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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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출생

175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 대주교령, 잘츠부르크

사망

1791년 12월 5일 (향년 35년 312일)
합스부르크 제국

직업

작곡가,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

서명

1. 개요
2. 이름
3. 생애
3.1. 어린 시절
3.2. 연주 여행
3.3.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3.4. 힘겨웠던 잘츠부르크 시절
3.5. 빈으로 간 모차르트
3.6. 빈에서의 성공
3.7. 오페라의 거장 모차르트
4. 후대의 평가
5. 모차르트의 주변 인물들
5.2. 모친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
5.3. 아내 콘스탄체와 처형/처제
5.4. 누나 난네를(마리안네)
5.5. 모차르트의 자식들
6. 모차르트에 관한 일화
6.1. 성격에 대한 논란
6.2. 모차르트와 베토벤
6.3.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청혼한 모차르트?
6.4. 사기적인 음감
6.5. 난무하는 모차르트 관광지
6.6. 콘스탄체와 파혼할 뻔 했던 모차르트
6.7. 리히노프스키 공작과의 소송
7. 죽음을 둘러싼 의혹
7.1. 모차르트의 죽음
7.3. 죽음의 원인에 대한 현대의학적 관점
7.4. 그의 장례식
8. 모차르트의 음악
8.1. 교향곡, 관현악
8.1.1. 어린 시절(초기) (1764–1771)
8.1.2. 잘츠부르크 시기(중기) (1772년-1781년)
8.1.3. 후기 (1781년-1791년)
8.1.4. 관현악곡
8.2. 협주곡
8.2.1. 피아노 협주곡
8.2.2. 바이올린 협주곡
8.2.3. 호른 협주곡
8.2.4. 목관 협주곡
8.2.5.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8.3. 실내악
8.4. 피아노
8.4.1. 소나타
8.4.2. 변주곡
8.4.3. 그 외 소품들
8.5. 오페라
8.6. 성악
8.7. 모차르트 작품 연주
9. 매체에서의 등장
9.1. 영화
9.2. 게임
9.3. 애니메이션
10. 트리비아

▲ 모차르트 합창곡 작품들의 듣기 좋은 부분들을 선정하여 모은 영상이다.

1. 개요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의 음악가로, 바흐, 베토벤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가장 뛰어난 음악적 업적을 이룩한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음악의 신동(神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전세계의 문명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없어도 모차르트베토벤의 이름은 알고 있으며, 설령 이름을 모른다 하더라도 그들의 음악은 들어봤을 것이다. 특히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주목할 만한 음악을 남겼기 때문에 음악 역사상 가장 재능이 뛰어났던 불세출의 천재로 인정받고 있다. 35년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작품 수만 무려 쾨헬 번호(K.) 626편에 이르는 곡[1]을 남긴 괴수[2]이며 단순히 곡 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다수의 작품들이 음악성 측면에서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다. 또한 대부분의 작품이 음악역사에 중요기점이 되고있다. 그의 음악은 모든 사람들이 곡명은 몰라도 한번 이상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곡들이 많이 있다.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출생했으며 1791년 12월 5일 에서 사망했다.[3]

2. 이름

그의 성 '모차르트(Mozart)'는 모첸(motzen, 남부 독일 방언: motschen)과 하르트(hart)의 합성어인 '모츠하르트(Motzhardt)'의 변형으로, 뜻은 '험담하는 사람' 혹은 '조잡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주장과, 중세 고지 독일어로 습지를 의미하는 모스(mos)와 하르트(hart)의 합성어라는 주장이 있다. [4] 아쉬운것은, Mozart(Mozahrt)가 기록에 최초로 등장하는것이 14세기이므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더 자세한 추측은 어렵다는 점이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로 일원화 되었지만, 그의 생애에는 제법 다양한 이름들이 쓰였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연주여행을 했기 때문에 각국 언어 관습에 따른 다양한 버전으로 이름이 각색되기도 했으며, 모차르트 본인이 성년이 되면서 본인의 취향이 반영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세례명'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이다. 세례명의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Wolfgangus Theophilus)' 부분을 독일식인 '볼프강 고틀리프(Wolfgang Gottlieb)'로 고친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 고틀리프 모차르트(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 Gottlieb Mozart)'를 일반적으로 모차르트의 풀네임으로 본다. 풀네임에서 첫 두 이름을 뺀 '볼프강 고틀리프 모차르트(Wolfgang Gottlieb Mozart)'에서 독일식의 고틀리프(Gottlieb)를 라틴식으로 바꾼 아마데우스(Amadeus)를 채용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가 현재 굳어졌다.

풀네임에서 생략된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Johannes Chrysostomus)'는 '황금의 입'으로 알려진 교부(敎父)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5]에게서 따왔다고 한다.

'볼프강(Wolfgang)'은 모차르트의 어머니가 살던 고향의 호수 이름[6]에서 따온 것이다. 지명이 아니더라도 볼프강은 독일어권에서 남자 이름으로 흔히 사용되는 이름 가운데 하나다.

'테오필루스(Theophilus)'는 대부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라틴화된 그리스어이다. 뜻은 '신의 사랑을 받은 자(Theo-Philus)'라는 의미이며 이를 독일식으로 쓰면 고틀리프(Gottlieb, Gott-Lieb), 이를 다시 라틴식으로 쓴 것이 아마데우스(Amadeus, Ama-Deus)였다.

모차르트가 성년이 된 후 그의 이름은 공식적으로 독일식인 '볼프강 고틀리프 모차르트(Wolfgang Gottlieb Mozart)'라 표기되었다. 모차르트 생전에 열린 콘서트 포스터에는 거의 모두 '볼프강 고틀리프 모차르트(Wolfgang Gottlieb Mozart)'라고 표기되어 있다. 프라하 등에서 열린 콘서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장난기가 많았고 언어유희를 좋아했던 모차르트는 사적인 편지에서 '아마데(Amadé)'라는 프랑스식 이름도 즐겨 썼다. 이러한 표현은 대부분 가족이나 지인과의 편지에서 사용되었고, 공식적으로 사용된 적은 사실상 없었다. 모차르트가 '아마데우스(Amadeus)'라는 정식 라틴어 표기를 사용한 적은 거의 없다고 한다. 아마데우스를 쓴 경우에도 '우올프강구스 아마데우스 모차르투스(Wolfgangus Amadeus Mozartus)'라는 식으로 이름 전체를 라틴어로 표기했는데, 이는 재미로 고대 로마식 이름을 흉내내서 써본 것이며, 결코 대외적으로 정식으로 사용한 이름은 아니었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모차르트가 생전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라고 표기한 적은 1787년 5월 단 한번 있다고 한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라는 표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서거 직후 그의 미망인 콘스탄체 모차르트(Constanze Mozart)에 의해서였다. 모차르트 서거 직후부터 미망인 콘스탄체는 자신의 공식적인 서명으로 '콘스탄츠 모차르트(Konstanz Mozart),[7] 결혼 전 베버(Weber), 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미망인'이라는 서명을 사용했다. 그러나 콘스탄체의 서명과는 별도로 모차르트 추모 콘서트를 포함해서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볼프강 고틀리프 모차르트(Wolfgang Gottlieb Mozart)'라는 표기가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모차르트 서거 후 1798년 그 유명한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에서 모차르트 미망인 콘스탄체의 도움을 받아 모차르트 전 작품을 악보로 출판했는데, 이 때 모든 작품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8] 아마데우스(Amadeus)라는 라틴식 미들네임이 사용된 것은 모차르트의 유족, 즉 콘스탄체의 의사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악보계의 바이블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사에서 출판된 모차르트 악보가 유럽 각지에서 사용되면서 이 이름이 완전히 굳어지게 된 것이다.

되도록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모차르트'가 올바른 한글 표기이다.[9] 하지만 '모르트'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외래어 표기법이 정착되기 전인 1980년대만 해도 이 명칭이 더 흔하게 쓰였다.

3. 생애

왼쪽: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모차르트의 초상화. 모차르트 사후인 1819년에 바바라 크라프트(Barbara Krafft) 가 그렸다. 모차르트 사후에 그려진 초상화이기때문에 실제 모차르트 생김새를 정확하게 구현했는가 의혹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가운데: 요제프 랑에가 그린, 죽기 한두 해 전의 모차르트를 그린 미완성 초상화. 그는 모차르트가 사랑했던 알로이지아 베버의 남편이자, 또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의 형부이기도 하다. 콘스탄체는 이 그림이 남편과 가장 흡사하게 그려졌다고 평가했다. 모차르트의 원래 머리카락은 적갈색이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깔끔한 백발은 다 가발이다.[10] 정작 모차르트 자신은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곤 가발을 쓰는것을 꺼려했으며,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유행하던 남성 헤어스타일인 생머리를 끈으로 동여매어두는 포니테일을 선호했다고 한다.

오른쪽: 북독일 지역을 여행하던 말년의 모차르트를 도리스 슈톡(Doris Stock)이 그렸다. 1789년 당시 33세이던 모차르트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다. 실제로 제자 훔멜 등 당시 여러 사람의 증언에 다르면 모차르트는 눈이 살짝 튀어나오는 증상을 유발하는 그레이브스병을 앓아 눈이 상당히 컸다고 한다.

3.1. 어린 시절

7살의 모차르트. 화가는 미상.

음악가 및 바이올린 교육자인 요한 게오르크 레오폴트 모차르트(Johann Georg Leopold Mozart, 1719~1787)와 아나 마리아 발부르가 모차르트(Anna Maria Walburga Mozart(통칭 Pertl, 1720~1778) 사이에 태어난 3남 4녀 중 막내 아들이다. 형제는 누나인 마리아 아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 모차르트(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통칭 Nannerl, 1751~1829)만 유년기를 넘겼으며 다른 5명은 모두 유아기 때 사망했다.

모차르트는 걸음마 시절부터 누나 난네를이 아빠에게 음악을 배우는 것을 지켜보고 자랐으며, 익히 알려진 대로 3세 때 클라비어 연주를 터득했고 5살 때 작곡을 시작했다. 음악을 배우는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5살 많은 누나의 수준을 금세 뛰어넘어 버렸고, 남동생에게 뒤처진 누나 난네를은 이를 몹시 속상해 했다고 한다. 부친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주변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음악적 능력에 대한 그의 주장을 그냥 허풍이 잔뜩 섞인 자식자랑 정도로 생각하고 믿지 않았는데, 일부러 그의 집에 찾아와서 어린 모차르트의 능력을 시험해 본 후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작곡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모차르트가 즉흥적으로 연주하거나 흥얼거린 것을 부친이 악보로 옮겨 놓은 것이다.

3.2. 연주 여행

아버지인 레오폴트는 자기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보고 작곡을 그만둔 뒤 볼프강에게 피아노바이올린을 가르치는 데에 힘썼다.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나이가 6살이 되던 1762년부터 온 가족을 데리고 유럽 연주 여행길에 올랐으며 이후 10년 동안 모차르트는 유럽 각지를 여행하였다. 이 여행을 통해 음악 신동 모차르트를 유럽 각지에 소개하는 한편[11] 각지의 유명한 음악가로부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작은 도시인 잘츠부르크를 넘어 좀더 큰 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하였다.

실제로 이 여행은 모차르트의 음악인생에 큰 자산이 되었는데, 비록 출세라는 세속적인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유럽 각지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접하고 당대의 중요한 음악가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여행에서 어린 모차르트는 뮌헨으로 가서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앞에서 연주를 선보였으며, 이어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쇤부른 궁정을 방문해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앞에서 신기에 가까운 연주 솜씨를 선보였고 다시 프라하를 방문하였다. 빈의 궁정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딸이자 비운의 여인이 된 마리 앙투아네트도 만났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 일화 항목으로.

이듬해에는 3년 반에 걸친 긴 2차 연주여행을 시작한다. 1차 여행이 신동 모차르트의 잠재력을 유럽 전역에 널리 알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2차 여행은 이제 갓 어린아이 티를 벗은 모차르트가 좀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음악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는, 좀더 현실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2차 여행은 뮌헨, 만하임, 파리, 런던, 네덜란드(헤이그)를 거친 후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면서 파리, 취리히, 도나우에싱엔, 뮌헨을 거쳤다. 모차르트는 상당히 어려운 쳄발로곡도 악보를 보고 즉석에서 연주를 해냈으며 어린 아이 답지 않게 즉흥연주에도 뛰어난 실력을 선보여서 사람들을 감탄시켰다. 이 시기 모차르트 남매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 알려졌기 때문에 각지에서 초청장을 보냈으며 덕분에 2차 여행은 3년이 넘는 긴 여행이 되었다. 문제는 여행이 길어지면서 레오폴트가 맡고 있던 잘츠부르크의 궁정부악장 자리가 장기간 공석이 되었다는 점인데, 다행히 당시 잘츠부르크 영주였던 대주교 지기스문트 폰 슈라텐바흐(Sigismund Graf von Schrattenbach)는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사람으로 모차르트 일가가 잘츠부르크에게 영광을 가져다주고 있다면서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다만 연주여행이 항상 즐겁지만은 않았는데, 레오폴트는 여행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비굴할 정도로 지역 귀족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으며 네덜란드에서는 가족들이 차례로 원인 모를 풍토병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이 여행에서 모차르트가 얻은 가장 중요한 성과는 당대의 훌륭한 작곡가들을 만나서 본격적으로 작곡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파리에서는 당시 전도유망한 쳄발로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요한 쇼베르트(Johann Schobert, 1735~1767)[12]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이 당시에 작곡된 모차르트의 작품(K. 6~9)에서는 쇼베르트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이후 모차르트의 중요한 후원자가 되었던 멜히오르 폰 그림 남작(Baron Christian Friedrich Melchior von Grimm, 1723-1807)도 이 시기에 인연을 맺었다.

1764-65년 런던에 머무를 당시에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 작곡법을 배웠는데, 이 크리스티안 바흐의 가르침은 이후 모차르트의 기악곡, 특히 교향곡과 협주곡의 길잡이가 되었다. 이 시절 처음으로 작곡된 모차르트의 교향곡에도 크리스티안 바흐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편으로 이 시기에 당시 유명한 카스트라토 가수였던 지오반니 만추올리(Giovanni Manzuoli, 1720-1782)에게 성악도 배웠는데, 모차르트는 성악에서도 매우 특출한 능력을 보여줬으며 변성기 전까지는 종종 교회 행사나 공연에서 보이소프라노로 활약하기도 했다.[13] 정말 타고난 음악 천재라고 볼 수밖에 없는 대목.

1766년 연주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슈라텐바흐 대주교 앞에서 연주여행의 성과로 얻은 자신의 음악실력을 뽐냈으며 이 시기 대학축제를 위해 최초의 극음악 '아폴로와 히아킨투스(K. 38)'가 작곡되었다.

1767년에는 다시 빈으로 가서 1년간 머물렀다. 빈으로 가자마자 도시를 강타한 전염병(천연두로 추정)때문에 모차르트 남매도 병을 얻어 한동안 고생을 했는데 다행히 회복했다.[14] 빈에서 모차르트는 오페라 작곡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 때 작곡된 <보아라, 어리석은 아가씨여(La finta semplice, K. 51)>가 이런 저런 이유로 상연이 좌절되는 바람에 크게 낙담했다.[15] 다만 프란츠 안톤 메스머라는 비인대학 교수 에게 의뢰를 받아 작곡한 1막짜리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Bastien und Bastienne, K.50)>가 소극장에서 공연됐고 고아원의 축성 예배를 위해 씌어진 '고아원 미사(K. 139)'가 호평을 받은 것이 위안거리.

한편 레오폴트의 계속된 외도(?)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슈라텐바흐는 결국 1768년 레오폴트의 급여지급을 중단했고, 모차르트 가족은 부랴부랴 잘츠부르크로 돌아가야 했다. 슈라텐바흐는 이미 오페라를 쓸 정도로 훌륭한 음악가가 된 12살의 모차르트를 수석연주자로 임명했으며 17살의 난네를은 학교의 음악선생이 되었다.[16]

3.3.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1769년 12월부터 3년간 계속된 연주여행은 이전의 여행과 달리 과감하게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방향을 잡았으며, 엄마와 누나 난네를이 빠지고 아빠와 아들만 참여하였다.[17] 이 이탈리아 여행은 연주여행이라기보다 작곡여행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로 소년 작곡가 모차르트의 역량이 빛났던 여행이었으며, 이 여행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 덕분에 모차르트는 훗날 당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가 될 수 있었다.

여행 첫 해 볼로냐에서는 당시 유명 오페라 작곡가였던 요세프 미츨리베첵(Josef Mysliveček, 1737-1781)과 지오바니 바티스타 마르티니 신부(Giovanni Battista Martini, 1706-1784)를 만나서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18][19] 마르티니 신부의 주선으로 원칙적으로 20살 이상의 작곡가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는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Accademia Filarmonica)의 회원자격을 받았다.

이듬해(1770) 로마에서는 시스티나 성당에서 연주된 그레고리오 알레그리(Gregorio Allegri)의 종교음악인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를 2번 듣고 거의 그대로 악보로 옮겨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곡은 당시 바티칸에서 악보를 유출시킬 경우 파문에 처할 정도로 엄격히 악보를 통제하고 있었는데[20], 당시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겁없이 신성모독을 저지른 이 인간 녹음기 소년을 파문에 처하기는커녕, 그의 재능을 크게 칭찬하고 황금 박차 기사단(Chivalric Order of the Golden Spur)이라는 근사한 칭호도 수여하였다.

같은 해 밀라노에서는 드디어 모차르트 최초의 본격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Mitridate, re di Ponto, K. 87)>가 공국 왕립 극장(Teatro Regio Ducal)에서 초연되었는데, 14살밖에 안된 소년 작곡가의 작품임에도 무려 21회나 상연될 정도로 당시로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 덕분에 모차르트는 공국 왕립 극장에서 주기적으로 작곡을 의뢰받아 <알바의 아스카니오(Ascanio in Alba 1771, K.111)>, <루치오 실라(Lucio Silla 1772, K.135)> 같은 오페라들을 잇따라 작곡하였다.

