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사

서진 추존 황제
世宗 景皇帝
세종 경황제

묘호

세종(世宗)

시호

무공(武) [1] → 충무후(忠武侯) → 경왕(景王) → 경황제(景皇帝)

작위

장평향후(長平鄕侯)→무양후(武陽侯)

출생

208년

사망

255년

능묘

준평릉(峻平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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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司馬)

사(師)

자원(子元)

부모

아버지 사마의, 어머니 장춘화

형제

9남 2녀 중 장남
동복동생 사마소, 이복동생 사마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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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평가
3.1. 정반대의 간극에 서 있는 두 남자 - 강유와 사마사
3.2. 고평릉 사변의 주도자는 사마사?
4. 가족 관계
5. 미디어 믹스

1. 개요

삼국시대의 권신이자 서진의 추존황제. 는 자원(子元).

서진의 초대 황제는 동생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이지만, 서진은 사실상 사마사가 세운 나라나 다름없다.

사마의장춘화의 장자로 사마소의 친형. 나라(晉)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으로, 나라에 비유하자면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손책과 비슷한 입지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생전의 지위는 장평향후(長平鄕侯), 무양후(武陽侯), 시호는 충무후(忠武侯)였으나, 동생 사마소가 진왕이 되자 그는 형 사마사를 경왕으로 추존했고, 나라를 건국한 조카 사마염황제가 되자 그는 묘호존호를 더해 백부 사마사를 세종 경황제(景皇帝)로 추존하였다.

2. 생애

약관의 나이 때부터 같은 세대 인물이자 처남인 하후현(夏侯玄)과 더불어 이름을 날렸다. 경초 연간(237년 ~ 239년)에 산기상시가 되어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거듭 승진하여 중호군까지 이르렀다. 진서 경제기에 문아(文雅)하여 풍채(風彩)가 있었다는 구절이 있는데 풍채라는 단어는 보통 외모에 쓰는 단어이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꽤나 미남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말년에 생긴 혹(혹은 종양) 때문에 외모가 많이 망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아버지 사마의와 동생 사마소와 함께 제갈량의 북벌 저지에 참전하였고 아버지가 제갈량에게 당했듯 자신도 호로곡에서 불 타 죽을 뻔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버지를 따라 전장에서 종군한 적은 없었고 동흥 전투로 보건데 전략은 뛰어나나 아버지만 한 군재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근대 왕조 국가의 사서면 구 왕조를 무너뜨리고 신 왕조를 창건하는 과정을 어떻게든 정당화시키고 윤색하기 마련이건만, 사서에서 대놓고 일찍부터 구 황실에 충심이 없었다고 언급되는 인물이다.[2] 그것도 나라가 기울어 갈 때도 아니고 조예가 건강하고 촉오의 북벌을 모두 막아내며 조위의 성세가 공고하던 시절부터 은밀히 야심을 품고 있었다. 사마사의 아내 하후휘는 남편이 위의 충신으로 남지 않을 것을 눈치챘는데, 사마사는 위의 개국 공신 하후씨의 피를 이은 그녀를 꺼렸고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이 있었던 234년에 그녀를 독살한다.[3] 그러면서도 어머니 장춘화가 사마의에게 괄시를 받아 단식할때 같이 단식하고 있었다는 일화나 어머니의 상을 잘 치뤄 효성스럽다는 평가를 들은 것도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

하후현이 정서장군(征西將軍), 가절도독옹양주제군사(假節都督雍涼州諸軍事)가 된 후 사마사와 교체되어 사마사가 호군(護軍)으로 임명되었다. 하후현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장제가 호군으로 있을 때 아문(牙門)에서 자리를 얻고 싶으면 1천 필(匹)을 바쳐야 하며, 백인독이 되고 싶으면 5백 필을 바쳐야 한다는 말이 떠돌았는데 사마의는 장제와 가까워서 어느 날 그를 불러서 그 사실을 물어 보았다. 장제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못하고, 농담으로 낙양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1전(錢)이라도 부족하면 안 되는 법이라고 했으며 사마의도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후현이 장제를 대신하여 호군이 되었지만 이러한 인사를 막지 못했다가 사마사가 호군이 된 후 이런 폐단을 없었다. 즉, 당시 중원에서는 '필(匹)'과 '전(錢)' 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으며, 조예 대 사마지 등의 건의로 화폐를 재건하기 위해 오수전이 발행되었음에도 중원에서는 이런 현물거래가 계속 성행했으며 포백(布帛)의 화폐 기능을 제거할 수 없었다는 걸 보여준다.

249년, 아버지 사마의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대장군 조상을 제거하려 하자 함께 출병, 조상과 그 일족을 제거하였다. 이른바 고평릉 사변이다. 동생 사마소가 거사 직전에야 합류한 데 반해 사마사는 처음부터 사병 3천여 명을 은밀히 민간에 잠복시켜 치밀하게 준비했고 이 사건 이후로 조위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즉,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권력 찬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찬역의 전날, 사마의가 두 아들의 처소를 살피게 했는데 거사 하루전에야 얘기를 들은 사마소가 잠을 이루지 못한 반면 사마사는 편안하게 잘 자고 있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251년에 사마의가 죽자, 사마씨에 장악당한 조정은 (왕을 폐한 명신) 이윤의 아들인 이척이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은 사례를 들어 사마의와 사마사의 관계를 이들과 비유했고 사마사는 황제인 조방에게 무군대장군 벼슬을 제수받았다. 이후 아버지 사마의보다 강력한 권세를 누렸고, 그 정도는 황제 조방을 이미 뛰어넘었다. 이듬해(가평 4년, 252년)에는 대장군이 되었으며 시중, 지절, 도독중외군사, 녹상서사도 겸해 정치, 군사를 모두 아우르는 권력을 거머쥐었다. 위서 제방기 주석 왕침의 위서에 인용된 조방 폐위를 청하는 상소에 따르면 그는 무양후(武陽侯)라는 작위도 새로 받았다.

