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왕(백제)

聖王
성왕


[1]

시호

성왕(聖王)/성명왕(聖明王)

별호

마한황제제왕(馬韓皇帝齊王)[2]

성씨

부여(扶餘)

명농(明襛)

왕태자

왕자

부여계(扶餘季)[4]

부왕

무령왕(武寧王)

생몰년도

음력

492년? ~ 554년 12월

재위 기간

음력

523년 5월 8일 ~ 554년 12월[5] (32년)

짐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금이 남긴 마지막 말.

1. 개요
2. 생애
2.1. 사비 천도
2.2. 다른 나라와의 교류와 불교
2.3. 관제 정비
2.4. 외교와 국방
2.5. 신라와의 미묘한 관계
2.7. 사후의 영향
3. 그 외
4. 삼국사기 기록
5. 일본서기 기록
6. 대중매체에서
7. 관련 문서

1. 개요

백제의 체제과 안정을 마련한 명군. 중흥을 이끌었으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왕.[6]

백제의 제26대 왕이자, 건길지. 성왕이란 왕명은 불교전륜성왕에서 따온 것이다. 금석문으로 볼 때 성왕이라는 호칭은 살아있을 때부터 불렸던 것 같다.《양서》(梁書) 백제전에는 이름을 명(明)이라 하였고,《일본서기》에는 명왕(明王) 또는 성명왕(聖明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상하게도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에 더 많은 기록이 나오는 왕이기도 하다. 특히 일본서기 흠명기는 성왕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백제의 원서인 백제본기의 기록을 충실히 반영해 놓았다. 물론 《일본서기》답게 성왕이 긴메이의 신하처럼 기록을 해 놓았지만, 왜곡 이면의 관계는 사실 그 반대였다고 추정된다. 《일본서기》에는 장수왕의 남하로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의 왕으로서 백제의 세력권인 가야를 재건하고 고구려에게 복수하려는 집념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마지막에 허무하게 죽는 장면과 아들인 위덕왕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자책하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지식이 영매(英邁)하고 결단력이 있어 나라 사람이 성왕으로 칭하였다."고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천도지리에 통달하여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고 찬양하고 있어서 그의 인물 됨됨이가 비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능력도 있었고 꿈도 높았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비운의 왕.

2. 생애

523년 음력 5월에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그해 음력 8월 패수(浿水)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장군 지충(知忠)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다. 524년 양나라(梁)와 국교를 강화하여 양무제로부터 지절 도독 백제 제군사 수동 장군 백제 왕에 책봉되었다.

525년 음력 2월에 신라와 서로 사신을 교환하였다. 526년 음력 10월 웅진성을 수리, 수성하였다.

529년 음력 10월, 고구려 안장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쪽 변경에 있는 혈성이 함락되었다. 성왕은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3만을 이끌고 싸우게 했지만 오곡원(五谷原)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자가 2천여 명이나 되었다.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그 뒤 한동안 소원해져 있던 신라와 다시 동맹을 강화해 고구려에 공동으로 대처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안원왕 말년 추군과 세군의 내전부터 해서 내부 혼란이 계속되어 성왕은 마음놓고 내정 개혁과 가야 방면 진출, 한강 유역 고토 회복 준비를 시도할 수 있었다.

2.1. 사비 천도

동성왕·무령왕이 웅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수습하면서 추진해 온 왕권 강화 정책을 계승하여 538년(성왕 16년)에 사비(泗沘)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성왕의 사비 천도는 고구려의 남침이라고 하는 외부 세력의 강요에 의하여 행해졌던 문주왕 웅진 천도와는 달리 성왕의 의도적인 계획하에 단행된 것이다. 따라서 이 사비 천도는 왕권과 국력 강화 정책의 마지막 마무리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비 천도에는 사비 지역의 토착 신진 세력이었던 사씨(沙氏, 沙宅氏) 가문의 정치적 지지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사비 천도 후 국호를 일시 '남부여(南扶餘)'라 개칭하여 부여의 후손으로서의 전통을 강조하였다.[7]

2.2. 다른 나라와의 교류와 불교

중국의 양나라와 빈번한 교류를 가지면서 모시박사(毛詩博士)·공장(工匠)·화사(畵師) 등을 초빙하고 열반등경의(涅槃等經義)를 수입하여 백제 문화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힘썼다.

