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타이

Salitai

? ~ 1232년

1. 소개
2. 여몽전쟁의 활약
3. 대한민국에서의 이미지

1. 소개

몽골 제국의 장수. 그의 원래 이름은 중세 몽골어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행적이 한문으로 작성된 사료밖에 없어서, 사료상에서 그의 이름 표기가 매우 제각각이다.

  • 사리타(沙里打) : 동국이상국집
  • 사타(沙打) : 동국이상국집
  • 사타리(沙打里) : 동국이상국집
  • 살대(撒歹) : 동국여지승람
  • 살례탑(撒禮塔) : 고려사 세가, 원사, 신원사 홍복원전, 고려사절요
  • 살리답(撤里答) : 원고려기사, 원사 홍복원전
  • 살리답화아적(撒里荅火兒赤) : 원사 우에르(五也而)전
  • 살리타(撒里打) : 동국이상국집
  • 살리탑(撒里塔) : 원사 홍복원전, 신원사 본기, 신원사 찰라역아태활아적전, 해동역사
  • 살리타화아적(撒里打火兒赤) : 성무친정록
  • 살리타화이적(撒里打火里赤) : 고려사 세가
  • 살리탑화리(撤里塔火里) : 원고려기사
  • 살리탑화이적(撒里塔火里赤) : 원고려기사
  • 살리태(薩里台) : 원사 본기, 원사 고려전
  • 살리태(撒里台) : 원사 왕준전
  • 살아태(撒兒台) : 원사 야율유가전
  • 살탑(撒塔) : 역옹패설
  • 융리태(隆里台) : 원사
  • 찰라(札剌) : 동국통감, 고려사 세가, 고려사절요
  • 찰라역아태(札剌亦兒台) : 원조비사, 신원사 고려전
  • 찰라역아태활아적(札刺亦兒台豁兒赤) : 신원사 우에르전, 신원사 찰라역아태활아적전
  • 찰라태(札刺台) : 원사 씨족전
  • 철리태(撤里台) : 원사 우에르전
  • 철아태(撤兒台) : 원사 벽도(薜闍)전

2. 여몽전쟁의 활약

1218년에 요수국(거란족)이 몽골군의 공격으로 패하여 동남쪽으로 달아나면서 고려를 공격하자 12월 1일(12월 20일)[1]에 부원수로 종군하여 원수인 카치운[2]과 함께 1만을 이끌고, 동진의 완안자연(완안쥬안)의 군사 2만명과 합세하면서 화주, 맹주, 순주, 덕주 등을 공격하면서 요수국이 점령한 강동성으로 향하였다. 1219년에 고려의 조충, 김취려 등이 합세하자 함께 강동성을 포위하여 이들을 항복시켰다.

1231년 8월에 몽골의 사신인 저구유가 살해된 사건으로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하면서 29일(9월 26일)에 함신진을 공격하여 조충의 아들인 방수장군 조숙창을 항복시키고, 인주도령인 홍복원이 항복하자 그와 함께 귀부하지 않은 주군을 공격하여 철주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푸타오(포도), 디주(적거), 탕우타이(당을태)가 이끄는 1군이 동선역에서 패하자 이들을 철수시키면서 3군과 합류하도록 하였다.

11월 11일(12월 6일)에 고려의 대장군 채송년이 분대어사 민희와 병마판관 최계년 등이 보내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면서 허실을 엿보도록 파견할 때 민희가 하급 관리인 것을 듣고 높은 관리가 직접 와서 항복하라고 하였다. 12월 2일(12월 26일)에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포위하면서 안북도호부에 진을 치면서 사자를 보내 강화를 시도하였으며, 5일(12월 29일)에 사신으로 파견된 회안공 왕정이 토산물을 주면서 절하자 이를 답하지 않았다가 왕정이 술, 안주로 대접하자 젖술로 답례하였다. 이 때, 왕정을 수행한 송국첨이 엄숙하면서 기상이 씩씩하고 컸기 때문에 탄복했다고 하며, 저구유(저고여) 암살 사건, 공물 문제 때문에 강화 협상이 잘 되지 않았다.

