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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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中國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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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서하

오대십국시대

북송

남송

1. 개요
2. 역사
2.1. 관료제의 발달과 중앙집권화 성공, 하지만 허약한 군사력
2.2. 결과적으로 실패한 외교 정책과 2차례의 멸망
3. 왕안석의 신법(新法)
4. 풍성한 경제력과 문화
5. 평가
6. 고려와의 관계
6.1. 북송의 몰락
6.2. 남송 시대 - 외교 단절
6.3. 새로운 동맹 - 남송의 몰락
7. 역대 황제
8. 계보
9. 추존 황제
10. 여담

1. 개요

北宋. 960년 오대십국시대 후주(後周)의 무신 조광윤이 후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한 중국의 한족 통일 왕조. 수도는 개봉(카이펑)이었다. 보통 북송은 960~1127년까지 존속한 167년의 역사를 말하나, 이후 남송도 1127~1279년까지 152년을 더 존속했으므로 송이라 하면 보통 960~1279년까지 총 319년간 존속했다고 평가받는다.

2. 역사

송나라는 육조시대 유송(공교롭게도 이름이 똑같이 宋이다) 이래로 계속되던 전 황제에게 선양을 받고 통수 크리로 그 일족을 멸족하던 관행을 중지하고, 후주의 황족인 시씨 일족을 보전하고[1] 우대하면서 그럭저럭 인도적으로 건국되었다. 실제 송태조 조광윤의 유언에 따라 송나라 존속 기간 동안 시씨 가문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남송 멸망시 다수의 시씨가 송나라와 마지막을 함께 하였다. 이때 시씨들을 쉽게 죽이지 않겠다는 증거로 내려준 것이 바로 단서철권이다. 애초에 후주 자체가 단명 왕조이기도 했지만, 후한의 유지원 - 후주 태조 곽위 - 후주 세종 시영처럼 양자제로 대를 이어왔던 상황이었다. 곽위에 비해서도 매우 온건한 계승을 한 셈이다.

송태조는 스스로 장수 시절부터 거란족을 물리치고 후주의 북조 전역을 완수하는 제1공신이었으나, 광주남한과 남부 최대의 국가였던 남당을 멸망시키는데 그치고 자기 대에 통일을 완수하진 못했다. 2대 황제는 조광윤의 동생인 송태종 조광의.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번에도 송 태조 조광윤의 의지로 조광의가 선양 받았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조광의가 방에 들어간 다음 갑자기 조광윤이 급사하고 다음 황제가 되는 식의 기록으로 볼 때,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이 자체가 조광의를 디스하는 이들의 주장이란 말도 있다. 어쨌든 송태종은 오월북한을 멸망시키고 통일을 완수한다.

하지만 이후부턴 약한 군사력이 발목을 잡게 되는데, 태조 조광윤과 태종 조광의 시절엔 이들이 무인 군벌 출신이기도 해서 나쁘지 않은 군사력을 선보였으나, 태종의 아들 송진종은 심성이 여린 군주로 거란(요나라)의 침략에 우물쭈물하다 굴욕적인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게 된다. 하지만 함평지치라 해서 송 번영기를 연 황제였던건 함정 이 조약은 거란이 송을 으로 모시는 대신에 송이 요에게 비단 20만필과 10만냥 등을 바치는 내용으로, 한마디로 돈 뜯긴 대신(...) 자존심은 그나마 지킨 요상한 조약이었다. 심지어 송은 요를 물리쳤었다.[2]그거 완전 친구비잖아(...)

이후엔 요와 금에게 눌려서 찍소리도 못하던 서하에게조차 여러 전투에서 참패한다. 서하 건국 초기의 혼란한 시절에 송나라는 자기들이 황제국임을 내세워 이제 막 건국한 서하에 자주 찝쩍댔으나 오히려 빡친 서하의 역공을 받고 호수천이라는 곳에서 크게 패한다(...). 덕분에 서하에게 공물을 바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사실 지휘관인 범중엄이랑 한기가 군대를 전혀 모르는 문관 출신인데다 작전에서 장군들의 말을 안듣고 제멋대로 하니 당연히 발릴 수 밖에 없었다. ???: 나는 문관인데도 이겼는데 뭔 개소리냐?[3]물론 송 초기의 경제력은 후술되어있듯 가히 역대급이라 서하와 금에 바치는 세폐가 큰 부담은 아니었지만, 이후 송의 재정이 나빠지자 문제가 된다.

그러다 1127년에는 정강의 변으로 송휘종송흠종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포로가 되는 충공깽한 치욕을 당하고, 남은 세력은 항주로 천도하게 되는데 이후의 시기를 남송, 그 전은 북송이라 일컫는다. 참고로 이 사건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송의 외교 병크로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있었던게, 송은 요를 제압하고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금과 결탁했는데, 이후 승리 좀 했다고 기분에 취해서 금나라까지 뒤통수 치려다 되레 털린 것이다.(...)

2.1. 관료제의 발달과 중앙집권화 성공, 하지만 허약한 군사력

북송의 수도인 개봉을 그린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 부분

조광윤은 당나라 멸망 후 거의 60년에 가까운 전란을 수습하고, 이 혼란이 나라 각지에 군벌(절도사)들이 할거하여 생긴 것이라는 판단 아래 모든 절도사를 해체하고 전군을 황제의 아래에 두며 금군을 설치하는 등 중앙집권제를 완성하였고, 과거제로 관료를 발탁해 그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강력한 군주제를 완성한다. 원래 과거 제도가 시행된 시기는 수나라 때지만, 진정한 관료 발탁의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한 때는 송나라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뛰어난 관료제와 중앙집권화 성공, 풍성한 경제력, 넓은 국토, 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송나라의 군사력은 이상하리만큼 너무나 허약했다. 그렇다고 송이 국방력에 마냥 소홀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라, 송나라 후기의 병력수는 무려 126만명에 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전투에서 송군이 이긴 횟수는 그닥 많지 않았고, 특히 북방 민족과의 전투는 상당수가 개박살이 났다. 북방 유목 민족들이 너무 강했던건 아닐까[* 실제 요나라발해도 멸망시켰다. 송만 털린게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가 생긴 원인 중 하나는 송 조정이 절도사들의 반란으로 멸망한 당을 보고 배운 점이 있는지 반란을 꽤나 두려워하여, 무관 대신 전투 경험이 없고 군대를 잘모르는 문관을 사령관으로 임명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한 몫 했다. 지휘관과 병사들이 서로를 잘 모르는데다 의견도 일치되지 않아 군대의 단합이 도무지 안되었던 것. 한 예가 바로 동관이다. 반면 한·당은 사령관을 무관으로 임명하거나 군대를 잘 아는 문관을 임명하였기에(이세적, 이정 등) 흉노, 돌궐과의 전쟁에서 충분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

