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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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왕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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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혜왕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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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대비 김씨*

명경왕대비
효유왕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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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대

효유왕대비

명헌왕대비*
(명헌왕태후)

* 효의왕후는 대비의 존호를 사양하여 존호가 없다.
* 명헌왕대비는 갑오개혁 이후 조선이 독립국이 됨에 따라 왕태후로 격상된다.

고구려백제신라발해고려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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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추존 왕비
소혜왕후 | 昭惠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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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자숙휘숙명의소혜왕후
(仁粹慈淑徽肅明懿昭惠王后)

<colbgcolor=#94a73e> 존호

인수자숙(仁粹慈淑)

휘호

휘숙명의(徽肅明懿)

시호

소혜왕후(昭惠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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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a73e><colcolor=#ffd400> 출생

1437년(세종 19년) 10월 7일[1]

조선 한성부

사망

1504년(연산군 10년) 5월 11일[2]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3]

능묘

경릉(敬陵)

재위

<colbgcolor=#94a73e><colcolor=#ffd400> 왕세자빈

1455년 ~ 1457년

인수왕비[4]

1470년 ~ 1475년

왕대비

1475년 ~ 1494년

대왕대비

1494년 ~ 15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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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a73e> 본관

<colbgcolor=#fff,#1f2023><colcolor=#373a3c,#ddd>청주(淸州)

전호

모자전(慕慈殿)

부모

서원부원군 한확, 남양부부인 홍씨

형제

3남 6녀 중 6녀
오빠 서릉부원군 한치례
언니 정선군부인 한씨

부군

덕종(의경세자)

자녀

2남 1녀
장남 월산대군
장녀 명숙공주
차남 성종

종교

유교(성리학)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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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인생
2.1. 친정 집안
2.2. 세자빈이 되다
2.3. 남편 의경세자의 요절
2.4. 아들의 왕 즉위
2.5. 왕대비가 되다
2.6. 왕실 최고 어른이 되다
2.7. 최후
2.8. 사후
3. 사극
4. 관련 항목

1. 소개

昭惠王后 韓氏/仁粹大妃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

한확의 딸로, 추존 왕 덕종의 아내. 세조의 맏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 남편 의경세자가 아들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된 후, 인수왕비(仁粹王妃)를 거쳐 인수대비(仁粹大妃)에 봉해졌고, 대중에는 생전에 받은 이 '인수대비'라는 존호로도 잘 알려져있지만, 사후에 올려진 시호인 소혜왕후(昭惠王后)로도 알려져 있다.

연산군중종의 친할머니이자, 한명회의 막내딸인 공혜왕후와 연산군의 모후인 폐비 윤씨,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자순대비)의 시어머니이다.

아들이 왕위에 즉위하면서 추존되었다는 점에선 신정왕후 조씨와 비슷하고, 남편이 병으로 죽고 시동생이 왕으로 오른 케이스라는 점에서는 민회빈 강씨와 비슷하다.

  • 참고로 혜경궁 홍씨의 경우엔 한중록에서도 드러나듯 사도세자가 추숭되지 못해 대비가 되지 못했고, 손자인 순조가 즉위했을 때도 추숭되지 못해 정순왕후 김씨 사후에는 사실상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는데도 공식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사도세자가 장종(대한제국장조)으로 추숭된 것은 훗날의 고종 때의 일이다. 이때 혜경궁도 헌경왕후, 효강대비, 헌경의황후로 추숭되었으나 남편이 죽은 지 100년, 홍씨가 죽은 지 50년이나 넘은 까마득한 사후의 일이었다.

불교를 신봉하면서도 유학자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유교에도 나름 통달했고, 여성 전용 유교서인 내훈(內訓)의 저자이기도 하다.[5]

다소 희한한 스펙이 하나 있는데,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산스크리트어에 능했다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는 배우기 무척 어려운 언어인데다, 이 당시 조선은 명나라나 일본 외에 다른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다. 다만 명나라와의 관계를 이용해 인도에서 불경을 반입해 볼 수도 있겠고 불경의 원본을 읽으려면 산스크리트어를 알아야 하니 배웠다고는 할 수 있는데, 이건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의 영부인이 아랍어나 히브리어를 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자신의 첫 손자 연산군을 낳은 맏며느리 폐비 윤씨를 내쫓은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시어머니이자, 자식 교육에 있어 매우 엄격한 어머니로도 알려져 있다.

