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

작위

왕세자(王世子)

시호

소현(昭顯)

이(李)

왕(汪)

세자 책봉

1625년(인조 3년)

생몰년

1612년 2월 5일 ~ 1645년 5월 21일 [1]

1. 개요
2. 병자호란 이전
3. 병자호란 후, 포로 시기
3.1. 아버지와의 갈등
4. 귀국 준비, 그리고 기구한 운명을 향해
5. 귀국과 의문의 죽음(독살설)
6. 사후
7. 자녀
9. 오늘날의 소현세자
9.1. 대중매체
10. 관련 문서

1. 개요

昭顯世子

1612~1645

인조인열왕후의 장남이자, 효종인평대군의 형이다.

2. 병자호란 이전

1612년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2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반정이 성공함으로서 하루 아침에 원자가 되었다. 보통 아버지가 세자를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오를 경우 자신의 장남을 바로 형식상 원자로 삼았다가 세자로 봉하는데, 소현세자의 경우 한참 동안 세자에 봉해지지 못하다가 그 후 1625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2]

그 후 불과 2년 만에 정묘호란이 발발한다. 이괄의 난으로 북도 방어력이 극히 약화된 상황에서 능한산성(凌漢山城)[3]까지 후금군에게 빼앗기자 인조는 분조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고 사헌부에서는 도성을 버리지 말고 근왕군을 이끌어 막자고 주장했으나 인조 자신은 '논한 것들이 실질성이 없다(所論, 太半失實矣)' 고 답하고는 자신은 강도(江都)로 향하고 세자는 분조[4]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가게 했다. 전란이 끝난 그해 말 강석기의 차녀와 가례를 올리게 된다. 이 시기의 기록물로 '소현동궁일기(昭顯東宮日記)'와 '소현분조일기(昭顯分朝日記)'가 있는데 당시 조선의 군 체계와 왕세자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侍講院)이 사용한 교재 및 교육 체계 등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1636년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치욕적으로 패배하면서 동생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묵던(Mukden, 현재의 랴오닝성 선양시)으로 끌려갔다.

여담으로 정묘호란이 끝난 직후, 시강원은 소현세자에게 엄청난 양의 공부를 시켰는데 인조 6년(1628년)에 있었던 조강례(朝講禮)[5]에서 소현세자가 강학한 책을 30번 읽는다고 하자 좌빈객[6]이었던 김상용이 '100번을 읽어야 그 뜻을 통달한다'고 답했고 인조 7년 조강례에서는 소현세자가 새로 배운 건 30번, 예전에 배운 건 20번 정도 읽는다고 하자 우부빈객 장유가 '읽는 양을 2배(!)로 늘리라'고 했다. 같은 해 회강례(會講禮)[7]에서는 김류가 민간의 선비들은 하루에 읽는 횟수가 기본 100회이고 70회 밑으로 내려가지 않으니 그러니 '새로 배운 것은 60번, 전에 배운 건 40번 읽으라'고 진언했다. 즉, 하루에 100번씩 읽는 게 당시 세자의 '기본' 학습이었던 셈. 그리고 소현세자가 포로로서 묵던으로 이동할 때 시강원 인원만 300명 정도가 동행했고, 정축하성 이후 인조는 세자가 북으로 간 탓에 시강원과 동궁의 호위를 맡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를 줄였다.[8]

3. 병자호란 후, 포로 시기

청나라 고관들과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으며 인맥을 쌓아나갔고 그를 통해 얻은 고급 정보를 몰래 인조에게 알려줘서 대비하게 하기도 했다.[9]

또 인질로 있으면서도 죽쳐 있지 않고, 아내 강빈의 권유로 묵던 근처에 농장을 만들고 끌려온 조선인들을 노예 시장에서 구출해내서 농장에서 일하게 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여기서 얻은 곡물로 장사를 하니 세자의 거처가 마치 시장과도 같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상당한 재물을 얻었고 이런 능력만으로도 보건대 소현세자의 상업적 능력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나라 측에선 툭하면 세자에게 외교적 현안, 특히 명나라와의 밀교 등에 대한 걸 따져 묻곤 했는데, 그때마다 세자는 마치 외교 훈련이라도 받은 듯이 능숙하게 답변하곤 했다고 한다.[10] 또한 횡의 사건[11] 때는 도르곤 등을 찾아 평안 감사, 선사포 첨사, 의주 부윤, 예조 참판 등 청나라에 끌려 온 수많은 조선인들이 목이 붙은 채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게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이러한 소현세자의 행보는 점점 인조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세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에서 인조를 길들이는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인조가 조금이라도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청나라에서는 "조선 왕(인조)은 너의 세자를 잊었느냐? 너의 아들도 잊었느냐? 을 잊었는가? 짐은 나한테 무릎 꿇던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장들이 날아오곤 했으며, 항복한 명나라 문인 범문정이 "조선 왕을 끌어내고 소현을 세웠으면 나았을 거"란 말을 하기도 했으며, 항복 구절에 "유고시 아들이 대신한다"는 문구를 넣었다. 물론 종합해보면 청나라의 협박은 소현세자 뿐만 아니라 봉림대군도 포함되는 말들이었지만 인조는 장자 상속이 기본 원칙인 조선의 왕이었고 자연히 소현세자가 인조의 정적이 되었다.

3.1. 아버지와의 갈등

흔히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유능한 아들에 대한 못난 아버지의 시기심으로 여기는 풍조가 강하지만, 이들 부자의 불화는 아버지의 인격이나 아들의 자질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12] 정묘호란 & 병자호란 & 삼전도의 굴욕으로 인조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세자가 아버지를 위협하는 정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조 - 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대의 선조 - 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재야 사림이나 조정 중신들이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하는, 다른 때 같으면 상상도 못할 상황에 처했다. 이때 선위를 주장한 이들이 대체자로 낙점한 게 세자 광해군이었다. 게다가 임란 이후 집권 여당이 광해군 과잉 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강경파 북인이었다. 자연히 선조는 왕 노릇 계속하기 위해[13] 광해군을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래서 어린 영창대군과 탁소북(濁小北)을 이용했다.

