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

  상위 문서: 가수,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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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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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도서관 영구 등재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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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등재

프랭크 시나트라, <Songs for Young Lovers> (1954)
마일스 데이비스, <Kind of Blue> (1959)
밥 딜런, <The Freewheelin' Bob Dylan> (1963)

2004년 등재

로버트 존슨, <The Complete Recordings> (1936-1937)
베니 굿맨, <Carnegie Hall Jazz Concert> (1938년 1월 16일)
글렌 굴드, <Goldberg Variations> (1955)
엘라 피츠제럴드,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
델로니어스 몽크, <Brilliant Corners> (1956)
찰스 밍거스, <Mingus Ah Um> (1959)
주디 갈란드, <Judy At Carnegie Hall> (1961)
비틀즈,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
조니 캐시, <At Folsom Prison> (1968
캐롤 킹, <Tapestry> (1971)
마빈 게이, <What's Going On>
브루스 스프링스틴, <Born to Run> (1975)

2005년 등재

존 콜트레인, <Giant Steps> (1959)
제임스 브라운, <Live at the Apollo> (1963)
비치 보이스, <Pet Sounds> (1966)
존 윌리엄스, <Star Wars> (1977)
퍼블릭 에너미, <Fear of a Black Planet> (1990)
너바나, <Nevermind> (1991)

2006년 등재

뮤지컬 '쇼보트(Show Boat)' 앨범 (1932)
데이브 브루벡, <Time Out> (1959>
비비 킹, <Live at the Regal> (1965)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Are You Experienced> (1967)
프랭크 자파 앤 더 마더스 오브 인벤션, <We’re Only In It For the Money> (1968)
스티비 원더, <Songs in the Key of Life> (1976)
소닉 유스, <Daydream Nation> (1988)

2007년 등재

피트 시거, <We Shall Overcome> (1963)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 니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1967)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 <Burnin'> (1973)
사라 본, <Live in Japan> (1973)
폴 사이먼, <Graceland> (1986)

2008년 등재

조니 미첼, <For The Roses> (1972)
허비 핸콕, <Head Hunters> (1973)
마이클 잭슨, <Thriller> (1982)

2009년 등재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57)
더 후, <My Generation> (1966)

2010년 등재

뮤지컬 '집시'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59)
빌 에반스 외, <The Complete Village Vanguard Recordings> (1961년 7월 25일 녹음)
더 밴드, <The Band> (1969)
패티 스미스, <Horses> (1975)
윌리 넬슨, <Red Headed Stranger> (1975)

2011년 등재

캡틴 비프하트, <Trout Mask Replica> (1969)
스틸리 댄, <Aja> (1977)
데 라 소울, <3 Feet High and Rising> (1989)

2012년 등재

부커 T. 앤 더 엠지스, <Green Onions> (1962)
러브, <Forever Changes> (1969)
프린스, <Purple Rain> (1984)

2013년 등재

사이먼 앤 가펑클, <Sounds of Silence> (1966)
핑크 플로이드, <The Dark Side of the Moon> (1973)
라몬즈, <Ramones> (1976)
비지스 외, <Saturday Night Fever> (1977)

2014년 등재

아트 블래키, <A Night at Birdland(Volumes 1 and 2)> (1954)
본 미더, <The First Family> (1962)
린다 론스태드, <Heart Like a Wheel> (1974)
뮤지컬 '스위니 토드'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79)
U2, <The Joshua Tree> (1987)

2015년 등재

조안 바에즈, <Joan Baez> (1960)
더 도어스, <The Doors> (1967)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Stand!> (1969)
라디오헤드, <OK Computer> (1997)
로린 힐,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1998)

2016년 등재

존 콜트레인, <A Love Supreme> (1964)
산타나, <Abraxas> (1970)
메탈리카, <Master of Puppets> (1986)

2017년 등재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People> (1964)
데이빗 보위,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1972)
이글스, <Their Greatest Hits (1971–1975)> (1976)
토킹 헤즈, <Remain in Light> (1980)
N.W.A, <Straight Outta Compton> (1988)

2018년 등재

메를 트래비스, <Folk Songs of the Hills> (1946)
해리 벨라폰테, <Calypso> (1956)
사운드 오브 뮤직 사운드트랙 (1965)
스티브 라이히, 리처드 맥스필드, 폴린 올리베로스, <New Sounds in Electronic Music> (1967)
플리트우드 맥, <Rumours> (1977)
Run-D.M.C., <Raising Hell>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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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2015년

Bob Dylan [1]

개명 전 본명

로버트 앨런 짐머맨 (Robert Allen Zimmerman)

출생

1941년 5월 24일 (만 77세), 미국 미네소타 주 덜루스

국적

미국

직업

싱어송라이터, 작가, 시인, 화가

주요 수상

노벨문학상 (2016년)
그 외 수상 경력은 항목 참조

서명

{{{#!folding [ 그 외 정보 펼치기 · 접기 ]

링크

[2] [3] 공식 사이트

거주지

미국 캘리포니아 말리부

학력

미네소타 대학교 중퇴 (1959-1960년)

종교

유대교개신교

데뷔

1962년 1집 <Bob Dylan>

장르

포크, 블루스, , 가스펠, 컨트리, 전통 팝 음악

악기

보컬, 기타, 건반 악기, 하모니카

신체

171cm

민족

유대계 미국인

레이블

컬럼비아 레코드

가족

부모

아브람 짐머만 (1911-1968), 베아트리체 러트만 (1915-2000)

배우자

사라 딜런 (1965 - 1977)
캐롤린 데니스 (1986 -1992)

자녀

마리아[4], 제시, 안나, 사무엘, 제이콥, 데지레이 / 3남, 3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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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1960년대
2.3. 1970년대
2.4. 1980년대
2.5. 1990년대
2.6. 2000년대
2.7. 2010년대
3. 평가와 영향력
4. 트리비아
4.1. 종교
4.2. 사용 기타들
4.3. 화가
5. 관련 인물
6. 앨범
6.1. 스튜디오 앨범
6.2. 라이브 앨범
6.3. 부틀렉 시리즈
6.4. 컴필레이션 앨범
7. 그 외 작품
7.1. 저서
7.2. 미술 작품
7.3. 필모그래피
8. 수상 및 기타 내역
9. 투어
10. 외부 링크

1. 개요

밥 딜런은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시인이자 뮤지션입니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제 영웅이기도 합니다.

스티브 잡스[5]

그는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으로부터 U2까지 모든 가수가 밥 딜런에게 빚을 지고 있다. 미국 음악사에서 밥 딜런 같은 거인은 없다.

버락 오바마[6]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이자 대중음악에 영혼을 불어넣은 음유시인.

미국싱어송라이터, 작가, 화가, 시인이다. 대중음악사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중의 하나이며 음악사의 막대한 업적을 남긴 전설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수 십년동안 현재까지 음악과 사회, 문화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7] 2016년에는 미국 가요 전통 안에서 참신하고 시적인 표현들을 창조해낸 공로로 가수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훗날 자신을 ‘밥 딜런’이라 부른 사내, 로버트 앨런 짐머맨은 일본군진주만을 폭격하기 반년하고도 십수 일 전인 1941년 5월 24일, 미합중국 미네소타 주 덜루스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둘다 유대인이었고, 아버지 에이브러햄은 러시아 제국의 탄압을 피해서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 오데사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조부 지그맨 짐머맨과 조모 안나 짐머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비어트리스 스톤, 통칭 비티는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조부 벤자민과 조모 리파 에델스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밥이 태어난 곳은 미 북부에 넓게 자리 잡은 5대호 중 하나인 슈피리어 호의 바람이 직접 밀어닥치는 곳 이었다. 아버지 에이브러햄은 이 도시에 있는 스탠다드 석유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밥이 다섯 살도 되기 전, 병에 걸려 퇴직할 수 밖에 없었다. 동생 데이비드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일가는 친척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 비티의 친족들이 살고 있고 아버지 에이브러햄의 두 형제가 사업을 하고 있던 미네소타 주 히빙으로 이주한다. 철강업으로 번성하는 도시였고 주민들이 서로 얼굴을 알고 지내던 지방도시였다. 아버지 에이브러햄은 형제들이 경영하는 전파상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밥 딜런이 사람들에게 노래를 하게된 계기는 일가의 새로운 생활이 이제 막 시작된 그 무렵이었다.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모였을 때 동요가 아니라 라디오에서 흐르는 성인 취향의 노래를 당당하게 소화해냈고 주위를 놀라게 했다.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한 밥 딜런의 다큐멘터리 영화 ‘노 디렉션 홈 : 밥 딜런’에서는 밥은 “열 살 때[8] 이사 온 집에 기타와 레코드 플레이가 달린 라디오가 있었다”고 말햐고 있었다. 플레이어 턴테이블에는 이전 거주자가 놓고 간 한 장의 레코드가 놓여있었다. 그 레코드에 수록된 ‘Drifting Too Far from the Shore’를 들었을때 충격은 “곡을 듣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정한 부모는 따로 있는데, 엉뚱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버렸다는 생각도 들었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밥 딜런 인생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음악에 눈뜬 밥 딜런은 열 살 무렵 어머니의 날, 자신이 만든 시를 어머니에게 선사할 정도로 시 창작에도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밥 딜런의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음악적 소양을 심어주기 위해 피아노를 집에 들여놓았던 것은 열두 살 때의 일이었다. 개인 레슨을 위해 교사까지 집으로 모셨으나 정작 레슨을 받은 것은 동생 데이비드 뿐이었다. 밥 딜런은 “내 맘대로 치게 내버려두세요!” 라며 레슨을 극구 거부했다. 하지만 밥 딜런은 어느샌가 독학으로 연주법을 터득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피아노를 독학 할 무렵, 밥 딜런은 ‘행크 윌리엄스’, ‘행크 스노’, ‘조니 레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음악에 몰입했고 당시 한참 인기를 끌던 페티 코모나 페티 페이지가 아니라, 보통 가수들과는 다른 느낌을 풍기는 독특한 가수들에게 이끌렸다. 어린 시절 라디오에 대한 밥 딜런의 열성은 대단했다. 새벽 2시, 3시까지 라디오에 심취해 있다가, 그 다음 리틀록, 시카고, 루이지애나에서 발송되는 방송까지 듣게 됬다고 한다. 심야방송을 통해 ‘머디 워터즈’, ‘존 리 후커’, ‘지미 리드’, ‘하울린 울프’ 등 흑인들의 블루스 세계에 빠젔다고 한다. 그 만큼 어린시절부터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린 시절, 음악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영향을 받았던 것은 오직 음악뿐이었다. 음악만이 진실이었다. 그 무렵 음악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밥 딜런이 사는 히빙 거리에는 흑인 음악 레코드를 파는 가게가 없었다. 하지만 집에 있는 기타로 라디오에서 들었던 노래들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친구들과 음악 이야기를 나누게 되지만 본인과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음악을 듣는 친구는 좀처럼 없었고 가까스로 발견해낸 사람이 존 버클린이었다. 버클린은 기타와 테이프레코더도 가지고 있었다. 밥과 버클린은 라디오에서 들었던 곡에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믹스해서 직접 곡을 만들었다. 밥이 피아노와 보컬을 맡았고 버클린은 기타를 쳤다. 버클린에 의하면 잼새션[9]에서 밥이 최초로 만든 곡은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를 노래했다고 한다.

1950년대 중반, 밥은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했으며 이전보다 훨씬 시끄러운 음악인 로큰롤을 좋하게 됬다. 또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의 영화도 빠지기 시작한다. 특히 ‘이유 없는 반항에서 제임스 딘이 연기한 짐 스타크를 좋아했다. 또 당시 최고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 음악에 매료되었고 텔레비전에서 리틀 리차드를 발견한 순간 즉시 좋아하는 가수 리스트에 넣었다고 한다. 피아노를 연주하기 보다는 때려부수면서 열창하는 리차드의 스타일을 자기 집 피아노로 흉내내기도 했다고 한다. 또 헤어스타일 마저도 리차드처럼 머리 꼭대기를 잔뜩 부풀어 오르게 하는 화려한 스타일로 바꾸었다.

이 당시 자신의 음악 취향과 잘 맞는 랠리 키건을 알게 되었고 생애 첫 밴드 ‘조커즈(JOKERS)’를 결성한다. 이 밴드는.유행하는 곡에 하모니를 넣어 노래하는 코러스 그룹이었다. 여자애들의 반응도 좋아서 트윈 시티즈[10]의 텔레비전 방송 미국 아마추어 쇼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한다. 1956년 여름, 딜런의 밴드 조커즈는 78 회전 다이렉트 컷 레코드[11]를 만든다. 비용은 5달러였고 밥은 피아노를 연주하며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밥 딜런 인생의 역사적인 첫 레코딩이었다. 진 빈센트의 ‘비밥 어 룰라’, 더 펭귄스의 ‘Fallen Angel’이 수록되었다. ‘조커즈’는 1958년 봄, 멤버 랠리 키건이 사고를 당할 때까지 존속했다.

‘조커즈’ 활동과 병행해서 밥 딜런은 빌 마리낙, 래리 팻보, 척 나일라 등 세 친구들과 드럼, 베이스, 기타, 피아노로 구성한 ‘더 새도우 블래스터즈(The Shadiw Blasters)’를 결성한다. 밥은 리더격으로 피아노와 보컬을 담당한다. 자신이 꿈꾸던 리틀 리차드 스타일의 밴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57년 ‘더 새도우 블래스터즈’는 고등학교 강당에서 개최된 학생 재능 경연 대회에 참가한다. 핑크색 셔츠에 선글라스. 머리 꼭대기를 잔뜩 힘준 헤어스타일의 밥은 선자세 그대로 피아노를 첬다. 하지만 반응은 정말로 안좋았는데 학생들은 단체로 비웃었고 선생들은 전부 얼굴은 찌푸린 채 끝까지 지켜봤다고 한다.‘더 새도우 블래스터즈’는 그 후 주니어 칼리지 축제에도 출연했지만 그것이 마지막 활동이었다. 하지만 밥 딜런의 재능 경연 대회는 학교를 뒤흔들었고 학생들은 밴드활동을 하는 밥의 또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됬고 교내에서 인기도 오른다. 학창시절 밥 딜런은 굉장히 조용한 학생이었다. 교사 본 롤프슨은 “무척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지만 무척 영리했어요. 아주 점잖았던 걸로 기억해요”라고 당시 딜런을 회상했고 밥에게 사회학을 가르친 찰스 밀러는 “달랐어요. 생각이 있는 아이였죠. 확실히 재능을 보여주었지요. 나중에 ‘Blowin’ in the wind’를 듣고 나니 그 애가 우리 수업에서 사회적 연민을 보인게 기억이 나더군요”라고 말했다.

당시 밥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자연스럽게 ‘팝 스타가 되겠다’는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밥은 일렉트릭 기타를 사서 코드 워크를 연습했다. 부친을 설득해서 핑크색 포드 자동차 컨버터블은 갖게 되었고, 심지어 대형 오토바이 할리 데이비슨(Harley-Davidson)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이때 오토바이로 종종 사고를 일으켰는데 자기 몸에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표정 변화 없이 태연스럽게 그 자리에서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젔다고 한다. 이때 첫 여자 친구가 생기는데 핀란드 이민자 ‘에코 헬스트롬’이라는 금발 미소녀였다. 에코는 가죽자켓에 청바지 차림으로 다녔고 그 시절 소녀로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반항적인 스타일이었다. 사귀자마자 밥은 그녀의 음악 취향을 물어봤고 자신과 라디오를 좋아하고 블루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됬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 중에서는 “주위 사람들이 신기해할 정도로 밥은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여자친구는 에코스타 외에도 존재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노 디렉션 홈 : 밥 딜런’에서 밥은 “사랑 덕분에 내 안의 시인이 눈을 떴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무렵 밥 딜런은 새로운 밴드 ‘더 골든 코드(The Golden Chords)’를 만든다. 드럼과 기타, 그리고 밥 딜런의 피아노로 구성된 트리오였다. 전 밴드였던 더 새도우 블래스터즈 시절보다 한층 더 성장하게 되는데 피아노나 기타로 즉흥연주를 하고 더욱 파워풀하게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했다. 1958년 2월 10일 히빙 고등학교 교장 주최로 교내 집회 당일, 마술과 합창에 이어 더 골든 코드가 등장한다. 밥 딜런은 날뛰면서 피아노를 첬고 노래를 불렀는데 괴성을 지르며 ‘Rock’n Roll Is Here To Stay!!’를 부르다가 피아노를 페달을 너무 세게 밟아 부러진다. 교장인 K.L. 페더슨은 무대 뒤로 달려나가 마이크를 꺼버렸고 밥 딜런은 그걸 알고도 피아노를 쾅쾅 처댔다고 한다. 더 골든 코드는 그 후 몇번에 걸쳐 무대에 오른다. 1958년 3월 1일에는 현지 디스코 자키가 히트곡을 틀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파티에 초대받아 연주를 하게 된다. 밥 딜런 인생 최초 음악을 통해 현금을 쥐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밴드활동은 순조로운듯 보였으나, 밥 딜런 이외의 나머지 두 멤버는 라이브를 해나가면서 엘비스 프레슬리 풍의 대중적인 음악을 원했고 자연스럽게 견해차로 해체한다.

1959년 1월 9일, 학교에서 다시 재능경연대회가 열려 밥 딜런은 다시 무대에 오른다. 이때의 밴드는 예전과는 다른 편성으로 기타, 베이스, 여성 코러스 세 사람과 밥 딜런으로 구성됬다. 밴드 이름은 ‘엘스톤 건[12]과 더 록 바퍼스’였다. 아무런 리허설없이 즉흥으로 연주했고 밴드는 이 날에만 노래하고 끝이었다.

이때 당시 밥 딜런의 새로운 음악 우상이 등장했는데 바로 버디 홀리였다. 딜런은 홀리의 순수하고 아이같은 목소리를 따라하기 시작한다. 딜런의 많은 음반들의 특징적 목소리는 버디 홀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딜런은 1월 31일 덜러스에 공연을 하러온 버디 홀리의 공연을 보기도 했다. 딜런이 그를 본지 사흘후 버디 홀리는 사고로 사망한다.

1959년 6월 밥 딜런은 히빙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결정한다. 졸업 기념 앨범 사진 아래에 첨부된 ‘장래의 꿈’이라는 코멘트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리틀 리차드의 동료가 되는 것”

1959년 9월 밥 딜런은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한다. 밥 딜런은 대학 시절에 대해 ‘마이 라이프 인 어 스톨른 모먼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중에 대학교에 갔었지. 내가 한 번도 가진적 없는 사기같은 스칼라쉽.

과학 수업에 들어갔지만 토끼가 죽는 걸 안보려 해서 낙제점을 맞았지.

영어 수업에서는 영어 교사를 묘사하는 시험지에 욕을 써서 쫓겨났고 커뮤니케이션 수업은 매일 전화로 결석을 알려서 낙제했고 스페인어 수업은 잘했지만 그건 아는거였고.

재미 좀 볼까해서 남학생 회관에서 어슬렁거려봤지. 처음에는 거기서 살아도 된다더니 나중엔 나가달라더군.

사우스 다코타 출신 여자애 둘과 방 두칸짜리 아파트에 들에가서 이틀 밤을 살았지.

다리 건너 14번가에, 햄버거와 농구 트레이닝복과 불독 조각상이 있는 서점 위층으로 살러갔지.

내 배를 무릎으로 걷어찬 배우 여자애한테 홀딱 반했지.

그리고 미시시피 강 동쪽 편으로 가게 되었지.

세븐 코너스 바로 남쪽 워싱턴 에비뉴 브리지 밑 압류된 집에서 친구들 한 열 명하고 같이 살았지.

내 대학 생활은 대략 그게 전부야.

그의 아버지는 “밥은 대학생 무리를 대단찮게 생각했어요. 대부분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죠.”라고 말했다. 한 카운슬러가 회상하는 딜런의 대학생활은 “속은 모르겠고, 밤낮없이 드나들고, 보통 넋이 나가있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밥 딜런은 미네소타 대학교의 인문예술 학과에 입학하긴 했어도, 그로부터 몇 달 안 되어 실제로는 딩키타운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전공은 음악, 부전공은 급진적 생활양식으로 커피하우스의 고급 세미나와 신메이킹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대학원 과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당시 동아리 활동도 했었다

밥 딜런은 바스티유에서 알게 된 여성, 프로 캐스트너로부터 우디 거스리의 음악을 들어본 적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밥 딜런은 그 당시 우디 거스리를 잘 알지 못했다. 프로 캐스트너의 오빠는 우디 거스리의 음반을 가지고 있었고 밥 딜런에게 78회전 SP음반 12장 앞뒤로 수록된 세트를 준다. 이때 밥 딜런은 우디 거스리에게 압도된다. 반면 거스리의 매니아로 변한 밥 딜런을 나무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포크송 레코드 수집가이자 연구자 존 팬캐이크(Jon Pankake)는 “그 상태로 아무리 해봤자 우디 거스리는 될 수 없을걸”이라며 밥 딜런에게 충고하기도 했다.

거스리의 노래를 통해 ‘노래란 삶의 방식을 배우는 것’임을 체감한 밥 딜런은 거스리의 노래에 몰입하면 할수록, 미니애폴리스에서의 생활이 더 이상 머물 가치가 없음을 느꼈고 1960년 12월 밥 딜런은 우디 거스리를 만나러 가겠다고 결심한다. 대학을 그만두고 포크송의 중심지인 뉴욕을 목표로 미니애폴리스를 떠난다. 크리스마스 직전 기타와 슈트케이스 하나만을 달랑 들고 히치하이크로 길을 나선다.

2.2. 1960년대

1961년 1월 밥 딜런은 위스콘신 대학교의 재학생 프레드 언더힐을 알게 된다. 언더힐은 친구인 데이비드 버거와 함께 차를 몰고 뉴욕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자신들과 함께 운전을 해줄 나머지 한 사람을 찾고 있었고 밥 딜런은 이 무리에 합류한다. 1961년 1월 24일 세 사람은 뉴욕 맨해튼의 그리니치 빌리지가에 도착한다. 맥두걸 가(Mavdougal Street) ‘카페 와?(Cafe Wha?)’로 세 사람은 직행한다. 마침 누구든지 무대로 올라와서 공연이 가능한 ‘후트내니의 밤’[13]이어서 밥 딜런은 거기서 몇 곡을 부른다.

그리고 며칠 후 밥 딜런은 우상 우디 거스리와 대면한다. 거스리는 뉴저지 주 모리스타운(Morristown)에 있는 그레이스톤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당시 거스리는 헌팅턴 무도병이라는 희귀병에 걸렸다. 밥은 몇 번에 걸쳐 거스리를 찾아갔다. 주말 동안 외출허가를 받은 거스리가 그의 친구 시드셀의 집에 있을때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에는 거스리의 동료들이 많이 있었는데 피트 시거, 잭 엘리엇등이 거스리의 주변에 모여 거스리의 곡을 불러줬다고 한다. 밥 딜런은 맨해튼으로부터 버스로 한시간 반, 정류소에서 병원까지 약 1km 거리를 걸어갔고 병원에서 밥이 직접 골라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고 거스리에게서 특정 노래를 요청받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날 밥 딜런은 거스리에게서 미발표 노래나 아직 곡조를 붙이지 않는 시가 자택에 있으므로 그것을 사용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코니아일랜드에 있는 거스리의 집을 가지만 이때는 발견을 못했다. 밥 딜런이 우디 거스리의 미발표곡을 부를 일을 그 후에도 없었다. 미발표 작품군은 거스리의 딸 노라에 의해 1998년 빌리 블랙과 윌코가 리코딩해 ‘Mermaid Avenue’라는 앨범을 통해 나온다.

뉴욕에 도착하고 나서 한달정도 지났을 무렵, 밥은 포크로어 센터에서 데이브 반 롱크와 우연히 만난다. 밥의 자서전에 의하면 이때 어떻게하면 게스라이트[14]에서 일할 수 있는지 반 롱크에게 물었다고 한다. 밥이 한 곡을 부르자 반 롱크는 그 날 게스라이트에서 자신이 올라갈 스테이지에 밥 딜런을 깜짝 출연시켜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반 롱크와 밥은 친밀한 선후배 사이가 된다. 반 롱크의 아내 테리가 밥이 출연할 만한 장소를 물색해주는 부킹 매니저 역할을 담당해준 시기도 있었다. 이 당시 밥은 노래, 기타 태크닉, 곡 해석, 편곡 등을 반 롱크로부터 배웠다. 반 롱크에 의하면 밥 딜런은 “직접 가르치려고 들면 불가능하지만, 나중에 보면 어느 사이엔가 자기것으로 만들어버렸다”라고 했다.

밥 딜런은 적극적으로 노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았고 선배 가수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교류가 높아진다. 당시는 재즈의 인기가 시들어지고 포크 가수가 많이 늘어났다. 여러 커피하우스, 라이브하우스에서 매주 누구든 즉석에서 자유롭게 참여 가능한 후트내니가 개최되었다. 그 당시 아마추어 포크가수들은 유창한 코러스나 청아한 노래들을 선보였는데 밥 딜런은 거스리 류의 거친 방식을 취한 특이한 존재였다. 애초에 그 당시 밥 딜런은 “우디 거스리의 족적을 따라 미국 내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다”고 자기소개했다. 이 당시 이질적인 존재였던 딜런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밥 딜런의 애호가들이 점점 생겨난다.

그리니치 빌리지의 유명한 라이브하우스 ‘거디스 포크 시티’에서도 매주 월요일 밤 마이크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됬고 밥 딜런은 자주 그곳에 다니며 노래를 부른다. 반 롱크나 톰 팩스톤, 더 클랜시 브라더스 등 선배거물 가수들이 밥 딜런의 노래를 듣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여러명의 지인들을 얻게 되는데 밥의 인기가 점점 늘어나면서 밥 딜런을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날만이 아니라 포크 시티의 정식 무대에 출연시키자는 여론도 높아진다. 가게 주인인 마이크 포코(Mike Porco)마저도 밥 딜런을 눈여겨 봤고 뉴욕에 도착한지 겨우 2개월만인 1961년 3월, 포코는 밥에게 2주간 출연을 제안한다. 블루스 가수 존 리 후커가 나오기 바로 직전에 무대였다. 그 당시 밥 딜런은 뮤지션 조합에도 등록하지 않은 상태일뿐더러 음주점포 출연용 허가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만 21세도 안 넘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동의서도 필요했다. 그때 가게 주인 포코가 보호자로 나서주며 조합등록비용 46달러까지 부담해줬다.

1961년 4월 11일 밥 딜런은 포크 시티의 무대에 선다. 2주간 무대에 선 까닭에 블루스 가수 존 리 후커와도 친해진다. 이때 불렀던 무대 레퍼토리는 우디 거스리의 곡 외에 반 롱크가 편곡한 ‘House of the Rising Sun’이나 자작곡 ‘Song to Woody’가 포함되어 있었다. 5월 6일에는 코네티컷 주 브랜보드에 열린 인디언 네트 포크 페스티벌에도 출연한다. 같은 달 미나애폴리스로 귀성하고 친구들을 만나며 노래를 부른다. 전 여자친구였던 보니 피처(Bonis Beecher)가 이때의 밥의 노래를 25곡 녹음했다.

그리고 다시 그리니치 빌리지로 돌아와 활동을 하는데 이때 가수만이 아니라 코미디언도 그리니치 빌리지 카페에 출연했는데 빌 코스비, 리처드 브라이어, 우디 앨런, 존 리버스, 레니 브루스, 후에 개명을 한 ‘피터 폴 앤 매리’의 일원으로 유명해진 노엘 폰 스투키 등이 있었다. 밥의 초기 자작곡 ‘Talking Bear Mountain Picnic Massacre Blues’의 바탕이 되었던 신문 기사를 밥에게 건낸 사람도 스투키였다. 또한 스투키는 밥의 능력을 가장 먼저 주목한 사람 중 하나였다.

게스라이트, 포크시티를 거점으로 밥은 적극적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에릭 본 슈미트, 렌 챈들러, 폴 클레이튼, 루크 에스큐, 할 워터즈, 존 윈, 루크 파우스트 등 수많은 재능있는 인사들과 교류를 하게 된다. 그 즈음인 1961년 7월 29일 밥은 어퍼 웨스트 사이드의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진행된 12시간 실황중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방송국 WRVR-FM 주최로 그리니치 빌리디 포크계의 주요 가수들이 차례로 노래하는 기획이었다. 무대를 내려온 밥 딜런은 17세 수지 로톨로[15]와 2년간 사귀게 된다. 수지는 10대 전반부터 각종 항의 운동에 참가한 여성이었고 포크송과 가깝게 지냈다. 이때부터 친구들이나 지원자들 집에서 전전하길 그만두고 처음으로 집을 빌린다. 수지는 밥 딜런에게 많은 영향을 줬는데 예술을 지향한 수지덕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두사람이 만난지 2개월 후, 1961년 9월 29일 밥 딜런의 인생을 바꿀 사건이 일어난다. 뉴욕타임즈지에 포크 시티에서의 밥 딜런의 무대를 절찬하는 평론가 로버트 셸턴 평이 게재된다.

거디스 포크 시티에 포크 음악에 새 얼굴이 출현했다. 비록 겨우 스무살이지만 밥 딜런은 요 몇달 새 맨해튼 카바레에서.연주한 스타일리스트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다.

합창단 소년과 비트족 사이의 어딘가를 떠올리게 하는 딜런씨는 천사같은 얼굴과, 허클베리 핀의 검은 코듀로이 모자로 일부 가려진 대걸레같은 더벅머리를 지녔다. 그의 옷은 어쩌면 재단이 필요할 수도 있지안, 기타나 하모니카, 피아노를 연주하고 새로운 곡들은 기억도 못할 만큼 빨리 작곡하는 그가 터질듯한 재능의 소유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딜런씨의 목소리는 예쁜것과 정반대다. 그는 뒤편 현관에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사색에 빠져 있는 남부 노동자의 거친 아름다움을 의식적으로 포착하려 한다. 모든 외피와 내피들이 그의 음표 위에 남아 있었고, 그의 노래에는 타는 듯한 강렬함이 배어 있다.

(중략)

포크에 대한 딜런 씨의 고도로 개인적인 접근법은 여전히 진화중이다. 그는 스펀지처럼 영향력들을 빨아들여왔다. 이따금 그가 의도하는 극적 효과는 과녁을 벗어나 멜로드라마가 되고, 그의 스타일라이제이션은 도를 넘어 자연스러움을 잃고 위태롭게 기우뚱한다. 그렇지만 모든 이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 해도, 젊음 때문에 더욱 주목할만한 그의 음악 만들기는 독창성과 영감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딜런 씨는 자신의 선조들과 출생지에 관해 모호함은 보이지만, 그가 어디로 왔느냐보다는 어디로 갈 것인가가 더욱 중요하다. 그는 곧장 위로 갈듯하다.

― 밥 딜런. 눈에 띄는 스타일리스트’, 로버트 셸턴

신문에는 모자를 쓰고 타이를 매고 큰 기타를 든 딜런의 러프한 사진이 7센티미터가량의 공간을 차지했다. 이 칼럼을 통해 밥 딜런은 엄청나게 인지도가 상승한다. 그의 후원자였던 음악가들과 밴 로크는 “무척, 무척 좋은 일”이라고 말했고 팻과 톰 클랜시 형제는 “바비는 재능이 많아요. 멀리 갈 자격이 있어요”라고 평했다. 딜런은 금요일 밤 포크시티에 나타났는데 칼럼을 보고 밥 딜런을 보려고 찾아온 엄청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무렵 밥에게 커다란 선물이 찾아온다. 밥의 표현에 따르자면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려 했다”. 로버트 셸턴의 호평 덕분에 컬럼비아 레코드의 거물 프로듀서 존 해먼드(John Hammond)가 밥에게 흥미를 나타낸다. 9월 말 컬럼비아 레코드사 소속의 캐롤린 헤스터의 리코딩에 밥이 하모니카 연주가로 참가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됬고 그때 리코딩 프로듀서가 해먼드였다. 이때 딜런은 평론가 로버트 셸턴에게 이 일을 언급한다.

