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원(가수)

1. 개요
2. 경력
3. 그의 죽음
4. 발견 당시의 상황
5. 유서
6. 마지막 음성
7. 자살의 원인
7.1. 20대 X새끼론의 희생자
7.2. 그의 사후
7.3. 죽음에 대한 루머
8. 음악적인 평가
9. 트리비아

1. 개요

본명

박병철

출생

1976년 2월 19일, 서울특별시

사망

1996년 1월 1일 (향년 19세)

신체

183cm, 63kg

가족

2남 중 장남

학력

미국 존버로즈 고등학교

데뷔

1994년 1집 'Seo Ji Won'

종교

개신교

1994년 데뷔 앨범 'Seo Ji Won'.

1990년대 선풍적인 발라드 열풍을 일으킨 재미교포 출신 가수. 유명 뮤지션 오태호가 작사/작곡한 1집의 타이틀곡 또 다른 시작으로 데뷔한 뒤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발라드계의 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서울 용산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살며 코헹가 중학교, 존버로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 12월 가수의 꿈을 안고 대한민국에 돌아와 데뷔하게 된다. 1집 앨범을 발표하자마자 수많은 소녀팬들을 확보하고 단숨에 인기 스타로 떠올랐다.

184cm의 훤칠한 키에 예쁘장한 얼굴을 소유했던 미소년. 특유의 미성과 가창력, 감성이 넘치는 표현력을 갖추었으나, 불투명한 미래와 주위 사람들의 지나친 기대,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획사에서의 횡포와 지나친 혹사에 절망감을 느낀 나머지 2집 발표를 앞둔 1996년 1월 1일 1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사실상 기획사에서 죽인 거나 다름없다는 것이 팬들과 유족들의 의견이다.

2. 경력

타고난 음성이 맑고 고와서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 전까지 KBS의 합창단원으로 활동했었다. 미국에서도 Angels 합창단에서 활동하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으며, 첼로와 피아노, 바이올린 연주도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배워 수준급이었다고.[1] 큰 키와 작은 얼굴, 날렵한 몸 덕분에 Bean X Model Agnecy 소속 (1990) Milo Print 패션모델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다.[2]

그러다가 그가 18살 되던 해,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 방송국과 신문사, 음반사가 주최한 신인가수 발굴 오디션에서 1,000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발탁되었다.

가수의 꿈을 위해 이미 특례합격되어 있었던 버클리대 심리학과 입학과, 미국 시민권도 포기하고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로부터 오랜 준비를 거친 끝에, 1994년 12월 첫 음반의 타이틀곡 '또다른 시작'으로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당시로선 보기 드문 10대 가수인데다[3] 모성애를 자극하는 귀여운 얼굴과 큰 키, 그리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단숨에 큰 인기를 얻고,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으로 아직 데뷔한지 1년도 안 되었을 때 벌써 주말 예능쇼의 MC 자리에 오르기도 하면서 수많은 팬들을 확보하게 되었다.[4] 그러나….

그가 2집 앨범 발표를 앞두고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2집은 그의 유작이 되어 버렸고, 정재형이 작곡한 타이틀곡인 '내 눈물 모아'는 당시의 가요프로그램인 KBS 2TV 가요톱텐인기가요 베스트 50 3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등 명곡으로 남게 되었으며 정작 1위의 주인공으로서 피날레 무대를 장식해야할 서지원은 안타깝게도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기에 그의 공연은 뮤직비디오로 대체되었다.[5]

서지원의 소속사에서는 그 후 그의 유작이 된 2집을 포함해 3년 동안 총 3개의 앨범을 발표했다.[6]

3. 그의 죽음

1996년 1월 1일 신정 저녁, 한창 새해에 대한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있던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뉴스가 보도되었다. 큰 인기를 누리고 있던 아이돌 스타 서지원이 19살이라는 아까운 나이로 요절했다는 소식이며, 더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토록 밝고 활발하던 그의 죽음이 그가 스스로 선택한 자살이라는 것이다.#

그의 직접적인 사인은 약물과다 복용으로 알려져 있지만, 진짜 사인은 그가 삼킨 약의 일부가 기도로 넘어가 호흡 곤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의 위에서 신경안정제 300알 분량의 약 성분이 검출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소화되기 전에 호흡곤란을 일으킨 듯하다.

