으로 던졌다.
  • MSS 역시 열이 뻗쳐 모사드 요원을 추적한 다음 당했던 만큼 보복하면
  • 모사드도 그 요원을 잡아내 폭탄으로 요단강 익스프레스 태워 보냈으며,
  • 이에 MSS 역시 반격하면 모사드는 적들이 근무하는 사무소를 향해 로켓포까지 쐈다.(...)

물론 이스라엘중국과 전쟁할 생각이 없어서 대놓고 적대하지 않았다. 중국 역시 빡쳐도 이스라엘의 태도를 알기에 모사드한테 엿먹을때마다 간접적인 보복만 했지 전쟁은 생각 안했다. 모사드는 그렇게 MSS와 치고박고 하다가 KGB가 멀티를 시도하자 모부투 자이르 대통령을 앞세워 휴전을 제의하고, 함께 KGB를 막자는 제안을 했다.[20] 그 뒤 중국이스라엘과 급속히 친해졌고 나중에는 서로 함께 미국의 주요 연구소를 털기도 했다. 2005년 5월 5일 중국 MSS, 인민해방군 정보국과 함께 미국의 핵무기 연구소인 로스 알라모스에서 가짜 화재를 일으킨 뒤, 중요한 핵무기 정보가 든 하드 드라이브를 해킹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로스 알라모스의 이 하드 드라이브를 분실한 것으로 생각했다. 한 달 뒤 구석에 숨겨져 있던 하드 드라이브를 발견한 뒤 난리가 났다. [21][22]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에서 모사드가 이런저런 루트로 검진키트 10만개를 가져왔는데 정작 제일 중요한 시약을 안가져와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지는 초대형 병크를 저질렀다.

4. 직제, 조직문화

모사드는 다른 나라의 해외 정보기관과 마찬가지로 매우 위험한 일들을 많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어려운 임무를 성공시키기 때문에 굉장히 주목받고 있다.

다음을 성공 요인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 방첩기관(신 베트), 해외정보기관(모사드), 군사정보기관 (아만)의 분리가 확실히 이루어져 있다.
  • 전 세계에 유대인 협조자가 있다. 2000년대에는 약 35,000명 정도로 추측되었다.
  • 대놓고 타국의 주권을 신경쓰지 않는 국제적인 암살 행위를 하는 것을 국가 차원에서 공인하고 있다.이건 윗동네도 그렇다. 다른 선진국들은 막나가던 냉전 시절의 미국 조차도 같은 서방 진영에서는 타국의 주권 침해를 하지 않거나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스라엘은 대놓고 이민국에서 위조 여권으로 쓸 외국인의 신분증을 복사해서 공급해준다. 암살을 위한 각종 독극물과 장비의 개발 및 공급도 모사드의 공식 업무가 요인 암살이므로 충분한 국가예산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모사드는 살인, 납치, 여권 위조, 절도 등을 하지만 총리가 외교부를 통해 다 막아 주기 때문에, 현장 공작 요원들은 외교적 문제 같은 것을 신경쓰지 않고 가장 이익이 되는 형태로만 행동하면 된다. [23] CIA의 비호를 받고 있던 알리 하산 살라메도 암살당했으며 이로 인해 CIA와 모사드의 관계도 냉각되었지만 이런 것조차 꺼리지 않는다. 알리 하산 살라메 암살 실패 당시에는 노르웨이와 단교 직전까지 갔고, 캐나다 여권을 도용하다 캐나다와도 단교 직전까지 갔던 적이 있다. 폭탄을 사용할 경우 무고한 민간인이 함께 죽기도 하지만 반드시 보상을 해 주는 것은 아니다.
  • 이득이 된다면 누구와 협력하든 가리지 않는다. 나치 독일, 그 중에서도 SS 중령이었던 오토 슈코르체니를 고용하였다.
  • 국장의 임기가 5년 가량으로 매우 긴 편이다. 총리의 위상을 돋보이기 위해 행동하는 게 아니라서 충분히 소신대로 움직일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24]
  • 수단과 방법이 다양해서 적들이 대응하기 어렵다. 베개로 눌러 죽이기도 하고, 이동전화나 책상 아래, 카시트 등에 부비트랩을 설치하기도 하며, 총으로 쏘아 죽이기도 하고, 귀에 독극물을 부어 죽이기도 한다. 차량이 도착할 만한 장소에 폭발물을 설치해놓기도 하며, 달리는 차량에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이 접근해 자석으로 폭탄을 붙이기도 한다. 거기다 절도, 미인계, 협박 등 다양한 테크닉이 이용된다. 굉장히 창의적인 수단이 많이 동원되는 것을 볼 때 혁신적인 내부 조직문화가 뒷받침 될 것으로 추측된다.
  • 많은 규모 : 메이르 아미트 (3대 국장, 1963~1968 재직) 시절에는 1200명 정도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25] 돈도 많이 들어갔을 것이 분명하다. 전직 안기부 제2차장에 따르면 2010년 즈음에는 1,500명 정도의 조직이라고 한다.