성왕은 미륵 신앙을 이용해 자신을 미륵이라 칭하며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또한 성왕은 인도로부터 범어(梵語)로 된 5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온 겸익(謙益)을 우대하여 고승들을 모아 5부율을 번역시키고 아울러 담욱(曇旭)·혜인(惠仁) 등이 지은 율소(律疏) 30권에 친히 비담신율서(毗曇新律序)를 써서 백제신율을 성립시켰다. 성왕의 이러한 계율의 장려는 불교 교단의 정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송하여 석가 불금 동상 1구, 번개(幡蓋)[8]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보내어 줌으로써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성왕은 의박사·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선진 문물의 전수자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2.3. 관제 정비

이와 더불어 사비 천도를 전후하여 웅진 시대 이래 행해졌던 내외관제를 정비하여 지배 체제의 정비와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중앙 관제로는 1품 좌평(佐平)에서 16품 극우(克虞)에 이르는 16관등제와 전내부(前內部) 등 내관 12부와 사군부(司軍部) 등 외관 10부로 된 22부제가 정비되었다.

또 왕도의 통치 조직으로서는 수도를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의 5부로 구획하고 5부 밑에 5항(五巷)을 둔 5부 5항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지방 통치 조직으로는 종래의 담로제(檐魯制)를 개편하여 전국을 동방·서방·남방·북방·중방의 5방(五方)으로 나누고 그 밑에 7개 ∼ 10개의 군을 두는 5방·군·성(현)제를 정비하였다.

이와같이 중앙 관제와 지방의 통치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성왕은 정치 운영에 있어서 귀족 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켜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2.4. 외교와 국방

성왕은 국제 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전대부터 유지되어온 신라와의 동맹 관계를 지속함으로써 고구려의 남진 압력에 대항하여 나갔다. 그리고 양(梁) 및 왜(倭)와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역과 이에 따르는 문화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551년 고구려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공격해오자, 백제는 패퇴하여 금현성을 빼앗겼고 이어 도살성 마저 함략 직전에 있었다. 이에 신라 원군이 도착하여 고구려를 물리쳤다. 신라는 패퇴하는 고구려를 뒤를 쫒아 강원도 일대의 고구려 영토를 침공하였고, 이에 백제도 경기도 지역 고구려 영토를 침공했다. 백제는 북진하여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남평양(南平壤 : 지금의 서울, 남양주)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점령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백제의 6군과 신라의 10군 추정 위치

또한 반로국[9]등을 위시한 가야 연맹을 사비회의를 통해 영향권 안에 넣기 시작했으며, 왜왕 말도 안 듣는 왜인 오미노 케누(近江毛野)가 탁순국(지금의 경남 창원시)에서 횡포를 부리자 그를 격퇴해주는 대신 가야 남부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을 쌓아 탁순국은 물론 가야 연맹 No.2인 안라국(지금의 경남 함안군)을 무력화시켰다. 일본서기 543년조에는 임나의 하한(下韓)에 있는 백제의 군령(郡令, 군장이라는 뜻)과 성주(城主)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심지어 가야의 일부 지역까지는 백제가 직할 통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태식 교수는 하한을 지금의 경남 남해군으로 비정했는데, 남해군에는 실제로 2014년 백제계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성왕은 가야 소국의 사신들을 초청해 사비회의를 열어 가야 소국을 신라에게서 백제가 보호해 줄 것이라고 선언하고 선물을 뿌리며, 안라국이 신라에도 접촉을 시도하는 정황이 포착되자 신라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회유와 협박을 하는 등 가야 소국들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신라는 가야의 일부인 탁기탄, 탁순국, 구야국을 먹긴 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가야 지역은 성왕의 영향력 하에 놓인 것이다.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백제의 간섭을 받게 된 안라국은 왜인을 매수해서 백제에게서 벗어나려 해보기도 하고[10] 나중엔 고구려와 은밀히 손을 잡았으나 당시 고구려는 전성기 다 끝나고 내전으로 허약해진 상태라, 동예인까지 박박 긁어모아온 고구려군을 독산성 전투에서 나제 연합군이 대파하기도 했다. 이 때까지는 진흥왕도 쾌히 수천의 원군을 보내주는 등 나제 동맹이 아직 유효한 것처럼 보였다.

