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

<span style="text-shadow: 0 0 10px #ffffff; color: #fede58;">건국훈장</span> 대한민국장(重章)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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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 한자 : 閔泳煥

대한민국 독립 운동가

생몰

1861년 8월 7일 ~ 1905년 11월 30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대한제국 한성부 종로구 견지동

국적

조선 -> 대한제국

본관

여흥(驪興)

자(字)

문약(文若)

아호

계정(桂庭)

시호

충정(忠正)

직업

정치가

종교

유교(성리학)

가족

민치구(조부) 민태호(백부 & 양부) 민승호(중부)
민겸호(부) 민영찬(남동생) 박수영(부인)
민범식(장남) 민장식(차남) 민광식(삼남)

1. 개요
2. 출생 및 가계
3. 민씨 척족의 신진 대표
4. 개화파 관료로
5. 러시아로 일본을 견제하다
7. 순국 이후
7.1. 혈죽
8. 애국자인가, 탐관오리인가?
9. 그외

1. 개요

조선 말기의 관료. 여흥(驪興) 민씨이다. 대한제국 성립 후 육군 부장(현재의 중장에 상당)의 지위에 올랐으나 본래는 과거에 급제해 관료가 된 문신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자결함으로써 순국한 애국지사이다. 자(字)는 문약(文若), 호(號)는 계정(桂庭),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그래서 충정공(忠正公) 또는 민충정공(閔忠正公)으로도 많이 불린다.

2. 출생 및 가계

1861년 탐관오리 민겸호(閔謙鎬)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견부호자 이후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민태호(閔泰鎬)에게 입양되었다. 민겸호 집안의 뒤는 둘째 아들인 민영찬(閔泳瓚)이 잇게된다. 1878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관료가 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민씨 일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쾌속 승진을 거듭해 1881년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 대사성 등의 요직을 거친다.

같은 여흥 민씨 일족인 민영환과 명성 황후와의 관계를 설명을 해야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는데, 족보를 펴놓고 보지 않는 이상 쉽게 혼동이 올 수가 있다. 일단은 과거에 친척간의 양자 입적이 흔해서 가계(家系)를 따지다가 헷갈리는 것도 원인이 되겠고, 다음과 같은 원인도 있다. 민겸호의 둘째 형인 민승호(閔升鎬)는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민치록(閔致祿)의 양자로 들어간다. 이 민승호가 폭사당한 뒤 민승호의 양자로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閔泳翊)이 들어오는데, 이 '민태호'는 동명이인인 또다른 민태호(閔台鎬)인 것이다.

민유중(閔維重)은 인현왕후의 아버지로, 앞서 언급한 모든 민씨 사람들의 공통된 조상이다. 그를 기준으로 삼고,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히 표를 만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민유중의 장남인 민진후(閔鎭厚) 쪽 후손 :

... 민치록 ― 민승호 (입적) ― 민영익 (입적)... 민치록 ― 명성황후 ― 순종

・민유중의 차남인 민진원(閔鎭遠) 쪽 후손 :

... 민치오 ― 민태호(閔台鎬)... 민치삼 ― 민태호(閔台鎬) (입적) ― 민영익 , 순명효황후[1]

・민유중의 삼남인 민진영(閔鎭永)[2] 쪽 후손 :

... 민치구 ― 여흥 부대 부인[3]고종... 민치구 ― 민태호(閔泰鎬) ― 민영환 (입적)... 민치구 ― 민승호... 민치구 ― 민겸호 ― 민영환

촌수를 따져보면, 민유중은 '호(鎬)'자 항렬에게 6대조(代祖)이므로, 명성 황후는 민태호(閔泰鎬) 등과 같은 항렬로 12촌지간이 되며, '영(泳)'자 항렬에게는 7대조(代祖)이므로, 명성 황후의 조카뻘인 민영환과는 13촌지간이 된다. 친척이라곤 해도 상당히 먼 친척임을 알 수 있다.

