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로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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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드어: 𒆍𒀭𒊏𒆠(Bābilim, Bābili)

아람어: ܒܒܠ‎‎(Bāḇel)

아랍어: بلاد بابل(bilad Babil)

영어: Babylonia

1. 개요
2. 고대 바빌로니아
3. 신바빌로니아
3.1. 성경의 바빌로니아
4. 기타

1. 개요

수메르아카드의 뒤를 이어 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 유역에 존재한 고대 국가. '바빌로니아(Βαβυλωνία, Babylonia)'라는 국가명은 수도였던 바빌리(바빌론)에 접미사를 붙여 그리스-라틴식으로 부른 것이다. 바빌론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을 기원전 23세기 아카드의 점토판에서 찾을 수 있을 만큼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이후 신(新)바빌로니아 왕국이 페르시아에게 멸망한 기원전 6세기 경까지 이어진다.

유적으로는 바빌론의 문,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유명하다.

2. 고대 바빌로니아

기원전 2000년대 수메르 족과 아카드 족의 여러 도시들이 한창 이전투구를 벌이던 시절, 이들과 다른 셈 족의 일파인 아모리 족은 바빌론을 세우고 조용히 발전시켜 메소포타미아의 정치, 상업의 최대 중심지로 점차 만들었다. 아모리 족은 남부 지역을 기반으로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후 도시국가 바빌론이 영역 국가 바빌로니아로 확장되어 갔다.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함무라비(Hammurabi) 시대에 이신, 우루크, 라르사 등의 수메르 도시국가와 마리 왕국 및 엘람까지 무너뜨렸다. 마침내 전 메소포타미아를 석권하여 서쪽으로는 지중해까지 닿는 대국이 되었다. 이후 명군들의 치세가 계속되면서 바빌론은 거의 역사상 최초로 '세계의 수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약 300년간을 고(古)바빌로니아 시대로 분류한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왕을 마르두크(Marduk) 신의 대행자로 믿었고 모든 왕들은 '신성한 도시'인 바빌론에서 왕권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관료 제도와 세금 제도, 중앙 정부 체계를 갖추었다. 신성화된 도시 바빌론의 이미지는 그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었다.

문화 쪽에서도 후대에 영향을 끼친 것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엘람 인을 추방한 후 왕국을 안정시킨 뒤 함무라비의 지시로 법전을 만든 것이다. 이는 함무라비 법전으로 불리며 체계적인 성문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함무라비 법전의 사본이 수사(Susa)에서 1901년에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프랑스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삼수일루나(Samsu-iluna) 시대부터 점차 분열이 시작되어 엘람 등지가 떨어져 나갔다. 결정적으로 BC 1531년 삼수디타나(Samsu-ditāna) 왕 때 히타이트의 침략을 받아 아모리 인의 왕국은 사실상 멸망했다.

아모리 왕조는 사라졌지만, 이후에도 바빌로니아는 부활해서 카시트인, 엘람 인들의 왕조가 이어지다가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3. 신바빌로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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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𒆍𒀭𒊏𒆠
ܒܒܠ

Bābili / Bāḇel

존속기간

BC 626년~BC 539년

위치

서아시아

수도

바빌론

국가원수

주요 국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

언어

아람어, 아카드어

종교

메소포타미아 종교[1]

종족

칼데아 인

성립 이전

아시리아

멸망 이후

아케메네스 왕조

종래의 지배국인 아시리아가 지배령 전역의 반발에 직면한 틈을 타 BC 626년에 나보폴라샤르가 옛 바빌론 고토에 다시 세운 것이 신바빌로니아다. 결국 아시리아는 붕괴하고 신바빌로니아-이집트-메디아 세나라가 3분하여 아시리아가 정복했던 옛 땅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리고 신바빌로니아는 그 종주국으로 명성을 떨쳤다. 본래의 국명은 구 바빌로니아를 계승하여 그냥 바빌리(바빌로니아)지만 구분의 편의를 위해 학계에서는 신바빌로니아로 통칭한다. 현재의 이라크 남부 및 쿠웨이트 등에 있던 셈계 칼데아 부족이 세운 나라라서 칼데아(Chaldea)나 칼데아 바빌로니아라고도 한다[2] 개역 성경에 나오는 구약의 갈대아는 칼다이아를 음역한 것이며,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카시딤(Kashdim, כשדים)으로 지칭하고 있다.