2.5. 신라와의 미묘한 관계

548년 독산성 전투에서 나제동맹 신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피한 백제는 이후 신라와 미묘한 관계를 이어갔다. 독산성 전투에서 자신감을 얻은 성왕은 550년 2월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도살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3월 구구려가 이에 대한 보복 공격으로 금현성을 포위하여 함략될 위기에 있었다. 이때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군이 도착하여 고구려군을 패퇴시켰다. 고구려군이 퇴각하자 이사부는 고구려군의 재침략에 대비해 1천명의 군대를 금현성과 도살성에 주둔시키고 성을 증축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도살성과 금현성은 신라 영토로 귀속되었다. 성왕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전혀 항의하지 않았는데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신라 원군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독산성 전투 및 도살성, 금현성 전투에서 보여주듯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 싸우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었고, 오히려 신라가 연속으로 고구려를 제압할 정도로 강성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551년에는 신라와 힘을 합쳐 백제가 한강 하류를, 신라는 한강 상류를 공략하는데 성공하나, 결과적으로 상류를 차지한 신라가 서진해서 하류까지 모두 차지함으로써 백제의 고토 회복도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과거에는 신라가 백제가 주둔하고 있는 한강 유역을 쳤다는 설이 주류여서 일부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으나, 현재는 신라가 백제의 뒤통수를 때려 쫓아낸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한 백제가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이 스스로 한강 유역을 포기하자 신라가 이 공백을 놓치지 않고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는 설이 주류로 대두되고 있다.

是歲 百濟棄漢城與平壤 新羅因此入居漢城 今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

이 해(552년)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 니미방이다.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일본의 사서 일본서기는 백제신찬 등 백제 사서를 직접 인용했기에 이 시기 역사를 알아보는 데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는데, 일본서기에서는 대놓고 백제가 한강 유역을 포기했고 신라는 그냥 그걸 낼름 먹었을 뿐이라는 식으로 쓰여 있다. 삼국사기에서도 한자의 미묘한 의미 차이지만, 백제 동북을 취(取)했다 쓰고 있다. 참고로 성왕, 진흥왕 본기의 다른 부분에서 백제나 신라가 뭔가 공격해서 빼앗을 때는 공취(攻取), 침(侵) 자를 썼다.

백제의 한강 유역 포기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임용한이다. 이 설에서 주장하는 백제가 한강 유역을 버린 이유는 1)북쪽의 고구려와 동남쪽의 신라 양측으로 압박을 받게 되는 점, 2)신라는 남한강의 상류에 있어 내려다보는 형세라 유리하고, 백제는 아래쪽 평야 지대라 한강에 주력 병력을 둔다면 자칫하면 사비성이 며칠 안에 아작날 수 있다는 점 등 지리상의 불리, 다시 천도할 수도 없고 3)옛 수도였던 한강 유역을 회복하면 왕권이 강화될 것을 우려해 충남 지역에 연고를 둔 백제 귀족, 호족들의 한강 유역 개발 비협조 등이다. 결국 성왕이 어쩔 수 없이 한강 유역을 포기하고, 이를 신라 진흥왕이 놓치지 않고 '잘 먹겠습니다' 하고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고 본다. 일본서기에도 백제가 이 땅을 버렸고, 이로 인해 신라가 그곳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고 적혀있고,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그 땅을 "빼앗다" 라고 하지 않고 "거뒀다" 라고 표현해 전투가 없었음을 간접 시사하고 있으며, 이게 만약 전투로 빼앗은 것이면 수백년간 이어진 백제 - 신라 관계 역사상 최대의 영토 획득으로 신라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일텐데 누구를 장수 삼아 군대를 파견해 백제군을 쳐부수고 등등의 구체적 내용이 있을 법 한데 전혀 없다.