송군이 오합지졸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극단적인 사례를 하나 들자면, 송 지방관 중 한 명이 무슨 배짱인지 공을 세우겠답시고 엄하게도 지나가던 금 사신을 공격했는데, 이때 송의 보병 2,000명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병/궁기병이긴 했지만) 금 호위무사 17명에게 가볍게 발렸고, 금의 사신은 제 갈 길 갔다(...). 이때 금 무사 17명은 중앙에 7명, 양익에 5명씩 배치하는 진까지 짰다. 송 보병들도 제대로 훈련이 되었으면 싸울 수 있었을텐데, 훈련도 제대로 안되어있을 뿐더러 목숨 아까우니 서로 앞에 나가려 하지 않다가 오히려 겁을 먹고 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활만 있었어도 충분히 잡지 않나,창병 훈련보다 궁병훈련이 훨씬 더 힘들다 더욱이 상대가 말을 타고 다니는 기마병인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다만 군사비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히 높았는데 정1품 재상의 식비 보조금은 매월 300관인데 장군인 정2품 절도사의 식비 보조금은 400관이었다. 장군들의 녹봉도 등급에 따라 매월 3,000관 내지 1만 관을 받았다. 군인들의 정치, 사회적인 지위가 낮은 대신에 많은 봉급이라는 반대 급부를 주었던 것이다. 송태조가 휘하 번진 절도사들에게 병권을 회수하는 대신에 많은 재산을 줘서 고향에서 행복하게 살게 한 것과 비슷한 이치. 하지만 좋은 은 못으로 쓰지 않고, 훌륭한 인재는 군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라는 말까지 있었고, 이 때문에 질 나쁜 범죄자들이 주로 병사가 되었기에 규율이 그닥 서지 않았다. 그 외 송의 군사력이 약했던 원인 몇가지를 거론하자면,

  • 송군은 보병 위주였다.[4]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던 것이 목초지를 당 말기랑 오대 십국 시대 때 유목 민족들한테 빼앗기다보니 목초지의 부족이 심각해져 기병을 양성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니 보병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기병 위주인 여진족이나 거란족 같은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훨씬 불리한 요인이 되었다.

다만 보병이 기병에 비해 야전에서 흔히 불리하다고 하지만 편견도 있는 것이 평지에서의 대규모 야전은 보병대가 장창 등으로 진형을 구성하고 버티기 시작하면 기병대도 손을 쓰기 어렵다.[5] 또한 궁병이나 쇠뇌로 사격하면 충분히 기병을 상대할 수 있다. 나당전쟁 당시 기병이 주축이던 군을 상대하던 신라군의 주력 병력은 장창병이었으며 나당 전쟁에 승리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들을 이용한 전술이다. 하지만 송나라처럼 지나치게 보병 위주로 전력을 짜면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기동력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보병이 대응을 잘해서 만만치 않다면 기병대는 그 진형을 우회해서 보병대의 거점을 타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보병이 대응을 위해 이동하여 도착할 무렵 기병대는 이미 상황을 끝내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렇게 거점이 당하면 보병대는 버틸 수가 없다. 거기다 송나라는 일단 영토가 크고 그리 쓸만한 자연적인 장애물들도 없다 보니 많이 불리했다. 그리고 대륙적 민족성(?) 때문에 산성에 짱 박히는 것을 선호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멀쩡히 잘 싸우던 장군을 불러다 숙청하기도 했다. 주전론자였던 악비를 처형한 게 바로 그 예다.이렇게 말이 부족한 문제점을 막기 위해 왕안석은 보마법을 시행했다. 호구마다 말을 기르게 하여 농사 짓는데 이용하고 전쟁시 말을 기병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들어보면 그럴 듯 한데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왜냐하면 목초지가 심각하게 부족해서 말을 기를 여건이 안되는데다 농사 짓는 말과 기병의 말은 사용하는 근육이 다르다. 따라서 평생 농사 짓던 말로 전쟁에 나서면 나가는 족족 발리기 십상이다. 평야가 넓다 하지만 그만큼 사람이랑 다른 가축도 많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하물며 요, 금, 원의 기병 앞에선(...) 게다가 군마를 먹이는 것은 일반 말을 먹이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병량 품목에 마초가 괜히 끼어있는게 아니다. 애초에 먹이도 다르고, 심지어 군마에 적합한 품종과 농업에 적합한 품종이 다르다. 농업용 말은 덩치가 크고 소와 비슷한 체형을 가졌다. 빨리 달리는 데에는 적합치 않다.
  • 총 병력 중 절반 가량인 60만명을 수도 방위 겸 해서 수도인 카이펑 근처에 밀집시켜놨었다. 당나라 시절 변방의 군대가 지나치게 막강해져서 안녹산의 난이라는 사태가 터졌기에 그걸 방지하려고 한 조치인데 이걸로 인해 변방의 수비력이 약해지고 만다. 변방이 깨지면 어쩔 수 없이 중앙군을 보내야 했는데, 자원과 시간 낭비도 있었을 뿐더러 중앙군은 변방의 지리와 기후를 자세히 알기 힘들었다. 지방군의 협조가 이루어진다면 어느정도 개선이 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변방이 근본적으로 오합지졸 투성이였다.
  • 군사 지휘권을 여타 장수들이 아닌 황제가 직접 가지게 하였다.[6] 이는 전 통일 왕조인 당(唐)의 실책에서 배운 것이였으나, 진짜 위협인 이민족 방어에 허술한 약점을 노출하였다. 당이 문제네 거기다 국경 지대에 배치하는 군사는 서류상으로는 수만 대군이었으나 실제 배치 병력은... 또 앞서 말했듯 장수들의 반란을 견제하기 위해 장수 직속 부하들을 대폭 줄여 군사 훈련과 상하 교류를 적게 만들어 버렸고, 이민족의 침략 당시에는 멀리서 파병한 생판 처음 보는 군사를 억지로 조련하여 싸워야 했으니...이게 게임이 될리가 없다. 참고로 이런 사태는 조선의 임진왜란 때 재현되기도 한다.
  • 송의 군대는 병사들의 연령대도 높았다. 당시 군대가 철밥통이다보니 병사들이 군대에 오래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군대에 남고 싶다니 그게 무슨 말이요 자연스럽게 연령은 높아지고 병사들이 죽은 다음에야 충원이 가능했기 때문에 병사들의 약체화를 초래했다.

다만, 송이 동네북마냥 매번 털리는 군대는 아니었다. 초기에도 요를 상당히 몰아 붙였고, 금과 몽골의 침략을 막고 심지어는 북방 중원을 일부 회복하는 경향도 있었다. 물론 그 이전대인 한, 당이나 이후의 명처럼 밖의 이민족들에게 진출하여 간섭하는 수준이 되지 못하고 셔틀화 된건 사실이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질 낮은 군대와는 달랐다. 남송시대 군사력에 대한 나름의 검토. 그리고 화약 무기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도 이때였다.

