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 د افغانستان تاري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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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냉전의 일부

날짜

1979년 12월 24일 ~ 1989년 2월 15일

장소

아프가니스탄

결과

소련군의 전면 철수

영향

소련의 해체 원인중 하나

제네바 협정 (1988)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지속.

교전국

소비에트 연방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지원국

동독

무자헤딘[1]

지원국[2]

미국

파키스탄

이집트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서독

중국

이란

병력

소련군 115,000명[3]
아프간 정부군 65,000명

무자헤딘 약 250,000명

손실

소련군 14,453명 전사, 53,753명 부상
아프간 정부군 18,000명 전사

무자헤딘 90,000명 전사. 75,000명 부상

민간인 피해

민간인 사망 560,000 ~ 2,000,000명

  • 파슈토어 : ه افغانستان کې شوروی جګړه‎‎
  • 페르시아어 : جنگ شوروی در افغانستان‎
  • 러시아어 : Афганская война (1979—1989), Советская война в Афганистане
  • 영어 : Soviet-Afghan War

1. 개요
2. 배경
2.2. 1978, 좌익계 군인들의 2차 쿠데타 ->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공산정권 수립
2.3. 내전: 공산 정권 vs. 반공산정권 게릴라 무자헤딘
2.4. 소련의 특수작전: 아민 대통령을 제거
2.5. 친소 대통령 '바브라크 카르말'의 공산정권 수립
2.6. 이슬람 세력의 반란
2.7. 소련의 참전
3. 시작
4. 전개
5. 절정
6. 각국의 개입과 지원
7. 종말
8. 영향
9. 미국의 전쟁 유도
10. 관련 대중 매체
10.1. 영화
10.2. 소설
10.3. 논픽션
10.4. 라이트노벨&만화&애니매이션
10.5. 게임
10.6. 노래

1. 개요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소련군

우리가 시작한 전쟁은 고귀한 이상을 위한 것이었으나, 결국은 민중을 적으로 삼은 전쟁이 되어버렸다.[4]

- 소련 공수군 중장 알렉산드르 레베디[5]

1979년 12월 24일부터 1989년 2월 15일까지 소련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소련판 베트남 전쟁이란 말처럼,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비소모를 한 채 물러나야 했다. 베트남 전쟁 때 소련과 중국이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무기 및 특수부대 등을 지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에서는 미국무자헤딘을 비공식적으로 지원해주었다. 이 전쟁은 소련이라는 을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에 가두었다는 의미에서 곰덫(The Bear Trap)이라고도 불린다. 소련이 해체되는데 일조한 사건으로 꼽힌다.

2. 배경

과거부터 아프가니스탄은 교통의 중심지로써 수 많은 세력들이 성장하며 영향력을 내려던 지역이다. 19세기 이후 해양진출을 위해서 남하하던 러시아 제국인도양으로 나가는 통로인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이에 맞서서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서 역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무력간섭을 자주 하였다. 이런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19세기 무렵, 3차에 걸쳐서 계속된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차: 1839 ~ 1842, 2차: 1878 ~ 1880, 3차: 1919 )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전후 아프가니스탄 왕정은 1960년대에 공식적으로 비동맹 노선을 표방했지만, 서방식 서구화, 근대화를 추진하는 한편, 부동항을 얻기 위해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노골적으로 노리고 있던 이웃 소련과도 적절한 친교를 맺었다. 이러한 실리적인 정책으로 60년대 아프가니스탄은 평화롭고 근대화를 차근차근 이루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완화하기 위해 소련과 군사적으로 교류하면서 점차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군에서 소련에서 연수보낸 군인들이 돌아와 소련식 공산주의를 추구하게 된다. 한편 종교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아프가니스탄 향촌에서는 서구화와 소비에트화에 모두 반발하면서 세력을 더욱 확장하고 있었다.

2.1. 1973년 모하마드 다우드 칸쿠데타

모하마드 자히르 샤

모하마드 다우드 칸

1973년, 자히르 샤(محمد ظاهر شاه‎) 국왕 치하의 아프가니스탄 왕국은 안정적으로 유지되며 근대화, 산업화를 이루고 있었으나, 왕의 사촌이었던 모하마드 다우드 칸(محمد داود خان)이 왕이 해외 순방을 하는 틈을 노려 쿠데타를 일으켰고, 왕정이 무너지면서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었다.

다우드 칸은 자신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개혁 정책을 추진함과 동시에 군부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반공 정책을 실시하며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탄압했다. 이에 다우드 칸 정권은 이슬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반발을 동시에 사게 되면서 국가는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된다.

2.2. 1978, 좌익계 군인들의 2차 쿠데타 ->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공산정권 수립

결국 1978년 좌익계 군인들이 주도한 쿠데타로 다우드 칸 공화국 정권이 무너지고 다우드 칸이 살해되면서,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 등이 이끌던 아프간 내 최대 좌익 정당이었던 '인민민주당'이 정국 주도권을 장악, 공산 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2.3. 내전: 공산 정권 vs. 반공산정권 게릴라 무자헤딘

이에 지방의 여러 부족들이 반발하였고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이른바 무자헤딘이라는 이름의 반군 게릴라들이 들고 일어나 공산 정권에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미 소련은 이 이슬람 세력이 자국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수많은 KGB 요원을 아프가니스탄에 잠입시켰다.

아프가니스탄은 집권 친소 세력과 친서방 세력, 그리고 향촌의 이슬람 세력로 나눠져 난장판이 되었고, 이슬람 세력은 이때부터 친소 세력을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하고 친소 세력뿐만 아니라 소련에 대한 테러를 시작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인도적 목적으로 파견되어 있던 원조단까지도 인질로 잡고 살해함으로써 소련을 격노시킨다.

2.4. 소련의 특수작전: 아민 대통령을 제거

더구나 집권한 공산주의 세력들은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아민이 타라키 대통령을 죽이고 대통령이 되었는데, 친소 성향이었던 아민 대통령이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CIA에게 포섭되었다고 아민 반대파가 흘린 거짓 정보가 KGB를 낚았고,[6] 결과적으로 소련 지도부마저 낚아버린다. 이로써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겉으로는 친소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끄나풀이라고 판단된 아민을 제거하고 이슬람 세력을 직접 진압하기 위해 군사개입을 결정한다.[7] 이 특수작전은 소련 정치국 내에서도 격론이 있었고 가까스로 통과되었다고 한다. 아민 정권 전복공작은 전면침공이 아니라 특수부대 및 KGB 요원들에 의한 특수작전에 가까웠고, 사실상 매우 적은 희생(20명 이하)으로 성공적으로 보이긴 했다.

