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회

국제조약을 위반한 소련한국에서 당장 꺼져라![1]

서북청년회

1. 개요
3.1. 다른 면: 정부에게 이용당한 집단
4. 극우 선봉세력, 정치깡패 활동과 숙청
5. 평가
5.1. 극우 세력의 왜곡
6. 서북청년회 재건위
7. 관련 문서
8. 관련 항목
8.1. 주요 관련 사건

西北靑年會

Northwest Youth League

(Northwest Youth Association)

1. 개요

[2]

초기 서북청년단의 강령

1.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의 전취(戰取)

2. 균등사회의 건설

3. 세계평화에의 공헌

대한민국에 실존했던 정치깡패. 백색테러를 무수히 자행하던 극우 성향 테러조직으로, 서북청년단이라고도 한다. 약칭은 서청(西靑).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로 구성된 청년단체(양호단,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청년부, 북선청년회, 평남동지회, 평안청년회)들이 모여 1946년 11월 30일 서울 YMCA에서 창단했다.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우기성을 선출했고, 중앙집행위원장 외에 11개 부서와 감찰위원회 및 지부가 설치되었다.정종식, 서북청년단의 결성과 활동

이들은 주로 지주, 개신교 인사[3][4], 민족주의자나 일부 친일반민족행위자북한의 탄압을 피해서 도망온 젊은이들이었다. 실제 해방 후 한국전쟁 전까지 소련군정하의 개신교 박해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단순히 개신교인이기 때문에 사회활동에 제약을 받거나 권리행사가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개신교인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이 한국전쟁 전에 고려호텔에 연금됐던 것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탓에 한국전쟁 직후 북한에는 지주, 자본가, 개신교도,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이 죄다 월남한 탓에 숙청할래야 숙청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 생겨버린다. 하지만 박헌영이 출동한다면 어떨까 그리고 1949년 백범 김구를 암살한 범인 안두희도 젊은 시절 이곳 정회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2.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과의 통합

사건 순서

대한청년단의 창단 과정[5][6]

1

조선건설치안본부

조선건국청년회

광복군 국내지대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

월남 청년단체[7]

대한민주청년동맹

대한독립촉성국민회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

20여개 군소단체

조선민족청년단

2

조선청년동맹

한국광복청년회

서북청년회

3

1947년 9월 21일 대동청년단 창단

재건 서청[8]

청년조선총동맹

4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 창단

5

1949년 1월 20일 대한청년단조선민족청년단을 흡수함.

1947년 4월 지청천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기존의 청년 단체들을 통합하면서 서북청년회를 해체하고 대동청년단에 합류시킬 것을 요구하자 장택상은 강력하게 반발했으며, 조병옥 또한 치안상의 문제를 들어 서북청년단 해산을 반대했다. 대동청년단 합류를 둘러싸고 서북청년회는 합동파와 합동반대파로 분열되었는데 합동파는 1948년 9월 대동청년단에 통합되었고 합동반대파는 문봉제를 위원장으로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고 초기 서북청년회가 김구 노선을 지지한 것에 비해 이들은 이승만 노선을 따라 이승만 친위대 역할을 했으며,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에 흡수 통합되었다. 서북청년단이나 대동청년단 같은 기존 단체들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시킨데에는 다른 정치가들의 세력 기반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하려는 이승만의 의도도 한 몫 했다. 대한청년단은 총재를 이승만으로 단장은 신성모로 했다. 일부는 내분에 염증을 느껴 탈퇴하거나 군이나 경찰, 특무대 등으로 들어가는 등 제3의 길을 택하기도 했다.