이탈리아에서 작곡한 이 세 오페라는 작품으로서의 가치와 별도로 모차르트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데, 해가 거듭될수록 발전하는 소년 작곡가 모차르트의 잠재력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음악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루치오 실라는 실패까지는 아니지만 미트리다테나 알바의 아스카니오처럼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대본이 너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지오반니 가메라(Giovanni de Gamerra)가 쓴 루치오 실라의 대본은 스토리의 개연성이나 등장인물의 개성 같은 극적인 요소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서 가사마저 유치함의 극을 달리고 있다.[21][22] 이런 엉터리 대본 때문에 고생한 경험 때문인지 후에 모차르트는 오페라를 작곡할 때 대본의 완성도에 굉장히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각설하고,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이 더 나이들어서 신동의 이미지가 사라지기 전에 어떻게든 안정적인 직장을 얻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다. 다행히 모차르트는 가능성있는 소년 오페라 작곡가로서 이탈리아 오페라계에 나름 신선한 인상을 주었고, 덕분에 밀라노의 통치자였던 페르디난트 대공(Archduke Ferdinand Karl of Austria-Este, Governor of the Duchy of Milan)이 모차르트를 궁정음악가로 고용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대공의 모친 마리아 테레지아는 모차르트 가족과 나름 인연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속하게 이 채용을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결국 모차르트의 취업은 성사되지 못했다.[23]

결국 1773년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에서 성공에 대한 기대를 접고 고향 잘츠부르크로 돌아가는데, 돌아오기 전 오늘날에도 절창되고 있는 소프라노 독창을 위한 모테트, <기뻐하라 찬미하라(Exsultate, jubilate, K.165)>를 작곡하면서 이탈리아 여행에 대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24]

Mozart Exultate Jubilate, K. 165(Barbara Bonny)

3.4. 힘겨웠던 잘츠부르크 시절

이탈리아에서 구직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어느덧 17살이 되었으며, 이제 신동으로서의 이미지를 벗고 잘츠부르크에서 본격 직업음악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미 뛰어난 작곡가로 유명해진 모차르트에게 여기저기서 작품 의뢰가 들어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활발하게 작곡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 피아노 독주곡, 협주곡(피아노, 바이올린 등), 오페라, 실내악, 교향곡 등등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잘츠부르크는 유럽클래스의 작곡가 모차르트가 운신하기에는 너무 좁은 동네였다. 그는 밀라노에서처럼 대규모 오페라를 작곡하여 상연하고 싶어 했으나 잘츠부르크에서는 마땅히 공연할 곳이 없었다. 운영비용 문제로 왕실 극장은 1775년 문을 닫아버렸으며 다른 극장은 오페라를 제대로 상연하기에는 크기나 시설이 너무 부실했다. 그런 탓에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스키피오네의 꿈(Il sogno di Scipione, K.126)>이나 <양치기 왕(Il re pastore, K.208)> 같은 소규모의 오페라밖에 쓰지 못했으며 그마저도 잘츠부르크 궁전에서 한두번 연주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사안보다 훨씬 큰 문제가 있었는데, 슈라텐바흐가 1771년 사망한 후 이듬해에 새로 잘츠부르크 영주로 부임한 히에로니무스 콜레레도 대주교(Archbishop Hieronymus von Colloredo)와의 마찰이었다. 무난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예술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전임 영주와 달리 이 콜로레도 대주교는 꼰대기질로 가득찬 인물이었다. 기본적으로 융통성이 없고 권위주의적인 성격으로 아랫사람들을 하대하고 상당히 깐깐하게 구는 경향이 있었으며 음악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음악에 대한 이해나 애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음악가들에 대한 처우도 상당히 박했다. 모차르트 역시 당시 시세로도 말도 안되게 낮은 연봉 150 플로린밖에 받지 못했으며 모차르트의 재능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나이는 어렸지만 이미 유럽클래스의 음악가 반열에 오른 모차르트가 이런 답답한 사람 밑에서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모차르트는 자기 본업을 자주 비워두고 다른 직장을 구하기 위한 구직활동에 열을 올린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1774년 9월에 빈을 방문했고 1달 후에는 뮌헨을 방문했다. 모차르트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뮌헨의 막시밀리안 선제후는 모차르트에게 대위법이 돋보이는 모테트 하나를 써보라고 권했는데 3일만에 작곡해서 바쳤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K. 222). 또한 선제후는 뮌헨의 사육제기간에 상연할 오페라 부파를 작곡하라고 의뢰했으며, 덕분에 그의 초기 오페라 중에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는 <가짜 여정원사(La finta giardiniera)>가 작곡되었다. 1775년 1월에 이루어진 <가짜 여정원사>의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아쉽게도 해당 극장에서 상연해야 할 작품이 밀려있던 관계로 모차르트의 작품은 3번 공연 후 내려가고 말았다. 이처럼 뮌헨의 선제후는 모차르트의 음악에 상당히 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끝내 자리를 제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1777년에는 아예 잘츠부르크 궁정음악가 자리를 사임해 버리고 모친과 함께 다시 뮌헨으로 갔다. 하지만 뮌헨에서는 모차르트가 찰츠부르크에서 고용주와 마찰을 빚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막시밀리안 선제후의 태도는 3년전보다 더 냉랭했다. 그는 모차르트에게 일단 이탈리아로 가서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하라는 등의 뜬금없는 조언만 하고 돌려보냈다.

낙담한 모차르트 모자는 만하임으로 떠났다. 만하임에는 유서깊은 교향악단이 있었고[25] , 모차르트는 이 악단에 취직하고 싶어서 만하임의 카를 테어도어 선제후에게 청원을 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대신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를 준비하고 있던 17세의 소녀 알로이지아 베버(Aloysia Weber)[26]를 만나 그녀의 음악선생이 되었는데, 둘은 곧 사랑에 빠졌으며 모차르트는 청혼까지 했다. 당시 모차르트가 얼마나 그녀에게 빠졌냐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알로이지아를 이탈리아로 데리고 가서 데뷔시키겠다"는,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상당히 허황된 계획까지 세웠을 정도. 하지만 그녀의 재능만큼은 모차르트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알로이지아는 이후 당대를 풍미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당시 모차르트는 그녀를 위해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2곡을 작곡했는데(K. 294, K. 316), 둘 모두 오늘날에도 상당한 가창력을 요하는 작품이며 특히 '테살리아의 백성들이어!(Popoli di Tessaglia!, K. 316)'는 기네스북에 사람의 목소리로 가장 고음을 내야 하는 아리아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난곡이다.

Popoli di Tessaglia!(K. 316)[27]

모차르트의 첫사랑 알로이지아 베버

모차르트가 만하임에서 일만 잘 풀렸더라면 두 사람은 큰 문제 없이 결혼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모차르트는 직장을 사임하고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해서 상당히 많은 빚을 진 상태였으며, 아들의 출세에 목을 매고 있던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로 일단 연애감정을 접고 구직을 위해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는 전술한 든든한 후원자 멜히오르 폰 그림 남작이 있었으며 그는 모차르트에게 돈을 빌려주고 구직을 위해 높은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구직도 영 신통치 않았다. 음악 선생이나 연주 및 작곡 알바로 돈을 충당하면서 약 6개월간 나름 열심히 구직활동을 했지만 베르사유 궁전의 오르가니스트같은 내키지 않는 제안만 들어왔으며 설상가상으로 모차르트와 동행했던 그의 모친이 전염병에 걸려 급사하는 비극까지 벌어졌다.[28] 결국 모차르트는 파리에서도 안정된 직장을 얻지 못하고 파리 교향곡 같은 몇몇 작품만 남긴 채 쓸쓸하게 파리를 떠나게 되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이처럼 자기 아들이 외국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아내마저 허무하게 잃게 되자, 모차르트에게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제안했다. 레오폴트는 이 지역 귀족들을 간곡하게 설득하여 연 450 플로린의 급여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냈고 콜로레도 대주교로부터는 다른 지역으로부터 초청이 있을 경우 출장을 허락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며 모차르트의 귀향을 종용했다. 당연히 모차르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대안이 없었다. 후원자였던 폰 그림 남작까지 당장 파리에서는 취직이 어려울 것 같으니 고향에서 재기를 노리는게 어떻겠냐고 권하자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복귀를 결심한다.

하지만 잘츠부르크에 가기 싫었던 모차르트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도 이곳 저곳을 들르면서 복귀에 뜸을 들였다. 이 시기에 다시 뮌헨을 거치는데, 이 때 뮌헨에 취직하여 가수로 활동하고 있던 알로이지아와 재회하게 된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녀는 더 이상 모차르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두 사람의 재회는 썰렁하게 끝나고 만다.[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로이지아를 포함하여 그 집안의 여인들은 모차르트와 평생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 콘스탄체 항목으로.

3.5. 빈으로 간 모차르트

우여곡절 끝에 잘츠부르크로 복귀했으나 이 곳 사정은 여전히 암울했다. 월급은 좀 올랐지만 콜로레도 대주교는 여전히 꼰대질을 해댔고(...) 음악환경은 열악했다.

오페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차르트는 일종의 외주를 받아서 오페라 작곡을 시도했다. 순회공연단을 위해 오페라 부파였던 '가짜 여정원사'를 독일어 징슈필로 개작하였고, 1779년에는 모처럼 프랑크푸르트로부터 징슈필 오페라인 차이데(Zaide)를 의뢰받아 작곡했으나 대본에 문제가 많은데다 징슈필 치고는 오페라의 분위기가 너무 어두운 탓에 도중에 포기했다.

이후 상황이 받쳐주지 않아 한동안 잠잠했다가, 이듬해 바이에른 선제후 칼 테오도르(Karl Theodor)가 궁정 카니발에 상연할 목적으로 모차르트에게 오페라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Idomeneo re di Creta, K.366)'를 의뢰하였는데, 이 오페라가 1781년 1월 뮌헨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30] 이 이도메네오는 모차르트의 후기 오페라들에게 인지도는 밀리지만 그의 음악인생에서는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데, 이 작품을 계기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재능과 역량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이도메네오는 이후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특징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으며 모차르트 당시 이미 화석화 되어버린 오페라 세리아 장르에서 모처럼 생명력이 넘치는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음악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31]

1781년 3월, 모차르트는 신성 로마 제위를 계승한 요제프 2세(Joseph II)의 대관식에 자신의 고용주인 콜로레도 대주교를 따라 참석하게 된다. 여기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받는 연봉의 절반이 넘는 액수를 제안받고 황제 앞에서 연주하려고 했는데, 콜로레도 대주교가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진다. 자신을 하인으로 취급하면서 사사건건 간섭하는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오만 정이 떨어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즉시 사표를 제출하는데, 대주교는 뜸을 들이다가 결국 사표를 수락하면서 모차르트에게 수모를 안겨준다. 즉, 자신의 시종에게 건방진 음악쟁이의 엉덩이를 걷어차게 해서 내쫓아 버린 것.[32]

이 일로 모차르트는 아버지와도 사이가 벌어지는데, 모차르트가 계속 떠돌이 인생으로 살기보다는 수준에 좀 안 맞더라도 당분간 잘츠부르크에 안정적으로 지내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물론 혈기 넘치는 25세의 청년이 아버지의 바램대로 움직일 리는 없었으며, 일단 사직한 후 지체없이 빈으로 떠났다.빈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더 이상 왕궁이나 지방 귀족들에게 굽실거리면서 자리를 얻으려 하지 않았고, 이 참에 과감하게 프리랜서 작곡가의 길을 선택한다.

잘츠부르크 시절 모차르트의 고용주였던 콜로레도 대주교는 상당수의 미사곡, 디베르티멘토, 교회 소나타 등 작곡에서 기교적인 콜로라투라 아리아나, 카논이나 푸가, 아 카펠라 등의 대위법적 페세지들을 최소로 줄이고 실제 교회 및 궁정 행사에서 사용될 적합한 규격으로, 최대한 간단하면서도 실용적인 형태의 작곡을 요구하였다. 미사곡의 길이도 실제 교회 예배에서 사용에 적합한 20분 이하로 맞출것을 주문하였는데 당시 모차르트의 상당수의 미사 브레비스(Missa Brevis)곡들은 이런 요구에 부합하여 작곡된것이다. "미사 브레비스"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간결한 미사"인데 통상전례문(Mass of the Ordinary) 형식의 미사 악장들, Kyrie, Gloria, Credo, Sanctus, Benedictus, Agnus Dei이 각각 2분~4분 내의 짧은 길이로 작곡되는게 실용성을 강조한 이러한 미사 브레비스 악곡의 특징이다.

결국 콜로레도 대주교의 이러한 요구들은 모차르트가 자신의 재능을 펼칠 범위를 최대한 제한한 것이다. 대담한 화성의 사용도 금하였는데, 이것은 마치 미켈란젤로에게 한정된 물감과 미술 재료만 가지고 그림을 그리라는 요구에 비유될수있었다. 모차르트는 이러한 대주교의 요구에 맞춰 많은 미사 브레비스 곡들을 최대한 단순한 조성인 C장조로 작곡하였으나 실제 곡 내에선 대주교의 꼰대성을 비꼬는 듯한 익살스럽고도 복잡한 화성을 자세하게 들으면 눈치챌수있을 정도로 조금씩 사용하였고, 실제 연주에서 대주교가 &quot;엥? 뭐임?&quot;거릴 상황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미사 형식에선 복잡한 대위법의 사용도 지양되는데, 가령 푸가로 Cum Sanctu Spiritu나 Et Vitam Venturi 따위의 짧은 메세지의 가사를 돌림노래처럼 여러 성부에서 엇갈리게 부르는 페세지를 넣으면 실제 통상전례문 미사곡의 가사가 커버해야될 한정된 곡 분량을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는게 이유였다.

잘츠부르크는 제대로된 규모의 오페라 하우스도 없는 시골도시였다. 여러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맘껏 펼쳐보이고 싶은 모차르트를 가두기엔 너무나도 좁은 우물이였던것이다.

모차르트가 전업 작곡가라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직종"의 창시자에 가깝다는 사실은 사회사(혹은 역사사회학) 및 예술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전업 작곡가 이전의 "음악가"들이 거의 궁정악사, 악장이나 교회 전속 음악가[33]로 직업이 협소하게 정해져 있었던 반면[34], 전업이자 프리랜서가 되면서, 당대의 계몽주의 사상과 맞물려, 음악의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한 현상이자 원인이 되었기 때문. 단적으로 모차르트의 전례가 없었다면, 베토벤의 활동이나 이후 슈베르트를 위시한 낭만파 음악, 다시 현대음악의 시작인 쇤베르크 등으로 이어지는 음악의 시대사적 변화가 가능했던 하나의 사회구조적인 요인은 형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사회구조적인 요인만이 음악의 시대사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또 한가지 언급해야 할 것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모차르트가 음악 역사상 최초의 프리랜서 작곡가는 아니라는 점이다. 모차르트 이전에도 궁정이나 교회에 소속되지 않고 연주/작곡 의뢰를 받아 생계를 꾸렸던 음악가들은 꽤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헨델.[35] 다만 선배 프리랜서 작곡가들과 달리 모차르트의 라이프 스타일은 이후 등장한 수많은 작곡가들의 직접적인 롤모델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여튼 결과만 놓고 보면 모차르트가 프리랜서가 된 것은 모차르트 본인에게도 상당히 성공적인 선택이었으며, 음악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확실하게 꽃을 피웠다.[36] 즉 모차르트는 전업 작가의 시조인 동시에 확실한 성공 사례를 제시했던 셈.

3.6. 빈에서의 성공

일종의 운명의 장난처럼 모차르트가 빈으로 오기 직전에 알로이지아 베버 집안도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만하임에서 빈으로 건너왔다. 일단은 전업가수로 성공한 베버집안의 요세파와 알로이지아가 더 넓은 무대로 진출하기 위해서였고, 그 다음으로 부친이 일찍 사망해서 집안에 일정한 수입이 없었던 관계로 적절한 돈벌이 수단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돈벌이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숙박업. 여기에 모차르트가 머물면서 그의 인생 2막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빈으로 온 모차르트는 당장 마땅한 거처가 없었다. 일단 콜로레도 대주교의 빈 저택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호의로 저택의 별사(別舍)에 머물렀는데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이때 옛 연인 알로이지아의 집안에서 하숙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는 잠시만 머물 생각으로 숙소를 옮겼다. 옛사랑 알로이지아는 이미 요셉 랑게라는 연극배우와 결혼하여 따로 살고 있었고, 그녀의 두 여동생 콘스탄체와 조피가 하숙집에 살고 있었는데, 모차르트는 이 쾌활한 소녀들과 너무 재미있게 지낸 나머지 잠시 머물려던 계획을 바꾸어 계속 하숙집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다가 콘스탄체와는 재미있게 지내는 사이를 넘어 연인으로 발전한다.

Mozart - 피아노를 위한 알레그로, K. 400. 조피와 콘스탄체(Sophie und Constanze)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져 결국 결혼 약속을 하는데, 문제는 양가의 부모였다. 일단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이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아직 자리도 못 잡은 주제에 결혼은 사치라는 것이 그 이유. 게다가 콘스탄체의 어머니 세실리아 베버도 처음에는 모차르트를 음악을 한답시고 일정한 직업도 거처도 없이 빈둥대는 백수건달 정도로 여겼던 탓에 두 남녀가 너무 가까워지자 모차르트에게 하숙집을 나가달라고 요구했다.[37] 하지만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 모차르트의 간곡한 설득에 그의 아버지는 결국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설득을 포기해 버렸고, 세실리아 베버는 모차르트가 빈에서 나름 잘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오히려 콘스탄체와의 결혼을 부추겼다.[38]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1782년 8월에 두 사람은 결혼했는데 모차르트의 가족들(부친과 누나)은 참석하지 않은 채 콘스탄체 집안 사람들만 참석한 채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모차르트 부부는 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4명은 일찍 죽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

20세 무렵의 콘스탄체 모차르트

빈에 온 모차르트의 음악인생은 상당히 순조로웠다. 빈에 오자마자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각광을 받았으며 제자도 생겼다. 178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자신보다 4살 위이며 모차르트보다 앞서 빈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무치오 클레멘티와 피아노 배틀을 벌였는데, 여기서 사실상 승리하면서 '빈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명성도 얻었다. 다수의 피아노 협주곡이 작곡되었으며 작곡자 본인의 연주로 공연되었는데, 공연때마다 성황을 이루었기 때문에 모차르트는 작은 콘서트홀 대신 큰 강당이나 발레 공연장 등을 연주장소로 선택하였다.

한편 당시 국립징슈필극장(Nationalsingspiel)[39]의 감독이자 대본작가였던 고틀리브 스테파니(Gottlieb Stephanie)는 신성 로마 황제 요세프 2세로부터 독일어로 된 새 오페라를 상연해줄 것을 요청받았는데, 모차르트는 스테파니를 설득하여 이 오페라의 작곡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서 모차르트의 또 하나의 중요한 징슈필 오페라 <후궁으로의 도피(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가 탄생한다.[40]

이와 동시에 그는 빈에서 음악적으로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도 여럿 만났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고트프리트 판 즈비텐(Gottfried van Swieten)과 요제프 하이든이었다. 장서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즈비텐은 바흐/헨델/텔레만을 비롯한 바로크 음악가들의 악보 사본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으며 모차르트는 즈비텐의 배려로 이 사본들을 열람할 수 있었는데, 이 때 모차르트는 바로크 특유의 정교한 대위법과 유려한 합창/성악 처리법에 주목한다. 이런 작곡수법들은 이제까지 모차르트가 접하지 못했던 것들로 모차르트에게는 중요한 발견이었다. 모차르트는 즈비텐이 보유한 바로크 거장들의 악보들을 베끼고 피아노로 연주해 보면서 열심히 공부했으며, 이후 모차르트의 중요한 작품 상당수에서 이 때 익힌 대위법 수법이 반영된다.[41]

1784년에는 빈에 들른 하이든을 만났는데 두 거장은 서로의 음악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24살의 나이차이를 딛고 금세 친구가 되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아들은 명성으로 보나 저의 경험으로 보나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입니다.'라는 찬사를 담은 편지를 보냈으며 모차르트는 모차르트대로 하이든의 영향과 앞서 언급한 대위법적인 전개수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6곡의 하이든 4중주((K. 387, K. 421, K. 428, K. 458, K. 464, K. 465)를 3년에 걸쳐 작곡하여 차례로 하이든에게 헌정하였다. 이 6곡의 하이든 사중주는 모차르트의 실내악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온 작품들로 음악적 가치 못지 않게 모차르트의 인생에서 상당히 중요한 작품들이다.