사마사는 정권을 쥐자 인선을 새로이 했다. 진동장군 도독양주 제갈탄, 진남장군 도독예주 관구검, 정남대장군 의동삼사 왕창, 정동장군 호준, 옹주자사 분위장군 진태에게 국가의 네 방면의 도독을 맡겼으며, 형주자사 양렬장군 왕기, 신성태수 주태, 등애, 석포에게 주와 군을 다스리게 하고, 노육이풍에게는 인재 선발을 맡기고, 부하우송으로 참모를 삼고, 종회, 하후현, 왕숙, 진본, 맹강, 조풍, 장집에게는 조정을 맡겼다. 경제기에 따르면 일단 이런 인사조치로 천하가 자신이 할 바에 경주(傾注)하여 조야(朝野)가 숙연해 졌다. 어떤 이가 있어 제도(制度)를 바꿀 것을 청하니, 경제가 말하기를 "(모시에) '(사사로이) 아는 것이 있어도 아는 것을 (쓰지) 않고, 상제(上帝)의 법을 따르노라(대아 황의편)'하였으니 이러한 것을 시인(詩人)이 아름답게 여기었소. 3대의 선조(先祖)께서 예전(禮典)과 제도(制度)를 (만드셨으니), 마땅히 받들어야 할 바요, 무력으로써 하는 것이 아니니, 망령되게 개혁을 할 수 없소" 하였다.

이때 사마사가 최측근 참모로 기용한 인물은 하남윤/상서 직을 맡고 있던 부하라는 인물이었는데 이 자는 '반 조상 파'라는 틀을 만든다 치면 그 최상위에 등재될 인물중 하나였다. 사마의가 태부로 물러난 뒤 조상이 하안등을 기용하며 정권을 잡을 당시 부하는 조상의 동생 조희에게 '하안을 경계하라'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을 들은 하안은 당연히 격분, 거기에 부하는 이후로도 이런 조상과 하안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아 결국 이 둘의 사이는 엄청나게 벌어지게 된다. 그 전후로 하안, 하후현등이 그의 명성과 후술할 장점탓에 몇번 그에게 등용을 요구할 겸 교류를 위해 찾아갔으나 이를 다 거절하고 친구들에겐 이들의 단점에 대해 신랄하게 까버리며 이와 엮였던 이풍또한 폄하한 적이 있다.

부하가 이렇게 적대적으로 나선건 하안과의 단순한 감정싸움만이 아니라 더 큰 원인이 있었는데, 조예가 황제이던 시절 유소라는 인물이 올린 '고과제'[4]에 대해 최림, 두서등과 같이 격렬하게 반대한 인물중 하나였을 정도로 적어도 인재 임용과 관리에 있어선 보수적인 관점을 신봉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이당시 조상의 행태를 그는 사상적으로 받아들일수 없었던 것. 결국 등용을 포기한 조상 일파에 의해 몇번 목숨이 노려지기도 했지만 친구 순의덕분에 이 위기에서 살아남았고 결국 고평릉 사변이 발발하면서 반 조상파 인물들을 사마가문이 중용하기 시작하자 처지가 좋은 의미로 역변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에 대해 엄청나게 적대했던 만큼 그들에 대해 자세히 알았던 인물이 바로 부하였던 지라 사마사는 그를 자신의 최측근으로 바로 등용한 것.

상술한대로 하안이 한번 까이고도 잠시간은 포기 못했을 정도로 그의 장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인맥. 그는 자신과 사상적으로 대립하는 인물만 아니면 엄청난 친화력을 보였던 인물이기에 수많은 유명인사나 그 유명인사들의 관계자들과 두터운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당장 쟁쟁한 네임드들만 해도 진군의 아들인 진태와 종요의 아들들, 순욱의 아들들 등등 위나라 건국공신 세력인 영천 사대부들의 2세대를 포함해 엄청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사마씨도 명문 사대부이긴 하지만 영천에 비하면 한끗발 밀릴수 밖에 없었고 이곳이 조위라는 점 까지 포함하면 더더욱 그랬기에 그들과 두터운 관계를 맺은 부하를 영입함으로서 그들을 감시하거나 회유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놓은 것. 그리고 이들 영천의 2세대 중에 부하가 그 컨트롤에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대상은 삼국시대 말 최고의 괴재(怪才)이자 사마씨 최강의 사냥개 종회였다.

한편 이런 '사상적 동질성'과 '조상 일파에 대한 정치적 원한' 면에서 부하에 못지 않았던 인물이 바로 유비의 스승으로 유명했던 노식의 막내 아들인 노육이었다. 노육은 조조 시절부터 그의 아래에서 활동해왔기에 이 시점에선 이미 나름 입지가 탄탄한 원로급 인사로 조예 시절 그의 어록들은 그야말로 당시의 주류보수적 임용관인 유교적 덕행과 평판, 명성을 중시하는 인사평가 법의 결정체였었을 정도. 부하와 달리 고과법에 대해선 미온적이나마 찬성하긴 했지만[5] 그와는 별개로 바른 수신과 유교적 덕행에 따른 평가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 역시 하안 등과는 양립할 수 없는 인물이긴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노육은 본래 맡고 있던 이부상서 직을 하안에게 뺏겨 복야로 밀려났고, 그로부터 얼마 안 가 이번에는 사예교위 필궤에 의해 면직됐지만, 워낙 명성있는 원로였던 만큼 여론이 들끓어 할 수 없이 광록훈으로 타협했던 것. 그러나 고평릉 사변 이후 사마의에 의해 바로 그 사예교위에 앉게되어 조상 일파의 처분 결정권자가 되었으니 한편의 멋진 복수극이었다.

부하가 그 젊음을 바탕으로[6] 과감하고 적극적인 형태로 조상 잔당들을 압박할 수 있는 카드라면, 노육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충분히 견제와 위압의 효과가 있는 원로였다. 더군다나 그가 맡은 임무는 인재의 등용. 사마씨 세력과 사상적으로 겹칠 뿐더러 만약 조상의 잔당이 재집권에 성공할 경우 사마씨와 함께 '재보복' 대상 1호에 오를 수밖에 없는 그가 이후 15년에 걸쳐 인재선발권을 틀어쥔 것은 분명 이후 사마씨의 패권 확립에 있어 큰 의미를 갖는다. 이풍과 함께라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경력과 평판, 그리고 '충성도'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으니, 주도권을 쥔 쪽은 물론 노육. 더군다나 이풍을 위해 사마사가 준비한 진짜 역할은 따로 있었다.

