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

1. 중국 사마씨의 왕조 서진(西晉)
1.1. 개요
1.2. 역사
1.2.1. 진나라의 시초, 위나라의 권신
1.2.2. 통일 제국의 개창
1.2.3. 퇴폐풍조와 현실도피의 만연
1.2.4. 현실에 구현된 막장 드라마
1.2.5. 영가의 난과 화북 상실
1.3. 평가
1.4. 매체화
1.5. 역대 황제
2. 오호십육국의 왕조 서진(西秦)
3. 일지매의 서진

1. 중국 사마씨의 왕조 서진(西晉)

중국의 역사 中國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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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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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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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개요

265년 ~ 316년, 4대 51년. 국호는 진(晉)이지만 대중적으로는 '서진'으로 불리며, 간혹 북진(北晉), 사마진(司馬晉)이라고도 한다. 수도는 낙양(265년) → (304년) → 낙양(304년) → 장안(304년) → 낙양(305년) → 장안(311년) → 건업 (317년)

사마의의 후손들이 삼국을 통일한 중국의 고대 국가. 그러나 막장 드라마 뺨치는 팔왕의 난을 겪고 30년 만에 망해버렸다. 중국 역대 통일 왕조 중 진(통일왕조), 수나라에 이어 3번째로 단명했다. 단 진이나 수와 달리 지방정권으로는 백여 년 넘게 더 갔다.

서진 이후 화북에는 오호십육국시대라는 헬게이트열리고, 진나라는 강남으로 수도를 옮겨 간신히 명맥을 이어간다. 그리고 통일을 했다지만 위와 같은 난리통에 끝내 하나마나였고 이는 수나라가 통일하고서야 끝나나 싶더니, 수양제 덕에 다시 혼란기가 왔다가 시대에 접어들고서야 진정된다.

1.2. 역사

진나라의 전체 존속 기간은 265년 ~ 420년이다. 일단 왕조 자체의 존속 기간은 155년으로 중국사 왕조치고는 나름대로 상당 기간동안 명맥은 유지했다. 이 가운데 수도가 화북에 있었던 316년까지의 기간을 서진, 수도가 강남에 있었던 317년부터의 기간을 동진(東晉)이라고 나누어 부른다(공백 기간 1년).

연표 보면 알겠지만 통일기간 30여 년에 평화롭던 시절은 고작 10여 년밖에 안 된다.

249년

고평릉 사변

263년

사마소가 진공으로 책봉

263년

촉한 정벌

264년

사마소가 진왕으로 책봉

265년

사마염이 황제로 즉위

279년

독발수기능 격파

280년

손오 정벌, 천하 통일

291년

가남풍의 쿠데타

300-307년

팔왕의 난

307-311년

영가의 난

316년

장안의 임시 정부 함락

317년

건강에서 사마예 즉위 → 동진

1.2.1. 진나라의 시초, 위나라의 권신

처음 조조의 후계자 경쟁에서 조비를 지지함으로써 친위 세력으로 입지를 다진 사마의는 이후의 제갈량의 4차, 5차 북벌을 막아내면서 군부의 중심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사마의는 이러한 군부 내의 입지를 바탕으로 해서, 조비와 그 아들인 조예가 죽은 뒤 나이 어린 조방을 끼고 실권자로 군림하던 조상쿠데타로 축출하고 자신이 위나라의 실권자로 군림했다. 과거 조조가 헌제를 앞에 두고 권력을 휘두르던 상황이 비슷하게 재현된 것이다. 이때가 249년, 사마의의 나이 71세였다.

그러다가 2년 만에 고령으로 사마의가 죽자, 이번에는 그 뒤를 이어받은 장남 사마사차남 사마소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마사와 사마소는 이미 실권이 사라진 위나라 황제 조방과 조모를 각기 폐위시키고, 또한 이에 반발하여 오나라 전선에서 잇달아 일어난 관구검, 문흠, 제갈탄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조정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굳혀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진(晉)의 공작까지 오른 사마소는(이전에 형 사마사는 사망) 이윽고 촉한 정벌에 착수하여 263년에 촉한을 멸망시켰다. 이 공으로 이듬해 사마소는 다시 왕으로 진봉받아 자그마치 20개 군을 거느렸으니, 아직 제국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진나라는 이렇게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정작 사마소는 중풍으로 이듬해에 죽고, 이러한 건국의 기반은 고스란히 아들 사마염에게로 이어졌다. 이렇게 사마염 이전에 나라의 기틀이 다 잡혔고 사마염은 그걸 받아먹은 것이 대부분이라, 사마염은 사마의사마사 그리고 사마소고조, 세종, 태조로 추존하고 자신은 실제 초대 황제임에도 세조 묘호를 받았다. 대체로 태조 묘호는 조조 정도를 제외하면 실제 초대 황제가 받는 경우가 많은데 특이한 사례다.

그러나 진나라는 한 명의 황제를 내치고, 한 명의 황제를 시해하는[1] 등 건국 과정이 탈법적, 부도덕적이었던지라 사마씨의 정통성은 취약했다. 여기서 조조와 사마의 이하 그 자손들의 군주로서의 책임감을 비교할 수 있다. 조조나 사마의는 최소한 자기가 시키거나 자기 책임 아래 난 일은 스스로 책임을 졌다.

어쨌든 뒷날 동진명제의 건국 과정을 듣고 자신의 일족과 나라를 부끄러워 했고,[2] 후조의 석륵은 "나는 조맹덕이나 사마중달과 같은 도적질은 안 하겠다."라고도 했다.

