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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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의 지방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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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이미지들은 상상에 의한 복원도이다.[1]

1. 개요
2. 행정
3. 지리
4. 규모
4.1. 기타 도시들과의 비교
5. 구조
6. 어원
6.1. 옛 명칭 유래설
6.2. 불교 유래설
7. 신라 이후
8. 기타

1. 개요

서라벌(徐羅伐) / 금성(金城)[2]

천년 왕국 신라수도.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기원전 57년 음력 4월 병진일부터 935년 음력 11월까지 약 991년 간 신라의 정궁인 월성이 위치한 수도로서 기능했다. 하나의 국가가 하나의 수도에서 천 년을 지속한 경우는 한국사를 넘어 세계사에서도 흔치 않으며,[3] 서라벌이 바로 그 경우에 해당된다.

그 명칭은 서라벌/금성 외에 달리 부르는 이름으로 경(京), 왕경(王京), 왕도(王都), 경사(京師), 동경(東京), 동도(東都) 등이 있었다. 이 중 동경은 고려시대 경주의 이름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당시 기록인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탑비문이나 처용가와 같이 신라시기에도 경주를 동경으로 불렸던 기록이 존재한다.[4] 중국 기록 양서에서는 건모라(健牟羅)라고도 불렸다는데, 고대 한국어의 '큰 마을'의 음차로 추정되고 있다.

2. 행정

수도 서라벌9주 5소경양주 땅에 둘러싸여 있지만 일단 양주 행정구역에 포함되지는 않았는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도 9주를 소개하기 전 맨 앞에 따로 경주를 소개하고 있으며, 수도 주변 동서남북을 둘러싸고 있는 의창군, 임관군, 대성군, 상성군 등은 양주에 속한 행정구역으로 나온다. 사실 양주의 치소(현대의 도청소재지 격)가 양주(양산시)인데 수도가 양주 소속이면 양산시 관할이란 말인데 당연히 기록상으로도 양주 도독이 수도를 관할하는 그런 정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면적이 넓지 않아서인지 현대에 나오는 신라 9주 5소경 지도에서는 그냥 양주 북쪽에 도시라는 점 하나 찍어놓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삼국사기 지리지대로라면 왕경은 지금의 경주시 동 지역 인근 정도 범위고 바깥지역 예를 들어 지금의 안강읍이나 외동읍 쪽은 별개 행정구역이란 말인데, 이 지역에 흥덕왕릉이나 원성왕릉이 있는데, 신라는 모든 신라왕릉을 왕경 범위 안에 조성했으므로[5] 이 지역도 왕경 범위 안으로 쳤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시대별로 범위가 바뀌었거나, 공식적인 행정경계와 관념적 경계가 일치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수도 중심지(경주분지 가운데 지역) 동쪽은 대성군(大城郡), 서쪽은 상성군(商城郡)이다. 그런데 전국 다른 군은 밑에 현(행정구역)이 있는 것과 달리 이 대성군과 상성군 두 군은 특이하게 아래에 현 대신 정(停)이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상성군은 남기정(南畿停), 중기정(中畿停), 서기정(西畿停), 북기정(北畿停), 막야정(莫耶停) 5개의 정으로 되어있고, 대성군은 약장현(約章縣)과 동기정(東畿停)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기(畿) 자는 '도읍의 주변'이란 뜻으로, 바로 경기도 할 때의 기 자다. 지리적 위치로도 짐작할 수 있지만 대성군과 상성군은 일종의 경기도, 내지는 수도권 역할에 해당하는 특수 행정구역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정황상 여기까지는 보편적으로 왕경으로 간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에 일반적으로 말하는 신라의 수도 서라벌 역시 이 정도 범위까지 포함된 개념을 말한다.