노육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사마씨의 사상적 원로가 바로 왕숙. 그는 사마사의 동생 사마소의 장인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왕랑의 아들이자 형주의 대학자 송충에게 사사받은 당대의 석학이기도 한데, 유교사에서 그의 이름은 꽤 오랜 세월 뜨거운 감자였다.

이미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경전에 주를 단 그는 특이하게도 후한 말 학문의 주류 패러다임이었던 정학(정현의 학문)의 열혈 안티였는데, 두 사람 다 금문과 고문을 종합하는 입장이었지만 정현이 금문을 채택한 곳에서는 고문을 채택하고, 정현이 고문을 채택한 곳에서는 금문을 채택했다 할 정도로 왕숙은 그와 철저하게 방향성이 달랐던 것.

이 과정에서 천년의 떡밥이 되는 공자가어와 공총자가 등장한다. 전자는 본래 한서에 기록이 있었지만 유실된 고서며 공총자는 기존 경전들의 내용을 인용해 편집한 책인데, 둘 모두 정현의 학설을 완전히 뒤집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기에 왕숙이 공자의 위세를 빌려 정현을 까려고 주작질 했다는 것이 이후의 해석.(다만 공자가어는 이후 목간본이 발견되어 100% 주작은 아니라고 밝혀졌다) 어쨌든 이런 주작의 술에 더해 사마씨와의 관계에서 얻은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왕숙의 학문은 일가를 이루어 '왕학'이라 명명되고 그의 해석이 학관에 채택되었으며, 과거 조상 정권에서 하안과 그의 현학이 그러했듯 그와 그의 학문은 사마씨 정권의 학문/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이 왕숙도 과거 조상 일파를 비난하고, 또한 트집이 잡혀 면직된 경험이 있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7]

참모의 부하,인사의 노육,학문의 왕숙 - 여기에 (위 리스트에는 없지만) 부하의 친구이자 종회의 형인 종육이 사법부인 정위를 맡게 됨으로써, 사마사는 조상 잔당에 대항하고 조정 내부를 장악할 기반을 굳건히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국경 쪽에서 사마사에게 한 가지 크게 다행이었던 것은, 사마씨에 이런저런 복잡한 추억이 있는 서부 전선이 이 시기에는 내외 모든 요소가 상당히 안정되었다는 것이다. 촉에서는 제갈량의 유지를 이어받은 위나라 최대의 국적 강유가 북벌을 계속해서 주장했지만, 상관인 비의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지 않고 있었다.[8] 또한 관중 일대는 과거 사마의/사마부 형제의 관중 부흥책에 힘입은 바 방위력과 보급 여건 모두가 개선되어, 제갈량 때와는 달리 수도의 지원 없이 자체 병력만을 활용해 촉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도 가능해졌고, 더군다나 서부 전선의 사령관들은 부하처럼 대놓고 사마씨의 사람이거나 종회같이 사마씨가 이용하는 사냥개는 아니여도 사마씨와 가까웠던 곽회, 진태 등이었다.

문제는 동부전선이었다. 조상 잔당의 견제자가 되어주리라 믿었던 왕릉이 오히려 솔선수범해 난을 일으킨 것이다. 그 반동으로 견제 대상인 제갈탄은 오히려 동부 전선의 실권자로 한 단계 뛰어 올랐고, 그 외에도 문흠과 관구검이라는 또다른 위험인물들까지 이곳에 버티고 있었다. 한편 장강 너머 오나라는 이 해 오랜 후계자 다툼의 혼란 끝에 손권이 사망하고 손량이 즉위하며 위나라를 잠시 꿈에 부풀게 했는데, 그러나 얼마 후 사마사는 그 만만해 보였던 오나라에 의외의 강적이 칼을 갈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252년 10월 제갈각이 동흥제를 재건하고 도발해왔을 때 부하의 지구전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12월 1일 제갈탄, 호준 등을 보내 동흥을 포위하는 동시에 왕창에게 남군을, 관구검에게 무창을 공격하도록 했지만 23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이는 제갈탄의 계책이었다고 하는데, 집권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큰 패배를 당하고 조정에서는 장수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었지만 사마사는 "내가 공휴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제장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라고 자기 책임을 인정하며 원만하게 수습에 성공한다.[9][10]

이듬해 5월 제갈각이 20만 대군으로 합비신성을 공격하고, 강유가 이에 호응해 북벌을 하는 위기를 맞으나 우송의 의견을 따라 곽회, 진태로 촉을 막고 오와 전면전을 하지 않고 기다리자 제갈각은 장특이 지키는 합비신성을 뚫지 못하고 손해만 보고 후퇴하기에 이른다. 제갈각은 사마사와 반대로 패전 책임을 회피하려 들고 무리한 재원정을 시도하다 주살당하기에 이른다.

한편 사마사가 황제마저 초월하는 권세를 누리자, 254년 2월 22일 황제 조방이 이풍(李豊), 장집 등과 사마사를 죽이고 하후현을 대장군에 앉히려는 친위 쿠데타 계획을 세우다 발각되었다.[11] 사마사가 이풍을 불러내어 죄를 나열하자 이풍은 계획이 발각된 것을 알고 사마사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이에 화가 난 사마사가 사람을 보내 칼의 고리 부분으로 이풍을 짓찧어 죽였으며, 하후현과 장집 등을 체포해 삼족을 멸하였다. 그해 3월에 황제로 하여금 황후 장씨를 폐하도록 하였으며, 9월 19일 조방을 폐위하고 같은 달 22일 조모를 황제로 세운다.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호삼성은 이 사건에 대해 '왕망과 사마사, 소란은 똑같은 마음이고 왕망이 한나라를 찬탈할 때 왕순을 파견하여 원후에게 요구하였는데, 이와 아주 흡사하다. 나라의 간적에게는 반드시 돕는자가 있느니 천하를 가진 자는 반드시 이를 경계해야 한다'라고 하였다.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망탁조사 출처는 권중달 교수 역 자치통감.

