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태사공(太史公)
사마천
司馬遷

최종직위

중서령(中書令)

사마(司馬)

(遷)

자장(子長)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145년 ~ 기원전 86년?

고향

섬서성(陕西省) 용문(龍門)

1. 개요
2. 생애
3. 말년
4. 평가
5. 기타
6. 관련 문서

사마천의 사기는 2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위대한 유산으로 숭앙받지만 유철이란 이름은 누가 기억하는가?

중국 역사학자 펑쉐린

1. 개요

중국 전한의 역사가. 《사기》의 저자. 동양 역사학의 시조, 아니 동양에서 역사라는 학문을 정립한 사람이라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닌 위인. 서양의 헤로도토스 정도를 빼면 역사학계에서 그 정도로 찬사받는 인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특히 사기를 쓰기 위해 영 좋지 않은 곳포기했다는 점에서 더욱 유명하다.[1][2]

2. 생애

태사공서(사기)의 맨 마지막 부분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는 사마천 자신이 쓴 자서전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기본적인 공부를 마친 후 관직으로 나가기 전인 10대에서 20대의 긴 기간을 중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적을 탐방하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전해듣는 데 썼다고 한다.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천문, 역법과 학문을 연구하는 직책인 태사령(太史令)[3]이었다. 한무제가 봉선을 거행하자 이 역사적인 현장에 자기도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참석하지 못하고 태산 아래에서 대기하란 명을 받게 되었다. 사마담은 실망한 나머지 몸이 급속도로 쇠약해져 아들 사마천에게 자기가 집필하던 역사서를 완성할 것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난다.

참고로 봉선은 중국의 황제들이 하늘에 대해 지내던 일종의 제사로, '나처럼 위대한 황제면 봉선을 지낼 정도로 위대하도다'란 일종의 과시이다. 그 시초는 주나라 때부터라고 하나 정치적 행사(?)가 된 것은 진시황이 처음이고, 한무제가 규모를 더욱 키웠으며 이후 후한광무제, 송진종명군 혹은 시대를 잘 탄 행운아들이 봉선 의식을 거행했으므로[4] 진짜 시대를 잘 만나고, 황제의 신임이 두터워야 간신히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런 것을 놓친 사마담이 실의에 빠질 만하다.

그 후 아버지의 직책인 태사령을 물려받아 태사공서를 집필하던 도중, 보병 5천으로 분전하다가 흉노족 8만에게 포위당해 항복한 장군 이릉(李陵)을 변호하자 한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사실 사마천은 이릉과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지만[5], 그의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제의 미움을 사 옥에 갇히고 만다.[6]

무제는 옥에 갇힌 사마천에게 형벌을 선택하게 했다. 당시 사마천이 택할 수 있는 길은 1) 돈 50만 전을 내고 풀려나기[7], 2) 그냥 죽기[8], 3) 궁형[9] 셋 중 하나였는데, 당시 50만 전은 병력 5천을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을 정도[10]로 거금이었는데 거부나 권세가가 아니었던 사마천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고[11], 결국 선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궁형을 받고 고자가 되었다. 《태사공자서》에 의하면 궁형을 당했을 때 "이것이 나의 죄인가! 이것이 나의 죄인가! 내 몸이 훼손되어 쓸모가 없어졌구나!"[12]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이 궁형으로 그는 몸에도 마음에도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여름에는 냄새 때문에 가족들도 멀리했다고 하며 보임안서에서는 하루에도 장이 아홉 번 뒤틀린다(장일일이구회腸一日而九回)며 육체적인 고통을 호소했다. 게다가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이후 친구 임안(任安)[13]에게 보내는 편지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죽고만 싶다고 쓴 기록이 보인다. 이후 옥중에서도 역사서를 계속 집필했으며, 훗날 무제의 신임을 되찾아 중서령의 자리까지 올랐다.[14]

사실 한무제가 대노한 이유도 꽤나 어이없었는데 이릉과 같이 출전한 이광리는 여동생 이부인이 무제의 애첩이라 '편애 모드'가 없다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반면 이릉은 조손 삼대가 무제와 꼬인 관계였는데 그의 할아버지 이광은 비장군으로 불리며 손꼽히는 명장이었지만 무제의 사주를 받은 위청에게 힐문을 당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했다. 또 작은 아버지 이감도 나름 흉노를 토벌하여 공적이 있었지만 이를 위청에게 따졌다가 사냥터에서 곽거병에게 살해당한다.[15] 물론 공식적으로는 사슴뿔에 찔려 사망했다고 했지만 이릉이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총대장 이광리는 패했는데 이릉은 압도적인 열세를 무릅쓰고 8일 동안 저항하다 끝내 투항한다.

