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상위 문서: 열사

이름

박종철(朴鍾哲)

국적

대한민국

본관

밀양 박씨

출생

1964년 4월 1일[1],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사망

1987년 1월 14일(향년 22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갈월동 치안본부

직업

대학생, 학생운동가

가족

아버지 박정기, 어머니 정차순, 형 박종부, 누나 박은숙, 삼촌 박월길

학력

부산 혜광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사인

물고문 중 치사.

1. 개요
2. 생애와 성품
4. 추모
5. 기타

1. 개요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1987년 1월14일, 자정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다 치사했다.

2. 생애와 성품

1964년 4월 1일 부산시 서구 아미동에서 아버지 박정기와 어머니 정차순의 차남(막내)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형 박종부와 누나 박은숙이 있다. 생존해 있었다면 2018년 현재 기준으로 만 54세.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해서 1984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하였다.

고교 시절 단짝이었으며 함께 서울대 84학번으로 입학한 김치하 씨(54)의 말에 따르면, "얼굴이 하얗게 뽀얗고 피부가 맨들맨들한데 두꺼운 안경을 낀, 그 당시로서는 귀티 나는 친구"다고 한다. 더불어 회고하기를 "아주 성실하고 차분한 사람이었으며, 한번 자리에 앉으면 진득하게 공부하는 친구였다.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가족들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종종 마음이 담긴 편지를 보내곤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친구 최인호 씨(52) 역시 그의 첫인상에 대해 "외모나 인상이 순진하고 해맑은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동기들보다 정치의식이 상당히 높았다"고 설명했다.1987년 1월 14일 이후 31년, 박종철을 기억하는 두 친구의 이야기

대학 생활 동안 동아리 활동과 농촌 활동(농활) 등을 통해 사회의 모순에 눈을 떴다.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당시 농성지원 가두시위로 닷새간의 구류를 살았고, 여름방학에는 공활(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 활동하던 중 1986년 4월 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가두시위로 구속되어, 과거 전력으로 인해 7월 15일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출소했다. 다음은 박종철이 옥중에서 부모님께 쓴 편지들 중 하나.

아버지, 어머니.

더운 날씨에 비는 오지 않고, 높은 하늘은 틀린 일기예보를 조롱이나 하는 듯이 연일 쨍쨍 내리쬐는군요.

꽤 더운 편이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 합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비치 파라솔 밑에서 선글라스 끼고 한가하게 피서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먹고 잘 놀아서 피둥피둥 찐 살을 빼느라고 사우나탕, 헬스클럽 다니면서 땀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삼복더위에 라면으로 끼니 때우며 먼지와 기름 냄새로 가득찬 무더운 작업장에서 묵묵히 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노동자들에 비하면 저는 신선 놀음입니다.

가족들의 그런 태도는 여기 갇혀 있는 저에게는 진정으로 위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딴 가족들은 면회 오면 어떻게든 꿋꿋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용기를 복돋아 주고 바깥 소식들을 전해주고들 하는데, 허구헌날 판사님 앞에 고개 숙여라, 판사가 무슨 내 할아버지라도 됩니까.

저들이 비록 나의 신체는 구속을 시켰지만, 나의 사상과 신념은 결코 구속시키지 못합니다. 저를 포함한 수많은 노동자, 학생들이 구속되어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누가 우리를 구속시켰습니까. 저들을 미워합시다. 그리고 저들이 저들 편한 대로만 만들어 놓은 이 땅의 부당한 사회구조를 미워합시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할 용기가 없다면 마음 속으로 진실하게 믿는 용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구속되어 있는 사실을 왜 쉬쉬합니까. 한 명에게라도 더 이러한 부당한 현실을 알리십시오. 내가 왜 구속되었는가를, 저들의 폭력성을, 우리들의 정당성을 사회적으로 고발하십시오. 그럴 용기가 없으면 마음 속으로나마 바깥에서 오늘도 열심히 싸우고 있는 우리 친구들과 저처럼 싸우다 갇혀 있는 친구, 선배들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라도 쳐 주십시오.

엄마 아버지의 막내는 결코 나약한 인간이 아닙니다.

이만 줄입니다.

1986년 7월 8일

3.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출소 이후에도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언어학과 3학년으로 학생회장 직분을 맡았던 그는, 1987년 1월 14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다 사망했다. 이에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황당하기 짝이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아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2]

4. 추모

1997년 서울대 교정에 추모비와 흉상이 건립되었고, 2004년에는 혜광고에도 추모비가 건립되었다.[3]

2001년 2월 27일, 서울대학교에서는 박종철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2018년 1월 13일, 관악구 대학동 대학5길에 박종철 열사를 기리는 박종철거리가 조성되었다.신림동 대학5길에 오늘 '박종철거리' 조성된다

2018년 3월 20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요양원에 있던 故 박종철의 아버지(89)를 만나 31년만에 고문치사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현직 검찰총장이 과거사에 대해 직접 사과한것은 처음있는 일 #

5. 기타

1987년은 꽃의 계절이었다

그 꽃으로 하여금 싸움의 게절이었다

저 6월 대투쟁의 꽃

모순의 근원에서

캄캄하게 죽어간 꽃

이 땅과

온 세상 전역에 찬연히 들불로 번진 꽃

네 이름 박종철

죽어 시체 빼앗겨 화장되어

그 뼛가루

분단임진강 한줄기에 뿌려져 흘러갔으나

네 이름 박종철

이 땅 안팎 가득히 피어난 시대의 꽃

마침내 이 땅은 너를 가졌어라

네 죽음으로 비통한 바 진노한 바 넘쳐

이 땅은 네 영광을 가졌어라

그렇다 진리는 죽은 자로부터 태어난다

오 네 이름 박종철

종철아 잘 가거래이

이 애비는 할말 없대이


  1. [1] 1965년은 호적상 생년이다.
  2. [2] 이 대사는 영화 1987에서 박처원 처장을 맡은 김윤석이 하게되는데 자신이 이 대사를 치게될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87년당시 대학생이었던 그는 이 얼토당토않은 변명거리가 신문지 헤드라인으로 도배된걸 생생하게 기억하는 세대였기 때문이다.
  3. [3] 본래 혜광고등학교 교정에도 흉상을 세우려 했지만, 개신교 미션스쿨인 혜광고에서 반대하여 추모비로 타협했다고 한다.
  4. [4] 공교롭게도 또 다른 한 명으로 더 꼽을 것 같으면, 바로 당시 박종철의 잠시 생전 시기를 다룬 1987의 치안본부장 강만창 역으로 나온 배우 우현과도 나이대가 동일하다.
  5. [5] 15권 권말 부록. 주로 1980년 이후 사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sta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