3. 지리

같은 삼국시대남북국시대고구려백제, 발해가 외침과 내부 정책에 따라 수도를 여러 번 옮겼던 것과는 달리 삼국통일 이후 통일 신라 시대까지 1천년 동안 굳건한 신라의 수도로, 형산강과 그 지류에 위치하여 식수 확보가 쉬우면서 자연 해자 역할로 방어에도 용이한 지형에, 경상도 지역치고는 꽤 넓은 평지인 경주분지에 위치해 있어 식량 생산력도 높아 서라벌을 중심으로 한 사로국이 주변 소국을 복속하고 영역국가 신라가 될 수 있었다.[6]

전술했듯, 은근히 당시 기준 군사적 입지가 좋았다. 동남쪽으로 치우쳐 있어 주변의 강국인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했으며,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덕에 왜구의 소소한 노략질만 뺀다면 대규모 외침을 당한 적이 의외로 거의 없다. 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밀고 와서 경애왕을 자살로 몰아넣는 사건은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신라가 껍데기 뿐이었고, 사실상 서라벌만 남은 상태였던 터라 서라벌의 입지를 원인으로 보긴 어렵다. 다음 왕인 경순왕고려에 항복했을 정도로 신라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다만, 서라벌의 이동이 100% 없었던 것은 아니고 지금의 경주시 영역 안에서 산발적으로 조금씩 왔다갔다한 적은 있다. 예를 들면 자비 마립간보문관광단지 근처의 명활성에 궁전을 옮겨 살았다.

그러나 통일 이후에는 한반도 전체에서 동남쪽으로 치우친 위치라는 한계성이 두드러졌다. 이에 31대 임금 신문왕달구벌 쪽으로 천도하려 시도했던 적이 한 번 있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수도를 이전하면 기득권인 귀족들의 힘은 약해지고, 상대적으로 국왕의 힘이 강해진다. 하지만 귀족들도 수도 편재성이 심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순 없었는지, 이를 극복하기 위해 5소경을 설치했다. 옛 금관가야, 고구려, 백제 땅에 5개의 소경을 설치하였다. 5소경은 각각 금관경(김해시)·남원경(남원시)·서원경(청주시)·중원경(충주시)·북원경(원주시)에 있었는데, 단지 좀 큰 지방도시 정도가 아니라 통치거점으로서 상당한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방 장악에 실패해 각 지역에서 호족들이 대두되게 되었다.[7]

서라벌의 인구와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적어도 소도시가 된 지금의 경주시 시가지보다 넓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라벌의 중심지역은 지금의 경주 시가지 중심부 기준으로 약간 남동쪽 월성동 지역에 있었다.[8] 그래서 조선 이후 비어버린 월성동 일대는 오랫동안 이 대부분이었는데, 경주에 가면 신라의 궁전으로 파악되는 경주 월성이나 첨성대, 안압지, 분황사, 황룡사지 등 주요 유적이 살짝 시가지 외곽의 논두렁 옆에 있는 게 이 때문이다. 이곳은 땅을 파헤치는 육중한 현대식 건축물이 별로 들어서지 않아서 많은 유적들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보존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동해남부선 철도가 경주에 놓이면서 이 곳을 관통해 사천왕사 등 많은 문화재 터가 훼손되기도 했다. 세계유산 보호를 위한 유네스코의 권고도 있고 해서 동해남부선은 현재 외곽 건천읍의 신경주역으로 이설공사 중이며 공사가 완료되면 경주 시가지의 경주역은 폐역, 선로는 모두 철거될 예정이다. 단선철도 하나 까는 것에도 이러한데 본격적으로 현대식 시가지가 개발되었다면 훨씬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4. 규모

신라의 전성시대에 서울 안 호수가 17만 8936호(戶)에 1360방(坊)이요, 주위가 55리(里)였다. 서른다섯 개 금입택(金入宅)[9]이 있었다.