이런 일로 궁형을 택해야 했던 사마천은 그야말로 안습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총대장이었던 이광리 또한 나중에 무제 말년의 후사문제에 휘말리게 되자 흉노와 싸우라고 준 군사들을 끌고 망명해버렸고, 사마천을 성불구자로 만들면서까지 이광리를 두둔했던 무제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장안에 남아 있던 그의 일족을 모두 몰살해버렸다. 투항한 이광리는 호록고 선우의 사위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오래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호록고의 모친인 전대 선우 저저후연지가 병에 걸리자 산 제물로 바쳐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는 먼저 투항해서 정령왕이 되었던 위율이 호록고에게 받던 총애를 이광리에게 뺏기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꾀를 써서 무당을 매수했고, 무당은 위율과 함께 선우한테 이광리를 제물로 바치면 모친이 나을 거라고 꼬드겼기 때문(…).

그래도 나중에는 한무제가 이 일을 후회했는지 당시 사마천을 비방하거나 처벌하라고 했던 사람들을 싹 다 죽여버리고(...) 사마천을 불러 '남자가 그까짓 거(?) 없는 게 뭐 대수냐! 겨우 그런 걸로 너무 절망하지 말고 당당하게 어깨 펴고 다녀라 하하하'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위로했다는 기록이 있다. 상하이 조심영에게 크로스이용에게

3. 말년

태사공서》 작성 이후의 기록은 전무해서 알 수가 없다. 다만 한서 사마천 열전에 '그 재능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고통을 당했으니 그 최후가 평안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말년이 영 좋지는 않았는 듯.[16] 그의 사망연도 또한 정확하게 기록된 바는 없으나 기원전 86년 즈음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마천의 고향이라는 섬서성 한성시에는 그의 후손들인 동(同)씨와 풍(馮)씨들이 거주하고 있다. 사마(司馬)라는 성이 아니어서 이상할 듯 하지만 동(同)은 사(司), 풍(馮)은 마(馬)를 변형한 것인데 이것은 사마천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사마천의 죽음에는 자살설을 비롯해 여러 설이 있는데, 그 후손들은 사마천이 상기 행적 이후 또 한번 황제를 비판해 노여움을 사 처형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일족들은 성씨를 둘로 나누어[17] 사(司)씨, 마(馬)씨, 아니면 성씨 한자를 변형시켜 동(同)씨, 풍(馮)씨 등으로 바꾸면서 숨어 살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상당히 먼 후대에 와서야 사마천의 후손으로 다시 공인되었기 때문에 가문의 역사에 비해 대수가 상당히 적다. 《태사공서》가 걸출하긴 하지만 후한시대까지도 방서(謗書), 즉 정부를 비방하는 위험한 책으로 불렸다는 점, 그리고 한무제의 까탈스러운 성격만 보더라도 개연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18]

하지만 이미 전한 말기에 세상에 나와 <태사공서>를 면학하고 초사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며, 다행히도 지금까지 <태사공서>는 전해지고 있다.

4. 평가

죽음 대신 치욕스러운 궁형을 택한 선택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두고두고 그를 멸시했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더욱 발분해 기원전 90년 경, 중국 역사서 중 가장 중요한 책으로 손꼽히는 《태사공서》를 완성한다. 이 태사공서가 훗날 이름이 바뀌어 전하니 그 이름이 바로 사기다. 사기는 그 책이 사찬서(私撰書)임에도 중국의 정사인 24사에 항상 포함되면서 나머지 사서를 압도하는 위엄을 뽐냈다. 사기와 한서, 삼국지, 후한서의 이른바 '전사사(前四史)'를 제외한 다른 정사서는 모두 관찬서(官撰書)이다.