이 이야기는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는데요. 아까 존 해먼드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나더러 컬럼비아하고 5년짜리 계약을 하재요. 그렇지만 제발, 비밀로 해줘요. 월요일이나 되어야 확실해지거든요. 심지어 내 노래도 안들어보고 서명을 하래요!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요. 셸턴. 컬럼비아의 어떤 윗대가리가 엎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진짜로 미팅이 성사될 것 같아요.

그리고 얼마 뒤 1961년 10월 26일, 밥 딜런은 컬림비아 레코드사와 정식계약을 맺는다.이 때의 소식은 당연히 포크 시티에도 퍼지는데 딜런은 질투를 받기 시작한다. 심지어 그의 뉴욕타임스 평과 그의 컬럼비아 계약 양측에 경악한 미네아폴리스의 포크서클에도 반향이 일었다.

정식 계약 9일 후, 이지 영의 기획으로 카네기 리사이틀 홀에서 밥 딜런은 첫 솔로 콘서트를 개최한다. 이 콘서트 프로그램에 싣기 위해 이지 영은 밥에게 활동 경력, 성장 과정 질문 리스트를 만들어 보냈다. 밥은 그에 대해 이렇게 답변했다.

미네소타 태생으로 뉴멕시코에서 성장. 미시시피에서 거주하다 아이오와, 사우스다코타, 켄자스를 거쳐 열네살때 카니벌 밴드의 피아니스트로 일한 후 시카고의 길거리 가수 그레이라는 사내로부터 블루스를 배웠다.[16]

계약 후 딜런의 데뷔 앨범 ‘Bob Dylan’은 즉시 리코딩을 시작한다. 녹음은 1961년 11월 20일과 22일, 겨우 이틀이었다. 경비는 402달러가 들었다. 가지고 있던 레퍼토리를 바탕으로 직접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 당초부터 상정되어 있었다. 거스리의 곡들은 녹음을 마첬지만 결국 수록되지 못했다. 녹음은 정말로 빨리 끝났지만, 1962년 3월 19일에야 출시한다. 관료주의로 인한 이 긴 기다림은 딜런을 매우 불편하게 했다. 1961년 말 엄청난 모멘텀을 느끼고 있던 딜런에게 그 다섯달 간의 답보 상태는 가혹한 안티클라이맥스였다고 한다. 앨범 커버는 풋내기 청년스러웠지만 노래와 연주는 대담한 연주로 가득했다. 심지어 수지의 사랑에 빠저있을때 였는데도 죽음과 슬픔에 관한 노래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디 거스리의 헌정곡 ‘Song to Woody’도 이 앨범에 들어가있다. 음반은 일부에서는 호평받았지만 반응은 미미했고 이 앨범이 많이 팔리기 시작한것은 밥 딜런이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한 2년이나 지난 후 였다. 컬럼비아 지역에서는 밥 딜런을 “존 해먼드의 실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만큼 밥의 전망을 밝게 본 사람은 소수였다.

데뷔 앨범에 두 곡 밖에 자작곡을 담을 수 없었지만 밥 딜런은 창작열을 불태웠다. 밥 딜런은 프로듀서 헤먼드가 준 로버트 존슨의 1930년대 중반의 음원에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됬다. 밥 딜런은 존슨의 노래를 몰입해서 들었고 가사를 필사하며 그 구조와 내용을 분석했다. 밥 딜런은 존슨이 만든 노래를 통해 정교한 기술과 본능적인 영감의 결합을 발견해낸다.

그때 만약 로버트 존슨을 듣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시들이 내 내면에 갖혀진 채로 였을 것이다.

그것을 문자로 바꿀 수 있는 자유와 용기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라는 표현까지 쓰며 로버트 존슨에게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된다. 밥은 1962년 무대에서 존슨의 ‘Kind Hearted Woman’를 부른다. 비공식적으로 녹음 기록이 있다.

당시 포크송의 주류는 잘 가다듬고, 명확하게 곡의 근거를 제시하고, 새롭게 집어넣은 부분이 어디인가를 듣는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 이었다. 그것과는 크게 상이한 데뷔 앨범을 만든 밥 딜런이 자작곡을 만든다는 소식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된다. 당시 직접 작사, 작곡해서 노래하는 포크 뮤지션은 아직 소수에 불과했다. 기성의 곡들에 독자적인 필치를 가미해서 노래하는 쪽이 주류였다.

1962년 2월 피트 시거의 알마넥 싱어즈 시절 동료였던 아그네스 시스 커닝햄과 그의 남편 고든 프라즌이 포크를 전파하기 위한 잡지 ‘Brodside’를 창간한다. 그 창간호에 반공산주의 단체=존 버치 모임을 비꼰 밥 딜런의 자작곡 ‘Talkin' John Birch Paranoid Blues’의 가사가 게재된다. 처음으로 딜런의 작품이 인쇄물이 실렸던 것이다.

밥은 그 무렵 이미 미시시피 주의 흑인 청년 에멧 루이스 틸 살인사건을 제재로 한 ‘The Death Of Emmett Till’, 클랜시 브라더즈의 멜로디에 가사를 12소절까지 단 ‘Rambling, Gambling Willie’, 냉전 체제에 대한 강박관념을 노래로 만든 ‘Let Me Die in My Footsteps’ 등의 곡들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곡들에는 인종평등회의나 인권운동에 참가했던 여자친구 수지의 영향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1962년 이후 밥 딜런은 자작곡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내가 부르고 싶은 타입의 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자서전에서 언급한다. 1963년 봄에는 수지가 제작 조수로 일한 음악극 ‘Brecht on brecht’를 보고 커트 웨일과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 충격을 받는다. 밥은 그들의 작품을 “가사의 형식이나 운문(Verse)간의 자유로운 관계, 그 음악적인 구조, 효과적인 멜로디 패턴에 관한 상식적인 무시. 그러한 것들이 이 노래를 참신하고 첨단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라고 평했다.

데뷔 앨범의 반응이 신통치않자 1962년 4월 다음 앨범의 리코딩을 위해 밥을 스튜디오를 부른다. 이 시기는 밥 딜런이 Blowin' in the Wind를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이 노래의 멜로디는 ‘No more auction block’을 바탕하고 있다. 밥은 훗날 ‘이 곡에는 흑인 영가와 일맥상통하는 감정이 흐르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특정 사항이나 인물을 제재로 하여 토피컬송 중심으로 작곡하던 밥이 스스로의 심정을 바탕으로 만든 첫 작품이었다. 밥이 개스라이트에서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직후, 1962년 5월 잡지 ‘Brodside’ 제6호에 이 노래의 가사가 게재되었다. 순식간에 워싱턴 스퀘어 파크의 청년 가수들 사이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 노래의 매력을 느낀 포크업계 매니지업 종사자 앨버트 그로스맨은 딜런은 접근하고 설득 끝에 밥은 1962년 8월 매니지멘트 계약을 체결한다.

1963년 3월 Live On TV

프로듀서 해먼드는 두번째 앨범은 데뷔 앨범과는 다른 제작방식을 택했다. 기타를 치면서 단 시간에 녹음하는 것이 아니라 밥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방식이었다. 리코딩은 1962년 4월 24일부터 1963년 4월 24일까지 간헐적으로 8회에 걸쳐 진행됬다. 리코딩 스튜디오에 보조역으로 녹음등에 개별참가하는 세션맨들이 모인것도 세번이나 됬다. 밥이 다른 뮤지션과 어떻게 교류하는지 헤먼드는 지켜봤다. 앨범은 데뷔 앨범과 마찬가지로 기타를 직접 치며 노래하는 곡들을 중심으로 정리되어 ‘The Freewheelin' Bob Dylan’이란 제목으로 1963년 5월 27일 발매된다.

겨울날 그리니치 빌리지를 걷는 수지와 밥의 다정한 사진이 앨범 재킷을 장식한 ‘The Freewheelin' Bob Dylan’ 서서히 화제가 되어 빌보드 앨범 차트 22위를 기록한다. 순위에도 들어가지 않았던 데뷔 앨범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런 가운데 매니지먼트 그로스먼은 히트 싱글 만들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룹 피터 폴 앨 메리에게 밥 딜런의 노래 Blowin' in the Wind을 부르게 한다. 당시 빌보드 차트 1위는 사카모토 큐의 ‘위를 보고 걷자’가 3주 연속 1위에 올랐다. 폴 앨 메리의 ‘Blowin' in the Wind’는 잰 앤 딘의 ‘Surf city’, 스티비 원더의 ‘Devil in Disguise’, 더 서파리스의 ‘wipe out’과 경쟁을 벌이며 1963년 8월 17일자 빌보드 차트에서 2위를 차지한다. 앨범 판매량은 이미 100만장을 넘었다.

딜런의 매니지먼트 그리스먼은 유명한 TV 프로그램인 ‘에느 설리번 쇼’에 1963년 5월 12일 일요일 밤 딜런의 출연 예약을 잡았다. 그 프로그램은 딜런같은 저항과 동일시되는 가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중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최종 리허설때 딜런을 늘 그렇듯 대충 주워입은 차림새로 나왔다. 딜런은 설리번과 티비 프로듀서 앞에서 ‘Talkin' John Birch Paranoid Blues’를 불렀다. 그러나 최종 리허설 직후 CBS 텔레비전 프로그램 편집자인 스토 펠프스가 그 노래는 쓸 수 없다고 통보하고 이 소식을 들은 그로스먼과 딜런은 분개한다. 에드 설리번은 딜런에게 다른 노래를 바꾸겠냐고 묻는다. 딜런은 한바퀴 돈 후 망설임없이 말했다. “그 노래를 못 부르게 하면 아무 노래도 안 부를 겁니다.” 그리고 스튜디오를 쿵쿵 거리고 나갔다고 한다. 언론들은 일제히 CBS를 비난했다. 뉴욕 포스트는 “그건 잘못된 결정이었다.”라고 말했고 해리엇 밴 혼은 “CBS 상층부는 우리 시대의 심각한 도덕적 이슈들에 대해 경직되고 편협한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딜런이 부를 예정이었던 검열당한 노래는 외설도 중상모략도 담고 있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은 점점 커젔고 딜런은 연방통신위원회에 공개 조사를 요구했으나 청문회는 열리지 않았다. 딜런은 실제로 설리번 쇼 파행 이전엔 녹화된 텔레비전 방송엔 출연했지만 그것은 5월 말에야나 가서 방송되었다. 딜런의 첫 텔레비전 경험은 12월 BBC였다. 그 다음번 출연은 뉴욕 WBRW방송사 자유의 노래 쇼였다. 그 후 수 많은 텔레비전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다 거절했다. 딜런은 오로지 최적의 조건에서의 올바른 쇼를 원했다.

1963년 5월 18일, 밥 딜런은 캘리포니아의 몬트레이에서 열린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하여 조안 바에즈와 처음으로 공연한다. 다음 달인 6월 피트 시거 등과 함께 미시시피 주 그린우드에서 개최된 ‘전미 학생 비폭력 조정위원회’가 주최하는 ‘선거인등록 집회’에 출연한다. 공민권 운동의 최전선이었던 남부에서의 첫 공연이었다. 밥 딜런은 거기서 경관의 감시, 백인 집단의 압력 속에서 이유 없이 살인의 희생자가 된 메드거 에버스를 그린 ‘Only a Pawn in Their Game’을 부른다. 같은달 26일부터 28일에 걸쳐 개최된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도 밥을 출연한다. 그 페스티벌에는 바에즈도 출연했다. 수지도 밥과 동행했지만 바에즈가 “이것은 옛날에 끝난 연애를 노래한 곡입니다”라고 코멘트를 한 뒤 밥 딜런의 노래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을 부르기 시작하자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울음을 터뜨리며 회장을 뛰쳐나갔다. 밥은 그 여름 내내 바에즈의 전미 투어에도 동행했다. 그 무렵 The Freewheelin' Bob Dylan의 판매량도 호조를 누리며 밥 딜런은 미국 전역에 걸쳐 주목 받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1963년 워싱턴 대행진에 참가한 밥 딜런과 조안 바에즈

1963년 8월 28일 밥은 바에즈와 함께 워싱턴 대행진에 참가한다. 정치집회, 데모에 참가하는 일은 전혀없었던 밥 딜런에게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집회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I Have a dream” 연설로 유명한 그 집회다. 밥은 바에즈와 함께 ‘Only a Pawn in Their Game’, ‘Blowin' in the Wind’을 부른다. 이때는 텔레비전으로 중계되기도 해서 밥 딜런의 인지도를 대폭 증가 시켰고 밥 딜런이 사회적, 정치적 제언을 노래로 만드는 리더인 것처럼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다.

10월 밥 딜런은 ‘뉴스위크’의 기자 안드레아 스베드베리(Andrea Svedberg’의 취재를 받는다. 밥 딜런 측은 앨범의 프로모션으로 취재에 응했으나 스베드베리는 밥 딜런이 애매하게 감췄던 출신지나 가족에 대해 폭로하는 취재를 진행했고 노골적으로 딜런을 궁지로 몰아넣어서 오만하게 인터뷰에 임했다. 험악한 인터뷰는 악의적인 기사로 이어젔고 밥 딜런은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지조없이 날조한 미네소타 중산층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부모님과 동생과 몇년과 인터뷰를 끊었고 매니지먼트 그리스먼은 언론에 대한 편집증적인 불신도 커젔다. 또한 뉴스위크도 오명을 입었고 음악가와 미디어의 고문같은 관계의 시대가 이때부터 형성됬다. 이 사건은 밥에 대한 주목도가 얼마나 높아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밥은 스베드버리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세번째 앨범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의 안쪽 재킷과 앨범을 싼 종이에 장편시 ‘11개의 개설의 의한 묘비명’을 실었다. 그 안에서 밥은 ‘진실을 제대로 답변할 수 없다는 소문이 돌아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협박 비슷한 대화를 적어 넣은 뒤, ‘당신은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멸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변덕스러움에는 타협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한다. 이 사건은 밥 딜런이 매스컴에 대한 불신이 증폭되는 발단이 된다.

앨범이 대성공하며 세상의 추세에 의해 밥 딜런은 사회파 포크 싱어송라이터의 리더격이 되었다. 1년전과의 취급이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밥 딜런은 자신의 음악을 받아들여주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에 기뻐했다. 그러나 사회운동에 대한 참가를 촉진하기 위한 노래가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사회적인 사건, 부정이나 차별에 관한 갑론을박이나 온갖 인간들의 군상, 인간들의 부조리한 행동이나 사고를 노래의 소재로 삼는 일은 있었지만 이미 밥 딜런은 개별적인 사항을 직접 전달하는 노래를 만들어내는 일에는 멀어져 가고 있었다.

세번째 앨범 ’The Times They Are a-Changin'는 1963년 8월과 10월, 총 6회의 리코딩을 통해 23곡이 완성되었다. 이번에도 모두 밥의 기타와 보컬과 하모니카만으로 이루어졌다. 프로듀서는 전작의 마지막 세션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톰 윌슨[17]이 역임했다. 존경하는 우디 거스리의 앨범 ‘Woody Guthrie Sings Folk Songs’을 모방한 재킷 사진이었고 전작이나 데뷔앨범과는 다른 심각하고 침울한 표정이었다. 이 앨범은 자신의 이전 작품들을 한참 앞지르는 시사가요들을 선보였다. ‘해티 캐롤’, ‘온리 어 폰’, ‘홀리스 브라운’은 뉴스 기사들에 자극 받아 쓴 노래들이었지만, 자신감으로 넘첬던 딜런은 더 큰 비전과 더 큰 보편성으로 좀 더 복잡한 이야기들을 가득 채웠다. 현재는 높은 평가를 바는 앨범이지만 발매 당시 평가가 엇갈렸다.

1963년 10월 26일 카네기 홀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고 장내는 만원이었다. 밥은 부모님들을 초대했고 콘서트의 청중들은 이미 포크 애호가 이외에도 많은사람들로 폭이 넓어젔다. 콘서트가 끝나고 분장실은 밥을 보기위해 밀려든 사람들로 가득 찼고 밥이 탄 차의 지붕이나 유리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높아진 인기와 사회적 영향력으로 긴급시민자유회의(ECLC)는 ‘시민의 자유 획득을 위한 투쟁에 혁혁한 공헌이 인정된 인물’로 1963년도 토머스 페인 상을 수여한다. 이때 당시 밥 딜런은 너무 긴장해서 술을 너무 마셨고 술에 취한채로 수상 연설을 한다.

머리카락이 부족한 노인들은 길을 양보해야 합니다. 나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머리카락이 없습니다. 무척 불쾌합니다. 검은색도 흰색도 오른쪽도 왼쪽도 없습니다. 위도 아래도, 아래는 땅과 거의 맞닿을 정도로 수렁입니다. 정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기어올라 보려고 합니다. 나는 좌익의 수하가 아니며 혼자 서고 혼자 걷는 음유시인입니다. 묘기를 부리는 바다표범이 아니란 말입니다.

장내는 소란스러워젔고 많은 참가자들이 밥 딜런에게 분노하다. 애당초 밥에게는 스스로 사회파, 활동가라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급시민자유회의 사람들은 밥을 사회파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상을 수여했다. 연배의 활동가들은 노골적으로 밥을 젊은 세대의 대변인으로 활동 하는 것을 기대했고 그것은 밥의 노래가 구세대 좌익들에게 평가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밥 딜런은 긴급시민자유회의에 상을 거부하지도 않고 면전에 모욕을 주었다.

바에즈와 동행했던 1963년 여름부터 가을까지의 콘서트 투어 도중, 바에즈 자택에 체재했을때에 하루종일 무엇을 쓰는것에 열중했고 이때 장편의 산문들을 썼는데 훗날 출판되는 밥 딜런의 첫 소설 ‘타란튤라’의 바탕이 됬다는 설도 있다. 백인에 의한 흑인에 차별을 묘사한 ‘The Lonesome Death of Hattie Carroll’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정갈하고 억제를 통해 시적 정취가 넘치는 작풍을 쓰기 시작한다.

미국 내 각지를 순회 공연이 끝나고 뉴욕을 돌아오고 수지 로톨로와 완전히 이별한다. 이때의 상심이 그 후 노래에도 반영된다. 1964년 5월 7일에는 런던으로 발길을 재촉하여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개최된 콘서트를 성공시켰다. 영국에서도 밥 딜런 붐이 일어나는데 1집 ‘Bob Dylan’, 2집 ‘The Freewheelin’ Bob Dylan’도 영국에서 좋은 평을 얻어 높은 판매량을 기록한다. 이 런던 체재 중 밥 딜런은 존 레논에게서 “콘서트에 가고 싶었다”는 전보를 받았다고 한다.

이 영국 투어 직후 1964년 6월 9일 밤, 6시간 만에 4번째 앨범 전곡을 순식간에 녹음한다. 앨범명은 ‘Another Side of Bob Dylan’. 이 앨범에는 그 동안 밥 딜런이 지금까지 사회적인 이슈를 담은 노래가 한 곡도 없다. 러브송, 특히 여성과의 관계에 대해 부른 작품도 적지 않았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블루스, 토킹 블루스를 과거에는 없던 난폭한 스타일로 불렀다. ‘Ballad in plain d’는 수지와의 결별을 은유가 아닌 노골적으로 노래한 노래다. 가벼운 노래는 적으나 여태까지의 이상으로 친근한 멜로디를 가진 곡들이 많다. 이 앨범을 듣고 여태까지 밥 딜런을 ‘저항가수’로만 인식한 일부 포크팬들은 ‘밥 딜런이 과거를 부정해버렸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앨범은 1964년 8월 8일 발매한다. 이 때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참여하는데 밥은 “사회는 경고를 필요로 하고 그것을 발하는 것은 젊은이였습니다. 세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밥 딜런’입니다. 라는 소개를 받으며 올라간다. 노래는 ‘Another Side of Bob Dylan’의 수록곡 위주를 부르게 되는데 무대의 평은 좋지 않았다. 기존과는 매우 다른 앨범으로 포크 평론가들도 당황하게 한다. 이 해 여름에는 밥 딜런의 인생의 중요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컨트리 음악의 거장 조니 캐쉬, 당대 최고의 밴드 비틀즈였다. 참고로 비틀즈는 ‘The Freewheelin' Bob Dylan’을 듣고 딜런의 팬이 되었다.

‘Another Side of Bob Dylan’의 리코딩으로부터 반년 후 1965년 1월 중순, 다음 앨범용 리콘딩 세션이 진행된다. 이번엔 직접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른게 아니라 스튜디오에 드럼, 베이스, 기타, 키보드의 실력자들을 모았다. 이때 밥 딜런은 매일같이 완성되는 곡들을 빨리 녹음하고 싶어서 견딜수 없었는데 곡조, 머리속에서 분출되는 언어들의 비트가 자기 혼자 기타나 피아노를 치면서 만들어내는 사운드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노 디렉션 홈: 밥 딜런’안에서 밥은 이 무렵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혼자 해나갈 생각은 없었다. 소규모 밴드가 있는 편이 노래의 힘을 보다 잘 끌에낼 수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일렉트릭으로 연주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꼭 현대풍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무렵 옛날 타입의 음악이라 생각되던 컨트릭 뮤직도 일렉트릭 계통의 악기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에 들어간 딜런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에 반응한 연주를 참가자 전원이 그 자리에서 계속 만들어간다. 사전 설명이 아주 조금 있었을뿐이었다. 곡조에 대한 밥 딜런의 희망사항도 적었다. 처음 시작할때 카운트를 세지 않는 곡들도 있었는데 밥이 기타를 두 소절이나 네 소절 치며 모두 황급히 그에 맞춰간다는 식이 대부분이었다. 제각각 밥의 음악을 듣고 자신만의 연주를 보여줬다. 참가자 중 한사람이었던 브루스 랭호른은 그때를 “마치 텔레파시가 통하는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런 형식의 음악은 팝 업계에서도, 포크 세계어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밥 딜런이 본능을 통해 방출한 음악은 겉으로 보이는 장르를 파괴했다. 직접 기타를 치면서 부르는 두곡을 포함한 전 11곡이 오버 더빙 편집도 없이 한 장의 앨범에 수록된다.

앨범 제목은 ‘Bringing It All Back Home’. 1965년 3월 22일 발매된다. 이 앨범은 빌보드 차트 6위, UK차트 1위를 기록하며 대히트를 친다. 그로부터 약 3주후 밴드 버즈가 밥 싱글 ‘Mr, Tambourin Man’을 커버한다. 이 노래는 1966년 6월 26일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한다.

앨범 발매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65년 6월 15일, 밥 딜런은 새 앨범을 작업하기 위해 리코딩 세션을 개시한다. 드럼에는 바비 그레그, 베이스에 러스 새버커스, 피아노와 오르간의 폴 크리핀, 그리고 기타에 마이클 블룸필드가 참가한다. 15일에는 세 곡을 시험 삼아 연주했다. 그중에 ‘라밤바(La Bamaba’같은 코드 진행의 왈츠 곡도 있었다. 이 날은 어렴풋한 형태에서 그 원형 같은 것이 완성되려던 참이었다. 다음날인 16일 밥은 그 곡에만 집중한다. 충동적으로 내뱉는 것처럼 가사를 적었더니 노트 20페이지 분량의 긴 이야기가 가사로 만들어졌고 그것을 곡으로 완성시킨다고 말한다. 이 노래는 바로 역사상 최고의 노래중 하나라고 평가받는 ‘Like a Rolling Stone’이다.

밥은 이 노래를 싱글 음반으로 발매할 것을, 리코딩이 완료되는 순간 희망했다. 그러나 컬럼비아 레코드는 난색을 표했는데 이유는 6분은 너무 길다고 영업부, 홍보부가 모두 반대했다.[18] 컬럼비아 측은 ‘뭘 노래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니 다시 녹음해’라고 요구한다.

결국 발매가 보류되는데 이 곡의 테스트 음반은 오피스 서랍에 한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던 것이 얼마 후 사무실이 이사를 가게 되자 신곡의 악보 담당 코디네이터 컨시다인은 우연히 다시 그 음반을 발견한다. 그는 그 음반을 뉴욕의 인기 디스코 ‘아더스’에 가지고 가서 DJ에게 부탁해 시험 삼아 틀어보라고 한다. 손님들은 그 노래를 춤을 추기 시작했고 그 날 밤 이 노래는 몇번이나 리퀘스트를 받는다. 그 DJ와 그 가게에 있던 라디오 방송국 디렉터가 다음날 컬럼비아 레코드에게 ‘Like a Rolling Stone’을 달라고 요청한다. 결국 1965년 7월 20일 긴급 발매가 결정된다. 선전 문구는 “6분짜리 싱글이라고? 아무렴 어때 밥 딜런을 6분동안이나 들을 수 있는걸”이었다. 이 곡은 비틀즈의 ‘Help!’와 같이 빌보드 차트를 진입하고 1965년 9월 빌보드 차트 2위를 기록한다.

1965년 7월 25일, Like a Rolling Stone을 처음으로 공개한 공개적인 석상인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연주하고 발표한다. 전날인 7월 24일 앨런 로맥스가 주최자였던 블루스 워크숍에 밥의 친구 마이클 블룸필드가 소속되어 있는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가 출연했다. 그때 로맥스는 그들을 “중산 계급 출신 백인 애송이들의 블루스 밴드로 수상쩍은 자들이니 조심하도록”이라며 소개했고 이에 대해 밴드의 매니저 담당을 맡기로 했던 밥의 매니저 그로스맨은 격노한다. 이 광경을 본 밥 딜런은 다음 날 갑자기 무대를 블룸필드를 중심으로 일렉트릭 세트로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평론가들은 비아냥거렸던 로맥스의 대응에 밥 딜런은 포크 교조주의자에 대한 혐오가 용솟음친 날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어쿠스틱 연주를 기대했던 관객들은 그야말로 경악을 한다. 그 당시 포크 팬들은 포크가수란 포크 부흥의 정신과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밥의 행동을 배신으로 간주했다. 물론 밥을 호응하는 관객들도 있었는데 당시 객석을 바라보고 있던 동료 뮤지션 마리아 물다우르는 “관객들은 3분의 1정도가 야유를 보냈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무대 뒤에서는 “이건 포크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파와 “이것이 젊은이들이 바라는 것이니 변화를 받아들여라”라고 주장하는 파가 격론을 벌였고 밥 딜런은 당시 객석으로부터 “이래도 니가 동료냐!”라는 비난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밥 딜런은 “그때의 반응은 연주했던 곡이나 귀에 들리고 있던 곡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뉴포트 패스티벌 4일 후, 밥은 새로운 앨범을 위한 리코딩을 재개한다. 프로듀서는 밥 존스톤으로 바뀐다. 그중에는 객석에 비난에 응하여 “나를 동료라고 부르다니,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라고 노래하며 보수적인 포크계를 강하게 비판한 “Positively 4th Street’란 곡도 있었다. 리코딩은 8월 4일까지 계속됬고 월말에 앨범을 발표한다. 앨범명은 ‘Highway 61 Revisited’. 마이클 블룸필드가 활약했고 로큰롤과 블루스가 약동하는, 가사도 연주도 공격적인 앨범이었다. 전작보다 더 명료한 앙상블 사운드를 가져서, 개별 악기들과 그 위의 목소리가 더욱 명료했다. 앨범은 극찬을 받았고 밥 딜런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높아진 인기로 인해 밥 딜런이 본인 커리어 최장/최대 투어를 개최한다. 1965년 9월부터 1966년 3월까지 미국과 캐나다를 순회하며 도합 50회 무대를 소화한다. 무대는 전반이 밥의 솔로, 후반이 밴드 주도의 일렉트릭 세트라는 구성이었다. 투어 자체는 밥의 희망이었지만 2부 구성은 매니저 그로스맨의 제안이었다. 투어에 앞서 준비를 겸해 8월 28일에는 뉴욕 포레스트힐 테니스 스타디움, 9월 3일에는 로스엔젤레스 할리우드 볼에서 콘서트를 개최한다. 콘서트는 매진됬으나 포레스트힐에서는 야유가 극심했고 반대로 로스엔젤레스에서는 열광적인 성원을 얻었다고 한다. 밥은 장기 투어를 뒷바침해줄 밴드를 찾고 있었고 더 호크스로 낙점했고 이 투어는 ‘더 밴드’[19]와의 인연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이 투어 도중 아주 잠깐 동안의 휴일인 1965년 11월 22일,밥 딜런은 사라 로운즈와 극비리에 결혼식을 올린다. 식에 참석한 사람은 매니저 그로스맨과 사라의 가정부뿐이었다. 다음 해 1월 6일에는 두 사람 사이의 첫 아이 제스 바이런 딜런이 태어난다.

투어가 장기간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밥은 이동하는 사이에 시간을 만들어 그룹 더 호크스와 다음 싱글이나 앨범용 리코딩을 착수한다. 장소는 주로 뉴욕이었지만 로스엔젤레스에서도 시도되었다. 프로듀서 밥 존스톤은 자신의 고향 내슈빌에서 녹음을 해보자고 제안했지만 밥 딜런은 뉴욕을 염두했기에 거절했다. 그런 상황에서 1966년 2월 중순, 밥과 더 호크스가 남부에서 투어를 돌 예정임을 알게 된 존스톤은 찬스라는 생각과 함께 찰리 맥코이, 케네스 버트레이, 헨리 스체렉키, 웨인 모스, 허거스 피스 로빈슨, 제리 게네디, 조 사우스 등 내슈빌의 내노라하는 세션맨들을 불러모았다. 4일간 다섯 곡이 녹음되었다. 곡을 만드는 작업은 밥이 스튜디오에 들어오고 나서 시작됬고 밥이 곡을 다 쓸때까지 뮤지션들은 트럼프를 치며 기다리고 한 곡을 다 쓰면 녹음을 한다. 녹음이 끝나면 뮤지션들은 다시 트럼프를 하고 밥은 다시 곡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밥이 곡을 완성하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뮤지션에게 들려주고 일부만을 파악한 채 녹음에 들어간다. 연주는 밥의 손짓이나 호흡을 보면서 진행됬고 딜런은 뮤지션의 즉흥성을 중시했다. 앨범은 첫 주요 록 사이클을 완성하는 대표적 콜렉션이었다. 그때까지 딜런의 음반 중 스튜디오 시간이 가장 많이 걸린 음반이기도 했다. 예비 작업은 1965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시작되었고, 간헐적으로 겨울 내내 이어졌다. 음반에는 뚜렷한 사운드가 있었는데, 이것은 후에 앨범인 ‘Street-Legal’에서 그것을 재창조하려 했다. 그는 그것을 “그 가느다란, 그 거친 수은 사운드”로 묘사했다. 앨범의 제목은 ‘Blonde on Blonde, 1966년 5월 16일 발매된다. 이 앨범 역시 극찬을 받았다. 팝으로서의 유연함과 번뜩이는 영감에 가득 찬 서정성이 서로 즉흥적으로 혼합되 있고 포크, 컨트리, 블루스, R&B, 그 중 뭔가 하나의 장르 속에 가둬두려고 하면 뭔가가 결정적으로 넘쳐 나오는 신선한 작품이었다. 당시의 유행과는 전혀 떨어지는 작품이기도 했다. 이 앨범은 밥 딜런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싱글 ‘Rainy Day Women ♯12 & 35’은 발매로부터 1개월 후 빌보드 차트 2위를 기록한다. 앨범 판매량도 호조를 보였고 2매 1세트의 LP로서는 경이적인 성적이었다.