  • 하지만 여기에는 반론도 있는데 소련이 단순히 낚여서 아민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아민이 아프가니스탄을 개판으로 운영해서 이대로 가다가는 반 소련파가 확산될 것을 우려해 제거했다는 설이 있다. 실제 아민 정권은 이미 충분히 막장이었다. 아민은 소련마저도 학을 뗄 정도로 공산주의에 집착했는데 그 예로 아민 정권 하에서 모든 공무원과 시민, 학생들은 공산주의의 상징인 붉은색으로 모든 사물들과 벽, 건물을 칠하는 작업에 강제적으로 동원되어야 했다. 집에 사용하는 가정제품이나 장식품마저도 붉은색으로 칠하거나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구를 넣어야 했다고 한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아프간에 거주하는 소련인들에게도 붉은색으로 그들이 사용하는 자동차나 자전거 등을 칠하도록 권고를 하기까지 했다. 이는 아프간에 있는 소련 거주민과 고문들을 경악하게 했고, 소련 고문관들은 본국으로 보내는 보고서에 아민 정권은 오히려 공산주의를 민중들에게 악이 되는 방향으로 주입 중이라 조속히 교정이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소련인들에게 내려온 권고문을 증거물로 삼아 보냈다. 즉, 소련은 단순히 아민이 필요없어서 제거한 것이 아니라 그럴 만한 어느 정도의 이유가 있어서 제거한 것이다. [출처 필요]

2.5. 친소 대통령 '바브라크 카르말'의 공산정권 수립

아민을 제거한 소련은 타라키와 아민에게 밀려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좌천된 바브라크 카르말을 새 대통령 자리에 앉혀 아프가니스탄에 원래 있던 친소정권을 갈아엎고 새로운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소련은 거짓정보에 낚여 친소적인 아민을 살해할 만큼 정보에 혼선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2.6. 이슬람 세력의 반란

그리고 소련에 반대하던 이슬람 세력들은 소련의 침공을 기회로 여기고 카르말 정권을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한 뒤 반란을 일으킨다.

2.7. 소련의 참전

궁지에 몰린 카르말은 소련에게 반란 진압을 위해 "중앙아시아 출신의 소련인들은 아프간인들과 생김새가 유사하니 이들을 투입해달라."며 소련군에게 요청하고, 소련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결국은 친소정권이 전복될 것을 우려하여 전면개입하게 된다. 그리고 몇 달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무력개입은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군사비 부담으로 소련 경제에 치명타를 안겼다.[8]

당시 집권 세력들은 소련으로부터 자주적인 독립국 지위를 얻으려 했지만, 사실 강제적인 독재정치와 국민들의 실정을 무시하는 경향 덕에 자국에서도 욕 먹는 상황이었다.

대내적으론 수천년 역사 동안 수많은 세력들이 거쳐가면서 이 지역은 철저하게 각 부족별로 움직이고 있을 뿐, 바라크자이 왕조가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대강 통일국가로서의 아프가니스탄을 이룩한 것은 1930년대였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의 아프가니스탄 국민'이란 인식이 희박하였다. 아니, 애초부터 이 지역에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가까운 국가란 인식은 없었다고 봐도 된다. 국토의 80%가 돌무더기 뿐인 가파른 산악의 연속이고,[9] 나머지는 사막과 황무지가 대부분. 여기서 어떻게 사람이 사나 싶은 동네인데, 선진 문물 도입을 시도한 것은 좋았다. 하지만 무지하고 먹고 살 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는 산골 사람들에게 갑자기 기계화된 공장과 대도시를 이야기하는 격...

3. 시작

"우리는 군병력을 파견하는 것이 중대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당신 나라의 상황은 좋아지지 않고 반대로 더 악화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는 외부세력 뿐만이 아니라 당신 나라 사람들 대다수를 상대로 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국민들은 절대 이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장관회의 의장[10]. 당시 아프간 대통령이었던 타라키의 군병력 파견 요청에 대한 답변[11].

세간에는 마치 소련이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아프가니스탄에 침공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당초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소련군 개입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을 서방에 넘겨줄 수 없다는 KGB측의 강력한 주장으로 1970년대 중~후반까지는 아직 구체적인 군사개입은 여러 옵션들 중 하나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에서 소련의 개입에 결정적인 구실을 주는 사건이 터진다. 그것은 1979년 3월의 하지-헤라트 사건으로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명령을 받고 반정부시위 진압에 투입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육군 17사단 병력들이 이스마일 칸 대위의 선동으로 오히려 반정부군 세력에 가세해버린 사건으로, 이 사건에서 소련 군사고문단과 명백한 민간인인 간호사, 군인 가족들까지 합쳐 300~500명에 달하는 소련인들을 학살하고 시체를 막대기에 꽂아서 거리에 전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공수군 스페츠나츠

당연히 이는 소련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소련의 개입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소련은 결정적인 오판을 하는데, 바로 친소 성향인 아민 정권을 제거하고 카르말 정권을 세우는 한편 적극 개입하여 아프간 전역을 확실하게 갈아엎는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리하여 197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새벽 소련군 제40군은 아프간 접경 테르메즈 인근의 아무다르야 강에 부교를 설치하고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본격적인 침공 시작 전인 12월 7일에 이미 민간인으로 위장한 KGB 예하 스페츠나츠 대원 700명과 친소파 인사인 바브라크 카르말을 전부 입국시켜놓았다. 초기에는 이 스페츠나츠 대원들을 이용하여 아민 대통령 관저의 식사에 독을 타는(!) 방법으로 아프간 지도부를 혼란시키려 했으나 미리 식사를 먹어보는 시식자들(...) 때문에 실패했고, 저격 또한 오발로 실패하였다. 결국 소련군의 본격적인 침공에 맞춰 관저를 전면공격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당일날 아프간군 지휘관들을 초청하여 모아두는 등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두고 1979년 12월 27일 작전개시와 동시에 아프간군 지휘관은 모조리 체포, 대통령궁은 스페츠나츠들이 습격했다. 당시 대통령궁을 지키고 있던 아프간 대통령 호위대 2백여 명은 모조리 사살당했고, 스페츠나츠들은 하피줄라 아민 대통령과 그 가족들까지 전부 사살해버렸다.[12] 스페츠나츠를 지원하기 위해 공수부대의 장갑차와 전차,[13] 소련-아프간 국경에서 전차와 장갑차들이 국경을 뚫어오고, 예정대로 지상으로 달려온 기갑부대와 보병들은 몇 개 안되는 아프간 도시들을 점령해서 전쟁은 순식간에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

4. 전개

본격 제2차 세계 대전 총기 박람회.[14]

오른쪽 총구를 하늘로 향해 들고 있는 소총은 리-엔필드 소총이고, 또한 들고있는 DP-28도 노획한 것이다. 소련제 무기이긴 하지만 이미 소련은 PKMRPK로 갈아탄지 오래된 시점이다. 심지어는 20세기 무기도 아닌 제자일도 현역으로 징발되어 쓰였다.

공산 정권 수립 후 아프가니스탄 공산 정권을 상대로 싸우던 무자헤딘은 급기야 아프간 주둔 소련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산악지형이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이용해 산악전 대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소련군을 게릴라전 등으로 공격하여 사상자들을 냈다. 한편으로 무자헤딘은 소련군뿐만 아니라 소련이 세운 친소 카르말 정부군도 동시에 공격하였다. 그러자 빡돈 소련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무자헤딘 토벌에 나섰다.

이 때 무자헤딘을 이끌던 7명의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했던 것이 아흐마드 샤 마수드였다. 마수드의 활약지가 소련 보급로 위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고 마수드는 주요 거점에 병력을 남겨두고 전투 발생 시 해당 지역에 기동부대를 보내어 각개격파하는 전술을 애용하여 친소 카르말 정권과 소련군을 울화통 터지게 만들었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북쪽으로 70km 떨어진 판지시르 계곡(Panjshir Valley)에서 소련군과 카르말 정권의 대규모 공세가 무려 9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다. 마수드의 군대를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전투 과정에서 마수드 군도 만만찮은 손실을 입었으나 결국 제압에는 실패했다.