이런 문제로 서진 정권은 구품중정제로 자리 잡은 귀족들의 지지에 기댔고, 이는 서진이 고작 건국 50여 년 만에 몰락하는 한 단초였다.

1.2.2. 통일 제국의 개창

사마소의 뒤를 이어 진왕이 된 사마염은 진왕이 되자마자 곧장 찬탈이나 다름없는 선양을 통해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그 방법이 또한 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흥기한 과정과 너무나 비슷해서, 과연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 조조도 근본적으로는 한실의 권위를 이용해서 세력을 구축한 뒤, 후한의 근왕 세력을 주륙하고 위왕에 올라 찬탈의 모든 준비를 끝내놓아 조비가 안정적으로 선양받게한 인물이라 도찐개찐.

전신이었던 위나라는 황족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 철저히 배제시켰다가, 근왕 세력을 숙청하고 중앙 군권이 사마씨에 넘어가면서 한순간에 권력을 잃었는데, 사마염은 그런 위나라의 쇠망 과정을 막으러 황족들의 권력을 상대적으로 강화시켰다. 황족들을 각 지방의 왕으로 분봉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군권까지 쥐어주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마염의 숙부 사마주(司馬伷)와 사마량(司馬亮)으로, 이 두 사람은 각기 동관왕(東莞王)과 부풍왕(扶風王)으로 책봉되어 오나라와 선비족을 상대로 전선에 나갔다.

여기에서도 보이듯, 당시 진나라의 주요 적국은 강남의 오나라농서의 선비족이었다. 이에 농서의 선비족을 관리하기 위해 따로 진주(秦州)를 설치하고 현지 출신인 호열을 자사로 앉혔지만, 터질 반란은 터지기 마련인지라 끝내 270년에 선비족의 독발수기능이 들고 일어나 호열견홍을 죽이고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선비족은 서량을 마음껏 유린했고, 사태를 수습하라고 보내려던 가충적절하게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는 꼼수를 부려서 부임도 안 했다.

한편 당시 오나라에는 손호가 황제였는데, 이 인간이 또 폭군이라 무리하게 무창으로 천도했다가 재정만 악화시키고 돌아오거나, 신하를 그 자리에서 죽여서 호랑이 밥으로 뒷산에 던져주고, 또 궁녀를 5천이나 뽑아내는 등 여러 막장행각을 일삼았다. 안으로만 이러는 게 아니라 밖으로도 이러니 문제였다. 사마염이 즉위하자마자 이를 깔보고 평화 조약을 폐기하며, 예언만 믿고 무리하게 북벌을 추진하다가 그만 폭설에 갇혀서 얼어죽을 뻔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부풍왕 사마준이 선비족의 우두머리인 독발수기능을 밀어내는데 성공하고 진나라에는 양호, 오나라에는 육항이라는 두 명장이 있어서 서로 대치하며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라이벌 사이에 싹튼 기묘한 우정은 덤 그러다가 274년에 육항이 죽자 양호는 장화, 왕준, 두예와 함께 오나라 정벌을 극력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이에 맞서. 가충, 풍담, 순욱 일파는 선비족이 먼저라면서 씹었다. 이에 양호는 결국 오나라 정벌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다.

279년에 때마침 마륭이 독발수기능을 참살하자 진나라는 280년에 가충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사마주, 왕혼, 두예, 왕준 등으로 대대적인 오나라 침공을 개시했다. 한 갈래는 서주에서 건업을 직격하고, 한 갈래는 형주로 밀고 들어가고, 다른 한 갈래는 익주에서 장강을 따라 내려간 결과, 마침내 진나라는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 통일을 완수했다.

1.2.3. 퇴폐풍조와 현실도피의 만연

  • 280년 ~ 290년: 통치 시작.

이렇게 해서 사마염의 진나라는 천하 통일을 달성하고 삼국시대의 최종 승자에 올랐다.

대개 혼란기를 거쳐 새로 만들어진 제국들은, 그때까지의 폐단이 혼란기를 거치면서 무너져내렸기 때문에 새로운 문화를 빚어내는게 보통이다. 서진은 위나라를 찬탈하면서 건국했고, 위나라의 기반을 그대로 이어받았다.[3] 거기까지는 좋은데, 사마씨는 찬탈로 정권을 잡았고, 조씨 정권보다도 명분이나 정통성 측면에서 더 떨어졌기 때문에 유교 교육을 약화시키고[4], 현실 도피성이 강한 도교사상과 향락풍조를 조장했다. 이러다보니 사회 전체가 현실도피 및 퇴폐로 흘렀다. 이 당시 죽림칠현 등이 나온 것은 단순히 전란이나 권력투쟁에 대한 선비들의 염증이 퍼졌기 때문만은 아니고, 사마씨 황실이 이런 풍조를 조장했기 떄문이었다. 예를 들어 졸부 석숭왕개이 온갖 사치로 돈지랄을 하며 낙양에서 "누가 더 돈을 많이 쓰나" 경쟁이는 돈지랄을 할 때, 황제였던 사마염은 이를 말리기는 커녕 앞다투어 구경을 하곤 했다.

사마염은 처음에는 간관(諫官)을 설치하고 비판을 관대하게 받아들이며, 태의사마 정거가 바친 꿩의 머리털만 모아서 만든 옷인 치두구(雉頭裘)를 그 자리에서 불태워버리거나, 오나라 전선을 지키던 석포가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이 돌자 체포령을 내렸다가 석포가 알아서 자진 출두해오자 오히려 최고위관인 사도로 임명하는 등 나름대로 개념인이었다.