인조는 그보다 더 심각했다. 파천했지만 잡히진 않은 선조와 달리, 외적에게 붙잡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권위가 바닥을 쳤다. 선조를 위협한 건 그래도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내부의 정치 권력이었는데, 인조는 조선을 침략해 짓밟은 거대한 외세가 세자를 영향력 아래 두고 압박해오고 있었다.[14] 왕조 국가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이런식으로 정적이 되는 사례는 고대부터 무척 흔하고, 초성왕의 예처럼 둘 중 한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예도 적지않다.

또한 이 당시 인조의 입장에서는, 인조 자신의 왕권도 왕권이지만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 청에서 집권 정당성으로 얻어 즉위하는 조선 왕의 출현을 경계해야 했다. 고려 무신정권명종은 무신들이 옹립했기에, 집권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 경대승이 사망하자 스스로 무신 이의민을 정계에 끌어들였다. 원 간섭기 고려 왕들은 원나라 황실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집권 정당성을 얻었기에, 원이 약해지기 전까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원 간섭기 고려를 타국 역사학계에선 원의 속국으로 간주하는 이유가 왕조 국가에서 왕이 원의 의중에 따라 갈아치워지고 원에게서 집권 정당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청이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즉위시킨다면, 실질적 영향력이 없는 사후 승인에 머물렀던 명의 책봉과는 차원이 다른 압력이 조선 왕실에 가해진다. 청나라의 힘으로 즉위해 청에서 집권 정당성을 얻는 조선 왕이 탄생하는 것이며, 이는 그의 가계를 따라 이어질 것이니 청에 대한 종속이 심해질 것을 걱정해야 했다. 물론 역사에서 그런일은 없었지만, 소현세자가 심양에 있던 이 시기 인조 입장에서는 충분히 걱정할만한 일이었다.

만약 소현세자가 외아들이었다면 좋든 싫든 어쩔수 없이 데려가야 했겠지만, 인조에겐 신체 건강한 차자 봉림대군이 있었다. 영창대군이 너무 어려서 대안이 없어 견제만 할뿐 광해군의 세자 지위를 흔들진 않았던 선조와의 결정적 차이점이었다.

4. 귀국 준비, 그리고 기구한 운명을 향해

인조는 자연스럽게 세자를 꺼리기 시작했다. 세자가 영구귀국 전 2차례 임시귀국을 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삼전도 이후 3년 만에 소현세자는 1차 귀국을 하게 되는데, 청에 보낸 사신이 "세자가 3년이나 청에 있었으니 고국 구경이나 시켜달라"며 독단적으로 요구했고 청이 원손과 인평대군을 볼모로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승낙한다. 독단으로 진행된 이 일로 원손까지 청의 손아귀에 집어넣게 된 인조는, 격분해 사신을 유배보낸다. 그리고 환영 행사도 치르지 않았다.

2차 임시귀국 때는 의심이 더욱 심해져 있었다. "세자가 여기 오래 있었으니 또 한번 보내주겠다"며 일시귀국시킨 것을 영구귀국으로 잘못 이해하고 중한 것은 버리고 작은 것은 취하니 이 어찌 된 영문인가? 저들이 갑자기 호의를 보이니 내 알 수가 없구나. 조그만 일에도 의심이 생긴다. 한번 화살에 상처입은 매란 으레 이런 것이다 라면서 노골적으로 의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의심은 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친정 아버지, 그러니까 인조의 사돈이자 소현세자의 장인인 강석기가 죽자 김자점을 비롯한 삼정승이 세자빈이 빈소를 찾아 곡을 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것으로 표면화된다. 나중에 강빈의 사사에 한몫을 했던 김자점조차 당황해서 "빈궁이 부친상을 당해서 가보라고 청나라에서 보내줬는데, 못보게 하면 청나라 사람들이 의심을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다시금 청했으나 무시했고 세자가 청으로 갈 동안 찾아보지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심기원의 역모까지 터진다. 반정공신 심기원이 인조를 상왕에 앉히고 세자를 왕위에 앉혀 반정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는데 세자가 귀국한 걸 보고 왕이 될 재목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회은군[15]으로 바꾸고 이것저것 꾸미다 발각된 사건인데 이로 인해 세자에 대한 경계심은 더욱 강해진다.

5. 귀국과 의문의 죽음(독살설)

청나라가 북경에 입궐하고 중원 제패를 완수한 1645년, 청나라의 실권자인 섭정왕 도르곤[16]은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을 허락했다. 이에 소현세자는 강빈과 함께 귀국했다.

이후의 행적을 보면 인조는 이미 후계자 교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년 만에 귀국한 세자에게 어떠한 위로의 말도, 귀국 축하 연회도, 치하도 하지 않았다. 죽기 전 3달 동안 세자에 대한 기사라곤 당대의 대 문장가 이식이 세자의 귀환을 축하하는 교서를 발표했다는 것뿐이다. 노골적인 박대의 분위기 속에 소현세자는 병을 얻었고, 결국 귀국한 지 3달도 못 되어 그 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소현세자의 죽음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때문에 소현세자가 독살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국가의 공적 역사 기록이라 할수 있는 실록에서까지도 소현세자의 시체가 매우 심하게 검게 변해 있었더라는 이야기를 적어, 소현세자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실록의 기록을 적자면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가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라고 쓰여 있다.# (독살설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이 죽음에는 인조가 직접 개입했으리란 말도 있고, 방조했다는 해석도 있다.)