또한 북, 남송 합쳐 직계 왕조로 300여년을 유지한 것도 결코 쉽게 볼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 중국의 통일 왕조들 중에서 300년 이상을 유지한 건 한과 송 뿐이다.[7] 실제 남송금나라에게 바로 망하지 않고 금나라를 포함한 수십개국을 멸망시킨 전천후급 전투 민족이었던 몽골에게 망했다. 경제력 + 군사력으로 주변국에 패권을 행사하는 강대국은 아니었어도, 적어도 경제력으로 자기 나라 국방을 300여년간 땜빵할 정도는 되었다는 것. 즉, 송대가 문치주의였던건 맞지만 그것만 가지고 부정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피상적인 견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졸전 중 송 사례가 많이 알려져있다보니 편향적 시선을 많이 받아 그렇지, 무경총요 같은 걸 보면 이론적으로는 군사학 진보도 상당히 이룬 시대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의 실사용자인 전문적인 군인들이 문제라 상당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좌절을 많이 겪었다. 이점은 지나친 문치주의의 폐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남송은 그 몽골을 상대로 수십년간 항쟁하는 등 상당히 선전하며 우리가 송하면 흔히 가지는 허약한 국가라는 편견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2.2. 결과적으로 실패한 외교 정책과 2차례의 멸망

허약한 국방력을 메꾸기 위해, 송나라는 문인들이 외교책으로 사태를 수습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허나 이러한 시도는 의도 자첸 좋았지만, 방법이 잘못되어서 외교책이랍시고 내놓을 때마다 나라를 두동강내는(...) 병크를 터뜨렸다. 이게 송이 화를 자초한 큰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 실제적인 사례는 후술되어있는 고려와의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는 중원 북쪽을 집적거리는 요나라를 해결하기 위해 금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안 여진과 직접 싸워본 고려에선 사신을 보내 여진은 믿을만한 족속이 아니라고 설득했지만 송은 듣지 않았다. 송은 순망치한이라고 요가 쿠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충치 치료한답시고 이를 통째로 뽑은 격 제일 큰 문제는 송과 금 연합군에 의해 요가 무너졌을때 금에게 바치기로 한 공물을 그냥 씹어버렸던 것이다. 덕분에 송은 빡친 금에게 수도가 함락되고 황제는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며 나라 반쪽을 잃고 만다.

문젠 이러한 교훈을 잊어먹고 남송똑같이 되풀이했다는 점이다. 물론 송 입장에서 순망치한 운운하기엔 전대의 원한이 있고 금도 좀 많이 재수없게 어그로를 끌긴 했지만, 외교 못해서 망한 나라2 철천지 원수가 된 늑대 금을 제압하기 위해 남송은 호랑이 몽골과 결탁하고 만다. 이것은 제딴엔 이이제이라고 했고, 초기엔 나름 성공적이어서 일단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몽골 심기 고려 안하고 이틈에 삼경팔릉 수복한답시고 화북으로 기어올라가자마자 빡친 몽골이 송을 밟으러 내려왔다. 동맹군이 적군 없애자말자 바로 얼라이 풀고 뒤통수 크리한 격이니 몽골이 빡칠만도 하다.(...) 만약 이때 국경을 정하고 화의를 맺었으면 몽골이 송을 밟을 빌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송이 외교에서 병크를 저지른 셈.

그렇게 시작된 남송-몽골 전쟁은, 일단 1259~60년 몽케 이 쳐들어왔지만 명장 맹공과 가사도 등으로 다행히 막아냈다. 가사도는 몽케 칸의 사망으로 인해 몽골 제국의 다음 칸을 선출해야 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쿠빌라이와 대충 협약을 맺고, 송나라 조정에는 자신이 몽골군을 격퇴했다고 보고했다. 그러고는 개선해서 16년간 송나라 재상이 되어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허나 자기 맘대로 쿠릴타이를 열어서 몽골 제국의 다음 으로 선출된 쿠빌라이는 1268년 내부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송나라 양양으로 다시 쳐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양양의 군사와 주민들은 무려 4년 동안이나 외부 지원없이 몽골군을 막아냈으나, 1273년 1월 끝내 함락당하고 만다. 그리고 이 패배 이후 남송은 3년만에 멸망하고 만다.

결국 1279년 2월, 쿠빌라이 칸원나라에 의해 황족이 다 바다에 빠져죽는 등의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남송은 멸망한다.[8] 마지막 황제인 조병은 8살의 아이에 불과했는데 '다시는 왕후장상의 씨앗으로 태어나지 않으리라'라는 비참한 유언을 남기고 스승 육수부와 함께 빠져 죽는다.

그래도 몽골의 주공을 두번이나 격퇴했다는 사실은 상기했듯 남송의 군사력이 북송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았다는 의의가 있을 것이다. 허나 이렇게 몽골에 저항을 심하게 한터라 그런지 이후 원나라에서 남송 출신의 한인들은 심한 차별을 받는다.

3. 왕안석의 신법(新法)

송(북송)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법이다. 송인종 이후 송은 재정상 큰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비대해진 관료제와 군대, 지주들의 토지 겸병, 대상인의 독점 행위, 세폐 문제 등이 재정 적자를 초래하여 이에 대한 해결이 필요했다. 이런 때 왕안석송신종의 신임을 얻어 신법을 시행했다. 신법은 부국책과 강병책의 두 종류로 나뉘는데 부국책은 청묘법과 시역법, 모역법, 균수법이 시행되었고 강병책으로는 보갑법과 보마법이 시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청묘법은 20%라는 싼 이자로 농민들에게 자금을 대출해주어 자연 재해로 인한 농민들을 구제함과 동시에 대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막음으로서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려는 의도였다. 참고로 송대에는 호구를 따질 때 주호와 객호로 따졌다. 그 중 주호가 주 납세층이었는데 주호 또한 5개 등급으로 나뉘었다(1, 2등급이 대지주, 3, 4등급이 대부분의 보통 농민, 5등급이 영세 농민). 그러나 대지주들은 토지 장부를 위조해 은닉하기 일수여서 세금을 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5등급의 영세 농민들은 세금낼 능력이 없다보니 자연스레 3, 4등급의 농민들이 1, 2등급의 대지주의 세금까지 떠맡게 되었고, 이들마저도 몰락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폐단을 막고 대지주의 성장을 막기 위해 실행된 청묘법은 안정된 세수 확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시역법을 실시해 중소 상인들을 보호하였다.

무엇보다도 왕안석이 가장 심려를 기울인 신법은 모역법이었다. 당헌종 때 양세법이 시행되어 원칙상 양세를 제외한 잡세는 폐지되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송대에도 여전히 양세법 하에 여러 잡세들이 많았다. 그 중 백성들을 괴롭힌게 역이었다. 일반 농민 뿐 아니라 지역의 유지들도 역을 져야 했다. 돈많은 지주야 거주지를 도시로 옮겨 역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일반 농민들은 그렇지 못해 자살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따라서 왕안석은 광범위한 여론조사와 시범운영을 통해 모역법을 시행하게 된다. 모역법은 납세층을 재산에 따라 5등급으로 나눈 후 각 등급에 맞게 세금을 거두고, 국가는 거두어진 세금으로 역을 수행할 사람을 고용하는 제도였다. 송철종 즉위 후 사마광 등 구법당이 신법을 폐지할 때 모역법을 폐지했다는 소식을 듣자 왕안석이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무튼 왕안석의 신법은 전체적으로는 적절한 개혁이었지만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관리들이 실적만 노리고 부실 운영하는 등 많은 부작용도 낳아 결국 송철종 때 구법당이 세력을 잡자 폐지된다. 그 후 다시 신법당이 등장하지만 이 때가 되면 개혁 의지는 사라지고 오로지 정쟁을 위해 신법을 이용하게 된다. 결국 구법당과 신법당의 당쟁 심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백성의 실생활에는 그닥 도움이 되지 않는 안타까운 결과로 그치고 말게 된 셈이었다.