《태사공서》는 그동안 춘추로 대표되는 편년체(編年體) 역사 서술 방식과 구별되는, 본기(本紀)·열전(列傳)·지(志)·연표(年表) 등으로 구성하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인 기전체(紀傳體)를 확립하는 시발점이 되었고 이후 동양 역사서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태사공서》에는 한무제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아무리 자신을 고자로 만들었다고 해도 당대의 권력자이며 황제인 한무제를 사마천 자신이 비판했으리란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후세의 가필이란 의혹을 받는다. 하지만 사마천은 잃을 게 없는 인물이었기에 (본인 스스로도 자기는 궁형을 받고도 "치졸하게"[19] 살아있는 이상 자기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란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어차피 죽을 마당에 황제를 욕한다 해도 별 페널티는 없었기 때문에 이판사판으로 나왔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데다가 가필이라는 물증도 없다.[20] 한문학자들 가운데서는 효무제본기의 문체가 지나치게 다른 부분과 달라 후대의 가필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그 외에도 한무제의 전 황제인 한경제 본기도 그 내용이 너무 단조롭다는 이유로 가필 의혹을 받고 있다.

사마천 이전에 역사라는 개념은 주로 역(歷)이라는 한자로 표기했는데 이것은 1년의 개념을 준 달력에 중심을 둔 생활중심의 개념이었다. 하지만 사마천 사후로 역사(歷史)라는 단어가 탄생했는데, 이는 역사의 개념이 도덕적인 평가를 중심으로 한 지금의 역사로 바뀌었다는 것이자 태사공 사마천의 업적을 기리겠다는 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사마천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상징이다.

사마천은 단순히 역사서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문학의 영역에도 큰 영향을 줬다. 서사문학으로서의 전(傳)이라는 장르는 사마천의 태사공서 중 열전에서 비롯되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특히 한문학에서는 문학과 비문학 간 경계가 불분명하여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 열전의 구조와 정신을 그대로 본딴 실전이 나타나고, 여기에 허구적 형상화를 거친 탁전,[21] 가전 등의 형태가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몇몇 전들의 경우 아예 사마천의 열전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이 가전은 훗날 소설(小說)로 이어지는데, 주로 단일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전책 양식의 소설에 영향을 미쳤다.

5. 기타

  • 사마천이 남긴 대표적인 글로 알려진 ≪사기≫와 <보임안서(보임소경서)> 외에도 몇 편이 더 남아 있는데[22] 반고의 ≪한서≫·<예문지>에 따르면 여덟 편의 산문과 ≪사마천집≫ 한 권, ≪소왕묘론≫ 두 권이 더 있다고 한다. 다만,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고, 두 편의 산문[23]과 ≪소왕묘론≫ 일부만이 다른 책들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24]

  • 궁형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수술 후 생존확률이 줄어드는데 당시의 수술기술로 40대 후반인 사마천이 궁형을 택했다는 건 자존심은 자존심대로 잃어버리고 자칫 목숨까지 같이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특히 사마천은 궁형으로 인해 '하루에 9번씩 창자가 뒤틀린다'라고 할 정도로 신체적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이 수모와 고통을 감당하였고 결국 동양 역사학의 시조로 평가받는 대업을 이루게 된다.
  • 돈을 내고 형을 면제받지 못한 것이 너무나 큰 아쉬움으로 남았는지, 사마천은 경제적인 면을 주로 다룬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여러 부자들의 이야기와 함께 돈만 많으면 고자도 되지 않고 황제 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 수 있으니 가급적 돈을 많이 버는 게 좋다는 식의 서술을 써놓는다.
  • 그의 아내는 유씨(柳氏)였고 그 딸[26]이 낳은 외손자 양운(楊惲)[27]은 사기를 보관하고 있으면서 이를 익히다가 세상에 내놓았으며 전한을 멸한 왕망이 사마천의 후손을 찾아서 사통자(史通子)라는 사관 벼슬을 주었다.
  • 후대의 환관들에게는 강철장군이라는 칭호와 함께 환관들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물론 사마천 훨씬 이전에도 환관은 있었지만 상징적 의미의 시조.
  • 그의 이름을 딴 도 있다. 소행성 12620 쓰마첸(Simaqian)은 바로 사마천의 중국어식 발음에서 이름을 따왔다.
  • 그를 소재로 한 시들도 있다.