그러나 이는 아직 확정된 설이 아니다. 상기한 임용한 교수의 경우 대체로 군사 지리적인 면에 포커스를 맞췄지만, 백제는 대중국 교류권을 위한 교두보로서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야 했고[11] 따라서 불리함을 감안하더라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땅이 아니다. 물론 한계를 넘는 세력권이라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겠지만.[12] 게다가 한강 유역이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식량 생산량이 어마어마한 곡창 지대였다. 흔히 백제의 전라도 영토(=호남 평야)를 생각하지만 당시만 해도 김제 만경 평야는 대부분이 뻘밭으로 본격적인 곡창 지대로 자리매김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마찬가지의 이유로, 신라는 기여에 비해 생산력(중요도)가 떨어지는 남한강 상류만을 차지할 수 있었기에 신라가 한강 유역을 선제 공격할 당위성 역시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13]

게다가, 앞에서 언급된 백제가 한강 유역을 포기한 이유를 양면 압박으로 들고 있는데, 이는 신라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하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먹을 경우는 이 압박이 훨씬 심하다. 지도를 보면 간단하게 알 수 있듯이, 백제가 한강 유역을 먹으면 동남쪽의 신라가 거슬리더라도, 그 신라의 남서부를 압박함으로서 신라의 한강 유역에 대한 견제를 해소할 수 있지만,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 이곳을 백제가 한강 유역에 압박을 넣을경우는 신라의 한강 유역을 뒤에서 받쳐줄 지역이 아예 없다.[14] 다만 신라 측은 이때 이미 고구려와 화친을 맺은 정황이 삼국유사에 전해온다. 이때까지만 해도 백제와 고구려는 살부지수의 관계 였다. 다만, 지형과 지정학을 고려하면, 백제의 불리함은 여전하다. 신라의 소백산맥 쪽 성들은 백제의 수도를 겨냥하고 있고, 남한강 상류를 장악한 신라가 보급에도 우위에 선다. 반면 백제의 보급은 육로에 의존해야하고, 남부에 주로 있는 곡창과의 거리는 더 멀다.

당시의 나제 동맹 지속 여부와 영토 분할 합의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문헌적인 확증이 없는 상황이다. 나제 동맹은 100년 넘는 기간동안 유지가 되다 말다 했으며, 성왕의 죽음 당시에는 이미 무의미해진 상황이었다. 고구려로 부터 탈취한 한강 유역 영토를 백제가 하류, 신라가 상류로 나누기로 했다는 것도 초반 점령지를 가지고 추측하는 것일뿐 그런 사료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강 상하류의 가치가 뚜렷히 다른 상황에서 상식적으로 그런 일방적으로 손해나는 합의를 신라가 할 가능성이 적다.

가설하고, 어쨋든 성왕은 도살성, 금현성을 비롯해 한강 유역까지 신라가 차지하자 대놓고 항의하지는 못했지만 어쨌거나 속으로는 적지 않게 못마땅하게 여긴 듯 하다.

2.6. 관산성 전투

신라의 한강 하류를 차지한 이후 성왕은 553년 딸을 신라 진흥왕에 시집보내며 나제동맹을 더욱 강화하는 제스처를 취했다.[15] 그러나 이는 관산성 전투를 위해 신라의 경계심을 풀어놓기 위한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당시 신라는 551년 진흥왕이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행사하게 되었고, 직후 진흥왕이 신라 조정의 세대교체 작업을 진행되면서 그간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이사부 등 원로 들을 이선으로 퇴진시키고 김무력 등 신진 세력을 기용하는 등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던 터였다. 이에 성왕은 딸을 신라로 시집보내에 당시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있던 신라 왕실과 조정의 내부 동향을 파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성왕과 태자 창은 신라의 이러한 정권교체기를 절호의 기회로 여겼던 듯 하다. 불패의 명장 이사부가 어이없이 퇴진한 가운데, 당시 신라군을 이끄는 장수들 역시 젊고 경험이 부족한 장수들인데다가 진흥왕이 무리하게 정권 교체를 단행하면서 군 내무 지휘 서열까지 꼬여버린 상황이었다. 당시 신라를 이끄는 진흥왕은 21세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진흥왕은 후세에 명군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 백제에게 진흥왕은 아직 아무런 업적이 없는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이에 554년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자 창(昌)의 주장을 받아들여 신라를 침공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신라 정벌군에는 가야와 일본의 원군도 합세하였다. 백제의 이와같은 군사 동원으로 양국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전투의 절정은 관산성 전투였다. 그런데 관산성 전투의 경과 및 성왕이 죽음을 맞는 과정이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본서기》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32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시호를 성이라 하였다.[16]