2. 인생

2.1. 친정 집안

인수대비의 큰 고모는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고 작은 고모는 명나라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따라서 영락제선덕제는 인수대비의 고모부가 된다. 남동생 한치례(韓致禮)는 정의공주의 차녀와 결혼했다.

2.2. 세자빈이 되다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450년(세종 32년) 수양대군의 장남 도원군 숭과 혼인을 해서 군부인(郡夫人)이 되었다. 이후, 시아버지였던 수양대군단종으로부터 (강제로)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며 남편은 왕세자에 봉해졌고 그녀 역시 세자빈이 되었다.

남편인 의경세자와의 금슬은 좋았다고 전해지며 결혼생활 5년 동안 슬하에 2남 1녀를 두는데, 월산대군, 명숙공주(이경근), 자을산군(훗날의 성종)이다.

그러나 차기 왕비가 될 예정인 그녀의 인생은 한순간에 무너지게 된다.

2.3. 남편 의경세자의 요절

훗날 성종이 되는 둘째 아들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경세자는 요절한다. 당시 의경세자는 20살, 한씨는 21살이었다. 단종을 몰아낸 세조를 미워한 문종의 비 현덕왕후 권씨의 저주라고 하는 말이 나돌아서, 이 말을 믿은 세조는 형수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을 저지른다(…). 다만 죽은 순서는 야사와는 달리 단종이 1달 뒤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세자빈의 자리는 아랫동서에게, 세자는 시동생에게 물려주고, 그녀 자신은 정빈(貞嬪)이라는 호를 받아 어린 세 자녀[6]를 데리고 궁을 출궁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빈'이 원경왕후가 세자빈으로 있을 때의 빈호와 같았으므로 훗날 수빈(粹嬪)으로 고쳐부르게 된다. 한편 자식들에게 매우 엄하다 보니 시부모인 세조정희왕후는 그녀를 폭빈(폭악한 세자빈)이라고 농담 삼아서 불렀다고 한다.

  •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은, 그 당시 조선왕실의 왕위계승법인 유교식 종법에 따르면 본래 의경세자 사후 원손이었던 월산대군이 그 뒤를 잇는 것이 맞다. 하지만 세조는 종법을 지키지 않고 애초에 본인부터가 종법과 거리가 몇천만리 떨어진 인물이었으니 나이와 경험이 더 많다는 이유로 자신의 차남인 해양대군(예종)을 다음 세자로 지목한다. 훗날 인조 치세 때 소현세자 사후 봉림대군이 차기 세자로 지목되었을 때 엄청난 후폭풍이 일어났으며 이 때문에 효종은 재위 기간동안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평에 시달려야 했고 이는 예송논쟁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성리학을 우선시했던 조선 후기와 달리 아직 성리학이 크게 중요시되지 않던 조선 전기때라 그런지 종법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아무도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이의 제기했으면 세조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거와 마찬가지인지라 게다가 조선 전기때의 임금들은 이미 문종단종을 제외하고 거의 종법과는 거리가 먼 케이스이기도 했다. 나이 순으로 따지면 당연히 해양대군이 월산대군보다 많은 데다가 항렬로 따지면 월산대군의 삼촌이었지만 웃기게도 이 둘은 나이차가 고작 4살밖에 나질 않았고 다음 세자가 결정되었을 때 해양대군은 8살, 월산군[7]은 4살이었다. 어차피 해양대군이나 월산군이나 알고보면 도찐개찐이었던 셈.[8]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어 어린 세 자녀를 데리고 궁 밖으로 나간 채, 왕비의 자리를 포기해야하는 상황이었으니 그녀가 냉정하고 엄격한 성품이 된 원인이 타고난 성품이기도 하지만 이런 환경이 더더욱 큰 원인이라고 훗날 평가되고 있다.