사마천 (司馬遷)[28]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29]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30]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더 튼튼하고

좀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 끌 수 없는

제 눈 속의 불

천년의 역사에다 당겨 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 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 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 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년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 일본의 소설가인 시바 료타로가 그를 매우 존경했으며, 필명(본명은 후쿠다 사다이치)을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郎)로 만든 이유도 '자신은 사마천을 따라가려면 멀었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 사마천 사후 훗날의 진태조 사마의는 같은 가문의 사람이지만 사마천의 직계후손은 아닌 관계. 즉, 전주 이씨로 비유하면 조선 태조 이성계이안사의 후손이긴 하지만, 조선왕조 직계가 아닌 전주 이씨 가문의 한 위키니트 이 아무개의 관계-본관은 같으나 분파는 다른 관계-로 볼 수 있다. 사기에 의하면 사마천의 가문은 원래 주나라 때부터 이어진 가문으로 사관으로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어진 가문은 주나라를 떠나 위(衛)나라, 조(趙)나라, 진(秦)나라 등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한편 진나라로 간 사마씨 중에 사마착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진왕 혜문왕에게 촉을 정벌할 것을 고하였고 이에 사마착이 촉을 정벌하여 진왕으로부터 촉의 수장으로 임명된다. 그 후 사마착의 손자 사마근은 장평 전투에서 조나라를 대파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백기가 숙청될 때 두우에서 함께 처형당하고 만다. 사마근의 손자 사마창은 진나라에서 철을 관장하는 관리가 된다. 사마창의 아들 사마무택은 시장(상업 지역을 담당하던 관리)이 되었고 사마무택의 아들 사마희는 오대부의 작위를 받았으며 사마희의 아들 사마담은 태사공에 이르렀다. 사마천은 이 사마담의 아들이다. 한편 조나라로 들어간 사마씨의 후손사마앙은 진나라가 망할 무렵에 무신군의 장수가 되어 조가를 함락하는데 항우에 의해 은왕으로 봉해졌고 고조가 항우를 정벌할 때 한나라에 귀순하여 하내군을 영지로 받게 된다. 이 사마앙의 11대손이 경조윤 사마방이며 방의 차남사마의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나라의 사마씨 가문진나라로 간 사마씨 분파 → 사마착사마근 (착의 손자) → 사마창 (근의 손자) → 사마무택 (창의 아들) → 사마희 (무택의 아들) → 사마담 (희의 아들) → 사마천 (담의 아들)

주나라의 사마씨 가문조나라로 간 사마씨 분파 → 사마앙사마방 (앙의 11대손) → 사마의 (방의 아들)

  • 한중 FTA 체결 기념으로 사마천의 고향 산시성 한청시에서 제작의뢰하여 사마천의 일대기를 다룬 오페라 <사마천>이 2016년 뉴서울 오페라단의 공연으로 초연되었다.