1982년에 행해진 5차(1만 2천여 명 동원), 6차 공세 모두 합쳐 소련 측에서 3천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와중에 공산 아프간군 1천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하는 막장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수드는 소련과 공산 아프간 측에서 노획한 물자와 서방에서 근근히 전해주는 원조물자와 무기, 민중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소 항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1984년 7차 공세에서는 소련-공산 아프간군 2만 1천여 명이 동원되었지만 5천여 명의 무자헤딘을 당해내지 못하고 2천 5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돌아갔다. 1985년의 9차 공세에서는 공산 아프간군 5백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했고 공산 아프간군 여단장이 무자헤딘의 공격에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소련 측은 1986년에 공세를 결국 중단, 1988년이 되어서야 판지시르 계곡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문제는 판지시르 계곡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상황도 가히 막장급이었다는 것이다. 1985년 후반기에는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지대에서 3km 떨어진 자와를(Zhawar)에서도 소련군과 무자헤딘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곳에서 무자헤딘은 동굴을 뚫어 창고와 모스크, 의료시설을 지어놓고 소련군과 전투를 벌였다.

1985년 후반의 1차 공세에는 공산 아프간군이 주축이 되어 무자헤딘에 무리한 공격을 가했다가 패배했고 그 결과 오히려 무자헤딘의 사기만 높여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1986년 초에 가해진 2차 공세에는 1만 2천여 명의 소련-공산 아프간 동맹군(이 중 2천 2백여 명이 소련군)이 다시 재차 공격을 가해서 어찌저찌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다시 후퇴해버렸다.

1987년 중반에는 파키스탄 남부 국경지역의 아르간다브(Arghandab)에서 공산 아프간 군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가며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으나 결과적으로 물라 나키브가 이끄는 무자헤딘 군에 대패하여 1천 7백여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 포로, 이탈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그러나 소련이 맞고만 다닌 것은 아니다. 상대가 미국과 맞설 수 있는 강대국인 소련이다 보니 모든 전투에서 소련 측의 사상자보다 무자헤딘 측의 사상자가 더 많았다. 10년 동안의 전쟁에서 소련군은 1만 5천명이 전사했는데 무자헤딘의 전사자는 20배에 달하는 30만 명이었다. 1987-1988년 사이 겨울에는 소련군 2만 명, 아프간 공산군 8천 명이 파키타 주(Pakita Province)에서 무자헤딘 2만 명에게 대규모 공세를 펼쳐서 무자헤딘 3천 명을 죽이는 등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승리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15]

동년 후반에는 무자헤딘 측이 공세로 나서, 일명 '화살' 작전을 발동, 아프가니스탄 북동부[16]에서 공산 아프간 정부군을 대패시키기도 하였다. 게다가 코스트 주(Khost Province)에서는 10년에 걸쳐 소련-공산 아프간 정부군과 무자헤딘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결국 소련측이 퇴각하는 일도 있었다.

참고로 소련군은 62만명(...) 정도의 대군을 아프가니스탄에 주둔시켰는데도 전과가 크지 않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것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기간 전체의 '연인원' 개념이다. 전쟁 기간 동안 평균적으로 8~10만명 정도의 소련군만이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였고, 내무부 보안군과 KGB의 특수부대는 다 합쳐봐야 1만명 수준이었다. 더구나 광활한 아프가니스탄의 각 주요도로와 거점지역으로 병력을 분산시켜야 했던 소련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생각하면 이것도 애초부터 이기기 불가능한 전쟁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프간은 외부에서 막대한 지원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현지에 나간 소련군 장군들도 모스크바에 전차와 전투기 중심이 아닌 2백만 명이 넘는 보병부대와 이를 지원하는 보급부대를 통하여 요충지나 도로 같은 점과 선 뿐만 아니라 면인 지역을 장기간 장악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했고 모스크바 군 장성들도 이에 동의하고 전략을 전면 수정하는 안을 보고 했으나 소련의 열악한 경제사정으로 이를 실행하지 못했다.

5. 절정

사상자가 만단위로 올라가자 소련군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온갖 대응방법을 내놓는다. 산악지대인 아프간의 특성에 대처하기 위해 육군 항공대Mi-24 공격헬기 부대를 투입해 성과를 올렸다. 회전익기 뿐만 아니라 소련 해군 항공대[17]공군을 동원해 공습과 폭격, 미사일 공격을 했으며 독가스화학무기를 살포하고 무자비한 대게릴라 작전을 펼쳤으나, 효과는 거의 없었고 아프간 국민들의 반감만 올라갔다. 유명한 특수부대 스페츠나츠도 투입되어 게릴라전에 게릴라전으로 반격을 펼쳐보았다. 쿠란에 폭탄을 설치해서 이슬람 교도들이 쿠란을 펼치는 순간 터지도록 만드는가 하면, 위장폭탄으로 무자헤딘의 집이나 기지 속에서 터지도록 만들기도 하는 등 꽤나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결국 승리하지는 못했다. 여담으로 이 '쿠란 폭탄'은 현재 이슬람 국가 놈들이 절찬리에 사용중이다(...).무자헤딘 활동하면서 안좋은 것을 배운 것을 넘어 이슬람교도로써는 하지 말아야 하는 라인을 건넜다...

6. 각국의 개입과 지원

소련군 특수부대가 아프간 무자헤딘에게서 노획한 독일제 H&K MP5A3 기관단총. 현재는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노획한 G3M16 소총을 들고 무자헤딘 코스프레를 한 소련군들.

무자헤딘이 미국이 준 스팅어를 들고 있다[18].

무자헤딘에게서 노획한 스팅어를 들고 있는 소련군.

한편 이 전쟁은 세계 각국이 개입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버금가는 대규모 국제 대리전(Proxy War)으로 비화되었다.

당시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캐나다, 터키, 서독 등 서방세계 국가들은 소련군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소총부터 미사일까지 온갖 무기들을 지원하였다. 또한 정보기관 요원들도 직접 파견해서 정보 지원도 하였다. 당시 CIA가 무자헤딘에 제공한 무기의 총 가치는 약 30억 달러였다. 또한 곡물, 기술 수출 금지 등 소련에 경제재제를 부과하고 전략무기제한협정의 미국 의회 비준을 연기하는 등 보복 조치를 행하기도 했으며, UN에서 각종 대소·대아프간 결의안을 채택하며 소련을 계속해서 압박했다.