3. 암살, 테러, 민간인 대량학살

1947년 삼일절 기념식을 따로 가진 좌·우익이 시가행진 중 숭례문에서 충돌한 사건을 비롯하여 부산 극장사건,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사무실 점령사건, 정수복 검사 암살사건 등 좌익 세력에 대한 테러를 주도하고 경찰의 좌익 색출 업무를 도왔다. 제주도 4.3 사건에서 언급되는 토벌대로 불리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정식 군대나 경찰이 아니라 이 서청이다.[9] 가장 큰 문제는 빨치산을 색출하고 처벌한 것이 아니라 민간인, 때로는 군경의 가족에게조차 적법하지 않은 사적재재를 가했다는 점에 있다. 물론 빨치산은 지역 주민의 호응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고, 따라서 이 글을 읽는 위키러가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서라면(또는 반공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던 숙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10] 그런 맥락으로 따지자면 우리는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이나 서울대병원 학살사건등을 영원히 비판할 수 없게 된다. 1949년에 이루어진 제네바 협약에 의거하여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민간인에 대한 증오범죄는 금지되며, 이에 따라 서북청년단의 행동은 위법이다. 당장 ISIL이 왜 욕을 먹는지 생각해보자. 거기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인간들 아무 권한도 없는 민간단체다! 그러나 말이야 맞지만, 1949년의 제네바 협약이 그 이전의 남로당과 이들의 범죄행위를 위법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는 애매하기는 하다.

또한, 6.25 한국전쟁 당시에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사건에서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했다. 이 사건의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아예 그냥 공무원들 각자 인원 할당량을 만들어서 쌀을 지급하는 등으로 유인해 허위로 가입된 무고한 민간인들도 수없이 무차별로 희생당했기에 이는 단지 이념만의 문제가 아니며, 매우 중대한 묻지마식 대량학살 범죄라고 볼 수 있다.

서청 중앙본부의 문봉제 단장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한 해명성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는 “우리는 어떤 지방에서 좌익이 날뛰니 와 달라고 하면 서북청년회를 파견했다”면서 “그 과정에서 지방의 정치적 라이벌끼리 저 사람이 공산당원이다 하면 우리는 전혀 모르니까 그 사람을 처단케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지역이 제주도”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린들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北韓硏究所, 北韓 1989년 4월호, 127쪽, 제주 4.3 사건진상보고서, 271쪽에서 재인용

이승만미군의 후원 아래 제주 사태의 최일선에 서게 된 서북청년회는 군‧경 모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중산간마을인 애월면 광령리 주민이던 고치돈은 하귀리 개수동으로 소개했다가 그곳에서의 무차별 총살에 놀라 다시 제주읍 외도리로 소개했다. 고치돈은 외도리 민보단장이 처가 쪽 친척이라 그의 배경으로 양민증도 비교적 빨리 얻었고, 특공대에 편입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했다. 고치돈은 특공대 시절 목격했던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들의 잔혹했던 행동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외도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李允道)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

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꼴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출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71쪽

1948년 11월 9일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金斗鉉, 53)이 서청의 손에 고문치사 당한 사건도 서청의 위세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제주도 행정 2인자가 보급문제에 불만을 품은 서청들에게 희생된 것이었다. 특히 서청 제주단장 김재능은 자기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을 한끝에 김두현 총무국장이 실신하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밖으로 내버려 끝내 절명케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1~272쪽

3.1. 다른 면: 정부에게 이용당한 집단

다만 이 범죄도 정부가 조장한 부분도 크다.

예로 사설단체인 서북청년단을 군인으로 대량으로 공급한 이는 이승만이다. 거기다가 급여를 주지도 않고 제대로 된 배급체계도 갖추어주지 않아 사실상 학살을 조장하게 만들었다. 서청 경찰관 출신 박형요는 "이승만이 우리를 이용했다고 여겨집니다.", "이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 이승만이 ‘죽이지 말라’고 했으면 제주도에서와 같은 학살사태가 있을 수 있습니까?"라면서 이 사람들도 이승만에게 이용당한 피해자일 가능성을 주장했다. 자세한 건 이승만 문서에서 3.2.5. 제주도민 대량 학살 참고.

4. 극우 선봉세력, 정치깡패 활동과 숙청

드라마 야인시대에 보면 서청의 활동상이 나와있다.

