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본기

百濟本記

백제삼서(百濟三書)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1. 개요
2. 일본서기의 인용문
2.1. 계체기
2.2. 흠명기

1. 개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백제의 역사서. 《삼국사기》를 비롯한 한국의 사서들에서는 언급되지 않으며, 일본서기가 인용을 함으로써 존재가 확인된 사서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부합하는 기록도 나오나,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백제가야와 관련된 기록들이 나오기 때문에 만약 정창원[1]에 현존 하고 있다면 한국사의 기록이 통채로 바뀔지도 모른다.

주요 기록이 백제 성왕 시기(531년, 545년, 546년) 에 걸쳐 있기 때문에 위덕왕 시기에 편찬된 기록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관련 기록들이 백제 성왕의 행적과 비슷한 이유도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이 책을 그대로 복붙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존재한다.

2. 일본서기의 인용문

일본서기에 인용된 횟수는 총 3차례로 케이타이 덴노, 긴메이 덴노의 기록에서 일부가 전해진다.

2.1. 계체기

겨울 12월 병신삭 경자(5일), 남야릉(藍野陵;아위노노미사자키)에 장사지냈다【어떤 책에서는 천황 28년 이 해의 간지 갑인에 죽었다(崩)고 하였다. 여기서 25년 이해의 간지 신해에 죽었다(崩)고 한 것은 『백제본기』를 취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 기록에서는 ‘이 해의 간지 신해 3월, 군사가 안라로 나아가 걸탁성(乞乇城)을 쌓았다. 같은 달, 고구려는 그 왕 안(安)을 시해하였다. 또한 일본 천황 및 태자 황자가 모두 죽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신해년은 25년에 해당한다. 후에 교감하는 자가 어느 것이 옳은지 알 것이다.】

《일본서기》 계체기 25년 계체천황을 장사지냄

2.2. 흠명기

이 해에 고구려에 대란(大亂)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살해당하였다.【『백제본기』에는 “12월 갑오(20일)에 고려국의 세군(細群)과 추군(麁群)이 궁문에서 싸웠다.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세군이 패하였으나 사흘 동안 군사를 해산하지 않았다. 세군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무술(24일)에 박국(狛國)의 향강상왕(香岡上王)이 죽었다(薨).”고 한다.

《일본서기》 흠명기 6년 고구려에서의 대란(大亂)


이 해에 고구려에 대란이 있었다.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백제본기』에서 “고구려에서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나이가 8살이었다. 박왕(狛王)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다. 정부인(正夫人)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중부인(中夫人)이 세자(世子)를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추군(麁群)이었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다. 박왕이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부인이 낳은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세군 측에서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흠명기 7년 고구려에서의 대란(大亂)

이 외에 백제본기라는 인용글은 없으나, 관산성 전투의 행적도 백제본기의 기록을 따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 [1] 일본 황실의 보물창고로 한국에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KBS측에서 궁내청 정창원관리소에 수차례 내부 촬영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모조리 묵살되었다. 이 때문에 이곳에 한국사와 관련된 각종 기록들도 남아있는거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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