이 당시 밥 딜런과 더 호크스는 영국에서 투어중이었는데 3월 말 북미 투어를 마친 후 4월 9일 호놀룰루를 시작으로 5월 27일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스웨덴, 덴마크, 아일랜드, 프랑스, 영국 등에서 총 24회에 공연을 한다. 9개월의 투어가 끝나고 밥은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언급한다.

”어느 순간부터 나에 대해 어떤 왜곡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음악 이외의 사람들이었다. 나를 ‘시대의 대변인’이라든가 ‘무슨 무슨 양심’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생겨났다. 무슨 말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해가 안 되었다. 노래를 위해서라면 어떤 라벨이 붙여져도 상관없다. 하지만 공격을 받고 질문공세를 당하고 그에 대해 답변해야만 하는 상황이 너무 싫어졌다.”

당시 밥 딜런의 영국 투어를 중심으로 촬영해왔던 필름 ‘Eat the Document’란 제목으로 텔레비전 방영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밥 딜런 자신이 필름 편집에 달려들었기 때문에 계획 자체가 좌절될뻔 했다 그 무렵 밥 딜런이 처음으로 쓴 소설 ‘타란튤라’도 출판 계획이 틀어졌다. 내용이 난해했고 교정 작업 중 느닷없이 밥이 전면 교정을 제안한다. 출판사 맥밀란은 1966년 8월 말 발매를 앞두고 프로모션 계획까지 진행하던 상황이었다. 이미 “TARANTULA, Bob Dylan?”이라고 적힌 쇼핑백이 1만개 팔린 상태였다. 맥밀란은 밥에게 개정 작업을 2주 이내로 완료해달라고 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후술할 사고까지 겹치며 타란튤라는 6년 뒤인 1971년 5월 간행된다. 이때 차기 투어까지 진행하게 되는데 1966년 8월부터 미 대륙 전역을 순회하며 연주하는 투어였다. 도합 총 64회였다.

그러나 1966년 7월 27일, 그날 밥 딜런은 이전부터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 트라이엄프 500을 타고 뉴욕 교외의 베어스빌에 있는 메니저 그로스맨 저택을 출발했다. 오토바이를 수리해달라고 가져다 주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갑자기 전도된 밥은 오토바이로부터 튕겨져 나왔다. 뒤따라오던 아내 사라가 밥을 싣고 병원으로 간다. 이 사고에 대한 언론들이 추측은 멈출 줄을 몰랐다. “밥 딜런 중태”, “의식불명”, “목 골절로 위독, 재기불능?” 온갖 찌라시들이 설첬고 한참 지나 척주 몇 대에 금이 갔다는 사실이 전해젔고 무기한 활동 정지를 발표한다. 투어도 출판도 영화 방영, 신작 녹음까지 백지로 돌아갔다. “그 상태로 계속 내달렸다면 얼마 안가 죽었겠지”라고 당시를 되돌아보며 밥은 말했다. 목에 기브스를 하고 초음파 치료를 받거나 등의 통증을 호소하며 수영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 1966년 10월 컬럼비아 레코드사는 내년 3월까지 밥의 활동은 없다고 발표한다. 이 당시 요양 중이던 밥을 방문한 것은 긴즈버그나 펜베이커 등 극소수의 친구들이었다.

사고로부터 몇 개월 후 더 호크스 구성원들과 밥 딜런은 1967년 2월부터 그 해 가을에 걸쳐 밥은 30여 곡을 만들었다. 6월부터는 당시 호크스와 모였던 빅 핑크 지하실에서 2트랙 테이프 레코더가 들어와 녹음할 수 있게 된다. 녹음은 빅 핑크에서 만이 아니라 밥의 자택, 공통의 친구 클래런스 슈미트의 집에서도 진행된다. 녹음한 총 테이크 수만 150개라고 전해진다. 민간 전승곡이 가진 가사의 신비스로움에 주목한 곡도 포함된다. 특히 빅 펑크 지하실을 중심으로 한 녹음들 중에서 24곡이 선택되어 1975년 6월에 The Basement Tapes가 정식으로 발매된다. 이전까지 유출된 해적판으로 돌아다녔다. 앨범은 다양성, 활력, 풍부함 그리고 시기에 구애받지 않은 적절함으로 최고의 평을 얻었다. 빌리지 보이스의 간판 평론가 로버트 크리스타구는 “1975년 최고의 음반, 1967년에 나왔어도 그 해 최고의 음반”, 워싱턴포스트는 “딜런은 현대 미국 팝 음악이 낳은 단 한 사람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인정받아야 한다.”라고 평했다.

당시 1967년 여름은 베트남 전쟁으로 다양한 뮤지션들이 목소리를 높이던 시기였고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같은 아티스트들이 등장했고 히피사이키델릭이 영향력을 보이는 시기였다. 영국에서는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전세계 음악씬의 충격을 줬고 핑크 플로이드, 롤링 스톤스가 등장하며 음악씬이 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딜런은 그 변화와는 전혀 무관한 은둔적인 생활을 보냈다. 그 심정을 ‘자서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실은 오로지 경쟁뿐인 사회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아이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삶이 변했고 나는 주위 사람들이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부터 멀리 벗어났다.”

”내가 해야 할 일우 자신의 사고방식을 조정하고 타인의 책망하는 것을 중단하는 일이었다. 자신을 단련하여 성장하며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했다. 매스컴은 자신들이 내린 판단을 간단하게는 취하할 수 없었고 나는 그 상태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내 손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갈아엎어 사람들의 나에 대한 인식을 고쳐나가야 했다.”

밥이 은둔해 있을 동안 컬럼비아 레코드사는 1967년 3월 밥 딜런의 유명한 10곡을 골라 베스트 앨범 ‘Bob Dylan's Greatest Hits’를 발매한다. 이 앨범은 예상밖의 대히트를 거두며 밥 딜런 최고 판매량 앨범이 된다. 밥은 1967년 7월 컬럼비아 레코드사와 재계약을 체결한다. 컬럼비아는 최고 대우하기로 약속했고 밥은 새로 녹음하는 형태로 4장의 앨범 제작이 의무 사항이었다.

밥 딜런은 재계약 후 첫 작품, 1967년 12월 27일 발매된 ‘John Wesley Harding’을 발매한다. 당시 현란한 사운드를 구사하는 유행과는 정 반대의 작품이었다. 녹음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밥 존스톤이 프로듀서를 맡았고 내슈빌에서 진행된다. 밥이 기타와 하모니카, 반주는 찰리 맥코이가 베이스, 케네스 버트레이가 드럼을 담당했다. 수록곡 모두가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9시간만에 녹음을 완료했다. Blonde on Blonde로 내슈빌의 분위기에 친숙해졌고 담담한 노랫소리와 환희가 엷고 넓게 베어저있는 앨범이었다. 딜런은 이 앨범에서 멜로디 라인과 꼭 필요한 반주로만 이어진 포크-컨트리의 단순성을 지향했다. 이 앨범 역시 평단에 극찬을 받고 히트를 친다. 홍보를 하지 않았는데도 첫 주에만 25만장을 기록했다. 혹자는 이 앨범을 “최초의 성경적 록 음반”이라고 부른기도 한다.

1968년 1월 20일 사고 후 처음으로 공식무대에 선다. 그 전년도인 1967년 10월 3일 사망한 자신의 우상 우디 거스리를 추도하는 콘서트였다. 컨트리풍 정장을 입고 더 호크스에서 더 밴드로 이름을 바꾼 그룹과 함께 거스리의 작품 세 곡을 노래한다. 공연 마지막에 출연자 전원이 함께 부른 합창곡에도 참여한다. 같은 해 6월 5일, 아버지 에이브러햄이 타계한다. 장례식에 참석하기위해 오랜만에 귀향한다. 같은 달 아들 사무엘이 태어난다. 그 전년도에 딸 안나가 태어났고 밥은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

1969년 4월 9일 세번째로 내슈빌에서 녹음한 앨범 ‘Nashville Skyline’을 발표한다. 앨범 재킷 사진에는 밥이 웃고있는 사진을 썼는데 이 사진 자체는 램블링 잭 엘리엇의 앨범에 대한 패러디다. 앨범은 대중적이고 목가적인 곡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앨범을 듣고 딜런의 팬들은 놀라게 되는데 밥이 전혀 다른 목소리인 거칠고 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앨범으로 ‘컨트리 음악의 딜런’으로 이미지 변신을 성공하며 앨범도 성공을 거둔다. 이 앨범은 컨트리의 거장 조니 캐쉬와 듀엣을 한 ‘Girl from the North Country’도 수록되어 있다. 밥과 캐쉬는 그 후 듀엣 앨범까지 녹음하려 했으나 무산된다. 이 당시 ‘조니 캐쉬 쇼’도 출연한다. 1969년 9월 20일 멜로디 메이커가 조사한 국제 팝 설문조사 결과 딜런은 국제적 남성 가수 1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1969년 4월부터는 새로운 앨범을 작업하게 된다. 이 앨범은 오리지널 노래뿐만이 아니라 커버곡도 녹음하게 되는데 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앨범이 바로 ‘Self Portrait’이다. 밥 딜런은 계속해서 본인의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이 당시 밥은 “생각이 난 것은 뭐든지 벽에 내동댕이치고, 벽에 들러붙은 것을 모두 발표한다. 벽에 들러붙지 않았던 것들을 다 긁어모아 그것 역시 모두 발표한다”라는 생각하고 ‘Self Portrait’를 발표한다. 나아가 이 앨범은 밥이 여태까지 들어왔던 20세기 전반의 포크송, 블루스, 그것들에 동시대에 청취하고 연주되던 촌스러운 컨트리 송, 가스펠 등을 다시금 학습하여 체득한 옛날 음악에 대한 흥미와 이해가 투영됬다. ‘Self Portrait’는 은둔 생활 후의 성과라는 측면이 있었고 ‘Self Portrait(자화상)=최근 3년간의 나의 흥미’인 메시지도 있었다. 1970년 6월 8일 ‘Self Portrait’는 발매되자마자 각 매체의 혹평을 받았다. 더 이상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밥의 마음을 평론가들은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 평론에는 이해할 필요조차 없다라고 억지식으로 논평하는 평론가도 있었다. 그러나 앨범 판매량은 호조를 기록했고 미국, 영국 모두 정상을 차지한다.

2.3. 1970년대

1970년 5월 상순부터 뉴욕에서 리코딩이 재개된다. 프로듀서 존스톤은 ‘Self Portrait’에서의 세션에 좋은 느낌을 감지했고 새로운 앨범에서도 같은 세션을 쓴다. 새롭게 만든 곡들과 맥클리시 희곡용으로 쓴 곡들 중 몇 곡을 리코딩한다. 알 쿠퍼, 데이비드 브롬버그, 찰리 대니일스, 거기에 밥 딜런이라는 심플한 편성이었다. 그런 시기에 비틀즈 멤버 조지 해리슨이 밥 딜런을 방문한다.[20] 밥 딜런은 해리슨이 가세한 세션도 녹음하고 앨범을 만들어가면서 전체상을 찾아간다.[21] 1970년 10월 21일 ‘New Moring’이라는 제목으로 앨범을 발매한다. 목소리는 다시 ‘John Wesley Harding’ 시절로 돌아왔다. 앨범은 블루스, 컨트리, 가스펠, 재즈 포엣 등 다양한 종류를 담아냈다. 오랜만에 밥의 시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밥의 팬들은 절찬한다. 감성적이고 활기가 결여됬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었으나 과거의 밥이 돌아왔다며 절찬하는 평가가 다수였다. 밥은 양쪽 모두 좋은 징조라고 받아들이며 “이 앨범이 미국을 얽매고 있는 것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며, 현 상태를 위협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은 분명했다.”라고 말한다. 판매량은 역시 호조를 보였고 UK차트에서 1위를 기록한다. 밥은 이 때 열린 우드스톡 음악 예술 축제, 알타몬트 무료 콘서트, 그 어떤 반전 록 이벤트에도, 참가는 커녕 구경도 안간다. 자연스럽게 이 시점부터 밥을 둘러싼 미디어의 기만과 선동도 사라진다. 1970년 4월 매시저 그로스맨과의 매니지먼트 계약이 만료되고 밥은 계약을 갱신하지 않는다. 음악 출판 업무, 매니지먼트 관리는 밥 딜런의 스태프가 인계받는다.

싱글 ‘Watching the River Flow’가 발매된 지 2개월 정도 후인 1971년 8월 1일 밥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조지 해리슨이 개최한 방글라데시 구제 콘서트에 출연한다. 무려 2년만에 오르는 무대였고 인도적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자선 공연이었다. 여기에서 리언 러셀의 베이스, 조지의 기타, 링고 스타의 탬버린이라는 반주와 함께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로 다섯 곡을 불렀다. 밥은 하모니카 홀더를 늘어뜨리고 데님으로 된 자켓을 입고 있었다.

1971년 11월에는 1960년대 후반의 대표곡들과 새로운 녹음, 신곡 등을 포함한 6개의 앨범 미수록곡도 수록한 두 장 세트의 LP ‘Bob Dylan's Greatest Hits Vol. II’가 발표된다. 앨범 재킨은 방글라데시 콘서트 때의 밥의 사진이 사용된다. ‘Tommorow is a long time’도 수록되는데 이 곡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커버한 유일한 밥 딜런의 노래다. 앨범은 전작 베스트앨범과 마찬가지로 대히트한다. 같은 해 또 다시 가스펠 풍의 저항 싱글을 발표한다. 캘리포니아 주 샌퀀튼 교도소에서 일어나 죄수 살해 사건을 테마로 한 ‘George Jackson’이란 곡이었다. 섣달 그믐날 더 밴드의 새해맞이 라이브에 게스트로도 출연해 파워풀한 라이브를 선보이긴도 한다. 이때의 모습은 더 밴드의 ‘Rock of Ages’의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되어 있다.

1972년에는 앨런 긴즈버그의 세션에 참가하기도 하고 엘비스 프레슬리나 더 그레이트풀 데드의 콘서트를 보러 다니며 지낸다. 11월에는 샘 패킨파 감독의 서부극 ‘관계의 종말’에 배우로도 출연하며 음악도 밥 딜런이 맡는다. 사운드트랙도 밥 딜런이 맡게 되는데 훗날 수많은 커버송을 양산한 knocking on heaven's door도 이 영화에서 나온다.

1973년 7월에는 사운드 트랙 음반 ‘Pat Garrett and Billy the Kid’, 같은 해 11월 16일 ‘Self Portrait’의 아웃테이크집이라 말할 수 있는 ‘Dylan’이 발매된다. ‘Can’t Help Falling in Love’, ‘A Fool Such as I’. ‘Big Yellow Raxi’ 등 유명한 명곡, 유명한 커버를 포함한 앨범이었다. 이 앨범은 밥의 전 앨범 중 가장 혹평을 받고 있는 앨범이며 컬럼비아 레코드사와의 계약 종료 정리 작업과 관련된 발매였고 밥이 이 앨범에 대해 언급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밥 딜런은 이 앨범 이후 컬럼비아사가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이유로 재계약을 거부한다.

이때 신생 회사인 어사일럼 레코드사가 더 밴드와 앨범을 만들고 전미 투어를 하면서 라이브 앨범을 내놓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다. 어사일럼의 오너 데이비드 게펜은 더 밴드의 로버트슨과 친해진 후 밥에게 그러한 제안을 한다. 이 계획에는 유며한 프로모터 빌 그레햄도 참여한다. 밥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1974년 1월 3일부터 투어 일정이 시작됬고 앨범이 제작 되기 전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1973년 여름부터 리코딩을 계속된다. 앨범은 ‘Planet Waves’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1974년 1월 17일 발매된다. 투어 중의 앨범이 발매되어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한다. 이 앨범은 팝 컨트리 색채가 전혀 없고 밥을 듣는 사람을 고무하는 것 처럼 노래한다. 투어에서는 대형 스타디움 위주로 돌았다. 약 40일 동안 21개의 도시에서 40회의 공연을 한다. 구성은 우선 밥과 더 밴드의 무대, 이어 더 밴드의 단독 무대, 밥이 어쿠스틱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고 나서 더 밴드가 다시 등장, 다시금 밥과 더 밴드가 함께 막이 내릴 때까지 공연을 하는 형식이었다. 라이브 앨범은 투어 최종일인 로스엔젤레스 공연 연주를 축으로 제작되어 ‘Before the Flood’라는 타이틀로 1974년 6월 20일 발매된다. 1965년~1966넌 투어와 거의 비슷한 멤버들로 구성된 투어였지만 시간이 흘렀고 야유하는 관객들은 없었다. 하지만 밥 딜런은 훗날 이 투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밥 딜런을, 더 밴드는 더 밴드를 연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 투어에서 우리들이 받았던 가장 큰 칭찬은 ‘믿기 어려운 에너지다’란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우리들은 기대에 응했다. 무의미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22]

1966년 이후 가정이 밥 딜런의 중심이었지막 1974년 투어는 밥 딜런이 아내 사라와의 결별의 기폭제가 된다. 투어 전년도에 밥은 캘리포니아로 이사했고 광대한 토지를 구입했고 개축에 개축을 거듭했다. 공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경에 다다르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대립하는 일만 커진다. 1974년 봄, 서로의 감각이 크게 엇갈리는데 밥이 노먼 레벤이라는 화가에게 그림을 사사받는 일이 발단이 되었다. 레벤은 그림은 그리는 것의 원리를 추상적이며 인상적으로 밥에게 가르첬다. 밥 앞에 화병을 놓고 30초 정도 지나면 그것의 밥의 눈앞에 치운다. 그러고 화병을 그리라고 밥에게 명령하고 밥은 그리기 시작했으나 화병에 대해 무엇 하나 떠올릴 수 없었다고 한다. 밥은 2개월간 레벤에게 그림을 배웠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 사라에게 레벤한테 배운 것들을 설명한다. 그러나 사라는 이해 불가능이었고 밥이 이야기를 해도 사라에게 통하지 않게 된다. 밥은 몇 년 후 “우리들의 결혼생활이 파탄나기 시작했던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23]고 말한다.

당시 레벤과의 교류는 밥의 창작 의욕을 되살아나게 된다. 그 결과 나온 앨범이 밥 딜런의 최고 명반 중 하나이자 대중음악 최고의 명반중 하나인 ‘Blood on the Tracks’이다. 밥은 이 당시 이렇게 말한다.

”한 장의 그림같은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회화처럼 일부분 만을 볼 수도 있고 전체를 볼 수도 있는 노래다. ‘Tangled Up in Blue’에서 그것을 시험해보았다. 시간의 개념과 등장인물들이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변하는 방법을 시험해본 결과, 듣는 사람에게는 3인칭 인물이 말하고 있는지, 혹은 1인칭 인물이 말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전체를 거시적으로 조망할 때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1974년 8월 1일 밥은 어사일럼 레코드스와의 계약 갱사을 중지하고 다시 컬럼비아사와 레코드와 재계약한다. 그 해 여름에 밥은 미니애폴리스에서 지내며 곡을 쓴다. 교외에 농장을 사서 농민들에게 빌려주고 오래된 가옥을 주거지로 삼아 인접한 헛간을 아트 스튜디오로 다시 만든다. 밥의 동생 데이비드가 거기로 이사를 가서 밥의 집 인근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다. 밥의 입장에서는 그 곳은 후에 휴가기간동안 남동생 일가, 어머니, 아이들과 지내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1974년 9월 새 앨범의 녹음이 시작된다. 레벤의 영향이 밥의 가사를 보다 다각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직유와 은유의 교차, 정경묘사의 시점 변화, 인물들과의 교차가 복잡해지며 이야기도 복잡해진다. 기존의 작품들에서는 없었던 그림의 영상이 각각의 곡들에 떠오른다. 기존의 밥의 실생활에 존재했던 괴로움속에서 태어난 곡들 뿐이기도 하였고 딜런의 영적 자서전으로 불렸다. 녹음은 뉴욕에서 완료되었지만 마음에 들지않아 12월에 미니애폴리스에 돌아올 즈음 동생 데이비드[24]의 조력을 얻어 지방 뮤지션들을 불러 몇 곡을 다시 녹음한다. 새 앨범의 타이틀은 ‘Blood on the Tracks’, 1975년 1월 20일 발매된다. 평단의 앨범 반응은 최고조에 달했고, ‘Blood on the Tracks’는 딜런이 7년이나 9년만에 내놓은 최고의 작품이라 불렸다. 심지어 딜런의 최고 역작이라 부르는 평론가들도 있었다. 빌리지보이스의 평론가 로버트 크리스타구는 음반에 A를 주며 “딜런의 새로운 입지는 그 어떤 것 못지않게 당황스럽다. 그렇지만 가장 즉각적이고 가장 심오한 놀라움은 음악에서 온다. 전체적으로 이것은 앞선 음악가의 가장 성숙하고 확신에 찬 음반이다”라고 평했다.

1975년 여름, 그리니치 빌리지에 장기간 체재학다. 잭 엘리엇이나 밥 뉴워스 등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들의 라이브에 손님으로 초대받게 된다. 그들의 무대 뒤에서 일하고 있던 믹 론슨, 롭 스토너 등과 교류도 이때 시작한다. 연출가이자 작사가인 자크 레비도 우연히 길에서 만나 공동으로 곡을 만들기도 한다. 옥중에서 자신을 무죄를 호소하는 루빈 허리케인 카터에 대해 묘사한 노래 ‘Hurricane’도 이때 태어난다.[25] 밥과 레비는 많은 곡들을 공동작곡하는데 밥의 추상적 표현을 레비가 구체적으로 표현해내는 작업은 매우 효율적이었다.

1975년 7월 리코딩이 시작된다. 20명이 넘는 뮤지션이 한자리에 모여 그중 몇 사람씩 세션을 만들어간다. 몇번인가 그런 상황이 반복된 후 일단 세션은 해산되고 곧바로 작은 규모의 편성 세트가 만들어진 후 곡이 완성되어갔다. 바이올린을 담당한 스칼렛 리베라는 바이올린을 들고 걸어가다가 밥에게 작업 권유를 밥고 합류했다. 이 세션과 그리니치 빌리지에서의 교우 관계를 바탕으로 밥은 음악과 함께 작은 마을들을 찾아다니는 유랑공연을 실행한다. 이 구상은 1960년대 중반 무렵 밥에게 들었다고 로비 로버트슨은 말한다.

”집시나 카라반처럼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고 다양한 곳어서 자유롭게 연주하며 동시에 그것이 하나로 통일성을 가질 수 있는 투어를 하고 싶다고 밥은 말했다.”

악단의 기초에는 롭 스토너, 스칼렛 리베라 등, 리코딩 작업의 소장파 조를 배치한다. 밥은 잭 엘리엇, 로저 맥귄 등에게 참가를 요청했고 1965년 헤어지고 이후 거의 만나는 일이 없었던 조안 바에즈에게도 참가를 권한다. 참가 인원은 계속해서 늘어났고 킹키 프리드먼, 티 본 버넷, J.스티븐 솔즈, 앫런 긴즈버그, 데이비드 맨스핀드, 여배우 로니 블레이클리도 여행 맴버가 된다.

밥 딜런윽 이 투어를 영상으로 남기고 싶어했다. 그것도 그저 기록만 하는 것이 아닌 출연자, 여행 대동자들의 연기도 수록된다. 투어의 연주씬, 무대 뒤편의 모습, 여행 중의 대화,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생각이 떠오른 대본에 의한 연극이 첨가된다. 두개의 조로 나누어 촬영반을 편성한다. 각본 담당으로 샘 셰퍼드를 동행시켰다. [26] 밥의 영화 타이틀은 ‘레날드 & 클라라’였고 투어 명은 ‘Rolling Thunder Revue’ 정해진다.[27]

1975년 10월 30일 여행은 메사추세츠 주 프리머스에서 막을 올렸다. 한번의 쇼는 서너시간이 될 정도로 긴 시간이었기 때문에 관객들은 예측할 수 없는 공간에 들어가 긴장감 속에 무대에 몰입한다. 투어 일행은 밥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즉흥 연기 장면 촬영 때문에 종종 멈춰야했다. 출연자로서는 그때그때 지명당한 사람이 밥이 말하는 장소로 끌려가 거기서 뭔가를 한다는 것이었다. ‘뭔가’라고는 해도 아무런 테마도 없는 경우도 많아서 그저 잡담이나 일신상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참가자는 날마다 들어가 밥의 전 여친들도 합류하고 심지어 아내 사라마저도 등장시킨다. 사라가 영화안에서 클라라 역할을 맡았고 밥은 그 사라에게 쫓기는 레날드였다. 한마디로 밥 부부 주연의 극 영화에 시샤 풍자극이 끼어들어 있는 구조였다. 방대한 양의 촬영은 그 후 1년 이상이 걸려 밥의 감수로 편집되었고 무려 4시간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1978년 도시부 극장에 일주일만에 일부 공개됬으나 일주일만에 상영이 끝난다. 다시 2시간만에 단축판을 만들었으나 평이 매우 좋지 않았다.

‘Rolling Thunder Revue’는 1975년 12월 8일 루빈 허리케인 카터의 변호 비용 조달 자선 이벤트로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행해진 쇼를 끝으로 잠시 막을 내린다. 미 북동부, 토론토, 몬트리올을 돌아 도합 31회 공연되었다. 그 첫번째 시기의 라이브 음원은 2002년 부틀렉 시리즈로 발표된다.

1976년 1월 16일 ‘Desire’ 발매된다. 일렉트릭 음반이며 전설적인 테마들과 현대의 의미를 결합한 앨범이었다. 욕망(Sesire’라는 단에는 이미 1964년부터 자주 입에 올렸다. Eleven Outlined Epitaphs에서 11번째 에피타프에서 그는 폭풍우 이후 “꾸준히 변화를 의미하는” 하늘 아래서, 사신은 욕망을 환영할거라고 선언한다.[28] Rolling Thunder Revue의 기점 중 하나가 되었던 1975년 7월 세션을 수록한 앨범으로 평단의 펴믄 대체로 호평이었고 상업적인 면에서도 성공한다.

1976년 3월, 밥은 에릭 클랩튼의 앨범 ‘No Reason To Cry’ 제작에 참가한다. 그러고 나서 8개월 후 더 밴드 해산 기념 이벤트에 참가한다.

4월 18일 Rolling Thunder Revue는 다시 재개를 한다. 플로니다 주 레이크랜드을 시작으로 남부를 돌았고 5월 25일 유타 주 솔트레이그시티 공연으로 막을 내린다. 이 가운데 1976년 5월 23일 콜로라도 주 포트콜린즈에서의 무대 모습이 NBC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영되었고 그 음원 일부가 라이브 앨범 ‘Hard Rain’으로 1976년 9월 10일 발매된다. 후기 투어에서 밥은 전기보다 거친 목소리를 보여준다.

1977년 3월 1일 사라가 이혼을 청구했고 양육권, 이혼수당, 법원 감독하의 부부공동재산 분배를 원했다. 딜런의 변호사들은 특정 법률 문서들의 대중적 금지하는 판결을 얻얻냈다. 사라는 판결끝에 아이들에 대한 일시적 양육권, 말리부 자택에 대한 독점권 사용권을 얻었다.

딜런은 즉시 대규모 투어를 계약한다. 1966년 이후의 첫 월드 투어였다. 1978년 2월부터 12월에 걸쳐 도합 130회였다. 투어는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1978년 2월 17일 밥은 도쿄땅을 밟는다. 2월 20일 무도관 공연을 시작으로 도쿄 8회, 오사카 3회, 도합 11회의 콘서트가 개최한다. 전설적인 뮤지션이 일본에 왔기에 일본 메스컴도 시끄러워졌고 NHK는 다큐멘터리 ‘밥 딜런이 왔다’를 내보낸다.[29] 이 당시 일본은 비틀즈가 일본에 온 이래 밥 딜런이 일본에 온 것을 음악적 사건으로 취급한다.

무도관 공연에는 하얀 정장 차림으로 하얗게 화장을 하고 등장한다. 밴드는 밥 딜런의 생애 가장 많은 11인 펀성이었다. 밥을 보조하는 형태로 음악감독 같은 역할을 베이스의 롭 스토너가 담당했다. Rolling Thunder Revue에 이어 기타의 스티븐 솔즈와 기타와 바이올린의 데이비드 맨스필드가 가세했고 유럽 투어 중이었던 기타의 빌리 크로스가 롭 스토너에 의해 호출됬다. 드럼에는 킹 크림슨의 멤버였던 이안 윌리스, 퍼커션에 모타운의 바비 홀, 섹소폰의 스티브 더글라스, 토니 윌리엄스, 알란 파스쿠아, 코러스에는 헬레나 스피링스, 조 앤 해리스, 데비 다이가 가세한다. 일본의 밥 딜런 배급원인 소니의 제안으로 2월 28일과 3월 1일의 일본 무도관 공연을 라이브 리코딩하여 LP 2매 1세트로 발매한다. 일본 공연은 2부 구성으로 도합 28곡, 그것들 중 거의 연주 순으로 22곡이 뽑혀 앨범이 수록된다. 앨범 타이틀은 ‘BOODOKAN’, 1978년 8월 21일 일본에서 발매된다. 하지만 곧바로 해외에서 주문이 쇄도, 일본에서 오는 수출판의 고액 거래를 대비하여 컬럼비아 레코드사는 다음 해 1979년 4월 전세계를 대상으로 발매한다. 밥의 첫 단독 라이브 음반이었다.

투어는 일본에서 뉴질랜드, 호주를 돌아 일단 미국으로 돌아 온다. 투어 도중 롭 스토너가 밴드 내 알력때문에 해고 되었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밴드에서 활동했었던 제리 셰프가 가세한다. 코러스의 데비 다이도 빠진다. 대신 참가했던 사람이 바로 미래의 아내가 되는 캐롤린 데니스였다. 참가 의뢰를 받았을때 캐롤린 데니스는 밥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한다.

투어 재개는 1979년 6월이었다. 밥은 이 기간동안 신작 앨범을 리코딩을 감행한다. 프로듀서는 밥 존스톤을 예정했으나 스케쥴이 맞지 않아 엔지니어 돈 드비토가 담당한다. 신곡은 이미 완성되에 있었다. 장소는 밥이 리허설용으로 구옥을 개조하여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산타모니카의 런다운 스튜디오였다. 음향은 양호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연주라는 결속을 통해 다른 앨범에는 없는 독자적인 사운드가 태어난다. 일각에서는 스티브 더글라스의 색소폰이 사운드의 핵이 되고 있었으며 곡조에 공통된 것이 느껴진다는 이유로 브루스 스프링스틴과의 비슷함을 지적했으나 밥 딜런은 “50세 이하 녀석들은 흉내내거나 하지 않는다”라며 반박했다. 앨범은 사랑에 대한 고뇌와 초조를 노래했고 종교적인 특히 성경과 관련된 작품이었다. 그러나 밥 딜런은 앨범에 완성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앨범 제목은 “Street-Legal”, 1978년 6월 15일 발매 된다. 평단이 반응은 찬반으로 갈렸고 굉장히 미묘했다. 상업적 성과는 미국에서는 11위, 영국에서는 1위를 기록한다.