특히 인조는 소현세자의 처남들인 강문명 등이 소현세자의 장례 일정이 원손에게 불리한 날이니 바꿔달라고 하자 갑자기 "그렇게 잘 안다면 어디 네놈이 한번 날을 잡아라!"라고 소리지르기도 했다. 지관들이 정한 장지도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바꿨는데, 지관들이 거긴 흉지라고 수군거리다가 곤장을 맞고 국문당하기도 했다. 장례조차도 "사대부의 예면 족하다"는 이유로 너무나도 초라하게 치러져서, 신하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독살이 있고 없고 떠나서, 세자에게 애정이 없었던 것은 분명해보인다. 하지만 볼모로 잡혀갈 때는 세자가 추위에 약하니 온돌방에 재워달라 부탁할 정도였다.

이덕일이 제시한 그 많은 독살설 중에 실록 등 사료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고, 무엇보다 인조의 행동 때문에 단종, 효장세자, 고종과 더불어 연구자들도 그 가능성에 동의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게 사실인 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실제로는 글자 그대로 '설'일 뿐이니 섣불리 사실로 기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증세에 대한 관찰기사 이상을 남길수가 없기 때문에, 정말로 독살을 당했다 하더라도 현재 와서는 가능성이 있다 이상의 확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치적 관점과 인조의 전후 행보를 보자면 인조가 세자를 제거했거나 세자의 죽음과 어떤 형태로든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어보이지만, 순수하게 의학적 관점에서도 볼땐 그냥 건강이 안 좋던 사람이 실력 없는 의사를 만나 병이 도져 사망했고, 인조는 그저 그 상황을 이용했을 뿐일 수 있는 것이다.[17]

2017년 8월 28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칼럼에서, 이상곤 한의사는 세자빈성욕 때문에 소현세자가 죽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현종 즉위년 9월 5일의 실록을 보면, “아버지(인조)가 애통해하면서 세자의 죽음에 대해 강빈(세자빈)을 책망하기를 ‘이는 밤에 잠자리를 삼가지 않은 소치’라 하셨다.”라고 되있다는 것이다. 귀국 후 의관들이 세자에게 처방한 청폐탕, 이모영수탕, 시호지모탕 등을 처방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한다. 이 탕약들에 공통적으로 들어간 지모는 스태미나가 고갈돼 허열(虛熱)이 올라오는 ‘음허화동(陰虛火動)’ 증상을 치료하는 대표적 약재이기 때문. # 다만 이후 인조가 며느리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해보면 이후의 핑계일 가능성도 배제는 못하겠다.

야사에서는 소현세자가 인조에게 청나라에서 가져온 벼루를 자랑하자 분노한 인조가 소현세자의 머리에 벼루를 던졌고 이에 맞은 소현세자가 상처가 덧나서 죽어버렸다는 말이 있는데, 여느 야사가 그렇듯이 웃고 넘어가자.[18][19]

6. 사후

소현세자가 죽은 뒤 인조는 신체 건강한 차남 봉림 대군을 후계자로 세운다.[20] 이는 종법 질서에 맞지 않는 일이라서 논란이 생길 수 밖에 없었지만 아이들이 하나 같이 너무 어려서 현실주의적으로는 충분히 설득할만한 계승이었다. 사실 손자들이 어리지만 않았다면 차자를 세우는 것도 부담이 되니 고려를 해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 어렸고 인조는 나이가 지긋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인조 대에는 대동법을 비롯해 조선 왕조 후기 200년을 관통하는 제도개혁이 시작되는데 광해군의 폭정 + 두번의 호란 + 소빙기 + 개혁, 개정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점[21]으로 하나 하나가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국왕이 붕당도 세심하게 제어해야 한다. 어린아이를 왕위에 올리는건 둘째를 후계자로 삼는것과 비교해도 리스크가 적다고 하기 어려웠다. 소현세자와 인조 사이를 벌어지게 만든 원인제공자인 청 조차 소현세자의 아들들 보다는 봉림대군 계승에 찬성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실권자였던 섭정왕 도르곤의 의중이었는데 중국 본토에서 이런저런 국정이 산적한 가운데 나이 어린 왕이 즉위해서 평정한지 얼마되지 않은 후방의 조선에서 즉위하는 일을 반기지 않았다.

전술했듯 시간이 많지 않았던 인조는 굳이 이 문제로 지리한 설전을 벌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인조는 일말의 설득없이 왕의 권위와 모략으로 신하들의 반발을 찍어 눌렀다. 송준길 등이 소현세자의 아들을 왕세손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오히려 "소인배 놈들의 행태를 차마 볼수가 없다!!"고 길길이 날뛰며 욕을 퍼붓더니, 이시백, 이시방 형제, 김육 등 고위 대신들의 반대도 모두 무시하고 둘째 봉림대군을 세자로 만들었다. 이때 인조의 주장에 영합한 것이 김류와 김자점이었는데, 김류는 인조가 "원손은 영 못 써먹겠다!!"고 하자 "혹시 양녕대군 같으면 쫓아내야겠죠?"라고 한마디 거들었다가 원손을 가르쳤던 김육에게 "어린 원손이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하고 극딜을 당했다. 인조가 "원손이 멍청해서 안 되겠다!!"고 하자 "재강할 때 원손의 재능이 드러났거든요?"라고 다시 김육의 반발을 산다. 그러자 인조는 "한갓 총명함이 문제가 아니라 나이가 문제다. 내가 나이가 많아 어린 원손이 성장함을 지켜볼 수가 없다"고 억지를 부려서 원손의 승계를 뒤틀었고, 김자점이 신나서 왕에게 아부하여 조정의 논의를 결정지어 효종을 후계로 삼는다.

