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공화국

베트남 공화국
越南共和國
'Việt Nam Cộng Hòa

국기[1]

국장

1955년 ~ 1975년

표어

Tổ quốc - Công minh - Liêm chính

국가

공민에게 고함

위치

동남아시아

수도

사이공

정치체제

공화제

국가원수

총통

인구

약 21,000,000명

언어

베트남어

종교

불교. 가톨릭, 개신교, 유교, 도교

주요사건

1955년 건국
1956년~1975년 베트남 전쟁
1975년 사이공 함락+멸망

통화

남베트남 동(Đ, đồng)

성립 이전

베트남국

멸망 이후

남베트남 공화국
자유 베트남 임시 정부

1. 개요
2. 역사
3. 부패의 역사
5. 멸망
6. 숙청
8. 통일 이후
9. 남베트남의 해외 이주자
10. 관련 문서

1. 개요

베트남 공화국(Việt Nam Cộng hòa, 비엣남 꽁 호아, 越南共和). 북베트남이라 불리던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대립하며 현 베트남의 남부에 존속하던 국가. 간단하게 남베트남(Nam Việt Nam), 남월(南越)이라고도 불린다.[2]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현재의 베트남 남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도는 지금은 호치민 시로 개명된 사이공(Sài Gòn, 柴棍)[3]. 국가는 '공민에게 고함'.

지방행정은 44개 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참고로 통일 후인 현재 구 남베트남 지역에는 31개 성이 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월남(베트남)을 정통 정부로 간주했기 때문에 남베트남을 월남이나 자유월남이라고 불렀고,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월남(베트남) 독립 동맹'의 정권이라 하여 월맹(베트민, Viet Minh)이라고 불렀다. 현재도 베트남 전쟁 관련 자료 등(특히 국방부에서 발간한 것들)에서 당시 명칭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베트남이 통일한 이후부터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베트남이라고 부른다.

2. 역사

사실 이 일대는 원래 베트남 영토가 아니라 서기 192년부터 1832년까지 참파라는 나라가 따로 존재했고, 참파의 주 종족이었던 참인들은 베트남의 주요민족인 킨족과는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많이 다른 민족이다. 그러나 베트남이 건국 된 이래로 꾸준한 남진 정책을 펴면서 밀려버리며 17세기에 빈사상태에 빠졌으며 참인들이 보트피플이 되며 언어적으로 비슷했던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일대로 이주하였고, 그 자리를 베트남인들이 차지하면서 국가가 찢어지고 종속국으로 전락한 끝에 1832년, 베트남에 완전히 흡수되었고 참족들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해버렸다.. 마찬가지로 수도 사이공이 있는 메콩 강 유역도 원래 프레이 노코르라 불리던 캄보디아 땅이었지만, 18세기에 베트남이 각종 이유를 들며 뜯어갔다. 베트남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남쪽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결국 찐(Trịnh, 鄭)씨의 북부와 응우옌(Nguyễn, 阮)씨의 남부로 분열되었고[4], 최종적으로 1802년이 되어서야 오늘날 베트남의 영토를 완성하고 통일을 이뤘다.

1945년, 베트남을 점령하던 일본이 항복한 이후 베트남을 관리하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도 실행하기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북쪽엔 중화민국군이, 남쪽엔 영국군이 베트남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이 두 세력이 들어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에 베트남은 관리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이 때를 노려 호치민이 이끌던 베트남 공산당이 전후 며칠 만에 베트남 북부를 장악. 9월 2일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프랑스 식민당국은 이를 눈뜨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는데 전쟁기간 동안 일본군은 이들을 억류하고 있던 상태였고 일본군이 항복한 이후 이들에 대한 억류조치를 풀지 않은 채 일본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 북부로 진입한 중국군은 자신들이 완전히 자리잡을 때까지 프랑스인들에 대한 억류조치를 풀지 않으면서 베트남 공산당의 이러한 행동을 사실상 방치하였다. 한편 16도선 이남의 영국군 주둔 지역에선 담당인 영국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들어오는 바람에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관할은 남베트남에 미치지 못했다.

1946년,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베트남 내 중국군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돌아가면서 프랑스인들의 억류조치를 풀어주었고 풀려난 프랑스 식민당국은 일단 영국군의 주둔지인 베트남 남부로 가 행정권의 인수인계를 받으면서 베트남 남부를 재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되면서 베트남은 사실상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남베트남에서도 프랑스는 환영받지 못했고 반프랑스 분위기가 퍼져나가자 결국 프랑스는 일단 괴뢰국을 세우기로 판단, 사이공에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세운다. 이후 베트남 재정복의 야욕을 감추지 못하는 프랑스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자 1946년, 중국의 중재 아래 정전 협정에는 합의했으나 프랑스가 이 협약을 파기, 베트남 남부를 재점령해 괴뢰국인 베트남국을 선포하고 하이퐁[5]에 상륙, 베트남을 재침공한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베트남 독립 동맹(통칭 베트민)을 결성,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에 대항한다.

