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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三別抄)

1. 개요
2. 역사에서는
3. 기타
4. 관련인물
4.1. 무신
4.2. 왕가
5. 같이보기

1. 개요

三別抄

고려 무신정권 시절에 탄생한 친위대. 여몽전쟁 이후 삼별초의 난을 일으켰다.

고려에는 원래 별초(別抄)라고 하여 특별히 선정해 뽑은 병사들로 이루러진 부대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최씨 무인 정권 시절 최우가 자신의 권력을 보호하고 신변 안전을 도모하려고 힘 세고 기골이 장대한 장정들을 뽑아 조직한 야별초(夜別抄)가 삼별초의 전신이다. 간단히 말해 권력자가 부리는 사병들이었다. 하지만 각지에서 변란이 일어나고 도적 떼가 준동하자 야별초에게 도적 떼를 토벌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면서 정규군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여기서 주의할 바는 최씨 무인 정권의 진짜 사병은 따로 존재했다는 것인데 이들은 여몽전쟁에도 동원되지 않고 말 그대로 정권 유지만을 목적으로 존재했다. 물론 삼별초는 그 특성상 사병이지만 엄연히 정규군이기도 하다.

몽골과의 전쟁이 계속되자 최우는 임시 조직이였던 야별초를 정규군 조직으로 재편하였다. 이에 따라 야별초를 좌별초, 우별초로 양분했고 여기에 몽골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거나 송환된 사람들을 모은 신의군까지 합쳐서 삼별초를 편성하였다. 이 시기에 삼별초는 치안 유지, 궁궐 수비, 요인 경호, 적장 암살, 몽골과의 전투(강화도 방위와 각지 유격전과 방어전) 등의 다양한 역할을 맡았는데, 그냥 혼자서 다 해먹었다고 보면 된다. 이 때문에 가뜩이나 몽골과의 전쟁에서 가진 전력을 거진 다 잃어버려 병풍화 되었던 기존 정규군 조직은 삼별초의 권한이 확대되면서 완전히 공기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최씨 무신정권이 본토의 정규군을 양성할 경우 본토의 정규군들이 자신들의 목을 노릴거라 생각해 삼별초를 키웠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이유가 뭐든 기존 정규군 조직을 삼별초가 흡수했다고 볼 수 있는 셈. 그래서 이후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고려 조정은 남도에서 병사들을 새로 선발해야 했다.

워낙 역할이 중요하니 삼별초의 영향력도 무시못할 수준이 되었는데 아예 집권한 무인을 제거하고 그 일파를 숙청하려고 삼별초가 통째로 동원되기도 했다. 그 대표 예로 김준은 삼별초를 동원해 최의 세력을 제거하고 60년 유지된 최씨 무인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그 뒤에는 임연도 삼별초를 이용해 김준 세력을 축출하고 나중에는 원종이 삼별초를 이용해 당시 실권자인 임유무를 살해하기도 했다. 이를 보면 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 혼란기 친위대의 행보와 유사할지도.[1][2]

알고 보면, 고려 원종은 무인 정권을 종식하게 하고 자신이 권력을 잡으려고 원나라와 손잡고 개경 환도를 준비했기에 대몽 항쟁 일선에서 활동하던 삼별초 처지에서는 고려 원종에게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고려 조정도 이 과정에서 실수를 했다. 원래 이런 거대한 조직을 해산할 때에는 내부에 포섭자도 만들고 부대별로 쪼개 놓고 반목하게 하여 저희끼리 알아서 해체되게끔 유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고려 조정은 삼별초를 대뜸 해산하고, 능력에 따라 재등용을 하거나 안하겠다고 공지한 것이다. 이 말은 너희 중에 맘에 안 드는 놈은 다 모가지라는 뜻으로 해석 가능하고 이때까지 최씨 무인 정권의 사병으로 왕실부터 문신들에게 이르기까지 원한을 쌓아 온 삼별초 내에 불안과 불만은 늘어났다. 결국 1270년 고려 원종이 해산령을 내리자 당시 지도자였던 배중손과 노영희[3]를 중심으로 뭉쳐 반기를 들어 삼별초의 난을 일으켜 왕온을 고려의 새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일단 강화도에서 벗어나 진도로 이동하여 새 성을 짓고 저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당시 장식품으로 전락한 고려 조정군은 삼별초에게 일방적으로 발리고 그 사이 삼별초는 나주에 이르는 호남지역과 남해안의 주요한 지역, 제주도를 석권하면서 자신들이 고려의 정통 조정이라고 강조하였다.