서북청년단은 정부수립 이전에 계림공작대라는 조직을 두고 독자적으로 대북공작을 벌이기도 했으며 이 조직은 정부수립 이후에 국방부와의 협력으로 호림부대라는 특수부대로 재편되어 북파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금강산까지 침투했던 호림부대원 상당수는 북한군 및 내무서원(경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생포되어 귀환한 자는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의외로 서청 단원 중에서 성공한 사람은 몇 안 되며, 이들은 결국 한국전쟁 중에 조선인민군에 의해 처형당하여 궤멸되거나 그나마 운 좋은 경우에는 약간의 훈련을 거친 후에 예비역 장교 신분으로 국민방위군을 조직하고 훈련하는 역할에 배정되기도 했는데 이들조차도 후에 군인들을 굶겨죽인 죄로 처형당했다. 그야말로 자기들이 저지른 업보에 걸맞는 인과응보. (국민방위군 항목 참조) 이렇게 해서 지향점을 잃어버린 이들은 민병대로 편입되었다.

이후 이용가치가 없어진 서청 출신자들은 특별한 보상 없이 그냥 잊혀졌다. 남한군 예비역 육군 대령이자 언론인, 작가의 길을 걸었던 선우휘는 출신에도 불구하고 서청과는 거리를 두었다.(반공 성향은 이해하자.) 하지만 그의 말년 작품은 대부분 서청 출신으로 쓸쓸히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 그가 진정으로 동인문학상을 주어야 할 작품이라 평한 "테로리스트"나 자신이 "대령"으로 등장하는 "오리와 계급장"이 대표적이다.

서청쪽 간부이고 유엔군의 북한 통치시기 이승만이 임명한 평안도 지사 대신 미군정에 임명돼서 벼슬을 한 김성주(김일성이 아니다.)는 이렇게 버려진 대표적 케이스, 그는 후일 반 이승만 음모혐의로 시간을 달려서 사형당한다. 정확하게는 고문치사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11] 시체를 헌병 사령관 집에 유기해버리고 사형 판결과 집행을 이전에 한 것처럼 날짜조작을 해버렸다. 4.19 이후에나 진상이 공개되고 시체가 발굴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김성주의 억울함을 증명한 건 같은 극우가 아니라 중도 보수였던 민주당이었다.

제3보병사단이 '백골부대'로 불리게 된 연유를 제공한 것도 서청 단원들. 수도사단 제18연대에 자원입대했던 서북청년단원들이 '죽어 백골이 되어서도 고향을 되찾겠다'는 의미로 방탄헬멧에 백골을 그려넣은 데서 이런 호칭이 유래되으며 후에 흥남철수작전 이후 18연대가 수도사단에서 3사단으로 배속전환되면서 사자부대라 일컫던 3사단이 백골부대로 변경되는 계기가 된다. 지금도 18연대는 진백골부대, 18연대 1대대는 진진백골부대라 한다. 헌데 서북청년회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저 '백골부대라는 호칭의 유래가 된 단체'로만 알고 있어서, 이들을 건전한 청년단체로 아는 경우도 있단다(…). 충공깽. 사실 같은 단체 소속이었다고 해도 때로 몰려다니며 사적 린치로 민간인이나 죽이는 위험분자들에 비하자면, 언제든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혼란시국에 고향을 되찾겠다고 제대로 된 군대조직에 몸담은 이들이 훨씬 제대로 된 사람인 것은 맞다.

이 밖에 월남한 이북 청년과 학생들의 생계를 돕는 지원사업을 했고, 활동자금은 한반도 서북부 출신 실업가들과 미 군정청 고위관리들,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의존하기도 했고, 각 지방단의 유지로부터 염출하거나 미 군정청의 원조물자를 유출하여 자금화했다.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제대로 된 조직 같아 보이는데, 전형적인 초기 조폭의 형태이다.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돈을 받아서 정치 깡패이고, 각 지방단 유지에게서 염출했다라고 하는데 이건 당시 서청의 위치로 보면 거절할 사람이 없었을 것으로 누가 봐도 영락없이 삥 뜯은 것이고, 원조물자 유출은 현재도 아프리카쪽 군벌들이 자주 저지르는 비리지만, 당시 조직폭력의 역사를 다루면 빠지지 않는 유형이다. 이승만 정권 때 박살나긴 했지만 이 때 살아남았어도 아마 몇년 뒤 박정희가 정권 잡고 나서 털어버렸을 것이다. 정치 권력에 기생하는 정치 깡패들은 또 다른 독재자의 눈에 들지 못하면 쉽게 숙청되기 때문이다.