1954년,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민에게 처절하게 깨지고난 뒤 베트남에서 발을 빼기위해 미국과 소련에게 중재를 요청,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네바 회담이 열렸다.[6]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될 경우 인도차이나 전역이 공산화될 것이라는 우려에 빠져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제네바 협의에서 베트남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 통칭 월맹)과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으로 분단된다. 정전선 설정에 관해서 논란이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프랑스는 북위 18도선을 고집했고[7], 월맹은 북위 13~14도선[8]을 주장했다. 저우언라이가 북위 16도선[9], 몰로토프가 16~18도선의 중간인 17도선을 중재하여 베트남은 17도선을 경계로 남북분단된다.

하지만 중재를 맡아 일단 전쟁은 끝내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이 회담에서 베트남은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한 뒤 2년 후 남북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총선거를 실시할 경우 공산세력이 압승을 거둘 것임이 확실했고 이럴 경우 베트남의 공산화는 불보듯 뻔한 상태였으므로 미국과 베트남 남부는 총선거를 거부한다.[10][11] 그리고 1954년 10월, 남부 베트남은 미국의 지원 아래 단독으로 베트남국 수립을 선언하고 바오다이가 황제, 응오딘지엠이 총리 직을 맡는다.

그런데 1955년 10월 26일, 응오딘지엠은 국민투표를 통해 베트남국을 폐지하고 바오다이를 폐위,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응오딘지엠은 정치적 선전방송을 통해 바오 다이를 쾌락 추구자로 비난하고 자신은 국가를 위한 경이로운 일꾼으로 선전했다. 응오딘지엠을 행운의 상징으로, 바오 다이를 불행의 상징으로 띠운 선거 전략은 주효하여 바오다이는 98.2%의 찬성 투표를 통해 폐위되었다.[12] 하지만 진짜 문제가 있었으니...공화정을 세운 것까지는 좋았는데, 베트남국의 무지막지한 부패를 베트남 공화국이 그대로 계승하고 만다.

또한 북베트남에서 파견한 간첩의 세력이 커졌는데 실제로 베트남 전쟁 이후 남베트남에 암약하던 북베트남의 간첩이 다 까발라졌고 다 먼저 처형당했다. 북베트남 간첩의 대표적인 예가 야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였던 쫑딘쥬였는데 간첩이 정부와 국회 등 국가 지도부 전체에 쫙 깔리니 국가 기밀이 북베트남에 유출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초기에는 응오딘지엠의 불교도 군벌 숙청과 치안력 회복 덕분에 6년 정도 평화를 누렸던 베트남 공화국이었지만, 북베트남이 국가정책으로 남베트남의 전복을 채택하고 남베트남의 게릴라, 베트콩에 대한 막대한 지원을 퍼붓기 시작하면서 베트남 공화국은 악명높은 베트콩의 준동으로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3. 부패의 역사

풍부한 쌀 수확 덕분에 북베트남보다 경제력이 앞섰지만[13] 미국의 원조를 받아 양성한 군인들이 대체로 무능하고 정치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특히 초대 대통령이던 응오딘지엠의 병맛 정치 때문에 더 환장할 상황이 벌어졌다. 초기에는 친불군부 숙청, 공화국 체제 수립, 정치깡패 및 불교도 군벌 정리를 통한 치안 안정, 북베트남의 무리한 토지 개혁과 종교 탄압 때문에 발생한 80만에 달하는 탈북민을 정착시키는 등[14] 그럭저럭 잘 출발하는 것 같았는데, 민주화를 요구하는 미국의 요구에 맞서기 위해 응오딘지엠이 내세운 것이 천주교도, 남베트남에선 소수인 북부 통킹인, 중부 안남인 중심 내각[15], 친족들로 정부를 채우는 족벌정치였고 미국의 입김을 줄이겠다는 이유로 조성된 가족정치 덕분에 공직을 맡을 사람을 뽑는 기준이 '친인척인가' 혹은 '가톨릭을 믿는가'였으니 말 다했다.[16]

쩐레쑤언
(Trần Lệ Xuân, 陳麗春, 1924~2011)

1963년 5월에 접어들어 지엠 정권의 불교 탄압에 분개한 베트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고승인 틱광둑(Thích Quảng Ðức, 釋廣德)이 소신공양으로 세계에 베트남의 상황을 알리고자 했으나 응오딘지엠 일당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뉴(Ngô Đình Nhu, 吳廷瑈)의 아내이자 역시 부패의 핵심 축 중 하나였던 쩐레쑤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마담 뉴(Madame Nhu)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는데 소신공양에 대해 매스컴에다가 이런 식의 소리를 지껄였다. 당시 영상

중놈들이 한 게 뭐가 있소? 기껏해야 한 사람 바비큐로 만든 것 뿐인데.