1978년 투어는 유럽에서 돌아와 미국 각지를 돈 후 12월 16일, 마이애미에서 종료된다. 투어 도중 밥은 코러스 중 한사람인 헬레나 스프링스와 깊은 관계를 맺으며 두 사람은 곡을 함께 만들기에 이른다. 그 동안 함께 만든 곡은 10여 곡에 이르며 그 중 두곡을 에릭 클랩튼이 사용한다.[30] 이 시기 헬레나 외에도 여러 명의 흑인 여자친구가 있었다. 이 당시 밥은 흑인 문화의 심취했으며 투어 도중 스테이지 후 식사로 소울 푸드를 제공하기 했고 보통 때도 흑인 음악을 듣는다. 흑인적인 것에 다각적으로 탐구했다는 증억도 있다. 이 당시 이혼 후 자녀들을 만날 수가 없었고 여러 명의 여자친구를 사귀며 위로를 찾는다. 그녀들의 영향으로 밥 딜런은 가스펠, 나아가 기독교 신앙의 마음을 기울인다. “Street-Legal”의 수록곡 ‘Señor’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에서 태에난 곡이다.

헬레나 스프링스의 의하면 밥은 당초 기도 방식조차 모른 비신자였지만 설명을 하자 기독교 탐구를 시작한다. 다른 여자친구였던 메리 앨리스 아티스는 소규모 복음교회 빈야드 펠로우쉽의 목사를 소개해준다. 그때 딜런은 목사에게 자신의 인생은 공허하다고 말한다. 밥은 같은 교단의 신도 학급에 들어가 1979년 전반에 걸쳐 3개월간 성경을 배운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세례를 받고 이른바 Born Again(신생)파 교도가 된다. 밥 딜런의 친척들중에는 이 선택을 화를 냈고 유대교도로 성장한 밥의 자녀들도 동요하게 된다. 하지만 훗날 밥은 당시 Born Again이라는 단어는 사용한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밥은 그때의 신앙을 바탕으로 새로운 곡들은 만든다. 당초에 밥이 프로듀서가 되어 그 신곡들을 캐롤린 데니스가 노래하는 앨범으로 만들려 했으나 무산됬고 결국 밥 딜런 본인이 직접 부르는 ‘Slow Train Coming’이 1979년 8월 20일 발표된다. 녹음은 앨라배마 주에 있는 머슬 숄스 사운드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프로듀서는 거장 제리 웩슬러와 베리 베케트가 담당한다.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마크 노플러, 픽 위더즈, 팀 드럼몬드, 머슬 숄스 혼스의 호른 세션에 여성 코러스 세 사람이 포진한다. 앨범은 듣는 이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밥의 노래에는 윤기가 다시 살아났고 델라니&보니나 리언 러셀 등의 수많은 가스펠 록 명작들과 비견되는 동시에 진지한 표현력이 살아있는 노래와 비트가 깊게 결합됬다.

앨범은 평단의 평은 매우 갈렸지만 로버트 크리스트가우가 B+를 주며 전작보다 좋은 평을 얻는다. 상업적으로 3위에 오르며 역시 이전 작품보다 좋은 성과를 얻는다. 밥 딜런은 ‘Gotta Serve Somebody (누군가를 섬겨야만 해)’를 싱글컷했고 결과는 빌보드 차트 24위로 ‘knockin' on heaven's door’ 이후 최고의 성과였다. 여담으로 이 제목의 존 레논은 반감이 들었고 생전에 발표하진 않았으나 ‘Serve Yourself (너 자신을 섬겨라)’라는 답가를 만든다.

드럼에 짐 켈트너, 프레드 태키트, 오르간에 스프너 올드햄, 피아노에 테리 영, 그리고 리코딩 멤버인 팀 드럼몬드와 여성 코러스 세명이 포진한 멤버를 이끌고 1979년 11월부터 1980년 12월까지 전미 투어를 나선다. 이때 기존의 작품은 한곡도 안 불렀다. 여성들이 노래하는 가스펠로 시작하고 밥이 등장해 직접 만든 가스펠을 불렀다. 객석은 당연히 대혼란이었다. 야유와 박수갈채가 뒤섞였지만 밥 딜런은 미동도 안한다. 밥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많은 미디어들이 오랜만에 밥 딜런을 이때 까기 시작했고 기독교도들중에서 밥 딜런의 신앙자체는 진심이 아니다라고 의심했고 유대인 사회부터에서도 경원시되었고 록 신봉자들에게는 비아냥을 받았다. 이 무렵 밥이 적으로 돌린자들은 자신이 일렉트릭 기타를 잡았던 그때보다 몇배는 더 많았다.

하지만 밥 딜런은 1980년 2월 27일 ‘Gotta Serve Somebody’로 그래미상 최우수 남성 록 보컬 퍼포먼스를수상한다. 이때 ‘Gotta Serve Somebody’를 가사를 바꿔 부르기도 했다.

2.4. 1980년대

1980년 6월 19일 가스펠 시리즈 2탄인 ‘Saved’를 발매한다. 보다 직접적인 메시지가 다수 포함되었고 연주도 매우 공격적이었다. 비트도 R&B 스타일에서 록으로 변화한다. 이 앨범은 상업적인 면에서도 굉장히 부진했고 호불호가 갈린 전작에 비해 비평가들에게 혹평을 받는다. 이때 가스펠 스타일로 변화한 밥에 실망해 투어도 악화되는데 밥은 다시 1980년 가을부터 예전 레퍼토리의 무대를 부활시킨다. 이때 라이브는 80년대 딜런 라이브 최고로 꼽히기도 한다.

1981년 4월부터 5월까지 밥 딜런은 투어 멤버에 몆 사람인가의 게스트를 더해 신작 리코딩을 시작한다. 딜런은 1980년 가을에 앞선 두 작품에 이어 가스펠 시리즈 제작에 들어갔는데 평소와 달리 곡을 만드는 시간이 꽤 걸렸다. 이 당시 절친했던 존 레논이 암살당한 사건이 영향을 끼첬을지 모르는데 밥 딜런은 1960년대의 록 스타가 모두 살해당하는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고 한다. 호신용으로 밴드 멤버들에게 방탄조끼까지 보냈을 정도다. 실제로 이 당시 밥 딜런을 스토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스펠 시리즈 제 3탄 ‘Shot of Love’가 1981년 8월 12일에 발매한다. 이 앨범은 전작들보다 신앙과 대중성 모두 고려했고 당대의 인기 가수였던 나나 무스쿠리에게 의뢰를 받아 만든 곡 ‘Every Grain of Sand’ 큰 호평을 얻기도 한다. 비평적인 면에서는 전작 Saved 보다는 좋은 평을 받았지만 상업적인면에서는 Saved보다 더 실패한다. 이 소식을 들은 밥 딜런은 크게 낙담하고 한다. 하지만 이 앨범의 리코딩 세션에서 밥 딜런은 앨범 세 장 분량의 작품들을 녹음했다. 투어 밴드를 축으로 데니 코치머, 도나드 덕 던, 론 우드, 링고 스타 등 여러 사람들이 세션으로 참가했다.

1981년 6월부터 투어를 재개한다. 미국에서 유럽으로 투어를 했고 미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가스펠의 영향으로 관객 수가 늘지 않아 고전했다. 단, 연주와 노래 모두 질적으로 훌륭했기 때문에 무대는 대호평을 받았다. 고등 학교 시절 같이 밴드[31] 활동을 한 랠리 키건도 두 번 무대에 올라 노래한다. 이 당시 딜런은 설교도 하지 않았고 예전 레퍼토리의 연주를 끼워넣어 훌륭히 소화해냈다.

하지만 밥 딜런은 개종에 대한 거듭되는 비난, 실적 부진, 심지어 전 매니저 그로스맨에 과거에 얽였던 일로 법정 투쟁까지 발발했고 스태프가 사망하는 등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 결국 1982년이 되자마자 자신의 런다운 스튜디오를 폐쇄해버리고 활동을 중단한다. 1982년 밥 딜런이 공적인 장소에 두 번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번은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 입성 축하식에서였고 또 다른 한번은 6월 6일 핵무장 해제를 촉구하는 집회였다. 밥은 단상에 올라가 조안 바에즈와 ‘With God on Our Side’, 지미 버펫의 ’A pirate Looks at Forty’ 그리고 본인의 곡 ‘Blowin’ in the Wind’를 듀엣으로 불렀다.

1983년 4월 밥 딜런은 새 앨범의 리코딩을 재개한다. 이 잠적 1년동안 앨런 긴즈버그와 녹음을 하거나 알 쿠퍼 등과 데모 테이프를 만들거나 클라이디 킹을 프로듀스하거나 카리브해의 앙귈라에서 현지 뮤지션들과 교류하기도 하면서 지낸다. 이때 프랭크 자파에게 프로듀스 의뢰를 하러갔는데 결국에는 다시 마크 노플러에게 프로듀스와 참가 뮤지션 선정을 의로한다. 레게 콤비인 슬라이&로비, 노클러의 절친 앨런 클라크, 롤링 스톤즈의 맴버였던 믹 테일러 등 맴버들이 포진해 있다. 밥은 이때 달라진 에코 감각이나 저음으로 울리는 사운드와 표면적으로는 아니지만 자신의 노래와 가사가 새로운 모습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 자세에 대해 모색했다. 1년간의 휴식 중 밥 딜런은 20곡 가까운 신곡을 만들었고 새로움 앨범 세션에서는 오리지널 16곡, 14곡이나 되는 커버곡을 녹음한다.

앨범의 제목은 ‘Infidels’였고 1983년 10월 발매한다. 수록곡은 8곡이었고 수록되지 못했던 녹음곡들 중에는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Blind Willie McTell’이 있었는데 이 노래는 후에 부틀렉 시리즈 1탄 ‘The Bootleg Series Volumes 1–3 (Rare & Unreleased) 1961–1991’에 수록된다. 앨범 안쪽 재킷에는 예루살렘 언덕에서 웅크리고 있는 밥의 사진이 보인다. Infidels(이교도)이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간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스라엘 옹호로 추측할 수 있는 노래, 소돔과 고모라 인용, 자본주의 비판, 달 착륙 규탄 등 세상의 모습을 여러 각도로 비판하는 앨범이었다. 한 평론가는 “기독교나 유대교 중 그 어느 쪽에서 봐도 결국 딜런 자신은 이교를 믿는 어리석은 백성에 불과하다는 선언”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 당시 인터뷰에서 “앞으로는 완성되었다고 느껴질 때까지 앨범 발매는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32] 전작보다 높아진 퀄리티로 앨범은 오랜만에 비평가들이 호평을 했다. 상업적인 면에서는 미묘한 반응이었다.

싱글 앨범 ‘Jokerman’의 비디오 클립[33]을 제작하거나 1984년 3월 펑크 밴드 프라그즈(The Plugz)[34] 맴버들과 인기 TV쇼 ‘데이비드 레터맨의 레이트 나이트’에 출연하기도 한다. 리허설도 히지 않은 곡이었던 소니 보이 윌리엄스의 ‘Don’t Start me to Talkin’을 갑자기 불러 뒤에 있던 프라그즈를 당황시키기도 했다.

1984년 3월 28일, 2년 만에 투어에 복귀한다.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네덜란드, 벨기에 등 유럽을, 산타나와 2인 주도 체재로 7월까지 순회 공연한다. 연 인원 10만명 이상으로 투어는 대성공을 거둔다. 밴드 페이시스의 맴버였던 이안 맥리건, 더 블루스브레이커스의 멤버였던 콜린 알런, 그룹 KGB의 맴버였던 그레그 서턴, 그리고 믹 테일러라는 구성원 등이 백을 담당한다. 밥은 오랜만에 빌 그래햄의 프로모션에 의한 스타디움 투어에 대응하여 록 형태의 어레인지와 대음량으로 화려한 밴드를 편성한다. 이 투어의 녹음을 통해 라이브 음반 ‘Real Live’가 만들어진다. 프로듀서는 글렌 존스였다. 익숙한 곡들이 줄줄이 나오고 산타나의 연주도 수록되어 있다.

이 투어 이후 밥 딜런은 차기작을 진행한다. 단독 프로듀스로 단속적으로 세번의 세션을 거쳐 만들어진다. 믹스는 힙합 프로듀서 아서 베이커가 담당한다. 밥 딜런은 그 당시의 절정기를 맞은 사운드를 원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기용이다. 이 앨범 제작 중 1985년 1월 28일, 자선 레코드 ‘We Are The World에 참여하기도 한다.

앨범의 제목은 ‘Empire Burlesque’, 1985년 5월 30일 발매된다. 악곡이 굉장히 풍요로워진 앨범이고 제각각에 서로 다른 배려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렉트릭한 음색에 비중이 실린 백 트랙과 밥의 목소리가 서로 반발하는 곡도 있다. 컬럼비아 레코드사 측의 요청으로 수록곡 ‘Tight Connection to My Heart’의 프로모션 비디오가 일본에서 촬영된다. 감독 폴 슈레이더가 제대로 일을 못해서 배우 바이쇼 미츠코만 나오는 퀄리티가 떨어지는 작품이다. 앨범은 상업적으로는 부진했으나 평단에 호불호가 갈리긴 했지만 올뮤직에서 4.5점을 맞는 등 나쁘지 않은 실적을 거둔다.

또 이 해 여름 7월 13일 미디어에 출연하는데 밥 겔도프가 빌 그래햄, 하비 골드스미스와 함께 런던과 필라델피아를 이원 중계로 연결시켜 전 세계에 방영하는 자선 록 이벤트 라이브 에이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출연자로 등장한다. 당초에 폴 앤 메리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를 예정이었다. 실제로 리허설로 진행됬지만 밥이 막판에 거절한다. 결국엔 폴 앤 매리 대신 키스 리처드, 론 우드와 진행한다. 이 때 공연이 끝난 후 느닷없이 밥 딜런이 말을 꺼내며 조그만 해프닝이 발생한다.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모인 돈의 일부, 아주 조금을, 100만이어도 200만이어도 좋으니 미국 농민의 부채 탕감을 도와주기 위해, 은행에 빚을 지고 있는 농민들을 위해 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밥이 솔직한 발언에 밥 겔도프는 이 이벤트에 대한 자신의 의도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는 데 경악했다. 하지만 밥의 말을 들은 컨트리가수 윌리 넬슨은 농민 지원 이벤트 개최를 결심한다. 이 이벤트에 밥 딜런이 참가하기도 한다. 이때 백 코러스를 맡아주었던 것은 톰 페티 앤 하트브레이커스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7일, 밥의 커리어의 작품들 중 엄선한 LP 5장에 수록산 박스 세트 ‘Biograph’가 발매된다. 여러 곡들이 시대 순이 아닌 랜덤으로 나열되어 있고 수록곡 53곡 중에 무려 21곡이 미발표 곡이다. 이것이 훗날에 ‘부틀렉 시리즈’로 이어진다. 이 박스세트는 높은 가격에도 25만 세트가 팔리며 성공을 거둔다.

1986년은 톰 패티 앤 하트브레이커스와의 투어로 일본 공연이 있었는데 이 공연에서의 밥 딜런은 컨디션 난조로 다소 주눅이 들어 있는 상태가 보인다. 이 투어는 2월부터 8월까지 계속된다. 투어를 진행하면서 그 사이에 밥 딜런은 앨범을 제작한다. 샘 셰퍼드, 캐롤 베이어 시거, 톰 패티 등과의 공동 작품으로, 주니어 파커,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커버 등 폭 넓은 내용을 담고 있다. 앨범은 ‘Knocked Out Loaded’라는 제목으로 1986년 7월 14일 발매한다. 싱글 히트를 노릴만한 대중적인 작품이 있는가 하면 11분이 넘는 실험적인 작품도 있다. 전체적으로 거칠게 들리는 느낌이 드는 앨범이나 밥의 커리어에 있어서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그러나 평단에 평은 위블리[35]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혹평을 내렸다. 상업적인 면에서는 본인 커리어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최저 순위를 기록한다.

이 앨범 발매 한 달 정도 전쯤 밥 딜런은 캐롤린 데니스와 정식으로 결혼한다. 데니스는 이 해 초 밥 딜런의 아이를 출산했다. 이 결혼에 관해서는 스태프 전원이 외부에 비밀로 할 것을 맹세했다고 한다.

1987년이 되자 봄에는 다음 앨범 녹음에 들어갔다. 브라이언 페리의 노래로도 잘 알려져 있는 ‘Let’s Stick Together’ 등 커버곡 중심이었고 참가 뮤지션도 많았다. 오리지널 신곡 ‘Silvio’와 ‘Uglest Girl in the World’는 그레이트풀 데드의 로버트 헌터와의 공동작품이다. 세션 중에서 완성도가 양호한 것들을 모와 왔다는 구성으로 앨범에 대한 인상이 가볍다. 앨범의 제목은 ‘Down in the Groove’이며 다음 해 1988년 5월 19일 발매된다. 전작에 이어 평단의 앨범의 평은 매우 좋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이 앨범은 전작에 이어 본인 커리어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최저 순위를 기록한다.

이 당시 1980년대 후반 밥 딜런의 앨범 퀄리티는 밥 딜런의 커리어에서 가장 좋지 않다. 귀에 친숙하기 어려운, 뭔가 판단하기에 어려움을 느끼게 해주는 곡들이 다수 있다. 기독교 개종 이후 낸 앨범 가스펠 삼부작은 많은 리스너들에게 위화감을 주긴 했으나 ‘Saved’를 제외하면 평단의 나쁘지 않은 평을 얻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딜런의 앨범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납득할 수 없는 좋지 않은 퀄리티였다. 딜런의 자서전에 의하면 당시 톰 페티 등과 함께 투어를 하는 도중, 수년간 느껴왔던 우울증이 기력이나 체력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첬다고 한다. 이 당시 밥 딜런은 은퇴를 고려하기도 했다. 앨범을 만든 후 투어에 나선다는 제작 사이클로 인한 정신적 압박도 있었다. 작곡 자체가 본인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결과, 과거 리코딩 세션에서 모아둔 것들을 손본다거나 다른 아티스트와의 공동 작업을 시도해본다거나 커버곡을 수록하거나 하고 있던 것이다.

이런 최악의 부진에 빠저 있을 무렵 딜런은 그레이트풀 데드와 조인트 쇼트 투어를 진행하는데, 그 리허설 도중 그레이트풀 데드 측으로부터 수년간 라이브에서 하지 않았던 곡을 하고 싶다는 제안이 나온다. 밥은 매우 당황스러워하며 동요했고 리허설장을 퇴장해버린다. 밥 딜런은 당시 평소 하고 있던 곡, 자신이나 관객들에게 친숙한 곡들을, 그냥 즐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본인의 무대의 레퍼토리는 수년간의 라이브를 걸치며 어느새 한정되어 있었고 그런 사실을 후배 그레이트풀 데드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점에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모든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밥 딜런은 빗속을 해맸고 거리의 끝 길모퉁이 쪽에서 재즈 콤보의 연주소리가 들려왔다. 밥은 그 소리를 듣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무대 근처 카운터에 기대앉아 그것을 들었다. 드럼, 베이스, 피아노 트리오를 뒤로 하고 나이가 든 남성 가수가 스탠다드 재즈 발라드를 부르고 있었다. 밥 딜런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자연스러운 힘을 담아 노래하고 있었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것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그 가수가 밥 딜런의 영혼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하는거야”라고 말을 걸어온 것 같았다고 한다.

”그의 목소리를 계기로 나는 자기 자신을 되찾았던 것이다. 나도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했었다고 생각했다.

(중략)

기본적이고 단순한 이 기법을 나는 잊고 있었다.”

이 당시 그레이트풀 데드와의 투어는 밥 딜런에게 중요한 자산이 된다. 무대가 일상이었고 음악 활동의 중심이었던 그레이트풀 데드의 라이브 방식은 밥 딜런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이들의 투어 음원 중 7곡이 뽑혀, 투어로부터 약 1년 반 후인 1989년 2월 9일 ‘Dylan & the Dead’라는 라이브 앨범으로 발표된다. 이 앨범이 발표된 직후인 2월 12일, 밥 딜런은 잉글우드에서 열린 그레이트풀 데드의 콘서트에 기습 참가한다. 무대에 올라간 밥 딜런은 자신의 곡은 안하고 그레이트풀 데드의 노래만 하겠다고 우겼고 어쩔 수 없이 그레이트풀 데드는 같이 함께 해주었다. 여기에서 웃긴 상황이 발생하는데 밥 딜런이 그레이트풀 데드의 곡 가사를 거의 몰랐고 최악의 무대가 되버린다. 모두가 설득해서 결국 밥 딜런의 곡을 노래했다. 밥 딜런과 그레이트풀 데드는 이후로도 관계가 계속됬고 1995년 8월 그레이트풀 데드의 멤버였던 제르 가르시아가 세상을 떠날때에는 장례식에 참석했고, 공식적으로 추도문[36]도 발표한다.

1987년 가을, 톰 패티 등과 함께 한 유럽 투에서 밥 딜런은 레퍼토리를 대폭 확장한다. 무려 110곡 이었다. 노래 부르는 것의 고통은 제거됬고, 오히려 얼마만큼이나 할 수 있는지 스스로 목적의식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런데 투어 후반인 1987년 10월 5일, 스위스 로카르노의 야외무대에서 새로운 사고에 직면한다. 3만 명의 관객들 앞에서 노래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원인은 알 수 없었고 순간적으로 밥 딜런은 패닉에 빠진다. 여기서 딜런은 “잃어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중해질 필요도 없다.”라고 밥 딜런은 생각했다. 자서전에 의하면 이 사건이 다시 태어난 듯한 에너지를 딜런에게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이 날을 기점으로 밥 딜런은 은퇴에 대한 생각을 접는다.

”나는 완전히 새로운, 진정한 의미에서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퍼포머가 된 기분이 들었다”

톰 페티와의 투어 종료 후, 바로 그 자리에서 투어 매니저에게 다음해인 1988년의 투어를 요청한다. 밥은 이때 연간 200회의 콘서트를 희망했다. 이 무렵 딜런은 1960년대 초 로니 존슨[37]에게 직접 배웠던 기타 연주법을 떠올렸고 그것을 응용해보고자 했다. 이 연주법은 관습에 의거하지 않는, 노래를 활성화시키는 존재감있는 연주법이라고 밥 딜런은 설명하기도 했다. 기타 주법에 대한 변화는 “자신이 연주하고 있는 것의 골격에 얽매이지 않고 노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1988년 4월, 조지 해리슨이 프로듀서 겸 뮤지션인 제프 린을 동반해서 밥 딜런의 집에 찾아온다. 조지 해리슨의 앨범 ‘Cloud Nine’의 프로모션용 12인치 싱글의 B면에 넣기 위한 곡을 녹음하고 싶으니, 밥 딜런의 홈 스튜디오를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조지와 린은 작곡을 개시했고 거기의 린의 프로듀스로 앨범을 제작중이었던 로이 오비슨도 어쩌다 보니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고 우연한 일이지만, 빌렸던 기타를 밥 딜런에게 돌려주기 위해 톰 패티도 딜런의 집에 왔다.

“모처럼 이 정도의 멤버들이 모였으니 한 곡 함께 해보자”라고 밥 딜런도 가세하여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Handle with Care”다. 이 곡은 히트를 치고 곧 바로 앨범 제작으로 발전한다. 밴드 이름까지 붙여보자는 이야기가 나와 이 5인조에 ‘Traveling Wilburys’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데뷔 앨범 ‘Traveling Wilburys Vol. 1’는 1988년 10월 18일 발매되고 평단의 대호평을 받고 빌보드 200 3위까지 오른다.

밥 딜런은 1988년 6월 7일부터 10월 중순까지 미국 전역을 도는 투어에 나선다. 드럼, 베이스, 기타 그리고 밥 딜런이라는 4인 편성의 밴드였다. 이 해부터 2018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1년에 80~120회의 무대를 매년 계속하고 있다. 투어에는 각 회마다 명칭이 붙여지기 마련이지만 딜런의 팬들은 이 해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콘서트 활동을 ‘네버 엔딩 투어(Never Ending Tour)’라고 부르고 있다. 밥은 이때부터 회장도 1,00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소규모 공간부터 2만명 규모의 스타디움까지 다양하게 투어를 한다. 관객과의 대면을 통해 노래하는 것이 자신의 음악에 가징 적합한 존재양식이라는 생각을 굳힌 결과다.

1988년 밥은 자택 키친에서 창밖의 언덕 경사면이 달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영감이 떠올라 ‘Political World’라는 제목의 곡 가사를 스무 소절까지 단숨에 써버린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딜런은 한 달만에 무려 20곡을 쓰게된다. 가사들이 정리되어 완성된 상태에 있었으면서도, 이러한 것이 리코딩되기에 이른 것은 약 1년 후의 일이다. 그 무렵 딜런이 깊은 교류를 나눴던 U2보노가 밥 딜런의 집의 놀러 왔던 것이 계기가 된다. 잡담을 하다가 우연히 보노가 “새로운 곡은 있는 겁니까?”라고 묻는다. 밥은 옛날에 썼던 그대로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곡을 보노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보노는 딜런에게 프로듀서 다니엘 라노아를 추천한다. 1989년 3월, 딜런은 라노아가 있는 뉴올리언스를 갔고 그리고는 1개월 남짓하는 체재를 통해 앨범 ‘Oh Mercy’를 완성시킨다.[38]

앨범은 뉴올리언스 민가 하나 전체를 빌려 기자재를 가지고 들어와 ‘Oh Mercy’가 리코딩되었다. 해당 지역의 분위기, 느낌 그 자체까지 곡의 배경이나 기반에 반영시키는 것이 라노아의 방식이었다. 창작 활동상 하나의 벽을 뛰어넘어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고 있던 밥 딜런은, 뉴올리언스라는 지역에서 라노아와 작품을 만드는 것에 굉장히 좋아했다. 밥의 자서전 1장 전체가 ‘Oh Mercy’ 제작에 대한 이야기에 할애하고 있을 정도.

‘Oh Mercy’는 밥 딜런이 노래와 언어를 비트와 감응시키는 일에 매진한 앨범이기도 하다. 1989년 9월 12일 앨범이 발매됬고 오랜만에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얻었고 상업적인 면에서는 미국에서는 여전히 부진했으나 UK차트에서는 간만에 6위까지 오르는 좋은 성적을 거둔다.

프로듀서 다니엘 라노아는 당시를 회상하며 자신의 책에 이렇게 적었다.[39]

”바야흐로 더 이상 각광받는 일이 없어진 복서가 컴백해서는 왕좌를 탈환하려는 듯한 분위기였다.”[40]

2.5. 1990년대

1990년 초 신작 앨범 리코딩을 하게 되는데 프로듀서는 돈 워즈와 데이비드 워즈, 통칭 워즈라고 형제라고 불리는 프로듀서였다.[41] 이들은 직접 밥 딜런의 앨범을 프로듀싱하고 싶다고 나섰다고 한다.[42]

이 세션을 통해 태어난 앨범이 바로 ‘Under the Red Sky’다. 이 앨범은 악곡은 새로우나 일부러 구식의 접근 방식으로 완성시켜본다는 타입의 작품들이 많이 수록됬다. 워즈 형제는 다니엘 라노아가 프로듀스한 ‘Oh Mercy’의 성과를 의식하고 있었고 좋은 앨범을 안들려고 했다. 녹음 실무를 담당한 돈 워즈는 밥과 세상 간의 관계성, 록/밥 역사상 밥의 위치를 다시금 정립하는것에 대해 갖가지 방법을 짜냈다. 활동 30주년을 맞이하려는 밥 딜런에 대한 의미있는 시도였다. 그러나 악곡 각각의 매력을 끄집어내는 것에 관해서는 어려움이 있었다.

스티브 레이 본, 데이비드 린들러, 와디 와치텔, 슬래쉬, 알 쿠퍼, 조지 해리슨, 엘튼 존, 데이비드 크로스비 등 화려한 참가 멤버로 주변을 다지고 ‘긍정적으로 과거를 돌이켜본다’는 워즈의 방식은, 과거 작품들도 신곡도 마찬가지로 무대에서 계속 노래하고 있는 밥 딜런의 입장에서 위화감이 적지 않았다. 밥 딜런은 훗날 이 앨범의 제작과정을 이렇게 말했다. “매일 서로 다른 밴드와 함께 연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에코가 너무 많아 힘들었다.” 심지어 이 앨범 제작과 트래블링 윌버리스 신작 리코딩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딜런은 이 당시 낮에는 조지 해리슨, 제프 린과 공동 작업을 하고 밤부터 새벽까지는 워즈 형제의 지휘하에 가사에 멜로디를 넣어 노래하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조지와 제프가 있는 곳으로 다시 가는 생활을 했다.

앨범 ‘Under the Red Sky’는 1990년 9월 11일 발매된다. 상당히 공을 들인 앨범이나 상업적인면에서도 부진했고 평단에 호평을 받았던 ‘Oh Mercy’와는 달리 대부분의 평단에게 혹평 세례를 받는다.[43]

이 당시 1년 가운데 3분의 1 가까운 시간을 투어로 보내게 되며 자연스럽게 아내 캐롤린과의 사이도 식어갔고 1990년 8월 캐롤린은 밥에게 이혼 소송을 했고 1992년 이혼한다.

같은 해 10월 밥 딜런은 뉴욕 주 웨스트포인트의 미육군사관학교에 초청받아 콘서트를 개최한다. 거기서 사관후보생들에게 ‘Masters of War’을 들려준다. 그리고 3개월 후인 1991년 1월 17일 걸프전쟁이 발발한다. 걸프전이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밥 딜런은 1991넌 1월 28일부터 2월 17일까지 유럽 순회공연을 했고 2월 20일 귀국 즉시, 그래미상에서 생애공로자로 평생공로상을 수상한다.[44] 밥은 수상식에 참석하여, 증정식 전 기념 라이브에서 ‘Masters of War’을 격한 연주와 쥐어짜내는 목소리와 함께 공연한다. 이 모습과 노래와 연주는 한참 전쟁 지지에 대한 기운이 고양되던 미국 전역에 방영되었다. 밥의 이 무대에는 찬반이 엇갈리기도 했다. 밥 딜런은 평생공로상 수상 후 스피치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언젠가 너를 남기고 사라져갈 이 세계에서는 나쁜 것들이 쉽사리 너를 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되어도 너는 스스로의 잘못을 참회하고 다시금 시작할 힘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은 그렇게 믿어주시므로”

밥 딜런에게는 자신이 과거에 녹음했던 대량의 미발표 음원들이 있었고 그것을 발굴한 ‘The Bootleg Series’가 컬럼비아 레코드를 매수한 소니 뮤직에 의해 시작한다. 이 부틀렉 시리즈는 현재에도 계속해서 발매되고 있다. 1991년 3월 26일 3종 1세트로 첫번째 부틀렉 시리즈 ‘The Bootleg Series Volumes 1–3 (Rare & Unreleased) 1961–1991’가 발매된다. 1961년부터 1991년까지의 전 58곡이 수록됬는데 그 중에 미발표곡은 45곡이다.

이 당시 투어의 고정 멤버들과 많은 무대를 소화하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밴드 편성에 의한 앨범 리코딩에 흥미를 잃어간다. 매일같이 대면하는 관객들이 최고의 청취자라는 의식이 높아진 상태였다. 투어를 하면서 밥 딜런은 자택에 설치된 스튜디오에 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전통 음악 작품을 두 편 녹음한다. 이 앨범들은 밥 딜런이 직접 편곡, 프로듀싱했다. 여기서 딜런은 기타 테크닉을 선보이기도 한다. 이전에는 자작곡 중에 그것을 집어넣거나 차용하는 형태로 전달되고 있었는데, 이 두 작품에는 가사나 곡 모두 옛날 형태를 답습하고 있고 밥 딜런의 해석도 적다. 첫번째 작품은 1992년 11월 3일 발표된 ‘Good as I Been to You’, 두번째 작품은 1993년 10월 26일 발표된 ‘World Gone Wrong’이다. ‘World Gone Wrong’에는 블루스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두 앨범 모두 평단에 평은 주로 호평이었지만 상업적 성과에서는 부진했다.