5. 평가

활동상만 보면 바로 정답이 나온다. 오죽하면 같은 우익조차 외면했다. 김성주의 비참한 최후는 이렇다. 서청은 같은 반공 세력에게도 환영을 못 받았다. 반공이 국시이던 당시 기준으로도 서청은 엄청난 만행을 일삼았다. 한마디로 홍위병의 극우버전이며, 반공을 외치면서 정작 무고한 민간인들을 강간 및 학살한 극악무도한 테러 집단이자 범죄 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서청 출신자들은 "남한마저 사회주의 세상이 되면 살 곳이 없어지기 때문에 생존차원에서 투쟁했다" 고 되도 않는 망언을 한다.[12] 즉, 고향에서도 살해 위협을 받으며, 재산마저 빼앗기고 쫓겨났기 때문에 살아남으려고 과격한 투쟁을 벌였다. 물론 이것은 논리가 없는 망언일 뿐이다. # 자기들 욕망대로 임산부를 윤간하고 살해하는 범죄가 도대체 반 사회주의 투쟁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그들은 심각한 전쟁범죄를 저질렀고, 반공 이데올로기 아래 숨어서 처벌을 면하고 일부는 승승장구했지만 유죄는 유죄다.

이승만에게는 서북청년회뿐만 아니라, 삼우회도 있었다. 하는 일은 같다. 해방 이후 좌익들 사이에서는 "이승만에게 삼우회가 있으면, 김구에게는 백의사[13]가 있다"고 소문이 났다. 여기에 양자 모두를 따른 것[14]김두한이 이끌었던 대한민주청년동맹, 약칭 대한민청이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홍위병이나 재특회, 그리스의 황금새벽당과 공통점이 더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들과는 다른 점 역시 상당하다. 가장 큰 특징은 명분은 크고 폼나게 내거는데, 정작 진짜로 사고친 것은 후방에서 한참 약자들 상대로 했다는 것이다. 보도연맹도 그렇고, 정치깡패짓도 그렇고, 제주도에서도 그렇다.

냉전시기에 서북청년회 같은 극우 조직들이 기승을 부린 것은 한국뿐만이 아니었다. 남미아프리카에서도 극우 조직들이 생겨나 빨갱이 사냥을 한답시고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콜롬비아의 "자위군"이라는 우익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동조하진 않고 단지 공산주의 게릴라들의 본거지에 거주했을 뿐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또한 과테말라에서도 극우 성향의 군부가 가혹한 착취 및 수탈에 시달리던 원주민들을 소련과 쿠바와 결탁한 공산주의자로 몰아 무참히 학살한 흑역사가 있었다. 이러한 만행이 얼마나 심했던지, 같은 우익 성향의 나라인 주 과테말라 영국 대사조차 이들의 잔악함에 치를 떨었을 정도였다.[15]

5.1. 극우 세력의 왜곡

극우 세력에선 이 정치깡패 집단을 "(對)대테러집단(...)" 이라고 왜곡하기도 한다. 관련은 조우석 문서 참고하자.

이주영[16]은 이 집단을 호국세력이라 왜곡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18권. 그간 금기시되어왔던 '서북청년회'의 진면목을 여실히 드러낸 책이다. 1945년 8월 15일의 해방 직후 좌익들과 싸워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기여했던 우익 청년단체의 하나인 서북청년회와 서북청년들의 건국, 호국 활동을 개략적으로나마 소개하고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 남북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소련군북한을 빨리 공산화시키려는 의지가 너무나 강해 미군과의 합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17][18] 또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좌익과 남북협상파들의 반대가 너무 강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도 좌우합작의 연립정부를 세운다는 허망한 목표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수우익 세력은 좌익과 남북협상파들의 친일파 숙청과 통일이라는 민족주의의 명분 앞에 주눅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유부단한 보수우익 세력을 반공과 정부수립의 방향으로 강하게 이끌고 간 세력의 하나가 서북청년회였다. 서북청년들은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로부터 탈출한 월남민이었기 때문에 전투적인 반공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의 말대로 그들이 없었으면 치안유지도, 정부수립도 할 수 없었던 중요한 세력이었다.