위의 표에서 보듯 '민태호' 한 명만 헷갈려도 '족보'가 완전히 꼬여버린다. 순식간에 '민태호'가 아들 민영익을 명성황후의 양오라버니인 민승호의 양자로 보내고나니 자신도 '아들이 없어'[4], 민영환을 대신 양자로 들였다는 새 족보가 생긴다[5]. 또 피붙이라고는 해도 친척 집안의 양자로 들어간 자식은 친부모 집안과는 가계가 끊긴다는 것과, 오빠, 동생이라는 말이 나와도 사실은 오빠뻘, 동생뻘이라는 것을 무시하면 가계도가 개판이 돼버린다. 이런 문제를 앞서 든 '민태호' 문제와 적절히 섞으면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지 다함께 살펴보자.

1. '민태호', 민승호, 민겸호, 여흥 부대 부인은 친형제 자매이다.

2. 민영익, 순명효황후는 '민태호'의 자식이다. 민영익은 민승호의 자식이기도 하다. '민태호' = 민승호

3. 민영환은 '민태호'의 자식이다. 민겸호의 자식이기도 하다. '민태호' = 민겸호

4. 민승호는 명성황후의 친정 오라버니이고, 그 아들인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친정조카이다.

5. 따라서 '민태호', 민승호, 민겸호, 여흥 부대 부인은 명성황후의 친형제 자매이고, 또한 민영익, 순명효황후,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친조카이다.

6. 그런데, 여흥 부대 부인은 고종을 낳고, 명성황후는 그 며느리가 되고 순종을 낳고, 순명효황후는 그 며느리가 되고 순종의 아내가 된다.

7. ????

8. 그러므로 민영익, 순명효황후, 민영환, 고종, 순종은 모두 4촌지간이다. 이게 무슨 개 족보야. 유럽 왕실이냐.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민영환과 명성황후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이 인터넷상에 돌아다니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 한 곳만 링크를 제시해도 충분히 설명이 되리라 본다. '국가 보훈처 공식 블로그'이다.

3. 민씨 척족의 신진 대표

친아버지인 민겸호는 민씨 척족(戚族)의 중심 인물로서, 부정부패가 심하였다. 1881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고 1882년에는 구군영(舊軍營), 즉 구식 군대를 기존의 5군영에서 2군영으로 축소, 개편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군영 소속 군인들에게 쌀로 지급하는 급료를 13개월 체불한 끝에, 6월 9일 일부 군인들에게 1개월분의 급료만 우선 내주었다. 그나마 지급한 급료도 겨와 모래를 섞었고 양도 절반 정도 밖에 안되자, 구식 군대의 군인들은 격분하여 난동을 벌였다. 이에 민겸호는 주동자를 색출하여 체포하는 등 강경하게 진압하려했는데, 이는 오히려 기름에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 난동은 곧 한양 도성을 휩쓸은 반란 즉, 임오군란으로 발전하였고, 결국 민겸호는 6월 10일에 반란군에게 살해당한다.

이 때, 민영환 역시 구식 군대의 처단 표적이 되기도 했으나 살아남았다. 이후 사직서를 냈는데 1884년 바로 이조 참의로 복직했고, 도승지, 전환국 총판, 홍문관 부제학, 이조 참판, 내무 협판, 개성 유수, 해방 총관, 친군연해 방어사, 한성 우윤, 기기국 총판 등을 역임했다.

1887년에는 상리국 총판, 친군전영사, 호조 판서가 되었고, 1888년과 1890년 병조 판서를 2차례 역임했다. 1893년에는 형조 판서, 한성 부윤, 1894년에는 독판 내무부사, 형조 판서가 되었고, 1895년에는 주미 전권 공사에 임명되었다. 각종 직책들을 보면 갑신정변 이후 민영익이 정권에서 밀려난 이후 그의 가지고 있던 직함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았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도 민겸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처단 대상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당시 민중들에게 미움받던 여흥 민씨 척족의 대표격인 인물이었기 때문인지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전봉준의 체포 후 진술 기록을 보면 고영근, 민영준[6]과 함께 민영환을 탐관오리의 대표로 지목하고 있다.

다만, 위에서 볼 수 있듯 민영환은 과거 급제 이후 쾌속 승진을 거듭하며 중앙의 경직(京職)만 맡아 봤기 때문에, 실제로 민중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예를 들면 고부 군수 조병갑과 같은) 탐관오리 짓을 할 수 있었을 지는 의문이다. 매관매직 등의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던 정황이 있다는 말도 있으나, 그보다는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외척(外戚) 세력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너무나도 컸고, 민영환이 민씨 일가 세도 정치의 대표격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지목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더구나 왕조 사회에서는 왕이나 왕후를 지목해 비판을 하는것이 금기시되었기에, '군주를 측근에서 잘 보필하지 못하고 미혹케 하는 간신'이라는 식으로 에둘러서 신하, 관리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고종, 명성 황후가 받아야 할 비난을 대신 덮어썼을 가능성도 있다.