그렇게 효종 - 현종의 승계 라인을 결정지은 인조는 맏며느리 민회빈 강씨에게 화살을 돌렸다. 소현세자의 자식들, 특히 맏이 석철은 살아있으면 효종의 정통성을 위협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어려서 꼬투리 잡을게 없으니 며느리에게 화살을 돌렸다. 의도적으로 강빈을 박대하다 전복에 독을 탔다는 누명을 씌워 그녀의 궁녀들을 무고하고, 강빈이 그 일로 항의하자 건방지다는 둥 청나라에 있을 때 홍금적의를 지어 입고 난을 모의했다는 둥 신하들의 반대에도 각종 누명을 덮어 씌워 사사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와 강빈의 세 아들들도 죄인의 아들이 되어 어린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에 처해진다. 섬 생활을 이겨내지 못한 장남 석철과 차남 석린은 어린 나이에 연이어 병사한다.[22] 이들이 죽기 직전 소현세자 부부의 죽음을 전해들은 청은 용골대를 보내서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도로 데려가서 키우고 싶다"는 뜻을 전했는데 조선은 거절했다. 이는 친청파 조선왕을 육성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도 있다. 제주에서 죽은 소현세자의 두 아들도 "인조가 독살한"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이후 즉위한 효종 역시 형수인 민회빈 강씨를 '역강'(반역자 강씨라는 뜻)으로 비하하며, 조금이라도 강씨를 비호하고 억울함을 주장하는 신하들을 잡아 죽이는 등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런데 정작 효종 본인은 봉림대군 시절 때부터 소현세자 가족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터라, 조카인 소현세자의 아들들의 유배지를 조금씩 더 편안한 곳으로 옮겨 주다가 나중에는 아예 도성으로 불러다 살게 해주었다. 즉, 효종으로선 자신의 정통성 유지를 위해서 본심이 아니라고 가정해도 강씨를 비난해야 했던 것이고 이미 죽은 사람이라 강하게 비판한 것으로 추정된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서삼릉 내에 있는데 그 묘를 소경원(昭慶園)이라고 한다. 그나마 소경원이란 이름은 고종황제 때 붙여진 이름이다. 그 이전에는 소현묘라 불렸으며 정자각이나 석물 같은 것도 없었다. 다만 정자각은 한국전쟁 때 불타 초석만 남아 있다. 이 묘는 비공개라 들어가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소경원 구역이 농협 부지이기 때문. 단 아예 볼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서삼릉에 가면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아침 10시에 해설사의 인솔 하에 비공개 능역을 들어갈 수 있는데, 소경원을 답사하고 싶으면 이때 시간 맞춰서 서삼릉을 방문하면 된다. 또 근처의 군 부대에서 정훈교육 기간에 맞추어 단체 방문한다. 비공개 능역 답사 때 인종인성왕후의 능인 효릉과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도 돌아볼 수 있다.

참고로 인조는 소현세자 장례 이후 사망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소경원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7. 자녀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모두 3남 5녀를 두었다.

  • 경선군 이석철 : 제주도 유배 후 사망. 소현세자의 장남이기 때문에 경안군의 아들과 손자가 사후양자 제도를 통해 그의 대를 이었다.
  • 경완군 이석린 : 제주도 유배 후 사망.[23]
  • 경안군 이석견 : 제주도 - 강화도 - 교동도로 유배지를 옮겨다니다가 결국 방면되었다. 혼인한 지 6년 뒤인 22세에 요절한다.
  • 경숙 군주 : 구봉장에게 하가하여 1남을 두었다.
  • 경녕 군주 : 박태정에게 하가하여 5남 4녀를 두었다.
  • 경순 군주 : 소현세자의 자녀들 중 가장 장수하였으나(55세), 19세에 남편 변광보[24]가 사망하여 후손은 없다.
  •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사이에서 첫째, 둘째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요절한 딸이 2명 있으며, 승정원일기에 출생과 장례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세 아들 중 경안군 이석견만 후손을 남겼기 때문에[25] 소현세자의 남계 후손은 모두 경안군의 후손이다. 왕이 된 효종 직계가 갈수록 손이 귀해지다 끊어져 버린 것과 달리, 소현세자의 후손들은 4살짜리 아이가 8년에 걸친 섬에서의 귀양살이를 버텨내고 이후 여러차례 역모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음에도 끝까지 대를 이어 살아남았다. 자세한 것은 이석견 문서를 참고.

아들들은 왕위 계승권 때문에 역모에 휘말려 죽거나 불안한 삶을 살았다면, 남겨진 세 딸은 기록이 없지만 효종이 청나라에서 공주를 왕비로 시집보내라고 했지만 보내지 않고 몰래 결혼시켜 준 걸 볼 때 조카딸들을 나름대로 잘 대우해준 듯.[26] 조카딸들은 아무 위협이 안 되기 때문에 배려해준 것으로 보인다.

8. 천주교?

일단 조선인 포로쇄환이나 각종 외교적 현안에서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며 조선의 세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행동한 건 분명하다. 문제는 가톨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조선에 들여오려고 했다는 둥, 서구문물에 밝아 그가 왕이 되었으면 개방이 일찍 됐을 거라는 둥[28], 유교 체제의 한계를 깨달았다는 둥[29] 관련 논문이라도 한편 읽어보았을까 싶은 어거지가 정설인냥 대중에게 떠돌아다닌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광해군과 유사점이 있다. 물론 광해군처럼 엄청난 실책을 저질러 놓고도 가려진 건 아니지만.

소현세자와 친교를 나누고 그가 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아담 샬 신부는 예수회 소속으로 1619년 마카오에 상륙해 1623년 북경에 입성하였다. 1627~30년까지 서안에 파견되었던 것을 제외하면 1666년 사망할 때까지 북경에만 머물렀다.

그는 1622년부터 1658년까지 자신과 중국 가톨릭에 관련한 사건들을 적은 라틴어 회고록 <Historica Relatio>을 남겼다. 이 기록에서 만주인들이 조선 왕국을 점령하고 요동에 포로로 잡아온 '조선 왕'이 역법을 익히려고 조선 역관들을 대동해 찾아왔고 아담 샬 신부 자신은 이를 성심성의껏 도와주며 조선 왕과 우정을 쌓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역법과 기타 서학서는 물론 성상과 천주교 서적들을 선물했는데, 이에 감격한 조선 왕이 서신을 보내 "천주교의 교리를 널리 알리고 싶으니 선교사를 일행에 포함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잘못된 예식을 할까 두려워 성상은 그냥 돌려보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담 샬 신부는 성상을 돌려보낸 것을 겸양으로 생각하고 조선 왕의 환관 중 세례성사를 받은 이에게 교육을 시켜 성상을 다시 돌려보내자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회 선교사를 대동시켜 조선에 들여보내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조선에 들어갈 시기를 놓쳤다고 적었다.