(What had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이 재활용도 어려울 역대급 고인드립에 그 동안 쌓인 대중의 분노가 전국적인 규모로 폭발했다. 심지어 당시 미국 정부도 어이를 잃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여론의 분위기를 보고 드디어 때가 왔다고 판단한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 楊文明) 장군을 위시한 고위 군사 사령관들이 작당하여 그 해 11월 1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 정권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응오딘지엠과 동생 응오딘뉴는 도망쳐서 교회에 숨어있다가 다음날 발견되어 사살당했다.[17][18] 그러나 이번에는 장군들 간에 권력 다툼이 시작되어 쿠데타가 줄을 잇다가 1965년에 응우옌반티에우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다소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막장을 다시 시작하였다. 자기 힘으로 전쟁을 치르겠다는 진지한 태도를 가지지 않고 미군의 전투력과 쇼미더머니 신공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에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여담으로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재정 적자, 무역 적자, 인플레이션의 3박자가 겹치면서 그 앞선다는 경제도 점차 안습이 되고 농촌 지역의 상당수가 베트콩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자 쌀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전락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정치적 혼란과 여러 이유로 병역기피도 만연하였다. 휴가를 제대로 보내주지 않는다거나 가족에게 가야 할 전사자 보상금을 장교가 빼돌린다던지…때문에 군대는 자주 농촌 마을들을 수색하여 징병을 해야 했다고 한다. 원래 수도인 사이공과 메콩 델타 일대만 하더라도 남북 베트남 분단 이전에는 오히려 베트남 공산주의자들 사이 단일 최대의 규모를 자랑했던 사이공 소비에트와 이를 지지한 빈농들이 다수인 지역이었다. 때문에 월맹이 1950년대의 토지 개혁을 둘러 싼 혼란을 극복하고 1960년에 본격적인 해방 전쟁을 선포하자 순식간에 수도권은 최전방이 되어버렸다. 1960년대 중반에는 아예 나라 전체가 베트콩에게 넘어갈 뻔하다가 미국이 이제까지 해 왔던 간접 지원에서 아예 대규모 지상군 파병을 하면서 겨우 살아 남았다.

응오딘지엠이 무능했고 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하게 미움을 사긴 했지만, 남베트남 역대 지도자 가운데서 미국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국정을 추구할 만큼 그릇과 세력이 있었던 인물 또한 응오딘지엠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나마 미국에게 받아 먹을 건 다 받아 먹으면서도독자적인 정책을 시도하던 응오딘지엠 시절과 달리,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북베트남의 선전 문구 그대로, 아예 1969년 파리 평화 회담 같은전쟁의 경과에 직결되는 중요한 회의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식으로 무시를 당하는 등 허울뿐인 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애당초 남베트남은 존립시기 내내 정상적이고 독자적인 행정 체계를 세우고 실행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1970년 총선에서 불교세력이 대거 진출하는 결과가 나올정도로 그럭저럭 정상적으로 치러졌고 그나마 정통성을 세울 기회였지만 1971년 대선에서 부정선거가 펼쳐지며 안그래도 없던 정통성마저 아작나버리고 말았다.

뒤집어 말하자면 미국이 아예 전쟁 자체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다면 남베트남 정권은 실제 역사보다 10년은 일찍 망했을 것이고 이건 당장 월맹측의 프로파간다용이 아닌 내부 자체 평가용 자료나, 미국 측의 시선이나 모두 동의 하는 내용이다.[19] 이따금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학계와 대중의 인식 둘 다 주도했던 68혁명 시절의 제 3세계 민족 해방 좌파적 낭만주의에 반발하여 진행과 결과에 대해 수정주의적 시각을 고수하며 월남이 적화 통일이 되지 않았을 대체 역사의 장미빛 미래를 운운하는 논객, 심지어 학자들도 있는데 정직하게 자체적인 역량으로선 실제 역사보다 10년 일찍 망했을 나라가 미국이 군사 지원도 아니고, 아예 대놓고 전쟁을 대신 싸워준 덕에 10년 동안 식물국가로 더 연명한걸 간과하거나, 아주 간편하게 무시하고 내놓는 주장이다. 지엠 정권도 당장 그나마 현대 들어와서 나름은 똑똑하고, 미국에게 휘둘리기만 한게 아니라 미국을 잘 이용했으며, 독자적인 비전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수준으로 부분적으로나마 재평가를 받은거지, 당장 아무리 개인적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다 한들 그 몰락 과정을 보면 어쨋든 그 한계와 실패는 뚜렷했던 인물이고, 그렇다고 해서 지엠 정권 몰락 이후 남베트남 내에서 의미 있고 지속된 독립 근대 국가 건설로 향한 발전이 있었냐 하니 그것도 글쎄올시다. 당장 내부 결속과 쌓아둔 정치적 자산, 조직력, 국가 건설 과정을 주도하는 명분 차원에서 이렇게 압도적인 차이가 났는데 이런 근본적인 여건의 차이를 무시하고 남베트남이 월맹에 비교하여 독자적인 경쟁력이 있었던 국가였다고 우기는거 자체가 도둑놈 심보다. 일반적인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식에서 미국의 역할과 그 이후 미국의 미디어물들이 재생산한 이미지가 너무 커서 흔히 간과 되는 면모인데, 하드웨어적 측면에서 군사적인 면만 빼면 베트남 전쟁 당시 진짜 다윗과 골리앗은 오히려 남베트남이 다윗이었고, 북베트남이 골리앗이었다. 그리고 신화적인 전승이 아닌 실제 현실에서 대부분의 다윗은 근본적인 체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골리앗에게 진다는 점에서 [20] 베트남 전쟁의 진행 과정과 남베트남의 흥망성쇠를 무슨 대단한 미스테리인양 신화화 하는 시각 자체가 좌우익을 떠나 학문적으로는 유익한 자세가 아니다.