그러나 천하를 발 밑에 둔 뒤에는 바로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통치를 했다. 오나라의 손호가 모아들인 5천 궁녀를 그대로 흡수해서 1만 궁녀를 현실에 실현하는 현실판 하렘 물짓을 하는가 하면,[5] 이 많은 궁녀 가운데 오늘밤은 누굴 골라잡을 지 몰라서 양이 끄는 수레에 타고 양 가는 대로 로또를 돌린 이야기도 유명하다. 게다가 이건 삼천궁녀처럼 과장한 야사가 아니라, 엄연히 정사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때문에 궁녀들은 양을 유인하러 양들이 좋아하는 댓잎과 소금물을 문간에 깔아놓았다고. 또 관리 선발에서 "사치가 심한 건 좋은 것이지만, 술병은 평생 못 고친다."는 개드립도 쳤다.

황제부터가 이 모양이니 나라 꼴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재능있고 패기넘치는 황제가 열심히 노력해도 통치가 잘 안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황제부터가 개판이면 오죽하겠는가. 당장 문벌귀족들부터가 사치, 축재, 매관매직, 부정부패 등 온갖 비리를 일삼으며 누가 더 나라 잘 말아먹는지를 겨루었다. 승상 하증은 하루에 1만 전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진수성찬을 차려도 먹을 게 없다며 징징거렸고[6][7], 사마염의 사위 왕제는 사람 젖으로 키운 돼지의 고기를 사마염에게 대접하는가 하면 낙양 한복판에 말 기르는 사육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시대 사치의 끝판왕은 역시 왕개석숭의 돈지랄 레이스. 왕개는 왕원희의 동생으로 사마염의 외삼촌이고, 석숭은 위에서 이야기한 석포의 막내 아들인데, 왕개가 엿기름으로 솥을 닦으면 석숭은 밀랍을 땔감으로 쓰고, 왕개가 명주로 40리에 장막을 치면 석숭은 비단으로 50리에 장막을 치고, 석숭이 집을 산초로 칠하면 왕개는 집을 주사로 칠했다. 왕개가 조금 밀린다 싶자 사마염은 외삼촌을 위해 2자(60cm)가 넘는 귀한 산호수를 하사했고 이걸 석숭 집에 들고 가서 자랑하자 석숭이 황제의 하사품을 쇠몽둥이로 개박살을 내버리고, 이에 왕개가 따지자 사과한답시고 창고에서 3~4자(90~120cm) 정도되는 산호수를 7개 정도 꺼내와서 하나 가져가라고 하였다.

이처럼 나라 꼴이 막장이었던 원인으로는, 우선 황제가 귀족 사회의 눈치를 보느라고 제왕의 위상이 떨어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사마씨 일족이 위나라 말에 절대적 지위를 구축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귀족 사회의 일원으로서였다. 한나라 시조 유방과 위나라 시조 조조가 극적인 자수성가를 이루어낸 데 반해,[8] 사마씨는 전통적 귀족 사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좋든 싫든 귀족 사회와의 관계를 항상 염두에 둬야 했다. 그것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귀족 사회에 속한 권력자라면 비교적 평화로운 방식으로 권력을 얻을 수도 있었겠지만, 고평릉 사변이나 조모 시해 사건 등을 거치며 이미 숱하게 피를 봤다.

제왕의 위상이 귀족층에 비해 나을 것이 없는 상황을 타개하려면 위나라처럼 강력한 법치를 통해 귀족들을 제어하는 것이 방법이다. 그러나 사마염이 법치의 각박함을 지적하며 아무것도 안하는 무위의 도인 도가적 통치로 가려고 했으니 진나라는 귀족을 제어할 수단을 버린 셈이다. 하다 못해 사마염 본인이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군왕으로서의 모범을 보였다면 모를까, 통일 직후부터 바로 썩어들어갔으니 더 이상 위엄이고 자시고 내세울 게 없었다. 결국 사마씨 황족은 귀족의 지지에 의존하게 되고, 자연스레 황제가 귀족들의 눈치를 봤다. 위에 언급된 대로 왕제가 '사람 젖을 먹여서 키운 돼지고기'를 대접하자 사마염은 몹시 불쾌해했지만 내색도 못하고 자리를 피해버렸다. 석숭이 쇠몽둥이로 사마염의 하사품인 산호수를 깨부셔도 별 말 하지못했다.

단, 서진 시대에 구품관인법귀족들의 고위 관직 세습 제도로 변질되었다는 것은 오해이다. 귀족들의 고위 관직 세습은 분명 일어나고 있었으나, 이것은 대부분의 전근대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현상이다. 구품 관인법이 능력과 무관하게 완전히 가문 위주로 바뀌는 건 남조에서 일어난 현상이고, 그마저도 서진 시대에 있었던 제도에 여러 차례 변경점을 가했기 때문에 판이하게 달라진 제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서진 시대에도 구품관인법의 위험성이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었지만, 아직 세습제도로 변질되지는 않았다.

어쨌든 서진이 표방한 유교 사상의 행보는 한밤중에 길 잃은 어린아이와 같았다. 이것은 당시 유학자들이 시대에 발맞추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유학자들은 정계로 진출해 권력을 잡은 부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부패한 정부에 발을 맞췄고 후자는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후한 시대까지는 광무제 덕분에 그럭저럭 유교 사상이 맥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광무제는 태학의 유학생이었고, 왕망의 한실 찬탈 때 관의 어용으로 이용당하는 유교 사상에 심각한 문제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동한 시기에는 광무제의 개혁 이후로 뛰어난 유학생들이 다수 배출되었으며, 어리고 어수룩한 황제들이 환관 손에 놀아나기 시작하자 유학자들은 여러 방면으로 태클을 걸었다. 이후 환관들의 유학 탄압이 시작되자 관직을 내려놓고 중앙정부를 떠나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면서 학문을 계속한다. 이들을 은자隱子라고 불렀으며, 후한에는 은자들이 유학의 맥을 잇고 있었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짐에 따라 이상적인 가르침보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집중하는 현실 참여형 유학자들도 대거 등장한다.