나보폴라사르의 아들이자 2대 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 때 전성기를 맞이했다. 정복 군주이기도 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맹렬한 정복 활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정복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남유다 왕국이 멸망하여 유대인들은 조국을 상실한 채 끌려와 바빌로니아의 폭압적 통치를 받았다. 수도 바빌론은 당시 세계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막대한 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현재까지 회자되는 바빌론의 공중정원도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바벨탑 또한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바벨탑과 관련한 성경의 내용이 바빌론 유수 시기의 유대인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 추측하는 쪽의 입장이다. 바빌론의 장대한 지구라트에 압도된 유대인들이 이 경험을 바탕으로 소위 바벨탑 이야기를 창작했다는 것.

하지만 새로운 바빌로니아도 네부카드네자르의 사후 불과 수십 년 만인 BC 539년에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를 제국으로 이끈 키루스 2세에 의해 정복당하고 말았다. 메소포타미아는 고대 내내 동방의 중심지였고 메디아의 영토를 그대로 계승한 페르시아는 변방에 불과했으므로 신바빌로니아가 당장 국력에서 밀린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페르시아가 아나톨리아의 리디아 왕국을 집어삼키고 난 후에는 사정이 달라졌고, 바빌로니아 역시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성경에 따르면 최후의 왕 벨사자르(벨사살)는 페르시아군이 침공해오는 것도 모르고 성대한 만찬을 흥청망청 즐기다 그 만찬이 끝남과 동시에 나라가 망한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성경 외에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도 그날 밤에 바빌론 사람들이 아주 제대로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고 나오고, 기원전 5세기 인물인 크세노폰의 기록 역시 이와 거의 같다. 20세기에 들어 출토된 소위 '나보니두스 연대기'에 따르면 바빌론이 제대로 된 시내 전투 한 번 없이 함락당했다고 한다. 물론 공식적인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아들인 벨사자르는 부왕에 버금가는 왕권을 행사하고 있던 대리 또는 공동 통치자 혹은 대리 섭정같은 존재였으며,[3] 기원전 3세기의 바빌론 사제 베로수스의 기록에 의하면[4] 이 함락이 있기 전 나보니두스는 키루스에 맞서 출정했으나 패배하고 제국 남쪽의 보르시파란 곳으로 달아났으며 바빌론 시가 함락당한 후 키루스에게 항복하였다고 한다. 바빌론의 문 문서 참조. 이때 바빌로니아의 유명한 건축물인 지구라트바빌론의 공중정원이 키루스 2세의 명으로 파괴되었다.

그렇게 신바빌로니아는 아주 허망하게 멸망하고 마는데, 이후 나보니두스의 또다른 아들이라 주장하는 자칭 '네부카드네자르 3세'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바빌로니아를 계승한 국가는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았으며, 바빌론은 계속 페르시아의 최대 도시로 남아 있다가 기원전 4세기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3세가 다시 바빌론을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그 후 셀레우코스 제국을 세운 셀레우코스 1세가 바빌론의 인근에 '셀레우키아'라는 도시를 건설하면서 바빌론은 쇠퇴했다.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바빌론 문서 참고.

바빌로니아 제국은 멸망했으나 바빌로니아인들의 정체성은 살아남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자기가 멸망시킨 아시리아인, 칼데아 가톨릭 문서 참조.

역대 왕은 다음과 같다.

역대

이름

아카드어 발음

재위 시기

초대

나보폴라사르
(Nabopolassar)

나부-압라-우추르

기원전 626~605

2대

네부카드네자르 2세
(Nebuchadnezzar II)

나부-쿠두리-우추르

기원전 604~562

3대

아멜 마르둑[5]
(Amel-Marduk)

아밀-마르두크

기원전 562~560

4대

네르갈-샤레제르

네르갈-샤르-우추르

기원전 560~556

5대

라바시-마르둑
(Labashi-Marduk)

라바시-마르두크

기원전 556

6대

나보니두스
(Nabonidus)

나부-나이드

기원전 556~539

7대

벨샤자르
(Belshazzar)

벨-샤르-우추르

기원전 550~539

3.1. 성경의 바빌로니아

유대인들에게는 2,500년 이상이나 지속된 디아스포라를 촉발시킨 장본국이기에 로마 제국, 나치 독일과 더불어 불구대천의 원수로 취급하는 국가이다. 구약 성경바빌론 유수, 네부카드네자르 2세 왕의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신바빌로니아인들은 유대인들의 나라인 남유다를 멸망시키고 주민의 상당수를 수도인 바빌론으로 끌고 가 포로 생활을 시켰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감정은 결코 좋을 리 없었다. 또한 당시 바빌로니아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영한 나라였던 반면, 유대인들의 나라인 남유다 왕국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 변방이었다. 시골 깡촌에서 살다 온 유대인들의 눈에 호화찬란한 영화를 누리고 있던 바빌로니아는 그야말로 쾌락이 가득했던 별천지였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바빌론을 악의 도시, 탐욕과 쾌락에 빠진 도시로 성경에 기록했다.