안 그래도 듀스의 전 멤버 김성재가 2개월 전인 1995년 11월 20일에 세상을 떠난지 몇달이 채 안되는 상황이었기에 그의 죽음은 더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은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을 때 그는 혼자 절망에 빠져 있었던 걸까. 그가 세상을 떠난 얼마 뒤에 김광석그의 뒤를 따랐다.

사후 만들어진 '내 눈물 모아'의 뮤직비디오에서 자살같은 건 절대 안 할것처럼 생전에 행복하게 웃던 그의 모습은 오히려 많은 이들을 더 가슴아프게 했다.

서지원의 가족들이 전부 미국에 있었기에 그의 시신은 친하게 지내던 보컬 트레이너 겸 가수였던 박선주가 대신 확인했다고 한다. 그의 빈소는 이홍렬, DJ DOC, 박선주 등을 포함한 동료 연예인들과 소녀 팬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으며 여러 기자들이 찾아와 그의 죽음과 빈소의 모습을 취재했다.

발인은 1996년 1월 5일 치러졌으며 장례 행렬의 맨 앞에서는 그와 절친했던 동료 연예인이자 친구인 강태석이 연신 눈물을 훔치며 영정사진을 들고 앞장서고 있었다.[7]

고양시 벽제 화장터의 뜨거운 불 속에서 그는 한 줌의 재로 돌아갔으며, 3년 뒤 지리산 꼭대기의 노고단에 뿌려졌다.[8] 스무 살, 이제 막 꽃피기 시작할 나이에 서지원이라는 청년은 본래의 이름 박병철로 돌아가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4. 발견 당시의 상황

서지원은 세상을 떠나기 전날인 12월 31일 밤부터 새해가 밝아오던 다음 날 새벽까지 후배 가수지망생인 박모 군을 비롯한 친구들과 송년회를 가진 뒤 함께 자신의 숙소인 동작구 대방동의 아파트로 들어와 아침에 라면을 끓여먹고 자기 방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그날 저녁 8시가 다 되어서야 잠에서 깬 친구들이 서지원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침대에는 노란색 알약 1알이 있었고 평소 그가 복용하던 약병과 아래에 서술된 내용의 유서가 놓여있었다.

그 때가 하필이면 신정이었던 데다가 때 마침 집의 전화기는 고장난 상태라 앰뷸런스조차 부를 수 없는 상황이었고, 친구들은 급히 그를 업고서 서울 중앙대부속 용산병원 응급실로 옮겼으나 그 날 저녁 9시에 그는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참고로 약으로 쓰러진 환자는 절대로 함부로 옮기는 게 아니라고 한다. 그의 경우 부득이하게 후배가 업고 뛰었을 때 약이 기도를 더 막히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이 때 병원에서 의사들이 위 세척이라도 해줬다면 살 수 있었을 거라는 점.

5. 유서

아래는 총 3장으로 이루어진 그의 친필 유서의 내용이며 '내 눈물 모아'의 뮤직비디오에서도 오버랩하듯 화면을 스쳐지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지금 이 모든 일을 한글로 적는 것은 아무래도 유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누군가 이 글을 봤을 때 나를 이해하길 바래서이다. 내가 오랫동안 각오해 왔던 바이지만 드디어 용기를 내어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나는 그 동안 약을 복용해왔다. 그 이유는 안정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 세상은 내가 존재하기에 너무도 험한 곳이고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 것 같다. 2집 활동을 앞둔 나는 더 이상 자신도 없고... 활동 중 군대도 가야하고 내 가족들을 또 사무실 가족들을 책임지기엔 너무도 벅차다. 새해를 맞이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다.

난 이제껏 진실하지 못했다. 하지만 몇 사람들에겐 정말 죄송하다.