한편 모차르트는 1784년에 12월에 프리메이슨 자선지회에 가입하였는데, 이 프리메이슨도 모차르트의 음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프리메이슨 가입을 통해 다수의 친구를 얻었으며,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프리메이슨의 의식을 위한 음악이나 프리메이슨 사상을 반영한 음악도 몇 작곡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이 K.477의 프리메이슨 장송음악(Maurerische Trauermusik)이나 K.623의 프리메이슨을 위한 소 칸타타(Little Masonic Cantata). 그리고 상당수의 연구자들은 그의 생애 최후반기에 작곡된 2개의 징슈필 오페라 현자의 돌(Der Stein der Weisen, K. 592a)과 <마술피리(Die Zauberflöte, K.620)>를 프리메이슨의 사상에 의거하여 씌어진 작품으로 파악하고 있다.[42]

그러나 모차르트에게 프리메이슨이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돈. 프리메이슨의 인맥은 모차르트의 일종의 돈줄 역할도 했는데, 특히 프리메이슨 동지이자 방직업자였던 미카엘 푸흐베르크(Michael Puchberg) 로부터 상당히 많은 돈을 빌렸다.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후에는 마스터 메이슨까지 올라갔다.

3.7. 오페라의 거장 모차르트

이처럼 모차르트의 빈 진출은 성공적이었다. 부와 명성도 얻었고, 결혼도 했으며, 사사건건 간섭하는 윗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음악적으로도 좀더 성장할 수 있었다. 문제는 돈을 많이 벌기는 했는데 실제 생활은 의외로 쪼들렸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작곡료나 연주료도 충분히 받았고 유력가 자제들을 대상으로 피아노 과외를 하면서 제법 쏠쏠하게 돈을 벌여들였다.[43] 그런데 작곡료로 돈을 벌면 도박과 사치로 그 이상을 써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벌어도 계속 돈이 모자랐다. 즉, 돈을 벌 줄만 알았지 그것을 관리하고 쓸 줄은 몰랐던 것. (일각에선 "모차르트가 실제 도박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 전쟁으로 인하여 음악가로서의 삶이 궁핍해진 게 모차르트 말년 가난의 더 큰 원인이다." 주장한다. 아래 "성격에 대한 논란" 항목 참조.) 모차르트만 돈관리를 못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아내 콘스탄체의 낭비벽은 남편보다 한술 더 떴다. 이 모차르트 부부는 돈이 좀 생기자 빈 중심가의 임대료가 매우 비싼 집으로 이사를 했다. 거기에 하녀와 요리사, 미용사도 고용하고 심지어 승용마도 샀다. 그리고 자기 아들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는 비싼 기숙사립학교로 보냈다. 집에서는 뭉칫돈을 들여 자주 잔치를 벌였다. 그가 빈에서 사들였던 포르테 피아노는 당시 시가로 900 플로린이었는데, 이는 잘츠부르크에서 받았던 연봉 2년치에 해당되는 금액이다.[44]

음악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는 빈에서 몇년간 활발한 연주/작곡활동을 했지만 오페라쪽에서는 후궁으로 도피 이후 딱히 이렇다 할 작품을 쓰지 않았다. 1784년 <카이로의 거위(L'oca del Cairo)>와 <속아넘어간 신랑(Lo sposo deluso)>의 작곡에 착수했으나 도중에 포기해버렸다. 2년 뒤 1막짜리 소규모 오페라인 극장지배인(Der Schauspieldirektor)이 쇤부른 궁(Schönbrunn Palace)에서 상연된 것이 전부.

이렇게 빈에서 명성을 얻었으면서 유독 자신이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오페라에서 지지부진했던 이유는, 피아노 연주자로 바쁘게 활동했던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오페라 대본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높이를 맞춰줄만한 대본작가로 베니스 출신의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 1749 – 1838)가 있었는데, 문제는 이 분이 이미 안토니오 살리에리를 비롯해서 다른 작곡가들의 대본 의뢰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당장 모차르트에게 대본을 써줄 형편이 안됐다는 것. 다 폰테는 몇 달만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몇 달을 기다려도 대본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마냥 다 폰테만 기다릴 수 없어서 다른 작가에게 의뢰를 하여 전술한 카이로의 거위와 속아 넘어간 신랑의 대본을 받았지만 대본의 수준이 도저히 제대로 음악을 붙일 수가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에 결국 작곡을 중도에 포기해 버린 것.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2년만에 어렵게 다 폰테로부터 받아든 대본이 바로 보마르셰의 희곡을 오페라용으로 각색한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모처럼 마음에 쏙 드는 대본을 받아 쥔 모차르트는 즉시 작곡에 착수하였고 1786년 드디어 야심작 피가로의 결혼이 완성되어 무대에 올려졌다.[45]

오페라 역사에 큰 획을 하나 그은 이 작품은 빈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모차르트가 방문한 프라하에서는 더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모차르트의 음악은 빈을 넘어 독일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피가로의 결혼의 성공에 고무된 모차르트는 다 폰테의 또 다른 대본 <돈 지오반니(Don Giovanni)>의 작곡에 착수하였다. 모차르트는 바람둥이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이 대본을 썩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았는데[46] 내용이 너무 파격이어서 대중들에게 외면받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프라하에서 초연된 돈 지오반니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후에 빈에서 상연되었을 때에는 우려했던 대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당시 돈 지오반니는 오페라 부파치고는 음악이나 내용이 너무 난해하고 복잡하다는 평을 받았다.

대중적인 성공여부와 별도로 다 폰테의 대본에 만족한 모차르트는 다시 그로부터 대본을 받아 1790년 다 폰테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코지 판 투테(Così fan tutte, K.588)>를 작곡하였으며 역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모차르트가 돈지오반니 작곡에 한참 열중하던 1787년 5월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부음 소식이 전해졌다. 모차르트는 야속하게도 잘츠부르크가 너무 멀다는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와 인연이 끊어진다.[47]

한편 돈 지오반니를 작곡하던 시기에 17세의 소년 베토벤이 모차르트를 찾아와 그에게 지도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 베토벤이 빈으로 여행을 떠난 것은 사실이지만 베토벤이 모차르트를 만났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며, 학자들은 만났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자세한 것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 문서로.

이 시기, 나름 빈의 황실에서도 모차르트라는 떠오르는 작곡가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1787년 12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요제프 2세는 모차르트에게 연 800 플로린의 급여를 지급하고, 황실에서 필요할 때 연주나 작곡을 의뢰하기로 했다. 낭비벽 때문에 쪼들렸던 모차르트에게는 많지는 않지만 정기적인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이 파트타임 잡이 나름 도움이 됐으며, 황실 음악가라는 타이틀도 내걸 수 있었다.[48]

3.8. 진혼곡

1788년에 모차르트 부부는 빈 중심가의 임대주택을 떠나 빈 교외의 알체그룬트(Alsergrund)에 있는 큰 집으로 이사를 했다. 1789년에는 돈벌이를 위해 베를린,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만하임을 비롯한 독일지역의 여러 도시로 연주여행을 다녔는데 목표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다만 이 여행을 통해[49] 그는 헝가리네덜란드의 귀족들에게 후원을 약속받고 그들에게 곡을 써주기로 했으며 이 후원금으로 드디어 그는 그간 늘어만 가던 채무의 변제를 시작할 수 있었다. 1791년부터는 창작의욕도 다시 회복되어 왕성한 작곡활동을 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희망을 보여준 1791년이 그의 생애 마지막 해가 되고 말았다는 것.

1791년 9월 6일 모차르트는 보헤미아의 왕이자 요절한 요제프 2세의 후임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레오폴트 2세(Leopold II)의 대관식 축제에 맞추어 프라하에서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La Clemenza di Tito)>를 상연하였는데 이때부터 병을 얻어 상당한 고열에 시달렸다.[50]

모차르트는 아픈 몸을 돌볼 새도 없이 9월 30일에는 빈에서 자신의 마지막 오페라가 된 <마술피리>를 초연 했다. <마술피리>의 초연은 성공적이었으나 이와 별도로 그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쉬지 못하고 진혼곡의 작곡에 매달려야 했다. 이 진혼곡은 당시 28살의 젊은 귀족이었던 프란츠 폰 발제그(Franz von Walstegg) 백작이 거액을 주고 20살에 죽은 자기 아내를 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곡을 의뢰한 것이다.[51] 모차르트는 작곡료의 절반을 미리 당겨받고 빠른 시일 내에 완성해 달라는 독촉을 받았는데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작곡에 속도를 내기 힘들었다.

모차르트는 11월 20일에 고열과 부종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구토를 하면서 쓰러졌고, 아내와 처제(조피)가 그를 간호하고 가족 주치의에게 치료를 맡겼으나 차도가 없었다. 결국 그는 1791년 12월 5일 진혼곡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 진혼곡은 결국 자신을 위한 곡이 되어 버린 셈.

이 모차르트의 사망과 관련된 이야기는 아래에 따로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

졸지에 미망인이 된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미완성 상태인 진혼곡을 완성시키는게 급선무였다. 의뢰인으로부터 이미 계약금의 절반을 받았는데 이를 완성시키지 못하면 되돌려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시일이 촉박했던 그녀는 먼저 모차르트의 제자 요제프 레오폴트 아이블러(Joseph Leopold Eybler, 1765~1846)에게 의뢰하였으나 아이블러는 Dies irae와 Confutatis의 오케스트레이션 일부와 Lacrimosa를 조금 손댄 뒤 포기했다. 이에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의 또 다른 제자였던 프란츠 쥐스마이어(Franz Suessmayer,1766~1803)에게 의뢰하였으며 결국 그가 이 진혼곡을 완성하였다. 쥐스마이어는 모차르트가 죽기 직전까지 그와 함께 있었으며 이 곡의 작곡 방향에 대해서 나름 지시를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Sequentia와 Offertorium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했으며 Lacrimosa 이후의 Sanctus, Benedictus, Agnus Dei는 쥐스마이어 자신이 작곡했다고 한다. 이렇게 쥐스마이어가 완성한 악보는 표지에 모차르트의 사인을 위조하여 기입한 후 의뢰인이었던 발제그백작에게 전달되었다.[52]

4. 후대의 평가

"모차르트여! 이 멋진 나은 세상의 모습을 당신이 주셨나이까? 가볍고, 밝고, 좋은 날들이 내 평생 동안 내게 머무를 것입니다. 멀리서와 마찬가지로 모차르트 음악의 마법의 음표는 여전히 우아한 방식으로 내게 떠오릅니다[53]"

- 프란츠 슈베르트

"서로 연결되는 안락함과 우아함으로서 이토록 즉흥적이고 명확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기쁨이다. 만약 우리가 모차르트의 음악의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 할 수 없다면, 최소한 그의 순수성을 글로 담아내보려고 하자.[54]"

- 요하네스 브람스

"모차르트는 음악 창작에 있어 전 영역을 아우르지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내 부족한 머리로 이 (피아노) 건반에 손을 대는 것일 뿐이다. [55]"

- 쇼팽

"모차르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다. 베토벤은 단순히 음악을 창조하였지만, 모차르트의 음악은 순수함과 미를 지녔는데, 그것은 우주에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어떤 부분의 내적 미학이 숨겨져 왔다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 같다.[56]"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모차르트는 매우 장대한 규모의 창의력을 보여서 사람들은 사실상 그가 그 자신을 계속해서 위대한 걸작에 내던졌다고 말하곤 한다.[57]"

-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

"모차르트의 음악은 특히나 연주하기 어렵다. 그의 감탄할 만한 명쾌함은 그 음악이 매우 청백함을 입증한다. 그의 연주에서 약간의 실수만 해도 그것은 백지위의 검은 점 처럼 두드러진다. 때문에 그의 곡은 음 하나하나가 정확히 연주되어야 한다.[58]"

- 가브리엘 포레

"대부분의 엄청난 천재들은 수 세기 동안, 모든 예술의 영역 내에서 모차르트를 다른 모든 거장 위에 두어 칭송했다.[59]"

- 리하르트 바그너

"모든 음악적 야망은 모차르트 앞에서 절망이 된다.[60]"

- 샤를 구노

"모차르트는 위대한 거장들 중에서 가장 범접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61]"

- 아르투르 슈나벨

"모차르트의 음악은 천사들을 지상으로 내려오도록 유혹할 만큼 매우 아름답다. [62]"

- 클루게

"어떤 난관에 부딪히면, 모차르트가 당신에게 해결책을 준다. [63]"

- 페루초 부소니

"인간 내면의 영혼과 그 에너지의 깊이를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바흐, 베토벤, 바그너의 곡들에 감탄할 만 하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신성한 본능이다.[64]"

- 그리그

"베토벤은 일주일에 두 번, 하이든은 네 번, 그리고 모차르트는 매일 연습한다![65]"

- 로시니

"우리가 모차르트의 음악을 자주 들을수록 그의 음악이 더 새로워 보이지 않는가? [66]"

- 슈만

"모차르트는 음악적 예수 그리스도다. 모차르트는 음악의 영역 내에서 얻을 수 있는 미의 정점이다.[67]"

- 차이콥스키

"모차르트는 정의되기 이전에 어떤 행복이다.[68]"

- 아서 밀러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모차르트를 가장 좋아했어요. 그건 변하지 않아요. 모차르트 음악은 아이러니한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음악은 기쁜데 슬픈 감정이 있고, 슬픈 음악인데 기쁜 감정이 느껴지고. 저는 사실 이게 예술의 끝이라고 보거든요. 열려 있는 해석이 가능한.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완벽미’ 때문이에요.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의 음악이예요."

- 피아니스트 손열음

5. 모차르트의 주변 인물들

5.1.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

해당 문서로.

5.2. 모친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1720~1778)는 찰츠부르크 태생으로 본명은 안나 마리아 페르틀(Pertl)이었으며 부친은 찰츠부르크의 공무원으로 알려져 있다.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는 종종 여행을 다닌 것을 제외하면 평생을 찰츠부르크에서 살았던 찰츠부르크 토박이였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7살에 1살 위의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결혼했는데 결혼식도 찰츠부르크에서 했다. 그녀의 개인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현재 남아 있는 자료에 의하면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의 여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69]

생전에 7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사망했으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그녀가 36살에 낳은 막내였다.

1. 요한 레오폴트 요아힘 모차르트(Johann Leopold Joachim Mozart, 1748) - 6개월만에 사망.

2. 마리아 안나 코둘라 모차르트(Maria Anna Cordula Mozart, 1749) - 며칠만에 사망

3. 마리아 안나 네포무케나 발푸르기스 모차르트(Maria Anna Nepomucena Walpurgis Mozart, 1750) - 2개월만에 사망

4. 마리아 안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 모차르트(1751-1829) - 모차르트의 누나 난네를(마리안네)

5. 요한 칼 아마데우스 모차르트(Johann Karl Amadeus Mozart, 1752) - 3개월만에 사망

6. 마리아 크레센티아 프란시스카 드 파울라 모차르트(Maria Crescentia Francisca de Paula Mozart, 1754) - 2개월만에 사망

7.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The Mozart

그녀는 신동으로 각광받았던 막내 아들의 연주여행에 자주 동행했으며 1777년 찰츠부르크를 벗어나고 싶어했던 아들의 구직여행에도 동행하였다. 그런데 이 여행에 따라 나섰다가 이듬해 프랑스 파리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서 결국 사망하고 만다. 향년 58세. 파리에서 구직이 잘 되지 않아서 경제적으로 쪼들렸던 모차르트는 모친의 병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고 이것이 결국 모친의 사망으로 이어졌는데, 당시 모차르트가 쓴 편지를 보면 이에 대해 상당히 자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모차르트는 이 모친의 죽음을 계기로 구직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찰츠부르크로 복귀하게 된다.

그녀의 유해는 파리의 성 유스타슈 묘지(Saint-Eustache Cemetary)에 안장되었는데, 어디에 묻혔는지 오리무중인 아들과 달리 현재에도 그녀의 묘지는 잘 보존되어 있다.

5.3. 아내 콘스탄체와 처형/처제

붉은 원 안의 여자가 콘스탄체[70]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결혼과정에 대해서는 전술한 모차르트의 생애 부분을 참고하자.