결국 고려 원종은 서둘러 난의 진압과 왕정 복위를 위해 원나라에 원병을 요청해 1271년 원나라군과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이 여몽연합군을 결성하고 진도를 향해 진격했다. 진도에 도착한 여몽연합군은 불창화포를 쏟아부었고 삼별초는 죽을 각오로 항전했지만 결국 패배해 배중손은 전사하고 명목 상으로 왕위에 올랐던 승화후 왕온마저 피살당한다.[4][5] 잔존한 세력은 김통정의 지휘하에 제주도로 피신하여 항전을 이어갔지만 1273년 여원연합군의 공격에 완전히 진압되고 말았다.

2. 역사에서는

제주도에서는 김통정을 다룬 설화가 조금 남았다. 설화에서 김통정은 지략과 도술을 부리는 장군으로 영걸 같은 인재지만, 제주도 백성을 핍박하고 결국 실패하는 인재로 그려진다. 또 제주도에는 김통정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가 토벌군에게 사살당하는 이야기나 그 어머니나 장모나 둘 다 토굴에 들어가서 숨었다는 전설도 존재한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삼별초가 직접 지배하던 제주도 북부 일대에는 김통정을 나쁘게 표현한 전설이 많은데 제주도 남부에는 김통정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전설이 많다는 점이다. 예컨대 "환생한 김통정이 왜구를 격퇴한다"는 내용의 전설이 다른 유형으로 전래하기기도 한다. 예컨대 제주도 북부에서는 '김통정이 포악하고 욕심을 부려 하느님이 장수 삼 명을 내려보내 김통정을 징벌토록 했다'는 전설이 있는 반면, 제주도 남부에서는 '원나라에서 김통정을 암살하고자 자객 삼 명을 밀파했으나 모두 김통정의 도술에 당하고 도망했다'는 내용으로 김통정에게 호의적이다.[6]

사학계에서는 삼별초의 거점이었던, 전라남도 珍島郡 內面 龍藏里 龍藏山(진도군 내면 용장리 용장성)에 엄존했던 龍藏山城(용장산성)에서 발견된 기와류큐 왕국에서 발견된 기와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삼별초의 잔여 세력이 오키나와로 건너가 류큐 왕국을 세웠거나 류큐 왕국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아직까지 확실히 검증되진 않았다. 관련기사

그런데 실제로 삼별초는 1271년 일본에 구원을 요청한 적이 있다. 일본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서 발견된 문서 가운데 '고려첩장불심조조'라고 해서 일본 다자이후 측 관리들이 "이번에 새로 온 국서가 전에 고려에서 받은 국서와는 내용 취지가 다르네? 이거 어떻게 된 거지?" 하고 의아해한 대목만을 추려 교토 조정에 보낸 것인데, 대체로 몽골을 칭찬하던 전의 국서와는 달리 몽골을 엄청나게 욕하면서 진일보해 몽골에 맞서서 함께 싸우자고 하면서 군사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는 사실을 유추 가능하고 이런 내용의 국서를 보낼 단체는 시대 상황상 삼별초밖에 없다. 2001년 일본 NHK 대하 사극 <호조 도키무네>에도 이 내용이 등장하는데 작중 나레이션으로 "이때 고려 본토에서 삼별초가 봉기해서 몽골에 맞서 항쟁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일본에 구원을 요청한 것인데 당시 막부의 관리들은 그 내막을 알 길이 없었다."라고 소개하면서, 국서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의아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러한 기록들이 나오자 삼별초가 고려사 기록 그대로 반역자를 넘어서 친일 세력이 되어 김방경이 다시금 영웅이 되는 상황이 되고 일본 역사책에선 삼별초가 민중들의 영웅으로 격상이 되었으며 덕분에 다시 김방경에 대한 평이 올라갔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한편 고려첩장 불심조조가 일본에서 발견된 것은 1977년의 일이고 한국에서는 일본이 삼별초를 재평가하기 훨씬 전, 그것도 해방 이전인 식민통치 시절에 김상기가 '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야'[7]라는 논문을 발표해 삼별초를 '대외항쟁'이라고 하는 재해석을 시도했었다.