삼국사기》 백제 본기 성왕조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 >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 <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高干都刀}> ,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백제 왕 명농이 가랑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 때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 대승하였다. 이 싸움에서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 9천 6백 명을 참하고,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진흥왕

자세한 내용은 관산성 전투 문서 참조.

일본서기에 기록된 성왕의 유언은 "짐은 매양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왔다. 더 구차히 살고 싶지 않다."

일본서기》에는 일설로, 사로잡힌 성왕은 참수되었으며 몸은 백제로 돌아갔지만 그 목은 신라 왕궁 북청 계단 밑에 묻었다 전해진다.[17]일본서기》에는 유독 신라를 미워하는데, 사실은 《일본서기》가 백제의 관점을 그대로 자신들의 관점으로 바꿨다는 의혹을 가지게 만드는 점 중의 하나다. 성왕을 사로잡은 부대 지휘관이 금관 가야계이며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金武力)이다. 가문이 그야말로 백제의 원수였다.

2.7. 사후의 영향

이러한 패전의 결과로 국내 정치 정세도 심대한 영향을 받아 동성왕 이후 성왕 대까지 어렵게나마 확립되어 가던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가 다시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로 전환되었다.[18]

이와 더불어 1세기 이상 신라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나제동맹 관계는 이 싸움 이후부터 완전히 결렬되었다. 이리하여 두 나라는 최후까지 적대적으로 대결하는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로 빠져버리게 되었으며, 이는 한반도에 있어서 삼국의 역학 관계의 성격을 결정짓게 되었다. 오히려 백제는 신라 타도를 기치로 내걸며, 예전부터 고국원왕개로왕 살해를 비롯해 서로 원한이 많았던 고구려와는 점차 화친, 나아가 동맹을 맺게 되었고, 더 나아가 고구려는 그동안 관심을 갖지 않았던 백제의 동맹국인 왜와도 손을 잡기 시작했으며[19] 신라는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수나라, 당나라에 친하려 하는 등 그 반대가 된다. 원래 외교라는게 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가 되는 것이 현실.

3. 그 외

불상인데 무섭게 생겼다

威德戀慕父王像 所造顯之尊像卽 救世觀音像是也。

위덕왕이 부왕 상을 연모하여 만들어서 나타낸 존상이 구세관음상이다.

《성예초(聖譽鈔》[20]

  • 호류사 몽전에 보관되어 있는 목제 구세관음상. 성예초에 따르면,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이 성왕을 기리기 위해 그의 모습을 본따 제작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는데[21] 녹나무로 만들어서 그 위에 금박을 입힌 이 목제 관음상은 실제로 가보면[22] 성인 남성 키와 비슷할 정도로 큰데 높이 179.9cm에 달한다.
  •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지 않고 전투에서 패해 일본으로 건너가 흠명천황이 되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의 한 로터리에는 성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성왕 본기

一年夏五月 성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좌장 지충이 고구려를 패수에서 격파하다

二年 양 고조가 왕을 책봉하다

三年春二月 신라와 서로 예방하다

四年冬十月 웅진성을 수축하고 사정책을 세우다

七年冬十月 좌평 연모가 고구려와 전투하여 패배하다

十年秋七月 별이 비 오듯 떨어지다

十二年春三月 양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하다

十二年夏四月 형혹성이 남두 성좌를 범하다

十六年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칭하다

十八年秋九月 장군 연회가 고구려 우산성을 공격하다

十九年 양에서 모시박사 등을 보내주다

二十五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六年春一月 고구려가 예와 공모하여 독산성을 공격하다

二十七年春一月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 지르다

二十七年冬十月 양에 사절을 파견하다

二十八年春一月 장군 달기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하다

二十八年春三月 고구려군이 금현성을 포위하다

三十一年秋七月 신라가 동북 변경을 획득하여 신주를 설치하다

三十一年冬十月 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가다

三十二年秋七月 성왕이 죽다

신라보다 고구려와 더 많이 싸웠다.