6. 서북청년회 재건위

2014년 9월, 뜬금없이 이른바 서북청년회 재건위가 등장해서 이 단체를 부활시키겠다고 선언해 서북청년회가 어떤 단체였는지가 재조명받고 있다. 사실 이들이야말로 민주화의 수혜자들로, 제1공화국을 제외한 독재 시절이었으면 오히려 이들 정치깡패남산에 끌려갔을 것이다. 이후 서북청년회 재건위는 2014년 11월 28일에 서울에서 재건총회를 개최했다. # 이 과정에서 수련관의 대관이 취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진입해 강행했다고 한다.

2014년 10월 2일에는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회 대표가 서북청년회 재건위를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서북청년회 재건위에서 김구김일성꼭두각시였고 암살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인데, 이는 명백한 허위사실이다.

시사인과의 인터뷰에서 재건위 관계자들은 억울하다고 항변하며 정당성을 부르짖고 있다. 시사인에서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숙청된 김성주나 서청 관계자들에 대하여 말을 하자 그에 대하여 어물쩍 넘어가면서도 여전히 이승만 찬양이나 했다. 사실관계를 굳이 따지자면, 서청은 당시 국민방위군과 연관된 신성모의 세력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기붕을 띄우기 위해 이승만에 의해 고문 및 암살당함으로써 공중분해된다. 또한 한국에는 우파는 있지만 극우가 없다며 네오 나치 같은 극우가 필요하다는 정신나간 헛소리를 하고 있을 정도. 사실상 본인들과 네오나치를 동류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물론 독일 극우네오나치와 자기들을 동일시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19]

현재 정함철이라는 사람이 이 단체를 이끌고 있다.