이런 현실 참여형 학자들의 염원을 실현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동탁과 조조였다. 동탁은 환관과 기득권층을 거의 박살내놓았고,[9] 그렇게 박살나 텅 비어버린 관료층을 조조가 채워준 것이다. 재야 여론을 주도하던 사인 식자층은 정치 감각과 뛰어난 통치 능력을 보여준 조조에게 크게 이끌릴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조조 역시도 한말의 문제점에 대해 진저리를 치고 있었으니 유학자들과 뜻이 맞았고, 그들을 받아들여 탄탄한 위나라 정부를 꾸리게 된다. 사마의 역시 이런 사인층 출신이었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잘못 생각했던 것은, 조조에게 있어 지식인들이란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린 것에서 알 수 있고, 공융이나 예형 같은 당대의 유학자들을 탄압해 죽이기도 했다.[10] 그런 조조가 세운 나라가 바로 위나라였고, 서진은 위나라를 그대로 이어받은 나라였다.[11] 서진이 통일할 때까지 한 자리 해먹은 유학자라면 이미 나라가 지식인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고 적응한 경우였고, 적응하지 못하고 떨어져나간 사람들은 그대로 중앙정부와는 인연을 끊어버린다. 이들은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며 현실을 개혁한다는 은자 정신을 가진 것도 아니라서, 그저 현실에서 도피한다는 식으로 아예 깊은 산 속에 틀어박히게 된다.

그나마 삼국 시대에 마융, 정현, 노식 등의 유학자가 있었으니 그들의 학풍이 계승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서진의 유학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당시 유학의 대표 중 죽림칠현이 유명한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숲 속에 틀어박힌 채로 다소 와전된 유교 사상과 도가 사상을 짬뽕시켜 즐기는 자들이 많았다. 이들 말고는 하안, 왕필, 하후현과 같은 유학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귀족 도련님들이 내세울 법한 세련된 현학이었다. 이러한 현학들 중에서 큰 성취를 이룬 하안이나 왕필 같은 경우 유학 사상에 대해 논할 정도는 되었으나,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라는 점에 변함은 없다. 대학자들이 이 모양이니, 그만한 경지에 이르지도 못한 얼치기들은 뭣도 모르고 허무주의신비주의로 흘러가기 일쑤였다.

결국 서진의 유교 사상은 이미 사상적 기능을 잃은 상태였다. 부패한 정권에 대한 저항 의식, 유학 이외의 다른 학문과 사상에 대한 포용, 탐욕과 권력욕에 대한 경계 등을 주장하는 청담사상은 후한말부터 시작된 청의(淸議)가 구체화된 사상이었으나, 서진에 이르러서는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서진의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아부와 칭찬을 늘어놓는 공담(空談)이 판을 쳤으며, 이런 학풍은 위진남북조 시대가 종결될 때까지 지식인들에게 크나큰 해악을 끼치게 된다.

여기에다 서진에서는 환각제까지 유행하여 더더욱 사회가 개판으로 돌아갔다.

1.2.4. 현실에 구현된 막장 드라마

천하 통일 뒤 정확히 10년 만에 사마염이 죽자, 그 뒤를 이어서 사마충이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사마충은 지금으로 보면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한다. 사마염도 살아 생전 이를 걱정했지만 그래도 사마충의 아들인 사마휼이 총명하니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 장남인 사마충으로 밀고 나갔고, 그 대신 작은 아버지인 사마량, 장인 어른인 양준(楊駿), 개국 공신인 위관(衛瓘)에게 사마충의 보좌를 부탁했다.

하지만 양준은 황족으로 군권을 잡던 사마량을 경계해서 쓰러진 사마염이 애타게 찾는데도 사마량을 예주로 발령내서 쫓아내다시피 보내버렸고, 이에 남은 위관은 알아서 버로우를 타버렸다. 이로써 외척인 양준 일파가 조정의 권세를 틀어쥐고 전횡을 일삼았는데, 이때 이들이 쥔 권력을 매의 눈으로 노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황후 가남풍이었다.

우선 가남풍은 양준을 꼬드겨서 형주의 군권을 잡고 있던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와 양주의 군권을 잡고 있던 회남왕(淮南王) 사마윤(司馬允)을 불러들인 뒤, 순식간에 양준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사마위와 사마윤으로 양준과 양씨 일족들을 싹 쓸어버렸다. 그리고 남은 두 고명 대신인 사마량과 위관이 정권을 넘겨받자, 다시 사마위를 꼬드겨서 이들마저 제거한 뒤 그 죄를 물어서[12] 사마위까지 토사구팽해버렸다.