255년에 관구검이 합비에서 문흠 등과 더불어 사마사의 황제 폐위에 대한 죄를 묻고자 군사를 일으켰다. 여기서 특기할만한 지점이 관구검 일당이 '역신' 사마사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으면서도 사마사의 아버지 사마의의 공로를 보아 처벌을 가볍게하고 다른 사마씨, 특히 사마소에 대해서 군자답고 충성스럽다면서 사마사를 대신하라고 말하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결국 반역의 동기 자체가 사마의의 명성과 사마씨의 지위를 인정하고 오로지 사마사만 찬역을 저지르고 있으나 다른 사마씨로 사마사를 대신하여야 한다고 말한다는 것인데, 혹자는 여기서 사마씨 분열을 노리는 관구검의 속셈을 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만큼 사마의가 사마사가 찬역의 길을 가고 있는 와중에도 세간에는 위나라의 영웅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사마소, 사마부, 사마망에 대한 유화적인 인식과 더불어서 말이다.

1월 관구검과 문흠이 병사 6만을 이끌고 회수를 건너자 다른 이들은 여러 장수들을 보내 이를 격파하자고 하였으나 부하와 왕숙은 사마사에게 직접 출병하기를 건의하였다. 이즈음 사마사는 왼쪽 눈 위에 큰 혹이 생겨서 요양 중이었는데, 통증에도 불구하고 직접 보병과 기병 10만여 명을 이끌고 출병하여 계속 전장에서 지휘하였고 문흠을 추격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자신의 군대를 문흠의 아들인 문앙이 혼자서 거의 전멸에 가깝게 격파했다는 소식에 놀라 눈 위의 혹이 악화되었다. 이때 사마사는 도포(또는 이불)를 입에 물고 고통을 참으면서 지휘했는데 도포는 이빨 때문에 헤져 있었고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문앙의 활약으로 문흠군은 항성으로 퇴각하였고, 문흠이 패퇴했다는 것을 안 관구검이 회남으로 달아났으나 안풍진의 도위가 그를 추격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보냈다. 문흠은 오나라로 퇴각하였으며 이로써 회남에서의 반란이 진압되었다.

일설에는 관구검의 난을 진압하기 전에 혹을 도려내는 수술을 했는데 그 후 문앙의 공격에 놀라 눈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결국 사마사는 얼마 뒤 진중에서 허창으로 돌아와 윤달 1월 29일(위서 삼소제기), 혹은 윤달 1월 28일(자치통감,경제기)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준평릉에 안장되었다. 그는 슬하에 딸밖에 없어 후사는 동생인 사마소에게 맡겼으며 사마소의 차남인 사마유가 사마사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한편 진서 경제기의 이 시기 시간 배정이 엉망이기로 유명한데, 관구검의 난에서부터 사마사의 죽음까지 타임라인은 관구검 문서에 잘 정리되어 있으니 참고 바란다.

사실 그의 혹은 악성종양이라는 추측도 있으며, 진압 후 돌아오던 길에 과다 출혈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덤으로 연의에서는 죽자마자 눈이 튀어나왔다는 다소 호러스러운 모습으로 각색되어 있다.

3. 평가

권력을 잡기 위해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도 허용된다는 마키아벨리주의를 몸소 보여준 냉혹한 야심가. 음험한 정략으로는 동세대에서 당해낼 자가 없던 삼국시대 최강, 최흉의 간웅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부친인 사마의보다 조조를 더 빼닮은 인물. 오랫동안 살의를 감추고 타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 한 번에 배신해 죽이는 그의 행동은 음험하고 냉혈하기로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오히려 어떤면에서는 조조 이상으로 간웅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인물이다.

부친 사마의가 조예의 총애를 바탕으로 조휴조진이 사라진 군부의 정점으로 올라서고 조상을 실각시켜 사마씨를 위에서 가장 강한 세력으로 대두시켰다면, 사마사는 아버지의 권력 장악 과정에 손발이 되었으며 부친 사후까지 남아있던 반대 세력을 싸그리 축출하고 사마씨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젊은 시절 산기상시라는 실권은 없으되 화려하고 명예로운 자리에서 관직을 시작한 사마사는 이후 몇몇 관직을 거쳐가다 중호군이라는 실권직에 안착한다. 중호군은 다름 아닌 무관을 선발하고 감독하는 자리. 그런데 비슷한 시기 사마사 최대의 악연이라 할 (전) 처남 하후현이 똑같이 산기상시, 중호군 루트를 밟는데, 이 하후현과 사마사가 중호군 자리에서 인재를 선발한 방향성이 뚜렷한 차이점을 보였다는 점은 흥미롭다.

배송지가 위서에 인용한 세어에서는 '중호군 시절 하후현이 뽑은 인물 중 준걸 아닌 자가 없었고 이들 중 상당수가 나아가 각 주를 다스리는 높은 인물이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고, 진서 경제기에는 '중호군 시절 사마사는 일부러 타인에 비해 공이 높지 않은 자들을 쓰니 다들 사심을 가지지 않았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방향 차이다.