4. 풍성한 경제력과 문화

▲ 북송의 수도인 개봉을 그린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 부분[9]

▲ 수력을 이용하는 물레 방앗간

군사, 외교적으로는 안습한 행보를 거듭해서 보인 송나라였으나,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역대급의 융성과 호황을 누렸다. 과거 중국 대륙은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져 있었으나, 송나라 대에 서역과의 무역 등이 활발해지면서 그 폐허를 딛고 완전히 부활했다. 수도 개봉은 당시에만 인구가 무려 130만여명, 남송 수도 임안(항저우)은 100만여명이었으며, 불야성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24시간 내내 각종 상점은 불이 꺼지지 않고 시장에는 사람들이 빼곡했다고 한다. 각종 문화, 예술도 꽃을 피우기 시작하여 중국의 산수화성리학도 이 때 기틀이 서기 시작했다.

심지어 송은 요, 금, 서하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도 이 경지에 이를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흠좀무. 아니, 애초에 그 '막대한 조공' 자체가 당시 송 입장에서는 별 것 아니었다. 실제 막대한 군사비 지출보다 조공으로 몇 푼 주고 백성들 고생 덜 시키는게 당시 풍요롭던 송 입장에선 더 싸게 먹히는 측면도 있었다. 문젠 그동안 허약한 군사력 문젤 보완했어야 되는데 이게 고질적이었다는 것과 이후 송의 재정도 악화되면서 부담이 되었다는거지만.

다른 왕조와는 차별되는 이러한 경제력의 근원은 송나라가 촌동네에 불과했던 강남을 드디어 개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이런 이미지를 반영하여 오나라가 '비옥한 강남의 토지'를 끼고 어쩌구 하는데, 삼국지연의가 쓰여진 시기가 원말명초 시기였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그렇게 묘사한 오류이다. 양자강 지역은 원래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의 언어를 쓰던 이민족의 영토였으며, 후한대에 이르러서야 한족의 이민이 시작된 곳으로, 삼국 시대 당시에는 모기에 전염병이나 들끓는 습지 촌동네였다.[10] 강남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어디까지나 육조시대 이후, 강북을 능가한 것은 남송 이후의 이야기다.

송나라 때에 드디어 강남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던 이유는 쌀에서 찾을 수 있다. 송 이전에는 쌀은 주식이 아닐 뿐더러 강북에선 자라기 힘든 작물이었다. 그러나 가뭄에 강하며 성장이 빠른 ‘점성도(占城稻)’ 품종이 동남아에서 들어와 강남 전역에 쌀 농사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쌀 농사에서 중요한 물 때문에 수차가 개발되어 계단식 논 또한 생겼다. 게다가 이앙법의 도입으로 이모작이 가능해졌다. 이런 연유 등이 겹치면서 백성들의 경제적 부가 늘어나자 상업이 발전하였고 운송업도 같이 발달했다. 그에 따라 숙박 시설이나 여관 수리업 등 서비스업도 발전했다.

생산력의 급증과 함께 중국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1억 명을 넘는 시기도 이 때쯤 시작되어, 화폐의 발전을 불러왔다. 그렇게 나온 것이 천희통보이나 연간 막대한 양을 찍어내도 수요를 완전히 따라잡지 못하였다. 화폐 다음 거래 수단으로 어음이 지목되었다. 원거리에서 무거운 화폐 대신 어음동이를 가져가면 되니 매우 편리했다. 하지만 이 또한 문제가 있었다. 가짜 어음으로 사기를 치거나 어음을 주니 실제 가치하고 다르거나 (비단을 2개가 아니라 1만 주는 경우)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세계 최초로 종이 지폐를 발행하니 1024년 "교자"가 발행되었고 근대적 회계 방식인 복식부기를 시행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한의학에서 기존과 선을 긋는 사상적 전환이 일어난 것도 이 시기.

상업 발달의 산물로서 상인 동업 조합(행, 작)도 번성했다. 도자기 기술도 발전을 거듭했으며 문화가 발달해서 농민들은 차를 상업적인 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고 찻집 같은 곳도 생겨났다, 예식을 대신 준비해주는 (요즘으로 말하면) '출장 뷔페 서비스'(!)가 있었고 기계식 물시계가 등장했으며 시중에는 음식점 숫자가 너무 많아서 맛을 넘어서 공연이나 냉난방, 배달 서비스 같은 마케팅으로 경쟁하였다. 도시 내에는 수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간이 극장이 존재했고, 각 가정에서는 석탄을 가정연료로 썼다.

당시 사람들의 성품이나 인심 역시 매우 후했다.

"외지에서 새로 이사 와 옆집에 살게 되면 서로 도구들을 빌려주고, 뜨거운 탕과 마실 것을 갖다 주었으며, 물건을 사고 파는 일 등에 관한 정보를 알려줬다. … 어떤 집에 경사나 흉사가 생기면 사람들이 모두 몰려가 그 집을 가득 메웠다."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11]

그러나 송대 이후 중국의 경제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예컨대 화북 지방의 철강 생산량은 송대에는 3만 5천톤이었지만 원대에는 8천톤으로 격감했다. 이는 철강이나 석탄이 고갈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유가 뭘까

서양학자들 역시 송나라의 경제력을 높게 평가하는데,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은 1인당 GDP를 450달러로 추산해 당시 송나라가 세계 전체 GDP 비율 중 23%을 차지한다고 추산했고,[12] 더 최근의 연구 결과에선 스티븐 브로드베리(Stephen Broadberry)가 1인당 GDP가 1200~1500달러 사이였다고 추산했다.[13] 참고로 산업혁명 초인 1750년 영국의 1인당 GDP가 1,710 달러, 1800년엔 2,080 달러였다.

1인당 PPP 또한 송이 압도적으로 우월하다고 추정했다. 북송 시대 인구는 대략 8천만[14] 유럽은 서유럽만이 아니라 전체 유럽 인구가 같은 시대 5천만 정도로 추정된다. 다만 Angus의 수치는 1990년대 초반의 자료이며, 2014년 기준(Angus의 최신 자료 포함) 학자들의 자료로 추산할시 1인당 PPP가 앞선 중국 시대 또한 많다.

'사회발전지수'라는 에너지/도시성/전쟁 수행 능력 기반의 지표로 동/서양을 구분한 이언 모리스는 저서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에서 제시한 그래프로 기원전 1만 4천년부터 서기 2000년까지의 비교선을 그려보였는데, 대운하가 뚫리고 남중국이 개발되면서 동서양의 격차가 가장 컸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5]

5. 평가

송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평가를 가질 수 있는 묘한 나라다. 일단 경제적으론 상당히 융성했고, 이를 기반으로 각종 문화들이 무르익기 시작한 시대였다. 서민 문화도 발달해서 그래서 그런지 송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이 많다. 수호전이 대표적이고 건축적으로도 이전 시대에 비해서 복잡한 구조의 누각 등이 많이 출현하고, 의장면에서 풍부해졌다.