하나님, 부모님, 전무님, 실장님, 정형.승만.세진(이 셋은 동등하다.) 태석이 등등 너무 미안하다. 그들은 남은 인생을 나처럼 살지 않길 바란다. 내가 못 이룬 꿈을 내 동생들이 이루었으면 좋겠다. 난 항상 생각해 왔다. 무엇이 날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는지... 그 무엇보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못 이긴 것 같다. 연예인으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난 더 이상 힘이 없다. 차라리 미국에서 평범하게 공부나 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게 할 말은 뚜렷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냥 진실한 세상이었으면 한다. 내 마음을 모두 표현 못 하겠지만 나를 정말 지켜오고 나를 아는 사람은 날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픔도 알 것이다.

나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은 정말 없길 바란다.

전무님은 내가 죽은 뒤에라도 PR을 잘해 2집이 많이 성공적이길 빈다.

내가 이런 일을 저지를 것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 난 항상 밝게 살아왔으니까..죄송하다... 정말 죄송하다... 정말, 사랑하고 싶었는데...그러고 싶었는데... 전무님께 정말 죄송하구요 실장님께도 죄송하구요 다른 바램은 아무것도 없구요.... 우리 어머니 좀 잘 돌봐주세요.

그리고 정현이 승만이 세진이는 정말 끝까지 책임져 주세요. 그리고 저 용서해주세요....그게 저의 마지막 바램이에요.

6. 마지막 음성

세상을 떠나기 직전, 서지원은 자신의 삐삐 사서함에[9] 흐느껴 울며 자신의 팬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마지막 메세지를 남겼다.[10] 목이 메인 듯한 울음소리로 "여러분, 사랑합니다...부디 그것만은 꼭 기억해주세요."라고 간신히 힘겹게 이어가던 그의 마지막 음성은 후에 그의 베스트 앨범에 삽입되어, 많은 팬들을 눈물 흘리게 했다. 한 인간이 삶을 끝내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있는 그대로의 진심이 담긴 메세지이다.

7. 자살의 원인

흔히들 언론에서의 편파적인 보도로 인해 마치 그가 단순히 2집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자살한 유약한 청년으로 알고들 있는데, 이거야말로 서지원이 들었다간 하늘나라에서 펄펄 뛸 소리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원인은 세간에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암울했기 때문.

그가 소속된 기획사에서 서지원은 유일하게 성공한 연예인이었으며, 자연스레 모든 직원들과 후배 연예인들의 기대는 그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기획사 사람들 전체를 서지원 혼자서 먹여살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압박감은 곧바로 자신의 2집도 1집 앨범만큼 성공할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활동 당시에 기획사로부터 받은 대우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나이 어린 동생[11] 운동화 한 켤레 못 사줘서 마음 아파했다는 게 그의 죽음 직후의 시사 프로그램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그 외에도 그가 모친에게 전화를 걸어 경제적인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었으며, 기획사에서는 모친에게 직접 전화로 대한민국에 와서 지원이 보약 좀 지어주시라고 했었던 적이 있다.[12]

실제로 그가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매니져가 지갑에서 1~3만원 꺼내주는 정도였다고 한다. 이미 이 때 서지원이 엄청난 방송 프로그램과 광고 등에 출연했던 걸 보면 그 수익금이 결코 적은 편이 아니었는데도.[13]

서지원이 지냈던 오피스텔의 전세금도 그가 기획사와 계약할 시에 받은 계약금의 대부분으로 충당된 것이었다는 걸로 볼 때 대충 그가 얼마나 부당한 대우와 부담감을 견디며 지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14]

또한, 그가 어렸을 적 일찍이 겪어야 했던 고통 역시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서지원과 그의 가족들은 원래는 미국에 있을 때 꽤 부유하게 살았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큰 백화점의 소유주였는데, 1992년에 일어난 LA 폭동 때문에 그 백화점은 불타버리면서 풍족하고 여유롭던 시간은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으며, 그의 가족들은 그 때부터 쭉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고.