이런 두 사람의 인재 등용관은 위진 교체기의 뿌리 깊은 논쟁과 연관지어 해석되곤 하는데, 일각에서는 이 시기 조상(+하후현)의 일파가 조조의 유재시거 정신을 이어온 데 반해 사마의 정권을 중심으로 한 호족~문벌귀족들은 구품중정으로 대표되는 정치를 이어갔다며 이 두 세력의 대립을 상반된 정치 사상의 대결로 조명하기도 한다. 즉 하후현과 사마사의 서로 다른 인재 등용 방침도 이 두 대립하는 진영의 사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그러나 사마사의 방침에 대해서는 그의 야심을 생각했을 때 그렇게만은 해석할 수 없는, 훨씬 음험하고 악의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하는 추측이 있다. 어쩌면 이미 찬탈의 마음을 굳힌 사마사에게 있어 인사란 '능력과 품성이 뛰어난 인물을 적재적소에 뽑아 나라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닌 '조정 내 자신의 장악력을 확보하는' 것이 지상 과제로 본 것이 아니냐는 것. 그에게는 하후현이 뽑은 타입의 인물들, 곧 결정적인 순간 나라를 위해 자신을 막아서거나 위협할지도 모르는 쟁쟁한 거물들보다는, 스스로 부족함을 알고 자기 의도에 따라 제 목소리를 낮출 줄 아는 인물들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섬뜩하게도 실제로 조상 일파가 숙청된 이후 사마씨 정권이 황실을 향해 노골적인 패역을 저지를 때도, 의외로 그 반향은 항상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

또 진서 경제기를 들여다 보면 초반부터 상당히 흥미로운 떡밥이 눈에 띄는데, 바로 젊은 시절 사마사와 함께 이름을 날린 인물로 '하안'과 '하후현'이 나란히 거론되고, 또한 하안주역 계사전을 인용해 나머지 두 사람을 칭찬하고 있는 것.[12]

사실 조상 일당은 흔히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정쟁적 인사 면에서는 꽤 무른 구석이 있었다. 조상과 하안이 바랐던 것은 사마씨의 완전한 배제가 아니라 차세대인 사마사 등을 자신들의 일파로 흡수해 조상 중심의 통합 정권을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조상 라인의 하후현과 사마의 라인의 사마사를 나란히 자신의 아래에 둔 하안의 발언은 이런 차세대 내각의 형성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그 이상의 큰 야심을 품은 사마사에게, 이러한 하안의 구애는 칼자루를 내준 꼴이나 다름없었다. 조상의 집안은 바로 그가 자신의 손으로 죽였던 전처의 외가 쪽 가문. 그런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자신을 여전히 인척으로 대하며 친근함을 내비치는 그들의 호의를, 사마사는 최대한 악용했음이 틀림없다. 그렇게 한편으로는 그들의 방심을 유도하고 한편으로는 그들의 정보를 캐내며 사병을 준비해 고평릉 사변의 1등 공신이 된다. 사건의 백미는 그 뒤의 일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정말로 사마씨 3부자가 자신들을 살려주리라 믿었던 조상과 하안의 모습은 어이가 없을 정도인데, 어쩌면 이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호의를 베푼 대상인 사마사에 한 조각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작 그 사마사가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장본인이었음은 깨닫지 못한 채. 이는 조상의 목숨은 보장된다는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변에 가담했다가 조상이 죽자 자신도 죄책감에 못 이겨 병사한 장제에게도 그러하다. 하후현하후패가 각각 초연한 죽음과 망명을 선택했던 것도 사마사의 이런 교활함과 냉혈함을 깨닫고 그 아래에선 도저히 자신들이 살 길이 없었다는 판단이라면 이해가 간다.

사마사는 이러한 역사적인 정황을 일단 배제하고 극적인 요소로서도 따져봐도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구 왕조가 건재하던 젊은 시절부터 야심을 품고 십 수년간 뱃속에 칼을 품은 채 때를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자신의 야심에 방해가 될 인물들의 호의를 받으며 친하게 지내다가, 결단의 순간 칼을 빼들어 저항하는 이들을 모두 제거하고 신 왕조를 세울 기반을 마련했으나, 정작 그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5년 남짓에 불과했다. 그가 기틀을 다진 왕조는 후한 말부터 쌓여온, 그리고 상당 부분 그의 일족이 심화시킨 온갖 사회적 모순에 짓눌려 허무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팔왕의 난영가의 난으로 이어진 혼란상을 그 개인의 탓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겠으나, 서진의 사회 구조적인 모순은 사마씨 일가의 후손들뿐 아니라 온 중국의 백성들에게 비극을 가져왔다. 아내를 죽이는 비극으로 촉발된 젊은이의 야망이 온 대륙을 불태우는 비극으로 끝난 것이다. 굉장히 드라마틱하다.

그가 한평생 노력해온 찬탈의 길은 아쉽게도 짧은 수명으로 본인이 스스로 완수하지 못했고 정통성과 황권 약화를 매끄럽지 못하게 매듭지은 동생인 사마소의 황제 조모시해로 인해 새 왕조의 기반이 탄탄치 못했다. 권력다툼에선 살기 위해선 누구든 짓밟아야 하지만 상황을 보면서 명분과 실리를 따져서 숙청을 해야한다. 사마소는 자기 형과 달리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설사 황제가 허수아비이고 자신이 실권자이고 찬탈의 야심을 가지고 있었어도 자신의 상관이고 군신관계였다. 어느 정도의 명분과 욕을 덜 먹는 쪽으로 자신도 형처럼 조모를 백주대낮에 시해하지 않고 생포하여 페위시켜야 했다. 그러나 사마소는 감정적으로 조모를 시해하고 민중들의 비난이 심해지자 가충을 처벌하라는 진태의 타협안을 무시하고 정작 가충의 명령대로 한 것 밖에 없는 성제성쉬에게 모조리 책임전가 하였다. 자신에 동흥제 전투에서 패배하였을 때 부하우송의 조언을 듣지 않아 패배한 책임을 인정하고 자신이 책임을 자신이 짊어지고 부하들의 책임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자신의 형인 사마사의 리더십과 대조되었다. 그래서 촉한의 정벌이라는 도박수를 건 것이다.