이렇게 조정의 권세를 한 손에 틀어쥔 가남풍은 그래도 장화와 같은 인재를 중용하면서 십여 년 동안이나 정사를 그럭저럭 꾸려나갔다. 오히려 평화로운 시대가 유지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는 모양.[13]

어쨌든 전란의 시대가 끝났으니 호족들의 사치와 병크에도 고생은 적었을 것이다. 삼국 시대의 인구는 세 나라를 더해도 777만 명 정도인데, 서진 대에 이르러 갑자기 인구가 1600만 명으로 불어나는 것은 난세 동안 호적에 안 잡히던 백성들이 통일 뒤 나타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참고로 고대의 호구(戶口)라는 것은 戶의 경우 '집'을 의미하며, 口는 개별적인 인구를 말한다. 사료에 따라 戶만 기록된 경우도 있고, 호구가 기록된 경우도 있다. 보통 이들 口를 신분별로 나누는 것은 시대마다 다양한 용어를 사용해서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전한 시대에는 일단 대남(大男), 소남(小男), 대녀(大女), 소녀(小女)등으로 구분한 것이 보인다.[14] 이처럼 진한 시대에 이미 이들에 대해 성별, 연령에 따른 상세한 인구 파악이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간간히 목간 자료로 출토되고 있다. 물론 완벽한 파악은 한없이 멀었지만…

즉 이 시대에 인구 폭증은 이러한 조사가 훨씬 원활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전쟁이나 혼란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문명 시작 이전의 장기 빙하기와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전근대에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 그럭저럭 호구 파악이 잘 되던 청나라 시기를 보면 19세기의 혼란기에 중국의 인구는 감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증가해서 문제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태평성대였는가 하면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당시 중국은 소빙기에 들어선 기후인지라 황하장강이 말라붙을 만큼(!) 극심한 가뭄과 한파에 시달리고 있었다.[15] 이런 마당에 왕융 같은 귀족들은 제 잇속부터 챙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있고, 실권자인 황후는 밤마다 애들과 놀아나면서 검열삭제를 벌이는 데다, 황제라는 작자는 '곡식이 없으면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라는 지적장애에 걸맞은 소리나 하고 있으니.

끝내 이러한 현실 속에서 팔왕의 난이라는 초특급 병크가 터지게 된다. 본래 사마충의 태자 사마휼은 가남풍이 아니라 후궁 사구(謝玖)의 소생이었는데, 가남풍은 의붓 아들이 황제를 하면 자신의 정권이 무너질 것을 염려한 나머지 사마휼을 모살했다. 그 방법이란 사마휼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폐하께선 이제 물러나십시오. 안 가시겠다면 제가 보내드리지요.'라는 글을 베껴쓰게 한 것. 이 일로 사마휼이 유폐되자 태의령 정거[16]를 보내 독살하려고 했는데, 사마휼이 약을 거부하자 약방망이로 때려 죽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301년, 마침 때를 노리던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은 이때다 하고 사촌인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과 함께 낙양으로 진군해서 가남풍 일파를 몰살시킨 뒤 정권을 잡았다.[17] 하지만 사실 사마륜도 부하 손수(孫秀)의 꼭두각시였을 뿐이었다니 또 모순이다.

여기서 끝났다면 또 모르겠지만, 태자는 이미 죽은 판이고 분수를 모르는 사마륜은 사마충을 태상황으로 밀어낸 뒤 기어코 자신이 황제로 올랐다가, 사마경을 필두로 한 나머지 황족들에게 몰려서 3개월 만에 죽었다. 그 뒤로는 황족들 가운데 한 놈이 나대면 나머지가 족치는 무한루프 상태로 돌입해서 서로 치고박다가, 사마충이 죽은 뒤[18]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 사마치(司馬熾)를 황제로 옹립하면서 팔왕의 난은 가까스로 끝난다.

1.2.5. 영가의 난과 화북 상실

그러나 내전을 틈타 자립한 이민족이 이미 진나라 내부에 일대 세력을 이룬 상태였다. 특히 조조가 병주에 정착시켰던 흉노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이들은 팔왕의 난 막바지에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과 결탁해서 선비족을 끌어들인 사마월과 맞서다가, 이내 사마영이 사마월에게 패사하자 흉노족을 끌어모아서 (漢)[19]을 세우고, 그의 아들 유총(劉聰)이 남하하면서 그 부하들(석륵, 왕미, 유요 등)이 화북 각지를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더욱이 팔왕의 난을 거치면서 서진의 지방 통치는 사실상 와해했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원래 후한 말부터 삼국 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지방 호족들은 군사와 행정의 여러 직책을 겸임함으로써 독자적인 군벌 세력이 있었다. 그런데 중국을 통일한 사마염은 다시 군사와 행정을 분리시키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여서 지방의 군대를 대부분 해산시켰고, 대신 왕으로 분봉한 황족들에게 군사권을 쥐어주어서 이를 보완시키려 했지만 이것들이 지들끼리 치고받다가 공중분해했으니(...).

때문에 실권자인 동해왕 사마월은 중요 거점에 친족들을 보내서 거점을 장악시키는 등 고군분투했지만, 애당초 이러한 자의적인 인사는 황권에의 도전으로 해석할 소지가 컸다. 실제로 자신을 향한 참소가 빗발치자 사마월은 그만 분사했으며, 뒤이어 실권을 잡은 왕연(王衍)이 사마월의 장례를 치른답시고 황제를 버리고 피난가다가 죄다 석륵(石勒)에게 잡혀서 싹 죽어버렸다.

이때 왕연과 동행하던 낙양의 주둔군이 다수 죽었기에, 석륵 등은 이 기회를 틈타 낙양까지 쳐서 함락시켰다. 선발대인 호연안(呼延安)이 배를 모두 불태워버리는 바람에 황제 사마치는 달아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포로로 잡혔다. 이것이 바로 영가의 난. 포로가 된 사마치는 2년 뒤에 유총에게 불려와서 노예 복장을 하고 술을 따르다가 그 모습을 본 옛 진나라의 신하들이 통곡하는 바람에 위험 인물로 간주, 살해되었다.