후에 그의 첫 음반이 예상보다 훨씬 인기를 얻자 그는 만약 2집도 소포모어 징크스로 그만큼 뜨지 못하면 그 옛날 겪었던 '추락'의 악몽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악몽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15]

설상가상으로 부모님마저 이혼한 상태라서 돌아갈 곳조차 없어진 상황이었으니, 그야말로 희망이라곤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것. 하다못해 기획사만 좀 잘 만났었더라면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전 문서에는 주영훈이 미국에서 자살한 어느 가수에 대해 언급했던 것에 관련지어 서지원이 그 가수인 것처럼 써 있었는데, 이건 조금만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애초에 서지원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자살했다.[16] 게다가 상식적으로 19살밖에 안 된 서지원이, 그것도 한창 인기가도를 달리던 중에[17] 뜬금없이 결혼할 여자를 데려왔다는 것 자체도 넌센스다. 때문에 이 둘은 동일인물일 수가 없다. 아마도 재미교포 출신이라는 점과 자살이라는 점 때문에 생긴 오해인 듯.

7.1. 20대 X새끼론의 희생자

이처럼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 편파적인 보도를 쏟아냈던 것은 당시 언론들이 X세대 때리기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88만원 세대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들의 시궁창스런 현실을 집중 조명하며 젊은 세대를 동정하는 기사들을 쏟아내지만, 당시 언론에서 다루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사치를 일삼는 개념없는 존재들이었다. 이런 기성세대들의 시각을 꼬집기 위해 당시 신세대였던 015B가 '요즘 애들 버릇 없어[18]'라는 노래를 만들었을 정도.

이런 식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프레임을 씌우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애꿏은 자식 죽이고 자살한 가장은 동정해도, 젊은이들의 자살은 동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 곱상한 외모를 지닌 서지원은 나약한 신세대의 전형적인 이미지였다. 서지원의 외모에 대한 반응은 세대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가 세상을 뜨자 그 밥맛 없게 생긴 애라고 반응하는 이들이 다수 있었을 정도.

그러던 것이 몇년 후 故 유니, 정다빈의 안타까운 죽음을 계기로 연예계의 고달픔과 우울증의 무서움이 집중 조명돼면서 시각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론이 개과천선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이 또한 정치적인 목적과 아예 무관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청년 실업 해결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정치인들이 늘어남과 동시에 젊은이들의 자살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는 젊은 세대의 고통을 강조하는 것이 상대 정당을 까기에 유리하고, 청년 유권자들의 표를 긁어모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시체 팔이에 이용당하는 젊은 영혼들만 가여울 뿐이다.

7.2. 그의 사후

서지원이 그렇게 영원히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열렬한 팬이었던 인천의 한 여중생은 그가 보고 싶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한 돈을 위해 무리하게 연예인들을 혹사시키는 연예계와 기획사들의 횡포에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내 눈물 모아'가 KBS2 가요톱텐에서 1위를 하던 날에는 그의 어머니가 먼저 떠나 간 아들을 대신해서 무대에 올라 상을 받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우리 지원이도 지금 보면서 정말 좋아할 거에요." 라는 수상 소감을 남겼고, 같이 1위 후보에 올랐던 그룹 DJ DOC는 투표 결과를 확인하기 직전에 "우리의 소중한 동생이자 동료 가수였던 지원이가 꼭 1위를 했으면 좋겠다."는 훈훈한 한 마디를 남기기도 했다.[19] 내 눈물 모아는 당시 MBC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도 1위에 올랐었는데, 1위 발표를 확인하기 위해 무대위로 올라온 많은 동료 가수들이 서지원의 1위를 진심으로 염원하는 장면이 나와 가슴 뭉클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추모 콘서트에는 3,000여 명의 관객이 몰려들었는데, 당시 서지원과 친하게 지냈던 베이시스정재형 역시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던 중 끝내 치솟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무대 위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서지원의 자살 직전 2집 녹음을 할 때 많이 혼냈던 게 너무나도 미안했다고.[20]

하지만 이런 훈훈한 추모 분위기를 망쳐놓은 주범은 다름아닌 서지원이 속해있던 기획사의 추태였다고 한다. 서지원의 동생의 학자금을 비롯한 그의 추모 행사에 쓰기로 한 콘서트 수익금과 그 많은 앨범 판매 수익금은 당초 의도대로 전혀 쓰이지 않았기 때문. 이에 대한 이야기는 트리비아 항목을 참조.