일각에선 실제로 실권 찬탈과 신 왕조 건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의지와 능력을 지니고 있던 사마사가 끝까지 찬탈의 길을 완수했다면 서진 역사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겠냐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한다. 관료 체계 밑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성장 배경이 건국 군주에게 확실한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 사마사에게는 그런 야심을 실현할 능력과 더불어 그를 도울 부하, 우송 같은 괜찮은 참모들이 있었다.당장 사마소에게 붙어있던 가충, 순욱, 종회 같은 인간들 생각하면... 사마사 본인이 아들이 없어 불안정할 수 있는 후계 문제도 사마소의 아들로 사마사의 양자가 되어 있었던 사마유가 있었고, 사마유가 막장 서진의 황족들 가운데 가장 나은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마사-사마유 라인이 사마소-사마염-사마충보단 낫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이 완전히 허튼 것만은 아니다.[13]

별개로 당대 일류급인 정략-군략을 겸비한 아버지인 사마의에 비해 군사적 능력은 약간 떨어져 보인다. 동흥 전투나 다 이긴 낙가 전투에서 문앙의 습격를 받아 충격를 받아 일찍 사망한다는 것.[14] 특히 동생인 사마소가 비슷한 상황이었던[15] 제갈탄의 난을 빈틈이 없이 처리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반란들을 무난하게 정리, 촉 정벌때 보인 나름 뛰어난 사마소의 군사전략을 고려하면 아버지의 군재는 사마소가 물려받았지만 반면에 정략은 부족했고 형 사마사는 반대로 아버지의 정략을 물려받았지만 군략은 동생에 비해 모자랐다고 분석할 수 있다.

3.1. 정반대의 간극에 서 있는 두 남자 - 강유와 사마사

삼국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영웅군상들 가운데 라이벌도 있고 친구도 있으며 증오의 관계, 애증의 관계도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같은 시대에, 서로 영향을 주지 않았는데도, 마치 상을 반대로 비추는 거울과 같이, 그린듯 정반대의 길을 걸은 두 남자가 있다. 바로 촉한의 강유조위의 사마사다.

우선 서로의 생애를 보자. 강유는 천수지방 호족 출신으로 아버지 없이 자란 고아, 협객에서 군중랑까지 승진한 인물이며, 망명후 독고다이 무기반 장군의 길을 묵묵히 걸으면서 중앙정계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30여 년을 오로지 촉한이라는 국가를 위해 멸사봉공하면서 분투한 끝에 나라는 망하고 몸은 전투중에 갈기갈기 찢겨진다. 반면 사마사는 일급명문 사마가 출신에, 천재적인 군략/정략가 아버지 밑에서 출세가도를 달린다. 강유와 달리 아버지의 기반을 물려맏아 황제를 위협할 정도로 대권을 장악했고 의외로 일찍 죽긴 했으나 천하는 그가 생전에 닦아놓은 레일 위로 움직였다.

서로의 능력 역시 거울과 같은 정 반대다. 강유는 당대 전술의 귀재라고 할 만했지만 전략은 선배들이 깔아놓은 레일을 그대로 달리는 정도였으며 정략은 그가 툭하면 촉한 정계의 샌드백(...)이 되었다는 기록들이 입증하듯이 약했다. 반면 사마사의 경우 전술은 애매하지만 전략가로선 당대 일류, 정략분야에서는 가히 신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 강유의 동료들인 장익, 요화, 호제, 동궐 등은 강유의 북벌을 전적으로 반대하거나 방해가 되는 경우가 다수였으나 사마사의 경우 관서 전선의 명장 진태, 등애, 회수전선의 왕기, 사마사의 순욱이라고 할 수 있는 부하등 쟁쟁한 참모진을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에 강유는 마땅한 후계자도 없었던 반면 사마사는 제국창업의 최후 실행자인 사마소가 후계자로 존재하고 있었다. 심지어 강유는 정현의 학문을 계승하고 있었지만 사마사는 현학의 무리들을 죄다 숙청한 이후론 정현의 학문을 부정하는 왕숙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밀고 있기까지 했다.

이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 될 수 있을것이다.

(이러하니 조방은) 천서(황제의 계보)를 잇기에 불가합니다. 신들은 한나라 곽광의 고사에 의거해 황제의 새수를 거두고 제왕으로 삼아 번국으로 돌아가게 하시길 청합니다. - 사마사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며칠만 더 치욕스러운 일을 참아내십시오. 신이 위태로워진 사직을 다시 안정시키고 어두운 해와 달을 다시 밝히겠습니다. - 강유

3.2. 고평릉 사변의 주도자는 사마사?

실제로 고평릉 사변은 사마사가 주도했고 사마의는 고령으로 얼굴마담 격으로 나섰다는 주장도 있다.

우선 사마의가 칭병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게 된 것이 진서 선제기에 따르면 247년 5월부터이다.[16]이승의 일화는 248년 3월로 기록되어 있다.[17] 그리고 선제기에 따르면 조상하안은 사마의의 병이 위중하다 여겨 마침내 무군지심(無君之心)을 품으니 장당과 더불어 은밀히 공모해 사직에 해를 끼치려 도모하여 그 기일이 멀지 않았고 사마의 또한 이를 은밀히 방비하니 조상(曹爽)의 무리들도 사마의를 자못 의심하게 되었다라고 하는데, 어쨌거나 핵심은 이때 사마의가 꾀병이 아니라 진짜로 아팠기에 조상의 행동을 조정에 나가 방어하지 못했다는 것.[18]

250년에는 '사마의가 오랜 병으로 조청(조현朝見, 황제를 배알함)하지 못하자 매번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천자가 친히 선제의 사저로 행차해 자문을 구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251년 4월에는 왕릉의 난이 있고, 사마의는 마지막 친정을 하여 왕릉을 토벌한다. 6월에는 다시 '사마의가 병으로 앓아누워 가규, 왕릉에게 해를 입는 꿈을 꾸니 이를 매우 꺼림칙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8월에 사마의는 마침내 사망한다. 247년 68세 부터 251년 72세에 이르기 까지 사마의는 거의 내내 칭병이나 와병 상태였다는 것이다.

선제가 장차 조상을 주벌하려 하매, 심모(深謀)와 비책(祕策)은 오로지 경제와 더불어 몰래 획책(劃策)하였는데 처음에 경제는 은밀히 결사대 3천을 양성하여 민간에 흩어져 살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하루아침에 모여드니 사람들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였다.