1929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서 1672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출간된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을 발견한 일본인 학자 야마구치 마사유키(山口正之)는 해당 부분을 당시 천주교 경성대목구 제8대 교구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에게 프랑스어로 번역해 줄 것을 부탁해 연구를 시작했다. 야마구치는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에 나온 조선 왕이 실제론 소현세자였으며 아담 샬 신부가 이를 오인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오늘날까지 소현세자와 천주교의 관계를 설명할 때 거론되는 주장들을 폈다.

그러나 야마구치는 편지 부분만을 연구하고 그 뒤에 이어지는 아담 샬 신부의 회고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아 소현세자가 성상을 그냥 돌려보냈다고 주장했고 더 나아가 아담 샬이 성상을 지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세례성사를 받은 환관을 데려가 주십사 청원하고, 소현세자가 이를 허락할 뿐 아니라 오히려 유럽 선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해 명나라 출신 환관 이방조(李邦詔), 장삼외(張三畏), 유중림(劉仲林), 곡풍등(谷豊登), 두문방(竇文芳)과 궁녀들이 인조 23년에 2월 18일 세자를 따라서 한양에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오늘날 대중들에게 소현세자는 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들여오려 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 그[=세자]는 말하기를 ‘신부님의 동료들 가운데 한 분을 제가 모시고 가서 저와 제 백성들을 가르치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이 없다면 이 환관이 그 대신 어떤 모양으로든 대행할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 선교회 장상에게 예수회원 가운데서 어느 회원으로든지 조선 왕을 따라가도록 해 주십사고 간청했습니다. 필요하다면 나중에 다른 회원으로 대치할 계획으로 말입니다. 장상은 대답하기를 그런 일이라면 예수회 순찰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러나 순찰사에게 연락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호기를 놓쳤던 것입니다.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에는 아담 샬이 아니라 소현세자 쪽에서 선교사를 청하고 정 안 되면 환관을 선교사로 활용할 생각을 했고 이에 아담 샬 신부는 백방으로 손을 썼지만 윗선의 허락을 받지 못해 하지 못했다고 적혀있다. 야마구치의 연구는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과도 안 맞는 내용이 있다. 게다가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 자체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일말의 사전지식도 없던 순치제예수 생애 화집을 보고 우리의 성현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대한 분이라며 경배를 드리고, 황후가 예수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적어 둔 진실성에 문제가 많은 기록이다. 아담 샬 신부의 말만 믿으면 순치제도 반쯤 기독교인이다.

일단 1644년 아담 샬 신부의 행적을 살펴보자. 이해는 격변의 한 해였다. 1644년(순치 원년) 1월 반란군을 규합한 이자성(李自成)은 장안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순(順), 연호를 영창(永昌)으로 정했다. 그 해 3월 18일 이자성의 군대는 북경을 점령하고 노략질하였다. 그러나 이자성의 천하는 예친왕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에 의해 40일만에 끝이났다. 오삼계의 협조로 산해관을 돌파한 청군은 5월 1일 청군이 북경에 입성해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청군은 자신들의 입주를 위해 북경의 중, 동, 서부 구역의 한족(漢族)들에게 사흘 이내에 북, 남부 지역으로 이주할 것을 명령하였다.

5월 11일 아담 샬 신부는 자신은 명 숭정제 2년부터 북경에 거주하는 유럽 선교사로서 성당과 이에 딸린 성구 및 3천권 이상의 서적을 선교 목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그 밖에 대량의 인쇄용 판본과 천문 기구, 그리고 책력에 필요한 140여권의 서적을 보유하고 있어서 사흘 이내의 이주는 불가능하다고 설명하고 따라서 북경 내에 거주하며 선교와 책력 제작을 계속하기를 청원하였다. 이에 2명의 관리들이 선교원에 와서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이튿날 아담 샬 신부의 청원을 허락하는 청나라 황제의 증서가 교부되었다.

그 직후 아담 샬 신부는 순치 2년을 위한 책력을 만들었고, 그 해 8월 1일에 있을 일식도 예보하였다. 이 날의 일식은 전통적인 대통력(大統曆)과 이슬람식 회회력(回回曆)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아담 샬 신부의 주가는 올라갔다. 같은 해 7월 2일 도르곤은 유럽식 역법으로 완성된 책력을 시헌력(時憲曆)이라 명명하고 순치 2년부터 천하에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로써 아담 샬 신부는 명조에 의해 청조에서 봉직할 기회를 얻었고 그 해 11월 25일 흠천관(欽天監) 감정(監正)에 임명되었다.

소현세자는 8월 20일 심양을 출발해 1,600리 떨어진 북경으로 향했다. 그리고 9월 19일 북경에 도착했다. 심양일기는 북경을 떠나기 2일 전인 8월 18일을 마지막이므로 북경에서 세자의 행적을 알려주는 조선 측 사료는 없다. 아담 샬 신부와 소현세자가 교류했다는 기록은 오직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에만 나온다. 심양일기와 장계에는 소현세자가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다고 볼 만한 기록이 전혀 없으므로 아담 샬 신부와의 만남 이전에 세자가 천주교에 대해 알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소현세자는 11월 11일 귀국 허가를 받아 11월 26일 조선으로 떠났으나 북경에 머무른 기간은 70일 남짓. 아담 샬 신부와 교류할 수 있었던 시간도 이 기간 뿐이다. 심양 시절부터 만나는 사람과 갈 수 있는 장소를 제한받았던 세자이기에 만약 아담 샬을 만났다면 실권자인 도르곤의 허가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아담 샬 신부는 소현세자와 여러번 만났다고 하는데, 세자를 조선왕으로 오인하고 인질이 아닌 포로로 적는 등 여러번 만난 사람치곤 부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다. 소현세자가 아담 샬 신부에게 보냈다는 서신은 오늘날 원본이 전해지지 않으며 오직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에만 등장한다. 그런데 이 서신 서두를 보면 구원자 하느님(Salvatoris Dei) 상 운운하는 표현이 나온다.[30] 마테오 리치 신부 이후 중국에 간 선교사들은 Deus를 천주(天主)라는 용어로 번역해 신명(神名)으로 사용했다. 그리스도교를 잘 알지도 못하는 세자가 이런 용어를 썼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즉, 진짜로 만나서 서신을 보냈다 쳐도 해당 편지 내용은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아니라 아담 샬 신부의 첨삭을 거쳤을 가능성이 높다.