1992년은 밥 딜런의 레코드 데뷔 30주년이었다. 그것을 축하하는 음악이벤트가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10월 16일 개최된다. 밥 딜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수많은 뮤지션들이 모여 밥 딜런의 노래를 불렀다. 음악 감독은 과거 딜런 밴드의 기타리스트 G.E.스미스였고 참석한 뮤지션들은 대부분의 반주를 맡는 ‘하우스 밴드’에 부커티 앤 앰지스, 짐 켈트너, 안톤 피그, 케롤린 헤스터, 더 클랜시 브라더스, 토니 메이컴, 로비 오코넬, 리치 해이븐스, 조니 캐쉬 & 준 카터 캐쉬, 윌리 넬슨, 스티비 원더, 존 멜렌켐프, 루 리드, 에디 베더, 시네이드 오코너, 닐 영, 에릭 클랩튼, 더 밴드, 조니 윈터, 로저 맥귄, 조지 해리슨 등등 거물급 아티스트들이 대거 출연했다. 이 공연은 전세계로도 생중계됬다. 네시간에 걸친 콘서트에 밥 딜런은 마지막에 등장해서 직접 기타를 치면서 두 곡[45]을 불렀고 ‘My Back Pages’를 닐 영과 에릭 클립튼 등이 릴레이로 선보였다. TV 방송시간 틀 안에 다 수록할 수 없어서 중계방송에서는 볼 수 없던 앵콜 장면에서는 밥 딜런은 혼자 직접 기타를 치면서 ‘Girl From the North Country’를 부르기도 했다. 이벤트는 성황리에 개최됬고 밥 딜런 역시 매우 감격했다고 전해진다. 이 날의 영상을 CD와 VTR로 시판됬다.

1994년 2월 밥 딜런은 일본 방문 투어를 개최했다. 이 해에는 5월 20일 나라 도다이지 경내에서 개최된 ‘The Great Music Experience 94 AONIYOSHI’에도 출연해 도쿄 뉴필하모닉 관현악단과의 공연 형식으로 ‘A Hard Rain's a Gonna Fall’, ‘I Shall Be Released’, ‘Ring Them Bells’를 부른다. 이 콘서트는 전세계로 위성 생중계된다. 나아가 1994년 8월 14일에는 25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우드스톡 94’에도 출연한다. 딜런의 콘서트와는 전혀 다른 그런지하고 얼터너티브 록을 즐기는 젊은 관객들이 주를 이뤘기 때문에 반응을 알 수가 없었으나 딜런이 등장하자마자 장내는 환희를 하며 끓어올랐고 공연은 성공적으로 마첬다.

이 해 11월에는 MTV의 ‘Unplugged’에 언제나 투어를 함께한 딜런 밴드로 출연한다. 브랜드 오브라이언이 해먼드 오르간으로 연주를 보조했다. 밥은 오래된 전통적인 포크송을 선보이려 했으나 제작측으로부터 제지가 있어 어쩔수 없이 히트곡 위주의 무대로 변경한다.

이 당시 밥 딜런의 레이블은 곡들을 손보고 이렇게 저렇게 순서를 바꿔가며 특별 음반들을 발매한다. 1994년 11월 15일에는 ‘Bob Dylan's Greatest Hits Volume 3’, 1995년 2월 7일에는 ‘Highway 61 Interactive’[46], 1996년 6월 2일에는 ‘The Best of Bob Dylan’이 발매된다.

1991년부터 1996년까지의 밥 딜런은 투어위주의 활동을 하면서 본인의 자작곡을 발표하지 않는다. 1996년에는 ‘의무방어전적인 음반’마저 나오지 않게 된다. 당시 딜런은 본인의 계약이 갱신되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컬럼비아 레코드/소니 뮤직은 밥 딜런과 관계를 끊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1996년 가을 밥 딜런은 한 뉴욕 호텔 객실에서 프로듀서 다니엘 라노아에게 새로운 가사를 읽어주고 있었다. 라노아의 자서전 ‘Soul Mising’에 의하면 라노아가 그 가사를 다 읽자, 딜런은 ‘레코드로 만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고, 그 가사는 라노아가 여태까지 한번도 느껴본적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여태껏 일찍이 그 누구도 써본적이 없는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몇십 년에 걸친 인생 경험과 고백이 적힌 페이지가 내 눈 앞에 있었다. 로큰롤은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신화가 이 사내의 강철처럼 냉철한, 새파란 눈에 의해 분쇄되었다.”

― 다니엘 라노아

라노아는 이 가사를 읽자마자 딜런의 새 앨범이 걸작이라고 직감했다. 밥의 새로운 가사 안에 들어있는 비트와 멜로디에 대한 이미지의 조각들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밥은 그때 리코딩에 참고하라며 로큰롤, 블루스의 추천 레코드 리스트를 라노아에게 건넸다. 거기에는 찰리 패튼, 리틀 월터, 아서 알렉산더 등의 작품들이 적혀 있었다. 그 작품들에 공통되는 사운드 특성은 주로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작품들이 가지는 황량함, 녹음 기자재의 한계점을 음악의 파워가 능가함으로서 발생하는 비틀림, 라노아의 자서전에는 과대 입력(오버드라이브)이라고 적고 있는 현상에 의해 생기는 사운드, 바로 이것이 밥 딜런이 갈망하고 있는 것이라고 라노아는 추측했다.

밥의 새로운 앨범의 본격 리코딩 작업은 마이애미의 크라이테리아 스튜디오에서 진행됬다. 드러머 4명, 기타 2명, 페달 스틸 기타 1명, 슬라이드 기타 1명, 키보드 1명, 오르간 겸 아코디언 1명, 퍼커션 1명, 그리고 라노아 자신이 몇 종류나 되는 기타를 가지고 참가한다. 이 인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밥의 노래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스튜디오 라이브 형식이었다. 사운드의 특색을 담당한 것은 키보드의 제임스 딕킨슨과 오르간의 명수인 오기 메이어스다. 허공에 떠 있는듯한 느낌과 묵직한 중량감 양쪽 모두를 두 명의 건반주자가 자아냈고 포크, 블루스, 로큰롤이 교회음악으로 접착되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었다. 11일 정도의 녹음 작업 후,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믹스한 후 완성 작업이 진행되었다. 밥은 완성단계에서도 가사나 코드를 추가적으로 변경했다. 앨범의 내용은 실연, 방황, 고독, 좌절, 체념, 죽음을 아름답게 또는 잔혹하게 표현한다.

도합 11곡이 수록된 이 앨범의 제목은 ‘Time Out of Mind’로 붙여졌고 1997년 9월 27일 발매된다. 앨범이 발매되자마자 그야말로 평단에서 오랜만에 극찬 세례가 쏟아진다. 평단은 거장의 부활이라고 찬사를 보냈고 이 앨범을 기점으로 80년대부터 주춤했던 음악 커리어가 완벽하게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상업적인 성과도 영국, 미국 모두 10위를 기록하며 반등한다. 이 앨범은 그래미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하며 밥 딜런 커리어 최초 본인의 앨범으로 제너럴 필드를 수상하게 된다. 딜런은 훗날 이 앨범을 만들 당시에 대해, 과거의 컨디션을 회복하려던 와중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앨범의 성과는 평단의 극찬, 상업적 반등도 있겠지만 앨범을 만들때마다 항상 고통스러워하던 밥이 마침내 편안해젔다는 점도 있고 녹음의 기본적 방법을 프로듀서에게 의존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포착할 수 있게 된다.

1997년 5월 24일, 56세의 생일을 딸 마리아의 가족과 보낸 밥 딜런은 가슴에 급작스러운 통증을 느낀다. 다음날 진행된 검사 결과 입원이 결정된다. 결과는 히스토플라즈마균 감염에 의한 심낭염이었고 ‘치사율이 발견되는 상태’라고 보도된다. 다행히도 투약만으로 회복했지만 투어들은 불가피하게 취소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레이블측에서는 발매 스케줄로 밥 딜런을 구속하는 일이 없어졌다.

1997년 12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딜런에게 백악관에서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수여했다. 빌 클린턴은 상을 수여하며 "그는 아마 다른 어떤 창조적인 예술가보다 우리 세대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평화를 어지럽힌 힘 있는 자들을 물리쳤다."라고 말했다. 1999년 딜런은 북미 투어에서 사이먼 앤 가펑클의 폴 사이먼과 함께 시작했고, 6월 1일에 시작하여 9월 18일에 끝났다. 이 콜라보레이션은 호평을 받았다.

1999년 12월 31일 타임지는 밥 딜런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타임지는 “거장 시인, 신랄한 사회 평론가, 용감무쌍한, 반문화 세대의 정신을 지도한 인물”이라고 밥 딜런을 평했다.

2.6. 2000년대

2000년 밥 딜런은 스웨덴 왕립음악원이 주관하여 음악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폴라음악상을 수상한다. 수상 이유는 “그의 업적은 40년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는 창의성을 보여줬고, 항상 혁신적인 음악을 보여줬다.”였다.

영화 애호가인 밥 딜런은 1990년 이후 몇몇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에 악곡을 제공했다. 단, 그런 것들은 이미 발표된 곡들이나 재연 버전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2000년 커티스 핸슨 감독, 마이클 더글러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토비 맥과이어, 케이티 홈스가 출연한 ‘원더 보이즈’[47]에 딜런은 신곡 ‘Things Gave Changed’를 제공한다. 핸슨 감독이 밥 딜런의 광팬이었기때문에 실현됬다고 한다. 이 노래는 상당히 좋은 평을 얻었고 2001년 골든글로브상 주제가상, 아카데미 시상식 주제가상을 모두 석권한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투어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현장 생중계로 수상 소감과 공연을 했다.

2001년 5월 24일에는 세계자연보호기금(WWF)의 공익 광고를 위해 자작곡 ‘Shelter from the Storm’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공적으로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무렵 동물들만이 나의 음악을 좋아해주었다. 이번엔 그 은혜를 갚을 차례다.”랴는 코멘트를 남겼다.[48] 이 날 밥 딜런은 60세가 된다.

이 무렵 밥 딜런은 새로운 앨범 리코딩을 작업 중이었다. 투어 밴드 구성원들, 래리 캠벨, 찰리 색스톤, 토니 가르니에, 데이비드 켐퍼가 중심이 되었다. 거기에 앨범 ‘Time Out of Mind’에도 참가한 키보드 오기 메이어스가 다시 가세했다. 메이어스는 밥이 가장 특별하게 생각했던 세션 중 한명이었다. 메이어스는 밥 딜런의 절친 더그 샘과 오랜 새월 함께 연주를 해온 유능한 오르간 연주자다. 텍사스류 멕시코 음악과 텍사스류 블루스나 컨트리가 융합된 음악인 텍스멕스 뮤직(Tex-Mex Music)의 선봉장이었다. 밥 딜런은 이 당시 텍스멕스 음악에 빠저있었는데 그런 만큼 오기 메이어스는 중요한 존재였다.

그 무렵 제작하고 있던 앨범의 프로듀서는 잭 프로스트였는데 이것은 밥 딜런이 사용하던 가명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또 한 사람의 자신에 의한 셀프 프로듀스’를 착수했다. 한 평론가는 “‘Time Out of Mind’에서 포착한 새로운 감촉, 여태까지 없었던 창작에 대한 의지, 그것을 끝내버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오기 메이어스의 재등장으로 이어진것’이라고 평했다.

밥 딜런이 잭 프로스트라는 이름으로 첫 프로듀스를 시작한 앨범은 31번째 앨범 ‘Love and Theft’였다. ‘Love and Theft’라는 이름은 1993년 간행된 영문학자 에릭 도트의 저서 ‘사랑과 절도: 블렉 페이스 민스트렐시와 미국 노동자 계급(Love and theft : blackface minstrelsy and the American working class/ Oxford University Press 간행)에 의거 하고 있다. 이 책은 19세기의 미국 민스트럴 쇼[49]에 관한 연구서다.

밥 딜런은 루트 록에 대한 경의를, 과거의 음악이나 문학 작품을 거듭 본뜨고 모방하며 차용하고 해체함으로써 표현했다. ‘Love and Theft’도 그런 작품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 앨범에서 들리는 밥의 목소리는 전혀 그늘이 없었고 감정 표현도 섬세했다. 거기에서 자신의 ‘욕망=사랑’으로 뽑아낸 노래를 현재진행형의 가창 표현, 즉 현재 살아 있는 딜런의 방식으로 현재 세상에 발신한다. 진지한 표현의 노래만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가벼운 곡들이나 로맨틱한 밝은 곡들도 있다. 앨범은 2001년 9월 11일, 미국이 동시 다발 테러를 당했던 그 날 발매된다. 앨범은 평단에서 전작만큼의 극찬을 받고 2001년 평단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앨범을 기록한다.[50] 상업적 성과도 전작을 뛰어 넘는 미국 5위, 영국 3위를 기록했고 그래미에서 최우수 콘템포러리 포크상을 수상한다.

2002년 7월에는 밥 딜런이 주연하고 각본은 맡은 ‘가장과 익명’이 촬영되었다. 감독은 래리 찰스였고 함께 출연을 맡은 배우들은 존 굿맨, 제시카 랭, 제프 브리지스, 페넬로페 크루즈 등이었다. 내용은 내전과 내란이 계속되는 어느 나라의 자선 콘서트에 초청된 왕년의 록 스타 잭 페이트(밥 딜런이 맡은 역할), 그가 그 나라에서 발생되는 온갖 트러블 속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딜런은 신곡도 불렀는데 밥 딜런의 음악 안에서 나온 커버곡도 다수 사용된다. 밥 딜런이 출연하고 있음을 인지되는 것만으로도 현실과 영화 속 시간이 비틀어져 하나가 되어버린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영화다. 밥 딜런이 감독한 ‘레날드&클라라’에서도 그런 경향을 볼 수 있다. 영화의 평은 매우 좋지 않았고 뉴욕과 로스엔젤레스에서 2003년 7월 25일부터 단기간 상영됬다.

2000년대에도 역시 네버 엔딩 투어를 꾸준히 진행했고 그 가운데, 밥 딜런은 2004년 10월 ‘자서전(Chronicles: Volume One)’을 출판한다. 자서전은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2004년 뉴욕타임스가 뽑은 올해 최고의 책에 선정되고 전미 도서상(National Book Critics Circle Award) 후보에도 오르는 등 비평과 상업적 성과를 거둔다.

2005년 9월 26일부터 27일까지는 미국 전역에서 밥 딜런의 텔레비전용 다큐멘터리 영화 ‘노 디렉션 홈: 밥 딜런(No Direction Home)이 방영되었다. 감독은 마틴 스콜세지였고, 방영시간은 3시간 28분의 장편이었다. 1966년에 있었던 딜런의 오토바이 사고까지의 밥 딜런의 발자취를 관계자들의 증언들과 기록 영상을 섞어가며 전하는 다큐멘터리다. 무엇보다 딜런이 자신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밥 딜런은 분명 스콜세지 감독을 향해 말하고 있을거라고만 보는 이들은 생각했지만 실제로 다큐멘터리 제작 중 두 사람은 단 한번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심지어 만난 적도 없다. 이 다큐멘터리는 비평적으로 높은 성과를 거뒀고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4점 만점을 주었고 2006년 4월에는 피바디상을, 스콜세지 감독은 그래미상을 받는다. 이 영화의 방영 전에는 희귀 음원으로 가득 찬 ‘The Bootleg Series Vol. 7: No Direction Home: The Soundtrack’이 8월 30일 발매됬다.

2006년이 되자마자 밥 딜런은 새로운 앨범 제작에 착수한다. 이번 앨범의 프로듀싱도 밥 딜런의 단독으로 이루어진다. 이 앨범의 녹음은 게스트를 넣지 않고 투어 밴드 구성원들만으로 이루어졌다. 일찍이 엘비스 프레슬리나 칼 퍼킨스가 녹음한 바 있던 멤피스의 선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했고 딜런은 이 곳에서의 녹음을 “최고를 녹음했다.”며 코멘트를 남겼다. 앨범은 인간의 죽음, 사라져 가는 자, 숙명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사운드와 언어와 연주가 쾌활한 비트를 각인시키며 결속하고 있다.

앨범은 5년만에 ‘Modern Times’라는 이름으로 2006년 8월 29일 발매된다. 평단은 역시 찬사를 보냈고 롤링 스톤은 “거장의 믿기 힘든 3연속 걸작”이라는 평을 내린다. 상업적 성과는 전작을 뛰어넘는 65세의 고령의 나이로 미국 빌보드 200 1위, 영국 3위를 기록한다. 또 그래미 최우수 콘템포러리 아메리카나상, ‘Someday Baby’는 최우수 록 보컬상을 수상한다.

2006년 5월 3일에는 밥 딜런을 알고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깜짝놀랄만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XM 위성 FM을 통해 딜런이 퍼스널리티를 담당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방송이 개시된다.

프로그램의 타이틀은 ‘Theme Time Radio Hour’였다. 날씨, 물, 어머니, 운세, 부자와 가난한 사람, 결혼, 이혼, 고양이, 개, 새 등, 매주 특정 테마를 따라 선택된 곡들로 구성된다. 밥 딜런은 그 한 곡 한 곡을 소개하고 각각에 코멘트도 단다. 해당 곡의 역사적 혹은 지리적, 문화적 배경에 대해 말해주는 경우도 있었고 연주하고 있는 뮤지션에 대해 해설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테마와 관련된 고찰을 선보이기도 했다. 딜런은 라디오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야기했고 풍부한 지식을 보여줬다. 선곡 스태프는 팀을 만들어 대응하고 있었는데, 매주 방송을 탄 곡들은, 컨트리, 포크, 재즈, 로큰롤, R&B, 라틴음악 등 광범위하게 분포됬다. 밥 딜런이 어린 시절 들었던 노래들, 혹은 그보다 더더욱 오래된 노래들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펑크, 힙합, 하드록에 최신 팝들도 선곡하기도 했다. 이 방송은 약간의 간격을 두면서 두 번째 시즌까지 100회가 방송되었고 2009년 4월까지 계속됬다. 딜런이 어린시절부터 라디오를 사랑했고 라디오에 의해 성장했기 때문에 의미가 남다른 프로그램이었다. 방송을 통해 방송에 탄 노래들을 묶은 옴니버스 음반들도 나왔다.

2007년 11월에는 밥 딜런을 이미지한 영화 ‘아임 낫 데어[51]’가 개봉한다. 감독은 바비 인형만을 사용한 카펜터스의 전기 영화, 글램 록을 테마로 한 영화 벨벳 골드마인을 감독한 토드 헤인즈였다. 감독 토드 헤인즈는 “밥 딜런의 예술적 업적은 내게서 어떤 보증 따위를 필요치 않는다. 그를 좋아하건 그렇지 않건 전후 문화와 대중음악의 영향력있는 리더로서 그를 피해갈 방법이란 없다”며 딜런을 평했다.

토드 헤인즈가 밥 딜런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딜런의 오랜 매니저 제프 로슨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그가 알려준 딱 한 가지 비책이란 이거였다. 절대로 “천재적인”, “시대의 목소리” 따위의 표현은 쓰지 말고 기획안을 작성하여 밥 딜런에게 보낼 것. 지금도 밥 딜런이 이 프로젝트를 허락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실토하는 토드 헤인즈가 자기의 지난 작품들과 함께 묶어 밥 딜런에게 동봉해 보낸 기획안에는 이런 제목이 적혀 있었다. “아임 낫 데어: 딜런에 관한 영화에 있어서의 추정들.” 그리고 밥 딜런은 자기를 추정해보겠다고 청한 자에게 생애 처음으로 그 자신의 전기 영화를 허락했다. 지금껏 딜런은 뻔하고 당연한 헌사가 아니라 용감한 추정을 기다린 것이다.

밥 딜런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읽고 본 다음 토드 헤인즈가 결정한 영화의 방향이 실은 밥 딜런이 원하던 모양새와 이미 같았다. 밥 딜런에 관한 영화는 “시간대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전기영화가 될 수는 없다. 실제 딜런 혹은 진짜 딜런을 찾으려던 전기작가들은 모두 실패하고 있다. 픽션을 통하지 않고는 진실을 전달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동시에 “딜런에 관해 알려져 있던 인식들을 산산조각내고 싶었다. 특정 시대와 장소를 살았던 창조적 예술가로서, 동시에 미국 대중의 투쟁, 대립, 전통을 체화하고 있는 밥 딜런이라는 사람을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한번 뒤집어보고 싶었다. 이 영화가 딜런의 광팬들을 건드려 도취와 분노를 동시에 일으키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욕망도 갖고 있었다. 적어도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밥 딜런에 관한 영화가 확실한데 밥 딜런은 등장하지 않는 영화라면서, 그런데 밥 딜런은 이런 사람이었고 또는 저런 사람이었다며 빠지지 않고 한마디씩 거들고 싶어하니 토드 헤인즈의 욕망은 얼마간 성공이다.

주드(케이트 블란쳇), 우디 거스리(마커스 칼 프랭클린), 아르튀르 랭보(벤 휘쇼), 잭/존(크리스천 베일), 로비(히스 레저), 빌리(리처드 기어). ‘아임 낫 데어’는 특별한 설명없이 이 여섯 인물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전개한다. 그 인물들은 각자의 이름을 갖고 있지만 실은 다 밥 딜런이다. 주드는 포크 음악을 등지고 백밴드들과 함께 전자기타를 메고 연주하는 것으로 전향한 시기의 밥 딜런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포크와 시대를 배신한 명목으로 대중과 언론의 지탄에 시달리던 상황이 묘사된다. 우디 거스리는 젊은 시절 밥 딜런의 우상이었던 컨트리 음악가 우디 거스리의 실명을 가져온 것이다. 백인인 우디 거스리를 흑인 소년으로 바꾼 뒤 밥 딜런의 유년 시절에 이입한, 재치 넘치는 가정이다. 랭보의 경우는 음악적인 면모보다 언어를 다루는 시인의 기질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고, 밥 딜런이 했던 특정 기자회견의 모습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영화에서 “시대의 양심”으로 불리는 잭은 당연히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를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데뷔 초기 포크계의 밥 딜런을 상기시킨다. 그 잭이 종적을 감추고 20년 뒤 음악가에서 목회자로 변신하여 ‘목사 존’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크리스천 베일은 이때도 존을 맡아 일인이역을 한다. 한편 ‘아임 낫 데어’에는 영화 속 영화가 삽입되는데, 사라진 전설의 포크 가수 잭에 관한 영화에서 잭의 역할을 로비라는 배우가 맡는다. 이때 로비는 밥 딜런의 연애사와 가정사에 대한 부분을 대변한다. 마침내 가장 뜬금없이 등장하는 서부 사나이 빌리는 밥 딜런이 조연으로 출연했던 샘 페킨파 영화 ‘관계의 종말’의 주인공 빌리 더 키드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관계의 종말’에서 밥 딜런이 맡았던 역할 앨리아스는 무법자 빌리 더 키드를 선망하여 따르는 추종자 중 한명이다. ‘아임 낫 데어’에서는 이들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캐스팅 기준에 대해 ‘내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배우를 선택했을 뿐’이라는 대답을 했다. 그에 걸맞게 <아임 낫 데어>에는 6명의 밥 딜런 뿐 아니라 조연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배우들이 포진해있다. 촬영 전에는 케이트 블란쳇이 밥 딜런이 된다는 소식의 놀라움과 우려의 목소리들은 있었으나 그녀가 현장에 나타나는 순간 잠잠해졌다. 함께 연기한 배우들조차 ‘케이트가 가장 밥 딜런과 비슷하다. 외모와 분위기는 물론, 목소리까지 비슷하다’고 감탄했을 정도. ‘아임 낫 데어’가 처음 공개된 베니스 영화제는 심사위원 대상과 함께 그녀에게 여우주연상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이후 그녀는 <아임 낫 데어>로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여우조연상, 시카고 영화평론가협회 여우조연상, 센트럴 오하이오 영화평론협회 여우조연상, 라스베가스 영화평론협회 여우조연상, 국제 영화평론 협회 여우조연상, 산 디에고 영화평론협회 특별상, 토론토 영화평론협회 여우조연상 등 세계의 연기상을 휩쓴다. 크리스찬 베일은 영화 속에서 60년대 초 저항가요의 스타로 떠오른 ‘잭’과 중년 이후 기독교에 귀의해 선교활동을 펼친 ‘존’의 1인 2역을 맡아 <벨벳 골드마인> 이후 두번째 토드 헤인즈 작품에 출연했다. 리처드 기어는 서부극에나 등장할 법한 시골 마을의 은퇴한 총잡이 ‘빌리 더 키드’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벤 휘쇼는 딜런이 사랑했다는 프랑스 시인 ‘아서 랭보’의 모습이며, 아역배우 마커스 칼 프랭클린에 이르러서 밥 딜런은 아예 천재적 소질을 가진 흑인 꼬마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히스 레저는 딜런의 사랑 이야기를 반영한 캐릭터인 ‘로비’로 변신했다.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했으나 비평가들에게 나쁘지 않은 평을 얻었고 상술했듯이 케이트 블란쳇은 많은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휩쓴다. 그리고 밥 딜런 본인도 이 영화를 호평했으며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했다고 평했다.

2007년 10월 1일, 콜럼비아 레코드는 3장의 베스트 앨범 ‘Dylan’을 발매했고, Dylan07 로고 아래에 그의 전 생애를 그림으로 그렸다. 마크 론슨은 이 앨범에 참여해 1966년 발매된 싱글 “Most Likely You Go Your Way and I'll Go Mine"을 재리믹스 했고 이 버전은 UK차트 51위를 기록한다.

2008년 4월, 비교불가한 시의 힘을 가진 수 많은 서정적인 작품들을 통해 대중 음악과 미국 문화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이유로 퓰리쳐상 특별상을 수상한다.

2008년 10월 7일에는 1989년 ‘Oh Mercy’부터 2006년 ‘Modern Times’까지의 미발표 음원 27곡을 수록한 부틀렉 시리즈 8집 ‘The Bootleg Series Vol. 8 – Tell Tale Signs’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평단에서 극찬을 받는다.

2008년 딜런은 새로운 앨범 제작을 진행한다. 앨범 제작의 계기가 된 것은 ‘라 비앙 로즈’를 만든 프랑스 영화감독 올리비에 다한이 자신의 신작 영화용으로 밥 딜런에게 새로운 곡을 의뢰했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는 ‘마이 오운 러브 송’이었는데 내용은 사고로 다리를 잃고 어쩔 수 없이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전직 여성 가수가 켄자스에서 뉴올리언스까지 여행을 한다는 로드 무비다. 감독 올리비에 다한은 “미국 남부를 느끼게 해주는 노래를 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 다한 감독은 느닷없이 딜런에게 10~12곡의 신곡을 요구했다. 그 곡 모두를 영화 본편에서 사용할 것이며 제각각의 곡들에 의미를 부가할 작정이라는 것이다. 밥은 딜런은 이 요청에 다소 어이없어 했으나 이 제안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의뢰에 따라 처음으로 만든 노래는 ‘Life is Hard’었다.

이 곡이 완성됨으로써 영화용과는 별도의 곡들이 계속 만들어졌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앨범까지 나왔다. 텍사스에서 멕시코로 도피행을 떠나는 감각의 앨범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딜런은 말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딜런은 작사에 관해서는 옛 친구이자 멕시코 주변과의 인연이 깊은 로버트 헌터와 공동 작업을 했고 둘이 함께 9곡을 만든다. 작품의 주된 무대는 휴스턴과 멕시코 국경 지역이다. 접경지대의 텍사스풍 멕시칸, 이른바 텍스맥스 음악과 50년대 시카고 블루스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는 곡들이 다수 있다. 이 앨범에는 밥 딜런의 키보드가 사운드의 핵심이 되고 있는 곡들이 적지 않다. 아울러 아코디언을 담당하고 있는 밴드 데이비드 히달고의 아코디언 로스 로보스이다.[52]

앨범은 ‘Together Through Life’라는 이름으로 2009년 4월 28일 발매된다. 앨범은 발매되자마자 대박이 났는데 67세의 나이로 미국 빌보드 200 최고령 1위를 기록한다.[53] 영국에서도 앨범 ‘New Mornig’ 이후 39년만에 1위를 기록한다. 이것도 신기록이었는데 가장 긴 공백 기간 이후 1위를 기록한 아티스트가 된다. 평단에 평은 전작들만큼의 극찬은 아니었으나 메타크리틱 76점을 기록하며 평균 이상의 수작이었다는 평이다.

2009년 10월 13일에는 크리스마스 앨범 ‘Christmas in the Heart’가 발매된다. 수록곡은 모두 크리스마스 스탠다들 곡들이다. 전작 연주진들과 함께 기타의 필 업처치와 코러스 부대가 7인 편성으로 가세했다. 앨범의 평은 망작까지는 아니나 평단의 호불호가 확 갈렸고 오랜만에 좋은 평을 얻지는 못했다. 이 앨범은 레코드 회사 주도가 아니라 밥 딜런 개인의 프로젝트로 추진되었다. 밥은 이 앨범 수익을 통해 발생되는 인세 전부를 영구히 기부한다고 공언했다. 미국 국내의 분은 식량지원기간 피딩아메리카로, 미국 이외의 수익은 유엔 세계식량계획(WFP)과 영국 홈리스 지원 단체 ‘Crisis’에게 갔다.

2009년 예술가로서 받을 수 있는 미국 최고의 훈장인 미국 국가 예술 훈장을 수훈받는다.

2.7. 2010년대

1990년대 이후 밥 딜런의 음악은 음악적인 뿌리 (블루스, 포크)를 찾아 회귀하는 인상을 보이고 있다. 그 후 2012년에 "Tempst"를 발매, 대중의 극찬은 물론 평론가에게도 극찬을 받았다.[54] 최근에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다룬 '스탠더드 팝' 앨범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을 통해, 밥 딜런은 시가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Horace Engdahl (전 스웨덴 아카데미 사무총장)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 이유는 "미국 가요 전통 안에서 참신하고 시적인 표현들을 창조해낸 공로." 링크

1996년 시인 앨런 긴즈버그의 제안으로 버지니아 군사대학교 교수 고든 볼이 밥 딜런을 노벨문학상 후보에 추천한 이래 해마다 유력 후보 중 한 명으로 이름이 거론되긴 했지만, 2016년에 수상자로 선정됐다. 1993년 토니 모리슨 이후 23년만에 미국인이 받는 노벨문학상이다.

문인이 아닌데 노벨문학상에 선정된 경우는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 정치인 윈스턴 처칠,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가 있지만 이들은 기존의 문학이라고 생각되는 범주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었고[55] 가수로서 이 상을 수상한 것은 밥 딜런이 처음이다.[56]

하지만 2016년 10월 19일, 밥 딜런은 노벨위원회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있었고, 노벨위원회는 밥 딜런에게 연락을 포기해서 측근에게만 수상 사실을 알렸다는 기사가 나왔다. 실제로 밥 딜런은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하여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았고 일부에서는 사르트르처럼 노벨상 수상을 거부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조심스럽게 나오기도 했다. 노벨위원회는 시상식에 오고 싶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10월 28일,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소감을 밝히며 상을 받겠다고 했지만# 다른 약속이 있다는 사유로 불참을 선언했으며, 어떤 약속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딜런은 노벨상 시상식에 수락 연설문을 보냈고, 다른 사람이 대신 연설한다고 밝혔다.# 그 다른 사람은 아지타 라지 주스웨덴 미국 대사가 대독하였다. #

다음은 밥 딜런이 스웨덴 한림원에 보낸 편지 전문.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의 가장 따뜻한 인사를 스웨덴 한림원 회원들과 오늘밤 참석해주신 기품있는 참석자들에게 보냅니다.