삼국유사》 제1 기이 진한

당시 수도 서라벌인구와 규모에 대한 기록은 대표적으로 삼국유사의 위 기록이 존재하는데, 당시 신라 정부가 세세한 인구조사를 실시할 체계와 능력이 있었던 것은 민정문서 발견으로 증명된 만큼 저 1단위까지 떨어지는 수치는 일연스님이 지어낸 것은 아니고 고려 중기까지 남아있었던 어떤 1차 사료를 인용한 수치일 가능성이 높다. 저 기록이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 호(戶)에 5명이라고 가정해도 경주 한 곳에만 인구 8~90만 명이 살았다는 뜻이다. 고려 수도 개경의 2~3 배, 조선 수도 한양의 4배, 현 경주시의 3.5배(!)가 넘는 수준이다.

다만 학계는 서라벌이 아니라 통일신라 국가 전체의 인구를 300~400만 내외로 추정한다.[10] 그리고 그 시대 그 인구 중에 90만 명이 몰려 살았음은 납득이 어렵다. 이기봉과 같이 서라벌 인구 백만설을 진지하게 검토한 학자도 존재하지만 학계에서 전반적으로는 곧이곧대로 해석하지 않는 시각이 많다. 그리고 지도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지만 경주 중심부의 경주분지 지형상 90만 명이나 몰려살 수 있을 만큼 들이 넓지 않다.[11] 아파트도 없던 시대라, 1~3층 정도 저층건물로 좁은 경주분지를 전부 꽉 채워도 90만은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전성기 서라벌의 규모를 전하는 얼마 안 되는 기록인' 이 부분을 엉터리 기록으로 단정하고 넘겨버리기에는 여러 가지 다른 해석도 있는데, 예를 들면 삼국유사의 17만 8936호는 17만 8936이나, 17만 8936(약 35만)로 한 글자를 잘못 쓴 것이 아니냐는 주장부터, 서라벌과 그 일대 수도권을 다 합친 기록이 아니냐는 식으로 17만 호가 말하는 범위를 넓게 보는 설들이 있다. 신라의 수도 범위를 경주분지의 시가지 자체로만 한정하지 않고 넓혀서 본다면 90만명이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12] 혹은 실제로는 신라 각 지방에 이런저런 이유로 나가 살고 있지만[13] 왕경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가문의 호적만 수도에 남겨두는 일종의 위장 전입이 전부 포함된 인구통계가 아닐까라고 본 설도 있다.[14] 실제로 현대에도 중국이나 북한 같은 나라는 수도에 산다는 신분증 자체가 일종의 귀족 신분증으로 직결되는 사회인 것처럼, 중앙집권적 귀족제 사회였던 신라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는 골품이 왕경인에게만 주어진다는 주장도 존재할 정도이니.

고고학적으로는 경주시 외곽인 지금의 건천읍 금척리, 모량리까지 방리도로 유적과 귀족 고분군 등이 드러나 일단 도시의 범위가 경주분지 중심지에 국한된 소규모는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삼국유사의 다른 부분인 권2 처용랑 망해사(處容郞望海寺)에서도 전성기 서라벌 시가지의 규모를 설명한 기록이 있는데, 제49대 헌강왕 시기 기준으로 서라벌의 중심지에서 동해 바다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연이어져 있었으며,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이 바다가 지금의 감포 앞바다인지 포항시 쪽인지 울산시 쪽인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진 않았지만, 어느 쪽이든 경주 중심지(월성)에서 약 30 km는 떨어진 곳이고 지금 경주시 시가지보다 훨씬 넓으며 개경이나 한양과도 비교할 수 없이 넓은 게 된다.[15] 물론 이 역시 은유적이고 과장된 기록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당대 한반도에서 압도적으로 규모가 큰 도시였음은 사실이고, 이런 뒷받침 덕에 고려시대에도 주요 대도시이자 3경으로 여전히 중요했다. 이후 이야기는 동경 문서 참고. 만약 서라벌이 쇠퇴하지 않고 아직까지 대도시로 남았더라면 일본의 교토 이상 되는 장관이었을 것이다.

4.1. 기타 도시들과의 비교

보수적으로 적게 해석해 17만 ~ 35만 정도라고 해도 당시로서는 엄청난 대도시임이 틀림없다. 한반도의 인구가 12배 늘어난 현재의 경주시보다 많았을 확률이 높다.