한편 냉전 동안 공산권의 맹주 자리를 두고 소련과 대립하던 중국도 미국과 수교하고 한참 개혁개방에 나서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과 손잡고 무자헤딘을 지원하였다. 소련제 무기를 무단복제해서 사방에 뿌리는게 특기던 중국인지라, 이때도 역시 AK-47소총부터 온갖 무기를 생산했고, CIA가 이 중국산 무기를 사들여서 파키스탄을 경유해서 무자헤딘에 넘겼다. 중국과 미국 양쪽과 동맹관계였던 파키스탄은 무자헤딘을 지원하는 배후 근거지 역할을 하였다. (19세기말 영국이 일방적으로 그은 듀런드 라인 때문에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양쪽에 나뉘어서 살던 파슈툰족이 양쪽을 연결하는 통로역할을 하였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이란,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같은 이슬람권 국가들도 무자헤딘을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인 경로로 지지하거나 자금 및 무기 등을 지원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열렬한 지원을 했던 곳이 이집트였는데, 그 당시 지도자였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맺은 평화 조약 때문에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배신자 취급을 받고 있었고,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을 지원하여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다.

반면에 이 전쟁에서 소련을 지원하였던 나라들은 별로 없었다. 중월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은 대놓고 보복 차원으로 무자헤딘을 지원했고 북한, 쿠바는 소련에 대해 극한 유감과 실망을 나타내었으며, 베트남[19]라오스, 캄보디아도 마찬가지였고, 유고슬라비아[20], 루마니아 등 일부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대통령을 사살하고 괴뢰정권을 세우며 점령군 행세를 보이자 아프가니스탄을 무단 침공한 소련을 격렬하게 비난하거나 유감을 표시했다. 그나마 위성국 불가리아, 동독, 소련과 친했던 인도가 소련을 지지했으나(무자헤딘을 지원하였던 파키스탄과 전통적으로 앙숙관계), 그 외 소련을 지지했던 나라들은 극히 드물었다. 당시 소련의 외교력이 얼마나 안습이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7. 종말

전쟁 막바지인 1989년의 상황.[21]

소련으로 철군하는 군인들. 1988년 8월.

이래저래 제대로 되는 건 없이 피해만 늘어나는 상황,.. 싸울래야 싸울 적도 잘 안보이는데 어디선가 뭔가가 날아오거나 터지면서 사상자만 늘어가는 애매한 그런 나날이 계속되다가 외교적으로도 욕을 먹기 시작하고 소련 내에서도 예상외로 길어진 장기전을 염증을 느껴 철수하자는 여론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989년 소련군의 전격적인 철수로 끝난다.

소련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아프간 파병군.

소련군이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 총이랑 방탄모도 냅두고 탄피로 글을 만들었다. '영원히 안녕, 아프간'.[22]

'나 돌아왔어요, 엄마!'[23]

당시 소련군은 주로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날 상황을 가정해 훈련해 왔다. 때문에 평원에서 기동전을 펼치거나 제파식 전술로 밀어붙이는 데 더 익숙했고, 산악전 및 게릴라전 대비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때문에 평원이라고는 없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8. 영향

우리는 대조국전쟁의 참전자들과 자주 비교되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는 동안 우린 무얼 했을까요? 어느 한 청년이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독일의 역할을 맡았던 겁니다. (어느 군인의 회상 중)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아연 소년들(Цинковые мальчики)> 중

10년간 지속된 아프간 전쟁은 소련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미국 레이건 행정부의 SDI 추진에 따른 군비경쟁, 1986년 유가 붕괴,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와 함께 소련 경제가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타격을 입은 원인으로 거론된다.

또한 약 10년 가량 지루하게 이어지던 전쟁은 당시 소련 젊은이들에게 반전주의와 염세적 허무주의를 널리 퍼트렸다고 한다.[24]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한 공포와 허무함에 빠진 일부 군인들은 마약, 매춘에 탐닉하게 되었고, 이들은 귀국후에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련의 큰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아프간 참전군인들의 상당수는 술, 마약, 매춘에 쩔어 살았고 그 중 일부가 에이즈에 감염되기도 했다.# 게다가 마약 중에서도 악명이 높은 크로코딜에 중독된 참전자들이 꽤 있다. 특히 이들을 통해서 소련 전역에 마약이 광범위하게 퍼졌다.[25] 사병 참전자는 거진 대부분 하층민이 되었고 심지어는 장교 참전자 역시 위관급 정도는 사병 참전자와 별다를게 없었다.

거의 10년 간의 전쟁에 투입된 소련군은 62만 대군인데 평상시 유지 숫자는 8만-10만 정도였다. 전쟁으로 인한 소련 측의 전사자는 1만 5천여 명, 부상자 5만 4천여 명이며,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힌 숫자도 수백여 명에 달한다.[26] 거기에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귀환한 소련군 장병들 중 포탄 쇼크나 정신 이상 증세, 부상,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40만이나 되었다. 또한 친소련 아프간 정부군은 1만 8천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30]

아프간 전쟁은 무엇보다도 소련 군부의 위신을 실추시켰다는 점에서 소련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아프간 전쟁은 소련군에게 있어 단지 전략적 실패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소련군, 특히 소련군 장성 출신 인사들은 아프간 전쟁 전까지 2차대전에서의 승리라는 막대한 정치적 명분으로 소련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세력 중 하나였다.[31] 아프간 전쟁 역시 뒷배경에는 소련군의 역할이 어느 정도 있었고, 이런 소련군에게 있어 아프간 전쟁의 패배는 단순히 군 차원에서 전략적 실패가 아닌 정치적인 책임이 뒤따르는 실패였다. 게다가 아프간 전쟁을 치루면서 발생한 대규모 부상, 사상자와 소련군이 저지른 전쟁범죄는 소련 국민들이 소련군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현재의 러시아 연방이 아닌 소련 내 발트 3국이나 캅카스, 중앙아시아의 자치 공화국들에서 차출된 병사들이 다치거나 죽으면서, 해당 자치 공화국 국민들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침략 전쟁에 개입한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을 부추겼고, 이는 조국의 수호자라는 소련군의 이미지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혔다. 비단 정치적인 차원 뿐만이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소련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소련군은 1989년까지 지속된 아프간 전쟁으로 군사적 역량을 소진한 이후 각 공화국들에서 벌어진 분쟁들에 대규모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어려웠고, 이는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등 소련 지도자들이 군사력 사용에 소극적으로 나서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몇십 배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일단 무자헤딘 병력은 20만 ~ 25만 정도로 추산되는데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32] 무자헤딘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60만-200만명이 사망하고 300만-500만명이 부상을 당했다. 또한 수백만 명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어떤 도시는 전쟁 전 인구가 20만이었는데 전후 계산해보니 단 2만 5천명만 살아남았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도 러시아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을 미국 이상으로 악랄한 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90년대 후반 체첸에게 두들겨 맞을 당시조차도 러시아에서 앙케트로 러시아의 주적을 무작위 선정했더니 1위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나올 정도였다. 참고로 2위가 미국, 3위가 중국, 4위가 체첸이었다. 당시 체첸 전쟁 와중이었음에도... 덕분에 러시아 역사에 최대 굴욕을 안겨준 몽골-타타르의 멍에[33] 못지않은 멍에라고 부를 정도이다. 결론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소련에 끼친 영향은 베트남전이 미국에 끼친 영향과 무척이나 비슷하다. 하지만 미국은 망하진 않았지

한편 이 시기에 미국의 이익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흘러들어간 수많은 무기들은 상당수 미국이 거액(예를 들어 스팅거 한발에 10만불)을 주고 되샀지만 남은 무기들이 지금은 미군을 노리고 있다.