4. 개화파 관료로

이후로는 일본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빌려 근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활동하는 대표적인 친러파였다. 1886년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맺을 것을 고종에게 건의했으나 같은 여흥 민씨 출신인 민영익이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도승지, 이조 참판 같은 요직에 있었으나 1895년 을미사변 직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을미사변 직전에는 주미 전권 공사로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했다.

1894년 12월 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알렉산드르 3세가 죽고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하자 1896년 5월 거행된 대관식의 축하 사절단 특명 전권 공사로 임명되어 대관식에 참석했다. 사절단 일행에는 윤치호도 포함돼 있었다.

이때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 개통 이전이라서[7] 사절단은 요코하마에서 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횡단, 캐나다 밴쿠버로부터 미국으로 입국, 대륙을 철도로 가로질러 뉴욕에서 다시 기선을 타고 런던으로 가서 거기서 다시 베를린을 거쳐 러시아로 들어가 대관식에 참석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반년에 가까운 여행을 해야만 했다. 대관식에 참석한 이후는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까)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톡으로 와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결과적으로는 정말 지구를 한 바퀴 돈 셈이 되어버렸다. 이 여행이 한국 최초의 세계 일주다. 총 걸린 시간은 6개월 2일이었고, 이때의 기록을 정리한 여행기가 ≪해천추범(海天秋帆)≫이다.

이전에도 청나라와 일본에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이 때의 러시아 여행를 전후해서 본격적으로 서구 문물에 눈을 뜨게 되었다. 러시아로 향하는 길에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제국 등 당시의 서구 열강을 전부 순회 방문하였으며, 이들의 발전된 문물 제도를 직접 체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귀국 후에는 의정부 찬정을 지내던 도중 광무개혁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군부 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군부 대신을 지내면서 군대의 근대화를 강력하게 주장,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군령권이 황제에게 직속되도록 만들었다. 1897년(광무 1년), 다시 영국ㆍ독일ㆍ프랑스ㆍ러시아ㆍ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6개국의 특명 전권 공사로 발령을 받았다. 유럽에 체류하면서 특명 전권 공사의 자격으로 영국 빅토리아 여왕(1897년)의 즉위 60주년 기념식(다이아몬드 희년)에도 참석한 바 있다. 이때의 기록을 ≪사구속초(使歐續草)≫로 남겼다.

이후에도 탁지부 대신, 표훈원(表勳院) 총재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민영환은 당시로서는 해외 경험이 풍부한 사람었으므로, 개화 정책을 실천하고자 유럽 열강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 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을 신장시킬 것을 지속적으로 고종에게 상소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전제 군주정을 지향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상소는 거부되고 군사 개혁안만이 받아들여졌다. 당시의 대한 제국의 상황상, 기초적인 제도 기반도 없이 표면적인 모방만을 추구했던 군사 개혁은 지나치게 무리한 시도였다.

이후 독립협회를 후원하여 '독립ㆍ자강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민권의 신장과 의회의 설치 등 정치 개혁 여론을 선도하려 했다. 군부 대신 겸 내무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개혁파를 옹호하고 중추원(中樞院)을 의회로 개편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당시의 어용 단체인 황국협회(皇國協會)로부터 "독립당을 옹호하여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 라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기도 했다. 의회 제도의 도입은 좌절되었다.