콘스탄체는 그간 영화 아마데우스를 비롯 각종 매체에 나온 철부지 이미지와[71] 모차르트의 부친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몹시 마음에 안 들어했던 전력 때문에 남편을 말아먹은 악처 또는 남편의 음악을 이해 못하고 사치만 즐겼던 여자라는 평가가 많았는데 이는 많이 왜곡된 평가이다. 또 그녀가 남자를 많이 만나고 다닌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라는 평도 있었는데, 이는 모차르트 부부가 자주 사람들의 파티에 참석하면서 나름 사교생활을 즐겼기 때문에 나온 소문일 뿐이며, 실제 그녀가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72]

기본적으로 베버 집안의 4자매 요제파, 알로이지아, 콘스탄체, 조피는 모두 음악가가 되기 위한 교육과 글을 쓰는 교육을 받은 교양을 갖춘 여성들이었으며, 음악에 대한 이해력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만약 진짜로 콘스탄체가 별볼일 없는 천박한 여자였다면, 모차르트와의 관계도 일회성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베버 집안의 4자매는 다들 성악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엄친딸급의 자매들. 장녀 요제파와 차녀 알로이지아는 훌륭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당대를 휘어잡은 명가수가 되었으며[73] 3녀 콘스탄체도 모차르트와 일찍 결혼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언니들처럼 전업가수가 될 수 있는 성악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막내 조피도 성악에 재능이 있어 성악가로 활동했다고 하는데 자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모차르트는 빈에 정착한 후 요제파와 알로이지아를 위해 다수의 아리아를 작곡했으며(K 383, K 416, K 418, K 419, K 538) 종종 오페라의 배역도 맡겼다. 오페라 <후궁으로의 도피>의 콘스탄체 역은 알로이지아를 염두에 두고 만든 배역이었다.[74] 또 돈 지오반니의 비엔나 초연 때에도 알로이지아가 돈나 안나를 담당했다. 요제파는 모차르트 최후의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역으로 열창하여 절찬을 받았다. 셋째 딸 콘스탄체도 모차르트와의 결혼으로 전문 가수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염두에 두고 작곡된 모차르트의 C 단조 미사(K. 427, 일명 대미사)를 보면 그녀가 전문 성악기 못지 않은 역량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잘츠부르크에서 이 작품이 초연되었을 때 그녀가 직접 소프라노 독창을 불렀다. 모차르트가 소프라노를 위한 음악을 작곡할 때 그녀와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을 정도로 성악에 대한 재능과 이해력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전술했다시피 콘스탄체는 부유한 집안 출신에다 사교생활로 인해 모차르트 생전에는 남편 못지 않은 낭비벽을 자랑했다. 벽난로를 지필 땔감이 없어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춤을 췄다는 에피소드 등의 단편적인 이야기만 접한 사람들이 모차르트가 가난하게 살았다는 인상을 가진 경우가 많은데, 가난하게 산 게 아니라 반대로 너무 사치스럽게 살았던게 문제였다.[75] 콘스탄체에 대한 후대의 비난들은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데, 콘스탄체가 당시의 일반적인 아내들처럼 집안일과 내조에 충실하지 않고 남편 저리 가라로 사교모임에나 나가고[76] 남편 돈을 펑펑 써댔기 때문에, 결국 집안이 빚에 허덕이고 남편이 일중독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분명 이러한 콘스탄체의 행실은 오늘날 관점에서 봐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다만 전술했다시피 모차르트 부부가 겪었던 자금난의 근본 원인은 사치와 당구도박에 빠져 있던 모차르트 본인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남편을 계속 닥달하여 과로사로 죽게 했다던가 돈을 보고 모차르트와 결혼했다는 식의 관점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1791년 12월, 어린 두 아들과 빚만 잔뜩 남은 상황에서 남편이 급사해 버리자 콘스탄체는 절망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간 철모르는 안방마님이었던 콘스탄체는 생활력 극강의 억척 아줌마로 변신했다. 우선 콘스탄체는 이미 주문받은 레퀴엠을 완성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여 여러 작곡가들을 찾아다니며 작품을 완성시켰다. 이어 남편의 미출판 작품을 차례로 출판하였다. 또한 남편의 작품들로 공연을 기획하여 수익을 얻기도 했다. 또 오스트리아 황실로부터 연금을 받는데도 성공했다. 이처럼 콘스탄체는 돈과 관련된 일을 잘 챙겨서 빚도 모두 갚고 생활도 금세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어느정도 여유있는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 콘스탄체는 덴마크의 귀족이자 빈 주재 외교관이었던 게오르그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 1761-1826)와 가까워졌고 나중에 결국 재혼하게 된다. 폰 니센과 콘스탄체가 가까워진 과정에 대해서는 약간은 서로 다른 내용의 서술이 있다. 평소 음악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었던 니센이 먼저 모차르트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그의 미망인 콘스탄체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모차르트의 유고들을 출판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이를 도와줄 명목으로 콘스탄체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설명에 따르면 폰 니센이 콘스탄체가 세를 내놓은 집에 거주하게 되어 세입자와 세입주로 알게 되었다가 점차 가까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콘스탄체와 니센은 서서히 가까워졌고 자연히 니센은 콘스탄체가 모차르트의 악보 및 유품을 정리, 보존하고 악보를 출판하는 일에 깊숙히 관여하게 되었다. 1798년경부터 두 사람은 사실혼 관계로 지냈다. 다만 공식적인 재혼은 모차르트의 두 아들이 모두 장성해서 출가한 후, 콘스탄체[77]의 나이가 47세가 되던 1809년에야 했다. 이듬해인 1810년에 니센은 오랜 빈 주재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본국인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돌아갔다가 이후 10년간 유럽 각지,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에 파견되어 생활했다. 콘스탄체 역시 1810~1820년 10년간 새 남편과 함께 코펜하겐 및 유럽 여러 곳에서 생활했다.

니센의 묘비.[78]

니센이 정년퇴직을 한 후, 니센과 콘스탄체 부부는 그동안 모았던 유품과 자료들을 바탕으로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기로 했고, 제대로 모차르트 연구를 하기 위해 1824년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 정착했다. 모차르트의 친누나인 마리안네와도 조우하였고, 마리안네가 가지고 있던 모차르트의 자료도 넘겨받게 되었다. 충분한 자료를 확보한 니센은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는데 착수했다. 하지만 니센은 전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서문만 조금 작성한 채 1826년 사망했다. 이후 이 전기작성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러 사람이 매달린 끝에 1828년에 겨우 완성되었다.

한편 1826년 니센이 사망한 후 콘스탄체는 언니 알로이지아와 동생 조피에게 잘츠부르크에서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당시 큰 언니 요제파 베버는 1819년에 사망했고 알로이지아 베버는 1795년 남편 요셉 랑어와 사실상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79] 막내 조피는 남편이었던 크로아티아 출신 가수겸 작곡가 야콥 하이벨(Jakob Haibel)이 하필 니센과 같은 해인 1826년에 사망한 탓에 미망인이 된 상황이었다. 이런 정황 덕분에 알로이지아와 조피는 콘스탄체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세 자매는 함께 찰츠부르크에서 여생을 보냈다.

알로이지아는 1839년, 콘스탄체는 1842년, 조피는 1848년에 차례로 사망했는데, 조피가 사망했을 때 상속자가 없는 관계로 세 자매의 재산은 잘츠부르크시에 증여되었다.[80]

여담으로 모차르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야말로 굉장히 저질인 글이 넘쳐난다. "언제나 당신의 소유물인 모차르트", "설탕처럼 달콤한 키스 3개가 당신을 향해 날아가고 있어요", "지금 난 당신을 생각하면서 발기했다", 엄청나게 야한 글들이 넘쳐날 정도로 편지를 쓰고 이웃들에게 농담을 했다. 그런데 그의 아내도 천생연분답게 비슷한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이런 편지내용은 그 시대상에서 유행하는 농담이었을 뿐, 딱히 두 사람이 변태기질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말자.

모차르트 팬이라면 이런 민망한 편지나 자료들도 일절 버리지 않고 보존에 힘썼던 콘스탄체와 니센에게 감사하자. 그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현재 우리는 위대한 음악가 모차르트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아는 게 적었을 것이다.[81]

5.4. 누나 난네를(마리안네)

7세의 모차르트와 12세의 난네를

1763년 유세비우스 요한 알펜

난네를[82](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 1751-1829)은 일찍 죽지 않고 생존한 모차르트의 유일한 혈육이었으며, 남동생처럼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그녀는 모차르트보다 5살 위로 어렸을 때에는 모차르트와 같이 연주여행을 다니면서 남매 신동으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당시에는 여자가 전업 음악가를 한다는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83], 1770년 이탈리아 연주여행부터는 남동생과 같이 다니지 않고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했다. 20대 초반에 남자친구가 생겼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하지는 못했다.

마리안네는 어머니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집안에서 어머니 역할을 떠맡아야 했으며 음악교사로 집안의 생계도 꾸려가야 했다, 이런 탓인지 당시로서는 굉장히 늦은 나이인 32살이 되어서야 잘츠부르크 법관이었던 프란츠 폰 베르흐톨트 추 존넨부르크(Johann Baptist Franz von Berchtold zu Sonnenburg)와 결혼하여 자신의 집에서 30km 정도 떨어진 길겐(st. Gilgen)에 정착했다. 이 존넨베르크는 이미 결혼을 2번이나 했고 전처에게 낳은 자식도 5명이나 있었는데, 다만 돈도 매우 많았기 때문에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다. 마리안네와 존넨베르크는 3명의 아이를 낳는데 첫째 아들은 외할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사망할 때까지 길렀으며 막내 딸은 1년만에 죽었다.

1801년 결혼 18년만에 남편이 죽자 마리안네는 4명의 의붓자식과 2명의 친자식을 데리고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의붓 자식들이 장성해서 슬슬 독립한데다 넉넉하게 유산을 물려받아서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기 때문에, 소일거리 차원에서 음악교사를 했다. 하지만 잘츠부르크로 복귀할 당시 이미 나이가 50살이었기 때문에 오래 하지는 못했다.

모차르트와 관련해서 마리안네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1820년 콘스탄체와 니센 부부가 잘츠부르크에 오면서 부터이다. 마리안네는 그간 며느리를 몹시 싫어했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콘스탄체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모차르트 사후 두 사람은 일절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이런 사정때문에 마리안네는 잘츠부르크에 재혼남을 데려온 콘스탄체를 처음에는 쌀쌀맞게 대했다. 하지만 콘스탄체와 니센이 자신의 남동생 모차르트의 연구와 자료수집에 열중하고 있고 이를 위해 직접 그의 고향까지 찾아온 것을 알게 되자 생각을 바꾸었다. 마리안네는 자신이 모차르트와 주고받았던 편지와 악보 등의 중요한 자료 일체를 콘스탄체 부부에게 제공하였으며, 모차르트와 가깝게 지냈던 증인으로서 그의 행적을 증언하는데 협조하기도 했다.

마리안네는 1825년경부터 시력을 잃고 급격히 쇠약해졌으며 1829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죽기 얼마 전 마리안네는 조카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를 극적으로 만날 수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계부 니센이 사망하자 그의 추도식에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지휘하기 위해 잘츠부르크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간 희미하게 존재여부만 알고 있다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펑펑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5.5. 모차르트의 자식들

모차르트 부부는 총 6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전술했다시피 2명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1. 라이문트 레오폴트 - 1783.6.17.~1783.8.19. 장남.

2. 카를 토마스 - 1784.9.21.~1858.10.31. 차남.

3. 요한 토마스 레오폴트- 1786.10.18.~1786.11.15. 3남.

4. 테레지아 콘스탄치아 아델하이트 프리데리케 마리아 안나 - 1787.12.27.~1788.6.29. 장녀. 다른 요절한 자녀들 중에서는 그나마 6달 동안 살아 있었다.

5. 안나 마리아 - 1789.11.16. 사산(死産).

6. 프란츠 사버 볼프강 - 1791.6.26.~1844.6.29. 4남.

차남인 카를 토마스(Karl Thomas Mozart, 1784~1858)[84]이탈리아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하다 중도 포기하고 공무원으로 살면서 이탈리아에 아버지의 음악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4남인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Franz Xaver Wolfgang Mozart, 1791~1844)는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아 음악가 및 음악 교사로 일했다. 다만 아버지가 죽기 4달 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으며, 음악적으로는 당대의 음악적 조류(낭만파)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빈 고전파 풍의 구식작법으로 곡을 썼기 때문에 큰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

이 두 아들들은 모두 독신으로 살아서 모차르트의 가계는 여기서 다 끊겨버렸다.

6. 모차르트에 관한 일화

6.1. 성격에 대한 논란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저는 천박한 놈이 맞습니다. 하지만 제 음악은 그렇지 않아요.

― 영화 아마데우스 중에서

어렸을 적에 폭스 테리어 종의 개와 카나리아, 찌르레기 등의 새를 집에서 키웠다. 링크

인생을 살펴보자면 매체에서 언급되는 일반적인 '괴팍하고 자유분방한 천재', 즉 천재 캐릭터클리셰의 오리지널 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모차르트의 서간집을 보면 어렸을 때는 스카톨로, 좀 나이 들고 나서는 검열삭제를 좋아한 듯. 내용이 참으로 아스트랄하다. 이 지저분한 소재는 당시 이 동네 보통 지식인들이 자주 써먹던 소재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런 행각은 서간집 외에 작품으로도 남아있는데, 당시 작곡가들이 여흥 거리로 쓰던 장르인 짤막한 카논들 중에도 노골적인 스카톨로지 메시지를 담은 곡이 몇 곡 있다. 대표적인 예로 '내 엉덩이를 핥아라(Leck mich im Arsch KV 231(382c)'(...). 모차르트의 카논 중 스카톨로지 성향이 있는 곡들은 당시 엄격했던 검열 제도 때문에 제3자가 상당히 순화된 건전가요풍 가사로 임의 개작하고 나서야 출판할 수 있었다.

이런 사회성 결여와 앞서 언급한 스카톨로지 변태 성향 때문에 모차르트 아스퍼거 증후군이나 투렛 증후군 환자였다는 설이 진지하게 돌아다니기도 했으나 모두 낭설에 불과하다. 2000년대 후반경에 재능 비범하고 사회성 떨어지는 천재들을 죄다 아스퍼거로 몰아가는 근거없는 주장들이 판을 친 적이 있었다. (...) 당장 나무위키의 모태가 된 리그베다 위키에서도 2010년까지만 해도 온갖 뜬소문에 근거해서 모차르트를 비롯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아이작 뉴턴오다 노부나가에 여러 역사적 위인들이 모조리 "아스퍼거 증후군 의심을 받는 사람들 목록"에 올라간 적이 있었으나[85] 모조리 들어내진 적이 있었다.

친 모차르트파쪽은 이중 스카톨로지설 자체가 확실치 않은 설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많기는 하지만 당시에도 현대처럼 똥과 엉덩이를 이용한 욕이나 농담이 유행하고 있었고 모차르트도 그런 더러운 소재를 이용해 농담을 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방귀를 뀌라느니 같은 말들이 농담이 아닌 진심으로 들릴지 몰라도 외국은 가장 많이 쓰이는 욕들 중에 'Shit(똥)', 'Ass(궁둥이)'같은 말들이 껴있기 때문에 농담이라 보는 경우가 많으며 강박적 외설증, 즉 틱장애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 부분은 2017년 9월 1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묘사된 모차르트의 모습으로 인해 그 성격이 실제로 노답 개차반이였다고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 모차르트는 이후 쇼팽, 슈만에게 큰 영향을 미칠 초기낭만파 거장인 요한 네포무크 훔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아무 댓가를 요구하지 않고 그를 2년간 자신의 집에서 기숙제자로 키워줄 정도로 통이 큰 인물이기도 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연주회에서도 훔멜에게 연주 기회를 주면서 &quot;훔멜은 나보다 뛰어난 연주자가 될것이다&quot;라고 칭찬하고 다녔다고 한다. 또한 요제프 하이든을 존경하여 항상 예의를 갖추고 "파파"라는 존칭으로 부르며 그의 작품을 &quot;난 그렇게 훌륭한 악상은 생각해낼수 없을것이다&quot;라고 평하며 항상 자신을 낮추며 겸손한 태도로 대했다. 할줄 알면서 대체 왜 살리에리클레멘티 한테는

이 밖에 모차르트 사후 레퀴엠의 완성에 기여한 아이블러를 모차르트가 극찬한 일이나, 음악가 카를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와 모차르트가 돈독하게 지낸 것도 있다. 즉, 자기 사람들한테는 끔찍이 대했지만 자신이 정한 선 밖의 인물들에게는 자신과 동등한 사람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았던 것. "노답 무개념 인성파탄자라서 당대 음악가들에게 왕따를 당했다."는 말은 모차르트의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에서 나온 말이다. 당장 현악사중주 6곡 &quot;하이든&quot;의 헌정서에 적힌 하이든에 대한 모차르트의 존경과 애정을 담은 진심어린 글과 클레멘티를 조롱하고 비웃으며 그의 시작주제를 무단으로 표절한 경우만 보아도 자신이 정한 선 밖의 인물과 안의 인물들에 대한 온도차가 극과 극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86][87] 모차르트가 이러한 선 안의 인물이 밖의 인물들보다 다수였다면 성격파탄에 관한 말은 나오지 않거나 시기어린 이들의 음해로 치부되었겠지만, 모차르트에게는 불행하게도 자신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허락한 인물들 보다 배척한 인물들이 곱절은 더 많아 이렇게 역사에까지 남게 된 것이다. 안습

모차르트 부부가 씀씀이가 헤프긴했지만 도박을 즐겼다는것은 낭설이다. 모차르트가 말년에도 고소득을 꾸준히 유지했다고 잘못 아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론 해가 지날수록 모차르트의 수입은 곤두박질쳤다. 실제로 1789년 5월 16일에 모차르트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quot;많은 찬사를 받은 연주회지만 정작 수입은 터무니 없이 적다.&quot;라는 글귀가 있으며, 이것은 모차르트 생애 마지막 3년과 시기가 정확히 일치한 제8차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1788~1791)이랑 깊은 연관이 있는데, 이 시기에 수도 빈에선 경기 침체로 인해 중산층의 문화예술 소비가 크게 줄어 오페라 활동이 상당수 중단되었으며, 연주회도 상당수 흥행 실패하는 등 전반적으로 음악가 및 예술가들에게 경제적으로 혹독한 시기였다.

이외에도 모차르트는 여성 편력이 심했다는 이미지가 있고 영화《아마데우스》도 그런 이미지를 상당히 부각시켰지만 특별히 다른 여자를 사귀었거나 향락에 빠져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후술되는 아내 콘스탄체와 마찬가지로 사교모임을 즐겼던 덕분에 잘 논다는 이미지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오페라 돈 조반니를 한창 작곡 중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모차르트를 찾아온 자코모 카사노바가 자신이 겪은 일화를 오페라에 넣어 달라는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을 정도. 사실 카사노바의 행동이 모차르트가 보기에도 너무 도를 넘긴 했다. <돈 조반니>를 작곡할 당시에도 '꼭 이런 부도덕한 호색한을 주인공으로 해야만 하나'하고 갈등했고, 결국 작곡이고 뭐고 다 때려칠까 하다가 "어차피 오페라의 스토리는 돈 조반니가 벌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는 각본가의 말을 듣고 작곡을 계속했을 정도였다.

6.2. 모차르트와 베토벤

모차르트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보다 한세대 앞선 인물이지만 같은 빈 고전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둘을 서로 자주 비교하는데, 대체로 신이 내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천재' 모차르트에 반해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신체적 약점마저 극복해 낸 '수재' 베토벤이라는 식으로 비교를 한다. 대중적으로는 "모차르트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재, 베토벤은 하늘로 올라간 천재" 라는 말도 있을 정도. 이는 2명 중 누가 낫다라고 우열을 내릴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모차르트 역시 시행착오 없이 처음부터 덥썩 명작을 양산했던 것은 아니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음악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은 작곡가였다.[88] 모차르트 생전에도 이런 평가가 많았는지, 본인의 편지에서 "사람들은 나를 천재라고만 생각하는데 나처럼 연습과 노력을 많이 한 사람도 없을 거야"라면서 푸념했다고 한다.

후에 로시니는 "모차르트는 천재성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만큼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음악가"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일생동안 베토벤을 존경한 브람스는 말년에 베토벤이 화성의 깊이와 전반적인 작품성에서 모차르트보다 못하다고 베토벤을 은근슬쩍 까기도 했다. 그만큼 후대의 평가에서 베토벤에 밀릴게 전혀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 모차르트이다.

하루는 베토벤이 거리를 걷다가 어느 집에서 연주되고 있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듣고, 옆에 있던 동료에게 "크라머! 크라머! 우리는 절대로 이런 곡을 쓸 수 없을 걸세!"라고 찬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베토벤은 실제로 이 곡을 모차르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사랑했고, 자기 스스로 카덴차를 붙여서 연주할 정도였다고 한다. 베토벤을 기려, 지금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은 베토벤의 카덴차로 연주한 음반이 가장 많고, DG에서 나온 베토벤 전집[89]에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이 끼여 있기도 하다. 베토벤의 카덴차는 장대하고 화려하며, 이 작품의 성격을 제대로 짚어냈다. 인류 최고의 음악가로 칭송되는 두 사람이 함께 작곡했다는 것만으로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의 가치는 입증된다고 볼 것이다. 베토벤 뿐만 아니고 슈만 훔멜 멘델스존 브람스 등 많은 작곡가들이 카덴차를 남겼다

6.3.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청혼한 모차르트?