통일신라 시대인 10세기 전을 기준으로 하면 신라와 비교도 안 되는 영토를 지닌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50만 정도, 서유럽 최대의 도시인 파리로마가 5만 정도, 런던은 간신히 만 명을 넘었다는걸 보면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대도시 중 하나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이 시절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을 세계를 대표하는 3대 도시로 보고, 중국에는 수십만 도시들이 몇 개 더 있었으니 못해도 세계 10위 안에는 들었을 듯. 만약 정말 90만이면 장안 다음의 대도시다. 사실 8세기 4대 주요 도시였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논쟁 중이긴 하지만4대 도시였다면 서울이랑 같은 급? 지금 서울이 경제력으로 보았을 때 세계 4대 도시 인 걸 감안 하면... 설령 17만 이하의 인구였다고 해도 작은 도시 수준은 절대 아니었고, 비단길의 발달된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일단 영문 위키백과에서도 8~9세기 서라벌이 장안,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다음으로 규모가 큰 4위 도시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당나라 제 2의 수도이자 장안 인구(약 100만)의 60% 정도 되던 낙양이 순위에 안들었는데 사실 낙양 인구(약 60만)가 서라벌 인구보다 많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사실 지역 할당제만 아니면 낙양이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각각 약 50만 추정)보다도 큰 도시였다. 경주와 비슷한 규모였던 헤이조쿄는 10만 정도로 추정된다.

17만 ~ 35만으로 봐도 후대 고려, 조선왕조의 개경, 한양에 못지 않거나 오히려 더 큰 규모로 나오는데, 사실 신라도 천년이나 되는 기간동안 경주를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관청도 많았고 살기에는 다른곳보단 괜찮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 수도집중현상으로 90만명이나 되는 인구가 살았을 수도.... 반면 고려의 수도 개경(개성)은 주변에 산이 많아서 많은 인구가 몰려살기엔 좋지도 않고[16] 수도만 집중적으로 개발한 것이 아닌 5도양계 곳곳에 목이라는 행정체계를 두고 그곳을 발전시켜왔기에 개경에만 인구가 집중된것이 아닐 수도 있다. 지방균형개발 성공의 모범 사례 또한 개경은 서라벌과는 다르게 많은 외침을 당하고 함락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기 때문에 인구가 전쟁중에 줄어든 것일 수도 있다.

조선의 경우는 다산 정약용이 자식에게 서울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로 서울 집중 현상이 심했지만, 그래도 수원 화성 등을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관련 기사 관련 기사2

5. 구조

기본적으로 중심지구는 서쪽으로는 서천, 북쪽으로는 북천, 동쪽으로는 명활산낭산 사이, 남쪽으로는 포석정까지로 추정되고 있다. 통일신라 전성기에는 건천읍 모량리와 북천 건너편까지 주거지역이 확대됐다고 한다.

궁전경주 월성 북쪽으로 넓은 주작대로가 나 있어 정북쪽의 성동동 전랑지까지 이어졌다. 궁전의 남쪽은 남천이 흐르고 있어 정문이 북쪽인데, 옛날 동아시아 웬만한 도시들은 중국장안을 본따서 비슷비슷한 계획도시를 만들었는데[17] 중국식이라면 남쪽으로 나 있어야 할 궁전의 정문이 북쪽이라[18] 서라벌은 이런 표준에서 다소 벗어난 구조였다. 어쨌든 타고난 지형상 그건 어쩔 수 없고, 중대에 들어서 중국의 장안을 본따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도시를 네모 모양의 방리로 구획하였다. 전체가 정사각형 36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1개 방은 16개의 작은 구획으로 나누었는데 구획에는 자갈 등으로 폭 13미터의 도로를 깔았다. 경주 왕경 전체는 6부 55리 36방으로 되어있었다.