5. 러시아로 일본을 견제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일본을 신뢰하지 않았고, '가까운 나라인 일본과 친하게 지내면 이들의 침략을 막기 어려우니, 멀리 있는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을 견제해야 한다'[8] 라고 생각했다. 온건 친러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갑오개혁으로 친일파 관료 세력이 대두한 이후에도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 친일파 대신 및 일진회 회원들과 대립했다. 이완용은 초기에는 민영환과 같은 친러파였지만 이후에 친미파, 다시 친일파로 갈아탔다. 그만큼 시세를 읽는 능력은 뛰어났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뒤 다시 의정부 참정대신(參政大臣), 탁지부 대신을 거쳐, 그의 건의에 의하여 설치된 원수부의 회계국 총장, 표훈원 총재, 헌병 사령관을 역임하였고, 육군 부장(현재의 중장에 상당)에 오르고,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 대훈위이화장(大勳位李花章)을 수여받았다. 참정 대신은 의정 대신의 다음 직위로, 내각의 좌의정, 지금의 부총리 급에 해당한다. 조병세가 의정 대신을 맡았으나 사직을 했으므로 사실상 국무 총리, 국무 총리 대리에 가까웠다. 이 직위는 나중에 한규설에게 가고, 한규설이 을사 조약에 분노해 사임하자 일제가 이완용을 앉혔다. 실질적인 총리 위치로 보아도 무방하다.

러일전쟁을 전후해 참정 대신, 외무 대신, 내부 대신과 학부 대신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내정 간섭에 항거하여 일본을 비난하며 친일 내각과 대립했기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 대신들의 공적(公敵)이 되었다. 결국 한직인 시종 무관장으로 좌천당하였으며, 순국할 때까지 시종 무관으로 있었다.

6. 자결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이 되자 전 의정대신(議政大臣 : 영의정에 해당)인 조병세를 대표로 조약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규합해, 이를 철회하고 을사오적 등의 조약 찬성파 신하를 처벌하라는 공동 상소를 올렸으나 일본 헌병대에 의해 조병세가 체포되고 입궐이 거부되는 소동이 있었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자신이 대표가 되어 상소하려 했으나 이번에도 일본의 헌병대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고 평리원((平理院 : 법원)에서 왕명 거역죄로 견책까지 당하게 된다. 그는 이에 분노해 귀가 후 자신의 명함 앞뒷면에 유서를 남기고 칼로 자신의 목을 베어 자결하였다.[9] 사망일은 1905년 11월 30일로, 향년 45세(만 44세 3개월)이다.

그가 남긴 유서는 전부 3통으로, 백성들에게 보낸 것이 가장 유명하고, 대한 제국에 주재하는 외국 외교 사절들에게 보낸 것과, 고종황제에게 올린 것이 따로 있다. 즉, 내용이 서로 달랐다.

민영환이 자신의 명함 앞뒤에 쓴 유서.[10]

내용은 다음과 같다.

嗚呼!國恥民辱乃至於此,我人民行將殄滅生存競争之中矣。夫要生者必死,期死者得生,諸公豈不諒?只泳煥徒以一死仰報皇恩,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泳煥死而不死,期助諸君於九泉之下。幸我同胞兄弟千萬倍加奮勵,堅乃志氣,勉其學問,結心戮力,復我自由獨立,則死者當喜笑於冥冥之中矣。鳴呼,勿少失望!

訣告我

大韓帝國二千萬同胞。

(아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국민은 머지않아 생존 경쟁 중에 모두 다 죽어버리겠구나. 무릇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살아날 것인데, 여러분은 어찌 헤아리지 못하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한다.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도울 것을 약속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억천만 배 더욱 분발하여, 의지를 굳건히 하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과 힘을 합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어두운 저승에서라도 기뻐 웃으리다. 아, 조금도 희망을 잃지 말라!

우리 대한 제국 2천만 동포에게 작별하며 고하노라.)

7. 순국 이후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백범 김구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가 조문하였으며, 조병세를 비롯해 전 참판 홍만식, 학부 주사 이상철여러 사람이 뒤이어 자결하였다. 이상설 역시 종로 거리에서 "민영환이 죽은 오늘은 전 국민이 멸망한 날"이라고 연설하고는 땅바닥에 머리를 찧어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국권 회복 투쟁에 일생을 바치게 된다.

사망 직후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추증되었고, 대한제국의 최고 훈장인 대훈위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이 추서되었으며, 충정공(忠正公)의 시호를 받았다. 고종이 사망한 뒤에는 고종의 종묘에 배향되었다. 광복 후에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묘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구성초등학교, 구성중학교, 구성고등학교 사이에 있으며, 묘역에는 민영환의 정치적 후원을 받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묘비가 남아 있다.