4. 베트남 전쟁

5. 멸망

독립궁(현 통일궁) 정문을 쳐부수고 들어오는 베트콩군의 전차(1975년 4월 30일 11시 30분 사이공)

결국 1973년 1월에 파리 협정을 체결한 미국이 전쟁에서 손 털고 떠나버리자 베트남 공화국은 완전히 새 되고 말았다. 1975년 봄에 시작된 북베트남의 막판 공세에서 남베트남군은 쑤안록에서 치열하게 싸운 18사단(역설적이게도 18사단은 원래는 최약체 사단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같은 일부 부대의 영웅적인 항전을 제외하면 일패도지,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병합되고 말았다.[21] 미국이 철수하면서 엄청난 군사지원을 해줘서 일시적으로 세계 순위권의 군사력을 가질 수 있었는데도 패퇴하고 만 것이다.

당시 베트남 공화국은 미국이 준 장비만으로도 공군력 세계 4위, 총 병력수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 순위권의 군사력이란 것은 잘 보면 빈 껍데기였다. 공군력도 숫자로만 4위, 실제 전력은 북폭을 할 능력도 없고 거의 다 지원기 수송기 위주였다. 100만 병력이란 것도 정규군은 45만 수준이고 나머지는 민병대와 지방대이다, 민병대와 지방대는 실제 전투전력이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겉은 그나마 번드르르했지만 안은 엉망이었다. 미국이 준 무기의 규모는 정말 세계 순위권에 들 수준이었으나, 정작 그 순위권에 드는 규모의 무기를 굴릴 돈과 물자는 주지 않았다.

미국도 일부러 안 준게 아니라 베트남 전쟁의 수렁 때문에 경제난이 심각했고, 미 행정부가 지원을 위해 예산을 편성해 미의회에 허락을 받으려고 했으나 미 의회에서 더이상 부패 정권에게 지원은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삭감했고 여론도 이미 남베트남 지원에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최종공세 당시 남베트남군은 연료와 부품이 없어 비행기도 제대로 띄우지 못했고 탄약의 부족으로 전투에도 제한을 받았다. 탄약 아껴쓰라는 명령이 내려올 지경이었다. 전술적으로도 미국식 전술과 미군의 지원에 너무 의지하게 된 것이 약점이 됐다. 미군만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군대가 미군처럼 싸우는데 익숙해져버렸으니.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이 지원하는 베트콩 게릴라를 잡으려고 전군을 국토에 넓게 분산시켰는데, 부족한 병력을 무리하게 넓게 펼치다보니 전 국토의 치안 유지 능력이 악화되었다. 결국 전략을 수정하여 주요 거점을 안전하게 확보한 다음 토벌에 나서기로 결정하고 대대적인 부대 재배치를 감행하였으나, 그 첩보를 입수한 북베트남이 부대 재배치가 이루어지는 빈틈을 노려 침공해왔다. 방어체계를 제대로 굳히기도 전에 전격전을 당한 것이다. 티우의 전략은 현재 병력으로는 모든 곳을 지킬 수 없으니 해안 주요도시 등 지킬 곳만 지키는 식으로 병력 재배치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2군단 몰락을 가져와 전체적인 남베트남 육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22]

그리고 부패하고 친서방주의의 베트남 공화국에 이미 민심은 떠나 있었다. 이로 인해 개전 초기에 100만이 넘는 병력 중 반 이상이 탈영을 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 북베트남의 지도자였던 호찌민은 생전에 베트남 공화국을 정복하는데 30년 이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죽은지 몇년 뒤인 1975년 4월 30일 개전 1개월 만에 정권이 무너졌다. 이후 남베트남에는 북베트남의 괴뢰 정권인 '남베트남 공화국(Cộng hòa Miền Nam Việt Nam)'이 세워져 이듬해인 1976년 7월 2일 북베트남과 통합하여, 베트남 통일을 이루었다.

국민의 지지를 못 받는 그리고 썩어빠진 정부는 허무하게 무너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

심지어 너무나도 외국군에게 의존하고있어 군내부의 부패를 잡지못해 좋은 전력차이에도 패배하고 만것이다.

6. 숙청

여느 공산 국가들이 그렇듯 상당한 규모의 학살 및 숙청이 일어났다.

1975년부터 10년간 사법적 과정없이 처형된 자들은 65,000명 정도며, 많이 잡으면 10만명 정도라고 한다. 미국의 연구자가 1990년에 발표한 논문이며, 굉장히 많이 인용된다. (당시 남북 베트남의 인구는 1973년 기준으로 북쪽이 2,393만, 남쪽이 1,937만). 다수가 처형되거나 혹은 수용소에 간 것도 사실이다. 남베트남에서 근무했던 군인, 공무원이 재교육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양민학살이나 심각한 부패 혐의가 없는 남베트남 관리나 지주 대부분도 재교육 캠프에 들어갔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야 석방되었고, 이 숫자는 100만명 정도 된다. 다만 공산정권은 특별히 베트콩에 잔혹행위를 하지 않았거나 부패혐의가 없는 남베트남 고위 관리들은 해외로 망명하도록 허가해주기도 했다.[23]