이는 위의 내용을 봐도 유추할 수 있는게,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싸웠던 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강 유역 수복을 끝내 이루지 못했다.

5. 일본서기 기록

일본서기의 내용들은 모두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애초에 일본서기의 편찬 목적이 "역사를 기록한다"보다는 "우리 나라가 세계 최고의 나라다!" 정도의 프로파간다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

  • 524년 정월 : 백제 태자 명이 즉위하다.
  • 529년 3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항구를 내려달라 요청하다. 안라회의에 사람을 보내다.
  • 530년 9월 : 안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모야신을 사로잡다. 5성을 취하다[23]
  • 531년 12월 : 백제군이 안라에 진출해 걸탁성을 쌓았다.
  • 531년 5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다.
  • 541년 4월 : 성명왕이 임라의 한기들에게 덴노의 뜻을 전하다.
  • 541년 7월 : 성명왕이 임라에 신하들을 보내다. 그리고 덴노에 부한과 일마의 정사를 아뢰다.
  • 543년 9월 : 덴노에게 공물을 바치다.
  • 543년 12월 :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렀으나 이들이 응하지 않았다.
  • 544년 정월 :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렀으나 이들이 응하지 않았다.
  • 544년 정월 이달 :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렀으나 낮은 이들을 보내왔다.
  • 544년 2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서를 받아오다.
  • 544년 3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다.
  • 544년 11월 :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러 임라 재건을 도모하다.
  • 545년 5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다.
  • 545년 9월 : 덴노에게 장육불을 만들어 바치다.
  • 546년 정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6년 6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공를 바치다.
  • 547년 4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다.
  • 548년 정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8년 4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8년 6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8년 윤7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8년 10월 : 득이신에 성을 쌓았다.
  • 549년 6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낻.
  • 550년 2월 : 일본에서 사신이 오다.
  • 550년 4월 : 일본 사신이 돌아가다. 고구려 노비 7명을 바치다.
  • 551년 12월 : 덴노가 보리 씨앗 1,000곡을 하사하다. 성명왕이 백제, 신라와 임라의 병사들을 이끌고 고려를 정벌해 평양을 토벌했다.
  • 552년 5월 :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다.
  • 552년 10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이해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다.
  • 553년 정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다.
  • 553년 6월 : 일본에서 사신이 오다.
  • 553년 8월 : 일본이 사신을 보내다.
  • 553년 10월 : 백제 왕자 여창고려군과 싸워 이기다.
  • 554년 정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다.
  • 554년 2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다.
  • 554년 3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54년 5월 : 일본 수군이 도착하다.
  • 554년 12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전투에서 패해 목이 베어지다.

6. 대중매체에서

6.1. 서동요(드라마)

서동요(드라마)의 프롤로그에서 신라군에게 잡혀 목이 잘리는 장면만 나왔... 으나 이것이 상당한 떡밥을 남겼는데 드라마 내 주요 사건 2개와 연관이 되어 있다. 성왕의 목은 신라의 북청 계단 밑에 묻혔고, 26년 후 부여선이 다시 신라에 잠입하여 찾아와 제를 올리기로 한다. 그러나 제의 전날 위덕왕은 무선공녀 연가모와 동숙을 하게 되고, 이 때 연가모는 훗날 무왕(백제)이 되는 부여장을 임신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이 귀족들에게 소문으로 퍼지면서 위덕왕은 귀족들로부터 압박을 받게 되고, 위덕왕은 연가모를 내칠 수 밖에 없었다.[24] 다시 20여년 후 백제와 신라 사이의 전쟁이 있고, 백제는 신라의 성을 획득한다. 그러자 신라 측은 20여년 전 부여선이 찾아간 수급은 가짜라고 주장하며 성과 바꾸자고 했고, 서동은 수급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 정변으로 백제에서 쫓겨나 신라에 가 있던 태학사의 기술자들을 다시 백제로 돌아오게 한다. 이 때 선화공주아좌태자가 각국의 대표로 나가 회담을 했는데 선화공주가 아좌태자에게 있던 왕자들의 표식을 보며 훗날 서동이 백제의 왕자임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6.2. 제왕의 딸 수백향