6. 관련 문서


  1. [1] 그래서 사마천은 훗날에 정화, 채륜과 더불어 환관들에게 추앙받게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한 번도 환관이었던 적이 없었다. 궁형은 형벌일 뿐 강제로 환관으로 만드는 게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남성기를 상실했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후대에 환관들의 추앙을 받다보니 환관 이미지가 씌워진 것. 즉 그는 한 번도 환관이었던 적이 없지만, 환관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2. [2] 또한 상위에 사마천의 초상화를 보면 수염이 없는데 당대에 그려진 초상화에 수염이 없는 것은 2가지 경우 중 하나이다. 하나는 사실 여자였거나, 하나는...
  3. [3] 지금의 과학기술부 차관과 국가기록원장을 겸한 직책으로 볼 수 있다.
  4. [4]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 당태종도 "나 정도면 해도 되지 않느냐?" 하면서 봉선을 거행하려고 했으나, 역시나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신 위징이 "아직 천하에 굶주리는 백성들이 수두룩합니다." 하면서 극구 반대해서 결국 포기한다.
  5. [5] 기록에 의하면 사마천과 이릉은 그때까지 서로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다.
  6. [6] 다만 서경잡기(西京雜記)에서는 이릉의 건 이전부터 사마천이 무제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사마천이 역사서인 경제본기에 경제와 무제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자 나중에 이를 알게 된 무제가 잔뜩 화가 나 그 내용을 지워 버렸고, 이후 이릉의 건을 빌미 삼아 탄압한 것이라는 이야기. 이에 따르면 전한 황실에서는 사마천의 후예를 등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7. [7] 이게 말이 50만 전이지 2020년 현재의 금전가치로 환산하면 중견기업 하나를 차릴 수 있을 정도의 큰 돈이었다. 한마디로 아무나 만질 수 없는 엄청난 거금인데 죽음을 상쇄해버릴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만만한 액수일 리 없다.
  8. [8] 다만 신하들에게 잔혹한 형벌을 자주 내리던 무제의 성격상 죽기를 선택하면 사마천은 혹형에 처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무제에게 처형된 신하들 중에서 혹형으로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무제는 가족들조차 참수했던 황제다.
  9. [9] 사실 거세가 핵심은 아니다. 죽으면 목숨을 잃어도 명예가 보존되지만, 궁형을 당하면 목숨을 얻되 명예를 잃는다. 조선시대 팽형의 개념. 하지만 현대에 그는 위대한 역사가로 추앙받고 있으니 명예를 잃은 것은 아닐지도...
  10. [10] 5천 병력의 식비 + 피복비 + 급여 + 기타 잡비 등등을 다 합친 수준이다. 그러니까 육군 중사(직업군인이 기준이 되어야 하므로 직업군인의 최소 계급인 중사로 한다.) 5,000명의 연봉보다 훨씬 큰 돈이라고 생각하자. 장난 아니게 큰 돈이다. 그 5,000명의 병력을 전부 중사로 해도 나가는 급여가 엄청난데 20명당 1명꼴로 소위가 있고, 100명당 1명꼴로 대위가 있으며, 200명당 1명꼴로 소령이 있으며, 500명당 1명꼴로 중령이 있으며, 1명의 준장과 3명의 대령이 존재하는데 소령부터는 중사의 2배 이상의 급여가 나간다. 게다가 이걸로 끝이 아니고 당시에는 군마, 현대 기준으로 따지면 각종 차량들을 수백 대는 보유하고 있다. 이 차량 구매비용부터 유지관리비용도 다 포함된다. 게다가 그 '차량'이라는 게 그냥 트럭이나 승용차 뿐만 아니라 이 정도 병력이면 중대 정도 수준의 기갑 부대도 편성되어 있는데 탱크 한 대당 기본 10억 원 정도는 한다.
  11. [11] 특히 전한의 관료는 봉급이 많지도 않았다. 고조선 멸망에 참전한 전한의 장군 양복만 해도 패전에 대한 책임으로 참수당하는 대신 많은 돈을 내고 풀려났으나 귀족 신분을 박탈당하고 평민으로 살아야했다.
  12. [12] 是餘之罪也夫! 是餘之罪也夫! 身毀不用矣.