정치적으로도 중앙집권화가 이뤄지고 꽤 안정되어 유교적 이상에 가까웠던 시대였다는 것은 특별히 부정할 이유가 없어보인다. 그냥 대충 봐도 정치적으로 뭔가 문제가 크게 꼬여서 사단이 난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일단 권력을 전횡하는 환관도 별로 없었고,[16] 황제의 힘을 넘보는 황후도 없었다. 특히 잔혹한 혹형이 이후 시대보다도 오히려 훨씬 적었다는 것은 큰 특징이다. 송 이전인 위진남북조시대, ·, 오대십국시대의 막장 행각을 보고, 송나라의 뒤를 이은 ··청나라의 피비린내나는 사태들을 생각해보자. 물론 정적 제거나 당쟁 같은게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피비린내는 훨씬 덜 나던 시대였다.

그래도 송나라 이전의 나라들 중 비교할 법한 나라는 역시나 당나라인데, 문무에 고르게 편승된 과거 제도도 본시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가 확립했으며, 당나라 말기 지주전호제와 유사한 토지 제도의 영향도 송나라에 꽤 보인다. 뿐만 아니라 지공거 체제도 당나라와 송나라가 비슷하며 빈공과 역시 송나라가 그대로 계승했다. 대신에 당나라의 경우는 정복 전쟁을 활발하게 벌였다는 점과 송나라는 꽤 주춤했다는 점이 차이고, 반란의 빈도는 당나라가 훨씬 심각했다는 점도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여담으로 그 반란을 줄이려 시행한 여러 조치들이 송나라의 군사력 약화를 가져왔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

물론 허약한 송의 군사력은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그래도 북송에 비해 남송은 몽골을 상대로 멸망하긴 했지만 첫 침공을 받은 후 40년 동안 상당히 선전했다. 두 번째 침입 때는 몽골의 몽케 칸이 직접 나섰으나 도중에 병사했다. 몽골 주력 부대의 침공을 받고도 이처럼 오래 버틴 나라는 매우 드물었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송의 군사력이 부족한 부분도 물론 있겠지만 반대로 당시 북방 민족들의 전투력이 너무 강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송나라의 군사력을 마냥 저평가할수만은 없는게 세계최초로 화약무기를 본격적으로 쓴 군대가 송나라군대라는 점은 분명 군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중화권에선 중국 역사상 마지막 한족 통일 왕조였던 (明)이 막장 황제들로 인해 말기에 실망스러운 행보를 꽤 보였기 때문인지, 한족 왕조 중 송을 은근히 더 쳐주는 분위기도 있다.[17] 다만 지역별로 평이 좀 갈리긴 한데, 중국 본토의 경우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중국의 문화와 지적 수준이 엄청나게 후퇴하면서 송이 고평가를 받게 되었다곤 하나, 아직은 정강의 변이나 몽골에게 치욕을 당한 것 때문인지 여전히 저평가 받는 부분도 있고, 근데 중국 소수민족 중에 여진족과 몽골족도 있잖아 오히려 대만 지역에서 문화 부흥 운동으로 송나라를 높게 쳐주는 편이다. 판관 포청천 관련한 작품들이 그 예로 이는 송나라의 치세를 가장 잘살린 매체로 알려져있다. 중국 본토 매체에선 보통 송의 영웅이 찌질한 황제에게 탄압받는 것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포청천의 경우는 성군과 충신이 둘 다 맞물려 신임을 두텁게 받는 것으로 나온다.

앞서도 말했지만 송의 경제력은 많은 주목을 받는데, 좀 오버하는 사람들 중엔 송대에 이미 산업혁명의 기반이 있었다는 식의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이는 송의 발달된 과학력, 그리고 산업 혁명 시기 영국과 비슷한 석탄 사용량과 제철 능력 때문에 나온 말. 그러나 산업 혁명의 원인을 단순히 석탄 사용과 제철 능력에서 비롯되었다는 단순화는 삼갈 필요가 있다. 물론 산업 혁명에 중요한 수력 방적기가 중국에서 탄생하긴 했다. 왕정농서에 14세기 수력 방적기가 실려있다. 그러나 이후에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논란이 많기는 하다. 실제로 송은 법의학, 수학, 기계식 시계를 수송이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그러한 혁신들은 대부분 단절되었다. (중국에서는 법의학만 남고 수학은 쇠퇴했다. 홍정하에 강희항목에 잘 나타난다. 수송이 수력으로 돌아가는 시계를 만들었는데 톱니 바퀴를 사용한 것이여서 자명종과 유사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려 그것도 잊혀졌다.)

애당초 산업 혁명은 몇가지 발명품에 의해 뿅 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시민 사회의 등장, 개인의 재산권 보호, 근대적인 계약법, 상법, 주식 회사(법인), 신체에 대한 권리(영장주의, 변호사 선임권) 등 몇 가지 발명으로 설명될 수 없는 훨씬 복합적이고 포괄적인 패러다임의 변화의 결과 혹은 그 과정 자체로서 나타난 것이다. 송나라가 석탄을 썼다고 해봐야 그걸로 내연 기관을 구동시켜 배와 마차를 움직인 것도 아니고 단순히 취사, 난방용으로 썼을 뿐이기 때문에 기계적인 의미의 산업 혁명과는 백만광년 정도 떨어져 있다. 그렇다고 석탄 시장이 흥해서 그걸 통해 주식 시장이 생기고 거품 경제 등의 현상이 일어났던 것도 아니다. 애당초 석탄을 취사, 난방용으로 써먹는건 이슬람과 유럽에서도 옛날부터 보이던 방식이니 이거 가지고 놀라는 것 자체가 침소 봉대에 불과하다. 또한 중국의 수력 방적기는 유럽에서 산업 혁명 과정에 쓰인 방적기와 별 관련 없다. 한국의 직지 심체 요절이 독일의 구텐베르크 금속 활자가 촉발시킨 인쇄 혁명과 별 관련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로마제국도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신전에 자동문을 만든 예가 있지만 이게 산업혁명이라고 볼수있는가?

한편 송은 조선 왕조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나라이기도 했다.조선과 동시기에 있던 명나라는? 실제로 이 시기에 편찬된 대학연의가 조선 왕조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고, 과거제도 송나라의 과거 제도를 조선 왕조가 완성시켰다. 형법 역시 송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6. 고려와의 관계

고려와 송은 국초엔 관계가 좋았다. 그러다 거란이 등장하고 여요전쟁이 발발하는 등 국제 정세에 따라 국교가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고려는 송을 이용해 요를 견제하는 동시에 공무역을 통해 송에게서 막대한 이익을 취할 수 있었고, 송 역시 요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에게 좋은 대접을 해줬다. 의천이 송으로 건너갔을 때 고려사란 절도 지어주고, 급기야는 고려의 사신을 서하의 사신보다 높이고, 조공사가 아닌 국신사란 별도의 명칭을 붙여 격을 높여주었다.

송나라 입장에서는 고려와의 연대가 절실했던 이유는 송나라 독자적으로는 요나라나 금나라를 상대할 힘이 부족했기에 고려와 힘을 합쳐 요나라와 금나라를 뒤통수 막아보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송나라의 외교적 방침을 요나라가 있었던 때는 연려제요(聯麗制遼)라 했고 금나라가 있었던 때는 연려제금(聯麗制金)이라 했다.