17일에 왕영조, 우예르(오야이), 일라(이라)가 이끄는 2군이 귀주성을 공격하였다가 박서, 김경손의 저항을 받자 고려의 통사 지의심, 학록 강우창 등을 통해 회안공 왕정의 편지를 주면서 항복을 권했으며, 이를 듣지 않아서 또다시 사람을 보냈지만 듣지 않자 다시 2군에게 귀주를 공격하도록 지시한다. 그러나 박서, 김경손의 항전으로 귀주를 함락하지 못하였으며(귀주성 전투), 23일(1월 16일)에 마침내 강화 협상을 성사하면서 몽골의 사신과 함께 조숙창을 보내어 저구유를 죽인 일을 묻게 하였는데 고려 조정에서 선물을 주는 것으로 사신을 돌려보냈으며, 29일(1월 22일)에 장군인 조시저를 사신으로 보내자 선물을 받았다.

금, 은, 의복을 적게는 말 1만필, 많게는 말 2만필에 실어보낼 양, 군사 100만에 해당하는 의복, 대마 1만필, 소마 1만필, 국왕, 제왕자, 공주, 군주, 고관들의 자제 1천명을 보낼 것.

강화 협상이 성사된 이후에 군사를 철수하면서도 2군이 끝내 귀주성을 함락하지 못하자 항복하지 않는 귀주성을 직접 5차례 공격하였지만 1232년 정월까지 고려군의 거센 항전으로 귀주성을 함락하지 못하면서 2군을 철수하도록 한 다음에 세 방면의 군사를 합류시키고 청천강의 북쪽의 다른 성들을 함락하여 귀주성을 고립시키려고 했지만 의주 함신진의 부사 전한의 배신으로 의주성의 몽골군이 전멸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또한 고려 삼군이 항복하자 회안공 왕정에게 편지를 보내게 하여 자주산성을 항복시키려고 했지만 항복하지 않자 고려 조정을 힐책하였으며, 대집성을 보내게 하였다가 항복하지 않자 노해서 최춘명을 죽이려고 했다. 3월에 철수를 완료하면서도 고려 조정에서 통사 지의심, 녹사 홍거원, 녹사 김겸 등의 사신을 보내면서 노자를 받으면서 요구한 공물에 대한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4월 12일(5월 3일)에 고려 조정으로부터 다시 요구한 공물에 대한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두 차례 보내온 내용이 요구한 양만큼의 공물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의심을 오고타이 칸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구금하였다.

그러나 8월에 다루가치에게 욕보였다는 것과 강화로 수도를 천도한 것 때문에 고려를 또다시 침공하면서 홍복원의 도움을 받아 남하하였으며, 11월에 고려 조정에게서 아량을 호소하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남하할 때 어사잡단 설신이 우리 나라(고려)의 속담에 따르면 다른 나라의 관리가 남쪽으로 강을 건너면 불길하다는 조언을 하자 이를 무시하였으며, 12월에 처인성을 공격하였지만 성 안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다.

3. 대한민국에서의 이미지

역사 교과서에서는 김윤후처인성 전투로만 언급되기 때문에 '살리타이? 아, 그 스님에게 화살 맞고 죽은 사람?' 정도의 이미지.

노미영의 만화 '살례탑'에서는 사실상의 주인공으로 나오며, 어린이 학습만화 같은 곳에서는 처인성 전투와 김윤후를 부각시키기 위해 살리타이의 악랄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1. [1] 이하 괄호는 모두 양력.
  2. [2] 칭기즈 칸의 둘째 동생인 카치운과는 동명이인으로 고려 측 사서에는 합진(哈眞), 합적온(合赤溫) 등으로 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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