또한 삼별초를 대외항쟁으로 재조명하는 관점에서 '고려첩장 불심조조'는 당시 삼별초의 항쟁이나 결과적으로 삼별초 항쟁으로 일본 침공이 (삼별초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늦춰져서 일본에 '방비'할 시간을 주었던 점과 함께 해석하면 몽골의 일본 침공을 원구(元寇)라 부르는 일본에서 "고려가 몽골의 앞잡이가 되어 일본을 침략해 선량한 일본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는 일본 학계의 주장에 대해 "삼별초가 몽골하고 피 터지게 싸우면서 일본에 국서를 보내 연합전선을 시도했지만ㅡ 일본은 국제정세에 어두워 제대로 반응하지 못해 결국 몽골 침공을 겪었다"고 반박할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중국 대륙에서, 그리고 고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곳에서의 상황이 일본 열도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것에 대한 첩보나 정보 수집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데 그러한 정세를 제때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막부의 실책이었다.[8]

국내에서 윤용혁이나 김보한 등 삼별초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원조명신사략》 등 제주 삼별초의 일부로 보이는 세력이 일본으로 가서 남송인들과 함께 몽골에서 보낸 사신 조양필 등이 일본 초유를 위해 활동하는 것을 훼방하려 했다는 사료를 발굴하고, 제주 삼별초가 쌓았던 환해장성이 일본 막부가 규슈 연안에 수축한 '원구방루'라 불리는 해안 상륙을 저지하는 방어용 성벽 축조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마도 - 신진도 방파제가 들어서자 물길과 해저 지형이 바뀌며 뻘에 묻혔던 난파선이 2009년에 발견되었고 지금까지도 난파선에서 수집 중인 목간을 보면, 삼별초가 최소한 별초당 3개 조였다고 한다. 사족이지만, 물품을 받는 사람은 저 위의 김준이다. 그리고 당시 시대는 강화도로 천도하던 시절이었는데도 공공에 관계되거나 사사로운 물품을 받는 등 국가 제도가 그대로 작동했으며 삼별초도 매우 정연한 군사 조직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현대에는 민족 기록화를 비롯하여 삼별초를 몽골에 항거한 영웅으로 미화하지만[9], 실제론 삼별초는 몽골군을 막으려고 거대한 장벽인 환해 장성을 축조하는데 제주도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기도 하고, 세금을 거둔다고 민가 수탈을 일삼아서 지역 백성들한테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백성들이 삼별초를 증오했고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삼별초의 몰락에 기여했으니 자업자득인 면도 있다. 특히 제주도 백성들은 본토와 달리 몽골군에 의한 피해를 그다지 입은 적도 없으니, 몽골에 대한 반감이 별로 없어서 더욱 그렇다. 물론 일개 군사 조직으로 전락하여 제대로 보급이나 지원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3년이나 버텼으니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지만...[10] 하지만 원나라·고려 연합군도 백성에게 했던 짓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삼별초만 특별히 악랄하다고 할 수도 없다.[11] 더욱이 삼별초의 업적 중 하나가 최씨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 때문에 삼별초를 그저 반란군이라고 폄하하하기에는 복잡한 면이 꽤 많다. 게다가 삼별초의 난을 일으킨 세력들은 최씨무신정권이 키운 좌별초와 우별초가 아닌 몽골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됐다가 탈출한 신의군 세력들이었고, 이들은 원종을 도와 무신정권을 종결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백관들의 처자를 납치하고 백성을 강제노역시키며 민가를 약탈한 것 자체가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여•몽 연합군도 만만치 않은 만행을 저질렀기에 확실히 평가내리기에는 애매하다.

3. 기타

한국의 펑크 록 밴드인 타카피의 이름은 삼별초에서 유래했다. 三別抄 = Three Another Copy → T.A.Copy. 원래 삼별초로 지으려다가 반응이 안 좋아서 지금의 이름으로 지었다고 한다.

국군, 특히 해병대에서 상무정신의 귀감으로 미화하며 제법 밀어주는 편이다.