진서 경제기

그리고 '꾀병'을 부리던 시기에 사마의는 장남 사마사에게 3천명이나 되는 대규모 비밀 사병을 조직하게 시키고 있었다. 이무렵 사마씨의 반란 모의는 진서의 기록에 따르면, 사마소조차도 직전까지 배제되었고, 사마의는 사마사와는 모든 계획을 공유하고 있었다.

새벽에 사마문(司馬門)으로 병사를 모이게 하니, (경제가) 안팎을 진정시켰고, 진을 친 것이 심히 가지런하였다. 선제가 말하기를 "이 아이가 마침내 하였구나." 하였다.

진서 경제기

물론 사마사의 난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사마의의 무군지심(無君之心)이야 충분히 의심해 볼만한 정황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대규모 피의 숙청을 직접 감행한 것을 보면 그가 고평릉 사변의 중심인물인 것은 당연하지만, 이 가설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실제적으로는 사마의는 얼굴마담 역이고 주동자는 사마사라는 것이다. 문제는 사마사는 아버지 사마의에 비해 업적이 매우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사는 아버지의 업적을 빌리고 사마의가 실제적으로 주동한것처럼 꾸며 어떻게든 반란의 정당성을 얼버무리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래서 아버지의 업적을 이용하기 위해 병든 아버지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웠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사마의가 꾀병으로 속였다고 거짓말을 해 사마의가 주도한 것처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선제기와 정사 삼국지 조상전에 따르면 '이승이 서울을 떠나 형주자사로 부임하는 길에 선왕을 방문했다. 선왕은 병이 위중한 척 하여 자신의 쇠약한 형상을 보여주었다. 이승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사실이라 여겼다.' 라고 말해서 양측 사서 모두 명백하게 사마의가 말짱한 컨디션으로 조상일파를 속이기 위해 꾀병을 부렸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사마의가 꾀병을 부릴때 모습과 고평릉 사변에서 말짱한 정신으로 조상 일파를 숙청하는 모습은 명백히 다르다. 사마의가 정말 아팠다치면 사마의가 주도한 숙청이나 정권 획득에 있어서 그토록 활발하게 활동한게 설명되지 않는다.

4. 가족 관계

그의 첫 부인으로 남편의 야심을 눈치챘던 하후휘는 남편과 점차 사이가 벌어지다 234년 돌연 음독사했다. 정황상 독살로 보는 의견이 많다. 독살설을 긍정할 경우 더욱 소름끼치는 게 아내를 죽여놓고 그녀의 남매인 하후현을 비롯해 조상, 하안 등 훗날 자기 손으로 죽이는 인사들과 교류하며 괜찮게 지냈다. 그것보다도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자를 자신의 야심을 위해 죽여버린거다... 위에서 누군가 조조랑 비교하기도 했는데. 적어도 조조는 자신의 여자에게만큼은 따뜻했다 이는 조조의 최후유언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19]

고평릉 사변 시점까지 조상 일파는 사마씨와 조씨의 다툼을 너 죽고 나 살자식 유혈 권력 투쟁으로 바라보진 않았다. 사마의 본인이 조상 일파인 이승 상대로 노망쇼(...)를 벌일 때조차 "사마사, 사마소 형제는 군(이승)과 우의로 맺어져 있으니 서로 저버리지 마시오."라고 특별히 언급하며 울고, 이승 역시 정말로 사마의의 병환이 심하다고 생각해 조상에게 이 얘기를 전하며 그가 그리 된 것이 애처롭다고 울었을 정도. 이렇게 조상 일파는 사마의를 견제하고 불편한 사이가 되면서도 그 아들이나 측근들에겐 특별히 제약을 가하지 않았고 고평릉 사변 때도 사마의를 믿고 순순히 무장 해제 해버렸다.

첫 부인 하후휘 사이에서 딸만 다섯을 보았고, 두 번째 부인인 진북장군 오질의 딸과는 자식 없이 금방 이혼, 세 번째로 맞아들인 채옹의 외손녀 양휘유와의 사이에서도 자식이 없어 이후 그의 직위는 동생인 사마소가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리고 사마소의 차남 사마유가 양자로 사마사의 계보를 잇게 되었다. 후에 진왕이 된 사마소는 형인 사마사를 경왕으로 추존하였으며, 평소에도

천하는 형님의 천하이다.

라며 형이 다진 기반이니 명목상으로라도 형의 양자인 사마유가 세자 책봉 시 사마염 대신 뒤를 이어야 한다고 했다. 물론 형님이 죽고 없어진 이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두 형제간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던 듯 하다. 그러나 조비/조식 형제의 사례와 같이 주변인의 만류로 사마염이 뒤를 잇게 된다. 그리고 이후 조카 사마염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그는 큰아버지 사마사에게 묘호와 존호를 올려 세종 경황제로 추존하였다.

사마사는 비록 다른 데서는 냉혹했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효자였던 모양인지, 사마의가 장춘화를 늙었다고 구박하자 장춘화는 분해서 단식투쟁을 했고 아들들, 정황상 장춘화의 장남인 사마사도 어머니 편을 들어 단식을 했다. 사마의는 늙은 마누라는 어떻든 상관없지만 뛰어난 아들의 몸이 상할까 싶어결국 장춘화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247년 장춘화가 죽자 장남 사마사가 어머니 장춘화의 상례를 치루었는데 지극히 정성을 다했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진서 경제기)

