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당(1990년)

1990년에서 1992년까지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진보정당.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독자적 민중후보 출마를 주장하였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1989년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이 결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1990년 11월 10일 창당된다. 상임대표 이우재, 정책위원장 장기표, 사무총장 이재오[1].

1991년 광역의원 선거에서 강원도의원 당선자[2]를 배출했으나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에서 눈에 띄는 후보를 내지 못하고 전국구에서도 득표율 미달로 한 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하여 정당 등록이 취소되어 해체되었다.[3] 따지고 보면 서울 은평구을의 이재오가 17%의 득표를 얻고 구로구을의 이우재가 20%, 동작구갑의 장기표가 20%를 확보하고 부산진구의 김영수가 11%의 득표를 확보하고 인천 북구을의 송경평이 14%의 득표를 얻고 구미에서 윤상규가 27%의 득표를 얻고 장승포-거제에서도 장대현이 12%의 득표를 얻는 등 의미있는 득표를 기록한 후보가 여러명 있었지만 지역적인 조직력이 원채 허약했으니 당선권에 든 후보가 1명도 없었으며 울산과 창원에 지역기반이라도 있던 민주노동당과는 다르게 지역기반이 전무했으니[4] 의석을 내기에는 언감생심인 수준이었다.

민중당 해산 이후 지도부였던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는 보수우익으로 전향하면서 1994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5] 새누리당에는 민중당 활동을 하다가 이들을 따라 같이 넘어간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민중당에서 활동했던 이들 중에 김성식, 정태근, 신지호, 김용태, 차명진[6], 박형준, 임해규 등이 새누리당(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냈다.[7][8]

장기표는 이후 기존 정당, 신당을 가리지 않고 제도권 정치 진입 그러니까 국회의원 금뱃지를 달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통합민주당, 새천년민주당은 물론 좌우중도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있는대로 긁어모아서 민주국민당, 녹색사민당, 정통민주당, 국민생각 등등 선거때마다 정당을 급조하는 행태를 보이면서 이미지가 완전히 망가졌다. 2020년 21대 총선을 앞두고는 미래통합당에 입당해서 김해에 출마하였다.

노회찬주대환, 조승수 등과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9] 창당을 준비하다가 1992년 초 민중당과 합당하였다. 민중당 해산 이후 지도부가 보수로 전향하고, 대부분이 노동운동/시민운동으로 떠난 이후에도 민중당 잔류파를 결집하여 진보정당 건설에 꾸준히 매진하여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백기완 후보 선거운동본부, '진보정치연합', '건설국민승리21'을 거쳐 민주노동당 창당에 이른다.

놀랍게도 허경영도 민중당에 참가했었다. 축지법 쓴다고 주장하고 콜미라는 노래를 히트한 그 사람 맞다. 1991년 지방선거에서부터 자신을 한국의 페스탈로찌라 칭하는 등의 패기를 보여주셨다. 당시에는 무명의 정치지망생에 불과했기에 국회의원이 아닌 시의원[10]으로 출마하였다.#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꼴찌를 기록했던 박종선도 1992년 민중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었다.

민중당 학생위원회로 결집했던 PD(민중민주)계 학생운동 분파들은 비주사NL 그룹와 통합하여 1993년 21세기 진보학생연합으로 발전하였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민중당 문서의 r15 판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1. [1] 나중에 이종걸 새천년민주당 의원에게 이 경력으로 공격당했다...가 더 세게 반격하여 사과를 받아낸 적이 있다.#
  2. [2] 정선군 제2선거구에 출마했던 성희직. 대한민국 역사상 첫 진보정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였다.
  3. [3] 2014년 헌법재판소에서 총선 득표율 미만 정당 해산에 관한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4. [4] 민주노동당은 그래도 PK 일부지역에서 지역기반은 가지고 있었으며 2000년 총선과 2002년 지방선거 때는 말 그대로 투표율이 저조해서 그렇지 투표율이 높았으면 더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는 레벨이었다. 어쨌거나 그래서 분당 이후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5. [5] 다만 이우재는 2003년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 창당에 합류하였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경선에서 2002년 재보궐선거 때 대결했던 이목희에게 패하고, 노무현 정권 후반기 한국마사회 회장을 역임한 후 정계은퇴.
  6. [6] 황제의 식사라는 망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그 사람 맞다.
  7. [7] NLPDR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약칭 전민련)과의 불화로 넘어간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전민련측에서 민중당을 무시로 일관했다고 한다. 재야와 노동, 농민, 도시빈민, 학생 등 각 분야별 운동세력의 연합체였던 전민련은 초창기에는 스펙트럼이 매우 넒었다. 이중에서 일부가 독자 정당 창당을 추친했으나, 전민련을 주도하던 범NL계는 독자정당 창당은 분열이라며 1989년 대의원대회에서 부결시켜 버렸다. 여기에 반발해서 정치참여를 주장하던 사람들은 일부는 민주당에 입당했고 일부는 민중당 창당에 참여했다. 그리고 NL계는 범민주대연합론을 주장하면서 일관되게 선거때마다 보수야당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지지를 내걸고 독자적인 진보정당파를 무시했다.
  8. [8] 1988년 전민련이 창립할때 대외적으로 주목받던 재야운동가 40대 4인방이 있었는데 바로 이부영, 이재오, 장기표, 김근태였다. 1989년 대의원대회에서 독자정당창당안이 부결되자, 이부영은 보수야당경유론을 내걸고 꼬마민주당에 입당했고, 이재오와 장기표는 민중세력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면서 민중당 창당을 주도했다. 반면에 김근태는 민족민주운동 전선론를 설파하면서 재야운동에 잔류했다. 하지만 김근태도 1995년 결국 김대중이 주도한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하면서 제도권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9. [9] 약칭 한국노동당.
  10. [10] 은평구 구의원 출마(낙선) -> 서울특별시 시의원 출마(낙선)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57.88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