6. 어원

신라의 도읍을 적을 때에는 서라벌 이외에도 금성(金城), 서벌(徐伐), 서나벌(徐那伐), 서야(徐耶), 서야벌(徐耶), 서라(徐羅) 등 여러가지 표기가 있었는데, 한자가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넘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진한고유어(우리말)를 나중에 들어온 한자로 표기(음차)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이름으로 기록에 남은 것이다. 신라 건국 초기였던 원삼국시대에는 수도 서라벌, 즉 금성이 신라라는 국가 그 자체인 도시국가였고, 국가의 기틀을 잡고 난 뒤에도 한동안은 서라벌이라는 이름이 나라 이름으로 쓰이기도 했으며[19] 사실 서라벌과 신라 둘 다 사로국, 사라 등 'ㅅㄹ' 계통의 동일 어원이다. 하나의 도시 정도에서 시작해 영역국가로 성장했고 도시 이름이 곧 나라 이름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지구 반대편의 도시 로마로마 제국의 관계로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서라벌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옛 명칭(국호) 및 '수도'를 의미하는 일반 명사로서의 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동음이의어) 문서 참조.

6.1. 옛 명칭 유래설

진한 6부의 사량부(새라)에서 유래하여 새라위에 있는 들판이란 의미로 새라불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유래한 설이 있다. 신라, 사로국, 사라 등도 모두 같은 유래로 본다. 국호 서벌을 새로운 땅(들판)으로 보기도 한다. 유력한 설로 알려져 있다.

'새라'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잠깐 생각해 보면, 실제로 고대 국가에서 민족의 이름이 곧 사람을 뜻했고, 이게 다시 지명이 되는 일이 잦았다. 만약 '신라', '서라', '사라', '사로' 등의 'ㅅㄹ' 계통이 현대어로 '인간', 즉 '사람', '삶', 살-(live)'과 같은 'ㅅㄹ' 단어들과 어원이 같다면 저 'ㅅㄹ' 단어 + '벌'은 곧 '사람이 사는 땅'이 된다. 민족을 가리키는 말 뒤에 땅을 뜻하는 접미사를 붙이는 조어법은 실제로 중앙아시아의 '-stan', 유럽의 '-ia' 등으로 지구상에서 흔한 편이기도 하다.

6.2. 불교 유래설

인도의 도시 슈라바스티에서 유래한 설이 있다. [20] 현장법사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면서 슈라바스티를 室羅伐悉底(실라벌실저)로 음차하였는데 사위성(舍衛城)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21] 실라벌실저에서 서라벌과 신라가 유래하였다는 것인데, 한반도불교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다는 것도 뒷받침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신라 중기에는 아예 왕족 이름을 석가모니의 가족 이름으로 짓는 등 굉장히 불교에 심취해 있었기에 그렇기도 하다.

다만 서라벌이나 신라와 동일 어원으로 보이는 비슷한 이름은 불교가 전해지기 훨씬 이전부터 쓰였으므로 신라 초기 연대가 좀 끌어올려졌다고 쳐도 시대가 안 맞는다. 가령 3세기에 쓰여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사로국이라는 이름. 정사 삼국지가 쓰여진 3세기는 말할 것도 없이 신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시기, 이차돈 순교로 공인된 시기보다 수백 년 이전이다. 3세기는 어쨌든 중국까진 불교가 확실히 넘어왔던 시대이고, 중국과 교류는 했으므로 어찌어찌 불교적 지식을 입수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어쨌든 아직 이차돈 순교 이전으로 신라의 토착신앙이 건재하기 때문에 신라의 수도 이름을 불교식으로 지어줄 이유가 부족하다.