소련군이 철수하자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공산 정권(대통령 무하마드 나지불라)만이 남았지만 희한하게도 소련군이 철수하고 난 뒤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나지불라는 정권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반군과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91년 12월 소련 붕괴 이후 뒤를 이은 보리스 옐친이 정권을 잡은 후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던 러시아는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렸고, 이후 헬리콥터를 돌릴 기름도 부족했던 나지불라 정권은 결국 1992년 4월 무자헤딘 반군들의 공세에 밀려 붕괴되고 말았다.

미국은 철수하는 소련군을 보며 "아프간이 괜히 제국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 아닌데 멋도 모르고 쳐들어간 소련 놈들 보소."하고 배를 잡고 비웃었지만[34] 20년 정도 후에는 정작 자기네가...

미국은 이 전쟁에 항의한다는 의미로 다음해에 열린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고, 대부분의 서방권도 이에 동참한다.[35] 이에 열받은 동구권은 4년 뒤에 열린 1984 LA 올림픽에서 똑같이 갚아줬고[36], 이 반쪽짜리 올림픽은 1988 서울 올림픽에서야 끝이 난다.

당시 소련군의 사기군기도 말이 아니었다. 당시 아프간에서 간염 걸린 병사가 11만 5천 명, 장티푸스 걸린 병사가 3만 1천 명. 도합 42만여 명의 병사가 앓아눕는 데도 의무대는 턱없이 부족했고 병사들에 대한 복지도 개판이었다. 그리고 전방의 병사들은 무자헤딘 때문에 하루종일 10분 쉬기도 힘들 정도로 바빴으나 후방의 병사들은 군수품을 아프간 민간인들에게 팔아 비자금을 마련하면서 배를 불렸다(...). 이는 당연히 전방 병사들과 후방 병사들의 갈등을 부추겼고 단합도 되지 않았다.

장교들도 병사들처럼 개판이긴 마찬가지였다. 전쟁통의 비참한 현실을 부정하려고 마약매춘에 찌든 자들이 많았다.[37]

즉 당시 소련군이 전투에서는 늘상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으나 전쟁에서는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러시아에서 제2차 세계대전과 남오세티야 전쟁, 시리아 내전의 참전 군인들이 지금도 모국에서 영웅으로 대접받는 것에 비하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이 전쟁에서 참전했던 참전 용사들은 대부분 참전 사실을 숨기거나 자랑하지 않을 정도로 대우를 못 받고 있다.

이밖에도,전쟁의 여파는 황당하게도 캐나다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는데, 다름아닌 라다 社의 차량 들을 몰고 다니던 차주들에게 불똥이 튀어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제대로 된 차량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9. 미국의 전쟁 유도

사실 이 전쟁의 시작은 미국의 숨은 노력이 많기도 하다. 1979년, 미국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고의적으로 유도했는데, 당시 주 아프간 미국 대사는 이런 사실도 모른 채 본국에 그런 식의 외교는 소련의 침공을 불러올테니 제발 조심해 달라고 항의성 경고를 했으나, 이미 미국 내부에서는 소련을 아프간에 끌어들여 소련판 베트남전을 하는 쪽으로 결정이 나 있었으니 먹혀들 리가 없었다.

전 CIA 국장 로버트 게이츠1996년에 쓴 회고록 「음지로부터: 냉전에서 승리한 다섯 대통령의 숨은 이야기」에서 미국 정보기관들이 실제로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후가 아닌 이미 그 6개월 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 게릴라를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밝혔고, 2년 후 지미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도 프랑스 주간지「누벨 옵세르바튀르」와의 인터뷰에서 게이츠의 주장을 분명하게 입증해 주었다.

그 인터뷰에서「누벨 옵세르바튀르」는 브레진스키에게 "게이츠의 주장이 정말 맞느냐?"라고 물었는데, 브레진스키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 공식적으로는 무자헤딘에 대한 CIA의 지원은 1980년, 즉 1979년 12월 24일 소련 군대의 아프간 침공 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비밀이 유지되어 온 실상은 전혀 다른 것이다. 사실 카터 대통령이 카불의 친소련 정권 반대파들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첫명령을 승인한 것은 1979년 7월 3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그러한 지원이 소련의 군사적 개입을 유도하리라고 대통령에게 설명했던 자료를 내가 작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벨 옵세르바튀르」의 인터뷰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누벨 옵세르바튀르」: 지금 당신은 이 점과 관련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가?

브레진스키 : 무슨 후회를 할 게 있는가? 그때의 기밀 작전은 기발한 구상이었다. 그 작전은 러시아를 아프가니스탄의 함정에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후회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소련이 아프간 국경을 넘었던 그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이렇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을 베트남 전쟁으로 몰아세우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라고.

「누벨 옵세르바튀르」: 그러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미래의 테러 집단들에게 무기와 군사 참모를 제공한 사실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브레진스키: 세계사의 전개에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판단해야 하지 않는가? 탈레반인가, 아니면 소련 제국의 붕괴인가? 이슬람교도의 일부를 약간 동요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중부 유럽의 해방과 냉전의 종식인가?

미국 내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 하워드 진9.11 테러가 터진 다음에 이게 "이슬람 교도의 일부의 '약간의 동요'인가?" 라고 한탄에 가까운 비판을 했다. 반면에 존 미어샤이머를 비롯한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은 그렇다. 라고 답했다.[38]

10. 관련 대중 매체

10.1. 영화

  • 아프간 침공(영화)(Afghan breakdown) - 1990년에 제작된 러시아 영화. 상당히 반전적이고 자국비판적인 작품이다.
  • 와치맨 - 미국 쪽에서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소련이 침략전쟁을 시작하는 신호탄으로 보며, 핵전쟁까지 불러올 절대 절명의 위기로 인식하고 있다.
  • 제9중대 - 위에서 언급된 3234 고지전을 소재로 한 러시아 전쟁영화.
  • 람보 3 - 아예 마지막에 아프가니스탄의 전사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고 언급한다. 개봉 시점이 1988년이긴 하지만, 21세기 미국의 행보를 보면 무척 황당한 대사.
  • 비스트 - 당시 소련군 전차 승무원들과 무자헤딘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 전쟁영화.
  • 007 리빙 데이라이트 - 아프간에서 소련군과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아프간 의상을 입은 제임스 본드를 볼 수 있다.
  • 찰리 윌슨의 전쟁 - 소련의 발목을 잡기 위해 무자헤딘을 지원한 미국의 꼼수를 다룬 미국 정치영화. 단 미국 영화이기 때문에 전후 지원에 무심한 모습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미국의 지원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 라스트배틀(Leaving Afghanistan) - 2019년 9월 6일에 개봉한 러시아 전쟁영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기 일보 직전에 임무를 수행하다가 스팅어에 의해 격추당하여 무자헤딘의 포로로 잡힌 전투기 조종사를 구하러 투입된 스페츠나츠 대원들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10.2. 소설

  • 헛된 기다림 - 나딤 아슬람의 소설. 작품 속에 나오는 러시아인 주인공 리라의 남동생인 베네딕트가 이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10.3. 논픽션

  • 아연 소년들 -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대표작. 소련-아프간전 당시 전사한 병사들의 유품이 아연으로 만든 박스에 넣어져 본가로 보내지는 것에서 제목을 지었다. 당시 18세 어린 나이에 징병되어 아프간에서 지옥을 겪고 돌아온 소년들과 그 가족들이 겪는 PTSD에 대해 다룬 책이다.