아까운 청춘에 자신에게 얹힌 부당한 현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떠나간 청년이었다.

7.3. 죽음에 대한 루머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사실 서지원이 사망 판정을 받았을 때 아직 사망한 게 아니었으며 나중에 시체를 안치한 병원의 영안실에서 깨어났다는 이야기였다. 이 때 그가 시신안치함 안에서 나오기 위해 필사적으로 소리 지르고 발버둥쳤음에도 아무도 열어주지 않아 끝내 그 안에서 생을 마감했고, 나중에 누가 열어보니 문 안쪽에 손톱으로 긁은 자국과 얼굴에 눈물 자국이 있었다 카더라는 당연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일단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기획사 사람들과 병원 사람들이 며칠 동안 밤낮으로 거의 십분 간격으로 영안실을 들락거리며 시신 확인을 했기 때문에 그가 정말로 일어났다면 곧 누군가 그걸 알았을 것이기 때문. 게다가 이런 루머로 인해 그의 시신은 한 차례 부검까지 받아야 했다. 행여라도 그런 소릴 들어도 그냥 비웃고 넘기자. 그야말로 이미 죽은 사람 두 번 죽이는 악성 루머다.

8. 음악적인 평가

그의 노래 스타일의 강점은 남자로서는 보기 드물 정도의 맑고 고운 미성과 노래 전체의 분위기를 목소리로 표현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는 것. 실제로 아무 생각없이 그의 노래를 들었다가 그 분위기에 동화되어 우울해지거나, 팬도 아닌데 눈물이 흐르더라는 등의 경험담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아주 가끔 노래 중간에 가성을 쓴 것이 지적되기도 하는데, 노래방에서 노래해본 남자들이라면 가성을 잘 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것이다. 보통 가성을 낼 때 성대를 쥐어 짜서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고문이자 테러에 가깝다. JTBC 투유 프로젝트 슈가맨에서 정재형은 '내 눈물 모아'라는 곡을 녹음할 당시에 서지원이 가성을 내지 못하여 자신이 가성 부분을 대신 불렀다고 밝혔다.

이 가성이 고와지는 것은 타고난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가성을 위한 발성법을 따로 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한데, 실제로 서지원의 곡을 들어보면 가성으로 넘어가는 부분에서도 음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편이다.

그와 함께 작업을 했던 작곡가 유영석은 "가수가 노래를 할 때 기교에만 신경을 쓰면 노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망치는데, 서지원 군은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를 한 호흡으로 마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라는 평을 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가수로서도 기본 발성력이 탁월했다는 것. 그냥 단순한 아이돌 가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노래 부르는 것말고도 원래 글쓰는 걸 좋아해서 자기 노래의 가사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이별만은 아름답도록', '잊을 수 있겠니' 등의 가사도 그의 작품. 그가 작곡한 노래로는 '사랑의 기초'가 있다.