물론 우연히 음가가 비슷했고 나중에 입수한 불교적 지명에서 찾아 끼워맞췄을 수도 있고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불교와 관련된 문화가 이미 퍼져있을 수도 있다.[22]

7. 신라 이후

935년 제56대 경순왕이 서라벌을 떠나 개성에서 항복하면서 신라의 천년 사직이 끝나고 도시 이름도 지금의 경주로 바꾼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고려시대에도 서경 평양과 함께 3경 중 하나인 동경(東京)으로서 중요한 도시로 대접받았고 정지상의 시에서도 일만호로 표현할 만큼 큰 시가지에 황금절이 빛나 지나가는 사람이 구경하기 바쁜 화려한 대도시로 등장하고 있지만[23], 수도였던 시절 전국의 세금이 모이는 거대 소비도시 구조와 인프라는 이제 지방도시가 된 경주로서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 예시로 1012년 황룡사 9층 목탑을 수리하기 위해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던 옛 신라 왕성의 일부인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건축자재를 사용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신라 때의 대형 사찰 중생사는 시주가 들어오지 않아 승려가 김해까지 탁발을 하러 갈 정도로 경영난을 겪었고 고선사와 창림사 석탑은 해체해서 개성 만월대로 가져가버리기도 했다.

고려 현종은 기존 신라 왕경의 중심지였던 현 월성동에서 서북쪽으로 2km 가량 떨어진 지점에 경주읍성을 새로 만들어 관청 등 시설을 모았고 이후 고려, 조선을 거쳐 21세기까지 약 1천년간 경주의 중심지는 지금의 중부동 일대 경주읍성 지역이 된다. 이후의 역사는 경주읍성 문서 참조.

그 대신 신라 때 중심지였던 월성동 쪽은 시가지의 축소, 이민족의 침입, 관리 부족, 부실한 치수 등으로 쇠락해 대부분 유구만 남고 논밭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중심지 이동 덕분에 신라시대 유적지 위에는 더 이상 건물이 세워지지 않아 유적은 더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서울 풍납토성이 유적 위에 들어선 시가지로 훼손된 것 같은 위기는 피한 것이다.

8. 기타

  • 심시티 4의 기본 큰지도 이름이다.
  • 서울 강북구에 서라벌중학교, 노원구에 서라벌고등학교가 있으며, 경주에 서라벌초등학교, 서라벌여자중학교, 서라벌대학교가 있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630년지진이 발생해서 대궐의 뜰이 갈라졌다는 기록이 있다. 2016년 경주 지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라벌이 위치한 경주 지역은 불국사 단층이 관통하여 예로부터 지진이 자주 일어났던 지역이다.