성경 다니엘서의 내용에 따르면, 금속으로 비유할 때 바빌로니아의 영화는 황금이요 이후에 나타나는 페르시아, 알렉산드로스 대왕헬레니즘 제국, 로마 제국은 각각 은, 놋쇠, 강철로 다 바빌로니아의 위대함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다니엘서 등등의 내용을 보면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을 비롯한 다른 나라 민족의 인재들도 능력이 있으면 바빌로니아의 주요 공직에 임명되기도 한 모양이다.[6]

그리고 성경의 바벨탑 전설도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와서 보게 된 거대한 신전의 탑인 지구라트를 보고, 또 자기들처럼 바빌론에 끌려온 수많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다른 수많은 언어로 떠드는 걸 보고 착안해 만들어냈다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에서도 아주 나쁜 의미로 바빌론을 언급하고 있다. 14장의 3번째 부제가 '바빌론의 패망'이다.

4. 기타

  • 남성이 돈을 주고 여성과 결혼할 수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결혼을 희망하는 여성이 경매 시장에 나가면 남성이 값을 불렀을 때 가장 높은 값을 부른 남자를 여성이 '선택'할 수 있었다. 여성이라고 반드시 경매 시장에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희망자들이 자발적으로 신청하면 나가는 방식이었으며, 값을 높게 불러도 남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선택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인신매매와는 다르다. 주의할 점은 그렇다고 이 시대에 자유연애로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자유연애는 근대에 들어서야 등장한 개념이며 근대 이전 결혼이란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자 상속권의 배분이었으므로 중매 결혼이 대부분이었다. 경매혼 시장은 어떤 관점에서는 중매보다도 더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서로 협상할 수 있으므로 사실상 현재의 결혼정보회사와 비슷한 셈이다.
또한 남편과 아내 양측 모두 합의 하에 이혼이 가능했고, 몇 가지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일방적으로 결혼을 무효로 돌릴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남편의 외도가 심하거나, 아내를 멸시하고 폭력을 사용하는 등의 이혼 조건이 충족되면 법에 따라 일방적으로 결혼을 무효로 돌리고 다른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


  1. [1] 여러 신들 중에서 마르두크(Marduk)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2. [2] 칼데아는 고대 그리스어 칼다이아(Χαλδαία)에서 유래. 칼데아인 스스로는 아카드어로 칼두(Kaldu), 아람어로 칼도(Kaldo, ܟܠܕܘ)라 불렀다.
  3. [3] 예전에는 벨사자르는 가공 인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설형문자 유물들이 계속 출토가 되면서 그가 실존했음이 밝혀졌다. 요약하자면 그가 바빌론이 함락될 당시에 그 도시에서 나보니두스에 비견되는 왕권을 휘두르고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보니두스는 재위 초기부터 남쪽 아라비아 지역에 관심을 가져 '데마'라는 지역을 정복하였다. 이후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으로 영구 복귀하기보단 데마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따라서 왕이 부재하게 된 바빌론 시는 애초 원정 당시 왕권을 대리했던 벨사자르가 계속해서 대리 통치했다는 것이다. 기록에도 분명 데마로의 원정 직전, 맏아들에게 왕권(대리)을 맡기고 바빌론 제국 각지의 군대에게 그를 따르도록 지시하였다고 한다.
  4. [4] 정확히 말하자면 서기 1세기의 유명한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그의 저작 <아피온 반박문>에서 이 베로수스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
  5. [5] 열왕기예레미야에는 '에윌므로닥'으로 나온다.
  6. [6] 앞의 저술은 논란이 있다. 대체적으로 다니엘서는 1~6장은 다니엘 본인이, 7~12장은 본인이 직접 또는 약간 후대에 다니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보지만 그것도 헬레니즘 시대까지 내려가지는 않는다. 다니엘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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