제왕의 딸 수백향에서 태자 시절의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했는데 배우는 서동요에서 무왕을 연기했던 조현재가 다시 한번 백제 왕역을 맡아 앳돼 보이고 많이 어설프던 그 때에 비해 부쩍 남성미와 연기력이 늘어날 걸 볼 수 있다. 캐릭터는 공적인 면에서 냉철하고 유능하면서도 한편으론 지나치게 입이 짧고 깔끔을 떤다. 맘이 있는 여주를 자꾸 골탕먹이며 사지로 내모는 츤데레 속성도 보이고 있다. 성왕(제왕의 딸 수백향) 문서로.

6.3. 만인보

고은 시인의 <만인보> 2권에 그를 다룬 시가 수록되어 있다. 제목은 사람 이름과 같은 '백제 성왕'.

무령왕의 아들로 즉위하자마자

북녘 패수에 침입한 고구려군 치고 신라와 교빙[25] 하였다

즉위 15년 웅진을 버리고

백마강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겨

국호도 남부여로 고쳤다

큰 땅 부여의 기상이었다 자부러진 부여 신세였다

허나 중앙 22부 지방 5부 5방의 틀이 비로소 잡혔다

허나 그의 만년

오랜 나제동맹 깨어지고

속임수 많은 신라 치려고

왕자 여창을 데리고 나가 싸웠으나

신라 신주 군주에게 대패

관산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그 성왕의 시체

신라 군대가 끌고 가서

서라벌 중앙 정청 문밖에 묻으니

신라 벼슬아치들 입궐 퇴궐 때마다

성왕 시체를 밟아댔다

이 견줄 바 없는 죄업이여

이런 죄업으로

어찌 아미타세계 서방 정토 찾는단 말인가

사천왕 도리천 도솔천 찾는단 말인가

아 고대사의 충성이여 애국이여 야만이여

7. 관련 문서


  1. [1] 이 표준 영정은 일본 호류사에 위치한 복제 구제 관음상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2. [2] 일본 오우치 가문의 족보에 기술됨. 위덕왕일 수도 있음.
  3. [3] 맏아들, 위덕왕이 태자였는지는 삼국사기 기록엔 없고 일본서기 기록에 있다.
  4. [4] 둘째 아들
  5. [5] 554년 7월에 사망한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 《일본서기》에 따르면 12월에 사망한 것으로 나타난다.
  6. [6] 개로왕과 더불어 전쟁터에서 목이 잘린 백제의 왕들 중 한 명. 전사한 것까지 치면 책계왕도 추가된다.
  7. [7] 고구려와의 경쟁 의식에서 비롯된 걸로 추정된다. 또한 참고로 백제는 부여를 북쪽의 살기 좋은 국가로 표현하는 일이 잦았다.
  8. [8] 불교 의식에 쓰이는 도구로 번(幡)이란 세로로 늘어트린 깃발이며, 개(蓋)란 불 보살의 위에 장엄하는 닫집, 일산(양산)을 가리킨다.
  9. [9] 흔히 알려진 이름으로는 "대가야"
  10. [10] 일본서기에서는 임나일본부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임나 일본부 식민지 경영설로 악용되었기도 했고 일본부라는 용어 자체도 당대에 사용되지 않았던 용어라는 등 문제가 있어 현대의 한국 학자들은 이 기관의 이름을 안라에 머무는 왜인들의 기관이라는 뜻에서 임의로 '안라왜신관'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기관은 처음에는 왜왕의 입장을 대변했는데 언젠가부터 안라국의 이익을 따라 행동하고 오히려 왜왕의 입장을 거스른다.
  11. [11] 대체 경로로 당진을 이용하긴 했으나 당시 항해 수준은 연안항해 위주였고, 황해 횡단은 백제 멸망 당시의 13만 당군 상륙전을 봐선 전혀 불가능한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루트였기에 한강 유역이 몇배는 유리하다.
  12. [12] 바꿔 말하면 위 주장은 백제의 당시 상황이 그러한 지형적 불리함으로 인한 문제가 백제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는 주장이고 반론은 감당할 만했을 것이다란 차이일 뿐이다. 즉 항강 유역 차지의 당위성 자체가 저 주장 자체를 타파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