그러나 정작 고려는 송이 원하는 군사적 대응에는 미온적이었다. 사실 송도 실제로 요나 금을 침공할 생각은 전무했고 이들에게 침공 당했을 때 고려에게 원군을 요청한 적도 적긴 했으므로 쌤쌤이긴 한 셈(...).[18] 어쨌든 고려나 송, 모두 상대방에게 원한 것은 유목 제국에 대한 견제였기 때문에 견제 그 자체만으로도 외교상의 실리가 있긴 하였다. 물론 고려의 경우는 송과는 달리 요나라의 침입때 결과적으로 요나라를 관광 태우긴 했지만, 고려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실제로 고려의 문자 기록이나 유물, 사적들을 보면 요나라의 침공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분간될 정도이니.[19] 어쨌거나 결론적으로 고려가 요나라를 공격하지 않더라도 요나라를 막을 수 있었고, 이것만으로도 송이 고려와 연합할 가치가 있었다는 것.

하지만 고려 사신에 대한 융숭한 대접과 고려와의 (조)공무역은 점점 송의 국가 재정에 악영향을 미쳤다. 한번은 남송의 상인들이 고려인들에게 물품을 빼앗겨 물어달라고 호소하기도 했을 정도. 이로 인해 요나라의 실제적인 위협이 줄어들자 송의 신료들 사이에서 반고려 입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격인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소식(소동파). 그는 고려를 대놓고 맥적(貊狄)이라 부르며 다섯가지 이유를 들어 고려와의 관계를 재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내용은,

1. '돈이 너무 많이 든다.'

2. '백성들이 힘들다.'

3. 고려가 송에서 '가져간' 물품을 거란에게 '갖다 주고' 있다.

4. 고려는 입으로는 '송을 받든다' 하면서 정작 실리만 챙길 뿐이며, 심지어 송의 지형을 '그려 가고' 허실을 조사하고 있다.

5. 거란이 고려와의 관계를 '트집잡을' 위험이 있다.

하지만 정작 이러거나 말거나 고려의 송나라에 대한 이미지는 좋았다. 대표적으로 김부식과 동생 김부철은 소식과 소철 형제에게서 이름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중간의 부자 돌림이 부정할때 부 아닐까

송과 고려의 이런 미묘한 관점 차이는 요 대신 금(여진)이 들어섰을 때도 마찬가지. 흠종 때도 소식이 주장했던 것과 같은 이유를 들어 고려 사신을 개봉으로 불러들이지 않고 객관에 1년이나 머물게 하다가 돌려보낸 적이 있다.

한편, 고려 입장에선 이런 북송이 갑갑하기만 했을 뿐. 틈틈이 요와 금의 상황을 알려주면서 군사를 들어 쳐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북송이 말을 들어처먹지를 않았다. 사실 고려의 입장은 '북송이 주도한 전쟁에 고려의 군대가 지원군으로 참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는데, 이러한 요구에 북송은 꿀먹은 벙어리였던 것.

결론적으로, 북송 입장은 우리가 고려랑 친하게 지내면 고려가 알아서 원쑤 요나라를 막아 주겠지? 데헷이었고, 고려 입장은 북송 님들아, 제발 요나라 정벌 좀. 정벌만 시작하면 우리가 참가해 줌. 그전까진 우리도 힘드렁이었기 때문에 양자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정강의 변이 일어나고 북송의 수도 카이펑이 함락되고 북송 체제가 사실상 멸망하면서(..) 양국의 겉 다르고 속 다른 친선 관계는 강제 종료되어 버린다.

6.1. 북송의 몰락

정강의 변 직후, 어찌된 일인지 송고종은 끌려간 휘종흠종을 돌려받겠다며 고려에 사신을 보낸다(?!). 명목상으로 내세운 것은 고려를 경유하여 여진으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다는 알쏭달쏭한 이유. 뭐, 난리법석이 된 북방의 육로를 거쳐 사신을 보내는 것보다 해상을 통해 안전한 고려를 경유하여 사신을 보내는 것이 더 빠르긴 했지만, 실제로는 고려가 남송에 줄을 설 것인지 금에 줄을 설것인지 확인하려 했던 것이라고 봐야 한다. 한편으로는, '혹시나 만약에 1000만분의 1이라도...고려 너네님들이 금나라 좀 때려줄 생각 없나요?'라는 생각도 있었을테고.(...) 뭐 그 정도까진 못해도 송을 위해 여진에 대한 최소한의 중개 역할을 해달라는 의도였다고도 불 수 있다. 어쨌거나 말하면, 이미 전세가 뒤집힌 상황에서 고려에게 태도를 정하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한 것인데...

결론적으로 무리수. 왜냐면 금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여태까지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던 고려에게 조서를 내리고 태도를 분명히 정하도록 압박을 가할 것인데, 이럴 경우 과연 고려는 실리적으로 과연 고려가 어느 제국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 너무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 바로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송 내부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若高麗辭以金人亦請問津以窺吳·越, 其將何辭以對?

만약 고려가 '금나라 사람도 오·월을 엿보기 위하여 나루터를 물어 왔다'라고 말한다면 앞으로 무슨 말로써 그에 대답하겠습니까?"

《송사》 외국 열전 고려조 건염 2년 10월.

이게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먼저 무리하게 도와달라고 했다가) 금나라도 고려한테 강남 공략을 도와달라고 하면 어쩔겁니까?"

당연히 고려도 당황. 고려 인종은 난처해하면서 아예 송고종의 조서를 거부했다. 송사 외국 열전 고려조 건염 2년에는 대놓고 "楷有難色(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 사실 고려 입장에선 나름 최선을 다한다고 김부식이 송의 사신을 접대하게하는데, 이는 고려로선 최선의 인선. 김부식이 실제로 친송인지 아닌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다만 소식의 이름자를 따라 이름을 지었을 정도로 송나라를 잘 알고 송나라 문화를 좋아하긴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 그런데 그런 김부식조차도 송의 사신에게 "여진에서도 우리 보고 군사를 요청하면 어쩔거냐? 우리도 신하로 삼던 여진이랑 친선하고 있으니 딱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너네는 왜 진작에 군사를 조직해서 여진을 칠 생각은 않고 여기 와서 이러는 건지?"이라며 송의 사신을 돌려 까버렸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송고종나라 절단난 것도 서러운데 고려가 은혜를 저버렸다며 크게 화를 내었다는데, 심지어 어떤 정신 나간 신하는 고려를 공격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려조 건염 2년 10월.

右僕射 黃潛善曰, "以巨艦載精兵數萬, 徑擣其國, 彼寧不懼."

우복야 황잠선이 말하기를, 큰 전함에 정예병 수만명을 싣고 가 곧바로 고려의 도읍지를 공격하면 저들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개봉에서 시원하게 털리고 거지꼴로 강남으로 도망쳐 온 상황에서 고려를 정벌할 군사력 따윈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협력할 만한 유일한 나라라고 굳게 믿었던 고려가 딱 잘라 거절하니 마지막 실낱 같던 자존심에 고려가 핵펀치를 날려버린 것.