6살의 모차르트는 1차 연주여행에서 당시 합스부르크의 여왕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있던 빈의 궁정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장난을 치다 넘어지자 모차르트보다 1살 많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90]가 일으켜 세워주었다고 한다. 이때 모차르트는 대담하게 공주에게 청혼을 했다고 한다. 혹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더니 당돌하게 "공주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더 큰 후에 보자"고 했다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청혼했다는 이야기는 어린 모차르트의 당돌하고 조숙한 귀여움을 보여주는 일화로 유명하지만,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마리아 테레지아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중에 보자고 답해줬을 가능성은 낮다. 당시 유럽귀천상혼 관습에 따르면 지배 가문의 자식은 다른 귀족도 안 되고, 오직 다른 왕가의 자식과 결혼해야 했다. 그런데, 지배 가문은커녕 봉신 영주나 가신도 아닌 평민 남성과 공주의 결혼이라는 건... 다른 국가들의 외교적, 정치적 조롱을 감당해야 하며, 왕가의 공주가 격이 맞지 않는 결혼을 했다는 데 대한 국내 귀족들의 격렬한 반발(심하면 반란)까지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된다.(...)[91] 그냥 마리아 테레지아가 꼬마 모차르트의 귀여운 제안에 장단을 맞춰준 것에 가까울 것이다. 굳이 귀천상혼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6살짜리 꼬마의 청혼에는 당연히 장난으로 대응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왕족급의 귀족들에게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 절대 아니라 일종의 사업이자 정치였다. 그 정략결혼은 오늘날에도 동서를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현대의 경우에 이런저런 차별이 실존한다 해도 일단은 '모든 인간의 평등'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여지는 것과는 달리, 근세 유럽에서는 격에 맞지 않는 결혼(귀천상혼)은 아예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여겨졌음을 명심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시 자신의 아들이 악단을 꾸리자, '돈도 없는데 그런 뻘짓을 왜 해'라고 편지를 보냈다(…). 정치적인 이야기지만, 당시 오스트리아프로이센과의 국제전쟁과 검소한 성품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긴 통치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긴축재정을 실시하는 국가가 되었다.

6.4. 사기적인 음감

모차르트가 7살이었던 때, 악사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아버지에게 "왜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면 반음 올릴 때와 반음 내릴 때의 음높이가 다른 건가요?"라고 질문했고,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피아노를 쳐주며 "그건 네가 잘못 들은 거고 반음을 올리든 내리든 반음만큼의 음높이는 일정하다"고 가르쳐 주었다. 이를 두고 모차르트가 온음, 반음 개념을 초월하여 음을 18등분해서 들을 수 있었던 컴퓨터급 절대음감을 지니고 있었다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5/18반음(27 cents)과 4/18반음(22 cents)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절대음감이 아니라 오히려 예민한 상대음감 능력이라 볼 수 있다.

당대 바로크 시대에는 바흐의 평균율이 표준적인 조율방식이 아니었으며, 음계를 구성하는 비율 뿐 아니라 기준음의 기저주파수 자체가 연주회 장소마다 달랐다. 구체적으로 현대음악에서 A4=440 Hz인데 17세기의 베니스에서는 465 Hz, 18세기 프랑스는 392 Hz, 독일은 415 Hz였으며,[92] 교회는 반음[93] 낮은 튜닝을, 연주회장은 반음 높은 튜닝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만약 상황이 이렇다면 현대음악에서 의미하는 절대음감의 소유자는 엄청 괴로운 음악적 환경에 놓이게 된다. 연주회 여행을 다녔던 모차르트가 매번 가는 곳마다 오케스트라를 갈아 뒤엎고 하프시코드까지 새로 두드려 맞추지 않은 이상 예민한 상대음감이었을 수 있다.

6.5. 난무하는 모차르트 관광지

모차르트는 베토벤과 더불어 관광지와 기념관/박물관을 마구 양산하는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25년이나 살았던 그의 생전에는 별로 관심을 주지 않았던 잘츠부르크가 정작 그의 사후에는 '모차르트의 고향'이란 이름으로 매년 막대한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모차르트가 이 작은도시 하나 벗어나려고 엄청나게 발버둥 쳤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이러니. 여튼 국제 모차르트 재단 본부도 여기 있으며 음악대학의 이름은 아예 라틴어로 모차르테움(Mozarteum)이라고 지었다.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 도시가 되면서 정말 불쌍하게 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전술한 요제프 하이든의 아우인 미하엘 하이든(1737~1806). 그는 잘츠부르크를 떠나지 못해 안달을 냈던 모차르트와 달리 무려 43년간 잘츠부르크에서 충성스럽게 음악활동을 했고 잘츠부르크에 있던 시절의 천방지축 모차르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작곡가였다. 당시 콜로레도 대주교가 모차르트를 별 망설임없이 내쫓았던 것도 미하엘 하이든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 그런데 지금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으며 심지어 잘츠부르크 시민들 상당수도 제대로 모르고 있을 정도니 정말 안습. 하긴 하이든이라면 형 요제프 하이든은 유명해졌지만 미하엘 하이든은 왠만한 사람은 모르는 판국이긴 하다. 조국 오스트리아나 잘츠부르크도 이러는 판국. 이러다보니, 현재 잘츠부르크에는 미하엘 하이든 기념관이나 박물관은 고사하고 그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찾기 힘든 지경인데 좀 너무하지 않나 싶을 정도다. 혹시 잘츠부르크를 방문하는 모차르트팬이 있다면, 모차르트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미하엘 하이든에게 마음 속으로 안부라도 전하고 오자.

일전에 잘츠부르크는 동계 올림픽 유치를 신청했다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이 때에도 캐치프라이즈는 '모차르트의 고향'이었다. 이 잘츠부르크에는 모차르트에 관련된 기념품 이것저것 많은데 특히 모차르트 초콜릿 혹은 모차르트 봉봉이라고 불리는 모차르트 쿠겔이 유명하다. 1890년 파울 퓌르스트(Paul Fürst)라는 사람이 개발한 초콜릿으로, 오리지널 모차르트 쿠겔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내수공업으로 하나하나 만들어지며 미라벨이나 레버 등 다른 브랜드에서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도 있다. 물론 오리지널은 잘츠부르크 현지에서만 살 수 있고 국내에서 많이 보이는 모차르트 얼굴 찍힌 초콜릿은 다 미라벨 같은 데서 만든 유사품이다.

모차르트에 대한 지분(?)을 요구하는 또 하나의 도시가 바로 프라하. 현재 프라하는 모차르트가 머물렀거나 다녀간 곳이 모조리 박물관이나 관광지가 되어 있다. 실제로 생애 후반에 모차르트는 오히려 빈보다 프라하에서 더 각광을 받았고 오페라 돈 지오반니를 비롯해서 교향곡 38번(일명 프라하)이나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 등의 중요한 작품들이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현재에도 프라하는 모차르트 생전부터 그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준 도시였다는 이유로 '모차르트 도시'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좀 오바스럽기는 하지만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촬영도 대부분 프라하에서 이뤄졌다.

한편 독일 남부의 로텐부르크에서도 해마다 음악회가 벌어지는데, 이곳은 모차르트와 인연이 딱 하나 밖에 없다. 모차르트의 여행 도중 마차의 말을 갈아타기 위해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떠났다는 것.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건가... 실제로 이곳은 잘츠부르크가 인접한 오스트리아의 국경과도 가까운 동네이기도 하다.

독일 남서부 만하임에 있는 예수회 성당에는 모차르트가 이 도시에 며칠 거주하는 동안 미사를 드렸다는 표지석이 붙어있다.

그런데 각 도시들의 이런 눈물겨운(?) 노력을 우습게 보는 도시가 있는데 바로 빈. 당연히 빈에도 모차르트와 관련된 기념시설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 등의 역대급 대작곡가들이 모두 빈에서 음악의 꽃을 피웠기 때문에 아마 만하임이나 로텐부르크 수준으로 이들이 거쳐간 곳을 마구 기념했다가는 아예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 되버릴 것이다.

사실 유명인이라면 이런 게 흔하다. 베토벤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베토벤의 고향 과 일생 대다수를 살다가 간 빈이 서로 베토벤의 고향이라며 홍보하듯이 모차르트나 슈베르트,하이든 등등 유명 음악가들도 여러 도시가 이렇게 홍보한다.

1991년, 그의 사망 200주기를 기념하여 전세계적인 모차르트 열풍이 불어닥쳤다. 우리나라에선 남양유업의 꼬모란 유산균 요구르트 광고에 모차르트의 초상을 CG로 입히며,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를 연기했던 배한성의 '모차르트도 넘어간 맛'이라는 나레이션까지 삽입된 광고까지 나왔었다.

6.6. 콘스탄체와 파혼할 뻔 했던 모차르트

연애시절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양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돈독하게 지냈던 잉꼬커플이었지만 한 때 파혼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 이유는 모차르트의 질투 때문이었다. 1782년 봄 경에 어떤 파티에 참석한 두 연인은 사람들과 게임을 했는데, 콘스탄체가 내기에 져서 어떤 젊은이가 콘스탄체의 엉덩이 사이즈를 재도록 하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 이 벌이 실제 실행되자 이를 장난으로 받아넘기지 못한 모차르트가 완전 빡쳐버렸다.[94]

당연히 파티가 끝나고 둘은 큰 싸움을 벌였고 이 사소한 일로 인해 급기야는 파혼 이야기까지 나왔다. 다행히 얼마 간의 냉각기 끝에 모차르트의 화가 풀려서 파혼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6.7. 리히노프스키 공작과의 소송

베토벤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리히노프스키(1761-1814)공작이 모차르트와도 인연이 있었다는 것이 최근에 알려졌는데, 모차르트와 리히노프스키는 같은 프리메이슨 소속으로 관련 모임에서 종종 만난 적이 있었다. 1789년 모차르트는 베를린 연주여행때 리히노프스키 공작과 동행하기도 했다.

1789년경 공작은 모차르트에게 거액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씀씀이가 헤펐던 모차르트는 이 돈을 갚지 못했고, 공작은 이 돈을 받기 위해 소송을 걸었다. 오스트리아 법원은 1791년 11월 이 돈을 갚으라는 판결을 내렸는데 선고가 내려진지 한달도 안되서 모차르트가 사망하는 바람에 결국 채무 변제도 흐지부지 되었다. 다만 모차르트에게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 황궁에서 후원 차원에서 빚의 일부를 갚아주었다고 한다.

7. 죽음을 둘러싼 의혹

7.1. 모차르트의 죽음

모차르트는 한참 명성을 구가하고 있던 35세 나이에 급사한다. 40살을 못 넘기고 죽었기 때문에 '천재는 단명한다'라는 이미지에도 영향을 준 인물. 뭐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모차르트는 평균은 넘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평균의 함정으로 당시에는 유아사망율이 너무 높아서 (아이들이 10에 7명이 사망할 정도) 청년기를 맞이한 사람치고 단명한 것은 맞으므로 전체 평균에 대입시키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인간은 히드라처럼 전 생애에 걸쳐 사망률이 일정한 것이 아니라, 성인기 이전의 유아기에 급격히 높아졌다가 성인기로 접어들면 급격히 낮아지고, 종국에 노인기에서는 예외없이 전부 죽는 형태다. (대체적으로 60세 전후가 당시 수명)

모차르트는 병에 걸린 지 15일 만에 사망했는데, 주치의는 모차르트가 죽을 당시의 상태만 가볍게 기록하고 부검은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은 미스테리로 남고, 추측만 무성했다. 사인은 '열과 발진, 사지통(四肢痛)'.

7.2.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독살설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주장이 아직까지 대중들에게 많이 퍼져 있다. 한국에서는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1984)가 크게 히트하면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설이 널리 퍼녔는데, 사실 이 이야기는 살리에리가 살아있을 때부터 있었던 소문이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시기하고 독살했다는 주장은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1830년에 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희곡에서 다루어지며 1898년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이 희곡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Mozart et Salieri)》(1898)를 작곡하기도 했다. 20세기에서는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1979)와 이 희곡을 바탕으로 한 전술한 영화가 크게 히트하면서 대중들에게 살리에리 독살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피터셰퍼의 희곡(및 영화)에서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그의 음악활동을 방해하고 심적 압박을 가해서 죽게 만드는 것으로 묘사된다.

1823년 11월, 베토벤의 제자인 이그나츠 모셀레스[95]는 당시 노환으로 투병중이던 살리에리를 만나 그 소문에 대한 진실까지 질문했을 정도였다. 당시 일제포르슈타트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살리에리는 처음에 면회를 거부했으나, 여러 번 설득한 끝에 그를 겨우 만날 수 있었던 모셀레스는 의사와 살리에리의 딸 요청으로 그를 흥분시키지 말라는 요구대로 부드럽게 말을 하면서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모차르트를 죽도록 싫어한 건 사실이지만, 그가 죽는데 난 털끝만큼도 그 어디에도 끼어들지 못했다. 나에게 그런 오명은 반갑지 않다."

모셀레스는 베토벤에게 이걸 이야기했는데, 비서인 안톤 쉰들러[96]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어도 그를 미워하고 말이라는 칼로 그를 상처낸 범인에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말했다. 이에 모차르트, 살리에리 모두에게 음악 교육을 받은 바 있던 베토벤은 "나로선 누가 범인이니 뭐니 구분할 생각이 없거니와, 살리에리를 믿는다"고 의견을 밝히며 그 소문을 못미더워했다.

또한 살리에리는 당대에는 빈에서 가장 잘나가는 음악가였으며 영화에서는 정신병원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75살로 죽기 1년 전까지 비인 황궁의 악장으로 재직했을 정도로 한평생을 평온하게 살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오페라는 당시 빈에서 19세기 초반까지 가장 인기있는 레퍼토리였다. 나이가 들면서 그는 후에 대작곡가로 발돋움하게 되는 많은 젊은 음악학도들을 가르쳤는데, 심지어 모차르트의 아들 프란츠 크사버 볼프강도 살리에리에게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최근의 연구결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서로 불편한 관계이긴 했지만 철천지 원수지간 까지는 아니었으며 상황에 따라 서로 경쟁도 하고 협력도 하는 그런 사이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전술한 모차르트의 생애에서 보았다시피 그는 일에 매달리다가 몸 관리를 못해서 사망했으며 살리에리는 딱히 모차르트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 자세한 것은 안토니오 살리에리 항목으로.

단지 살리에리는 모차르트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는 사람들 중에 하나 였다. 당시 모차르트 살해 의혹을 받은 사람들은 살리에리 말고도 대법원장, 궁중대신들, 귀족, 다수의 음악가들도 포함되었이었다. 그러다가 푸시킨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그리고 영화 아마데우스가 이를 진실이냥 표현시켜 그 오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7.3. 죽음의 원인에 대한 현대의학적 관점

2001년 전염병 전문가 Jan V Hirschmann, MD가 Archives of Internal Medicine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돼지를 통해 감염되는 기생충선모충증이 모차르트의 사망원인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돼지고기를 날로 먹거나 덜 익혀 먹었을 경우 걸리며, 고열이 나고 근육통을 일으키며 쇠약해지는, 지금도 적합한 치료법이 없는 무서운 질병이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바로 돼지고기를 매우 좋아했다. 어찌나 돼지고기를 좋아했던지, 아내 콘스탄체에게 돼지고기를 찬양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사랑하는 아내 콘스탄체에게

내가 지금 무슨 냄새를 맡고 있는지 알겠소?

바로 포크 커틀릿이지. 어찌나 맛이 좋은지!

나는 당신의 건강을 축원하며 먹는다오.

모차르트가 병에 걸리기 44일 전에 보낸 편지. 그런데 선모충증의 잠복기는 약 50일이다(…). 비록 선모충증 이론이 모차르트의 증세를 설명할 수 있지만, 증언들을 토대로 병의 진행 과정을 고려해 볼 때, 특히 선모충 감염의 최종 단계인 호흡곤란에 의한 사망의 흔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 모차르트의 사망원인은 오랜시간 관심을 끌고 온갖 설이 난무하는 주제로, Faith T Fitzgerald, MD는 Mozart의 사망원인에 대해 감별진단(differential diagnosis)하여 논문도 발표했다. 위의 BBC 기사에서 Dr. Fitzgerald는 선모충증 이론이 '150개의 가설더미 위에 그냥 하나 더 얹은 것 뿐'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했다. 그의 진단은 "acute rheumatic fever, with carditis, polyarthritis, erythema marginatum, and possibly, chorea"(...)라고 한다.[97]

모차르트의 가계에서 어떤 단명에 관한 유전적 요인을 찾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것은 모차르트의 누나인 마리안네, 아버지 레오폴트, 그리고 그의 막내아들인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가 전부 환갑을 넘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필요 없는 작업이었다. 모차르트 학자간에서 이견이 그나마 없는 죽음의 원인으로는 모차르트 그 자신이 몸을 막 다루었다는 사실이 있다. 모차르트는 주스가 되었든 물이 되었든 술이 되었든 과음하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결정타는 마지막 해 1791년, 오페라 2곡을 동시에 작곡하면서 레퀴엠까지 떠안은 결과 나타난 과로였다.

모차르트 부검 결과에는 '속립진열(粟粒疹熱: 발열과 발진을 동반한 급성 질환)'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병으로 인한 증상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의 여동생이 전하는 기록이다. 그녀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고열에 시달리면서 끊임없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크게 기침을 하더니 검은 밤색 액체를 뿜은 뒤 쓰러졌다.

7.4. 그의 장례식

명성과는 달리 장례식에는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친척들을 포함한 일부만이 참석했는데, 눈보라가 치는 기상여건속에서 모두 빨리 돌아가 버리고 매장자 홀로 묘지로 향했다는 섬뜩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유해는 빈 외곽에 위치한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지금까지도 묘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빈의 많은 시민들이 참석했던 베토벤의 장례를 생각하면 엄청난 차이다.

그런데 이런 모차르트의 장례는 원래 당시 빈 중산층의 장례가 그랬던 것을 생각할 때, 결코 초라하거나 막 치러진 게 아니다. 시신이 그냥 아무렇게나 버려진 게 아니다. 다만 매장지까지 아무도 동행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규칙에 따라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모르는 데다, 사후 묘지 관리도 좋지 않아 유해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모차르트 시절 황제 요제프 2세계몽군주로서 사회 전반의 여러 분야에서 개혁을 시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장례절차에 관한 규정이었다. 요제프 2세는 전염병에 따른 피해를 막고자 전염병으로 죽었거나 죽었다고 의심되는 환자의 사체는 반드시 개인매장이 아닌 공동묘지에 묻도록 했다. 물론 높으신 분들이 반대함에 따라 개인매장을 허하게 되는 방향으로 가닥이 나중에 잡혔지만, 그 때 티푸스 의심 환자로 보였던 모차르트는 그런 거 없었다.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서 모차르트는 12구 가량을 공동 매장하는 곳에 묻혔고,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 한해선 영화 <아마데우스>의 묘사대로다. 하지만 이건 아내가 무슨 돈을 엉뚱한 데 쓰고 다니느라 돈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고, 단지 그때 법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비엔나의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세워진 모차르트의 묘비. 물론 앞서 설명했듯이 사진 속의 위치에 모차르트가 묻혔다는 보장은 전혀 없으며, 단지 이 공동묘지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을 반영해서 세워졌을 뿐이다. 참배가는 이들이 있다면, 착오 없기를.