  13. [13] 임안의 자는 소경(少卿)이며 형양(滎陽) 사람으로, 청년 시절 매우 가난하였으나 후에 대장군 위청(衛靑)의 시종(侍從)이 되었다가 그의 추천으로 낭중(郎中)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은 익주자사(益州刺使)에 이르렀다. 그런데 B.C. 91년, 여태자(戾太子) 유거의 반란, 즉 무고(巫蠱)의 난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임안은 경성(京城) 금위군(禁衛軍)의 북군(北軍)을 관리하는 군관으로 있었다. 그는 여태자의 출동 명령을 받고도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는데도, 북군의 한 말단 관리의 모함으로 이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처형될 위기에 몰렸다. 임안은 처형되기 전에 사마천에게 구원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사마천은 자신의 처지 때문에 답장마저도 제 때에 하지 못하였다. 결국 안타깝게도 그해 겨울, 임안은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腰斬刑)에 처해졌다. 친구끼리 한무제한테 쌍으로 못볼 꼴을 당하고 말았다.
  14. [14] 중서령은 당나라 때부터는 엄연한 재상직이었지만, 중서령이 재상직으로 격상된 것은 위문제 때부터고, 이때 당시까지만 해도 중서령은 황제의 서간 등을 관리하던 직책으로 당시까지만 해도 지위만 높았지 사실상 환관이나 맡았던 직책이었다.
  15. [15] 위청은 한 무제의 처남이고, 곽거병은 처조카라 한무제와는 인척이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이광 못지 않은 명장이긴 했다.
  16. [16] 다만 중국의 사기 연구자인 천퉁성처럼 사마천의 말년이 비교적 평안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17. [17] 후대에 제갈씨들이 성씨를 제씨, 갈씨로 나누어서 사용한 경우와 비슷한 경우로 보면 될 것이다.
  18. [18] 당장 사마천이 죽은 지 100년도 안 된 전한 말기에 저소손이 여기저기 내용이 빈 곳을 땜빵했던 점을 봐도 초기의 사기가 상당한 수난을 겪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19. [19] 본인 표현.
  20. [20] 물론 사기 전체 내용을 보면 후대에 더해지고 빠진 부분들이 여럿 보이지만, 무제에 대한 비판이 가필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얘기.
  21. [21] 실제 인물의 전기를 마치 가상인물의 전기인 것처럼 가탁하여 쓴 것이다.
  22. [22] 다만 사마천의 문장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는 논쟁이 다소 있다고 한다.
  23. [23] 지준에게 보낸 편지인 <여지준서>와 그에 대한 답장이 한 편, 때를 잘못 만난 선비를 슬퍼하는 글이란 뜻의 <비사불우부> 한 편, 이렇게 두 편이 남아 있다고 한다.
  24. [24] 출처 : 김영수 저,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모든 것 1권 278p, 279p
  25. [25] 사마천 그 자신은 유학을 배웠음에도 유학자들과는 견해가 다른지 가령 여후를 다룬 기록을 본기에 넣기도 했다.
  26. [26] 고자가 되기 전에 낳은것
  27. [27] 전한 경조(京兆) 화음(華陰) 사람. 자는 자유(子幼)고, 사마천(司馬遷)의 외손이다. 『사기(史記)』를 익혀 세상에 널리 전파했다. 선제(宣帝) 때 좌조(左曹)에 임명되어 곽씨(霍氏)의 음모를 고발해 평통후(平通侯)에 봉해졌고, 중랑장(中郞長)이 되었다. 신작(神爵) 원년(기원전 61) 제리광록훈(諸吏光祿勳)에 올랐다. 관직에 있는 동안 청렴하여 재물을 경시하고 의로움을 좋아했다. 그러나 각박하고 남의 나쁜 비밀 등을 들추어내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의 원한을 많이 샀다. 태복대(太僕戴) 장악(長樂)과 사이가 나빴는데, 장악이 고발당하자 그가 시킨 것으로 잘못 알아 평소 언어가 불경하다고 상소를 올림으로써 면직당해 서인(庶人)이 되었다. 직위를 잃고 집에서 일하며 집안을 일으켜 그 재산으로 생애를 즐겼다. 친구 손회종(孫會宗)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충고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편지에 원망하는 내용이 많았는데, 선제(宣帝)가 이것을 읽고 미워한 데다가 참소와 중상모략을 당해 대역 무도죄로 요참형(腰斬刑)을 당했다. 왜이리 주변에 요참형 당한 사람이 많을까...
  28. [28] 박경리,《못떠나는 배》(1988, 지식산업사).
  29. [29] 궁형을 당했다는 사실때문에 자식이 없는줄로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마천은 처벌을 받았을 당시에 자식이 있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후손이 남아있다.
  30. [30] 문정희,《남자를 위하여》(1996,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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