베트콩 정부와 군대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은 북베트남군에서 남파한 인력이므로 애초에 숙청대상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베트콩(정부)은 남파된 북베트남군+자생적 반정부주의자(소위 민족주의자)의 공생조직이었으므로, 남베트남이 패망할 무렵부터 베트콩은 서서히 공생조직에서 북베트남군 일색으로 교체되어 간다. 이는 베트콩 정부에서 법무장관으로 활동했던 민족주의자 계열의 반정부 지식인이 직접 목격한 것으로 얼마 전까지 남베트남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됐던 부대가 머지않아 다시 봤더니 온통 북베트남인(군)으로 채워져 있었고, 북베트남군 정치장교가 통제하고 있더라는 증언을 했다. 베트콩들 역시 1968년 일어난 구정 대공세로 인해 대부분의 간부들이 남베트남군과 미군에의해 토벌당했고 살아남은 민족주의계열 간부들은 거의없었고 남은건 남파된 북베트남 정치장교들이 대부분이었던것이다.

피해를 봤다면 민족주의 세력이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남베트남의 패망이 유력해질 무렵부터 베트콩 정부와 군대의 요직에서 밀려나기 시작했고, 이들이 밀려나면서 베트콩 정부가 북베트남 정부와 다를 바 없게 되자 북베트남은 베트콩 정부와의 상의도 없이 남베트남 패망 2년 후 일방적 합병선언으로 통일을 완수했다. 북베트남의 강력한 재교육 정책에 항의했던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은 재교육 캠프에 수용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민족주의 계열인사(베트콩 정부의 법무부 장관)는 결국 승리했음에도 보트 피플로 망명해 최종적으로 현재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이 내용은 그가 프랑스에서 발간한 자서전의 일부이며, 실제로 그 외에도 북베트남 정규군 출신으로 통일후 남베트남에 대한 정책에 회의를 품고 망명해 프랑스에 거주하는 전직 북베트남 장교들도 유사한 증언을 한 바가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베트콩 정부(와 군대) 내의 공산주의자 계열(대개 북베트남 남파인원)들은 당연히 문제가 안 됐고, 자생적 민족주의자(반정부) 계열은 통일 이후 가치 하락과 반항 정도에 따라 요직에서 제외 혹은 재교육 캠프행이 결정됐고, 남베트남 출신들도 마찬가지였다고 보면 된다.[24]

최후의 남베트남 대통령이었던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은 1980년대 한국의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서는[25]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나왔지만 실제로는 사이공 함락 후 간단한 조사를 거쳐 귀가시켰고, 후에 프랑스 망명을 허가해줬다. 그리고 나중에 즈엉반민이 해외에서 사망했을 때도 베트남 정부에서 유감을 표명했을 정도. 이는 즈엉반민의 경우 사이공 함락 당시 무조건 항복한 당사자라는 점, 그리고 해외 망명생활에서도 공산 베트남 정부에 대해 크게 비판적인 말을 하거나 하지도 않고, 비교적 조용히 살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베트남 현 정부에서도 크게 거슬려 하지는 않았다. 반면 남베트남계 이주민들은 즈엉반민을 곱게 보지 않는다. # 남베트남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응우옌까오끼(Nguyễn Cao Kỳ)의 경우도 2004년 베트남 방문을 허가해줬다.

이렇게 상당히 많은 사람이 처형되거나(약 10만), 수용소(약 100만)로 간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누구보다는 비교적으로 덜 악랄하게 굴었지만, 어쨋든 국가 주도의 대규모 인권 탄압과 보복성 테러가 자행 된 걸 부정할 순 없다. 호찌민은 통일후 대량숙청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는지 베트남전 종전 몇년 전에 죽을 때 남베트남 사람을 탄압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당부했지만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물론 공산화 직후 옆동네에서 벌어진 사태에 비하면 훨씬 덜하기는 덜했다.[26]

7. 왜 망했는가

베트남 공화국/패망 원인 참조.

8. 통일 이후

북베트남이 비록 무력으로 남베트남을 통일시키기는 했다만, 정작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남부 통치에서 고전을 거듭했다. 농촌의 사회주의화 개조 작업은 자영농 체제에 익숙해져 있던 남부 농민들의 저항에 직면했고, 새로히 협동농장에서 일하게 된 농민들은 저임금에 대한 불만으로 태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생산성은 오히려 이전보다 크게 떨어졌다. 또한 협동농장화가 완료된 북부 농촌과 사회주의 개조가 지지부진한 남부 농촌의 공존은 정부의 경제정책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드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태풍이 연속적으로 들이 닥치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데다가 협동농장화되지 않은 자영농들의 농산물은 암시장으로 흘러들었고, 공무원들조차 배급이나 정부공급가가 아닌 암시장에 의존해 식량을 수급해야 했다. 베트남 정부에서는 이러한 경제문제를 해결하려고 물가조정조치 및 신 화폐 발행을 단행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별 효력을 얻지 못한채 물가상승률만 높여주는요인이 되었고 오히려 먹고살기 위해 다른국가로 배를 타고 이민가는 보트피플이 더욱 성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풍요로운' 사이공의 모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북부 출신의 당·정·군 간부들을 빠르게 '타락'시켰다. 남부인들은 사이공 등의 도시에서 이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상납해가면서 암시장을 비롯한 시장경제 활동을 이어나가며 베트남 정부가 꿈꿨던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교란시켰다. 이러한 경제운용의 난맥상과 통일 후 장기간 이어져온 경기침체를 극복하려는 베트남 공산당 내 개혁파들의 노력이 1980년대 몇 차례의 개혁을 거쳐 결국 도이머이로 불리는 대대적인 시장화 개혁으로 이어졌다. 이는 중화민국과 국민당을 내륙에서 몰아냈지만 결국엔 개혁개방정책을 펴서 경제발전을 이록한 중국의 모습과 비슷하다. 결국 현재 베트남호찌민이나 북베트남이 꿈꾸던 노동자, 농민, 인민의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남베트남이 꿈꾸던 자본주의 국가가 되고 말았다.[27]