4. 관련인물

4.1. 무신

4.2. 왕가

5. 같이보기


  1. [1] 임연이 김준의 뒤통수를 쳐서 김준이 죽자 김준의 아들이 즉각 삼별초를 소환해 임연과 싸우려고 했다. 그런데 당시 삼별초 지유(脂諭): (지휘관) 고여림은 막상 오기는 했으나 중립을 선언한다. 외치고는 구경만 했고 결국 임연 일파가 승리할 때까지 손놓고 구경만 했다.
  2. [2] 이 고여림은 원래 탐라의 왕족인 고씨 일족인데 이 때문에 삼별초의 난 당시에 고려 조정의 명으로 제주도로 파견되어 제주도 수비를 전담했다. 그러나 막상 삼별초가 제주도에 상륙하자 수탈에 시달리던 제주도 백성은 모두 삼별초를 해방군으로 여기면서 환영했고 같은 고씨 일족조차 중립을 선언하고 구경만 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자신이 지휘했던 삼별초에 살해당한다.
  3. [3] 당시 삼별초 지유는 노영희로 배중손은 장군이기는 했으나 삼별초의 지휘관이라고 분명하게 명시되지는 않았고 삼별초가 봉기하게 된 직접인 계기도 배중손이 노영희를 찾아가 봉기하자고 설득한 게 최대 이유였다. 그러나 그 후 노영희가 사실상 공기화 했는데 배중손은 사실상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것을 원나라나 고려 조정도 같이 인식했다.
  4. [4] 당시 왕족이었던 승화후 왕온은 배중손의 강압으로 삼별초 정권의 왕이 되었다가 여몽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온 매국노 홍복원의 아들인 홍다구에게 피살당한다.
  5. [5] 여담으로 이 때 살해당한 승화후 왕온의 동생이 바로 홍다구의 아버지인 홍복원을 살해한 영녕공 왕준이다. 왕준은 삼별초의 진압군으로 파견되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형인 승화후를 살아서 모시고 오라고 간절히 부탁하기도 했었다.
  6. [6] 지배자와 해방자를 향한 피지배민의 시각이 얼마나 변화무쌍하고 제멋대로인지 인식 가능한 사례이다. 황산 대첩에서 죽은 왜장 아기발도아기장수 우투리 설화에서는 민중의 해방자로 묘사된다고 하는 게 비슷한 예로 들 수 있지만, 우투리 = 아지발도가 정설은 아니다.
  7. [7] 처음 발표된 것은 1938년1941년까지 진단학보를 통해서였다. 3부작에 걸쳐 발표된 해당 논문은 해방 직후에 재발표되었고, 삼별초라는 고려 무신정권의 군사조직이 벌인 몽골과 고려 조정에 대한 반발 행위들을 대외 항쟁으로 해석한 최초의 논문으로 평가된다.
  8. [8] 실제로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부터 이미 호조 도키무네를 "몽골습래라는 일본 역사상 초유의 국난 앞에 저자세로 굽히는 일 없이 의연히 항쟁을 결정해 나라를 지킨 영웅"으로 평가했고 일본 제국 시절에 황국사관의 관점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함께 '항쟁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원자폭탄을 맞고 패전한 뒤에는 "편협한 사고방식으로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던 몽골의 사절을 살해하여 대일 교섭을 결렬시키는 등 철저한 항전자세를 취한 도키무네의 태도는 일본의 글로벌화를 늦추고 세계화에 뒤처지는 결과를 초래한 자"라는 비판도 함께 일게 된다.
  9. [9] 군사정권이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려 무신정권을 미화하다 보니 그 무신정권이 만들어낸 삼별초까지 미화한 것으로 보인다.
  10. [10] 사실 삼별초도 백성의 지지를 얻기위해 노력하기는 했다. 대표적으로 노비 문서를 불태운다든지, 토지를 골고루 분배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고 삼별초 본진도 일부러 제주도 백성들이 살고 있던 중심지를 벗어난 서측 외진 곳에 마련했던 것도 백성들과 토착 세력들을 존중하는 일이었다.
  11. [11] 특히 경상도 남해안 지역이 그랬다. 대몽 항쟁 후기 집중적인 몽골군의 학살과 약탈 대상이 되었던데다가 일본을 원정한답시고 농사도 못 짓고 배 만들러 끌려 나왔기에 반몽 정서가 극심했다. 그래서 삼별초의 세력이 강대할 때는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키거나 기밀도 유출했고 제주도로 공물을 몰래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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