명나라에 봉직하던 환관들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었던 건 맞고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중국인 환관을 데려온건 맞지만[31]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지낼 때 중국인 환관들을 거느렸는지, 귀국할 때 데려온 환관들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명나라 조정에 봉사하던 궁인들은 엄연히 청나라의 포로였다. 인질 신분이었던 세자가 임의로 특정인을 요구해 대동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아담 샬 신부는 소현세자가 귀국하기 하루 전에야 청나라 조정에서 관직을 받았다. 그 전에는 계속 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 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황인데 아담 샬 신부 임의로 명나라 환관을 조선으로 보내는 것 역시 어렵다. 게다가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에서조차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만약 성공했다면 자신의 선교 일화를 상당 부분 부풀렸으며 조선 선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32] 그가 회고록에 언급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 뿐 아니라 동료 선교사들의 서한이나 보고서에도 전혀 확인되지 않으며 인조실록 같은 조선 측 기록에서도 이들이 천주교 신자인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소현세자가 데려온 중국인 환관과 궁녀는 어디까지나 청나라 조정이 임의로 뽑아 보낸 이들이었다.[33]

인조실록 1645년 7월 22일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 어떤 요망스러운 무당이 말하기를 “세자가 북경에서 올 때에 금수(錦繡, 수놓은 비단)를 많이 구입해 왔는데, 이 물건이 빌미가 되어 흉화를 당하게 된 것이니, 이것들을 빨리 물에 띄워버리거나 불에 태워서 신(神)에게 사죄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흉화가 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애란이 이 말을 듣고 강빈에게 고하자, 강빈은 그 말을 믿고 그 금수(錦繡)를 모조리 찾아내어 애란에게 주면서 무당의 말과 같이 하도록 하였다.

아담 샬 신부가 전해주었다는 성상이나 서학서는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요약하면 아담 샬 신부가 자기 회고록에서 세자와의 만남과 그의 서신에 대해 언급한 것이 소현세자가 천주교에 관심이 깊었다는 주장에 대한 유일한 증언이며, 후대 저자들의 진술들은 모두 아담 샬 신부의 증언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가 인용한 세자의 서신은 원본이 부재하기 때문에 그 진위를 알 수가 없다. 설령 세자가 아담 샬 신부에게 서신을 보낸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아담 샬 신부가 세자의 서신을 충실하게 번역, 인용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아담 샬 신부는 여러 번 만났다고 주장한 사람치곤 소현세자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조차 틀리게 적었으며,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명 환관이 있었던 건 맞지만 이들은 아담 샬 신부나 소현세자 의사와 관계없이 청 조정이 임의로 골라 보낸 이들이며 천주교 신자인지도 알 수 없고 무슨 특별한 역할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세자가 성상이나 천주교 서적을 들여왔는지도 확실치 않다. 설사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왔다 해도 유몽인(1559-1623), 정두원(1561-?), 이수광(1563-1628), 이익(1579-1624)[34] 등이 한문으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을 들여와 소개한 상황에서 뭐 그리 특별하게 여겨질 일인지도 의문이다. 또한 아담 샬 신부가 남긴 교류 기록에서 종교 관련 부분들을 빼놓고 보면 소현세자가 가장 큰 관심을 쏟은 문물은 역법으로 보이는데 이 역법은 조선에 들어온 외국 문물 중에서 가장 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아담 샬 신부와 흡사하게 센코쿠 시대 일본에서 활동한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도 선교 활동의 와중에 본인의 기록을 많이 부풀렸다고 한다.

막상 조선시대 당시에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귀국할 때, 청나라 황제가 원하는대로 선물을 주겠다 하자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제의 귀한 벼루를 요구해서 받아오고[35], 봉림대군이 조선 포로들을 요구하여 데려왔고, 이것을 보고 소현세자에게 노한 인조가 그 벼루로 소현세자를 때려죽였다는 이야기가 민간에 널리 퍼져있던 것이나 위에 나온 심기원이 소현세자가 왕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이야기 등 소현세자의 활동은 조선시대 당시에는 양반 계층과 민중 모두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 반청이 기조인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리라. 소현세자가 벼루에 맞아 죽었다는 야사는 1980년대까지도 대한민국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으나, 1980년대 이후 소현세자가 과도하게 추앙되면서 2010년대 현재는 거의 잊혀버린 상태다.

9. 오늘날의 소현세자

소현세자에 대한 대중적 여론이 상당히 동정적, 호의적이다보니 현대의 창작물에서는 좋은 대접을 받는다. 사극에서 등장할 때는 아버지 인조가 악역으로 자주 나오는 데 반해 주로 주인공의 조력자 역을 많이 한다. 비중있게 나오지는 않아도 선역으로 잘 나오는 편. 능력과 기대감은 있었지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기 때문인지 역사를 기반으로 한 소설의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한다.

2010년 3월에는 김인숙 작가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인 <소현>을 발표했다. 작품 속 소현세자가 비록 대단히 능동적인 행동은 하지 않지만, 묘사나 고증은 괜찮은 편.