현재 모사드의 직제는 민간에선 아무도 모른다. 그나마 외부로 공개된 극비자료 중 하나는 CIA가 1977년에 작성한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대한 보고서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이 점거되었을 때 외부로 유출되어 알려졌다. 이 자료에 의하면 모사드는 8개 부서로 나뉘어 있다.

  • 첩보수집국 : 해외 공작을 책임지며 모사드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모사드 요원들은 해외 공관의 외교관 신분과 신분 위장을 통해서 해외에서 활동한다.
  • 정치 활동 및 연락국 : 세계 각국 정보기관과의 연락.
    • 지역과 : 정치활동연락국과 첩보수집국은 공동으로 8개의 지역과를 운영했고, 이스라엘 대사관의 모사드 요원들은 이 2개 부서에서 파견나온 요원들로 구성된다. (북미, 중미, 남미 등)
  • 기술국 : 첨단 장비 제공
  • 기술공작국
    • Lohamah Psichologit Department : 심리전과 정치 선전 그리고 기만 작전을 담당한다.
  • 분석국
  • 훈련국
    • 암살-납치 부서 '키돈'(Kidon) : 언제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르나, 60~80년대가 아닐까 추측만 하고 있다. 키돈 여성요원의 존재는 2004년에야 세상에 드러났다. 키돈의 훈련과정은 2년인데, 각종 무기, 폭발물, 미행 기법, 호텔 객실 침입 방법, 속옷 안에 권총을 은폐하는 방법, 위장 방법, 미인계 등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진다. 규모는 50~70명 정도로 추측되고 있다.
  • 작전기획조정국
  • 인력 재정 병참 보안국

5. 대한민국

※《기드온의 스파이》참조. (모사드에서 해당 작전내역이나 공작을 인정할 리는 없다.)

중동에 수출된 북한무기의 경우 모사드가 직접 한국으로 무기들을 보내주기도 했으며, 굳이 북한제가 아니더라도 중동 전쟁 동안에 T-72 등 소련제 전차들을 입수한 이스라엘은 이걸 군용기에다 실어서 한국에 보내주기까지 했는데, 이를 이용한 시험 데이터는 북한군의 전차 성능 연구와 차세대 국산 전차 개발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2014년 1월에는 선진 정보기관에 대해 배우기 위해 7명의 한국 국회의원이 모사드를 방문했다. 다만, 이 때 해당 국회의원들이 한국 언론에다 방문 일정을 예고한 바람에 모사드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대한민국 국내에도 해외 요원이 돌아다니고 있을 수 있다. 국정감사에서는 2003~2013년 북한 이외의 국가에 현지 협력자로 활동하던 한국인 30여명이 처벌받았다고 한다. 이 중엔 우방국 정보기관의 비밀공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2020년 초 전세계적인 판데믹을 불러온 코로나-19 관련해서도 모사드의 개입이 있었다. 예루살렘포스트의 보도에 의하면 3월 19일 코로나 진단키트 10만개를 모사드를 통해 이스라엘로 공수했는데# 보도 당시에는 진단키트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문재인 대통령의 진단키트 제조기업 씨젠 방문 영상#[26]에서 씨젠 대표의 발언을 통해 이스라엘이 사용하는 진단키트가 한국산임이 밝혀졌다.

2020년 3월 26일 이스라엘 신문 The Times of Israel 에서 모사드가 비밀리에 40만 개의 키트를 공개되지 않는 외국에서 추가로 가져왔다고 말하였다. # 이 역시 한국산 키트인 것으로 추정된다.