2.4. 아들의 왕 즉위

하지만 수빈(粹嬪)은 이대로 기다림을 타지 않았다. 차남 자을산군한명회의 딸과 정략적으로 결혼시켰고, 시어머니 정희왕후 윤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여전히 권력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결국 시동생 예종이 갓난 아기인 제안대군만 남겨놓고 사망하자, 권신 한명회와 왕실 최고 어른인 정희왕후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자을산군을 왕(성종)으로 등극시키는데 성공했다.

물론 이럴 때 후사는 누가 이을지를 결정할 권리가 정희왕후에게 있었다. 즉, 성종의 이런 승계가 왕위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정희왕후가 인정했기에 성종이 즉위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당시 한명회가 두 딸을 왕실에 시집보내면서 왕실과 중첩된 사돈관계를 맺고 정승 자리에 오르면서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희왕후조차도 후계자 선정에서 마냥 한명회를 무시할 수 없었기는 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자을산군이 예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들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한동안 빈의 지위에 머물러야 했다. 대신 국왕의 생모로서 궁 안에서 살게 되었고, 이후 궁 안에서 애매했던 그녀의 지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한편 정작 예종의 친자였던 차남 제안대군은 세종의 적7자인 평원대군의 봉사손(奉嗣孫)이 된 채 왕위와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2.5. 왕대비가 되다

처음에는 인수왕비(仁粹王妃)에 봉해졌지만 성종 2년에 남편이 덕종으로 추존되어 대비의 지위에 올랐다. 이리 되면서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와 그녀 중 어느 쪽이 더 서열이 높은지에 대해 논란이 발생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희왕후 윤씨가 "맏며느리인 인수대비가 더 서열이 높다"고 공언하면서 이후에 다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무척 박식해서 한문에도 밝았기 때문에, 정희왕후는 "나보다는 문자를 아는 며느리 수빈이 수렴청정에 적합할 것이다"라고 수렴(收簾)을 사양하기도 했다. 또한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시기, 한글은 알지만 한문에는 밝지 못한 정희왕후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유교경전은 물론 범어에도 조예가 깊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고 내훈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수렴청정을 했던 시어머니 정희왕후가 사망하자 마침내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된다.

2.6. 왕실 최고 어른이 되다

이 때 아들 성종은 이미 어린 아이가 아니었고 본인부터가 "여인은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던지라 큰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실록에서 인수대비가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려한 흔적은, 금승법(禁僧法)이 통과되어 불교를 거의 말살(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독실한 불자의 입장으로 결사반대한 것 정도가 전부다. 그 유명한 폐비 윤씨 사건을 주도한 것은 인수대비가 아닌 성종이었고, 인수대비의 시어머니 정희왕후가 언문 교지를 내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윤씨를 비판했을 정도였다.

폐비 윤씨를 죽이는 데 주도적이었다는 야사가 유명하다. 성종후궁들인 귀인 엄씨, 귀인 정씨와 결탁하여 폐비 윤씨가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 오라는 내관을 협박하여 "폐비 윤씨가 오만불손하기 그지없더라"라는 거짓 보고를 올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100% 구라다. 우선 이 야사의 전제 조건은 성종이 윤씨를 그리워했다는 건데, 성종폐비 윤씨라면 치를 떨면서 윤씨가 언급만 되어도 버럭 짜증을 내던 사람이었다.

애초에 윤씨의 2차례 폐비 위기도 대비들이 아니라 성종의 주도였고, 나중에 윤씨의 죽음도 성종이 윤씨 동정론이 나오자 못을 박아 결정한 일이다. 자세한 것은 성종 문서 참조. 엄격한 성격으로 폐비 윤씨와 갈등을 빚었다는 것이야 없잖아 사실이긴 한데, 일단 실록의 기록만 보면 윤씨의 성격머리가 장난이 아니라서, 아무리 천사표 대비라도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고.

2.7. 최후

연산군 재위 초창기에는 성종의 장례에 관하여 자문하기도 하고,[9] 연산군이 그녀를 위해 잔치도 자주 베풀어 주는 등 대체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사화폐비 윤씨의 사망을 빌미로 연산군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에서 승하했다.