개인적으로 여러분과 함께 있지 못해 유감입니다. 하지만, 제가 정신적으로는 여러분과 분명히 함께 있으며 이런 권위 있는 상을 받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노벨문학상 수상은 제가 전혀 상상해본 적이 없던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저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러디어드 키플링, 버나드 쇼, 토마스 만, 펄 벅, 알베르 카뮈 같은 빼어난 가치가 있는 이들의 작품을 흡수하고 읽는 것에 친숙했습니다. 세계 곳곳 도서관에 소장되고 학교에서 가르치며 존경어린 어조로 말해지는 작품을 쓴 문학의 거장들에 언제나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이런 이름들과 함께 같은 명단에 오른다는 것은 진정으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들이 노벨상 (수상)에 대해서 생각해봤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책과 시 그리고 극본을 쓰는 세계 누구라도 안쪽 깊숙한 곳에서 비밀스러운 꿈을 품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너무 깊이 묻어뒀기 때문에 거기 있는지를 자신들도 모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노벨상을 받을 아주 적은 기회가 있다고 이야기했다면, 에 서 있다고 하는 이야기와 똑같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내가 태어나고 그리고 몇 년 뒤까지는, 세상 누구도 이 노벨상을 받을 만큼 훌륭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매우 드문 대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뉴스를 들었을 때 저는 길 위에 있었습니다. 정확히 의미를 깨닫는데 몇 분 이상 걸렸습니다. 위대한 문학가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가 자신을 극작가로 생각했다고 봅니다. 문학 작품을 쓰고 있다는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무대를 위한 말을 썼습니다.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해지기 위해서 썼다는 뜻입니다. 그가 <햄릿>을 썼을 때, 저는 그가 여러 다른 생각을 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이 역에 맞는 배우는 누구지?” “어떻게 무대에 올리지?” “이 작품 (배경을) 덴마크로 설정하는 게 맞나?” 그의 창조적 비전과 야망은 그의 마음 전면에 있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루고 고려해야 할 일상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자금 조달이 제대로 될까?” “후원자들을 위한 좋은 자리가 충분할까?” “해골을 어디에 가져다 놓아야 할까?” 저는 셰익스피어의 마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질문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문학인가?”

저는 10대 때부터 곡을 쓰기 시작했고 제 능력으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기 시작한 이후에도, 노래들에 대한 제 열망은 그 정도 거리까지만 그쳤습니다. 커피숍이나 바, 나중에는 카네기 홀이나 런던 팰라디움에서 제 노래가 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정말 크게 꿈을 꾼 게 있다면, 노래를 녹음해서 제 노래를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기를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녹음을 해서 라디오에서 자기 노래가 나온다는 뜻은 많은 청중이 있다는 뜻이고 시작하고자 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저는 제가 하고자 한 일을 지금까지 오랫동안 계속해왔습니다. 수십여번 녹음을 했고 전 세계에서 수천번의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는 모든 일의 필수적 중심에는 제 노래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다른 문화에 속한 많은 사람의 인생에서 제 노래들은 공간을 찾아낸 듯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를 아주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해야만 하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5만명 앞에서 그리고 50명 앞에서 공연해본 공연자로서 전 50명 앞에서 공연하는 게 더 어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5만명은 한가지 페르소나이지만 50명과 함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각자 모두 개인이고 다른 정체성과 세계가 있습니다. 더 명확히 사물을 인식합니다. 정직함과 그것이 재능의 깊이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가 시험 됩니다. 노벨 위원회 (위원이) 소수라는 사실이 제게는 효과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처럼, 저는 자주 창조를 위한 노력에 대한 추구와 일상의 문제들의 모든 측면을 다루는 데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노래들에 적합한 최상의 음악가는 누구지?” “맞는 스튜디오에서 녹음하고 있는 걸까?” “이 노래 조성이 맞나?” 어떤 것(고민)들은 40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한 번도 저 자신에게 “내 노래가 문학일까?”라고 질문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웨덴 한림원에 바로 그 질문(자신의 노래가 문학인지)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는 점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런 멋진 답을 주었다는 점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럼 모두 안녕히 계세요, 밥 딜런.

이날 시상식에서 축하 공연을 한 가수 겸 작가 패티 스미스는 딜런의 노래 'A Hard Rain's A-Gonna Fall'를 선곡했다.

3. 평가와 영향력

[57]

밥의 노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밥의 가사를 읽어봐야 한다. 그것들은 삶의 기쁨과 슬픔으로 채워져 있다. 밥이 되어 노래를 하면 어느 누구도 평범하게 노래할 수 없다. 가끔 난 내가 곡을 만든 것처럼, 나인 것처럼 그의 곡을 노래한다. 난 밥과 같이 가사를 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날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지미 헨드릭스


전 결코 밥 딜런이 되지 못합니다. 그는 거장입니다. 내가 누군가가 되고 싶다면 그건 그 사람(밥 딜런)입니다.

닐 영, 2005년


And now Dylan has entered that pantheon, shoving against the boundaries of the definition of ‘literature’ just as he pushed past so many borders in music.

밥 딜런은 이제 만신전에 올랐다. 음악에서 수많은 경계를 밀어냈듯이 '문학'의 정의라는 경계를 힘차게 밀어내면서.

LA 타임스, 2016년


그의 시대의 셰익스피어로 추앙 받는, 딜런... 작사의 표준을 정하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고대 그리스음유시인들 옆, 오비디우스의 옆, 낭만주의 공상가들 옆에 위치하는 가수.

― 호러스 엔그달 (문학 사학자, 전 스웨덴 아카데미 사무총장[58])


대중 음악의 가사를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리고 포크를 현대 예술로 탈바꿈시킨 역사적인 인물.

밥 딜런은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롤링 스톤스 등과 함께 대중 음악사 최정상에 위치한다. 롤링 스톤롤링 스톤 선정 100대 아티스트 2위[59]에 꼽았고 2015년에는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송라이터 위대한 송라이터 1위로 꼽기도 했다. 음악 통계 사이트인 어클레임드 뮤직에서는 비틀즈에 이어 역대 아티스트 랭킹 2위를 기록했다.

대중 음악사 최정상의 아티스트답게 그에게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는 엄청나게 많다. 굵직한 아티스트만 말하자면 비틀즈, 조니 캐쉬, 더 클래쉬의 제리 그라시아[60], 더 후의 피트 타운젠드[61], 닐 영[62], 루 리드, 브루스 스프링스틴, 데이빗 보위, 사이먼 앤 가펑클, 레너드 코헨, 록시 뮤직의 브라이언 페리, 패티 스미스, 닉 케이브, 핑크 플로이드시드 바렛, 톰 웨이츠, 조니 미첼 등이 있다. 그의 음악적 영향력을 <뉴스위크>는 70년대의 가수들 이를테면 폴 사이먼, 닐 영, 도노반, 돈 매클레인[63], 조니 미첼[64] 등을 팝 역사는 다른 말도 아닌 '딜런의 자식들'로 분류했다. R.E.M., 에서부터 징징거리는 기타 소리의 헤비 메탈 밴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뮤지션들을 '딜런의 후예'라고 일컬었다.

밥 딜런이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중 하나로 꼽히는 가장 큰 이유는 노랫말때문이다.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는 밥 딜런에 대한 가사를 감상하고 분석하는 강좌들이 개설되어 있다. 1970년대부터 영문학계에서는 그의 노랫말을 텍스트로 하는 학위 논문이 제출되기 시작했고, 문학계 일부에서도 시로 인정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현재는 대학 강의에서 밥 딜런의 노랫말이 문학 텍스트로 활용됨은 물론, 다른 문학가들과 동등하게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가 내세운 이유 역시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로, 시인으로서 밥 딜런의 공로를 인정했다.

1998년에 밥 딜런의 가사는 스탠퍼드 대학교가 후원하고 개최한 '밥 딜런에 관한 최초의 국제 학술회의'에서 학계와 시인들에게 상세히 연구되기 시작했다.

2004년 하버드 대학교의 고전 문학 교수 리처드 토마스는 "딜런"이라는 제목의 1년생 세미나를 만들어 개설한 강의는 딜런의 예술세계를 탐구하면서 고대문학을 함께 다뤘다. 그가 딜런의 음악에서 고전 시 코드를 읽어낸 건 2001년부터다. 당시 딜런이 발표한 신곡 ‘론섬 데이 블루스’를 들으며 고대 로마시대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대서사시 ‘아이네이스’를 떠올린 것이다. 2006년에 나온 앨범 ‘모던 타임스’에는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시 구절이 18구절이나 인용돼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토머스 교수는 뉴욕타임즈 인터뷰에서 “딜런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웠다. 가사를 보면 라틴어 문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04년 토머스 교수가 딜런의 영상과 노래를 교재로 고전 시를 가르친다고 했을 때 동료 교수들은 “가수 딜런 노래로 고전문학을 가르친다고?”라며 비웃었다. 심지어 학교위원회는 강좌 개설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는 “딜런은 단순한 가수가 아니다. 그는 문학과 음악이라는 이질적인 영역을 통섭한 문화 현상 그 자체”라며 교수들을 설득했고 결국 세미나가 만들어젔다. 토머스 교수의 수업은 한 학기 동안 딜런의 생애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교재는 딜런의 앨범과 영상이다. 강의계획안에는 “그의 가사를 통해 생명력이 긴 문학과 음악 문화를 배우며 베르길리우스와 호메로스 등 고대 작가의 작품을 다룬다”고 안내돼 있다. 학생들은 발표와 함께 토론에 적극 참여해야 하고 학기 말에는 2500단어 분량의 리포트를 내야 한다.

2009년 캘리포니아 대학교/샌디에이고 캠퍼스의 문학 학자이자 독일 비교 문학 교수인 윌리엄 아칸더 오브라이언은 '딜런'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적 강의를 개설하고 세계 문학에 기여한 딜런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미적, 문화적 중요성"을 기념했다.

문학 평론계 최고의 평론가 중 한 명으로 간주되는 크리스토퍼 릭스는 밥 딜런의 작품을 분석하고 500페이지 분량의 책 'Dylan's Visions of Sin'를 공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딜런을 언어적으로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딜런에 관한 책을 존 밀턴, 존 키츠, 앨프리드 테니슨, 토마스 스턴스 엘리엇에 관한 서적과 함께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영문학 분야 가장 권위 있는 문학 선집으로 알려진 『노튼 앤솔러지』에도 딜런의 가사가 실려 있다. 〈스페인산 가죽 부츠(Boots of Spanish Leather)〉가 『노튼 시선집(The Norton Anthology of Poetry)』(2005)에, 〈미스터 탬버린 맨(Mr. Tambourine Man)〉이 『노튼 문학 입문집(Norton Introduction to Literature)』(2010)에 수록됐다.

과학자들까지 그의 가사를 논문에 인용을 많이 해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는 어렸을 때 시인 랭보를 좋아했고 지금의 이름도 영국 시인인 딜런 토머스에게서 따올 정도로 시와 가까이 있었다. 때로는 가사가 비유와 상징을 사용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도 있지만 저항정신을 담으면서도 사회와 인간, 인생을 바라보는 따뜻함을 잊지 않았다.시대와 주류에 맞서는 저항성에 예술성이 더해지면서 그의 노래의 진정성은 진가를 발휘했다. 창법도 때로는 음정과 박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창법으로 읊조리듯 불러[65] 아티스트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존 레논 역시 소년과 소녀의 사랑 얘기밖에 몰랐는데 그의 음악을 듣고 나서 인생, 사회, 종교에 대한 노랫말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60년 보헤미안들의 성지였던 그리니치 빌리지에 정착한 그는 우디 거스리와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포크 커뮤니티의 정치적 성향에 자극받아[66] 저항적, 사회 비판적 성격을 띤 포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1962년 밥 딜런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 존 해먼드에 의해 컬럼비아레코드에서 데뷔앨범을 낸 후, 1963년 《프리휠링 밥 딜런The Freewheelin’ Bob Dylan》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이 앨범에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을 비롯한 〈전쟁의 지배자들Masters of War〉[67] , 〈궂은 비가[68] 쏟아지네A Hard Rain’s A―Gonna Fall〉 등 지금까지 불리는 수많은 곡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앨범으로 밥 딜런은 저항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국이었으면 블랙리스트카더라 실제로 저 앨범을 내놓을 즈음에 예정되어 있던 에드 설리번 쇼 출연이 거기서 부르려던 노래가 문제가 되어[69] 직전에 취소가 된 일이 있었다. 사실은 노래를 바꾸기만 하면 출연할 수 있었지만 딜런 본인이 이 노래를 부르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무산된 것.(...)[70]

1960년대는 세계사적 전환기였다. 선발 제국주의 국가와 후발 제국주의 국가가 맞붙은 2차 세계대전 후 세계는 동서로 분할되고, 냉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의 각축장이 된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제국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두 개의 제국 어디에도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저항이 19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 시기 미국의 현실을 가장 적확하게 노래한 사람이 바로 밥 딜런이었다.

한국의 학생운동에도 영향을 준 ‘Blowin‘ in the Wind’(바람만이 아는 대답)과 ‘The Times They Are a-Changin’과 같은 노래들은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저항적 노랫말로 시민권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다. 이러한 가사들로 밥 딜런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저항의 아이콘, 반전가수로 인식되었다.

또 딜런은 장르적으로 포크, 록, 컨트리, 블루스에 걸쳐있으며, 포크록을 창시해 1960년대 청춘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포크록의 전형을 보여준 ‘Highway 61 Revisited’와 ‘Blonde On Blonde’ 앨범은 포크의 저항성과 록의 마이너(하위문화)를 결합한 것이다.

유명한 비평가 그레일 마커스는 그의 앨범을 연구한 저서 <보이지 않는 공화국>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음악은 음악으로만 보면 안 된다. 그것은 대중음악의 정신혁명과 관계한다. 그의 음악은 20세기 모더니즘의 가장 강렬한 분출이다. 이 점을 빼놓고는 왜 그의 음악과 앨범이 명작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여기까지 읽고도 '도대체 이 사람이 뭐길래 이리 잘났다고 호들갑인가' 라고 생각한다면 임진모의 평을 읽어보면 참고가 될 것이다. 아주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밥 딜런의 노래가 이해되기 시작했다면 당신은 팝과 락 등의 대중음악 감상에 있어서 아마추어로는 거의 최고의 수준에 올라갔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의 노래들은 그만큼 미적으로 뛰어나지만 이해하기도 어렵다.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중략)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임진모, 1999년

4. 트리비아

  • 엄청난 워커홀릭이다. 1962년 앨범 발매 이후 최소 2~3년안에 무조건 앨범을 냈다. 이렇게 앨범을 자주 냄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작품의 퀄리티를 계속 유지한다. 가장 오래된 공백기는 2001년 'love and theft' 발매 후 5년만에 'modern times' 앨범을 낸것이다. 2015년, 2016년, 2017년엔 3년 연속으로 앨범을 내기도 했다. 또 1988년부터 2017년까지 한해도 빠지지 않고 투어를 진행했다. 투어의 이름은 ‘Never Ending Tour’.

언제나 그는 제 영웅입니다. 그를 흠모하는 마음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깊어젔어요. 그렇게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스티브 잡스

끊임없이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만이 예술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밥 딜런과 피카소는 언제나 실패의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스티브 잡스

  • 스티브 잡스가 가장 존경한 인물중의 한명이다.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말. 딜런이 녹음한 773곡 전곡이 담긴 디지털 패키지 세트를 아이튠스 스토어에서 판매하기로 했는데 상품의 출시를 알리면서 잡스는 "밥 딜런은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시인이자 뮤지션이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제 영웅이기도 하다"고 소개했다. 영화 ‘스티브 잡스’의 대니 보일 감독은 “그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반골로 부르며 우상화했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그 모든 사람 중에서 딜런이 잡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애플 초창기 잡스는 100시간 분량이 넘는 1960년대 딜런 음악 해적판을 수집했다. 월터 아이잭슨이 저술한 잡스 전기에 따르면 그와 애플 초기의 스티브 워즈니악은 딜런 팬으로서 마음이 맞았다. “딜런의 노래책을 구입해 가사를 해석하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고 워즈니악은 말했다. “딜런의 가사들은 창조적 사고를 불러내는 주문이었다.” 그 뒤 잡스는 1984년 매킨토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밥 딜런의 곡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 마침내 딜런과 상봉했다. 잡스의 전기에 따르면 두 사람은 “딜런의 방 앞쪽 테라스에 앉아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잡스는 긴장했지만 그의 우상은 “내가 바라던 그대로였다. 정말로 허심탄회하고 솔직했다.” 잡스가 기억하는 한, 그가 너무 긴장해서 말이 잘 안 나온 적은 오직 밥 딜런을 만났을 때(2004년 10월)뿐이었다'는 대목도 있다. 1984년 매킨토시를 공식 발표할 때 스티브 잡스는 연설 첫머리에 딜런의 ‘세상이 변하고 있네(The Times They Are a-Changin’)’ 중 둘째 행을 인용했다. 한편으로 잡스는 바에즈와 데이트를 했다
  • 1960년대 당시 인터뷰, 기사들

시카고 데일리 뉴스: 당신은 이른바 포크록 음악을 부를 생각이 있나요?

밥 딜런: 아니요, 그건 포크록이 아닙니다. 그냥 악기들이요.... 나는 그걸 기계 음향이라고 불러요. 뭐랄까 독립음악 같은 거죠. 정말이지 설명을 못 하겠는데... 나는 열세 살인가 열네 살때부터 열 다섯 살 때까지 로큰롤을 연주하고 있었지만, 열여섯 살인가 열일곱 살때 그만두고 말았죠. 그냥 그런 식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시: 포크 사운드는 왜 그만뒀습니까?

밥: 그것만 줄창 하기에는 여기저기 너무 많이 가본 거죠. 진정한 포크는 절대로 42번가를 보지 않죠. 비행기를 타는 법이 없어요.

시: 마치 사람들로부터 끔찍하게 유리된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밥: 어떤 압력 때문에 그런건 아니에요, 그냥 습관이죠. 내가 원래 그런 식이에요.. 모르겠어요, 연결되는 것보다 단절되는게 더 쉬운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나는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엄청나게 존경해요.. 관련이 너무 많았죠, 상황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아아서, 자신을 깨트리는 것보다는 그냥 관련되지 않았죠..

시: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는걸 피하시나요?

밥: 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요. 나 같은, 역시 단절된 사람들이요. 단절된 사람들이 많죠. 나는 소외되었다거나 단절되었다거나 두렵다는 느낌이 없어요. 단절된 사람들 간의 어떤 종류의 조직화는 별로예요. 나는 그냥 어떤 조직과도 함께 갈 수 없어요. 언젠가는 어떤 지하철에서 자선이 완전히 혼자 있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르죠. 전기도 나가서, 오도가도 못 하고, 40명의 사람과 함께. 그러면 저는 그들을 알아야 했죠. 그때는 그냥 해야 하는 일을 할 거예요.

― 1965년 11월, 시카고 데일리 뉴스

내가 그의 셋째 음반을 건네고 그에게 사인을 요청하자 그는 자기 사진에 턱수염과 콧수염을 그리고 서명했다. 나는 그에게 블루스를 정의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말했다. “블루스는 주머니가 텅 빈 바지입니다. 마음에 들어요? 블루스는 주머니가 텅 빈 찢어진 바지라고요.”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블루스(blues)는 색이에요. 그게 다에요.” 그리고 나는 “미국 포크 음악에서 본인의 위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물었다. 그는 말했다. “내가 포크 가수면 개나 소나 포크 가수일걸요.” 나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요. 그리고 앞으로 올 세대가 그들 자신의 지도자를 발견할까요?” 그는 약간 더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새 세대를 믿어요. 곧 새 세대가 내게 맞서 반항할겁니다. 내가 더 예전 세대에 반항했듯이요. 변화만큼 안정적인 건 없지요. 나는 그게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 데일리 헬럴드, 스튜어트 크럼프[71]

딜런은 그가 자신을 의식하는 동안 모든 이가 자신을 의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탬버린 맨을 들을 수 있는 그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동시대인들의 야심의 핵을 건드렸습니다. 오크와 팩스턴과 팀 하딘 같은 소수의 사람들은 그의 에너지를 느끼고 에너지를 전달받았습니다. 일부, 엔더슨교 블루와 나머지, 리처나 파리나 같은 이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영웅이었고 마지막 위대한 소포모어인 폴 사이먼은 딜런에게 충격을 받았지만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 마이클 토머스, 1968년 8월

KQED 방송국: 자신이 기본적으로 가수라 생각합니까, 시인이라 생각합니까?

밥 딜런: 아 나는 자신을 노래하고 춤추는 남자라고 생각해요.

K: 당신의 개인적 미래 희망은 뭐고 세계가 어떻게 달라졌으면 좋겠습니까?

밥: 미래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없고 그냥 갈아 신을 장화가 많았으면 좋겠네요

― 센프란시스코 KQED 방송국, 1965년 12월 3일

KQED: 포크 가수 가운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오늘날 저항 가수들로 규정 할 수 있을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밥 딜런: 이해가 안 가는데요. 다시 질문해주시겠습니까?

K: 당신과 동일한 음악적 터전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저항 가수인 사람들이 얼마나 되나요? 즉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오늘날 사는 사회적 상태에 관해 저항하는 데 음악을 이용하나요?

밥: 얼마나 많냐고요? 약 136명이요 (웃음) 136명이나 아니면 132명이요.

K: 저항이라는 단어는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나요?

밥: 노래하고 싶지 않을 때 노래를 한다는 뜻이지요. 노래하고 싶은 희망을 거스르며 노래한다는 뜻입니다.

K: 저항가요를 부르시나요?

밥: 아니요.

K: 무슨 노래를 부르시나요?

밥: 모든 사랑 노래요.

K: 개명을 하셨다는 게 사실인가요? 그렇다면 다른 이름은 뭔가요?

밥: 쿠네제비치요. 친척들이 이곳저곳에서 찾아여 콘서트 표 같은걸 달라고 할까 봐 바꿨어요.

K: 밥, 오늘날 가수들은 왜 그렇게 마약을 널리 이용할까요?

밥: 몰라요. 당신은 가수인가요?

Q: 밥, 당신은 작곡을 할 때 어떤 주법을 사용하시나요, 아니면 기법이라고 부르나요?

밥: 음, 그냥 앉아서 정신 차려보면 곡이 나왔어요.

Q: 당신은 왜 우리와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면을 썼나요?

밥: 나는 그냥 당신 질문에 수준에 맞취 답변하고 있을 뿐인데요.

Q: 틀림없이 천 번은 들으셨을 질문인데요. 음악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시나요? 저는 노래 한 곡이 이해가 안 가는데요.

밥: 음, 기분 나뻐하거나 하지 마세요. 나는 당신에게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아요. 못 알아들었다면, 정말이지 고민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당신한테 하는 말이 아니니까.

Q: 글을 쓸 때 뭔가를 말하려고 하시나요? 아니면 그냥 즐기시나요?

밥: 나는 그냥 엔터테이너예요. 그게 다에요.

Q: 당신은 글을 쓰고 노래하는게 자신에게 진정 중요하다고 느끼시나요?

밥: 당신 때문에 화가 날 것 같은데요.

Q: 아니면 그냥 잘되어가기 때문에 하고 싶은건가요? 당신이 쓰는 것들에 대해서 진심으로 느끼나요?

밥: 느낄게 뭐가 있는데요? 몇 개만 대봐요.

Q: 기본적 감정들이요. 고통, 후회, 사랑...

밥: 나는 그런 감정이 없는데요.

Q: 당신은 작곡을 할 때 어떤 감정을 느끼나요?

밥: 나는 내 느낌들을 설명할 필요 없어요! 여기 재판정이 아니에요!

― 센프란시스코 KQED 방송국, 1965년 12월

플레이보이: 왜 저항가요를 작곡하고 부르는 것을 그만두셨나요?

밥 딜런: 메시지가 있는 노래들은 다들 알겠지만, 지겨워요. 내가 하려는 건 시청을 세내서 약 50명의 웨스트 유니온[72] 사람들을 데려오는거에요. 내 말은 그러면 진짜 메시지가 있을 수 있겠죠.

플: 작년에 한 인터뷰어에게 ‘나는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게 사실이라면 더 기대할게 남아 있나요?

밥: 구원이요. 그낭 순전한 구원이요.

플: 소년 시절 꿈의 정석인, 커서 대통령이 되는 꿈을 꾼 적이 있나요?

밥: 아니요. 어렸을때는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이었어요. 누가 트루먼이 되고 싶겠어요?

플: 음, 당신이 대통령이라고 칩시다. 첫 1,000일 동안 무슨 성과를 달성하고 싶나요.

밥: 맨 처음 할 일은 아마도 백악관을 옮겨야죠. 나는 즉시 미국 국가를 새로 쓸 거고, 어린 학생들은 ‘아름다운 미국’을 암기하는 대신 ‘데솔레이션 로’를 외워야 할겁니다. 그리고 나는 마오쩌둥에게 당장 승부를 걸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싸우겠어요.

― 플레이보이, 1965년

  • 알다시피 가사 쓰는 실력을 보면 과연 보통이 아니다. 신랄하면서도 예리한 촌철살인적인 발언들은 그를 히피 세대의 대변인으로 자리잡게 했다.[73] 하지만 그런 인기와 달리 그의 행동들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아웃사이더적인 면모가 많았다. 이런 독단적이고 개인적인 행동들 때문에 인생사가 심각하게 우여곡절이 많은 편이다. 이혼도 자주 했고, 마약도 하고, 주변 사람들과 불화도 심했다.
  • 반전운동, 반문화운동, 저항운동의 상징이다. 하지만 본인은 자신이 이런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을 늘 불편해 하여 음악 스타일, 대외적인 이미지를 몇년 단위로 바꾸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당대 시국과 관련된 발언 자체를 하지 않고[74] (그를 접한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앞 뒤 연결이 힘들고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보이는 등[75] 대중과 언론의 기대를 아랑곳 않는 행보를 보여왔던 탓에 영미권에서는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전술한 것 못지 않게 강하다.
  • 딜런은 음악적으로 뿐 아니라 음악외적인 이미지와 행동양식 면에서도 동시대 및 후대의 뮤지션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썬글래스를 쓰고 담배를 꼬나물고 늘 티꺼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건방진 이미지와 수수께끼 같고 냉소적인 행동방식을 통해 한 락뮤지션 이미지의 원형을 만들어낸 원조가 바로 밥 딜런이다. 역대 록 뮤지션들 중에 섹시한 스타일로 쿨한 이미지의 원조 스타가 엘비스 프레슬리라면, '지적인' 스타일로 쿨한 이미지의 원조가 바로 밥 딜런이다.[76] 특히 벨벳 언더그라운드루 리드가 밥 딜런의 그런 이미지를 모방하며 이미지 스타일과 언행방식의 롤모델로 삼았다는 점은 꽤 유명하다.

  • 60,70년대에는 앤디 워홀과 관계가 있을 정도로 유명했지만, 2015년 20대 경관에게 노숙자취급을 받아서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트리기도 했다.
  • 90년대 번역 출판된 소설 중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비롯한 일본어 소설을 보면 밥 딜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편인데, 이름이 보브 딜런으로 표기되어있다. 밥 딜런을 일본어 가타가나로 풀어쓴 걸 그대로 옮겨온 듯한 이 번역은 사실 외래어 표기법의 원칙에 의한 것으로 2001년 국립국어연구원의 심의를 거쳐 지금의 밥 딜런으로 고쳐졌다. 다만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2001년 이후에도 여전히 보브 딜런으로 쓰는 사람도 꽤 있다.
  • 90년대 초반에는 애플 컴퓨터 제품에 이름이 딜런이라는 것 때문에 소송 제기했다가 패소했는데, 미국 언론에게도 딜런 토머스 지인들도 문제시하지 않은 일이라고 비웃음을 들었다.
  • 외국에서는 비틀즈, 롤링 스톤스와 동급의 본좌 뮤지션으로 평가받는 것과는 달리 번안된 "Blowin' In The Wind"가 국내에서도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언어 문제와 앨범에 담긴 미국적인 향취 때문에 의외로 대한민국에서 밥 딜런 자체의 인기는 그리 높지 않다. 유명하지만 유명하지 않다라는 모순적인 표현이 잘 어울린다고 할까. 그래도 '아임 낫 데어' 같은 영화 때문에 일반 대중의 밥 딜런에 대한 인지도가 조금씩 늘고 있다.
  • 가창력 자체보다는 웅얼웅얼 읊조리며 부르는 독특한 분위기의 창법이 유명하다.[77] 올리비아 뉴튼 존이 부른 'If Not For You'나 건즈 앤 로지스가 부른 'Knockin' On Heaven's Door'[78]를 들어보면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2012년 작 "Tempest"에 수록된 "Duquesne Whistle"에선 루이 암스트롱을 연상시키는 창법으로 노래했다. 참고로 이것들은 노래와 자신의 이미지 구축을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목소리다. 지인들 말에 따르면 실제로는 미성의 소유자이며, Nashville Skyline에 나오는 목소리가 진짜 목소리에 가깝다고 한다.
  • 2010년 3월 31일 잠실에서 내한공연을 열었다.
  • 원피스 만화 연재본 572화의 제목인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은 밥 딜런의 3집 앨범 제목이자 타이틀곡이다. 이 노래는 잭 스나이더가 감독한 영화 왓치맨의 오프닝 곡으로도 쓰였다. 오프닝 영상은 원작에서 길게 소개되는 미닛 맨 소속의 과거의 히어로들의 역사를 20세기 미국사의 여러 장면들과 함께 시간순으로 배치하여 보여주는데, 이는 원작의 긴 스토리를 효과적으로 요약해 보여줄 뿐 아니라, 노래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영욕의 세월을 거쳐 새로운 국면으로 치달아가는 작중 히어로들의 상황을 잘 나타낸다.
  • 첫째 부인에서 얻은 네 번째 자식인 아들 제이컵 딜런 또한 미국의 유명 밴드 '월플라워스(The Wallflowers)'의 리더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아버지 밥 딜런 정도의 전설은 아니지만, 아버지 후광 없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 뜨고 나니 아버지가 밥 딜런이었구나 하고 알려질 정도. 1996년 앨범 Bringing down the horse, 그리고 이 앨범 최고의 히트곡 One Headlight는 상당히 유명하고 1998년 Time Out Of Mind로 아버지 밥 딜런이 그래미 앨범상을 받을 때 월플라워스 역시 락부문 그래미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앨범부터는 그만한 인기를 얻지는 못하고 잇다. 활동은 중단하기도 했지만 꾸준하게 하는 중. 밥 딜런이 심한 바람둥이었기 때문에 부자 간 사이는 좋지 않은 듯하다. 손자인 파블로 딜런은 래퍼로 활동 중인데, 할아버지나 삼촌과는 달리 철저하게 언더 활동 중이라 정보가 매우 부족한 편.
  • 2013년 11월 13일 "Complete Album Collection Vol. 1"이 국내 정식 발매되었다. LP 미니어쳐로 제작된 정규 47개의 앨범들, 268쪽의 부클릿등 딜런의 음악을 귀로 직접 체험하고 싶다면 구입해보도록 하자. Vol.1이라는 타이틀이 무섭게 느껴진다.
  • 배우로도 아주 가끔씩 활동한 적이 있는 데, 가장 유명한 영화라면 샘 페킨파의 〈관계의 종말〉이 있다.[79] 비중있는 조역인데 연기는 그닥(...) 감독 영화도 있는데 망했고. 10여년 이후 영화가 재발굴되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Hearts of Fire이 혹평을 들은 이후로는 영 아니다 싶었는지 출연은 없다. 장난삼아 배우를 한 건 아니고, 어렸을 적부터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참고로 배우로써 데뷔를 한 건 의외로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그것도 가수로서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된 1963년에 BBC에서 만든 단편 영드 'Madhouse on Castle Street'에서였다.