5. 미디어 믹스


  1. [1] 사마소가 조조와 같다고 거부
  2. [2]진서》가 당(唐)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진서》가 참조한 서진이나 동진의 기록에서야 당연히 윤색이 들어갔겠고 이 때문에 《진서》 자체도 문제가 많은 사서가 되었지만, 남북조의 피비린내 나는 난세를 뚫고 세워진 으로선 그 모든 난세의 시발점이자 원흉격인 사마씨의 평가에 기름칠을 해줄 이유가 없다. 물론 《진서》 자체가 교차 검증 안 되는 허황된 기록을 많이 넣어서 문제가 되긴 하나, 적어도 사마씨 왕조 황제 개개인의 품성이나 야심에 대해서는 냉담하기 그지없다.
  3. [3] 기록상으로는 단순히 독을 먹고 죽었다고 되어 있지만, 정황 상 사마사에게, 또는 그가 아니더라도 사마 가 사람에게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4. [4] 이름 그대로 관리의 공과 과를 평가하는 제도.
  5. [5] 애초에 고과법 자체가 그 뿌리가 본인에게 있었기에 크게 따질수도 따질 의미도 없었다.
  6. [6] 최고권력자가 된 것 치곤 상당히 어렸던 사마사보다도 한살 아래였다.
  7. [7] 여담이지만,이 사마씨/왕씨 인척관계는 양측의 안티들에게 훌륭한 깔 거리를 남겼다. 사마씨 안티들은 주작질도 서슴치 않는 엉터리 학자와 사돈 맺은데서 사마씨의 도덕 수준이 빤히 보인다고 까고, 왕숙 안티들은 순수한 학문적 성취가 아닌 사마씨 권력과의 인척관계로 일가를 이룬 왕숙을 매식자/어용학자라 비난한다.
  8. [8] 바로 이듬해에 비의가 암살당하면서 사정이 바뀌긴 한다.
  9. [9] 이 앞뒤가 안맞는 말들에 대해선 한진춘추, 경제기 모두 딴 소리들을 해대고 있으니 적당히 넘기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10. [10] 사마사 동흥에서 발려 놓고 '공휴 말 안들은 내잘못' 운운은 예전에도 말했듯이 미스테리긴 하다만, '안건' 자체는 채택해 놓고 세부 전략 면에서 말을 안들었던 것이라고 넘어갈 수 있긴 한데...근본적인 의문은 동흥 전투 자체를 막으려 했던, 그리고 사마표 전략 편에서 보이듯 당시 '이쪽 말을 들었어야 옳았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던 부하(+다른 발안자?) 쪽의 말을 안 들은 것을 후회해야 맞지 않냐는 것. 다만 이 부분도 정치적인 이유였다는 쪽으로 해석은 가능하다. 제갈탄이야 뭐 나중에 갈라서게 되긴 하지만 최소한 이 시점까지는 '안고 가려했던 회색분자'고,부하는 완전히 제 사람이니...애초 이 자책쇼가 '부하들의 허물을 자신의 것으로 돌리는 참군주' 상을 위한 퍼포먼스인 만큼 스스로 자책해 놓고 제 오른팔인 부하를 띄워주기 보단 입지 미묘했던 제갈탄 쪽의 체면을 세워 주는게 보기에도 그럴싸하고,새장안의 새가 아닌 새장 밖의 새에 모이를 주는 것이 된다...그리고 애초 부하가 이 놈 뭐 지 말 씹혔다고&논공행상 제대로 안됐다고 삐지고 그런 타입도 아닌것이고.
  11. [11] 이때 하후현은 계획이 자세하지 않다는 지적을 했으나 결국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12. [12] "드러내지 않은 도리까지 깊이 헤아려 능히 천하의 뜻에 형통한 것은 하후태초이며, 사물의 징조를 엿보아 천하의 대사를 이룰 만한 인물은 사마자원이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쾌속하고 행하지 않으면서도 도달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결국 자기 잘났다는 소리
  13. [13] 물론 서진 멸망의 모순을 심화시킨 건 사마씨 정권과 문벌귀족들이라는 점을 보면, 그렇게 크게 달라졌을지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사실 사마염이 했던 것처럼 각지에 군사력이 있는 왕들이 있어도 제대로 돌아가는 중앙 정부가 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런 장치가 꼭 완전히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사마염이 중앙 정부 기능에 대해 방심해버린 건 정말 큰 잘못이었지만.
  14. [14] 다만 문앙의 먼치킨스러운 실력을 감안하면 그럴 만도 했고, 사마사는 심한 지병을 달고 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15. [15] 같은 상황인 것이 맞긴하나 제갈탄의 난 당시에는 제갈탄이 동오과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킨지라 오히려 사마소가 불리했다. 그나마 오나라 총사령관이 역대급 바보라서 다행이지만
  16. [16] 사마의의 아내 장춘화는 247년 4월에 사망.
  17. [17] 삼국지 조진 자 조상전에 따르면 248년 겨울이라고 되어 있다.
  18. [18] 그러나 정작 정사 삼국지와 배송지 주에는 사마의의 주장 외에 조상일파가 딴 마음을 품었다는 기술 자체가 없다. 애당초 조상이나 하안이 무군지심을 품었다는 증거도 부족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마의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자 군권을 주면 살려줄것이라고 안이하게 믿은 조상이나 사마사를 자신의 파벌인 하후현과 같은 반열에 두고 친하게 지내다 고평릉 사변 이후 자신과 관련된 이들을 고발하면 살아날수 있을거라 생각한 하안의 행동이 설명이 안 된다. 선제기가 사마의를 비호하기 위한 기록을 인용했다는 증거. 조상이 무군지심을 품었다는 것도 사마의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사마의가 진짜로 아팠기 때문에 역심을 품은 조상일파를 조정에서 방어하지 못했다는건 맞지 않는 셈인것이다.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조상의 무군지심이라는 무리수 없이 바로 사마의의 꾀병이라는 독립요인이 존재하기도 하고, 자치통감도 조상이 무군지심을 가졌다는 내용을 기재하지 않고 정사 삼국지의 기술을 따랐다.
  19. [19] 하후휘는 사마사와 금슬이 굉장히 좋았으며 유일하게 사마사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본 부인이다. 무려 20대 중반의 부부가 자식을 5명이나 낳았다는 것은 둘의 사이가 아주 좋았다는 반증. 당연하지만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가히 셰익스피어의 비극 빰치는 로맨스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여담으로 하후휘의 아버지인 하후상 또한 삼국지에서 가장 잘 알려진 로맨스 스토리 중 하나의 주인공이다. 참고로 이것도 비극(...). 부전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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