9. 트리비아

  • 그를 대표하는 노래이자 2집 타이틀이었던 '내 눈물 모아'는 정재형이 가요계에서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작사,작곡을 한 곡이다. 자기와 절친한 사이였던 서지원의 부탁으로 그 노래를 만들었으나, 서지원은 정작 그 노래를 무대 위에서 불러 보기도 전에 안타깝게 떠나 버린 것. 당시 베이시스에서 활동 중이었던 정재형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많이 입었다고 한다. 2010년 11월, '놀러와'에 출연한 정재형은 서지원이 죽은 지 무려 15년 만에 방송에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 참고 참았던 눈물을 흘려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21] 정재형의 솔로 1집인 '기대'에는 정재형이 부른 '내 눈물 모아'가 실려 있다. 정재형은 2015년 12월 8일 방송된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에 출연해 '내 눈물 모아'의 후렴구에 나오는 '내게로~'의 가성은 서지원이 가성을 잘 못불러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 것이라고 밝혔다.
  • 2013년 10월 12일 방송된 불후의 명곡 '추모연가7'[22]편에서는 다비치강민경이 '내 눈물 모아'를 불렀을 때 정재형이 피아노 반주를 했다. 무대에 오르기 전 인터뷰에서 정재형은 “열아홉이면 꽃 같은 나이다. 그런데 그 나이가 멈춰 버렸다. 어린 나이에 데뷔를 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많이 외로웠나, 하는 생각이 든다”라는 말을 하면서 눈물을 보였다.
  • 윤일상도 그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2집의 곡 상당수를 작곡하였다. <히스토리 후> 인터뷰에서 그가 세상을 떠나기 4시간 전에도 웃으며 즐겁게 얘기를 나눴는데, 그가 자살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면서 슬퍼했다.
  • 박선주는 2006년에 디시인사이드의 취재진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가수가 누구였느냐는 질문에 서지원이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그와 듀엣곡으로 무대에 오른 적도 있고, 가장 친했기에 주위에서 친남매냐고 할 정도로 매일 만났다고 한다. 성격이 참 밝았는데, 가끔씩 불안해보였다고.
  • 그의 장례식에는 당시 같은 소속사에서 데뷔 준비중이었던 아이돌 그룹 스크림의 멤버들도 오열하며 인터뷰를 했다. 사실상 이 그룹의 마지막 TV출연이었으며 그 해 스크림은 천사의 질투라는 곡으로 데뷔했지만 별로 인기를 얻지 못하고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 그 때 장례식에서 울고 있던 어린 멤버 송호범은 오랜 세월을 보내고 나서 오창훈 [23] 과 함께 원투로 다시 컴백하게 된다. 훗날 송호범은 인터뷰에서 같은 소속사 친한 형이자 선배였던 서지원과의 추억을 더듬으며 안타까워 하기도..
  • 90년대 중후반 유명 댄스그룹 구피(Goofy)의 그룹명도 서지원이 처음 지어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 2AM의 멤버 조권이 서지원과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있다. 조권 역시 티비에서 '내 눈물 모아'를 열창한 적이 있는데, 목소리가 남자치고는 미성이라는 점 또한 둘의 공통점인지라 정말로 서지원과 비슷해보이기도.
  • 2011년 10월 중순 MBC 프로그램인 '히스토리 후'에서는 추모 15주년 특집으로 그의 짧은 삶과 아직도 그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서지원의 아버지와 직접 전화 연결을 해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인터뷰 마지막 부분에서 하늘에 있는 아들에게 보내는 음성편지에는 자식 잃은 부모의 심정이 절절하게 드러나있다.
  • 활동 당시 한 토크쇼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전 죽을 때까지 노래를 할 거에요."라고 말한 것이 그의 자살로써 이뤄지고 말았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
  • 믿거나 말거나,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실제로 아이큐가 183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미국의 학창시절 때 잰 결과라고 한다. 하지만 본인도 그렇게 신뢰하진 않은 듯하다(…)

-당시 인터뷰 자료

아이큐가 183이라고 하는데 사실인지...

지원-그건 미국에서 고등학교 때 심리학시간에 잰 결과예요. 물론 찍기도 많이 했지만.. 한국이랑 기준이 같은지는 잘 모르겠구요.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그냥 결과는 그렇게 나왔어요.