이에 관중에서 장안을 수복하고 태자로 추대받아 진나라 임시 정부를 이끌던 사마업(業)이 사마치의 부고를 접하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이 또한 각지에 흩어진 군벌들의 지원을 못 받아 2년 만에 장안이 포위되자 농성 끝에 항복했고, 역시 이듬해에 유총에게 불려와 술을 따르다가 그 모습을 본 옛 신하들이 통곡하는 바람에 죽는다. 이로써 화북의 진나라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완전히 사라졌다.

다만 강남에서 호족들을 규합하던 사마예가 사마업이 죽은 이듬해인 317년에 그의 부고를 듣고 황제로 즉위하여 진나라의 명맥을 이어나가는데, 이 나라를 동진이라고 부르며, 이후 백여 년 동안 이민족 왕조가 화북에서 조지고 부시고 갈아엎으며 깽판을 치는 사이 강남에서 한족 왕조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1.3. 평가

고우영 삼국지 엔딩

성공했다고 보기엔 어려운 왕조인지라 진시황제의 진(秦)나라와 비교하는 의견도 곧잘 보인다. 그래도 천하 자체를 완전히 잃은 그 진나라와는 달리 이쪽은 절반이나마 보전했다. 반쯤 말아먹은 것과 완전 말아먹은 건 다르다.

물론 군주로서는 진시황제가 사마염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게 독보적이지만, 국가 시스템의 역량은 사마염의 진나라 쪽이 낫다. 진시황의 진나라는 근육은 좋아도 내장이 병들어 있었던 것이고, 사마염의 진나라는 군살이 많아 병들고 나서도 군살이 빠졌을 뿐 죽지는 않은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결국 강해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아서 강한 것이다.[20] 적어도 체제 자체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마염의 진나라가 판정승이라고 할 수 있다.

찬탈로 얻어낸 나라로 바로 통일을 달성했다는 점에서 수나라와 공통분모가 있다는 의견도 있으나... 수 문제에게 너무 큰 실례가 아닐까? 수 문제는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도 명신으로 명성이 높았던 반면, 사마염은 조상들 덕택이 상당히 컸다. 본인에게 자질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입은 은덕이 컸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참고로 시황제도 혼자 다 통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조상 은덕이 컸다. 5대조 때부터 시작한 개혁의 혜택을 크게 봤고, 아버지 때부터 이미 진나라의 국력은 다른 나라보다 넘사벽이었다.[21]

삼국지연의로 널리 알려진 삼국시대통일최후의 승자이며, 제갈량라이벌로 유명한 사마의의 후손들이 세운 왕조인데도 취급이 별로다. 아무래도 삼국지연의 후반이다보니 독자들의 재미와 관심이 떨어진 상태에서 등장한 국가이고, 덕분에 유명도가 함께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진은 역사적으로도 분명하게 의의가 있는 국가이다.

삼국통일도 거저 먹은 게 아니라 위나라의 한계를 극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지연의의 독자들은 좋아하는 영웅들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버렸다면서 썩 달가워하지 않지만, 잘 생각해보면 오히려 영웅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진나라가 있었다고 하겠다. 진나라는 위나라의 기반을 갖춘 상태로 시작했으니 직접적으로 위나라의 덕을 본 셈이고, 또한 위나라와 함께 삼국의 형세를 만든 다른 두 나라에게서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삼국통일 후 위촉오 삼국의 온갖 나쁜 점을 갖췄다는 주장도 있으나 근거는 빈약하다. 가장 정통성이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쪽은 오히려 갑자기 황제에 즉위하여 의문을 남긴 오나라에게 향해야 할 비판이다. 진나라는 한나라에서 위나라를 통해 건너건너 선양을 받으며 정통성을 갖췄다.

사마염의 능력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데, 결과적으로 암군이겠지만 자질과 통치내용을 보면 상황이 따르지 않았다는 변호도 가능하기 때문에 명군이냐 암군이냐 하는 이분법적 구분이 애매하다. 또한 가장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22] 황제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것은 조위에게도 해당된다. 조조는 헌제의 신변에까지는 손을 대지 않았으니까 최후의 선을 넘지 않은 셈이지만, 조위가 서진보다 나은 점은 이 정도가 전부다.

따라서 서진 왕조를 무조건 실패한 왕조로 치부하는 것은 편향된 관점이라고 하겠다. 삼국지연의가 유명한 만큼 연의로 진나라를 접하는 사람들이 많고, 연의 관련 매체에서도 취급은 별로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연의 관련 매체의 관점을 하나의 의견으로 인정하는만큼, 실제 역사에서 이후에 일어난 일을 알아보는 관점도 또한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이후 역사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면 서진도 분명 남긴 것이 있다. 서진 이후에는 남조와 북조가 탄생하는데, 남조가 바로 서진의 영향을 받았다.

서진의 황제 사마염은 암군으로서 보여주는 행태로 큰 비난을 받지만, 행정에 대해서 아예 까막눈은 아니었다. 최소한 동오의 손호보다는 우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오의 손호는 무리한 군비 증강과 중앙 집권책으로 동오 지역 민중과 호족 세력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는데, 서진이 동오를 끝장낸 이후로는 민중 생활이 안정되는 동시에 경제력도 향상되었다. 비록 사마염의 막장 행각을 살펴보면 동오 지역에 대해 어떠한 선정을 펼쳤다고 보긴 힘들다. 그러나 동오 지역을 복속시키고 난 다음부터 그 지역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고, 이는 훗날 동진을 비롯한 남조 국가들이 북조 국가에게 대항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서진 정권은 본의였든 본의가 아니었든, 동진이 되기 전부터 동오 지역에 대해서는 괜찮은 행정 시스템을 구축해뒀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동진으로 정착한 다음부터는 늘 북쪽의 야만족들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는데, 이 때문에 중앙 정부에서 언제나 전전긍긍해야 했다. 우습게도 서진 시절 국가통치에 완전히 손을 놓아버린 사마염이 황권을 약화시켜둔 덕분에, 무능력한 황제가 귀족들에게 태클을 걸어 중앙 정부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일이 방지되었다(...) 남긴 거라면 이것도 남긴 셈이다.