2019년 10월 1일에 유니폼을 입고 경복궁역을 활보했다. #

7. 관련 문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서북청년회

(시사상식사전-방문각)서북청년단

(위키백과-한국어)서북청년회

(디지털제주문화대전)서북청년회 제주도지부

미군정·이승만 정권의 제주4·3항쟁에 대한 인식

8. 관련 항목

8.1. 주요 관련 사건


  1. [1] 저 원문을 직역하면 '국제 조약의 배신자 소비에트 연방 한국에서 꺼져라' 정도가 되겠다.
  2. [2] 폭행만이 아니라 강도, 강간, 살인, 고문 등은 물론 제주 4.3 사건 당시 일제나 저지르던 영아살인 등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은 거의 전부 저질렀다고 보면 된다. 전시상황이라고 옹호할 수 없는 것이, 이 자들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단체였다.
  3. [3] 해방 직후 평안남도를 비롯한 서북지역은 조선에서 가장 개신교 신자 비율이 높았다. 해방 직후 뿐 아니라 20세기 초부터 개신교 신자 비율이 매우 높았다. 때문에 한때 '평양'은 '동방의 이스라엘'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처럼 서북지역에서 개신교의 교세가 거셌던 이유로는 조선시대 차별받던 서북지역민들에게 기독교의 만인평등사상이 많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연구도 존재한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가 이들의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4. [4] 한국의 개신교 교인들 특히 보수성향 신자와 목사들이 현재진행형으로 공산주의북한에 대해서 듣기만 해도 치를 떨고 이를 가는 것은, 북한과 공산주의자들이 개신교도들을 탄압한 일이 가장 큰 이유다.
  5. [5] 정종식, 서북청년단의 결성과 활동
  6. [6] 김수자, 대동청년단의 조직과 활동(1947~1948년)
  7. [7] 양호단,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청년부, 북선청년회, 평남동지회, 평안청년회
  8. [8] 대동청년단에 합류하지 않은 서청 세력
  9. [9] 4.3 사건 당시 서북청년회는 대동청년단이나 대한청년단에 흡수된 상태였지만, 서청 출신 단원들은 계속 서북청년회의 이름을 걸고 활동했다.
  10. [10] 피아를 구별하지 않는 무자비한 학살은 오히려 정말 무고한 양민들마저 진압군을 적대시하고 게릴라에 협조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정말 게릴라의 준동을 발본색원하기 위해서라면 꼭 피해야 할 행동이 민간인 학살이고, 그래서 현대 미군이 이라크나 아프간에서 민간인들의 부수적 피해마저 예방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4.3 사태가 장기화 된 것엔 대다수 외지인들로 구성된 진압군이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민심을 잃은 것이 크게 작용했다.
  11. [11] 다만 재판부는 살인죄로 규정했다.
  12. [12] 이런 소리는 한국의 우익 지식인들도 하는데, 그래서 진중권이 자신의 책인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 그런 지식인들을 비꼬는 내용을 넣었다.
  13. [13] 대동단이 후신이라고 한다.
  14. [14] 회장 유진산, 고문 신익희, 명예회장이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다. 당시 대표적인 우익지도자는 거의 다 보인다. 김두한은 감찰부장이었다.
  15. [15] 출처: 빼앗긴 대륙, 아메리카/ 로널드 라이트 지음/ 안병국 번역/ 이론과실천
  16. [16] 건국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미국사 전공으로 대중들에겐 대한교과서에서 출판된 세계 각국사 시리즈 중 미국사의 저자로 친숙하다. 이 미국사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폭넓게 다루면서도 알기 쉽고 중립적으로 쓴 양질의 입문서인데 전공도 아닌 근현대사에 손을 대더니...라고 일각에서는 보는것 같은데 미국사 또한 현대사 파트에서 저자의 극우적 성향이 아주 잘 드러난다. 그가 쓴 미국사 책에서 베트남 전쟁 파트를 보면, 고딘디엠의 부정부패상은 전혀 얘기하지 않고, 베트남 전쟁 시기 베트남 사회의 부패와 혼란상을 단순히 베트콩을 비롯한 간첩의 침투로만 설명하고, 68혁명시기 반전운동과 신좌파를 자처하던 세력을 "이성과 합리를 버렸다"라고 하며 자신의 극우적인 정치색을 미국사 서적에서도 드러냈다.
  17. [17] 설득력이 별로 없는 주장이다. 해방 후 꽤 오랜 시간 동안 남북한 모두 좌익의 세력이 우익보다 강력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제 말기까지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한 이들이 주로 좌익이었기에 민족적정통성에서 우월했다는 점이 그 하나다. 반면 우익들은 아예 노골적 친일로 돌아서거나 그 정도는 아니라도 항일운동을 사실상 포기한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더 급한 쪽이 미국이었을까 소련이었을까? 특히나 당시 소련은 동유럽에 정신이 팔려 동아시아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일제 패망 후 한반도에 진주할 때 소련은 미국이 분할 점령선으로 39도나 심지어 40도선을 제안하더라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는 사실이 그 반증이다.
  18. [18] 이외에도 아래에는 독단적인 주장이 많다. 이주영 교수는 서북청년단을 항일투쟁을 계승한 집단으로 왜곡해서 주장하기 까지 한다. 참고로 이주영 교수 전공분야도 원래 한국현대사가 아니라 미국사다.
  19. [19]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치 독일붕괴 이후 기존의 독일 극우세력들 중에 나치에 동조했던 인종주의자들은 무너지고 단순히 타민족에 배타적인 극우 민족주의자들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이들 극우세력은 외국인에게 배타적이긴 하지만 나치처럼 인종제일주의를 외쳐서가 아니라 그냥 독일 민족이 우선이라는 정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짜배기 극우들은 소위 정재계의 거물을 주축으로 하고 있는데, 네오나치들은 사회불만 세력이 자기들의 사회적 경제적 불만을 약자들을 대상으로 하면서 이름만 네오나치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니 나치에게 박해를 당했던 폴란드러시아에서 네오나치가 나오는 것인데, 이게 소위 진짜 극우들 눈에 찰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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