어쨌거나 정신 멀쩡한 다른 신하들이 말렸고, 고려 쪽에서도 이내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면서 겉으로는 무마되었다만 어디까지나 말 뿐이었고 동맹을 맺거나 이후로도 군사 원조를 했다는 건 전혀 없었다. 그 이후로 결국 고려와 남송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반대 급부로 고려와 금나라의 사이는 더욱 가까워졌다. 실제 고려와 금나라 사이엔 단 1번도 전쟁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고려와 금나라는 우호 관계였고, 두 국가는 우호 관계에 금이 갈 만 한 일은 사전에 차단하였다. 무신정변 시절엔 조위총정중부이의방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금나라의 힘을 빌리고자 매국노 짓이나 다름없이 서경 일대 40여성을 들어 귀순하겠다고 요청했으나 금나라가 조위총의 귀순을 거부하면서 우호 관계를 굳건히 했다.

요약하자면, 북송 멸망으로 송에게 남은 최후의 수단은 고려와의 연합 뿐이었는데, 군사적인 연합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그나마 가능한 것은 외교적인 연합 내지 친선 관계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그런데 송고종이 주위에서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고려에게 무리하고 성급한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가 양국 관계가 쫑 나버렸다는 슬픈 이야기.

6.2. 남송 시대 - 외교 단절

송고종의 삽질 이후 다시는 송 - 고려 관계가 복원되지 않았다. 심지어 남송은 내내 고려가 금의 첩자 노릇을 할 거라는 강박 관념에 시달렸다. 고려가 위의 사건 직후 송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모습을 보였고, 이후로도 몇 차례 조공을 보내보지만 남송은 끝끝내 이를 거부한다.

그러다가 1195년 ~ 1200년 무렵에는 아예 상인들이 고려에 동전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조차 금지해버린다. 뭐 민간에 다한 이러한 명령이 잘 이행되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이것으로 국가와 국가 간의 정식 관계는 단절되어버린 셈. 실제로 남송의 기록을 보면 이후로 더이상 고려에 대한 언급이 없다.

남송이 이런 조치를 취한 것도 나름 이유가 있긴 있었는데, 일단 겉으로 드러난 원인은 믿었던 고려에게 공식적으로 구원 요청을 거부당한 탓에 강남으로 도주한 굴욕을 당해 황제국으로서 권위에 큰 손상을 입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번 권위를 잃자 의심을 품게 되버렸고, 고려를 특별 취급할 이유를 잃게 된 것.

하지만 역시나 가장 큰 원인은, 고려와의 관계가 더이상 실익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당시 통신 보급 상황으로는 대륙을 거쳐 말 몇마디로 타국끼리 실제적인 군사 협력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 심지어 나당 연합군처럼 왕국을 하나씩 격파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는 제국으로 거듭나며 성장하는 기마 민족이다. 한마디로, 카이펑이 함락되어 송나라가 강남까지 밀려나고 고려와 지리적으로 격리된 순간부터, 송-고려 연합이 금에게 실제적인 압박을 가한다는 계획은 완벽하게 소멸된 것. 그러니깐 국경선이 가까울 때 쳤으면 좋았잖아

사실 고려 입장에선 고려의 중립 외교가 현실적으로 실익을 보았긴 하지만, 애초부터 고려는 송의 국방 정책과 외교적 해결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에도 일단 기회가 나는데로 송에게 북방 정벌을 권유해왔고, 이것이 계속해서 무시 내지 거부 당했던 것. 그렇지만 북방 정벌을 권유라도 할 수 있는 송이 존재하긴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겐 힘이 되니까 송과 관계를 유지할 필요성이 있다라는 입장.

그런데 이렇게 취약한 이론상의 명분과 실익이 북송 멸망이라는 현실 앞에서 더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가 관성적으로 송나라와의 관계를 이어가려 하긴 하였으나 사실 무의미한 일이었고, 먼저 송이 무시하자 고려 역시 억지로 양국 관계를 이어나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고려 - 송 관계는 종료된다.

6.3. 새로운 동맹 - 남송의 몰락

한편, 남송은 이후 고려 대신 새로운 군사적, 외교적 협력 상대를 찾아내긴 했는데, 문제는 그들이 바로...어쨌든 남송은 '송나라 주도-고려 참가'를 주장했던 고려와는 달리, 북송 시절부터 한족들이 가장 원하는 전쟁 시나리오였던 '몽골이 주도-송나라 참가'라는 전략 동맹 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몽골이 금나라를 개박살 내는 동안, 남송은 뒤치기를 날려서 원수였던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복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잘 알려져있듯 송나라는 실익을 거의 얻지 못했고, 반면에 몽골은 남송의 도움으로 금나라를 간단히 무너트리는데 성공하고, 이후의 남송은 몽골을 몇번 격퇴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더 지독한 몽골에게 완전히 멸망당한다. 이후에는 원나라의 중국 지배가 시작된다.

7. 역대 황제

참고 사항으로 황제 재위 기간에 연호가 여러 차례 바뀐 관계로 명이나 청처럼 연호를 붙여서 "XX제" 형식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대수

묘호

이름

연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 기간

능호

01

태조(太祖)

조광윤
(趙匡胤)

건륭(建隆, 960년 ~ 963년 11월)
건덕(乾德, 963년 11월 ~ 968년 11월)
개보(開寶, 968년 11월 ~ 976년 12월)

960년 2월 4일

976년 11월 14일

16년 284일

영창릉(永昌陵)

02

태종(太宗)

조경(趙炅)
[20]

태평흥국(太平興國, 976년 12월 ~ 984년 11월)
옹희(雍熙, 984년 11월 ~ 987년)
단공(端拱, 988년 ~ 989년)
순화(淳化, 990년 ~ 994년)
지도(至道, 995년 ~ 997년)

976년 11월 15일

997년 5월 8일

20년 174일

영희릉(永熙陵)

03

진종(眞宗)

조항(趙恒)

함평(咸平, 998년 ~ 1003년)
경덕(景德, 1004년 ~ 1007년)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년 ~ 1016년)
천희(天禧, 1017년 ~ 1021년)
건흥(乾興, 1022년)

997년 5월 8일

1022년 3월 23일

24년 319일

영정릉(永定陵)

04

인종(仁宗)

조정(趙禎)

천성(天聖, 1023년 ~ 1032년 11월)
명도(明道, 1032년 11월 ~ 1033년)
경우(景祐, 1034년 ~ 1038년 11월)
보원(寶元, 1038년 11월 ~ 1040년 2월)
강정(康定, 1040년 2월 ~ 1041년 11월)
경력(慶曆, 1041년 11월 ~ 1048년)
황우(皇祐, 1049년 ~ 1054년 3월)
지화(至和, 1054년 3월 ~ 1056년 9월)
가우(嘉祐, 1056년 9월 ~ 1063년)

1022년 3월 24일

1063년 4월 30일

41년 37일

영소릉(永昭陵)

05

영종(英宗)

조서(趙曙)

치평(治平, 1064년 ~ 1067년)

1063년 3월 1일

1067년 1월 25일

3년 331일

영후릉(永厚陵)

06

신종(神宗)

조욱(趙頊)

희녕(熙寧, 1068년 ~ 1077년)
원풍(元豊, 1078년 ~ 1085년)

1067년 1월 25일

1085년 4월 1일

18년 66일

영유릉(永裕陵)