또한 서진이 훗날의 남조 국가들에게 남긴 유산이 또 있는데, 바로 정통성이다. 유송이 북위에 대해 정통임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후한-조위-서진-동진-유송으로 내려오는 중국 왕조의 정통성 계승 덕분이었다. 사실 북위도 정통성 문제를 의식하고는 있었고, 이름을 북라고 한 것도 국가시조인 탁발부가 위나라에게 조공을 바쳐서였다. 그래도 형식상이나마 선양을 통해 계승한 동진의 정통성 앞에서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남조는 양나라 이전에도 여전히 북방 오호의 불안정한 국가들보다 안정되어 있었으며, 이는 이미 서진의 기반을 계승한 동진에게서 정통성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남조 정권의 강력한 정통성은 오호 국가 및 북위에서 가끔씩 부정했으나, 역사적으로 남조가 더 강력한 정통성을 가졌다는 부정하기 힘들다. 서구 학계에서도 전반적으로 남조를 동양판 비잔티움 제국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며, 일본의 연구자들도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결국 세력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북조였지만, 남조와는 달리 5호 16국에게는 정통성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서로 불신과 반목을 일삼으며 국가의 생사를 걸고 치열하게 싸우는 시기를 겪어야만 했다.

당대에 광무제급 혹은 조조급이라고 평가받던 유연이 있었고, 조조와 사마의를 무시하던 석륵이 있었으나, 그들조차 동진을 끝끝내 타도할 수는 없었다. 당시의 동진을 잘 살펴보면 촉한을 병합한 직후의 조위보다도 형편없었고, 천하통일의 업적에 도취되어 부패한 서진보다도 허약한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이는 정통성을 계승한 후손들이 동진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영웅의 업적과 한계가 동시에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참고로 역사적 의의를 떠나 국가 자체로서는 전형적인 막장테크를 탄 왕조다. 과장된 헛소문이었던 백제의 삼천궁녀와 프랑스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같은 에피소드가 진나라에서는 현실 정사에 기록된 채로 더 심각하게 등장한다. 게다가 국가 막장 테크에서 빠질 수 없는 내부 분열, 민족과 문화 관리, 수뇌부의 부패와 체제의 붕괴, 자연적 요인, 전쟁과 외침이 모두 복합적으로 나타난 바 있다.

1.4. 매체화

진삼국무쌍6에서 신세력으로 나왔다. 이제 사국무쌍이라 불러야 하느니 개드립이 많았지만 스토리 모드를 해보면 그냥 후기 위나라다. 진짜 진나라 소속인 인물도 7 기준으로 사마소, 왕원희, 가충, 문앙 넷 뿐이고 사마염은 엔딩에서 뒷모습만 잠깐 나온다. 삼국지 관련 2차 매체들 가운데 삼국지 9 다음으로 제갈량 사후 부분을 가장 비중있게 다룰다는 평가를 받는다.

만화로는 고우영 십팔사략에서 8권에서 오호 십육국, 남북조 시대를 다루면서 서진의 멸망을 재미있게 묘사했다. 물론 그래봐야 막장은 막장이다

1.5. 역대 황제

대수

재위기간

묘호

시호

성명

약력

능호

추존

고조(高祖)

선황제(宣皇帝)

사마의(懿)

사마염의 조부, 건국의 기초를 닦음.
179년 출생, 251년 사망. 73세.

고원릉(高原陵)

추존

세종(世宗)

경황제(景皇帝)

사마사(師)

사마염의 백부.
208년 출생, 255년 사망. 48세.

준평릉(峻平陵)

추존

태조(太祖)

문황제(文皇帝)

사마소(昭)

사실상 진나라의 초대 군주.
211년 출생, 265년 사망. 55세.

숭양릉(崇陽陵)

1대

265-290년

세조(世祖)

무황제(武皇帝)

사마염(炎)

진나라의 초대 황제이자 정상적인 권력을 누린 마지막 황제[23]
236년 출생, 290년 사망. 55세.

준양릉(峻陽陵)

2대

290-301년

 

효혜황제(孝惠皇帝)

사마충(衷)

백치 황제, 가남풍의 남편.
263년 출생, 306년 사망. 44세.

태양릉(太陽陵)

임시

301-301년

 

조왕(趙王)

사마륜(倫)

사마충의 숙조부, 3개월 천하.
301년 사망.

-

복위

301-306년

 

효혜황제(孝惠皇帝)

사마충(衷)

유폐되었다가 복위.
263년 출생, 306년 사망. 44세.

태양릉(太陽陵)

3대

306-311년

 

효회황제(孝懷皇帝)

사마치(熾)

영가의 난이 터짐.
284년 출생, 313년 사망. 30세.

-

4대

313-316년

 

효민황제(孝愍皇帝)

사마업(鄴)

장안의 임시 정부에 의해 옹립.
300년 출생, 317년 사망. 18세.

-

이하는 동진/역대 황제 문서로.

서진 황실을 더 알아보고자 한다면 서진/계보 문서로.