10.4. 라이트노벨&만화&애니매이션

  • 블랙라군 - 러시아 레드 마피아 조직 호텔 모스크바의 로아나프라 지부의 조직원 대부분이 이 전쟁의 귀환병 출신이다. 지부의 보스를 맡고있는 여보스는 이 전쟁에서 대위로 임관, 공수군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화려한 전공을 올렸다.
  • 풀 메탈 패닉 - 작품 내 스토리는 이 전쟁을 기점으로 현실 역사와 달라진다. 소련이 진땀을 흘린 것까지는 실제역사와 같으나, 타임 패러독스로 인해 개발된 신무기의 등장으로 전략적인 우세를 잡은 소련이 승리하게 되었다.[39] 참고로 주인공 사가라 소스케가 어렸을 적에는, 이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이었다.[40] 애니메이션 상영 당시에는 아프가니스탄의 명칭만 헤르마디스탄으로 바뀌어 나온다.[41]

10.5. 게임

  •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2 - 'Old Wounds'라는 미션에 등장. 프랭크 우즈, 알렉스 메이슨, 제이슨 허드슨, 톈 자오가 무자헤딘을 지원한다. 말을 탄다는 점에서 꽤나 재미있는 부분. 더불어 스팅어를 한 손으로 들고 말을 타고 다니는 전투민족 메이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메탈기어 솔리드 V 더 팬텀 페인 - 작중 초반부 배경이 1984년 한창 전쟁 중이던 아프가니스탄[42]이다. 여기서 다이아몬드 독스는 소련군에 맞서 싸우는 무자헤딘을 지원해달라는 CIA의 의뢰를 받기도 하고, 게다가 다른 PMC세력들은 소련을 직접적으로 적대하기에 꺼리는 것을 카즈히라 밀러는 다이아몬드 독스를 더욱 강하게 만들 기회라 여기고 개입한다. 메인미션 중에 꿀벌은 어디에 잠들어 있는가 라는 미션이 있는데 CIA가 무자헤딘에게 지원해준 허니비가 소련군에게 넘어가버리고 그걸 다시 회수해서 와야만 한다.
  • 월드 인 컨플릭트 - 확장팩 '소비에트 어설트'로 추가된 소련 측 싱글 캠페인 등장인물인 블라디미르 올로프스키가 이 전쟁에 참전했던 적이 있는 노련한 사령관이라는 설정이다. 하지만 그 지옥도와 같았던 80년대 말 대전쟁기의 아프간에 직접 있었던 인물인 만큼 전쟁의 참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그 결과...[스포일러]
  • 황혼의 투쟁 - 중기 냉전. 미국의 3Ops 카드다. 위에 나온 'bear trap'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소련은 매 턴마다 2Ops 이상의 카드를 버리고 주사위를 굴려 1~4가 나올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 버릴 카드가 없는 경우 점수 카드를 쓸 수는 있다.

10.6. 노래

전쟁 당시 소련은 록 커뮤니티인 투소프카[44]를 중심으로 록 음악이 융성하던 시절인데, 이 시절 뮤지션들은 징병을 피하기 위해 온갖 이유를 대며 빠졌다고 한다[45]. 레닌그라드 출신 음악가인 빅토르 초이와 마이크 나우멘코를 주인공으로 삼은 레토에서도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46] 당연히 이미지는 매우 나쁘며, 다뤘다 하면 전쟁을 까는 반전 노래다.

또한 이 시기 소련군에서는 사가가 융성하기 시작했는데, 아프간 현지의 소련군들이 전쟁의 애환을 담은 사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이러한 사가를 부르는 그룹이 아프간 현지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그룹이 밑에 후술되는 푸른 베레(Голубый береты)이다.

  • 아프간전 당시 아프간 현지에서 활동하던 소련군 사가 그룹 '카스카트'(Каскад)의 앨범 '기억하라 동료들이여'(Вспомним, Ребята)
  • 혈액형(키노) - 말이 필요없는 레전드급 반전가요. 다만 가사를 쓴 빅토르 초이의 발언을 고려해 보았을 때 반전가요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긴 하다. 해당 문서 참고.
  • 헤라트 왈츠(Гератский вальс) - 러시아의 가수 스타스 유르코(Стас Юрко)가 부른 소련-아프간 전쟁을 다룬 노래.

  • Hill 3234 - 역사적인 전쟁을 주로 다루는 스웨덴의 헤비메탈 밴드 사바톤이 2016년 내놓은 제9집 The Last Stand의 8번째 수록곡. 제9중대로 유명해진 3234고지 전투를 다루고 있다.

  • Who Will Save The World - 독일의 2인조 유로팝 밴드 모던 토킹이 1987년 11월 30일 발표한 앨범 'In The Garden of Venus'의 3번곡으로, 소련 병사들이 해당 곡을 사제 라디오로 들으면서 BTR-80을 타고 아프가니스탄을 달리는 모습이 미국 다큐[47]에 잡히면서 서방 측에서는 이 노래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상징하게 되었다. 해당 곡의 가사도 아들이 아버지에게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곳에서 병사들이 편지를 보냈다느니, 그 병사들이 '여기'로 자신들의 청춘을 불태우러 곧 올것이라느니, 하다가 결국 아버지에게 '나는 아직 죽기에 어려요' 라는 후렴구로 끝나서, 많은 소련 병사들이 이 곡에 대해 공감했다고 한다.[48]

  • ДДТ - Не стреляй(쏘지 마라!) - 소련 및 러시아의 유명 락밴드인 ДДТ가 1980년 부른 노래로, 밴드의 리더이자 작사/작곡을 담당했던 유리 셰프추크가 자신의 절친이자 아프간 전쟁의 첫날부터 참전했던 빅토르 탸핀(Виктор Тяпин)과 대화를 나누다 영감을 얻어 작곡한 곡이다.

  • 이런 훈장은 파는 게 아니다(Ордена не продаются) - 푸른 베레
    지옥을 겪고도 나라에서 던져준 건 훈장 하나인데, 그거나마 달고 다녔더니 모르는 노파한테서 '아버지 돈으로 놀고먹는 젊은이 주제에[50] 어디서 훈장 하나 사서 으스대고 다니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고 타박을 받은 한 참전자의 노래. 그렇다고 가사 내용처럼 아프간전 참전 사실을 밝힐 수도 없었던 게, 2000년대 초반까지는 러시아 내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참전자들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나빠 참전자라는 사실을 밝히면 욕을 얻어먹어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당시 러시아인의 증언). 다행히 최근 들어서는 이들 또한 높으신 분들의 희생양이라는 등 시선이 그나마 호전되었다고 한다.
  • 당신들이 우릴 여기에 보냈다(Вы нас туда послали) - 위의 곡들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사람들의 노래라면 이 노래는 당시 VDV를 전역한 군인들이 모여서 만든 밴드인 '푸른 베레'의 곡이다. 해당 곡은 소련 민중의 지지를 얻어 군 수뇌부가 전쟁을 일으켰는데 정작 전쟁이 일어나고 난 뒤에 민중들은 아프간 전쟁을 멈추라고 하고 군 수뇌부는 침묵하며, 오히려 전쟁에 끌려간 장병들이 온갖 쌍욕들과 부조리에 대면하는 것을 가사를 통해서 풍자하는 것이 일품.
  • 철학쟁이(Философ) - 위에서 언급된 '푸른 베레'가 부른 곡이지만 정규 앨범엔 넣어지지 않은 곡이다[51]. 모스크바의 사무실에 앉아 병사들에 무관심한 지휘부와, 수많은 기자들의 물음에 우리는 명령대로 했다고 하자 기자들은 1940년의 독일군과 다를게 없는 살인자들이라며 비난하고, 그러한 비난에 보호 하나 없이 노출된 장병들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는 곡이다.