" 존 포드의 영화엔 용기와 용감한 행동과 구원 그리고 고뇌와 황홀함의 기이한 조합이 있다. 그는 이런 것들을 놀라울 정도로 드라마틱한 방식을 통해 보여 준다.(...) 찰리 채플린은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내가 노래를 부를 때조차 그렇다. 난 항상 채플린의 떠돌이 캐릭터를 의식하는 것 같다. "[80]

  • 허영만의 1987년 작품 <고독한 기타맨>에도 나온다. 처음에는 주인공 이강토의 동경의 대상이었으나("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을 반복해서 듣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중에 이강토와 직접 만나게 되며, 이강토의 기타 실력에 빠져서 그의 멘토이자 프로듀서로 나선다. 이강토는 밥 딜런의 도움에 힘입어 전미를 석권한다. 실제 밥 딜런은 한국 포크음악계의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을 넘어 기축이 되었던 존재였다. 한국 포크록의 전설인 한대수도 밥 딜런의 창법과 스타일을 많이 연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만든게 "행복의 나라"였다. 실제 그가 말하길 밥 딜런은 한국 포크음악 등장에 씨앗을 뿌렸다라고 평한다.
  • 60~70년대 많은 유명곡을 뽑아내던 활동시절과 현재의 목소리가 많이 달라졌다. 음악 성향도 그렇고. 1980년대 이후 앨범들은 한국에서 그다지 잘 알려있지 않기 때문에 2010년 내한공연 때 예전 생각하고 보러 온 상당수의 관객들이 당황하기도 하였다. 본인은 이 상황을 즐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팬들 여러분 감사합니다.'라는 발언을 했다. 사실 그에 목소리가 안 좋아진 것은 아니고 1980년 이후로 갑자기 창법을 바꾸었는데 1986년 Oh Mercy이후로 창법을 완전 갈아 엎은 것으로 보고 있다.
  • 2013년에 프랑스에 거주하는 크로아티아인들에게 모욕 및 혐오선동 건으로 고소를 당한 적이 있다. 2012년 롤링 스톤 프랑스어판 인터뷰에서 '흑인들은 아직도 일부 백인들이 노예제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노예 주인이나 KKK의 피를 갖고 있다면 흑인들이 알 수 있다는데 마치 유대인이 나치의 피를,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의 피를 알 수 있다는 것과 같다.[81] 부디 하루빨리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발언하여 크로아티아를 나치에 비유했다는 이유. 오프 더 레코드를 걸은 건데 그걸 어기고 기사에 실은데다가 특정 국가를 비하할 의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혐의 처리되었다.
  • 밥 딜런의 골수팬이라면 밥 딜런하면 떠오르는 것중 하나가 바로 해적판 앨범이다. 딜런은 엄청 많은 곡들을 작곡하고 테이프에 기록하였는데 문제는 비공개된 음악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더 밴드와 모여서 재미로 자기 집에서 부르고 녹음한 음악들이 따로 모여서 시장에 해적판으로 판매되어 인기를 얻자 결국 공개하기로 하고 모아서 만든 The Basement Tapes 앨범등이 있었으나 여기서 공개가 안된 해적판으로만 있던 비공개곡을 다시 또 모아서 공개한 Bob Dylan & The Band – The Basement Tapes Complete: The Bootleg Series, Vol. 11[82]도 있다. 워낙 비공개된 곡도 상당수준의 음악이 많은 지라 해적판에만 혈안이 된 이들도 있다고 한다.

4.1. 종교

밥 딜런의 종교적 회심에 대한 오해와 진실

1979년말 밥 딜런은 갑작스레 '거듭난 그리스도인'(born-again Christian)이 되었다고 선언하며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더 나아가 이 때 발표한 세 장의 앨범 < Slow Train Coming >(1979), < Saved >(1980), < Shot of Love >(1981)에는 자신의 회심을 고백하고 신을 찬미하는 노래들로 채웠다. 이후 몇 년간 그는 전도자로 활동한다.

비슷한 시기 유대인이었던 밥 딜런이 기독교에 귀의한 것은 당시 대중들에게 이런 충격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밥 딜런의 전기 작가인 로버트 쉘턴(Robert Shelton)에 의하면 그는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자랐고, 어릴 때 다른 유대인들처럼 유대교 예식 참여는 물론 히브리어도 상당 수준으로 학습했다. 일부 언론과 평단은 늘 베일에 쌓여있던 그의 신비주의 전력을 근거로 그의 회심을 의심했다.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벌인 일종의 쇼라는 것이다. 더욱이 몇 년간의 뜨거운 전도활동 후 그는 자신의 신앙적 입장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으니 이런 의심이 생길만도 하다.

1970년 전후, 미국 음악계의 대전환이 이루어진다. 왜곡된 히피 정신을 가졌던 찰스 맨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여배우 샤론 테이트(로만 폴란스키 감독 부인)를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또한 롤링스톤즈의 알타몬드 공연에서는 죄 없는 흑인 청년이 오토바이족 헬스 엔젤스의 칼에 맞아 죽었다. 패션이 된 약물은 수많은 청춘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소위 '27클럽'의 '위대한 3J'(지미 핸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가 약물중독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사건은 음악계에 흐르던 저항문화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대신 카펜터스, 캐롤 킹, 짐 크로취 같은 싱어송라이터들의 서정적이고 따뜻한 노래가 사랑 받게 된다.

밥 딜런 역시 이 시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행복했던 결혼도 권태기에 빠졌다. 결국 밥 딜런의 외도로 아내 사라와 이혼했고 다섯 자녀의 양육권 역시 긴 소송 끝에 잃어버렸다. 또한 자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 Renaldo and Clara > 역시 평단의 지독한 혹평 가운데 실패했다. 무엇보다 그의 내면에 지독한 허무감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1970년대 밥 딜런은 시적 은유가 가득한 노랫말의 확장과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계속했다. 당시 그의 노랫말을 들여다보면 이 세상에 자신의 의미가 무언지를 되묻는 사상적 고뇌가 두드러진다.

당시 밥 딜런은 '흑인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흑인 음악, 흑인 음식, 흑인 스타일에 흑인 애인까지. 부인과 이혼 후 그가 사귀었던 여성들은 모두 남부 출신 흑인들이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코러스 싱어 케롤린 데니스(Carolyn Dennis)와 결혼해 여섯째 아이를 낳았다. 그녀 역시 흑인이었다. 한대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밥 딜런은 흑인들의 가스펠에 매료되었고, 그 안에 담긴 그들의 신앙에도 빠져들었다고 말한다.

다가 1978년 밥 딜런은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빈야드 펠로우쉽 처치'의 성경공부에 참여하게 된다. 이 교회가 속한 '빈야드 크리스천 펠로우쉽'은 은사주의적 성격이 강해 기독교에서 이단 시비까지 일으킨 바 있는 초교파 교회이고, 이적과 체험을 강조한다. 이 교회는 1990년대에는 '모던워쉽'을 주도하며 기독교 음악계에 큰 획을 그었다. 지금도 미국 뿐 아니라 국내의 거의 모든 교회에서 빈야드가 발표한 노래들을 예배 때 부르고 있다.

이런 '복음주의' 기독교는 보수적 교리와 사회관, 그리고 종말론적 가르침을 강조한다. 밥 딜런이 회심한 빈야드 교회 역시 그 특성상 이런 '복음주의' 그룹에 속한다. 이 교회에서 그는 존 듀이어 목사의 영향을 받으며 결정적으로 회심하고 세례를 받는다. 신약성서를 깊게 읽으며 자신의 공허한 일상을 위로하는 예수의 메시지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1979년 발표한 < Slow Train Coming >은 제리 웩슬러(Jerry Wexler)가 프로듀싱하고 다이어스트레이츠의 마크 노플러가 기타로 참여하며 평단으로부터도 큰 찬사를 받았다. 제리 웩슬러는 빌보드지 기자 시절 처음으로 '리듬앤블루스'(R&B)란 용어를 사용했고, 1950-1960년대 레이 찰스와 아레사 프랭클린 등의 음반을 프로듀싱하며 흑인 음악 활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때까지 그의 수많은 히트곡들을 외면해 왔던 '보수적인' 그래미는 놀랍게도 이 앨범의 타이클곡, 'Gotta serve somebody'에게 그의 첫 번째 그래미상(최우수 록보컬 남자 부문)을 안겨주었다.

밥 딜런의 크리스천 삼부작 앨범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종교적 회심의 진정성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딜런은 특히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 말씀들을 자신의 노래들에 인용했다.

앨범 발매 이후 딜런은 1979년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투어를 진행했다. 총 79회의 공연에서 그는 오직 새롭게 만든 종교적 노래만으로 세트리스트를 채웠고, 공연 중 신앙고백과 전도 메시지를 전했다. 1980년 5월 투어를 마치며 그는 저널리스트 카렌 휴스(Karen Hughes)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분이 언제나 나를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적절한 때와 뜻을 이루십니다. 나는 바로 그분의 때에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1980년 11월부터 1년간 지속된 다음 투어에서는 공연 중 종교적 노래와 자신의 히트곡을 함께 불렀고, 공연 전 대기실에서 세션들과 함께 '주기도문'을 함께 낭송하며 공연을 시작했다.

< 밥 딜런 평전 >(실천문학사, 2008)을 보면 당시 그의 회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가 후대에 기독교에 심취하게된 이유는 미국의 혼란스런 사회상에서 이데올로기도, 아니면 그에 반하는 이데올로기도, 전쟁을 찬성하는 국가지배층도, 반대로 반전을 주장하는 이도, 그들의 행동 양식은 결국은 성경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후 밥 딜런은 빈야드 교회와 결별하며 자신의 회심에 대한 지속적인 고백이나 전도 활동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는다. 1982년 이후 그는 기독교 신앙을 중단하고 다시 유대교로 복귀했다는 소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아울러 그의 종교적 입장과 변화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앨범, < Christmas In The Heart >을 발매한다. 종교적 다원사회가 된 미국에서 "Merry Christmas"라는 인사는 공식적으로 “Happy Holiday”라고 표현한다. 2000년대 발매한 대부분의 캐롤 앨범도 “홀리데이” 뮤직으로 명명하지만 밥 딜런은 앨범에 “크리스마스”란 단어를 표기하고, 선곡도 예수에 대한 찬미의 노래들로 채웠다.

그의 새로운 신앙의 노래는 의외로 2012년 발표한 앨범 < Tempest >에서 나타난다. 이 앨범에 수록된 'On Narrow Way'의 가사다.

나는 광야의 길을 걷고 있어요. 내 영혼의 안식처를 찾기까지.

나는 내가 뒤에 남겨지리라(left behind)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날이 저물어가던 때에 한 음성을 들었어요.

“평안하라 형제여, 평안히 기도하라”

그것은 먼 길이죠. 아주 멀고 좁은 길이예요.

만약 내가 당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언젠가 나를 끌어내리겠죠.

4.2. 사용 기타들

그가 커피 하우스에서 연주했던 그의 첫번째 기타는 마틴 1949년형 00-17이었다. 그는 그것을 1959년에 취득했는데, 그가 처음 미니애폴리스에서 뉴욕으로 이주했을 때였다. 그는 이 일에 대해 크로니클에 쓰고 있다.

제가 첫번째로 한 일은 일렉트릭 기타를 팔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일렉트릭 기타는 제게 쓸모가 없었을 겁니다. 더블 디 마틴 어쿠스틱 기타입니다. 그 가게의 남자는 나와 균등하게 교환했고 나는 그 기타를 들고 떠났습니다. 나는 이 기타를 몇년 동안 연주할 것입니다.

이 '2년'이란 시간은 그의 공식 녹음일 이전이었이만, 1961년 라이브로 출시된 미네소타 호텔 테이프에서 미네소타 테이프와 '물 속의 웨이드'를 포함한 다른 초기 테이프에서 기타 라이브를 들을 수 있다.

1961년, 딜런은 기타를 케빈 크라운에게 주었는데, 그는 그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크라운이 1992년에 죽었을 때 기타는 피터 매켄지에 넘겨졌는데, 피터 매켄지는 맥과 이브 매켄지의 아들이다. 딜런은 종종 뉴욕 초기에 연주를 하곤 했습니다.

다음 기타는 낡은 깁슨이었던 J-50 모델이었고 프로듀서 존 해먼드 주니어의 말에 따르면, "조금 흠이 있었지만 깔끔했고 훌륭햐 기타"라고 텔레그래프 인터뷰에서 말한다. 이 기타는 밥 딜런의 데뷔 앨범 ‘Bod Dylan’ 커버에서 들고 있는 기타다. 또 다음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에서도 사용된다.

1963년 어느 날, J-50이 갑자기 행방 불명되었고, 그 대신 그의 가장 유명한 기타인 ‘Gibson Nick Lucas Special’이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 기타는 63년 말부터 66년까지 그가 콘서트에서 사용했던 메인 어쿠스틱 기타다. 앨범 ‘Another Side of Bob Dylan’과 ‘Bringing it All Back Home’에서도 이 기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딜런은 그는 기타 상점을 운영한 마크 실버로부터 그것을 샀다.

나는 60년대에 그에게 몇 가지의 기타를 팔았지만 그 후에 그를 안 봤다. 내가 그것을 그에게 팔았을 때는 새 것 같은 상태였으나, 조금 부서졌다. 그는 그 기타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아마도 70년대 초반에, 저는 우드 스톡까지 차를 몰고 가서 그에게 멋진 60년대 Martin이라는 기타를 팔았어요. 하지만 그는 기타의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사업하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이 당시 딜런의 기타 컬렉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한가지 예외는, 다큐멘터리 ‘Eat the Document’에 나오는 펜더사 어쿠스틱 기타다. 딜런과 더 밴드의 로버트슨이 함께 ‘What Kind of Friend is This?’, ‘On a Rainy Afternoon’을 부를 때다. 기타 명은 펜더 킹[83]이고 1963년 이후로 펜더가 내놓은 어쿠스틱 기타 시리즈에 속하며 이는 일렉트릭 기타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1960년대 말 1970년대 그는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 뉴포트에서 기타를 빌렸고, 1968년 1월에 거스리 트리부트 콘서트를 열어, Martin 0-18을 연주했다.

1969년 앨범 Nashville Skyline의 기타는 조지 해리슨에게 선물받은 Gibson J-200이다. 그 해 말에 와이트 섬 축제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70년대 초 그가 대부분의 출연한 곳에선, 그는 마틴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앨범 ‘Self portrait’ 작업 동안에 사용한 기타.

조니 캐쉬쇼에서 사용한 Martin Triple-018.

방글라데시 공연에서 사용한 Martin D-28.

1974년 칠레 공연에서 사용한 Martin 00-21.. 마틴이 포크 붐 이전에 제작한, 50년대의 제작한 것이다. 1974년 더 밴드와의 투어에서 대부분 이 기타를 사용했다.

앨범 ‘Blood On The Tracks’ 제작 기간 중 뉴욕 세션에서 사용한 칠레 공연에서 사용한 Martin 00-21이다.

1978년 무도관 투어 동안, 그는 야마하 기타 두개를 받았다. 그는 이 기타를 무도관 투어에서 종종 사용하였고 이 투어부터 워시번 기타를 사용한다.

1984년 투어에서도 워시번 기타를 사용한다. 라이브 앨범 ‘Real Live’의 앨범 커버에도 이 기타가 나온다.

1986년과 1987년에는 워시번과 마틴을 번갈아 가며 연주했다. 왼쪽 사진이 1987년 6월에 사용한 워시번 기타, 오른쪽 사진이 1986년에 사용한 마틴 기타다.

네버 엔딩 투에서는 여러해 동안 그는 Martin D-28을 사용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깁슨 기타를 재사용한다. 1998년 이후 거의 전적으로 sunburst J-45을 사용한다. 사진 오른쪽이 1993년 뉴올리언스에서 사용한 마틴사 기타. 왼쪽이 2000년 깁슨사 J-45 in 0-1이다.

단, 2001년 가을 투어에서는 예외적으로 마틴사 기타를 사용한다. 이 기타는 어쿠스틱 기타 매거진의 기념일로 만들어낸 HD-28이다. 딜런은 그것을 보고 마틴사에게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4.3. 화가

데뷔초인 1960년대부터[84] 꾸준히 그림을 그려오며 본인의 앨범 커버를 직접 그린적도 있다.[85] 밥 딜런의 경우, 그린다는 행위를 통해 ‘뭔가를 볼 때 쓸데없는 요소를 제거하는’것이 가능해짐’을 느낀다고 한다. 1994년 11월에는 밥 딜런의 첫번째 드로잉집 ‘Drawn Blank’가 출판되었다. 모노크롬의 선묘화 화집으로 풍경이나 인물 등 그림의 대상이 다양했다. 선으로 그려진 그림들에 색깔을 칠해 하나의 작품을 가지고 몇 가지 패턴을 만들어내는 시리즈 ‘Drawn Blank Series’도 2007년부터 전람회가 개최됬다. 그 후 여러 화랑과 미술관에서 전시를 가졌다. 그의 회화와 드로잉은 1990년대 중반부터 아트마켓에서도 제법 잘 팔렸다.

지구촌 평범한 이들의 살아가는 모습, 때로는 낡고 누추하지만 독특한 정경을 만들어가는 이름 없는 이들의 모습을 담아낸 드로잉은 특히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브라질 시리즈>와 <철길 시리즈>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 브라질 시리즈

밥 딜런은 2008년에는 덴마크 코펜하겐국립미술관에서 <브라질 시리즈>'를 선보였다. 또 독일 켐니츠에서는 대표작인 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어 2013년에는 이탈리아 밀라노 시 초대로 <뉴올리언즈 시리즈>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작업을 토대로 그는 6권의 드로잉집을 출간했다.

▲ 아시아 시리즈

2011년에는 세계 최대의 화랑이자, 영향력 1위의 가고시안 갤러리의 초대를 받아 뉴욕 가고시안 화랑에서 성황리에 개인전을 가진바 있다. 이 전시에 밥 딜런은 아시아 뮤직투어 때 틈틈이 그린 드로잉과 회화를 선보였다. 당시 일본, 중국, 베트남, 한국을 여행했던 밥 딜런은 아시아 여러 도시에서 접한 풍경과 아시안들의 삶을 특유의 드로잉으로 옮겼다. 이는 '아시아 시리즈(Asia Series)>로 소개돼 높은 호응을 얻었다. 2013년에는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영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가진바 있다.

▲ 2016년 영국 런던 핼시온 갤러리

2013년, 2016년에는 영국 런던 핼시온 갤러리에서 작품 전시회를 했다.

5. 관련 인물

폴 매카트니: 그는 우리의 우상이에요

링고 스타: 밥은 우리의 영웅입니다.

조지 해리슨: 아니, 우상이 아니라요, 우리는 단지 그의 레코드를 들었습니다.(...)

나는 그를 존경했고, 나는 그를 많이 존경했다.[86]

존 레논, 1970년

비틀즈는 1964년 저널리스트 알 아로노비츠의 주선으로 밥 딜런과의 뉴욕에서의 만남이 성사된다. 밥 딜런은 비틀즈의 음악이 가진 활력에 매료되어서 비틀즈와의 만남을 원하고 있었으나 비틀즈는 딜런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딜런은 비틀즈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마리화나를 선물로 준비한다. 이 만남은 이후 비틀즈와 딜런 상호간에 음악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밥 딜런과 존 레논은 동갑내기다.

흥겹고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가사의 대부분이던 비틀즈는 밥 딜런의 노랫말에 깊은 인상을 받아 1965년부터 작사에도 큰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그래서 가사에 멤버들의 가치관이 많이 반영되어 철학적이거나 사회비판적인 면모가 가사에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포크적인 요소도 수용하였다. 이러한 변화가 드러난 출발점이 비틀즈의 대표 명반 중 하나인 Rubber Soul 앨범이다.

반대로 밥 딜런은 비틀즈의 다이나믹한 록큰롤 사운드의 영향력을 목도하며 과감하게 일렉트릭 기타[87]를 들고 무대에 섰다. 이런 그의 음악적 변신의 중심에 밥 딜런의 명곡, 'Like a Rolling Stone' 이 있다. 이 노래는 1965년 그의 세 번째 음반 Highway 61 Revisited에 실려 빌보드 차트 2위에 올랐고 밥 딜런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밥 딜런, 비틀즈, 그리고 이 둘 모두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버즈(The Byrds), 이 세 뮤지션에 의해서, 종전엔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포크'와 '록'이 급속도로 융합되기 시작했으며, 이런 화학작용은 '포크록'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두 거물의 만남은 서로에게 엄청난 윈윈이 된 것이다.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도 조지 해리슨은 밥 딜런과 사적으로도 친한 친구 관계를 쭉 유지했다.

  • 수지 로톨로

”우디 거스리는 인간성의 여러가지 측면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평범한 노래는 단 한 곡도 없었다. 우디 거스리는 주위의 모든 것들을 철저히 비판했다. 이때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진실을 포착했고 마침내 다다른 항구의 바다 깊숙이 무거운 닻이 내려진 것 같은 감각이었다.”

― 밥 딜런

”거스리는 사물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깊은 감정이 넘쳐 흘렀고 힘찼으며 리듬이 살아 있었다. 진지하고 강렬했으며 그 목소리는 칼처럼 날카로웠다. 우디 거스리는 그때까지 들었던 다른 그 어떤 가수들과도 달랐다.”

― 밥 딜런

밥은 우디 거스리에거서 자신의 이상, 영적인 아버지이자 음악적 모델로 생각했다. 자신의 ‘에피타프’에 거스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마지막 우상이었네

최초의 우상이었으므로

나와 얼굴을 맞대고

남자들은 남자라고 가르쳐준

내가 만난 최초의 우상이 그였으니

심지어 우상으로서의 자신을 깨트리며

우디는 한번도 내게 두려움을 주지 않았고

어떤 희망도 짓밟지 않았네

그는 그냥 인간의 책을 가지고 다녔고

그것을 내게 읽도록 주었으니

그리고 그로부터 나는 가장 위대한 교훈을 배웠네

6. 앨범

6.1. 스튜디오 앨범

#

발매일

제목

장르

프로듀서

길이

메타크리틱

01

1962.03.19

Bod Dylan

포크, 컨트리 블루스

존 하몬드

36분 54초

자료 없음

02

1963.05.27

The Freewheelin' Bob Dylan

포크, 블루스

존 하몬드, 톰 윌슨

50분 4초

03

1964.01.13

The Times They Are a-Changin'

포크

톰 윌슨

45분 36초

04

1964.08.08

Another Side of Bob Dylan

포크

50분 37초

05

1965.03.22

Bringing It All Back Home

포크 , 포크

47분 21초

06

1965.08.30

Highway 61 Revisited

, 일렉트릭 블루스

밥 존스톤

51분 26초

07

1966.05.16

Blonde on Blonde

포크

72분 57초

08

1967.12.27

John Wesley Harding

포크 , 컨트리 락, 컨트리

38분 24초

09

1969.04.09

Nashville Skyline

컨트리 락, 컨트리

27분 14초

10

1970.06.08

Self Portrait

포크 , 컨트리 락, 블루스

73분 15초

11

1970.10.19

New Morning

포크 , 컨트리 락, 블루스

35분 21초

12

1973.07.13

Pat Garrett & Billy the Kid[88]

포크 , 컨트리 락

고든 캐롤

35분 23초

13

1973.11.19

Dylan

, 포크

밥 존스톤

33분 22초

14

1974.01.17

Planet Waves[89]

루츠

롭 프라보니

42분 12초

15

1975.01.20

Blood on the Tracks

포크

밥 딜런

51분 42초

16

1975.06.26

The Basement Tapes[90]

루츠 , 포크 , 블루스 , 컨트리 락

밥 딜런, 더 밴드

76분 41초

17

1976.01.05

Desire

포크

돈 드비토

56분 13초

18

1978.06.15

Street-Legal

50분 18초

19

1979.08.20

Slow Train Coming

블루스 , 가스펠

배리 베켓, 존 웩슬러

46분 19초

20

1980.06.23

Saved

, 가스펠

42분 39초

21

1981.08.10

Shot of Love

, 가스펠

밥 딜런, 척 플롯킨, 펌프 블랙웰

40분 15초

22

1983.10.27

Infidels

하트랜드

밥 딜런, 마크 노플러

41분 39초

23

1985.06.10

Empire Burlesque

, 하트랜드 , 뉴웨이브

밥 딜런

46분 24초

24

1986.07.14

Knocked Out Loaded

35분 18초

25

1988.05.30

Down in the Groove

32분 10초

26

1989.09.18

Oh Mercy

다니엘 라노아

38분 46초

27

1990.09.10

Under the Red Sky

잭 프로스트 (밥 딜런), 돈 워스, 데이비드 워스

35분 21초

28

1992.11.03

Good as I Been to You

포크, 블루스

데비 골드

55분 31초

29

1993.10.26

World Gone Wrong

포크, 블루스

밥 딜런

43분 51초

30

1997.09.30

Time Out of Mind

블루스 , 포크

다니엘 라노아

72분 50초

31

2001.09.11

Love and Theft

포크 , 블루스

잭 프로스트 (밥 딜런)

57분 24초

93점

32

2006.10.29

Modern Times

포크 , 블루스

63분 4초

89점

33

2009.04.28

Together Through Life

포크 , 블루스

45분 33초

76점

34

2009.10.13

Christmas in the Heart

크리스마스 음악

42분 21초

62점

35

2012.09.10

Tempest

포크, 포크

68분 31초

83점

36

2015.02.03

Shadows in the Night

전통 , 보컬 재즈

35분 17초

82점

37

2016.05.20

Fallen Angels

전통

37분 50초

77점

38

2017.03.31

Triplicate

전통

95분 42초

80점

6.2. 라이브 앨범

#

발매일

제목

장르

프로듀서

길이

01

1974.06.10

Before the Flood

로큰롤

밥 딜런, 더 밴드

92분 38초

02

1976.09.13

Hard Rain

밥 딜런, 돈 드비토

51분 06초

03

1979.04.23

Bob Dylan at Budokan

돈 드비토

99분 41초

03

1984.11.29

Real Live

포크 , 하드록

글린 존스

50분 15초

04

1989.02.06

Dylan & the Dead[91]

존 커틀러, 제리 그라시아

43분 07초

05

1992.10.26

The 30th Anniversary Concert Celebration

제프 크래머, 제프 로젠, 존 드비토

148분 24초

06

1995.05.02

MTV Unplugged

포크, 포크

제프 로젠

69분 24초

07

2001.02.28

Live 1961–2000: Thirty-Nine Years of Great Concert Performances[92]

, 포크, 컨트리

미공개

72분 56초

08

2005.08.30

Live at The Gaslight 1962

포크

스티브 버코위츠, 제프 로젠

46분 29초

09

2005.11.15

Live at Carnegie Hall 1963

포크

제프 로젠

31분 53초

10

2011.04.11

In Concert – Brandeis University 1963

포크

미공개

38분 24초

11

2016.11.11

The 1966 Live Recordings[93]

포크,

스티브 버코위츠, 제프 로젠

27시간 37분 01초

12

2016.12.02

The Real Royal Albert Hall 1966 Concert (Live)[94]

포크,

스티브 버코위츠, 제프 로젠

1시간 34분 12초

6.3. 부틀렉 시리즈

#

발매일

제목

장르

프로듀서

길이

메타크리틱

01

1991.03.26

The Bootleg Series Volumes 1–3 (Rare & Unreleased) 1961–1991[95]

포크 , 포크 블루스

제프 로젠

229분 37초

자료 없음

02

1998.10.23

The Bootleg Series Vol. 4: Bob Dylan Live 1966, The "Royal Albert Hall" Concert[96]

, 포크 , 블루스

95분 18초

03

2002.11.26

The Bootleg Series Vol. 4: Bob Dylan Live 1966, The "Royal Albert Hall" Concert[97]

포크 , 로큰롤

스티븐 버코위츠, 제프 로젠

102분

04

2004.05.30

The Bootleg Series Vol. 6: Bob Dylan Live 1964, Concert at Philharmonic Hall[98]

포크, 포크

104분 12초

05

2005.08.30

The Bootleg Series Vol. 7: No Direction Home: The Soundtrack[99]

포크 , 로큰롤

스티븐 버코위츠, 제프 로젠, 브루스 디킨스, 마틴 스콜세지

144분 31초

06

2008.10.06

The Bootleg Series Vol. 8: Tell Tale Signs: Rare and Unreleased 1989–2006[100]

, 포크, 포크 , 컨트리 , 블루스

밥 딜런, 다니엘 라노아

137분 07초

86점

07

2010.10.09

The Bootleg Series Vol. 9: The Witmark Demos: 1962–1964[101]

포크

스티븐 버코위츠, 제프 로젠

138분 28초

88점

08

2013.08.27

The Bootleg Series Vol. 10: Another Self Portrait (1969–1971)[102]

포크, , 컨트리

밥 존스톤

113분 27초

81점

09

2014.11.04

The Bootleg Series Vol. 11: The Basement Tapes Complete[103]

포크, 루츠

미공개

6시간 33분 49초

99점

10

2015.11.06

The Bootleg Series Vol. 12: The Cutting Edge 1965–1966[104]

가스펠,

미공개

145분 04초

99점

11

2017.11.03

The Bootleg Series Vol. 13: Trouble No More 1979–19[105]

포크,

미공개

2시간 33분 01초[106]
8시간 10분 19초[107]

88점

6.4. 컴필레이션 앨범

#

발매일

제목

비고

01

1967.03.27

Bob Dylan's Greatest Hits

02

1971.11.17

Bob Dylan's Greatest Hits Vol. II

03

1978.03.12

Masterpieces

[108]

04

1985.11.07

Biograph

[109]

05

1994.11.04

Bob Dylan's Greatest Hits Volume 3

06

1997.06.02

The Best of Bob Dylan

[110]

07

2000.10.31

The Essential Bob Dylan

08

2000.11.28

The Best of Bob Dylan Vol.2

[111]

09

2005.11.15

The Best of Bob Dylan

[112]

10

2006.06.27

Blues

[113]

11

2006.08.29

Bob Dylan: The Collection

[114]

12

2007.10.02

Dylan

[115]

13

2009.07.27

The Collection

14

2009.10.19

The Original Mono Recordings

[116]

15

2009.10.19

The Best of The Original Mono Recordings

[117]

16

2011.03.29

All Time Best: Dylan

17

2011.10.21

Pure Dylan

18

2011.10.24

Beyond Here Lies Nothin' – The Collection

[118]

19

2012.10.21

The Real Bob Dylan

[119]

20

2012.12.27

The 50th Anniversary Collection

[120]

21

2013.11.05

The Complete Album Collection Vol. 1

[121]

22

2013년 11월

The 50th Anniversary Collection 1963

[122]

23

2014년 12월

The 50th Anniversary Collection 1964

[123]

7. 그 외 작품

7.1. 저서

발매 년도

제목

1971년

타란튤라
Tarantula

1973년

Writings and Drawings

1985년

Bob Dylan: Lyrics, 1962-1985- Includes All of Writings and Drawings

2004년

바람만이 아는 대답 : 밥 딜런 자서전
Chronicles: Volume One

2004년

Lyrics: 1962–2001

2014년

밥 딜런: 시가 된 노래들(1961-2012)
The Lyrics: Since 1961

2017년

The Nobel Lecture

7.2. 미술 작품

발매 년도

제목

1994년

Drawn Blank

2008년

The Drawn Blank Series

2010년

The Brazil Series

2011년

The Asia Series

2013년

Revisionist Art: Thirty Works by Bob Dylan

2014년

Face Value

2016년

The Beaten Path

7.3. 필모그래피

년도

제목

비고

1963년

BBC Sunday-Night Play

1화 출연

1972년

관계의 종말

배우, 음악

1972년

잇 더 도큐멘트[124]