만화가 박시백은 자신의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대부의 바다에 고립된 광해군을 생각하자"라고 큰 기대를 걸지 않으면서도 "그(사대부)들을 설득해가면서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는 건 어려웠겠지만, 성리학 일변도였던 조선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은 주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유자들 눈에는 문제점도 많았겠지만, 세계사적 전환기에 반드시 필요한 인격과 정치적 능력을 가졌던 세자' 라고 긍정적으로 평했는데 위에서 실컷 설명했듯이 소현세자가 성리학 통치질서를 바꾸려 했다는 근거 자체가 없다. 광해군이 사대부의 바다에 고립되었다는 서술도 근거 없기는 매한가지.(서인, 남인, 북인 모두 사대부고, 대북 강경파가 득세하는 정국 자체를 광해군이 만들었는데 무슨 사대부의 나라에 고립이란 말인가.) 저자가 논문보다 대중역사서 인용을 즐겨해서 생긴 문제.(이건 뇌피셜이 아니라 책뒤에 인용목록만 보면 알 수 있다.)

9.1. 대중매체

10. 관련 문서


  1. [1] 음력 4월 26일
  2. [2] 당시 인조반정의 명분은 백성들이 보기에 매우 부족했고, 이 때문에 세자의 책봉이 미뤄질 정도로 민심이 어지러웠다고 한다.
  3. [3] 오늘날의 평안북도 곽산군 능한산에 위치해 있다.
  4. [4] 조정의 일부
  5. [5] 아침 예절 공부
  6. [6] 빈객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세자 시강원 소속의 관직이며 인조실록에도 '세자 빈객'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각 관직은 좌우(左右)로 나뉘어졌는데 사(師) 정 2품, 빈객(賓客)은 종 2품이었다. 그 외에 종 3품의 보덕(輔德), 정 4품의 필선(弼善), 정 5품 문학(文學), 정 6품 사경(司經), 정 7품 정자(正字), 정 8품의 시직(侍直)으로 구성되었다.
  7. [7] 왕세자가 월 2회 사부들과 관료들 일부를 데리고 경전과 사기 등을 강론하는 모임이다. 그 동안 배우는 학문을 시험해 보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논술 시험의 의미도 있다.
  8. [8]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5일 을유 1번째 기사
  9. [9] 몽골어만주어에 능했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떠돌고 tvn 드라마 <삼총사>에선 능숙한 만주어로 말하는 소현세자가 등장하는데, 실제로는 외국어 못했다. 본인 스스로 황제의 말을 잘 못 알아들어 불편하다고 밝혔고, 청나라가 몽골어를 가르치려고 보낸 역관들을 "아랫 사람들부터 익숙하게 되면 배우겠다"면서 돌려보낸 기록이 있다.
  10. [10] 유명한 일화로 청 장수 용골대가 세자를 윽박지르자 "나는 타국에 있지만 일국의 세자인데 어찌 이리 협박하는가? 죽고사는건 하늘에 달렸으니 이런 식으로 협박하지 말라"라고 조용히 반론한 적이 있다. 세자인데다 포로 입장에서 저렇게 점잖게 반박한거지, 쉽게 말하면 내가 한 나라의 왕자인데 고작 네 까짓 장교한테 그 따위 소리 들을 위치가 아니다. 꼬우면 죽여라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11. [11] 임경업, 최명길 등이 명나라를 위해 공포탄을 쏘고 화살촉을 제거한 화살을 쏘는 등 태업 행위를 하고, 명나라 배에 식량을 제공하며 스님들을 시켜 명나라에 외교 문서들을 전달했다가, 명나라 병부 상서가 투항하면서 들킨 일.
  12. [12] 정말 아버지의 인격이 문제가 된 사례는, 기질 차이로 물론 그것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아들을 심하게 대하다 정신병자로 만들고 좋은 대체재가 생기자 죽여버린 영조의 사례다.
  13. [13] 참고로 선조의 선위를 주장하며 신하들이 들었던 예가 당현종당숙종의 사례인데 선대 황제와 현 황제의 권력 다툼이 벌여져 아버지 현종이 실권을 모두 잃고 반유폐 생활을 해야 했다. 선조 이전까지 조선에 상왕이 5명 있었는데 세조는 상왕으로 달랑 하루있다가 병사했으므로 크게 의미없는 사례고 태종같은 경우에는 군사권과 외교권을 쥐고 실권을 휘두르고 맘편히 살다갔지만 나머지 태조, 정종, 단종은 모두 쿠데타 즉 1, 2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로 반강제로 물러났으며 이중 단종은 비명에 갔다. 이런 사례들을 볼 때, 선위하고 물러나라는 게 선조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을까?
  14. [14] 그러나 정작 인조는 삼전도의 치욕 이후 후반기의 정국을 철저히 자기 뜻대로 끌고 나가며, 새로운 세자(효종)는 물론 세손(현종)으로까지 이어지는 후계구도까지 완성시켜놓고 죽는다. 당장에 소현세자 사후 강빈옥사를 밀어붙이는 점만 봐도... 김자점이나 소용 조씨 같은 이들이 대중매체에서 인조를 쌈싸먹는 인물로 묘사되곤 하지만, 실상 이들은 그저 인조의 장기말에 불과했다. 실제로 인조 사후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이들은 싱겁게 제거된다. 인조라는 숙주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에 불과했던 것.
  15. [15] 월산대군의 4대손
  16. [16] 순치제는 어린아이라, 숙부인 도르곤이 섭정왕으로 실권을 쥐고 있었다.
  17. [17] 소현세자를 집도한 의원 이형익은 소현세자 귀국 후 소현세자의 주치의로 내정되었으며 침술에 능한 이였는데, 소현세자는 침을 맞은 직후 사망했다. 원래 이 작자는 돌팔이 의사라는 시각이 많았고, 효종(당시 봉림대군)도 이 사건을 의료 사고로 생각했는지 중병에 걸린 이후에도 이 어의에게 침을 맞지 않았다. 인조가 계속 맞으라고 했음에도 끝내 맞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효종 자신도 결국 수전증이 있었던 침의에게 머리에 침을 맞고 과다출혈로 사망하지만. 덤으로 인조도 병이 걸려 그 이형익(!!!)에게 침을 맞다가, 갑작스럽게 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조차 의료사고면, 세 부자 모두 의료 사고로 명을 달리한 셈. 특히 이형익 이 작자는 왕과 세자를 더블 킬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18. [18]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는 소현세자파의 약사를 설명하면서 이 야사를 사실인 양 소개하고 있다.