지금도 구 북베트남 지역보다 구 남베트남 지역이 경제적으로도 훨씬 부유해서, GDP도 옛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호치민(사이공)이 북부의 수도 하노이보다 두 배나 높다. 정작 분단 시기에는 남베트남이 다소 앞서다가 얼마 가지 않아 가난해졌음을 감안하면 격세지감.

현재 남베트남의 재분단운동단체가 존재하긴하지만 남베트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아직도 남아 실상은 이름만 내걸고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다. 거기다 현 베트남이 재분단을 가만히 보기만하지도 않을테고 말이다.[28]

9. 남베트남의 해외 이주자

프랑스의 경우는 과거 베트남을 식민지로 하고 있었던 관계로, 지금도 베트남계 혼혈들이 있으나, 프랑스를 제외한 여타 서유럽 국가들, 호주-뉴질랜드, 미국캐나다북미나 그 이외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등에서[29][30] 베트남계 주민이 보인다면 대다수가 남베트남 시절 넘어왔거나[31], 남베트남 패망 이후 도망쳐 어떻게든 그 지역까지 흘러들어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비록 미국과 베트남이 수교하면서 본국과의 교류는 자유로워졌기는 했지만 그와 별개로 현 베트남 정부는 그들을 외국으로 도망가게 만든 1등 공신인지라 아직도 공산 베트남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상당한 수준이라고 한다.# 특히 미국에 남아있는 남베트남 시절에 넘어온 베트남 사람들 가운데 몇명은 네오콘보다 훨씬 극단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32] 흠좀무. 반대로 당시 동맹국이자 파병국인 한국에 대해서는 좋은 시선을 가지고 있고 넷상 월남참전동지회 페이지에도 미국, 대한민국, 대만, 호주, 태국 등등의 참전용사들에게도 감사를 표하거나 월남군 출신들도 심심치 않게 활동하신다.

2008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웨스트민스터 리틀 사이공, 베트남계 미국인들이 황저삼선기를 들고 행진하고있다. 원출처의 설명 " A colorful procession of South Vietnamese flags (now a symbol of the Vietnamese-American community) leads the Tet parade in “Little Saigon.”"

남베트남의 국기인 황저삼선기는 현재 베트남계 미국인의 기로서 여러 주에서 공인되었다. 이로 인해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가 정상화된 뒤 미국에 건너온 베트남계 이주민과 베트남 공화국 패망기에 건너온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 이주민들 사이에 반목도 종종 벌어진다고 한다. 예를 들면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 이주민들이 가게에 황저삼선기(黃底三線旗)를 걸면 현 베트남 출신 이주민들이 뭐라 하고, 현 베트남 출신 이주민들이 현 베트남의 국기인 금성홍기를 걸면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들이 비난하는 등. 다만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이 압도적으로 숫자도 많고 베트남계 미국인들 사이 권위도 더 강하다. 1990년도에 반 호치민 시위까지 일어날 정도이니.

대한민국 웹 사이트에서 아시안 프린스의 노래라고 잘못 알려진 Heart2Exist의 Who i am/25 Years(Tôi Là Ai/25 Năm, 2002)가 바로 이러한 이민자(들의 2세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무래도 앞서 말했듯 남베트남 패망 후 도망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베트남계 미국인은 정치적으로 다른 아시아인들과 달리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편이다. 2012년 미국 대선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아시아계 미국인의 77%가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를 뽑았지만 베트남계 미국인 사이에서는 공화당 롬니(54%) 후보의 득표율이 오바마(44%) 후보를 앞섰다. 참조 이것도 2000년대 초반까지는 공화당 득표율이 70%대가 나오던 거에 비하면 내려간 편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더 이상 나라도 없고, 거주하는 나라에 배경도 전혀 없는 관계로 잃을 게 없다라는 심정으로 사는 사람도 많다. 베트남계 갱들이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한다거나, 잔인하기로 유명한데는 이런 뒷이야기도 약간 있다. 관련이 있을지 모르지만 블랙 라군의 배경이 되는 도시 로아나프라는 베트남 전쟁에서 패전하여 피난온 군인들에 의해 형성된 도시라고 한다. 이 도시가 어떤 곳인지는.