감독, 제작, 음악

1974년

레날도와 클라라

감독, 각본[125], 배우, 편집

1987년

하트 오브 화이어

배우, 음악

1987년

트래블링 월버리스[126]

본인 출연

1990년

뒤로 가는 남과 여

카메오

1999년

파라다이스 코브

배우

2003년

가장과 익명

각본, 배우, 음악

8. 수상 및 기타 내역

미국 의회도서관 영구 등재 앨범

{{{#!folding [ 펼치기 · 접기 ]

2003년 등재

프랭크 시나트라, <Songs for Young Lovers> (1954)
마일스 데이비스, <Kind of Blue> (1959)
밥 딜런, <The Freewheelin' Bob Dylan> (1963)

2004년 등재

로버트 존슨, <The Complete Recordings> (1936-1937)
베니 굿맨, <Carnegie Hall Jazz Concert> (1938년 1월 16일)
글렌 굴드, <Goldberg Variations> (1955)
엘라 피츠제럴드,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
델로니어스 몽크, <Brilliant Corners> (1956)
찰스 밍거스, <Mingus Ah Um> (1959)
주디 갈란드, <Judy At Carnegie Hall> (1961)
비틀즈,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
조니 캐시, <At Folsom Prison> (1968
캐롤 킹, <Tapestry> (1971)
마빈 게이, <What's Going On>
브루스 스프링스틴, <Born to Run> (1975)

2005년 등재

존 콜트레인, <Giant Steps> (1959)
제임스 브라운, <Live at the Apollo> (1963)
비치 보이스, <Pet Sounds> (1966)
존 윌리엄스, <Star Wars> (1977)
퍼블릭 에너미, <Fear of a Black Planet> (1990)
너바나, <Nevermind> (1991)

2006년 등재

뮤지컬 '쇼보트(Show Boat)' 앨범 (1932)
데이브 브루벡, <Time Out> (1959>
비비 킹, <Live at the Regal> (1965)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Are You Experienced> (1967)
프랭크 자파 앤 더 마더스 오브 인벤션, <We’re Only In It For the Money> (1968)
스티비 원더, <Songs in the Key of Life> (1976)
소닉 유스, <Daydream Nation> (1988)

2007년 등재

피트 시거, <We Shall Overcome> (1963)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 니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1967)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 <Burnin'> (1973)
사라 본, <Live in Japan> (1973)
폴 사이먼, <Graceland> (1986)

2008년 등재

조니 미첼, <For The Roses> (1972)
허비 핸콕, <Head Hunters> (1973)
마이클 잭슨, <Thriller> (1982)

2009년 등재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57)
더 후, <My Generation> (1966)

2010년 등재

뮤지컬 '집시'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59)
빌 에반스 외, <The Complete Village Vanguard Recordings> (1961년 7월 25일 녹음)
더 밴드, <The Band> (1969)
패티 스미스, <Horses> (1975)
윌리 넬슨, <Red Headed Stranger> (1975)

2011년 등재

캡틴 비프하트, <Trout Mask Replica> (1969)
스틸리 댄, <Aja> (1977)
데 라 소울, <3 Feet High and Rising> (1989)

2012년 등재

부커 T. 앤 더 엠지스, <Green Onions> (1962)
러브, <Forever Changes> (1969)
프린스, <Purple Rain> (1984)

2013년 등재

사이먼 앤 가펑클, <Sounds of Silence> (1966)
핑크 플로이드, <The Dark Side of the Moon> (1973)
라몬즈, <Ramones> (1976)
비지스 외, <Saturday Night Fever> (1977)

2014년 등재

아트 블래키, <A Night at Birdland(Volumes 1 and 2)> (1954)
본 미더, <The First Family> (1962)
린다 론스태드, <Heart Like a Wheel> (1974)
뮤지컬 '스위니 토드'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79)
U2, <The Joshua Tree> (1987)

2015년 등재

조안 바에즈, <Joan Baez> (1960)
더 도어스, <The Doors> (1967)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Stand!> (1969)
라디오헤드, <OK Computer> (1997)
로린 힐,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1998)

2016년 등재

존 콜트레인, <A Love Supreme> (1964)
산타나, <Abraxas> (1970)
메탈리카, <Master of Puppets> (1986)

2017년 등재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People> (1964)
데이빗 보위,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1972)
이글스, <Their Greatest Hits (1971–1975)> (1976)
토킹 헤즈, <Remain in Light> (1980)
N.W.A, <Straight Outta Compton> (1988)

2018년 등재

메를 트래비스, <Folk Songs of the Hills> (1946)
해리 벨라폰테, <Calypso> (1956)
사운드 오브 뮤직 사운드트랙 (1965)
스티브 라이히, 리처드 맥스필드, 폴린 올리베로스, <New Sounds in Electronic Music> (1967)
플리트우드 맥, <Rumours> (1977)
Run-D.M.C., <Raising Hell> (1986)

}}}





년도

1963년

톰 페인상

1997년

케네디 센터 공로상

도로시와 릴리언 기쉬 상

1999년

타임지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2000년

폴라음악상

2007년

아스투리아스 공상 - 예술 부문

2008년

퓰리쳐상 특별 감사상

2014년

MusiCares 올해의 인물

2016년

노벨문학상

  • 수훈



년도

수훈 부문

1990년

프랑스 예술 훈장

2009년

국가 예술 훈장

2012년

대통령 자유 훈장

2014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4등급 오피시에

  • 헌액

영국 음악 명예의 전당 헌액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2004년 헌액

195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 클리프 리처드 & 섀도우즈
1960년대: 비틀즈, 롤링 스톤스
1970년대: 밥 말리,
1980년대: 마이클 잭슨, 마돈나
1990년대: U2, 로비 윌리엄스

2005년 헌액

핑크 플로이드
유리드믹스
아레사 프랭클린
지미 헨드릭스
밥 딜런
조이 디비전 / 뉴 오더
더 후
킹크스
블랙 사바스
오지 오스본

2006년 헌액

제임스 브라운
레드 제플린
로드 스튜어트
브라이언 윌슨
본 조비
프린스
더스티 스프링필드

}}}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127]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름

밥 딜런
BOB DYLAN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88년

}}}


년도

헌액 부문

1982년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

198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2002년

내슈빌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

2005년

영국 음악 명예의 전당

년도

명예 학위

1970년

프린슨턴 대학교 명예 음악 박사

2004년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교 명예 음악 박사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주제가상 수상작

제72회
(2000년)

제73회
(2001년)

제74회
(2002년)

You'll Be in My Heart
필 콜린스
(타잔)

Things Have Changed
밥 딜런
(원더 보이즈)

If I Didn't Have You
랜디 뉴먼
(몬스터 주식회사)


역대 골든 글러브 시상식

주제가상 수상작

제51회
(2000년)

제52회
(2001년)

제53회
(2002년)

You'll Be in My Heart
필 콜린스
(타잔)

Things Have Changed
밥 딜런
(원더 보이즈)

The Hands That Built America
U2
(갱스 오브 뉴욕)


년도

수상작

1980년

도브상 ‘세속 예술가의 앨범상’

Slow Train Coming

2000년

골든글로브상 주제가상

영화 원더 보이즈 ‘Things Have Changed’

아카데미상 주제가상




년도

작품

부문

수상여부

1963년

Bob Dylan

최우수 포크 레코딩

노미네이트

1965년

The Times They Are A-Changin'

1969년

John Wesley Harding

최우수 포크 퍼포먼스

1970년

Nashville Skyline Rag

최우수 컨트리 인스트로멘탈 퍼포먼스

1973년

The Concert for Bangladesh[128]

올해의 앨범

수상

1974년

Pat Garrett & Billy the Kid

영화, TV 및 기타 영상 미디어 부문 최우수 사운드트랙 앨범

노미네이트

1980년

Gotta Serve Somebody

최우수 남성 록 보컬 퍼포먼스

수상

1981년

Saved

최우수 가스펠 퍼포먼스

노미네이트

1982년

Shot of Love

1989년

Pretty Boy Floyd

최우수 전통 포크 퍼포먼스

1990년

Traveling Wilburys Volume One

올해의 앨범

최우수 록 듀오/그룹 보컬 퍼포먼스

수상

1992년

Series of Dreams

최우수 뮤직 비디오

노미네이트

-

평생공로상

수상

1994년

All Along The Watchtower

최우수 솔로 록 보컬 퍼포먼스

노미네이트

My Back Pages

최우수 록 듀오/그룹 보컬 퍼포먼스

Good As I Been to You

최우수 컨템포러리 포크 앨범

1995년

World Gone Wrong

최우수 포크 레코딩

수상

1996년

Knockin' On Heaven's Door

최우수 남성 록 보컬 퍼포먼스

노미네이트

Dignity

최우수 록 노래

MTV Unplugged

최우수 컨템포러리 포크 앨범

1998년

Time Out of Mind

올해의 앨범

수상

최우수 컨템포러리 포크 앨범

Cold Irons Bound

최우수 남성 록 보컬 퍼포먼스

1999년

To Make You Feel My Love

최우수 컨트리 노래

노미네이트

2001년

Things Have Changed

최우수 남성 록 보컬 퍼포먼스

영화, TV 및 기타 영상 미디어 부문 최우수 노래

2002년

Love And Theft

올해의 앨범

최우수 컨템포러리 포크 앨범

수상

Honest With Me

최우수 남성 록 보컬 퍼포먼스

노미네이트

2004년

Gonna Change My Way Of Thinking

최우수 팝 보컬 콜라보레이션

Down In The Flood

최우수 남성 록 보컬 퍼포먼스

2007년

Someday Baby

최우수 남성 록 보컬 퍼포먼스

수상

최우수 록 노래

노미네이트

Modern Times

최우수 컨템포러리 포크 앨범

수상

2010년

Beyond Here Lies Nothin

최우수 솔로 록 보컬 퍼포먼스

노미네이트

Together Through Life

최우수 아메리카나 앨범

2016년

Shadows in the Night

최우수 전통팝 보컬 앨범

2017년

Fallen Angels

2018년

Triplicate

9. 투어

타이틀

일자

국가

공연 횟수

1965년

Bob Dylan England Tour 1965

4월 30일 ~ 5월 10일

8회

1966년

Bob Dylan World Tour 1966

2월 4일 ~ 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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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회

1974년

Bob Dylan and the Band 1974 Tour

1월 3일 ~ 2월 14일

,

40회

1975년 ~ 1976년

Rolling Thunder Revue

1975년 10월 30일 ~ 1976년 5월 25일

,

57회

1978년

Bob Dylan World Tour 1978

2월 10일 ~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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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회

1979년 ~ 1980년

Bob Dylan Gospel Tour

1979년 11월 1일 ~ 1980년 5월 21일

,

79회

1981년

Bob Dylan World Tour 1981

6월 10일 ~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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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회

1984년

Bob Dylan 1984 European Tour

5월 28일 ~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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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회

1986년

True Confessions Tour

2월 5일 ~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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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회

1987년

Bob Dylan and the Grateful Dead 1987 Tour

7월 4일 ~ 7월 26일

6회

Temples in Flames Tour

9월 5일 ~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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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회

타이틀

일자

대륙

공연 횟수

Never Ending Tour

1988년

Never Ending Tour 1988

6월 7일 ~ 10월 19일

북아메리카

71회

1989년

Never Ending Tour 1989

5월 25일 ~ 11월 15일

북아메리카 78회
유럽 22회

100회

1990년

Never Ending Tour 1990

1월 12일 ~ 11월 18일

북아메리카 72회
남아메리카 2회
유럽 19회

93회

1991년

Never Ending Tour 1991

1월 28일 ~ 11월 20일

북아메리카 59회
남아메리카 9회
유럽 33회

101회

1992년

Never Ending Tour 1992

3월 18일 ~ 11월 15일

북아메리카 61회
오세아니아 20회
유럽 11회

92회

1993년

Never Ending Tour 1993

2월 5일 ~ 10월 9일

북아메리카 40회
중동 3회
유럽 33회

76회

1994년

Never Ending Tour 1994

2월 5일 ~ 11월 13일

북아메리카 73회
아시아 14회
유럽 17회

103회

1995년

Never Ending Tour 1995

3월 11일 ~ 12월 17일

북아메리카 70회
유럽 45회

113회

1996년

Never Ending Tour 1996

4월 13일 ~ 11월 23일

북아메리카 56회
유럽 28회

84회

1997년

Never Ending Tour 1997

2월 9일 ~ 12월 20일

북아메리카 78회
아시아 11회
유럽 4회

93회

1998년

Never Ending Tour 1998

1월 13일 ~ 11월 7일

북아메리카 56회
남아메리카 6회
유럽 33회
오세아니아 15회

110회

1999년

Never Ending Tour 1999

1월 26일 ~ 11월 20일

북아메리카 98회
유럽 21회

119회

2000년

Never Ending Tour 2000

3월 10일 ~ 11월 19일

북아메리카 75회
유럽 37회

112회

2001년

Never Ending Tour 2001

2월 25일 ~ 11월 24일

북아메리카 62회
유럽 37회
아시아 13회
오세아니아 9회

106회

2002년

Never Ending Tour 2002

1월 31일 ~ 11월 22일

북아메리카 78회
유럽 29회

107회

2003년

Never Ending Tour 2003

2월 6일 ~ 11월 25일

북아메리카 54회
유럽 33회
오세아니아 11회

98회

2004년

Never Ending Tour 2004

2월 28일 ~ 11월 27일

북아메리카 90회
유럽 21회

111회

2005년

Never Ending Tour 2005

3월 7일 ~ 11월 27일

북아메리카 82회
유럽 31회

113회

2006년

Never Ending Tour 2006

4월 1일 ~ 11월 20일

북아메리카 79회
유럽 20회

99회

2007년

Never Ending Tour 2007

3월 27일 ~ 10월 29일

북아메리카 58회
유럽 28회
오세아니아 12회

98회

2008년

Never Ending Tour 2008

2월 2일 ~ 11월 21일

북아메리카 59회
유럽 30회
남아메리카 8회

97회

2009년

Never Ending Tour 2009

3월 22일 ~ 11월 19일

북아메리카 64회
유럽 33회

97회

2010년

Never Ending Tour 2010

3월 11일 ~ 11월 27일

북아메리카 62회
유럽 25회
아시아 11회[129]

102회

2011년

Never Ending Tour 2011

4월 3일 ~ 11월 21일

북아메리카 28회
유럽 42회
아시아 7회
중동 1회

89회

2012년

Never Ending Tour 2012

4월 3일 ~ 11월 21일

북아메리카 28회
중앙아메리카 1회
남아메리카 11회
유럽 15회

86회

2013년

Never Ending Tour 2013

4월 5일 ~ 11월 28일

북아메리카 50회
유럽 35회

85회

2014년

Never Ending Tour 2014

3월 31일 ~ 12월 3일

북아메리카 35회
유럽 21회
아시아 17회
오세아니아 19회

92회

2015년

Never Ending Tour 2015

4월 10일 ~ 11월 22일

북아메리카 28회
유럽 59회

87회

2016년

Never Ending Tour 2016

4월 4일 ~ 11월 23일

북아메리카 59회
아시아 16회

75회

2017년

Never Ending Tour 2017

4월 1일 ~ 11월 25일

북아메리카 56회
유럽 28회

84회

2018년

Never Ending Tour 2018

3월 22일 ~

유럽 22회
아시아 1회[130]

23회 (진행중)

10. 외부 링크


  1. [1] 지금쓰는 밥 딜런은 예명이 아니라 법적으로 개명한 본명이다.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성씨가 '지머맨'이 아닌 '딜런'을 썼거나 쓰고 있다. 첫번째 음반을 내놓을 시기에 밥 딜런으로 법적 개명했다.
  2. [2] 밥 딜런 본인의 sns는 아니며 밥딜런 공식 홈페이지의 sns다.
  3. [3] 밥 딜런 본인의 sns는 아니며 밥딜런 공식 홈페이지의 sns다.
  4. [4] 양녀
  5. [5] 2006년 8월, 발표회에서
  6. [6] 2012년 미국 민간인 최고 훈장인 자유의 훈장 수훈식에서
  7. [7] He has been influential in popular music and culture for more than five decades.
  8. [8] 밥 딜런의 기억의 오류로 실은 일곱살 때다.
  9. [9] 재즈 연주자들이 모여서 악보없이 즉흥적으로 하는 연주
  10. [10] 미니애폴리, 세인트폴 두 도시를 합쳐 부를때의 애칭
  11. [11] 레코드 제작에서 통상 행해지는 오리지널 테이프에 대한 녹음, 편집 등의 프로세스를 거치지 않고 녹음한 음곡 등을 그 자리에서 믹스다운에서 만든 레코드
  12. [12] 밥 딜런의 무대 이름
  13. [13] 포크송을 부르며 춤을 추는 사교적인 집회
  14. [14]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던 카페로 코엔 형제인사이드 르윈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카페다. 비트족 시인들이나 전설적인 포크 가수들이 거주한 곳이다.
  15. [15] 민요연구가 앨런 로맥스의 사무실의 비서 카라 로톨로의 여동생
  16. [16] 미네소타 태생이라는 것 외에 다 엉터리였다.
  17. [17] 1954년 23살에 자신의 레이블을 설립하고 세실 테일러, 존 콜트레인, 선 라등의 앨범을 제작, 발매했다. 1963년에는 컬럼비아 레코드사 프로듀서가 됬다.
  18. [18] 이전에도 다 합쳐서 6분정도 되는 히트곡은 있었다. 1959년 발매된 레이 찰스의 ‘What’d I Say, 아일리 브라더스의 ‘Shout’ 등인데, 모두 곡의 반을.잘라 a면과 b면으로 나누어 발매된다.
  19. [19] 나중에 호크스에서 더 밴드로 이름을 바꾼다.
  20. [20] 밥 딜런은 조지 해리스의 앨범 All Things Must Pass의 수록곡에도 참여한다.
  21. [21] 단 조지가 참여한 곡은 수록되지 않앟다.
  22. [22] 바이오그래프, 1985년
  23. [23] 1978년 11월 23일, 텍사스 모닝 뉴스’
  24. [24] 미니애폴리스의 음악 프로듀서였다.
  25. [25] 밥은 형무소로 가 카터의 지원을 약속하기도 한다.
  26. [26] 처음에는 셰퍼드는 밥의 방식을 이해를 못했다. 밥은 셰페드에게 프랑스와 트뤼포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쏴라 처럼 만들고 싶다고 전한다
  27. [27] 밥은 롤링 썬더가 그저 정원에서 투에 명칭을 생각했는데 천둥소리가 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훗날 롤링 썬더가 네이티브 아메리카의 가르침으로 ‘진심을 말한다’는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기뻬한다.
  28. [28] 그리고 그 후 돌아오는/그것은 욕망/그 밑에서 나와 함께 돌아오는/그것과 함께 돌아오는/결고 두려움없이/마침내 믿음 가득한/그것은 나를 잘 이끌어주리/결고 실패 없이
  29. [29] 밥이 처음으로 일본으로 온 것에 일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추적하는 내용
  30. [30] 앨범 Backless에 수록
  31. [31] 조커즈
  32. [32] 그러나 이 해부터 밥 딜런에게는 매년 앨범 한 작품씩 발매라는 계약조건에 의무사항이 있었다.
  33. [33] 딜런 인생 최초의 비디오 클립
  34. [34] 나중에 크루자도스(Cruzados)로 개명한다.
  35. [35] 위블리만이 이 앨범의 만점을 줬다.
  36. [36] “그는 친구일 뿐 아니라 형제 같은 존재였습니다.”
  37. [37] 재즈, 블루스 기타리스트. 1930년대부터 활약했다.
  38. [38] 밥이 라노아에게 프로듀스를 맡긴 이유 중 하나가 밥이 좋아하는 네빌 브라더스의 앨범 ‘Yellow Moon’을 라노아가 프로듀스했다.
  39. [39] 또 라노아는 밥에 대해 “함께 일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집중력이 뛰어난 인간”이라고 평했다.
  40. [40] Soul Mining, 다니엘 라노아 저
  41. [41] 참고로 혈연관계가 아니다.
  42. [42] “현재의 밥의 내면에 계속 살아 있는. 과거의 밥으로 통하는 숨결을 꾜집어 내고 싶다.”
  43. [43] 평론가 로버트 크리스트가우는 A-를 주며 호평을 하기도 했다.
  44. [44] 시상은 잭 니콜슨이 했고 매리언 앤더슨, 존 레논, 줄리 스턴, 키티 웰스와 공동 수상했다.
  45. [45] Song to Woody, It’s Alright Ma’
  46. [46] 그리니치 빌리지를 탐방하고 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관련 데이터를 볼 수 있다.
  47. [47] 영화는 좋은 평을 얻었으나 흥행에는 실패한다
  48. [48] 양승갑 전남대 교수는 밥 딜런을 생태문학적으로 접근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논문에서 밥 딜런의 음악이 대중에게 생태적 인식을 주입하는 훌륭한 생태학적 텍스트임을 입증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49. [49] 백인 예능인들이 얼굴을 쌔까맣게 칠하고 흑인들 흉내를 내며 노래하고 춤추는 무대다. 비슷하게 꾸민 겉모습, 즉 의장에 의해 성립되고 있다. 백인이 흑인들의 생태를 관찰하고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 관객들 내면에 있는 이미지로서의 흑인풍 태도나, 동작, 가창법 등을 과장함으로써 웃음을 이끌어낸다. 이것은 백인이 흑인 지배와 인종차별이 잉태시킨 문화다. 남북 전쟁 후에는 그 무대에 검게 칠한 백인들 사이에 섞여 흑인 예능인들도 출연하게 되어, 백인들이 흉내 낸 흑인들을 흑인들이 다시금 흉내 낸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상태도 보이게 된다. 이것은 포크나 록에서도 농후하게 나타났고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에나 그런 의식은 내재되어 있다고 딜런은 시사한 것 이다.
  50. [50] 2001년 메타크리틱 올해의 앨범 1위
  51. [51] 제목은 물론 밥 딜런의 곡에서 가져왔다. 1966년 밥 딜런은 급작스러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뒤 몇년간 칩거하며 더 밴드(마틴 스코시즈의 음악다큐 <라스트 왈츠>의 주인공들)와 함께 우드스탁의 빅 핑크 별장에서 연주와 녹음을 하며 보낸다. <아임 낫 데어>라는 곡은 당시 연주 녹음된 것으로 1975년 발매된 <지하실의 테이프들>(The Basement Tapes)에 실릴 예정이었지만 실제 발표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해적판으로 떠돌다가 <The Genuine Basement Tapes, Vol2>(1992)에 실렸고, 이번 사운드트랙에도 들어갔다. 이 제목은 “여러 명의 밥 딜런이 등장하는 것을 가리키는 제목으로 합당하다”는 의미에서 지어졌고, 또 하나는 토드 헤인즈 개인에게 이 말(나는 거기에 없다)이 프랑스의 낭만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시구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나는 타자다.”).
  52. [52] 로보스는 1992년 밥 딜런의 멕시코 투어에서 오프닝 아웃을 담당했다.
  53. [53] 이 기록은 2011년 토니 베넷에 의해 깨진다.
  54. [54] “금세기 밥 딜런 최고의 앨범“ - MOJO ★★★★★, “밥 딜런의 카탈로그 중 가장 낯선 앨범“,"이 시대의 마스터피스" - 롤링 스톤 ★★★★★, 밥 딜런의 최근작 중 가장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앨범 - 10점 만점 Uncut, “지난 10년간 밥 딜런의 작품 중 최고의 결과물 “ - The Guardian
  55. [55] 역사학자인 테오도르 몸젠을 제외하고서 윈스턴 처칠은 '2차 세계대전 회고록'를 집필. 러셀은 수필을 많이 남겼고, 사르트르는 <구토> 같은 뛰어난 소설을 남겼다.
  56. [56] 1990년대 이후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차례 올랐다는 소문도 있어왔지만 실제로는 수상하지 못했고 2016년에 도박사들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수상자로 예상했다.
  57. [57] 에스콰이어 1965년 9월호 표지. 밥 딜런과 말콤 X, 피델 카스트로, 존 F. 케네디의 얼굴을 1/4씩 배치했다.60년대 초중반 딜런의 가사가 얼마나 크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는 지를 알 수 있는 짤방. 하지만 밥 딜런 본인은 이걸 보고 이게 뭐하자는 플레이냐며 굉장히 불쾌해 했다.
  58. [58] 노벨 위원회 멤버이기도하다
  59. [59] 1위는 비틀즈
  60. [60] Dylan's influence on Garcia and Hunter was a given; both admired his songwriting and thought he gave rock music a modicum of respectability and authority. "He took ‘rock music’ out of the realm of ignorant guys banging away on electrical instruments and put it somewhere else altogether," Garcia said later. Richardson, P. (2015). No Simple Highway. St. Martin's Press. p. 150.
  61. [61] "They asked me what effect Bob Dylan had on me," Townshend said. "That's like asking how I was influenced by being born." Flanagan, (1990), Written In My Soul, p. 88.
  62. [62] "Bob Dylan, I'll never be Bob Dylan. He's the master. If I'd like to be anyone, it's him. And he's a great writer, true to his music and done what he feels is the right thing to do for years and years and years. He's great. He's the one I look to." Time interview with Neil Young, September 28, 2005.
  63. [63] 많은 사람들이 돈 맥린, 돈 매클린으로 알고 있는 가수다.
  64. [64] 돈 매클레인과 조니 미첼은 시기와 전달 매체는 다르지만 밥 딜런에 대해서 부정적인 언급을 한 바 있다.
  65. [65] 초창기 창법은 우디 거스리의 영향을 받았다.
  66. [66] 본인은 그리니치 빌리지에 안갔더라면 이런 노래들을 결코 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67. [67] 영국 중세 민요인 Nottamun Town의 멜로디에 딜런이 쓴 전쟁의 부조리함을 꼬집는 새 가사를 입힌 곡이다. 다만 딜런이 부른 곡조는 영국 출신의 미국 여성 포크 가수 겸 애팔래치안 덜시머 연주자인 진 리치(Jean Ritchie)의 편곡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리치 측과 합의 하에 3000달러를 물어야 했다.
  68. [68] 많은 사람들이 방사능 낙진(쿠바 미사일 위기 참조)을 묘사한 것이라고 해석했는 데, 본인은 부정했다.
  69. [69] 노래 제목은 Talkin’ John Birch Paranoid Blues. 정규 앨범에 수록되지는 않고 나중에 발매된 공식 부틀렉에 수록되어서야 빛을 본 곡이다. 극우 반공 단체 '존 버치 소사이어티' 일원이 빨갱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데, 급기야 자신까지 훑어보는 신세까지 이른다는 내용.(...) 저런 걸 TV로 내보내겠다고?
  70. [70] 이에 대해서 자신의 반항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일부러 저런 행동을 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71. [71] 크럼프는 “인터뷰보다 익삭글과 더 비슷한 것 같습니다”라고 인터뷰를 평했다.
  72. [72] 금융, 통신회사
  73. [73] 다만 말 솜씨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고 사석에서 말수도 적었다고 한다.
  74. [74] 베트남 전쟁부터 9.11 테러까지 당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슈에 대해서 본인의 견해를 딱부러지게 언급한 적이 별로 없다.
  75. [75] 처음으로 언론에서 인터뷰를 할 즈음엔 언론에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기 사진이 잘 나오는 지 신경을 쓰는가 하면, 후술할 첫 일렉트릭 콘서트에서 청중들과 거의 싸울 듯한 모습을 보이는 듯 하다나 공연이 끝나니 관객 수가 몇명인지 묻는 등. 또한 부랑자를 연상케하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섬을 몇 개씩이나 보유한(거기다 현재 집 주소가 말리부다.) 부동산 부자다.
  76. [76] 그래서 엘비스가 록의 엉덩이(혹은 골반)고 밥 딜런은 록의 두뇌라는 비유도 있다. 참고로, 밥 딜런 본인도 다른 당대 로커들이 그랬듯이 엘비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77. [77] 사실 밥 딜런과 같은 수준의 보컬리스트들은 노래를 못하는 것조차 하나의 미적 효과로 작용하게 된다. 애초에 멋지게 잘 불러야 듣기 좋을 노래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니까...
  78. [78] 그런데 현실에서 이 노래는 건즈 앤 로지스가 부른 것으로 더 유명한 듯 하다. 오죽하면 존 본 조비가 "아가들아 GNR 노래가 아니라 밥 딜런 아저씨 노래란다" 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이니.
  79. [79] Knockin' On Heaven's Door'가 바로 이 영화 사운드트랙에 실린 곡이다.
  80. [80] #출처 기사 / #중앙일보 번역 기사
  81. [81] 이 발언이 나온 배경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우스타샤 문서 참조.
  82. [82] 심지여 영화로만 공개되었던 I'm Not There 음악이 여기에 있다! 하긴 그때 1967년도에 만들었는데 그때 명곡을 이렇게 오래동안 숙성시킨 것이다. 이외에도 몇몇 곡들은 앨범에 넣기도 했지만 그에 비해 공개 안된곡이 너무 많다.
  83. [83] 1966년 말"킹맨"이라고 이름 붙여짐
  84. [84] 여자친구였던 수지 로톨로의 영향이 컸다.
  85. [85] ‘Self Potrait’, ‘Planet Waves’
  86. [86] Wenner, Jann S. Lennon Remembers, Rolling Stone Press (2000) 148쪽
  87. [87] 포크 페스티벌에 일렉트릭을 들고 나타난 딜런을 보고 관중과 동료들은 '아무리 잘 나가도 그렇지, 해도 해도 너무한다'며 야유를 하고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아니다. 딜런이 하는 것이 포크이니 저게 바로 포크의 미래다.'라며 그를 옹호한 것은 바로 당시 포크계의 대부 우디 거스리.
  88. [88] 사운드트랙 앨범
  89. [89] 더 밴드와 합작 앨범
  90. [90] 더 밴드와 합작 앨범
  91. [91] 더 그레이트풀 데드와 합작 라이브 앨범
  92. [92] 일본에만 발매됬다.
  93. [93] 36CD 박스셋
  94. [94] 2CD
  95. [95] 3CD, 디럭스 4CD
  96. [96] 2CD
  97. [97] 2CD
  98. [98] 2CD
  99. [99] 2CD
  100. [100] 2CD, 디럭스 3CD
  101. [101] 2CD, 한정판 디럭스3CD
  102. [102] 2CD, 한정판 디럭스 4CD
  103. [103] 6CD
  104. [104] 2CD, 디럭스 6CD
  105. [105] 2CD, 디럭스 8CD
  106. [106] 스탠다드 버전
  107. [107] 디럭스 버전
  108. [108] 호주, 뉴질랜드, 일본 한정 발매
  109. [109] 5LP 세트
  110. [110]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한정 발매
  111. [111]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한정 발매
  112. [112] 미국 한정 발매
  113. [113] 디지털 한정 발매
  114. [114] 디지털 한정 발매
  115. [115] 싱글 디스크 버전, 디럭스 버전 발매
  116. [116] 8CD/바이닐 세트
  117. [117] 싱글 디스크 세트, 8CD/바이닐 세트
  118. [118] 2CD세트
  119. [119] 3CD세트
  120. [120] 4CD세트, 유럽 한정 발매
  121. [121] 47CD세트, USB로도 발매
  122. [122] 6LP세트, 유럽 한정 발매
  123. [123] 9LP세트, 유럽 한정 발매
  124. [124] 다큐멘터리
  125. [125] 샘 셰퍼드와 공동 각본
  126. [126] 단편 비디오
  127. [127]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함.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주길.
  128. [128] 조지 해리슨의 앨범에 밥 딜런도 참여했고 수상한다.
  129. [129] 3월 31일에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내한 공연 한다.
  130. [130] 일본 후지 록 페스티벌 헤드라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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