  • 2011년 김준희는 한 토크쇼에서 자기가 가장 미안함을 느끼는 연예인으로 서지원과 박용하를 언급하며 눈물을 흘렸다. 서지원은 그녀가 연예인으로 데뷔하고나서 가장 처음으로 친해진 남자 연예인 친구였고, 그가 세상을 떠나기 4시간 전까지도 윤일상과 다같이 술을 마셨었다고 한다. 그가 속으로 삭히고 있었을 아픔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게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고.
  • 2011년 11월 27일에 방송된 나는 가수다 10라운드 1차경연에서 김경호가 서지원의 "내 눈물 모아"를 불렀다. 김경호와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세상을 떠나기 2주 전에 같이 고정 게스트로 참여했었다고 하며 김경호는 자기 자신보다는 서지원과 이 노래가 더 주목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불렀다고 밝혔는데 잠시 인터넷 검색순위 10위안에 서지원이 오르기도 했었다.
  • 야구선수 이승엽이 일본 진출 전 대한민국에서 활동했을때 '내 눈물 모아'를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말한적이 있다.
  • 1집 활동 당시에 서지원이 소녀 팬들 중에서도 특히 가깝게 지냈던 여학생들 몇명을 데리고 밥을 사준 적이 있었는데, 다같이 밥을 먹던 중 두부조림의 두부를 집었더니 그 아래에 바퀴벌레 죽은 게(...) 깔려있었다고 한다. 같이 있던 팬들은 기겁을 하면서 난리를 치는데도 오히려 서지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아, 이거 먹는다고 안 죽어.'라면서 태연하게 그 두부를 계속 먹는 바람에 팬들은 경악. 이는 일찍부터 어린 동생을 데리고 힘든 생활을 해왔던 탓인지 뭐든지 아껴쓰는 게 몸에 배어있었던 듯하다.
  • 본명은 박병철. 사실 2에서 이름을 따 왔다. 그래서 이미라 작가의 은비가 내리는 나라가 연재하고 있던 저학년 타겟 순정지 나나에서 이미라와 서지원의 대담 형식 인터뷰가 기획되기도 했다.
  • 한편 그 당시 서지원의 팬클럽인 푸르매에서 활동했던 팬들은 서지원의 소속사인 '옴니뮤직'의 사장에 대해 여러 가지 서운한 감정이 많은데, 이유를 들어보면 정말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관련글
  • 한국연예제작자협회에는 옴니뮤직의 대표자가 나타난다. http://kepakepa.ween.co.kr/inc/member_list.php?&sfl=mb_3&stx=7&page=3
  • 1995년에 뿅뿅요정 하니 주제곡을 불렀다.
  • 한국 대중가요에 정통한 한 일본인은 서지원을 오카다 유키코의 예를 들며 굉장히 안타까운 가수라고 평가하기도....실제로 두 가수는 2년 남짓 짧은 시간을 활동했지만 큰 인기를 얻었고 꽃다운 스무살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둘 다 본명이 아닌 예명이다. 뭔가 조금은 묘하게 닮은 점도 보인다.
  • 2015년 9월 28일에 방송된 SBS 추석특별 프로그램 심폐소생송에서 그와 생전 절친했던 작곡가 박선주가 서지원 2집 앨범의 수록곡이자 그와의 듀엣곡인 '76-70=♡'의 심폐소생을 의뢰하는 작곡가로 출연한다.[24] 또 그와 생전에 같은 방송에도 나오며 절친했고, 영결식에서 영정사진을 들고 있었던 친구 강태석도 오랜만에 출연. 생전에 서지원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방송 직후 서지원은 인터넷 검색순위 1위에도 오르며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 2016년 1월 1일은 그의 사망 20주기이다.