  1. [1] 단적인 예로 위에 나와 있는 황룡사 9층 목탑은 어떻게 생겼는지 설만 분분할 뿐 아무도 모른다.
  2. [2] 한국사 검정 교과서 표기. 금성과 서라벌은 모두 같은 지명을 하나는 한자음으로(음독), 하나는 고유어로(훈독, 신라어독) 읽은 것이다.
  3. [3] 경주 외에는 대표적으로 로마(고대 로마, BC 753~476), 콘스탄티노플(동로마 제국, 330~1453, 오스만 제국까지 합치면 1922년까지), 교토(일본, 794~1868) 정도가 손에 꼽히는 편이다. 파리런던 등도 전통의 대도시이지만 속령이 아닌 독립국의 수도였던 기간은 천년이 채 안된다. 한편 서울특별시나 중국의 시안시, 뤄양시, 베이징시 등은 수도였던 기간을 종합하면 천년이 넘지만 쭉 이어진게 아니라 파편적인 기간을 모조리 합산했을 때 천년이 나오는 거라 앞의 도시들과 비교하기는 차이가 있다.
  4. [4] 수도 서라벌을 '동쪽 수도'란 의미인 동경으로 칭한 것은 '서쪽 수도'로 간주한 곳도 존재했다는 의미인데, 이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당시 신라에서 지방 통치를 보완하기 위해 설치된 행정 구역이었던 5소경에 대응된 호칭이라는 설이 있다. 이들 5개 소경은 '작은 수도'라는 의미답게 수도의 사람과 기능을 일부 옮겨 조성했고 위치도 모두 경주보다 서쪽에 위치해 있다. 다른 하나는 서쪽 당나라장안을 서경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대응해 신라를 중국과 대등한 문명국가로 간주해서 동경으로 칭했다는 설이 있다. 주보돈 교수는 2015년 신라의 동경과 그 의미라는 논문에서 8세기 중엽부터 신라인들이 고양된 문화의식과 자존의식 아래 그렇게 부르는 용법이 생겼으리라 추정했다. 이런 신라인의 자존의식의 예시로 황룡사 9층목탑의 의미, 태종 무열왕묘호 분쟁, 김헌창의 난 때 장안국을 칭한 것을 예로 들었다. 물론 이 시기 경주는 수도였기 때문에 굳이 동쪽 수도라는 의미의 동경보다는 경(京), 왕경(王京) 등 수도 그 자체로 더 많이 불렀다.
  5. [5] 멸망 이후 조성된 경순왕릉은 예외.
  6. [6] 현대에 경주보다 더 넓은 농토가 된 김해평야나 호남 지방의 평야 등은 고대에는 바다였거나 농사를 짓기 힘든 환경이었다.
  7. [7] 사실 김헌창의 난 당시 수도에서 가장 먼 북부의 지방관들이 신속하게 지원군을 보냈던 걸 보면 통일신라의 지방 장악력이 한국사 다른 나라나 동시기 중국, 일본에 비해서 특별히 부족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물론 마지막 순간에는 지방 장악에 실패했지만 이게 통일신라 성립으로부터 계산해도 220여년만에 일어난 사건인데 220년 동안 지방의 반란을 차단해왔던 것은 세계사적으로 길면 길었지 짧은 것은 절대 아니다.
  8. [8] 조선시대에 경주읍성이 오늘날의 중부동 일원 (북부, 서부, 동부동)에 세워지면서 그 때 경주시 시가지 중심부가 북서쪽으로 약간 옮겨가고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9. [9] 황금을 집에 씌운 부잣집 큰 저택을 말한다.
  10. [10] 통일신라의 8~9세기 인구를 전대 고구려 인구와 비슷하게 추정한다. 통일신라가 백제, 신라를 모두 삼켰음을 감안한다면 얼마나 많은 고구려인이 신라에 흡수되지 못했는지, 통일신라 흡수 인구와 훗날 고려로 망명한 발해 유민을 제외하면 상당히 많은 고구려계열이 현대 한국인의 조상이 되는데 실패했는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11. [11] 그래서 그런지 경주분지 땅에서 비교적 외곽 지역인 구 경주경마장 부지에서도 집단 집터와 숯을 굽던 가마터가 20기나 발견됐다. 이는 당시 경주분지 땅 안에서 인구집중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이다.
  12. [12] 그러나 경주분지 주변으로 넓혀서 봐도 의미 없는게 경주분지 주변지형은 죄다 산이다. 구글어스를 통해 경주시를 보면 대번에 드러난다.
  13. [13] 작은 수도라는 의미의 소경(小京)은 아예 중앙 귀족과 부유한 백성을 옮겨서 채웠다는 기록도 있다.
  14. [14] 하일식, 「신라 왕경인의 지방 이주와 편적지(編籍地)」,『신라문화』38, 2011
  15. [15] 다만 경주분지바깥의 단층이 발달한 지형상 현대의 부산이나 홍콩마냥 가늘고 길게 시가지가 쭉 이어졌다고 하면 감안할 여지는 있다. 양산단층 문서를 참고.
  16. [16] 그런데 이건 경주도 마찬가지다.
  17. [17] 발해상경용천부, 일본나라, 교토 등도 똑같이 장안을 본따서 정궁과 주작대로를 두고 구획을 지었다.
  18. [18] 정석에 가까운 구조는 경복궁이나 자금성을 떠올려보면 된다. 경복궁의 경우 광화문 광장이 주작대로. 개성 만월대 역시 개경 내부에서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19. [19] 지증왕의 국호 통일 이전
  20. [20] 금강경이 설해진 배경이 되는 도시이다.
  21. [21] 구마라습의 번역은 슈라바스티를 사위성으로 표기하였다.
  22. [22] 인접한 곳에 위치한 가야는 이미 일찍부터 불교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3. [23]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백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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