7.1. 혈죽

그의 자결 1년 후인 1906년, 그의 자택, 자결했던 방의 마룻바닥에서 대나무가 돋아났다. 실내에서 대나무가 자라는 것이 무척 드문 일이라 사람들은 이를 그의 피가 대나무가 된 혈죽(血竹)이라고 일컬었는데, 일제는 이것을 조작으로 의심하고 조사 후 뽑아버렸으나 그의 부인이 뽑힌 혈죽을 수습해서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흠좀무한 건 대나무 잎의 개수가 45개로 순국 당시의 나이와 정확히 일치했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는 KBS 스펀지 209회에서도 소개되었다.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48화 방송분에도 등장했다.

도화서의 화원이었던 석연 양기훈이 당시에 그린 혈죽도. 현재 고려대 박물관 소장.

당시 촬영된 사진.

현재 보관되고 있는 혈죽. 민영환의 후손들이 보관하다 현재는 고려대 박물관에서 보관 중.

8. 애국자인가, 탐관오리인가?

조선 시대에 그려진 민영환의 젊은 시절 초상화

흔히 을사조약에 항거해 자결한 우국지사, 순국자로서의 이미지만이 강하게 남아 있지만, 젊은 시절에는 명성황후를 등에 업은 민씨 척족 출신으로서 행실이 방자하다고 욕도 많이 먹었고, 매관매직이나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던 의혹도 남아 있어서 마냥 좋게 평가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많다. 특히 위에 적혀 있듯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군에서는 민영환을 조선의 3대 탐관오리 중 한 명으로 꼽았을 정도였다. 따라서 실제 행적에 비해 마지막 행적만을 가지고 지나치게 미화되었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에 반박하는 견해도 있는데, 그가 젊은 시절에 여흥 민씨 척족 중 한 명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가 민씨 세도(勢道) 기간 중 그가 직접 저지른 과오라고 할 만한 점을 지적하기가 어렵고, 전봉준 등 동학 세력이 민영환을 매관매직을 일삼은 부정부패의 우두머리로 지목한 것 또한 그가 민씨 척족의 대표로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지목된 것에 가깝다고 본다. 그리고 민씨 척족은 당시 수구 세력의 대표격으로 알려져 있었던 반면, 민영환이 보여준 행보는 그와는 거리가 먼 개화파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것도 사실이다.

당시의 인식과 현대에 와서 밝혀진 사실이 다른 아주 좋은 사례이다. 애초에 민씨 일족은 부정부패가 심했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상황에 대한 인식을 보면 온건 개화파이지 최익현 류의 개화 반대파가 아니다. 이들이 수구파로 알려진 것은 급진 개화파가 자신들과의 개화의 속도 차이로 상대를 수구당으로 싸잡아 분류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민씨 일족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개판이 된 것도, 당시의 사회 · 문화적 환경에도 어느 정도는 원인이 있다. 전근대적인 인식에서 나라가 어지러운 것은 중앙 정치의 책임인데, 임금에게 책임을 직접 물을 수는 없기 때문에 임금 주위의 정치 세력에게 책임을 돌리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멸망의 책임을 전적으로 고종이나 민씨 세력에만 묻는 것이 이해하기도 쉽고 마음 편하지만, 못보고 지나치는 것들이 분명히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동시대에 쓰여진 역사 자료라 할지라도 철저한 사료비판을 거친 현재의 연구 성과를 통해 살피는 것이 객관적 이해를 위한 길이다. 물론 당시 고종이나 대원군은 대놓고 매관매직으로 자금을 마련했고, 민씨건 종친이건 조씨건 벼슬 좀 하는 이들 중 수탈을 일삼던 관리가 차고 넘쳤던 것도 사실이니,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평가가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는 평가로 바뀌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은, 비록 젊은 시절에 과오가 있었다 하더라도, 외국을 순방하고 돌아온 이후에는 국제 정세를 깨달아 개화파가 된 점, 고종에게 여러 가지 정치 개혁안과 근대화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던 점, 친일 단체로 변질되기 전인 초기의 독립협회와 만민 공동회를 후원하고 민권 신장에 찬동하였던 점 등은 그의 공적이라고 본다. 젊었을 때의 과오와 나이가 든 다음의 공적을 나누어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젊었을 때는 지체 높으신 집안 출신 젊은이로 방약무인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정신을 차려 개화파 우국지사다운 면모를 보여 줬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세계 유람 전과 후의 민영환이 보여 준 행보는 매우 다르다. 조지훈의 '지조론'에서도 초년보다 후반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민영환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친일인명사전 또한 이러한 관점에 기반하여 생애 초기에는 반일 행보를 보였으나 이후 친일파로 전락한 인사들은 등재한 데 비해, 이와는 반대로 일제로부터 작위도 받는 등 생애 초기에는 식민 통치에 협력하였으나 이후 반일로 전향하여 독립 운동에 힘쓴 인사들은 등재하지 않았다. 민형식(1875)은 매국노 동명이인(1859년 생)이 있어서 그런지 아직도 친일파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한일 병합 때 자결한 황현은 평소에 남에 대한 평가가 아주 매서워서 '매천의 붓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다(梅泉筆下無完人 : 매천필하무완인)'란 평을 들었는데,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는 민영환과 이용익 등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도 비난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기록만으로는 이를 사실로 입증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민영환의 인물을 평가할 때에는 이러한 사료 부족 문제를 고려해서라도 젊은 시절보다는 나이든 이후의 삶에 초점을 맞춰 판단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매천야록마저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슬퍼한 대신 조병세, 병졸 김봉학, 이름 없는 인력거꾼이 뒤따라 자결하였다는 얘기를 실어 놓았으며, 뒤이어 민영환의 장례 풍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함으로써 백성들이 민영환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통해했음을 밝히고 있다.