이후 DNA 분석을 비롯한 현대 과학기술까지 동원하는 등의 엄청난 노력을 들여 시신을 찾고 있지만, 아직까지 전혀 진전이 없다. 남아있는 건 적갈색인 그의 머리카락 일부분 뿐(…).

8. 모차르트의 음악

모차르트의 작품 번호에는 특별히 'KV'나 'K'를 써서 매긴다. 자세한 내용은 쾨헬 번호 문서로. 모차르트는 신동 또는 천재의 이미지가 강한데, 그가 천재인 것은 맞지만 자신의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경험을 쌓고 노력을 했기 때문에, 35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딛고 위대한 작곡가가 될 수 있었다.

이 쾨헬번호 관련해서 재미있는 사실은 모차르트가 일생동안 작곡을 거의 일정한 속도로 했기때문에 쾨헬번호 100이 넘는 모차르트 곡의 번호를 25로 나누고 10을 더하면 곡을 작곡하였을때의 모차르트의 나이가 (약간의 오차 범위내에서) 나온다는것이다. 즉,

K = 작품의 쾨헬번호 { 100 < K ≦ 626 }

N = 해당 작품을 작곡했을때의 모차르트 나이

K / 25 + 10 = N

예) 피아노 환상곡 C단조 K. 475

( 실제 작곡년도 | 모차르트 나이 : 1785년 | 29세 )

475 / 25 + 10 = 29

미사 브레비스 B플랫장조 K. 275

( 실제 작곡년도 | 모차르트 나이 : 1777년 | 21세 )

275 / 25 + 10 = 21

물론 학자들이 번호를 매길 당시 작곡년도를 잘못 알고 '잘못된' 번호를 매긴 몇몇 작품들도 있는데, 키리에 D단조 K. 341와 푸가 G단조 K. 401가 그런 사례에 속한다.

아무튼 이 공식을 알아두면 쾨헬번호를 대입하여 모차르트가 곡을 작곡한 시기를 유추해볼수있어서 유용하다.

어렸을 때부터 연주여행을 다녔던 모차르트는 유럽 각지의 음악을 접하고 명망있는 음악가들들 만날 기회를 얻었으며, 이런 경험들은 그의 음악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8살 때에는 그의 초기 기악곡 양식 정립에 큰 영향을 미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로부터 교향악과 협주곡의 작곡법에 대해 배웠다. 1770년의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여러 오페라 작곡가들로부터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을 익혔고, 마르티니 신부로부터 대위법의 기초도 배웠다. 잘츠부르크의 궁정음악가로 일하던 시절에는 같이 잘츠부르크에서 활동하던 미하엘 하이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98]

빈에 정착한 이후에는 쯔비텐이 수집한 바로크 음악 필사본으로부터 대위법을 익혔고, 이어 대작곡가 요제프 하이든을 직접 만났다. 모차르트에게 하이든은 음악적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모차르트는 1782부터 3년에 걸쳐 작곡한 6곡의 현악 4중주곡 하이든에게 헌정하여 감사와 존경을 표했다. 하이든 가문의 두 형제가 모두 모차르트에게 은인이었던 셈.

모차르트는 기악분야에서도 훌륭한 작품을 엄청나게 많이 남겼지만, 그의 확실한 진가는 성악곡에서 드러난다. 특히 모차르트는 오페라 분야에서 전무후무한 성과를 이루었는데, 기본적으로 가사를 효율적으로 아름답게 처리하는 능력이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런 재능은 흔히 '오페라의 언어'라고 불리는 이태리어 뿐만 아니라 독일어로 된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당대의 대작곡가들조차 모차르트의 성악 처리능력은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인정했는데,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오페라와 아리아를 접한 후 오페라 분야는 자신이 모차르트에 비할 바가 못된다고 했고,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던 베토벤조차 성악쪽은 자신이 모차르트보다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했을 정도.[99][100] 그의 오페라에 대해 자세한 것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문서를 참고하기 바라며, 간단히 이야기하면 그의 선배 글루크가 주창한 '극과 음악이 일치하는 오페라'의 이념을 본격적인 예술작품으로 구현한 사람이 바로 모차르트다. 오페라 아리아나 기타 성악곡에서는 벨칸토 창법 일변도의 기교적인 발성에서 벗어나 좀더 호소력 있고 가사와 감정의 전달이 용이한 창법을 구사하였다.

8.1. 교향곡, 관현악

모차르트가 작곡한 마지막 교향곡은 41번이지만, 총 60여편의 교향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8.1.1. 어린 시절(초기) (1764–1771)

  • 교향곡 1번 E플랫장조, K.16
  • 교향곡 4번 D장조, K.19
  • 교향곡 5번 B플랫 장조, K.22
  • 교향곡 6번 F장조, K.43
  • 교향곡 7번 D장조, K.45
  • 교향곡 8번 D 장조, K.48
  • 교향곡 9번 C장조, K.73
  • 교향곡 10번 G장조, K.74
  • 교향곡 11번 D 장조, K.84 (모차르트의 작품인지 확실하지 않음)
  • 교향곡 12번 G장조 , K.110
  • 교향곡 13번 F장조, K.112

8.1.2. 잘츠부르크 시기(중기) (1772년-1781년)

  • 교향곡 14번 A장조, K.114
  • 교향곡 15번 G장조, K.124
  • 교향곡 16번 C장조, K.128
  • 교향곡 17번 G장조, K.129[101]
  • 교향곡 18번 F장조, K.130
  • 교향곡 19번 E플랫장조, K.132
  • 교향곡 20번 D장조, K.133
  • 교향곡 21번 A장조, K.134
  • 교향곡 22번 C장조, K.162
  • 교향곡 23번 D장조, K.181
  • 교향곡 24번 B플랫장조, K.182
  • 교향곡 25번 G단조, K.183[102]
  • 교향곡 26번 E플랫장조, K. 184
  • 교향곡 27번 G장조, K.199
  • 교향곡 28번 C장조, K.200
  • 교향곡 29번 A장조, K.201
  • 교향곡 30번 D장조, K. 202

8.1.3. 후기 (1781년-1791년)

8.1.4. 관현악곡

  • 세레나데 7번 D장조 '하프너' K.250[104]
  • 세레나데 9번 D장조 '포스트 호른' K.320
  • 세레나데 10번 B플랫 장조 K. 361, 그랑 파르티타(Gran Partita)[105]
  • 세레나데 13번 G장조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K.525[106]
  • 디베르티멘트 K.136
  • 디베르티멘트 K.137
  • 디베르티멘트 K.138
  • 디베르티멘토 11번 D장조 K.251[107]
  • 디베르티멘토 17번 D장조 K.334[108]
  • 3개의 독일 춤곡 K.605

8.2. 협주곡

8.2.1. 피아노 협주곡

  • 피아노 협주곡 1번 F장조, K.37
  • 피아노 협주곡 2번 B플랫장조, K.39
  • 피아노 협주곡 3번 D장조, K.40
  • 피아노 협주곡 4번 G장조, K.41
  • 피아노 협주곡 5번 D장조, K.175
  • 피아노 협주곡 6번 B플랫장조, K.238
  • 3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7번 "로드론" F장조, K. 242
  • 피아노 협주곡 8번 "뤼초우" C장조, K.246
  • 피아노 협주곡 9번 "주놈" E플랫 장조, K.271 [109]
  • 2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10번 E플랫 장조, K.365
  • 피아노 협주곡 11번 F장조, K.413/387a
  • 피아노 협주곡 12번 A장조, K.414/385p
  • 피아노 협주곡 13번 C장조, K. 15/387b
  • 피아노 협주곡 14번 E플랫장조, K.449
  • 피아노 협주곡 15번 B플랫장조, K.450
  • 피아노 협주곡 16번 D장조, K.451
  • 피아노 협주곡 17번 G장조, K.453 [110]
  • 피아노 협주곡 18번 B플랫장조, K.456
  • 피아노 협주곡 19번 F장조, K.459
  • 피아노 협주곡 20번 D단조, K.466 [111]
  • 피아노 협주곡 21번 C장조, K.467 [112]
  • 피아노 협주곡 22번 E플랫장조, K.482
  • 피아노 협주곡 23번 A장조, K.488 [113]
  • 피아노 협주곡 24번 C단조, K.491
  • 피아노 협주곡 25번 C장조, K.503
  • 피아노 협주곡 26번 "대관식" D장조, K.537
  • 피아노 협주곡 27번 B플랫 장조, K. 595

8.2.2.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은 총 5곡이며 모두 잘츠부르크 시절인 1775년에 작곡되었다. 그래서 이 다섯 곡을 묶어서 잘츠부르크 협주곡이라고 부른다.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B플랫 장조 K.207
  • 바이올린 협주곡 2번 D장조 K. 211
  • 바이올린 협주곡 3번 G장조 K.216
  • 바이올린 협주곡 4번 D장조 K.218
  • 바이올린 협주곡 5번 A장조 K.219

8.2.3. 호른 협주곡

  • 호른 협주곡 1번 D 장조 K. 412 [114]
  • 호른 협주곡 2번 E플랫장조 K.417
  • 호른 협주곡 3번 E플랫장조 K.447
  • 호른 협주곡 4번 E플랫장조 K.495

8.2.4. 목관 협주곡

  • 바순 협주곡 B플랫장조 K. 191
  •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 C장조 K. 299 [115]
  • 플루트 협주곡 1번 G장조 K.313
  • 플루트 협주곡 2번 D장조 K.314[116]
  • 오보에 협주곡 C장조 K.314 [117]
  •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118]

8.2.5. 신포니아 콘체르탄테[119]

  • 바이올린, 비올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E플랫장조, K. 364 [120]
  • 오보에, 클라리넷, 호른과 바순을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E플랫장조, K. 297b

8.3. 실내악

모차르트의 실내악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있지만 작품성이나 중요도 측면에서 하이든과 베토벤의 실내악과 함께 매우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모차르트의 실내악 작품중 훌륭한 것을 찾으려면 5중주곡을 찾으면 된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클라리넷 5중주와 현악 5중주 6곡을 비롯해서 피아노-목관 5중주, 호른 5중주 등 5중주 가운데 훌륭한 작품이 상당히 많다. 한편 하이든 4중주로 불리는 현악 4중주 14~19번은 하이든의 영향을 넘어 모차르트만의 독자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 현악 4중주 14번 G장조~19번 C장조 "하이든 4중주"(차례로 K. 387, K.421, K.428, K. 458, K. 464, K.465)[121]
  • 현악 4중주 21번 D장조~23번 F장조 "프러시안 4중주"(차례로 K.575, K.589, K.590)[122]
  • 현악 5중주 1번 B장조 K. 174[123]
  • 현악 5중주 2번 C장조 K. 515
  • 현악 5중주 3번 g단조 K. 516
  • 현악 5중주 4번 c단조 K. 406(516b)
  • 현악 5중주 5번 D장조 K. 593
  • 현악 5중주 6번 Eb장조 K. 614
  • 피아노 3중주 1번 Bb장조 K. 254[124][125]
  • 피아노 3중주 2번 G장조 K. 496
  • 피아노 3중주 3번 Bb장조 K. 502
  • 피아노 3중주 4번 E장조 K. 542
  • 피아노 3중주 5번 C장조 K. 548
  • 피아노 3중주 6번 G장조 K. 564
  • 플루트 4중주 1번 D장조 K.285
  • 플루트 4중주 2번 G장조 K.285a
  • 오보에 4중주 F장조 K.370[126]
  • 디베르티멘토 3번 E플랫 장조 K.186/159b[127][128]
  • 디베르티멘토 4번 B플랫 장조 K.169/159d - 위 작품과 동일한 악기 구성
  • 디베르티멘토 Eb장조 K.563 - 현악 3중주 구성
  • 피아노와 목관을 위한 5중주 E플랫 장조 K.452
  • 클라리넷 5중주 A장조 K.581[129]

8.4. 피아노

모차르트가 어렸을 때는 클라비코드라는 건반악기가 있었다. 모차르트는 클라비코드 위주로 곡들을 작곡했는데, 클라비코드의 단점과 한계를 극복한 악기인 피아노가 만들어졌고 이후에는 피아노를 중심으로 작곡했다.

8.4.1. 소나타

소나타라고 명명되긴 했지만 이 소나타는 1악장이 변주곡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2악장은 미뉴에트 트리오, 3악장은 론도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소나타 형식을 가진 악장은 하나도 없다. 1악장도 나름 유명하지만 터키 행진곡이라는 부제가 붙은 3악장이특히 유명하며 철도청 시절 전동차 종착역 안내방송에서 쓰였다.

8.4.2. 변주곡

  • <바타비아 사람들아, 기뻐하라> 주제에 의한 8개의 변주곡 G장조 K.24
  • <빌헬름 판 나사우> 주제에 의한 7개의 변주곡 D장조 K.25
  • 자작 주제에 의한 6개의 변주곡 F장조 K.54
  • <피셔의 미뉴엣>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 C장조 K.179
  • <살리에리의 '베네치아의 시장'> 주제에 의한 6개의 변주곡 G장조 K.180
  • <살리에리의 '나의 사랑하는 아도네'> 주제에 의한 9개의 변주곡 C장조 K.264
  • &lt;아, 어머니, 말씀드릴게요&gt;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 C장조 K.265
  • <사랑의 하나님> 주제에 의한 8개의 변주곡 F장조 K.352
  • <아름다운 프랑소와즈>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 E플랫장조 K.353
  • <보마르셰의 '이발사'의 로망스>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 E플랫장조 K.354
  • <주여, 거룩하시도다> 주제에 의한 6개의 변주곡 F장조 K.398
  • <어리석은 백성이 생각하기에는> 주제에 의한 10개의 변주곡 G장조 K.455
  • <어린양처럼> 주제에 의한 8개의 변주곡 A장조 K.460
  • 자작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 B플랫장조 K.500
  • <뒤프로의 미뉴엣> 주제에 의한 9개의 변주곡 D장조 K.573
  • <여자만큼 근사한 것은 없다> 주제에 의한 8개의 변주곡 F장조 K.613

8.4.3. 그 외 소품들

론도 a단조 K.511

  • 미뉴엣 K.1, 2, 4, 5, 94, 315a, 355
  • 알레그로 K.9a, 72a, 400
  • 안단테 Bb장조 K.9b
  • 푸가 K.41e, 153, 154, 401, 426
  • 안단티노 Eb장조 K.236
  • 프렐류드의 푸가 K.284a & K.394[134]
  • 론도 K.284f, 485, 494, 511
  • 카프리치오 C장조 K.395
  • 환상곡 K.396, 397, 475
  • 모음곡 C장조 K.399
  • 장송 행진곡 c단조 K.453a
  • 아다지오 b단조 K.540[135]
  • 지그 G장조 K.574

8.5. 오페라

모차르트의 오페라 문서 참조.

8.6. 성악

  • 레퀴엠 K.626
  • 아베 베룸 코르푸스(Ave verum Corpus, 성체찬미가) K.618
  • 미사 C단조 K. 427(미완성)
  • 미사 C장조 K. 317 '대관식''
  • 기뻐하라, 환호하라(엑술타테 유빌라테) K. 165: 이탈리아의 교회음악 양식을 소화한 것으로, (경과적 역할의 레치타티보를 제외하면) '성악을 위한 협주곡'의 성격을 띤다.
  • 그 외의 다수 합창곡 및 성악곡들

여기에 없는 작품 목록에 대해서는 한국어 위키백과의 모차르트 작품 목록 페이지로.

8.7. 모차르트 작품 연주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로 꼽히는 지휘자로는 네빌 마리너, 카를 뵘 등이 있다. 특히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상당한 양의 레코딩을 남긴 카를 뵘 같은 경우는 아직도 대다수가 폐반되지 않아서 구하기도 쉬운 편.[136] 시대연주 관련해서는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크리스토퍼 호그우드등도 있다.

모차르트의 건반음악은 비교적 간단한 노트에도 불구하고 난이도 있기로 유명하다. 악보 읽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간단한 만큼 한 음도 헛되이 연주할 수 없기 때문. 모차르트 곡은 한 음 틀리면 티가 확 난다. 기계적으로까지 들릴 수 있는 음악을 감정을 살려서 연주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쇼팽 에튀드를 암보하는 음대 입시준비생에게 모차르트의 소품을 들이밀었더니 욕을 먹었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 믿거나 말거나가 문제가 아니다. 모차르트는 전공하는 입장에서 진짜 지옥같다. 음악계의 피카소

모차르트의 음악을 백조에 비유한 이들도 있다. 잔잔한 호수에 미끄러지듯이 수영하는 백조의 다리는 쉴틈없이 바둥바둥거리고 있다나? 이런 표현을 돌직구로 느끼고자 한다면 그 간단하다던 반짝반짝 작은 별 변주곡을 들어보면 되겠다.

피아노를 조금 쳐 본 사람은 알겠지만, 모차르트의 곡들은 옥타브가 많다거나 하지 않다. 손이 작아도 무리없이 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거장 음악가 중 한 명이다.[137]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의 악곡들이 연주하기 힘든 것은 트릴과 어마어마한 노트들 때문.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모차르트는 피아노를 연주할 때 항상 즐겁고 가볍게, 신나게 연주하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모차르트의 악곡들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그런 느낌이 필요하다. 마치 날아가듯이 연주해야 듣는 사람이 모차르트 곡의 진가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마냥 가볍고 빠르게 치다 보면 음이 모조리 빠지고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 모차르트의 악곡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느낌을 살려 제대로 치기 위해서는 수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건반을 둥글게, 정확히 누르는 타건법, 그리고 손가락과 손목에 무리한 힘을 싣지 않고 자유자재로 치는 법, 악보에 표현된 이음줄과 붙임줄[138]을 정확히 구사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모차르트 악곡은 거의 페달을 쓰지 않기 때문에 아기자기한 느낌이 들며 베토벤 이후의 악곡에서 느껴지는 페달을 사용한 장엄함은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이음줄 등의 악상 기호를 정확히 표현해야만 느낌을 살릴 수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수많은 연습과 훈련 위에 통통 튀는 느낌으로 연주하는 것이 모차르트 악곡 표현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다.

옥타브 이상으로 손가락을 벌릴 필요가 없어 손이 작아도 연주에 아무런 지장이 없고[139] 경쾌하고 산뜻하게 진행하면서도 동시에 내면의 깊이를 담아 연주해야 하기 때문인지, 모차르트의 스페셜리스트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여류 피아니스트들이 많으며, 모차르트 피아노 음악의 명반을 꼽을 때 주로 거론되는 음반도 여성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것들이다. 클라라 하스킬, 마리아 조앙 피레스, 우치다 미츠코 등이 이에 해당한다. 물론 프리드리히 굴다 등 남성 피아니스트들이 남긴 음반도 명반들이 많다.