2. 오호십육국의 왕조 서진(西秦)

3. 일지매의 서진

일지매의 등장 인물로 도성군 사령관을 맡는다. 여자인데도 남자처럼 행동하는 까닭은, 그녀의 어머니가 딸을 낳으면 불이익을 받으니 왕에게 아들이라고 말해서였다. 아버지도 서진이 여자로 행동하면 혼내 주었다고. 풍이가 밤마다 일지매로 활동하다 숲 속에서 반한 상대이자 적수이다. 하지만, 26화에서 둘이 거지를 도와주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1. [1] 여기에 시해의 죄를 실행자인 성제 형제에게 덮어씌웠다.
  2. [2] 그러면서 한 말이 " 얘기가 사실이면 그 진나라가 일찍 망한 건 당연하고 이 진나라도 일찍 망할 것이오" 명제의 개념적인 발언 덕인지 동진은 무려 100년 넘게 이어졌으나 끔찍하게 막을 내렸다.
  3. [3] 구품관인법을 비롯하여 위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를 그대로 계승했다.
  4. [4] 忠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정책을 펼친 이유는 황실의 일족인 사마씨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현위황제를 쫓아내거나 시해하고, 반항하는 세력은 몰살시키는 행위를 통해 조씨를 몰아내고 집권한 현실과 무관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충을 강조하면, 그것에 대해 가장 많이 걸리는 쪽이 사마씨 황실이다.
  5. [5] 심지어는 이전에도 5천이었으니 이전부터 막장이었다는 얘기다.
  6. [6] 참고로 아들 하소는 하루에 먹는 데에만 2만 전을 썼다.
  7. [7] 이 하증은 후대에도 까임거리라서 소동파는 '나나 하증이나 배부르기는 매한가지' 라며 깠고 이색은 '가난한 시인에게선 시라도 할 줄 안다'라고 깠다.
  8. [8] 조조는 아버지 조숭이 환관으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조 자신은 그 권력을 이용하지 않고 자수성가했다.
  9. [9] 물론 이것은 중앙정부를 무력화시키려고 하다보니 중앙권력에 깊숙하게 관여한 환관들도 함께 쓸어버린 것뿐이다. 국가개혁의 큰 뜻 같은건 없었다. 애초에 무고한 인민을 수없이 살상하고 수도 일대를 초토화시키면서 대혼란을 초래한 것에 불과하다.
  10. [10] 특히 공융은 불효자라고 낙인찍어 죽여버린 건 말의 앞뒤가 안 맞는 사례였다. 불효자이거나 인성이 안 좋은 자라도 능력만 있으면 대접하겠다고 해놓고는 저랬으니.
  11. [11] 삼국지의 독자들은 위-진 교체 장면에서 위나라가 드디어 업보 쌓아온 댓가를 받는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진나라는 위나라와 다를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뭐 하나 다른게 없이 위나라의 기반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12. [12] 왜냐하면 두 사람은 인망이 좋아서 죽자마자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 사실 이는 가남풍의 자작극으로 일부러 사마량과 위관을 총애해 사마위의 어그로를 끈 뒤 사마위에게 몰래 사마량과 위관을 제거하라고 한것
  13. [13] 수년 동안 암군이 즉위해 있는데도 조야가 안정되었으니, 장화 등의 공이었다. 數年之間,雖闇主在上,而朝野安靜,華等之功也。─ 자치통감
  14. [14] 호북성 형주시 출토 <이년 서향 호구부>등
  15. [15] 유소민(劉昭民), 『기후의 반역』,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6. [16] 사마염에게 치두구를 바쳤다가 혼쭐난 그 인물 맞는다.
  17. [17] 태자를 제거한 이상 명분으로는 아주 충실하다. 특히 가남풍에게 다른 자식이 없었으니
  18. [18] 동해왕 사마월이 떡을 줬는데 그걸 먹고 앓다가 죽었다는 점에서 독살이 확실하나 증거는 없다.
  19. [19] 유연의 유씨는 선조 묵특이 한 고조와 화친을 맺을 때 성을 받았기 때문으로, 국호는 이에 근거했다. 유요가 즉위한 뒤에 조(趙)로 개명한다. 이것을 전조라고 부르고, 여기서 분가한 석씨의 조나라를 후조라고 부른다.
  20. [20] 역사적으로도 통일 제국 중 최약체인 송나라가 당나라보다 오래 갔으니,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는 북송과 남송을 합쳤을 때 이야기지만...
  21. [21] 진나라가 한 번 망하고 나서 한나라로 이름만 바꿔 다시 일어선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으나, 통일된 모습만 고려하는 결과론의 오류이다. 오히려 결과론을 따지면 진나라가 오백 년 넘는 사직을 완전히 잃고 타국의 일부로 흡수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사마씨의 진나라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22. [22] 사마씨는 권력 장악에 방해가 될 것 같으면 라도 거침없이 폐위시키거나 죽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세력도 과감히 제거했다.
  23. [23] 사실상 진나라는 사마염 이후로 정상적인 권력을 누린 황제가 없다. 사마충은 가남풍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으며 팔왕의 난에 휩싸여 혼란 속에 죽었다. 진 회제, 진 민제는 영가의 난으로 인해 전조의 포로 신세가 되어 비참하게 죽었다. 진 원제는 왕돈의 꼭두각시 신세였으며 진 명제 때 황제권을 회복한듯 싶었지만 요절하였고 이후 황제들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환온, 환현 같은 신하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였다. 효무제 때 잠시 황제권을 되찾는 듯 싶었지만 효무제가 어이없게 죽고난 후 진 안제와 진 공제는 유유의 꼭두각시 신세가 되었고 유유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리고 진나라는 멸망했고 이후 진나라 황족들은 유유에 의해 거의 몰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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