07

철종(哲宗)

조후(趙煦)

원우(元祐, 1086년 ~ 1094년 4월)
소성(紹聖, 1094년 4월 ~ 1098년 5월)
원부(元符, 1098년 6월)

1085년 4월 1일

1100년 2월 23일

14년 331일

영태릉(永泰陵)

08

휘종(徽宗)

조길(趙佶)

건중정국(建中靖國, 1101년)
숭녕(崇寧, 1102년 ~ 1106년)
대관(大觀, 1107년 ~ 1110년)
정화(政和, 1111년 ~ 1118년 10월)
중화(重和, 1118년 11월 ~ 1119년 2월)
선화(宣和, 1119년 2월 ~ 1125년)

1100년 2월 23일

1125년 1월 18일

25년 329일

영우릉(永祐陵)

09

흠종(欽宗)

조환(趙桓)

정강(靖康, 1126년 ~ 1127년 4월)

1125년 1월 19일

1127년 1월 9일

1년 355일

오국성 부근

8. 계보

추존 황제 선조 조홍은

1.태조

2. 태종

조덕소

3. 진종

4. 인종

5. 영종

6. 신종

7. 철종

8. 휘종

9. 흠종

10.고종

11.효종

원의 태자

12.광종

13.영종

14.이종

15.도종

16.공종

17.단종

18.소제

9. 추존 황제

묘호

시호

이름

비고

성조(聖祖)

상령고도구천사명보생천존대제
(上靈高道九天司命保生天尊大帝)

조현랑(趙玄朗)

태조 추숭, 송 왕실의 시조

희조(僖祖)

입도조기적덕기공의문헌무예화지효황제
(立道肇基積德起功懿文憲武睿和至孝皇帝)

조조(趙朓)

태조 추숭, 태조의 고조부

순조(順祖)

혜원예명황제
(惠元睿明皇帝)

조정(趙珽)

태조 추숭, 태조의 증조부

익조(翼祖)

간공예덕황제
(簡恭睿德皇帝)

조경(趙敬)

태조 추숭, 태조의 조부

선조(宣祖)

소무예성황제
(昭武睿聖皇帝)

조홍은(趙弘殷)

태조 추숭, 태조의 부친

-

황고복안의황
(皇考濮安懿皇)

조윤양(趙允譲)

영종 추숭, 영종의 생부

10. 여담

중국의 자동차 제조사인 BYD에서 생산하는 BYD 송, BYD 송 맥스 이름의 유래가 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1. [1] 설정인지 진짜인진 모르겠으나 수호지의 등장 인물 중 하나인 소선풍(小旋風) 시진(柴進)이 이 후손들 중 하나로 작중에서도 그 사실이 언급된다.
  2. [2] 사실 이건 송나라의 막장 군사력 때문에 그런 것으로, 군대에 들어가는 비용은 많은데 정작 요나라를 막아내는 데는 별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나라를 이긴 것조차도 실상 송나라에게는 피로스의 승리나 다를 바 없었기에 승전하고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3. [3] 사실 고려의 문관들은 과거시험을 볼때 무인들이 봐야할 병법서를 시험과정에 추가함으로써 고려역시 무신정변이전까지 송과 비슷하게 문치주의 정책을 실시하였어도 몽골을 제외한 북방민족들의 침입을 손쉽게 막아내었다.
  4. [4] 송과 비슷하게 친문관 정책을 펼쳤던 고려의 경우에는 기병이 약하진 않았으나, 상대 기병과의 야전을 최대한 피하고 산성에서 버티는 전법을 썼다.
  5. [5] 단, 기동성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기동성이 우수한 부대가 불리한 장소에서의 회전에 응하지 않고 유리한 장소에서 싸우면 그만이다. 특히 전략적으로 로마처럼 바다를 끼고 있거나 이탈리아와 같이 본토의 입구 경계가 생각보다 좁거나 하는 등의 지리적인 배경이 없으면 기병에 비해 보병은 매우 불리하다. 보병을 중시하고 잘 육성하던 로마 역시 기병을 망치와 모루 같은 전술, 전략에서 핵심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보병보다 높은 전력으로 두었던 것이 사실인만큼, 보병도 기병을 상대할 수 있다 정도로 생각을 해야 한다. 대전차 보병이 전차를 상대로 대승하거나 선전하는 사례가 있다고 항상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짓이며 고대에서도 보통은 지형, 기술력의 차이 때문에 선전하는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은 기병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6. [6] 당연히 황제는 딱히 군사 전문가가 아니었다.
  7. [7] 명 또한 남명을 포함하면 306년가량 존속했지만 넘어가자.
  8. [8] 다만 남송의 수도 임안(항저우)를 함락한 후 조씨 황족을 대도로 불러와 나름 후대했다는 기록도 있는걸 볼때, 바다에 빠져죽은 쪽은 잔당 세력에 남은 황족들로 보인다.
  9. [9]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영역 세계사 문제에서 자주 출제되기로 유명한 그림 중 하나다. 송나라 관련 기출 문제 중에서 그림으로는 단연 1위다.
  10. [10] 후한 말 남양에서 강성한 세력을 지닌 군벌이었던 원술이 비어있는거나 다름없는 강남 놔두고 중원에서 피터지게 싸우다 망한 것도 그만큼 강남이 별로 매력적이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강남에 자리를 잡은 손책과 그 뒤를 이은 손권 역시 지방 군벌로 끝났거나 독자적으로 제위에 올랐지만 당시 한(漢)의 천하에 군사적이거나 경제적, 정치적으로 별다른 영향을 주지도 못했다.
  11. [11] 물론 모든 이가 이런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빈부격차로 거지나 도둑이 생기거나 부자의 자녀를 납치해 몸값을 받거나 하는 문제도 있었다. 참고로 수호지의 배경이 북송 말기다.
  12. [12] https://en.wikipedia.org/w/index.php?title=List_of_regions_by_past_GDP_(PPP)&oldid=272230369#1000.
  13. [13] http://www.nuffield.ox.ac.uk/users/broadberry/China8.pdf. 양측 자료 모두 1990년 달러가 기준이다.
  14. [14] http://www.china-profile.com/data/fig_pop_0-2050_large.htm.
  15. [15] 참고로 이언 모리스는 이 시기가 청대까지도 이어지고 1700년대 중후반에 가서야 끝난다고 봤다.
  16. [16] 아예 없지는 않았다. 송휘종동관(童貫)이라는 인물이 방랍의 난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수호전에서도 악역으로 나온다.
  17. [17] 다만 최근에는 명도 다시 재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명이 암군들 때문에 과소평가 받는거지 국력 자체는 상당했던 나라로 전성기 때는 동아프리카까지 사람을 보낼 정도였다.
  18. [18] 사실 원군을 부르기도 전에 개박살...이라는 게 사실이긴 하다만.
  19. [19] 그래도 요나라로 인한 피해는 빠른 회복이 가능한 수준이었긴 한데, 몽골과의 전쟁은...그냥 고려가 깡그리 불태워졌다.
  20. [20] 초명은 광의(匡義)였으나 형의 이름을 피휘해 광의(光義)로 바꿨다가 즉위 후 경(炅)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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