이와 별도로 모차르트는 일부 파이프오르간 작품도 남겼는데, 환상곡 K.608 같은 경우는 오르간 전공자들 입장에서 난이도가 헬이라고 한다. 비록 대중적으론 알려지지 않은 곡이지만, 베토벤슈베르트대위법을 연구한적이 있는 음악사적으로 유서깊은 곡이다. 약간 바흐스러우면서도 모차르트스러운 오페라풍의 극적 효과나 멜로디 및 반음계주의를 살린 독창적인 곡이다.

연주자로서의 모차르트는 즉흥 연주를 많이 했다. 출판된 악보에 간단하게 표현된 노트는 그냥 기본적 멜로디를 표기한 것일 뿐, 본인이 연주할 때는 그것을 바탕으로 즉흥적으로 덧붙여서 야단법석일 정도로 화려한 애드리브를 펼쳤다고.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사람이 스승의 연주를 들리는 대로 적어놓은 종이 조각이 전해지는데, 음표가 엄청나게 많다. 불꽃 같은 애드리브를 시전한 모차르트나, 그걸 또 받아적은 제자나... 또한 모차르트의 악보는 고쳐쓴 흔적이 거의 없다. 한 마디로 머리 속에 있는걸 그대로 옮겼다는 뜻이다. 외계인 그래서 그 많은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는지도.

대중적이면서도 기억에 오래남는 선명한 멜로디를 기반으로 작곡한 곡에 조바뀜이 계속 일어나는 실험적인 시도도 많이 하는 등 청자에게는 굉장히 감정적이면서도 연주자에게는 보기보다 굉장히 어려운 기교를 요한다.

9. 매체에서의 등장

9.1. 영화

9.2. 게임

9.3. 애니메이션

10. 트리비아

스펀지에 따르면 거꾸로 봐도 연주되는 카논이 있다고 하며 이를 '역행 카논'이라고 한다. 참고로 바흐도 <음악의 헌정>에서 이 역행 카논을 사용한 적이 있다. 또한 주사위로도 작곡을 한 적이 있었는데, 먼저 악보를 만든 다음 주사위를 던져서 해당하는 악보를 정리해서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16개의 미뉴에트를 이런 형식으로 만들 경우 무려 1,518,999,334,332,964(!)가지가 가능하다고 한다.

유네스코에서는 뛰어난 음악적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모차르트 메달을 수여한다.

2016년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차지했다.

한국에서 빅데이터로 분석한 결과 모차르트의 영향력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 이어 2위로 나타났다.

모차르트 vs 인공지능 작곡 대결을 한 적이 있다.

언젠지는 잘 모르겠으나 약 2008년경에 누군가가 모차르트 문서에 '모차르트는 조선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출신의 음악가이다. 유년기 때에는 싸움을 좋아해 벌교에서 싸움 자랑 못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양반집 아들', '아버지 "금난새"와 어머니 "조수미" 사이에서 태어나' 등의 온갖 약빤 개드립으로 모차르트 문서에 반달리즘을 저질렀는데, 그 내용이 위키백과에서는 즉각 복원되었는데도 불구하고[140] 다음 검색에 일주일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었다. 다음 서버에서는 위키백과의 내용을 실시간으로 긁어가지 않고 일정 주기에 따라 긁어가는데, 하필이면 저렇게 문서가 반달당했을 때 긁어가서 저 모양이 된 거다.[141]

Falco의 Rock me Amadeus에서는 그의 일생이 간략하게 묘사됐는데, 영어 가사로 되어 있다.