이 정도면 사실상 기획사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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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실제로 나중에 대한민국에서 활동할 때도 무대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라이브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2. [2] 이 때 별명이 '엉덩이가 예쁜 남자'였다고(…).
  3. [3] 물론 저 당시에도 10대 나이에 연예활동을 한 가수들도 몇몇 있긴 했다. 하지만, 현재처럼 TV 음악프로그램에 10대들이 도배하는 상황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당시 최고 인기스타였던 서태지와 아이들서태지양현석은 20대 중반, 이주노는 서른이 코 앞이였다(...)
  4. [4] 작곡가 유영석에 의하면, 몰려드는 팬들 때문에 낮에는 아예 개인적인 외출은 거의 못 했다고 한다.
  5. [5]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는 그의 가족들이 대리수상을 했다.
  6. [6] 서지원이 생전에 발표하지 못한 미발표곡, 라이브 무대음과 후배 가수들이 그를 추모하여 부른 노래 등을 적당히 섞어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의 음반을 3번이나 낸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돈에 환장한(…) 짓이었고 그 때문에 팬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외에도 서지원 유족과 팬들은 이 기획사 사장의 서지원 사후 행보 때문에 이래저래 서운한 게 많은 상태.
  7. [7] 위의 뮤직비디오에도 등장했다. 서지원과 함께 SBS <점프챔프>라는 예능 프로의 MC를 맡기도 했으며 이후 군 전역 후 2001년 하늘의 웃기네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 현재 근황으로는 오래전에 연예계를 떠나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8. [8] 서지원의 모친이 훗날 직접 밝힌 내용.
  9. [9] 그 땐 인터넷이 없었고 휴대전화도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팬들에게 스타의 사서함은 그들의 스케줄이나 공지사항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10. [10] 링크된 페이지에서 재생버튼을 누르면 들을 수 있다. 참고로 이것은 그의 마지막 음성을 추모 앨범의 인트로 부분에 삽입한 것.
  11. [11] 본명은 박병훈 군이며, 당시 서지원과는 7살 차이의 어린 동생이었다고 한다.
  12. [12] 참고로 이 때도 모친은 미국에 살고 있었고, 보약이라고 해봤자 보통 미국과 대한민국 왕복 비행기표 값보다 더 비쌀 수가 없는데 기획사라는 곳에서 그 돈 아까워서 외국에 있는 사람 왔다갔다 하게 만들었냐는 비난을 팬들로부터 듣기도 했다.
  13. [13] 그의 사후에도 이 수익금은 전혀 유족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14. [14] 이런 건 당연히 기획사에서 마련해주는 게 기본이다.
  15. [15] 1집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2집 역시 그렇게 성공할 수 있을까, 만약 못하면 또 다시 추락해야 한다는 등의 부담감을 갖고 있었던 듯.
  16. [16] 정확히는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자신의 숙소에서.
  17. [17] 이때 하도 스케줄이 빡빡해서, 나이트에서 공연하던 중간에 픽 쓰러져서 실려간 적도 있었고 췌장염에 걸려 병원에 한동안 입원하기도 했다.
  18. [18] 노래 제목은 물론 반어법이다.
  19. [19] 가요톱텐이 아닌 다른 방송인 듯 하다. 불후의 명곡에 당시 수상 장면이 자료 화면으로 나왔는데 그 당시 1위 후보에 같이 올랐던 가수는 패닉솔리드였다.
  20. [20] 정재형은 서지원 2집 작업 전이었던 1995년 여름 SBS <점프챔프>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났다. 그리고 이 때의 친분으로 타이틀곡을 포함한 2집 앨범의 여러 수록곡을 작곡했다. 특히 타이틀곡 내 눈물 모아는 정재형이 작곡가로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준 곡이라고 한다.
  21. [21] 서지원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이들도 이 노래만 들으면 갑자기 슬퍼진다는 얘기를 하는 등 여러 모로 듣는 이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명곡이다. 혹시라도 아직 안 들어봤다면 꼭 들어보자. 그 외에도 'I miss you', '또다른 시작', '그때가 좋았어'같은 곡들도 명곡으로 취급된다.
  22. [22] 김재기, 남인수, 김성재, 김성호, 채동하, 차중락을 추모하는 특집이다.
  23. [23] 원투 그룹 전에 이미 1995년에 체크라는 그룹, 그 다음 해에 뮤의 김준희와 마운틴이라는 그룹을 함께 했다. 원투 활동 이후 현재는 구피의 박성호와 함께 작곡가 활동을 하는 중.
  24. [24] 실제 방송에서 심폐소생사로 나와 듀엣으로 노래를 부른 두 명은 그룹 레드벨벳웬디와 메이트로 활동했던 정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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