야사에는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할머니! 왜 제 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라며 대들다가 머리로 인수대비의 가슴을 머리(머리박치기)로 들이 받아버렸고 그 후유증으로 승하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실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만약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들이받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연산군의 막장성과 패악질을 강조하기 위해 사관이 수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그런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사실이 아닐 것이다. 상대가 자기 할머니인 만큼 폭력을 쓰진 못하고 말빨로 조졌던 모양.

실록에는 다만 연산군이 이복형제이자 귀인 정씨의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끌고 인수대비 앞에서 깽판을 치다가 인수대비에게 "왜 제 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라며 그저 "불손한 말이 많았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실록은 임금의 부적절한 언행에 대해서 돌려 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불손한 언행' 이라는 말이 단순히 인수대비에게 대들었던 것을 의미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쌍욕을 섞어가며 인수대비에게 패드립을 쳤을지는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왕대비전(王大妃殿)에 쳐들어가 꼬장을 부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형사고였다는 것.

이날 연산군의 깽판질은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1504년) 음력 3월 20일 기사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렇지 않아도 건강이 나빴던 인수대비는 이 때 큰 충격을 받아 이 일이 있은지 1개월 남짓 뒤인 4월 27일에 승하하는 비운을 맞았다. 연산군은 평상시에는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위해 큰 잔치를 자주 베풀었고, 선물도 많이 올리며 상당히 후하게 모셨다. 불사도 말리지 않았을 정도.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전까지만 해도 폐비 윤씨죽음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전혀 문제삼지 않았고 폭군 기질 조차 보이지도 않았다. 즉위 초기에 '윤기무' 라는 이름을 보고 신하들에게 물어보고 폐비 윤씨의 아버지라는 언급이 나오자 그날 수라를 걸렀던 일이 있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폐비 윤씨의 존재와 그 전말에 대해서 얼추 알고 있음에도 별다른 문제없이 넘어갔던 만큼 인수대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뒤통수를 제대로 맞는 느낌이었을 것이며, 평소 극진하던 손자가 돌변해 서슬 퍼렇게 위협을 가했으니 이미 노령인 인수대비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흔히 사극에서는 인수대비가 연산군을 향해 저주를 퍼붓거나 한이 서린 말로 유언을 남기고 죽는 장면이 많은데 실제 인수대비의 유언은 "내가 죽고 3일 후에는 주상이 고기를 먹게 해라."였다. 세간에서 알고 있듯 인수대비와 연산군이 쌍방으로 갈등을 한 것이 아니라, 연산군 혼자서 엇나가서 할머니한테 반항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언으로 미루어볼 때 인수대비 입장에서는 "쟤가 갑자기 왜 저러냐..."하는 할머니로서 안타까운 마음과, 그래도 손자를 걱정하는 마음이 공존한 것 같다.

2.8. 사후

일설에는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가진 원한이 깊어 세자빈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고 하나, 연산군일기에 보면 그런 일은 없다. 전호는 임금이나 왕비, 왕대비, 대왕대비에게나 지어올리는 것인데, 연산군일기에 보면 인수대비의 혼전(魂殿)이라고는 명시되어 있진 않으나 정황상 인수대비의 혼전으로 보이는 모자전(慕慈殿)에 연산군이 참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허나, 실제로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격하하여 왕세자빈의 예로서 장례를 치르려한 적이 있다. 연산군이 "대행대왕대비께서는 곤위(琨位)[10]에 계셨던 적이 없으니 왕세자빈의 예로 장례를 치러야 맞지 않겠는가?"하고 하문하니 신하들이 평소엔 연산군의 기에 눌려있다가도 이것만은 반대를 하고 나섰다. 영의정 유순은 "그건 주상전하의 뿌리를 스스로 격하시키는 일입니다."[11]라고 아뢴다.

그러자 연산군도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했던지 그러면 의경세자보다는 높고 안순왕후보다는 낮게 행하라고 분부하였으나 이것도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결국 왕후의 예로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끝내 고집을 부려 상제(喪祭)를 단축하여 지내는 것만은 밀어붙여 확정 짓는다.