  19. [19] 백윤식이 소현세자로 연기한 KBS 드라마 대명(1981년)에서 이 설을 채용했다.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김동원)가 던진 벼루에 헤드샷 당하고 실려간 후 죽는다. 또 만화 보물섬맹꽁이서당도 이 설을 소개했다.
  20. [20] 적자가 셋뿐이니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계승하지 않기로 했다면 당연히 봉림대군이 되어야 했다.
  21. [21] 대동법만 해도 세제를 싹 갈아 엎는건데 시행착오가 없을 수가 없다. 인조 대에서 삼도대동법 좌초는 이런 맥락에서 봐야지 단순히 인조의 시행의지 문제로 몰아가는건 너무 단편적이고 악의적인 해석이다.
  22. [22] 유배될 당시 4살이었던 막내 석견만 살아남아서 효종 말년에 드디어 풀려나 경안군에 봉해졌지만, 혼례 직후 22세로 죽었다.
  23. [23] 사후양자는 성종의 13남 영산군(寧山君)의 7대손인 이의저로 지명되었다. 덧붙여서 이의저 뿐만 아니라 아들들에게 군(君) 작위에 추증되었다. 참고로 영산군파보를 보면, 이의저 이후 고손자부터 항렬자 통일령으로 '응(應)'자부터 쓰기 시작한 내용이 나온다.
  24. [24] 효종의 딸 숙정공주의 부마간택에 최종후보 3명 중 한명이었다
  25. [25] 요절하였지만 2남을 두었다. 소현세자의 혈통은 자식부자인 경안군의 장남으로부터 이어지게 된다.
  26. [26] 조카딸들은 왜 싶을 수도 있지만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천자의 딸뿐만 아니라 후계자인 태자의 딸도 공주로 취급했다. 일본에서 황실전범이 생기기 전 덴노의 딸에게만 책봉한 내친왕(內親王) 작위를 동궁(東宮)의 딸에게도 책봉시킨 점에서 알 수 있다.(내친왕 작위는 구 황실전범이 생기며 손녀까지 확대되었고 이는 현 황실전범도 황손 부족 문제로 유지중이다) 오히려 세자의 딸들을 공주 옹주가 아닌 군주 현주로 따로 구분한 경우가 더 특수한 편인지라 중국 입장에서는 세자의 딸들도 대상에 들어갔다.
  27. [27] 심양일기에는 엽행일기라고 사냥갔을때 일만 기록한 일기가 따로 있다.
  28. [28] 소현세자는 북경에 70일 있었고 심양에 8년 있었다. 막연히 드라마로만 소현세자를 접한 대중들은 심양일기에 소현세자가 서구인들과 교류하고 그 문물을 받아들이겠다 결심하는 뭐 그런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데, 그런 거 없다. 심양 생활 중 소현세자가 받았을 충격은 수렵과 야외활동을 즐기거나[27] 여인도 사냥터에 말 타고 참여하는 청나라의 문화나 몰락해가는 명나라와 조선인 포로들의 애환이었다. 심양 일기에서 서구 문물에 관심을 가졌다고 볼만한 기록이 없다. 후술하겠지만 석달도 안 되는 북경 생활, 그것도 아담 샬 신부 혼자만의 기록에 근거해 서구 문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29. [29] 그 근거가 상업 활동에 힘썼다느니 서연을 열심히 안 했다느니 하는 건데, 상업활동을 하긴 했는데 청나라가 1641년 12월부터 따로 정착비용을 주는 대신 토지를 주어 농사를 지으라고 지시했다. 청나라는 심양관에 한 번씩 담비가죽, 담요, 낙타, 노루 등 예물을 보냈고 이에 심양관 측에서도 조선산 과일이나 은제품을 답례품으로 보내야 했다. 게다가 청나라 황족이 사적으로 상업거래를 요구하는 일도 있었고 청 관리들도 많이 만나야 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돈과 귀중품이 많이 필요했다. 농사 지을 때 조선인 포로들을 써서 이들을 구제해주거나 수완을 발휘해 많은 이익을 낸 점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확대 해석할 여지는 전혀 없다. 서연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도, 서연이 소홀해지는 1640년 경부터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가며 심양관을 여러차례 수리한 걸로 볼 때, 그냥 심양 생활이 기약없이 길어질 걸 생각하고 신경을 덜 썼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심양생활 길어지면서 건강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모시던 신하들이 농사 짓는 걸 반대하긴 했는데, 이건 청나라가 세자를 영영 돌려보내지 않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30. [30] 어제 뜻밖에 제게 보내주신 구원자 하느님의 상, 역서들, 기타 서학서들을 선물로 받고 제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저는 신부님께 큰 빚을 졌습니다.
  31. [31]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7월 22일 신미 2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pa_12307022_002
  32. [32] 1637년 11월 8일 아담 샬 신부가 마카오의 데 로데스(Alexander de Rhodes)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입국 허가 없이 북경에 들어온 프란치스코회의 프란치스코 델 라 마드레 데 디오스(Francisco de la Madre de Dios) 수사와 가스파르 데 알렌다(Gaspar de Alenda) 수사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그들에게 조선 선교를 권했다.
  33. [33] 이들은 1645년 7월 22일 청나라 사신을 따라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34. [34] 성호(星湖) 이익(李瀷) 말고 간옹(艮翁) 이익(李瀷)
  35. [35] 위 인조실록 기사에 소현세자가 비단을 많이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런 것이 근거가 되어 나온 이야기 같다.
  36. [36] 인수대비에서도 후손인 소현세자처럼 세자 신분으로 요절했던 추존왕 덕종을 연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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