21일, 민영환을 용인에 예장하였다. 이때 고종은 친히 뜨락에 내려 멀리 떠날 때까지 전송하며 경의를 표하였고, 또 각국 공사 및 영사들도 모두 와서 조문을 하며 관을 어루만지고 애통해하였다. 위로는 진신(搢紳)으로부터 밑으로 방곡(坊曲)의 조예(皂隷), 부유(婦嬬), 걸인, 각 사찰의 승도들도 거리가 빽빽하게 모여 곡을 하면서 전송하였으므로 그 곡성은 산야를 뒤덮었다. 이때 전동(典洞)에서 한강에 이르기까지 인파가 첩첩으로 쌓여 진을 친 듯하였다. 상여(喪轝)를 전송할 때 이렇게 인파가 많은 것은 근고(近古)에 없는 일이었다.

이때 향병(鄕兵) 한 아무개(韓某)라는 사람이 장례지에서 민영휘[11]를 보고 “당신도 호상(護喪)을 하러 왔습니까? 당신의 성이 민씨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민씨는 죽고 어떤 민씨는 죽지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 나라가 망하였지만 한 번 죽어 속죄를 하지 않고 충정공(忠正公)의 영구를 따라 여기까지 왔으니 하늘이 두렵지 않습니까? 속히 이곳을 떠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뾰족한 내 군화에 치여 죽을 테니까!”라고 하자 민영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곳을 떠났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통쾌하게 생각하였다.

아울러, 당시 중앙 정계의 실세 중에서 국가를 망국의 길로 이끈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황제와 백성에게 사죄한 인물은 그가 거의 유일했다는 점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