이에 대해 인수대비의 며느리이자 연산군의 계모인 자순대비는 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따르지 않겠다며 연산군에게 항의했고, 연산군은 삼종지도를 언급하며 "남편이 죽었으니 이제는 아들이 하는 말에 따르는 게 여자의 도리가 아닙니까?"라며 또 패륜스러운 소리를 한다. 자순대비는 하는 수 없이 연산군의 뜻에 따라 장례를 치르며 "내가 대왕대비께 죄를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며 한탄했다.

그러나 조선왕조 기간 내내 상제를 단축하여 지내온 적은 많이 있었다. 성종도 정희왕후의 상제를 한 달로 단축해서 지낸 예가 있었는데, 보통 국왕이 상제를 단축하려 한 뜻은 상제를 빨리 끝내야 조정을 정상적으로 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연산군이 딱히 인수대비를 격하시킬 의도로 그런 건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안순왕후의 장례 때는 13일 만에 상복을 벗었으나 인수대비의 장례 때는 27일 동안 상복을 입었으니 그래도 친할머니라고 조금 더 성의를 보인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인수대비가 승하한 직후 상례를 의논할 때 왕세자빈의 예로 치르자고 한 것을 보면 분명히 연산군이 격하할 의도가 아예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12]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 경내에 있는 경릉(敬陵). 남편 덕종과 함께 동원이강릉의 형태로 묻혀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인수대비의 능이 남편인 덕종의 능보다 더 화려하고 높은 위치에 묻혀 있으며 석물도 덕종의 능보다 인수대비 능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건, 덕종은 세자일 때 승하했지만 인수대비는 왕실 최고의 어른인 대왕대비일 때 승하했기 때문에 다르게 하는 것이다.

3. 사극

세조~연산군 시기 대중의 인식에 야사에 편중되어 있어 때문에 역사속 모습과 거리가 좀 있다. 왕의 생모라는 지위를 내세워 권력을 휘두런 대비는 후대의 문정왕후(그마저도 왕이 어려서 가능했고)고 인수대비가 처세와 수완을 발휘한건 도원군 사후, 그러니까 세조 시기이지 예종, 성종 시절이 아니다. 세조의 충실한 계승자로 서슬퍼랬던 예종은 말할것도 없고 성종이 어렸을때 수렴청정은 정희왕후 몫으로 정희왕후를 거두는데 머물렀으며 스스로가 여인은 정사에 깊이 관여하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장성한 성종이 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헌데 사극에선 특히 폐비 윤씨 야사와 얽어서 성종을 조이는 모습으로 많이 비춰진다.

1984년 방송된 MBC '조선왕조 오백년 - 설중매'에서 인수대비와 연산군 역을 맡았던 고두심임영규.[13]

1998년 방송된 KBS 1TV '왕과 비'에서 인수대비와 연산군 역을 맡았던 채시라[14]안재모

2007년 방송된 SBS '왕과 나'에서 인수대비 역을 맡았던 전인화

2011년 방송된 JTBC '인수대비'에서 어린 시절은 아이돌 티아라함은정, 이후에는 왕과 비에서 인수대비를 연기했던 채시라가 맡았다. 이른바 채시라는 국민 인수대비가 되다.

역사적 행적으로 봐도 조선사에서 상당히 튀는 행적을 보인 여성이라서 극적인 요소가 많이 있어서인지 사극에서도 몇 차례 등장했는데, 왕과 비왕과 나에서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왕과 비에서는 채시라가, 왕과 나에서는 전인화가, 각각 냉철하고 권력욕이 강한 인수대비의 모습을 정말로 잘 연기해냈다.