10. 관련 문서


  1. [1] 황저삼산기.
  2. [2] 남월은 중국의 번속국이었던 고대 국가의 이름이기도 하다. 남월을 뒤집어서 월남이 된 것이니 엎치락 뒤치락이 된 셈.
  3. [3] 중국에서는 사이공은 西貢(서공)이라는 표기를 사용한다.
  4. [4] 이 당시 찐과 응우옌 세력의 경계선은 현대 베트남의 남북분단 경계선이던 17도선보다 좀 더 북쪽에 있었다. 하띤 성과 꽝빈 성의 경계가 당시 두 세력의 대략적인 경계.
  5. [5] 수도 하노이에서 동쪽으로 약 100㎞에 위치한 항구로, 최단진격거리에 상륙한 셈이다.
  6. [6] 더불어 이 회담에선 한국 전쟁의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한 논의도 벌어졌다.
  7. [7] 하띤 성과 꽝빈 성의 경계와 거의 동일하다. 옛 대월이 북쪽의 찐 씨 세력과 남쪽의 응웬 씨 세력으로 나뉘었을 때 두 세력의 경계와 이와 거의 동일했다.
  8. [8] 13도선의 경우 남베트남은 코친차이나와 안남 최남부 일대만 남으면서 남북간의 국력 차가 너무 커지게 된다.
  9. [9] 투아티엔 성과 꽝남 성의 경계와 거의 동일하다. 이 방안 대로라면 응우옌 왕조의 고도 후에는 북베트남령이 되며 다낭은 재수없게도 16도선이 도심을 정확히 관통하기 때문에 둘로 분단된다.
  10. [10]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국무 장관 덜레스도 선거를 하면 분명 호치민이 80% 이상의 득표로 승리할 것이라 보았다. 다만 이에 대해서 '민주적이고 정통성 있는 북베트남'이 민심을 얻어서 이긴다는 나무위키에 널리 퍼진 이상주의적인 전망이 아니라 일당독재와 공포정치로 북베트남을 장악한 공산당이 부정선거로 이길 것이 틀림없다는 전망이었다. 이미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소련군이 진주한 동유럽 국가 일대에서 공포정치와 부정선거로 공산 정권을 수립한 전례가 있고 실제로 가톨릭 교도 탄압, 과격한 토지개혁과 농민 학살 등을 보고 미국은 북베트남을 전형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독재정권으로 판단, 전혀 믿을 수 없다고 보고 있었고 선거를 감독할 예정이었던 프랑스군은 남북을 가리지 않고 베트남 전역에서 난타를 당하다 손털고 나가서 공정한 선거는 이미 물건너 간 후였다.
  11. [11] 월맹 정권의 '민주성'이야 당연히 현대적 기준에서 의문과 비판의 대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술한 편집자의 시선처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정치적인 공작과 선거 조작만으로 압승을 거두었을 거라는 것도 반공적 시선이 농후한 억측이다. 어쨋든 베트남은 이미 이 시점에서 길게 잡으면 1930년대 응에안-하찐성 소비에트 봉기, 짦게 봐도 45년 8월 봉기 이후 정당화 된 정치 세력으로서는 공산당이 민족주의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던 것이 사실이고, 미국과 남베트남측이 선거에 대한 진정성이 었었다면 프랑스 대신 미국 당국이나 제3국에게 감독을 맡길 수도 있었으며, 50년대는 아직 월맹이 미국측에게 자신들은 미국과 정면대결하기 싫다며 OSS시절 그 짦은 협력 관계 들먹이던 시절이다. 백번 물러나 수정주의적 시각에서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다른 세계 각지에서의 공산당이 한 짓을 보고 월맹측의 진정성을 의심할 근거 자체는 있었지만, 애초에 베트남 전쟁에 대한 가장 맹렬한 비판점 자체가 국제 냉전이라는 거대한 내러티브에만 정신이 팔려 당장 베트남이란 특정한 국가, 민족의 역사적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인식론적 실패인 만큼 이러한 근거가 있었다고 해서 근본적인 삽질 자체가 사라지는건 아니다.
  12. [12] 하지만 선거 자체는 CIA가 배후에서 깊이 관여한 부정선거였다. 98.2%라는 결과도, 99%로 발표하려던 것을 미국에서 너무 비민주적으로 보인다고 지적해서 낮춰서 발표한 것.
  13. [13] 물론 지금의 동남아를 보면 알겠지만 최빈국이었던건 마찬가지였다.
  14. [14] 사실 이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당장 지금의 한국만 봐도 탈북자 재정착에 애로사항이 꽃피고 있는 게 현실이 아니던가? 당시 남베트남이 북베트남보다 잘 살긴 했는데 그래봐야 흔한 개도국 수준밖에 안 되었으니 나름 대단한 일이었다.
  15. [15] 응오딘지엠 본인도 북베트남령인 안남 지방 꽝빈 성 출생이었다.
  16. [16] 당시 남베트남의 종교 비중은 불교 신자가 90% 이상이었다.
  17. [17] 이 쿠데타는 사실 CIA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며, 총 42000달러나 되는 뇌물을 건넸다고 한다. 또한 응오딘지엠 정부의 저런 망언에 남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조차 분노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감안하면 CIA가 쿠데타를 지원한 것은 단순한 독단이 아니라 미국 정부도 못해도 묵인한 것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쿠데타 지원 자체를 행정부 차원에서 지시했을지도 모른다.