더 추가 바람.


  1. [1] 단일 집단이 아니라 하위 분파가 매우 다양하다. 크게 수니파, 시아파, 마오주의파로 나뉜다.
  2. [2] 중국은 마오주의파 지원, 이란은 시아파 지원, 그 외의 국가들은 수니파 지원.
  3. [3] 연 투입 누적인원은 620,000명
  4. [4] 소련인들은 아프간 전쟁 초반에는 정말로 이 전쟁을 혁명을 전파하기 위한 거룩한 전쟁으로 생각했다. 아프간 공산주의자들은 한때 쿠바의 혁명가들과도 같은 사람들로 추켜세워졌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그런 분위기는 사라졌다.
  5. [5] 레베디는 소련 해체 후 정계에 입문하여 1996년 대선에서 옐친을 지지한 공로로 국가안보위 총서기에 임명되었지만, 자신의 입지에 위협을 느낀 옐친에 의해 해임되었다. 이후 2002년 주지사로 재직하던 중 항공기 사고로 52세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일설에는 그와 포지션이 겹치고(KGB 요원 대 장성), 연배도 비슷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푸틴은 1952년생으로 레베디보다 2살 아래)의 라이벌 제거였다는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6. [6] 더 웃긴 것은 아민 반대파에게 이런 소문을 내라고 한 것은 KGB였다. 아민을 압박하여 아프간 공산화를 독촉할 생각이었는데 지들이 낸 백색선전을 인지부조화를 일으켜 사실로 믿어버린 셈.
  7. [7] 사실 아민은 소련군이 쳐들어왔을 때에도 적이 소련군인 줄 모르고 "소련군에게 도움을 청해라!"라고 할 정도로 친소파였다.
  8. [8]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SDI 계획으로 촉발된 미국과의 군비경쟁, 아르메니아 대지진과 함께 소련 붕괴의 직접적인 4대 요인으로 꼽힌다.#
  9. [9] 풀숲이 우거진 한국의 산악지형과는 많이 다르다.
  10. [10] 내각 총리
  11. [11] 1979년 3월 29일, 코시긴 의장과 타라키 대통령간의 회담 중 일어난 발언이었다. http://www.stoletie.ru/territoriya_istorii/mogli_li_my_pobedit_v_afgane_2011-01-11.htm
  12. [12] 여기서부터 문제가 되었다. 지도해줄 국가가 없다면 통제가 풀려난 무장단체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그래서 훗날 상임이사국인 중국, 영국, 미국, 러시아가 타 국가에 전쟁선포 하고 승리한 뒤 경제재재만 했으면 했지, 광신적인 ISIS를 제외하면 정권까지 박살내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미국이 카다피와 후세인을 몰아낸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지만.
  13. [13] 전차는 소련군 참모부의 '설마 저항세력들이 대전차 무기를 사용하겠냐'는 안일한 판단으로 고작 T-62가 투입되었으나 현실은 시궁창. 이는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 게릴라들이 미군을 상대로 대전차 무기를 적극 사용하는 등 이미 대전차 무기 체계가 광범위하게 확산된 점을 간과한 것이다.
  14. [14] 소련-아프간 전쟁 당시 아프간 무자헤딘들은 자국이나 파키스탄에서 들여온 무기들로 싸웠다. 대부분의 무기들이 2차대전 때 사용된 영국, 소련, 나치 독일제 무기가 많았다.
  15. [15] 그러나 이 작전도 전술적으로는 몰라도 전략적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16. [16] 카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라그만 주(Laghman Province) 지역이다.
  17. [17] 해군Yak-38STOVL기라는 특성을 활용해 활주로가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도 잘 운용해보려 했으나, 기체 자체의 한계로 포기하고 금방 철수했다.
  18. [18] 종전 후 미국이 아프간에게 돈을 주고 스팅어를 다시 돌려 받았으나 받은 양은 전체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했다. 남은 스팅어는 아프가니스탄에 남아있었으나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선 쓰이지 않았다. 미사일 유도에 필요한 적외선 탐색기가 2001년 즈음에는 수명을 넘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이나 서독, 중국 등 다른 나라가 준 무기들(M16 소총, H&K G3, 중국제 무기들)은 미군들을 공격하는데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이러다보니 소련은 서방이 문제를 악화시킨다며 반발했다.
  19. [19] 베트남도 친소정책을 펼치고 캄보디아에 괴뢰정부를 세웠지만 아프간까지 가서 무슬림들까지 신경 곤두세우게 할 명분이 없었다.
  20. [20] 2차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를 건국한 국부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긴 했어도 일방적으로 소련을 추종하는 걸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걸었다. 때문에 코민포름바르샤바 조약기구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미국, 프랑스 등 서방국가들과도 관계가 무난했다. 티토주의라고 불리던 유고슬라비아의 독자노선은 1980년 티토가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21. [21] 카불의 친소 정권은 주요 도로만 간신히 통제할 정도였다. 사실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미군도 비슷한 상황이긴 하다.
  22. [22] Прощай. 발음은 쁘라샤이. 강세가 а에 오기 때문에 о는 발음이 약화되어 ㅏ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23. [23] Я Вернулься. Мама! 야 볘르눌쌰, 마마! 라고 발음한다.
  24. [24] 실제로 당시 소련의 전설적인 록 밴드 키노의 리더 빅토르 최도 반전 음악을 발표했다. 후술하겠지만, 소련 록의 부흥 역시 이런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와 함께한다.
  25. [25] 이는 베트남 전쟁 전후 미국의 사회상과 비슷하다. 실제 베트남전 말기부터 마약중독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지미 카터 행정부 시기가 되면 미국인의 최소 10% 이상이 중증의 마약중독자라는 충격적인 통계가 나오기도 한다. 그외에 참전군인들의 상당수가 귀국후에 알코올 의존증, PTSD 등으로 사회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빈민층으로 전락한 일부는 각종 흉악범죄를 일으켜서 사회를 불안하게 하였다.
  26. [26] 탈영하거나 낙오된 이들 중 일부는 아프간인 사회에 동화되어 아직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2013년에 그런 병사들 중 한명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관련 링크(1), 관련 링크(2)
  27. [27] 2011년 8월에는 미군 70명이 전사했다.