  1. [1] 각 편마다 3악장, 4악장씩 이루어진 소나타, 협주곡, 교향곡 등을 보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곡들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2. [2] 다만 이 626편 중 일부는 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3. [3] 잘츠부르크는 현재 오스트리아의 한 지방인데, 모차르트 생전에는 엄밀히 말하면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리던 오스트리아 소속이 아니라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으로 독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모차르트가 프리랜서로 독립하기 전 잘츠부르크 대주교인 콜로레도 대주교를 상전으로 모셨던 것. 모차르트 사망하고 10여년이 지나서 나폴레옹이 침공하자 콜로레도 대주교는 영지를 포기했고 오스트리아가 잘츠부르크를 관할하게 되었다.
  4. [4] 독일계 성은 보통 그들 조상의 직업을 따서 만든 것으로, 조상 대대로 직업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면 현재 직업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독일에서 가장 대표적인 성 뮐러(Müller)는 풍차 돌리는 사람 내지 방앗간 주인 정도 되겠다.
  5. [5] 라틴식으로는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이다. 언변이 뛰어나고 설교를 잘 하여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요한 금구(金口)'라고도 부른다.
  6. [6] 호수 이름이면서 동시에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7. [7] 콘스탄체는 서명에서는 항상 독일식인 '콘스탄츠(Konstanz)'라고 표기했다.
  8. [8] 콘스탄체는 모차르트 서거 후 레퀴엠의 완성을 시작으로 적극적으로 모차르트의 작품을 정리, 출판했다. 이를 통해 콘스탄체와 자녀 등 모차르트 유가족들은 경제적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고, 또 모차르트의 악보, 편지를 비롯한 각종 자료가 잘 보존될 수 있었다.
  9. [9] 실제 발음은 표준 독일어 기준으로 모차트에 가까우며, 바이에른-오스트리아 사투리 발음으로는 모짜르트에 가깝다.
  10. [10] 백발 가발은 당시 정장의 일부였으며 바흐, 헨델, 하이든 등도 가발을 쓴 초상화가 있을 정도로 이들이 살았던 17~18세기 당시에는 가발을 쓰는 것이 유행이었다. 심지어 현대 영국 법원에서 아직 사용할 정도.
  11. [11] 여행 초반에는 누나 난네를도 어린 나이라는 프리미엄이 있었기 때문에 종종 소녀 음악가로 소개되었다.
  12. [12] 오늘날에는 음악보다 베일에 싸인 인생으로 더 유명한 음악가이다. 일단 출생년도가 불확실한데, 1735년설과 1740년설이 대립하고 있다가 최근에는 1720년생(..)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중세 이전의 인물도 아닌데 출생년도를 놓고 20년의 시차를 둔 논란이 생기는건 정말 드문 일이다. 출생지 또한 실레지아(Silesia), 알자스(Alsace), 뉘른베르크(Nürnberg), 마인츠(Mainz) 등 후보군이 다양하다. 그리고 생에 초반에는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가 1760년경부터 갑자기 파리에 나타나서 전도 유망한 젊은 음악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사망 이유도 범상치 않은데, 집에서 독버섯이 든 요리를 먹고 부인과 함께 급사한 것. 이 사망원인을 두고 각종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현존하는 그의 많지 않은 작품을 살펴보면 확실히 재능은 뛰어난 음악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3. [13] 나중에 모차르트가 알로이지아 베버에게 성악을 가르치거나 오페라 공연 연습때 가수들의 발성이나 가사처리를 일일이 지도할 수 있었던 것도 본인이 소시적에 뛰어난 가수였기 때문이었다.
  14. [14] 당시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자 나폴리 왕 페르디난트와 결혼했던 마리아 카롤리나도 이 때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15. [15] 이 La finta semplice는 아플리지오라는 자칭 극장흥행사에게 사기를 당한데다 극장마다 상연될 오페라들이 밀려 있어서 좀처럼 상연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레오폴트가 이 때 보낸 편지에 보면 비인의 다른 작곡가들이 이 오페라의 상연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고 적혀 있다. 그나마 이 오페라는 1년 후 잘츠부르크 궁정에서 조촐한 규모로 연주되었다.
  16. [16] 다만 이 수석연주자는 일종의 명예직이라서 월급은 없었다. 정식 월급은 콜로레도 주교가 부임한 후부터 지급되기 시작했다.
  17. [17] 난네를은 2차 여행이 끝난 후 음악교사가 되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나이도 이미 18살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소녀음악가라는 타이틀을 붙이기도 어려웠다.
  18. [18] 미츨리베첵은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체코(프라하)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작곡가이다. 현재는 아는 사람만 아는 인물이지만 당대에는 가장 인기있는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모차르트에게 이탈리아 오페라 작법을 본격적으로 가르쳐준 은인으로, 이탈리아 여행 이후에도 모차르트 부자는 이 미츨리베첵과 종종 연락을 주고 받았다. 미츨리베첵 본인도 외국 출신이었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외국인 입장에서 어떻게 이탈리아 오페라를 배워야 하는지 잘 알려주었다고 한다.
  19. [19] 마르티니 신부는 당시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음악 이론가이자 교육자였다. 모차르트 부자도 마르티니 신부를 만나기 위해 꽤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마르티니 신부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본 후 모차르트에게 수준 높은 대위법과 음악이론을 가르쳤다. 모차르트는 마르티니가 1784년 사망할 때까지 서신을 주고 받았다.
  20. [20] 특별한 정치적 이유는 없고 일종의 바티칸 신비주의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이 음악은 바로크 초기 작곡가인 알레그리의 작품으로 되어 있으나, 18세기 초에 토마소 바이(Tommaso Bai)라는 작곡가에 의해 한 차례 개작되었다.
  21. [21] 그나마 가사는 가메라의 스승 메타스타지오(Pietro Metastasio)가 대폭 다듬어서 많이 나아졌다. 가메라는 나중에 꽤 인정받는 대본작가가 되지만 루치오 실라처럼 초짜 시절에 쓴 대본들은 상당수가 이런 3류급 풍모를 자랑하고 있다.
  22. [22] 한편으로 이런 망한 대본이 나오는 것은 당시 오페라계를 장악하고 있던 가수들의 등쌀 때문이기도 했다. 그 시절 가수들은 자신이 부각되고 가창력을 과시하는데만 신경을 썼기 때문에 스토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모차르트의 초기 오페라가 현재 자주 연주되지 않는 이유도 이런 스토리상의 약점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
  23. [23] 페르디난트 대공은 1754년생으로 모차르트보다 겨우 2살 많았기 때문에 비슷한 연배의 소년 작곡가 모차르트에게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모차르트 부자에 대해 '거지처럼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고용주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쓸모없는 사람들'이라면서 고용에 반대했다. 이렇게 과격한 표현까지 써가면서 결사적으로 반대한 이유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레오폴트가 비인에서 아들의 오페라를 상연시켜달라거나 궁정음악가로 받아들여달라는 등의 각종 청원서를 황궁에 올리면서 유난스럽게 굴었던 것 때문에 모차르트 부자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774년에도 모차르트 부자는 비인 황궁에서 뇌물을 써가면서 마리아 테레지아를 직접 알현할 기회를 얻었는데, 이 자리에서 레오폴트는 아들을 당시 공석이었던 빈의 황립 극장감독으로 추천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24. [24] 이 모테트는 사실 소프라노가 아니라 카스트라토 가수였던 베난치오 라우찌니(Venanzio Rauzzini)를 위해 작곡된 것이다. 이 라우찌니는 루치오 실라에서 세실리오 역할을 맡아서 상당히 인상적인 가창력을 보여주었고 이 모테트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작곡된 것.
  25. [25] 현대적인 의미의 교향악단의 효시가 바로 이 만하임 교향악단이다. 바로 이 만하임 교향악단으로부터 바로크시대의 '합주'를 넘어서는 '교향악'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었으며 이 만하임 교향악단의 성립과 발전에 큰 역할을 했던 작곡가 요한 슈타미츠(Johann Stamitz, 1717-1757)는 교향곡 양식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참고로 하이든은 교향곡 양식의 완성자이다).
  26. [26] 베버라는 성을 보고 짐작한 사람도 있겠지만 이 알로이지아 베버 집안과 음악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 집안과는 친척관계이다. 알로이지아 베버의 부친과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부친은 나이 차이가 꽤 나는(알로이지아 부친이 손위) 이복형제였다.
  27. [27]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엘리자베스 비달같은 1급 소프라노조차도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할 정도로, 이래저래 부르기 굉장히 어려운 아리아이다. 아무리 나중에 명가수가 된 알로이지아지만 당시 제대로 데뷔도 하지 않은 17세의 소녀가 이런 아리아를 제대로 불렀을지는 의문이다.
  28. [28] 자금난에 시달렸던 모차르트가 치료비를 마련하지 못했던 탓에 그의 모친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결국 사망하였다.
  29. [29] 이런 상황이 제기된 것은 물론 연애감정 자체가 식은 탓도 있지만, 그보다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이 현실적으로 너무 맞지 않았던 탓도 있다. 알로이지아는 소녀 티를 완전히 벗기도 전에 이미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가수가 된 반면 모차르트는 일종의 몰락한 유망주로서 과거 신동의 칭호가 무색하게 빈털터리 신세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로이지아는 부친이 일찍 사망하여 사실상 소녀가장 신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좀더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1780년 알로이지아는 부유한 연극 배우이자 화가였던 조셉 랑게와 결혼하는데, 결혼 시에 남편으로부터 자신의 모친에 대한 경제적 원조를 약속받았다.
  30. [30] 원래 뮌헨의 영주는 전술한 막시밀리안 선제후(막시밀리안 3세)였는데 그가 1777년 말에 사망하면서 후임을 놓고 바바리아 계승전쟁이 벌어졌다. 이후 지저분한 협상 끝에 1779년 칼 테오도르가 후임으로 결정되었다.
  31. [31] 전술했다시피 당시 오페라 세리아는 천편일률적인 스토리에 가수들의 가창 경연대회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 이도메네오는 '극과 음악의 일치'라는 선배 작곡가 글루크의 오페라철학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진정한 극음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만 이 오페라를 공연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당시의 관행에 젖어 있던 가수들이 곡을 멋대로 바꿔 부르거나 배역의 비중을 높여달라는 등의 무리한 요구를 해댔기 때문에 이들을 달래느라 엄청나게 애를 먹었다.
  32. [32] 당시 잘츠부르크에는 요제프 하이든의 친동생 미하엘 하이든이 있었기 때문에, 콜로레도 대주교는 건방지고 다루기 힘들었던 모차르트의 부재를 딱히 아쉬워하지 않았다.
  33. [33] 미사 또는 예배음악, 장례음악 등 담당
  34. [34] 직업이 협소하다는 것은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좁게 정해져 있었다는 얘기다. 그 범위를 벗어나면 심하게는 처벌 또는 사형당할 수도 있었으나, 모두가 알다시피 개혁군주의 하나로 통하는 요제프 2세의 정책의 영향과 함께 그는 이 모두를 초월하는 음악을 남겼다.
  35. [35] 헨델은 1714년 후원자였던 앤 여왕이 사망하자 오페라 극장의 창립에 직접 참여했으며, 영국에서 오페라가 몰락한 1730년대 이후 본격 프리랜서 작곡가로 전향해서 다수의 오라토리오와 기악곡을 작곡했다.
  36. [36] 다만 밑에 나와 있다시피 돈 관리를 잘못해서 그 많은 돈을 다 탕진하기는 했다.
  37. [37] 그래서 하숙집에서 두 집 정도 떨어진 곳으로 숙소를 옮겼다.
  38. [38] 심지어 세실리아는 모차르트에게 자기 딸과 약혼을 해놓고도 결혼하려고 하지 않는다면서 1년에 300플로린을 딸에게 지급하라는 소송을 걸겠다는 되도 않는 협박까지 했다. 모차르트는 이런 속물근성에 질린 탓인지 결혼 후에도 장모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39. [39] 우리말로 번역하면 국립"노랫말"극장
  40. [40] 연구자들은 이 오페라의 여주인공의 이름이 콘스탄체이며 역경을 이겨내고 사랑을 이루는 내용 등을 볼 때, 자신의 처지를 투영한 작품으로 파악하고 있다. 게다가 콘스탄체는 자신의 옛 연인이었던 알로이지아 베버를 염두에 두고 만든 배역이니, 모차르트에게는 더더욱 이 작품이 특별했을 것이다.
  41. [41]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모차르트는 바흐나 헨델의 몇몇 작품을 편곡하거나 고전파 수법으로 재구성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바흐의 5개의 푸가 편곡(K.404) 이나 헨델의 오라토리오 아시스와 갈라테아의 편곡(K.566)이 있다.
  42. [42] 두 오페라의 대본작가가 쉬카네더(Emanuel Schikaneder)인데 이 분도 프리메이슨 소속이다. 두 작품 중 현자의 돌은 모차르트와 다른 4명의 작곡가의 공동작품인데 상연기록만 남아 있고 악보가 분실되어 버렸기 때문에 실체를 알 수 없었으나, 1996년에 음악학자 데이비드 버치(David Buch)가 이 작품의 모차르트의 자필 사본을 발견하여 현재는 연주 가능한 수준의 악보가 나와있다.
  43. [43] 전술한 클레멘티와 피아노포르테 연주대결에서도 승리하여, 한방에 잘츠부르크 시절 연봉 수준의 상금을 받기도 했다.
  44. [44] 다만 그가 잘츠부르크에서 받았던 연 450 플로린의 연봉은 정말 심하게 박봉이긴 했다.
  45. [45] 다 폰테는 모차르트 오페라의 빛나는 조연이었다. 모차르트의 이태리어로 된 또다른 걸작 오페라 돈 지오반니와 코지판 투테도 모두 다 폰테의 대본으로 바탕으로 작곡된 것이다.
  46. [46] 이 돈 지오반니 대본의 주인공인 바람둥이 남자의 실존 모델은 바로 다 폰테 본인이었다. 다 폰테는 당시 최고의 난봉꾼으로 알려진 카사노바 못지 않게 여성 편력으로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다. 한편 카사노바가 모차르트를 직접 찾아와 돈 지오반니에 자신의 일화를 반영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적이 있었는데 모차르트는 가차없이 거절했다.
  47. [47] 이후 누나 란네를과도 다시 재회하지 못했다. 다만 모차르트가 사망한 후 한참 뒤인 1820년에 콘스탄체가 잘츠부르크에서 난네를을 만났으며 이후 콘스탄체와 그녀의 3자매들이 모두 잘츠부르크에서 말년을 보냈다.
  48. [48] 황실이 이런 제안을 한 이유는 본격적으로 궁중음악가로 활용하려는 목적보다 모차르트라는 유명 작곡가에게 일종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빈에 계속 머물게 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황실에는 이미 전속 음악가가 차고 넘쳤다). 황실에서 모차르트에게 요구한 것은 황실의 축제나 무도회 때 연주될 춤곡을 작곡하라는 정도가 전부였기 때문에 모차르트는 계속 음악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 지원금은 요세프 2세가 1790년 사망하면서 중단되는데, 이 때 모차르트와 당시 비인 황실의 악장이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갈등이 본격화된다. 모차르트는 살리에리가 자신을 시기해서 지원금을 중단시켰다고 주장했는데, 자세한 것은 살리에리 항목 참조
  49. [49] 여행 덕분인지는 사실 불확실하다.
  50. [50] 당시 모차르트는 <마술피리>의 작곡 주문을 받은 상태에서 진혼곡을 작곡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이런 와중에 2달도 남지 않은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에 맞춰 상연할 오페라 주문을 또 받았다. 제아무리 천재라도 이런 강행군에서는 몸이 견뎌낼 재간이 없다.
  51. [51] 발제그 백작은 이 작품을 자신이 쓴 것으로 사칭하여 발표하려고 했다. 거액을 준 이유도 자신의 의도를 작곡가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쥐스마이어가 완성한 악보를 필사하여 1793년 12월 자신의 지휘로 연주를 했다고 하는데, 이 때 자신의 작품으로 사칭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 곡의 초연 자체는 1793년 1월에 이미 이루어졌다.
  52. [52] 많은 학자들은 쥐스마이어가 모차르트의 스케치나 모차르트가 생전에 레퀴엠의 작곡을 위해 연주하던 것을 듣고 기억하여 이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레퀴엠의 끝곡인 Communio는 곡의 첫 부분인 Introitus와 Kyrie의 선율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모차르트의 지시라는 것이 정설이다. 음악적으로 보면 라크리모사 이후 쥐스마이어가 완성한 부분은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한 부분에 비해 수준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다른 작곡가나 연주자들에 의한 수정보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아직도 쥐스마이어판이 가장 많이 연주된다. 더 자세한 것은 따로 진혼곡 항목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53. [53] What a picture of a better world you have given us, Mozart! A light, bright, fine day this will remain throughout my whole life. As from afar, the magic notes of Mozart's music still gently haunts me. (Franz Schubert)
  54. [54] It is a real pleasure to see music so bright and spontaneous expressed with corresponding ease and grace. If we cannot write with the beauty of Mozart, let us at least try to write with his purity. (Johannes Brahms)
  55. [55] Mozart encompasses the entire domain of musical creation, but I've got only the keyboard in my poor head. (Chopin)
  56. [56] Mozart is the greatest composer of all. Beethoven created his music, but the music of Mozart is of such purity and beauty that one feels he merely found it-that it has always existed as part of the inner beauty of the universe waiting to be revealed. (Albert Einstein), 아인슈타인의 인용구를 축약하였다.
  57. [57] Mozart shows a creative power of such magnitude that one can virtually say that he tossed out of himself one great masterpiece after another. (Claudio Arrau)
  58. [58] Mozart's music is particularly difficult to perform. His admirable clarity exacts absolute cleanness: the slightest mistake in it stands out like black on white. It is music in which all the notes must be heard. (Gabriel Faure)
  59. [59] The most tremendous genius raised Mozart above all masters, in all centuries and in all the arts. (Richard Wagner)
  60. [60] Before Mozart, all ambition turns to despair. (Charles Gounod)
  61. [61] Mozart is the most inaccessible of the great masters. (Artur Schnabel)
  62. [62] Mozart's music is so beautiful as to entice angels down to earth. (Franz Alexander von Kleist)
  63. [63] Together with the puzzle, Mozart gives you the solution. (Ferruccio Busoni)
  64. [64] In Bach, Beethoven and Wagner we admire principally the depth and energy of the human mind; in Mozart, the divine instinct. (Edvard Grieg)
  65. [65] Beethoven I take twice a week, Haydn four times, and Mozart every day! (Rossini)
  66. [66] Does it not seem as if Mozart's works become fresher and fresher the oftener we hear them? (Robert Schumann)
  67. [67] Mozart is the musical Christ. Mozart is the highest, the culminating point that beauty has attained in the sphere of music. (Tchaikovsky)
  68. [68] Mozart is happiness before it has gotten defined. (Arthur Miller)
  69. [69] 공교롭게도 그녀의 딸 마리안네도 찰츠부르크 토박이로 살았고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후술되는 내용 참조
  70. [70] 1762-1842. 장수한 탓에 사진의 발명이 이뤄질 때까지 살아남았다. 모차르트는 초상화의 시대에서 살았지만... 위의 사진은 1840년에 촬영된 것. 다만 현재 원 안의 인물이 콘스탄체가 맞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71. [71] 뮤지컬 모차르트!에서도 콘스탄체는 무식하고 돈만 아는 여자로 나온다.
  72. [72] 심지어 모차르트의 제자 쥐스마이어와 모차르트의 막내아들의 이름이 프란츠 사버로 똑같다는 이유로, 이 막내아들이 사실은 쥐스마이어의 아들이라는 정신나간 주장도 있었다. 프란츠 사버 모차르트는 유전자 감식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닮았다.
  73. [73] 두 사람을 위해 모차르트가 작곡한 아리아나 오페라의 배역을 보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지닌 가수들이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장녀 요제파는 마술피리 초연에서 '밤의 여왕' 배역을 맡아 그 유명한 아리아 'Der Hölle Rache'를 부르기도 했다.
  74. [74] 다만 알로이지아가 초연 때 실제로 이 배역을 맡았는지는 불확실하다.
  75. [75] 애초에 당시에 벽난로를 갖춘 집 자체가 상당히 비쌌다. 땔감이 없었던 건 일시적으로 돈이 부족했던 상황이었을 뿐이지, 계속 그렇게 살았던 게 절대 아니다. 또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춤을 출 생각을 한다는 것도 진짜 가난한 사람이었다면 생각해 내기 힘든 아이디어이다.
  76. [76] 모차르트 부부는 집안일을 해줄 사람을 고용했기 때문에 이런 귀족스러운 생활이 가능했다. 심지어 이 부부는 요리사까지 고용했다.
  77. [77] 재혼 후에도 콘스탄체는 콘스탄체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다.
  78. [78] 묘비에 Gatte der Witwe Mozart(모차르트 부인의 남편)라고 씌어있는데 이를 보면 그가 얼마나 모차르트에 열중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79. [79] 정식 이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1795년 별거한 후 다시는 남편과 만나지 않았다. 한편 요셉 랑어는 1800년경부터 다른 여자와 동거하면서 세 명의 자식을 낳았으며 1831년 사망했다.
  80. [80] 유일한 혈육이었던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두 아들은 조피가 사망하기 전에 사망했다.
  81. [81] 사실 니센은 모차르트가 주고 받은 편지들을 정리하면서, 정도가 심한 내용들은 살짝 편집하거나 점잖은 표현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런데도 수준이 저정도;;;
  82. [82] 난네를은 어렸을 때의 애칭이며, 성인이 된 후에는 마리아 안나 또는 마리안네로 불렀다. 이 항목에도 이런 점을 반영하였다.
  83. [83] 모차르트와 교환한 서신에 보면 나름 작곡도 한 것 같지만, 현재까지 전해지는 그녀의 작품은 없다.
  84. [84]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모차르트의 아들이 이 사람일 것이다.
  85. [85] 똑같은 논리면 전투력 강화에 집착하고 부하들의 군율위반엔 웬만해서는 참형으로 대처했던 이순신 장군한테마저 아스퍼거 증후군 설을 뒤집어씌울 수 있다.
  86. [86] 모차르트가 클레멘티를 처음 만났을 때 클레멘티는 이미 전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는 연상의 천재 피아니스트였으며, 훗날 다양한 음악 교수법을 고안 및 편찬해 음악교육사 쪽으로도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런 동업자이자 인생의 선배를 그냥 마음에 안든다고 요절하기 전까지 평생토록 씹어댄것.(...) 아이러니하게도 클레멘티는 모차르트를 퍽 마음에 들어하기도 했다.
  87. [87] 클레멘티는 훗날 영국으로 넘어가 작곡, 지휘, 교육에 힘썼으며 훗날 이름난 제자들을 다수 배출한다. 혹자는 클레멘티 그거 이름 같은거 들어본적 없는데 완전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제자 중에는 존 필드와 루트비히 베르거가 있다. 그렇다, 각각 쇼팽멘델스존을 가르친 인물들이다.
  88. [88] 반대로 베토벤도 재능으로 따지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작곡가이다. 단지 모차르트처럼 그 재능이 유년기부터 폭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동이라는 이미지가 약할 뿐이다.
  89. [89] ORIGINALS로도 나온 적이 있는 리히테르의 연주가 들어갔다.
  90. [90] 흔히 알려진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어 이름이고, 원래 오스트리아인이므로 본명은 독일어로 '마리아 안토니아'였다.
  91. [91] 귀천상혼의 금지 자체는 성문법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고, 가톨릭 교리상으로도 문제될 것이 없지만, '상식적으로' 엄청난 조롱과 치욕을 각오해야 했다.
  92. [92] 문서 링크
  93. [93] 이게 평균율에서처럼 f2과 f1가 반음 차이라면 f2/f1=2^(1/12)인 관계가 아닐 수도 있다.
  94. [94] 아마 벌 자체보다도 이 과정에서 오갔을 지저분하고 짓궂은 농담들에 화가 났을 것이다.
  95. [95] Ignaz Moscheles,1794~1870. 그도 음악가로 살아있을 때 꽤 인정받긴 했지만, 지금은 듣보잡이 되어버렸다.
  96. [96] 1795~1864. 제자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비서이다. 그도 음악가이긴 했지만. 베토벤 연구가인 레이너드 솔로몬이나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는 쉰들러를 베토벤이 왜곡되도록 연구를 가로막은 악당이라고 비난했다. 자세한 건 루트비히 판 베토벤 문서로.
  97. [97] 대충 번역하자면, 심근염, 심내막염, 다발관절염, 경계성홍반, 무도증을 동반한 급성 류마티스열. 류마티스열은 아직도 위생이 좋지 않은 개발도상국에선 흔한 질환이고 물론 이 시기 오스트리아에서도 보편적인 질환이었다.
  98. [98] 미하엘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20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꽤 친한 사이였으며, 모차르트는 빈에 정착한 이후에도 자주 미하엘 하이든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종종 악보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래서 악보 정리과정에서 미하엘 하이든의 작품이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K.444의 짧은 교향곡은 미하엘 하이든의 곡에 모차르트가 짧은 서주를 붙인 곡이다.
  99. [99] 그래서 베토벤은 자신의 유일한 오페라인 피델리오를 작곡할 때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열심히 연구하였다.
  100. [100] 가곡 분야 한정으로 슈베르트 역시 천부적인 가사처리 능력을 보여준다. 다만 모차르트와는 방향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두 작곡가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기는 어렵다.
  101. [101] 2악장은 과거 코레일, 대구도시철도공사 전동차에서 종착역 안내방송으로 쓰인 적이 있다.
  102. [102] 모차르트의 교향곡 41곡 중 40번과 더불어 둘 뿐인 단조 조성의 작품이다.
  103. [103] 교향곡 37번은 미하엘 하이든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104. [104] 교향곡 35번과 관련이 있다.
  105. [105] 관악기와 더블베이스를 위한 곡으로 연주시간이 50분에 달하는 대작이다. 비인 초기시절 작곡되었으며 모차르트의 관악합주곡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106. [106] 그의 기악곡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주로 현악 오케스트라로 연주되지만 종종 현악 4중주나 5중주로 연주되기도 한다. 1악장은 1997년 경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 열차의 종착역 안내방송에 쓰인 적이 있으며, 3악장은 코레일, 대구도시철도공사 소속 지하철 전동차에서 환승역 안내방송으로 쓰인 적이 있었다.
  107. [107] 바이올린 2, 비올라 2, 더블베이스, 호른 2, 오보에
  108. [108] 바이올린 2, 비올라, 더블베이스, 호른 2. '미뉴에트' 가 특히 유명하다.
  109. [109] 서주에 피아노가 등장하는 최초의 협주곡으로 피아노 협주곡 역사에서 중요한 곡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모차르트 초기의 기악곡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이다. 지금껏 헌정된 피아니스트가 주놈이라고 알려졌지만 음악학자인 마이클 로렌츠는 그녀가 '빅투아르 제나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모차르트의 친한 친구이자 유명한 무용가였던 장 조르주 노베르의 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110. [110] 3악장의 도입부가 자기가 시장에서 산 찌르레기의 소리에 착안하여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1. [111] 이 곡은 베토벤이 젊은시절 모차르트 작품중 가장 좋아해서 자주 연주한 곡이였으며, 베토벤이 작곡한 이 곡의 카덴차는 걸작으로 남아 현재도 가장 많이 연주되는 버전이다.
  112. [112] 2악장이 특히 잘 알려져 있다.
  113. [113] 이탈리아 피겨 스케이터 카롤리나 코스트너의 2011-2012 시즌 프리 스케이팅곡
  114. [114] 2번째 악장은 모차르트의 사후에 그의 제자인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에 의해 1792년에 완성되었다.
  115. [115] 아마추어 연주자를 위해 쓴 곡으로, 사뭇 다른 두 악기의 조화는 매우 독창적이다. 하지만 정작 모차르트는 플루트를 싫어했다. 왜 싫어했는지는 플루트 항목으로.
  116. [116] 플루트 곡을 의뢰받은 모차르트가 자신의 C장조 오보에 협주곡을 D장조로 조옮김하여 플루트 협주곡으로 편곡하여 준 경우.
  117. [117] 플루트 협주곡으로 알려져 왔지만, 원래는 거의 확실하게 오보에 협주곡이다.
  118. [118] 모차르트 말년의 작품 중의 하나로, 모차르트가 클라리넷을 위해 작곡한 3곡 중 하나다. 특히 2악장은 모차르트 작품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곡중 한 곡.
  119. [119] 교향 협주곡
  120. [120] 2악장의 주선율이 홍난파의 봉선화랑 유사하다
  121. [121] 실내악의 대가 모차르트의 면모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작품군이 바로 이 6곡의 하이든 4중주이다. 생애 항목에 있듯이 모차르트는 친구 쯔비텐이 보유한 바로크 음악가들의 악보를 보면서 대위법의 놀라운 음악적 효과와 가치를 깨달았는데, 이 깨달음의 성과가 이 하이든 4중주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이든에게 헌정되었기 때문에 '하이든 4중주'라는 이름이 붙긴 했는데, 실제로는 이 6곡의 4중주를 통해 모차르트는 선배 하이든과는 본격적으로 다른 음악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따라서 작품성을 가지고 이름을 붙이자면 오히려 '탈(脫)하이든 4중주'라고 붙이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122. [122] 이 프러시안 4중주는 첼로 연주에 일가견이 있었던 프러시아의 왕 빌헬름 프리드리히 2세를 위해 작곡된 덕분에 첼로의 역할이 커졌고 음역도 넓게 쓰고 있기 때문에 첼로파트 연주자의 역량이 상당히 중요하다. 하이든 4중주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작품성은 더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123. [123] 모차르트의 현악 5중주 6곡은 모두 현악 4중주에 비올라가 추가된 구성이며 추가된 제 2비올라의 비중이 높아서 비올라 5중주라는 표현도 종종 사용한다. 모차르트의 현악 5중주는 현악 4중주 못지 않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후기에 작곡된 5, 6번 현악 5중주는 모차르트 실내악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현악 4중주와는 사뭇 다른 풍성한 음향을 느낄 수 있다.
  124. [124] 현존하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3중주 가운데 완성된 곡은 6곡이며 기타 미완성 또는 일부만 남아 있는 작품이 몇 곡 있다. 모차르트의 실내악 가운데 피아노 3중주는 현악 4중주나 5중주 등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선배 하이든의 피아노 3중주에 비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진일보했다는 점에서 음악적으로는 나름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125. [125] 다만 잘츠부르크 시절에 씌어진 피아노 3중주 K. 254는 바이올린은 어느 정도 독립적인 위치를 갖고 있지만 첼로가 피아노의 저음부(왼손부)를 보강해주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어서 아직 하이든의 3중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빈 시절에 씌어진 K. 496 3중주부터 본격적으로 모차르트의 진가가 드러난다.
  126. [126] 현악 파트는 오보에를 보조하는 역할에 충실하기 때문에 일종의 오보에 소협주곡에 가깝다.
  127. [127] 모차르트의 디베르티멘토는 현악 3중주 형태의 구성부터 10개의 관악기를 위한 합주곡까지 작품마다 악기 구성이 매우 다양하다. 악기뿐만 아니라 악장 구성도 3~6 악장 형태로 다양하다.
  128. [128] 오보에, 잉글리시호른, 클라리넷, 호른, 바순 각 2대
  129. [129] 모차르트의 실내악 정점을 이루는 명작이다.
  130. [130] 3악장은 494이고,1,2악장은 533이다. 3악장은 처음에 따로 짓다가 나중에 1~2악장을 작곡하고 이 소나타에 합친 것.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중 쾨헬 번호가 2개붙 은 유일한 곡이다.
  131. [131] 도~미↗솔↘시도레도로 유명한 곡. 다른 곡들에 비해 규모가 작고 기교적으로도 어렵지 않기 때문에 소나티네라고 봐도 무리가 없으며 실제로 소나티네 앨범에도 수록되어 있는 곡이다. 이 곡의 1악장은 터키 행진곡과 함께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곡으로 손꼽힌다.
  132. [132] 이 곡은 모차르트의 다른 작품을 편곡한 곡을 엮어 묶은 작품으로, 1악장은 바이올린 소나타 36번 F장조 K.547의 2악장을 피아노 독주 버전으로 편곡하였고, 2악장은 피아노 소나타 16번 C장조 K.545의 3악장을 거의 그대로 가져와 F장조로 이조시켰다.
  133. [133] 모차르트가 당대의 여성 피아니스트 요제파 바르바라 아우에른함머(Josepha Barbara Auernhammer)와 연주하기 위해 작곡한 것으로, 흔히 "모차르트 곡을 들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라는 통설의 발단이 된 곡이다.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노다 메구미치아키 신이치가 함께 연주하는 피아노곡으로 알려졌다.
  134. [134] 판본에 따라서 K.394는 '환상곡과 푸가'라고도 한다
  135. [135] 연주회 레퍼토리에 자주 오르는 유명한 작품으로 소품이지만 매우 훌륭한 작품성을 갖고 있다.
  136. [136]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사용된 음악은 네빌 마리너 지휘인데 비해 시중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모차르트 음반은 대부분 카를 뵘 지휘곡이다. 동일한 곡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전체적인 뉘앙스가 꽤 다른 편.
  137. [137] 베토벤, 쇼팽, 나아가 라흐마니노프를 치다 보면 손이 작은 연주가들은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리고 프란츠 리스트에 이르러서는 통곡을 하게 된다. 도에서 다음 미에 겹화음 옥타브를 누르라고? 난 여기서 빠져나가야겠어
  138. [138] 의외로 모차르트 악곡은 이 이음줄 표현이 정말 중요하다. 이음줄 하나는 곡의 느낌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친다.
  139. [139] 모차르트 작품이 요구하는 터치 특성상, 오히려 손이 작고 손가락이 가늘어야 미스터치가 덜 나고 좀 더 표현이 쉽다는 의견도 많다.
  140. [140] 복원되는 데 걸린 시간은 1분도 되지 않았다.
  141. [141] 실시간으로 문서를 긁어가면 수정은 바로바로 되지만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쓴다. 엔하위키 미러도 비슷한 방식이라서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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