6. 대중매체


  1. [1] 구약 성서 잠언 11장 14절의 일부이다. 참고로 과거 원훈은 더 살벌한데 바로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 마찬가지로 잠언 24장 6절의 일부이다.
  2. [2] 팔레스타인 하마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레바논 헤즈볼라, 이란/구 이라크/구 시리아의 핵 개발 관련자 등이 있다.
  3. [3] 북한의 최대 무기 수출국이자 핵 개발 기술을 전수받는 시리아 및 이슬람계 국가가 적국이기 때문이다.
  4. [4] 공산 독재국가에 총기를 밀반입해서 암살을 성공시킨 것이니 평범한 암살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5. [5] 인구 27,000여명의 소도시. 1994년 동계올림픽의 개최지이기도 했다.
  6. [6] 이 양반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에게 직접 뽑혀서 국장으로 취임했는데 이때의 작전 실패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뿐만 아니라 모든 언론의 비난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물론 네타냐후 총리는 나몰라라 했고. 결국 다니 야톰 국장은 얼마 안돼서 스위스에서의 공작 활동 실패로 인해 자신이 책임을 떠 맡고 사퇴했다.
  7. [7] 형식이 만화이긴 하지만, 작가가 언론인으로서 충실히 인터뷰해서 쓴 것이다
  8. [A] 8.1 8.2 사진 삭제됨
  9. [9] 사실 여성 1명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완벽하게 제압해서 완벽하게 성공시키기 위해서인 듯 하다.
  10. [10] 근육마비제. 시간이 지나면 인체에서 자연 분해되어 증거가 남지 않는다.
  11. [11] 다만 슈코르체니는 SS답지 않게 나치의 전쟁범죄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으며 오히려 포로나 민간인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전적이 있다.
  12. [12] 아이히만의 납치가 공개된 후 즉시 아르헨티나는 아이히만의 송환을 요구했으며 UN 안전보장이사회도 이스라엘의 주권 침해를 인정하였다. 결국 이스라엘은 아르헨티나에게 사과, 배상함으로써 아이히만을 돌려보내지 않고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13. [13] 납치 과정에 대해서는 미인계 문서의 모사드 문단 참조.
  14. [14] 물론 같은 유대인이라서 팔레스타인인들에 비하면 약하게 해준거다.
  15. [15] 기밀 유출에 대가를 받지 않았고, 또 유출된 기밀이 인류 공공의 이익과 관련된 핵 개발 등이었기 때문에 정확히는 간첩은 아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정부도 대놓고 죽이지 못하고 굳이 납치하는 수고를 벌인 것이다.
  16. [16] 한국으로 치면 무기형을 선고한 다음 경북북부제2교도소 독방에서 10여년 동안 감금했다고 보면 된다. 냉전 시기 대놓고 간첩질을 크게 하거나 대남 테러를 실행하다가 걸려 사형당하지 않고 남파간첩 혹은 간첩 협조 혐의로 무기형을 받은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이런 처우가 행해졌다고 한다.
  17. [17] 이는 서방세계에서의 가장 긴 독방 수감기간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됐다고 한다.
  18. [18] 부모와는 기독교로 개종한 일로 관계가 나빴기에 이번 일로 의절한 상태여서 직계가족이 형 메이르 바누누와 아내와 자식들외엔 없었다.
  19. [19] 즉, 북한도 미군이 직접 들어가서 상당한 기간동안 주둔하며 북한 전역을 샅샅이 헤집고, 핵무기를 다 찾아서 미국으로 가져가서 폐기하는 리비아식 비핵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협정도 해줄 수 없다는 의미라는 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
  20. [20] 모사드와 MSS가 치고받고 하는 동안 KGB가 은근슬쩍 엉덩이를 들이밀며 아프리카를 요리하려고 했다고 한다. 중소분쟁 이후 소련과 갈라진 중국으로써는 또다른 적이 출현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던 터라 여기서 이해관계가 일치한 양국은 결국 휴전에 동의한다.
  21. [21] 특히 FBI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22. [22] 미국-이스라엘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중에 이스라엘의 사죄로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
  23. [23] 대개의 선진국 정보기관은 강대국에서 불법적인 정보활동을 하는 것을 꺼린다. 외교적으로 불이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24. [24] 한국 국정원은 평균 1년 정도이고, 대통령이 자신의 뜻에 맞는 고위 인사를 앉히며, 그 고위 인사는 군대, 행정공무원, 검사, 인권변호사 등 다양한 커리어패스를 거친 사람이 뽑힌다.
  25. [25] 1968년 이스라엘 인구가 280만명이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매우 인원이 많았던 것이다.
  26. [26] 영상 5분 5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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