  18. [18] 그리고 해외로 달아난 쩐레쑤언은 베트남 정부를 비난하면서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과거 냉전 시절에 반공 투사인 양 행세하기도 했으나 미국에선 용녀(Dragon Lady. 동양의 용과 달리 서양의 드래곤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수의 이미지가 강하다) 같은 악랄한 여자라는 비아냥만 쏟아졌으며, 냉전이 막을 내리면서 거지꼴로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2011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초라하게 죽었다.
  19. [19] 단적으로 17년 가을 현재 방영중인 켄 번즈의 베트남전 다큐멘터리만 봐도 미국측 내에서도 이런 비관적인 육성 증언들을 많이 들을 수 있고, 전임자들이 키워놓은 판을 패배자처럼 포기할 수 없다는 존슨 행정부의 부담감은 결국 전면 개입으로 이어졌다
  20. [20] 물론 여기서 다윗은 미군이라는 무슨 삼손과 여호수아 합친것 급의 빽이 있었기는 했지만, 그 빽은 머나먼 다른 동네에 살며, 그나마도 대신 좀 싸워주다가 피곤하다고 GG치고 다시 나가버렸다
  21. [21] 결국 18사단을 이끌었던 살아남은 지휘관들은 전쟁후 숙청당했고 전투 후 포로로 붙잡혔던 장병들은 모조리 재교육수용소에 들어가야했다.
  22. [22] 중국의 국공내전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군도 이런식으로 주요거점을 중심으로 재배치를 감행하다가 마오쩌둥의 공산군에게 각개격파당하고 결국 장제스는 전쟁에서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쫓겨났는데 남베트남이 똑같은짓을 벌인것이다.
  23. [23] 대한민국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통일 후 베트남 공산당에 의해 수백만이 죽고 베트콩도 숙청당했다 한다. 그러나 그걸 사실이라 입증할 증거는 없다.
  24. [24] 이를두고 과거 한국의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절에 도덕책이나 사회책에선 적화통일되면 가장먼저 간첩행동이나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변절자라는 이유로 가장먼저 숙청당한다고 나오는데 사실 누구먼저 숙청당하느냐 이유없이 자유진영에 부역했던 공무원들이나 민족주의계열이나 공산정권에게는 방해요소이므로 가릴것없이 모두 숙청당한다.
  25. [25] 이게 왜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건지 의아한 사람이 있을텐데, 당시까지는 반공교육이 정식으로 도덕 교과에 포함되어 있었다. 즉 기본적인 일상의 덕목반공이 들어갔다는 이야기. 반공교육은 90년대 중반에 끝났다.
  26. [26] 북쪽의 누구보다는 그래도 연좌제라든지 그런게 없어서 남베트남공무원가족들까지 묶어서 집단학살하는 경우는없었고 베트콩,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한사람에 한해서만 지목해서 사형시켰다.
  27. [27] 후술하겠지만 이런 흐름 때문에 일부 극단적인 사고를 가진 해외 거주 남베트남 이주자들이 현재 베트남 공화국은 경제 체제로는 자본주의 정책으로 흐르기 때문에 남베트남이 다시 수복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있다.
  28. [28] 이미 멸망한 자유 베트남 정부와는 엄연히 다른 단체다. 거기는 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멸망시키려는 단체고 여기는 분리주의 단체다.
  29. [29] 보트피플들이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홍콩이었다. 홍콩 식민정부는 1979년 베트남계 난민을 정식 수용하고 이들을 구룡성채 내의 난민촌으로 보낸다. 물론 구룡성채도 상태가 안 좋은 곳이었지만 최소 굶어죽진 않았고, 성채 해체 후에는 밖으로 나와 2세 이상은 홍콩화되었다. 태국에는 캄보디아를 거쳐 육로로 도망간 피난민도 많이 건너가 파타야나 라용 주 등에 정착했다. 월남전 당시 독립한 싱가포르는 인구 부족 해결 목적으로 베트남 난민을 정식으로 받아 들이며 이 인연으로 현재도 싱가포르는 베트남과 교류가 많은 편이다.
  30. [30] 물론 비단 홍콩이나 마카오로만 온건 아니고 중국으로 온 보트피플도 상당수 있었기는 했고 육로로 추방된 사람도 있다. 물론 이들중 대부분은 베트남에서 대대로 거주하던 화교들인데 베트남의 화교탄압정책과 중월전쟁으로 인해 추방된 케이스다.
  31. [31] 단, 동유럽(20세기 후반에 공산주의국가였던 유럽국가들)이라면 해당되지 않는다. 동유럽에 거주하는 베트남계 주민 대다수가 북베트남에서 동유럽으로 돈좀 벌려 일하러 들어왔다가 정착한 이들이 대다수라 현 베트남 정부와는 관계가 상당히 우호적인 편이기 때문이다. 한편 냉전시기에 공산권이었던 곳에는 동독이 포함되며, 그래서 독일 통일후에 서독의 베트남계 거주민과 동독의 베트남계 거주민과의 갈등이 꽤 심했다고 한다.
  32. [32] 예를 들어 현재 베트남 공화국은 경제체제로는 자본주의 정책으로 흐르기 때문에 남베트남이 다시 수복해야한다는 내용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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