  13. [13] 위 항목과 마찬가지로 당위성이 반론 자체로 여겨지긴 힘들다. 선제 공격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사실만 증명할 뿐이다. 성왕의 복수 다짐 역시 신라가 선제 공격했기 때문이 아닌가 할 수도 있겠지만 동맹국이 전쟁의 결과로 획득한 이익을 전부 차지했다는 점은 무혈 입성이든 신라가 공격한 것이든 백제 측에서 반감을 가지는 건 당연한거라 오히려 즉시 공격에 나서지 않았고 혼인 관계까지 맺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선제 공격이 아니라 백제가 사정상 물러난 쪽에 더 힘이 실리는 근거가 된다.
  14. [14] 그러나 이 경우는 평면적인 세력도만을 고려한 주장이다. 한강 상류 영역으로 철수 후 방어를 펼치다 원군이 도착하면 반격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이나 험준하다고 까지 할 수는 없으나 남쪽에서 올라오는 세력을 어느 정도 막을 만한 지형은 동남쪽에 충분히 있다. 게다가 저 반론(반론 자체가 신라가 먼저 공격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주장의 반론임에 주목하자)의 논거 대로라면 역시 신라가 선제 공격을 했을 이유도 같이 사라진다. 즉 양면 포위가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오히려 당시 다른 이유로 백제가 사정이 나빠서 물러난걸 신라 측이 낼름 먹었다 쪽에 신빙성만 올라가는 셈.
  15. [15] 성왕 쪽이 진흥왕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심지어 성왕의 아들 위덕왕 부여창이 진흥왕보다 열 살이나 더 나이가 많다.
  16. [16] 백제본기의 관산성 전투에 대한 언급은 이게 전부다. 관산성이라는 이름이나 저 50명 이외의 다른 군사들의 존재는 전혀 언급이 없다.
  17. [17] 백제 유민 사이 돌던 소문일 가능성이 높으며,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군주제 시대에는 보통 적국 군주라도 어느 정도 대우해 주는게 동서고금의 보편적 현상이었으며, 무엇보다 왕궁을 매번 다녀야할 지배층이 소름 끼쳤을테니 말이다. 일본서기 기록에 성왕의 목을 베기 전에 일단 절부터 올렸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적이라도 국왕은 고귀한 혈통이며, 그러한 사람의 목을 계단 밑에 묻어서 아무나 밟도록 만들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만약 이런일을 했다면 신라왕도 저렇게 될수 있다는 선례를 남겨서 신하들이 호박씨 깔 확률이 더 높아지게 만든다.
  18. [18] 귀족들이 다 뜯어말린 전쟁임에도 성왕 본인과 태자가 강행했다가 왕은 전사하고 무려 3만에 이르는 전사자가 발생했으니 어찌보자면 왕권 위축은 불가피한 결말이었다.
  19. [19] 이 시기를 전후하면서 왜에 대한 고구려의 문물 전수와 외교 접촉이 늘기 시작했다.
  20. [20] 15세기 초에 호류사에 머물렀던 승려인 성예가 남긴 책.
  21. [21] 쇼토쿠 태자를 본땄다는 설도 있다.
  22. [22] 일본의 비불이기 때문에 특정 날에만 공개한다. 구세관음상의 경우 매년 봄(4월 11일 ~ 5월 18일)과 가을(10월 22일 ~ 11월 22일)에만 공개.
  23. [23] 등지리모라(騰利枳牟羅)‧포나모라(布那牟羅)‧모자지모라(牟雌枳牟羅)‧아부라(阿夫羅)‧구지파다지(久知波多枳) 위치는 불명이나 대구에서 창령에 걸치는 지역으로 보는 설과 창원 북부에서 영산 밀양 일대의 성이라는 설도 있다. 아부라는 현풍 방면, 구지파다지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성산동으로 추정된다.
  24. [24] 사실 평소라면 임금이 나인과 동숙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제의 전날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거다.
  25. [25] 交聘,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사신을 보냄.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sta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