9. 그외

  • 그가 세상을 떠난 곳은 현재 종로구 공평동 하나투어 빌딩(옛 한미 빌딩 / 한미은행 본점)이 있는 자리다. 바로 옆의 태화 빌딩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4년 후에 있었던 3.1 운동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모였던 태화관 자리다.
  • 새비지 A. 랜도어가 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12]에 보면 민영환과의 통교와 랜도어가 그린 초상화가 나온다. 여기에서의 묘사에 의하면 '장군'으로 칭해지며[13] 외국 문물에 관심을 가지는 호방하고 개방적인 성격이지만 서양화의 원근법을 이해하지 못해서 "왜 옆모습이 안 나오는 거요?"라고 투덜대는(...) 장면도 있다. 랜도어는 결국 민영환의 측면 초상화를 따로 그려주었는데, 이를 위해 닭 우는 꼭두새벽부터 관복을 갖춰 입고 찾아왔다는 증언이 남아있다.(...)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도로충정로는 민영환의 시호인 '충정(忠正)'에서 따왔다. 충정로역도 충정로에서 따온 것. 민영환 묘역이 있는 용인시 구성 읍내의 도로도 도로명 주소 개편 직후에 '충정로'로 명명했으나, 서울 충정로와 혼동의 소지가 있어 도로명을 '구성로'로 변경했다.
  • 흑역사가 하나 있는데, 훗날에 대립하게 되는 친일파 송병준이 김옥균을 만난 죄로 투옥되었을 때, 석방을 주선해준 흑역사가 있다...
  • 자결 당시 배에 칼을 꽂았으나 바로 죽지 못하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몇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도움을 받아 목에 상처를 내고 죽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 시대에는 왕에게 끝까지 간언하여 사약을 받는 정치적 자결이 주였고, 그 외의 자결도 대부분 목을 메거나 독약을 마시는 형태였고 이런 식의 할복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어떻게 해야 사람이 죽는지 정확한 방법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조선에서 할복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내세우니 아무리 자살해도 할복은 고르기 어려운 선택지였을 테고 그랬으니 할복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턱도 없었을 것이다.
  • 영화 'YMCA 야구단'에는 민영환의 딸 민정림(김혜수 분)이 여자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신여성으로서 우리나라에 야구라는 운동종목을 처음 소개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팀인 황성 기독교청년회 야구단을 창단,운영하는 데 크게 공헌한 역할로 등장한다. 민영환이 자결한 뒤 장례식 때 주인공 이호창이 민정림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정림에게 주려다 실수로 잃어버리는데, 이걸 민영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민영환의 유서인 줄 알고 비장하게 읽는 참극(?)이 발생한다.
  • 2018년에는 민영환의 증손녀인 민명기씨[14]가 민영환의 삶과 죽음을 주제로 한 소설을 집필했다. 제목은 '죽지 않는 혼'. 무작정 민영환의 삶 전체를 미화하지는 않고 비교적 담담하게 묘사했다.[15]


  1. [1] 순종의 아내. 황태자비.
  2. [2] 민진후, 민진원의 배다른 동생이다.
  3. [3] 흥선 대원군의 아내
  4. [4] 글 제일 첫머리에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민태호'라고 적혀있다.
  5. [5] 실제로는 민태호(閔台鎬)는 민영린(閔泳璘)을 양자로 들였다.
  6. [6] 나중에 '민영휘'로 개명한다. 휘문고등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며, 갖은 악랄한 방법으로 재산을 긁어모아 거부가 되었다.
  7. [7]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1850년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1897년 부분 개통하였고 모스크바 ~ 블라디보스토크 전 구간 개통은 1904년의 일이다. 철도 개통 이후 만주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가할 것이라는 일본의 우려도 1905년 발발한 러일전쟁의 이유 중 하나이다.
  8. [8] 이이제이, 원교근공(遠交近攻) : 삼십육계 중 제23계. 먼나라와는 동맹을 맺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한다.
  9. [9] 처음에는 작은 칼로 복부를 찔렀으나 칼이 작아 깊이 들어가지 않자 다시 목을 베었다고 한다.
  10. [10] 육군부장정일품대훈위 민영환
  11. [11] 1906년 휘문 의숙(휘문고등학교의 전신)의 설립자이자 대표적인 친일파로 활동한 인물이다.
  12. [12] 원문이 Korea이기 때문에 이 부분이 '한국'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가장 큰 원흉(?)은 시사 영어사의 창립자 민영빈(공교롭게도 이 민영환과 같은 항렬이다.). 그가 펴내는 영어 교과서마다 반드시 한국의 전통 문화 관련 파트를 꼭 넣도록 했기 때문에 이후에도 다른 영어 관련 책에서 이 책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13. [13] 정확히는 병조 판서였다.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
  14. [14] 이화여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후 저명한 정치학자인 최장집과 결혼했다. 1976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변호사협회(USA Bar Associasion)’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면서 남편의 유학(시카고대학) 생활을 뒷바라지했다. 남편을 따라 미국에서 생활하던 젊은 시절 <한국일보> 엘에이(LA) 지사에서 주최한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입상한 적이 있다. 귀국한 뒤에는 ‘서울 Accenture’ 등에서 일했고, 남편이 정년퇴임한 뒤 일흔이 넘어서야 작가가 됐다.
  15. [15] 한편 민명기 작가는 2017년에 충정공의 손자 며느리인 자신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집안 얘기를 소설(<하린>)로 썼다. <죽지 않는 혼>이 충정공과 부모, 형제들 얘기인 반면에, <하린>은 충정공의 자녀들과 손자대의 얘기이다. 100여년에 걸친 충정공 가문의 역사가 두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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