  28. [28] AC-130, 무인정찰기, 토마호크, 향상된 방탄복, 피카티니 레일과 광학장비를 장착한 개인화기, 80년대라면 죽었을 병사를 급하게 후방으로 수송해서 팔다리를 절단하는 선에서 살려놓기 등.
  29. [29] 무자헤딘은 서방세계로부터 군사 고문단과 물자를 지원받았고, 규모 또한 20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반면 탈레반과 알 카에다, IS는 테러 지원국에 대한 국제적 감시와 제제, 미군의 집요한 공격 때문에 군사 고문단은 커녕 물자의 수급조차 원활하지 않고 규모는 5만명 선으로 추정된다.
  30. [30] 1980년대라는 시대상을 감안해보면 소련군이 입은 피해는 많은 것은 아니다. 전쟁 10년동안 소련군 1만 5천명이 전사했는데, 미군도 이라크 전쟁 첫 5년 동안 4,000명 이상 전사하였고 아프간 전쟁에서 ISAF는 11년 동안 3,300명이(이중 미군은 2,200명 정도) 전사했다. 2010년 6월에는 103명이 전사하였다(2010년 7월 미군 65명 전사)[27] (이라크는 2008년 이후 미군이 철군하면서 전사자가 감소하였지만 아프간은 2009년 이후 전사자가 증가하였다). ISAF가 80년대에 비해 발전된 보급/의료 지원체계[28]를 갖췄으며 ISAF의 적 탈레반은 무자헤딘보다 대체로 규모와 조직력이 떨어진다는 점[29]을 감안할 때 소련군이 아프간과 이라크의 미군에 비해 열세한 전과를 올린 건 아니다. 시대보정을 한다면 우세한 전과를 올렸다고 볼 수도 있다. 소련의 아프간 전쟁이나 미군의 아프간, 이라크 전쟁은 걸프 전쟁처럼 치고 빠지는 전쟁이 아니었다. 소련군도 하피줄라 아민 정권만 붕괴시키고 빠졌으면 전사자가 14명이었을 것이다.
  31. [31] 니키타 흐루쇼프의 실각, 유리 안드로포프의 집권과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선출조차 항상 에 대한 얘기가 함께 나온다.
  32. [32] 일단 전쟁에서는 승리했어도 소련군이 무자헤딘보다 압도적인 무장을 갖추고 있어서 전투에서는 지기만 했다. 어떤 곳에서는 소련군 공수부대 39명에 무자헤딘 400여 명 중 200여 명이 전사하여 쓸려나가는 대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3234 고지 전투이다. 러시아에서 제9중대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단 3234 고지 전투에서 소련 공수부대 6명이 전사하고 28명이 부상하는 등 소련 측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33. [33] 몽골의 침공으로 240여 년동안 지배받은 역사를 러시아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아돌프 히틀러도 물리친 러시아가 당한 유일한 굴욕이라며.
  34. [34] 당시 미국인 교수들이 소련의 아프간 침공 결정을 대놓고 비웃는게 MBC 뉴스데스크로 중계되기도 했다.
  35. [35] 참가한 일부 국가도 있었지만, 국기 대신 올림픽기를 보내 이 대회 참가가 개인적인 것이라는 점을 명시했다.
  36. [36]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는 제외. 유고슬라비아는 비동맹세력의 맹주이며 루마니아는 탈소련 정책 펼쳤기 때문에 참가하였다.
  37. [37] 레스터 그로우의 산맥을 넘은 불곰 中
  38. [38] 이런 식으로 따지면 1979-89년의 아프간 침공 유도와 무자헤딘에 대한 지원보다 걸프 전쟁이 9.11 테러의 훨씬 직접적인 요인이다. 걸프전을 기점으로 미군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성지로 여겨지는 사우디 아라비아에 주둔하게 되었고, 이에 격분한 오사마 빈 라덴알 카에다를 조직해 미국에 대한 테러에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걸프 전쟁은 미국 입장에서 중동의 세력균형 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전쟁이었다. 이라크의 중동 현상변경 시도조차 이럴진대 미국이 수만발의 핵폭탄으로 언제든 수십억명을 살상하고 세계를 멸망시킬 능력을 가진 상대를 여객기를 훔쳐서 수천명을 죽이는 것이 한계인 상대보다 덜 중요시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핵폭탄으로 수십억 명을 살상할 능력을 지닌 상대 소련은 나라 이름만 러시아로 바꾸고 좀 약해지긴 했어도 여전하다. 오히려 국제정치학에서 많은 현실주의자(Realist)들은 소련과의 냉전체제(Bipolar)는 최소한의 규범과 상호공존을 상정하는 만큼, 현재(Unipolar)와 같은 각종 테러단체들이 난무하는 상황보다 더 안정적이고 긍정적이라는 분석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냉전 시절의 민간인들은 이렇게 빈번한 테러에 휘말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우발적 핵전쟁의 공포로 인류 멸망의 위기에 시달렸을 뿐이지.
  39. [39] 당시 신중한 강경파였던 알크스니스를 암살할 정도로 우세한 무자헤딘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했지만 이는 소련군 특수부대에 의해 훈련받은 친소 병력에 의한 공격이었다. 또한 당시 정보에 따르면 암슬레이브가 대량생산에 들어갈 정도였다.
  40. [40] 때문에 일본산 창작물 주인공 중 드물게도 무슬림이다.
  41. [41] 이는 당시 9.11테러사건으로 인해 바뀐 설정이었다. 참고로 하이잭 사건의 배경으로 나오는 북한도 애니메이션에서는 한카 자치주로 바뀌어 나온다.
  42. [42] 하지만, 게임 내의 맵은 요르단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코지마 히데오가 라디오 방송 중에 밝혔다...
  43. [스포일러] 43.1 해당 미션에서 조카이자 휘하 장교였던 니콜라이 말라셴코에게 살해당한다. 자세한 사항은 각각의 항목 참고 바람.
  44. [44] 정확히 말해 투소프카(Tusovka)는 반문화(counterculture)를 의미한다.
  45. [45] 그 예를 들자면, 빅토르 초이의 경우 가짜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고 우겨 약 한 달 정도 정신병원에 들어갔다고 한다(원래 2주일 정도만 들어가 있으려고 했는데 여러 사정이 거쳐 한 달로 연장되었다고 한다). 특히 초이의 경우 "동양인은 더 징병당하기 쉽다"라는 진위 불명의 소문까지 돌았기에...
  46. [46] 중간에 신체 검사 장면이 나오는데, 검사받는 아들에게 밖에 있던 어머니가 '아프가니스탄은 절대 안 돼!'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에도 전쟁에 대한 여론이 개판이었다는걸 보여주는 장면.
  47. [47] 자막 버전.
  48. [48] 사실 해당 곡의 출시 시기나 가사로 보았을 때, 아프간에 파병된 소련 병사들을 대변해 만든 곡이라는 말이 있어서 그 시선대로라면 현장에서의 소련 병사들이 공감할 법하다는 의견이 있다.
  49. [49] 'PTSD'를 의미하는 러시아의 숙어. 유래는 당연히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50. [50] 노파에게 있어 '전쟁 참전자'란 독소전쟁 참전자를 의미하는데, 청년의 나이로 보아하니 절대로 독소전쟁 참전자는 아니기 때문.
  51. [51] 이후 연주한 적이 없어, 음원은 사실상 위의 영상이 유일한데 90년대 VHS를 변환한 거라 가사가 뭉개져 들리는 등, 질이 좋은 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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