작중 묘사의 차이점은 이러하다. 왕과 나의 인수대비왕과 비와는 다르게, 나름대로 연산군과 사이가 좋고 연산군을 아끼는 편이란 거다. 다만 계모 정현왕후와 단 둘이 있을 때 세자는 폐비의 소생이라면서 내심 못마땅하다는 속내를 털어놓는데, 그래도 기본적으로 왕실의 장자이자 왕위를 잇는 후계자로서 우대는 해 주는 편. 물론 가끔 연산군을 붙잡고 잔소리로 갈굴 때도 있지만 그것마저도 연산군이 학문을 게을리하거나 함부로 사화를 일으켜 조정대신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차원에서 가족으로서 하는 잔소리다. 실제로 자신이 아끼던 상궁을 잡아가려는 것을 말리려다 연산군에게 밀쳐져서 앓아눕게 되었는데, 자신에게 문병을 온 며느리 정현왕후에게 "주상의 폭정이 더 심해지면 진성대군을 옹립하자는 말들이 들릴게요. 허나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대비의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죽기 직전 연산군과 화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죽은 인수대비에게 연산군이 "어찌 소손의 어미를 그리도 미워하신 겁니까!! 소손을 보위에 올리시고도 어찌 따듯하게 안아주지 않으신 겁니까!! 소손은 할마마마가 원망스럽습니다!!"며 슬퍼하는 장면까지 있을 정도.

반면 왕과 비인수대비는 극 중 보면 친할머니가 맞나 싶을 정도로 손자 연산군에게 폐비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천한 피가 흐르다고 운운하면서 엿을 먹이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이래서 연산군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할머니를 볼 때마다 항상 위축되면서 우는 모습을 많이 보였고, 이는 세자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장성한 뒤로는 연산군 역시 이에 질세라 자신의 할머니에게 항상 골탕을 먹이는데 온 힘을 집중한다.

심지어 성종이 승하하고 나서 연산군이 상주(喪主)로서 뒷처리를 해야할 때, 굳이 사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연산군에게 성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교행사인 수륙제를 지내야 할 것이라며 압박을 가하는가 하면, 즉위를 윤허한다는 교지 역시 쉽게 내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나마 최측근이자 사촌오빠인 한치형이 간곡하게 설득해서 어쩔 수 없이 연산군의 왕위를 인정해준 것 뿐이고,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문안인사를 할 때 제대로 받지 않고 자신의 둘째 손자인 진성대군만 편애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나마 이 둘의 호흡이 척척 맞았을 때는 무오사화 때 뿐.[15] 하지만 무오사화를 기점으로 자신의 왕권을 다지고 자신감을 가지게 된 연산군은 아예 자신의 친할머니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깽판을 놓기 시작한다.

결국 인수대비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손자와 치열하게 대립하다 못볼 꼴 다보고 죽고 죽고 나서도 자신의 손자에게 온갖 방법으로 고인드립을 당하는데, 죽기 전 연산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의 장인 신수근에게 넌지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왕위에 올리라고 암시를 주기도 하며, 실제로 마지막회에서 폐위되자 연산군 자신은 크게 웃으면서 덩실덩실 춤추고 "할머니, 할머니 소원대로 폐주가 되었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내쫓고 새 임금을 세웠으니 새 임금인들 임금노릇을 재대로 하겠습니까?"라고 외치면서 매우 기뻐한다.

또한 인수대비왕과 비는 같은 작가(정하연)와 같은 주인공(채시라)이 참여했음에도 인수대비에 대한 묘사가 크게 다른데, 왕과 비의 인수대비는 군부인 시절부터 왕비가 되려고 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자신의 권력유지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가족이라도 사람 취급도 제대로 안하는 냉혹한 면모를 지녔지만, <인수대비>의 인수대비는 비교적 인간적이고 고뇌하는 면모도 많이 보이는 편이다.

특히 연산군을 대하는 모습에서 그 차이가 큰데, 가령 <왕과 비>의 인수대비는 친손자인 연산군에게조차 냉혹하고 폐비의 핏줄이라며 제대로 된 정을 보여주지 않고 심하게 갈군다. 폐비 윤씨를 사사할 때, 어미 잃은 연산군을 측은히 여겨 감싸안고 대성통곡하며, 그 전에 폐비 윤씨 사사가 거론이 되었을 때도 사촌오빠 한치형이 차라리 폐비를 죽이지 말고 원자를 같이 폐위시켜버리자고 주장할 때, 엄연히 자신의 손자이고 죄도 없기 때문에 폐위시킬 이유는 없다고 감싸주긴 한다. 하지만 어린 연산군이 자신을 볼 때마다 쫄면서 울음을 터뜨리자 몰론 나중에 엄청난 최종보스로 각성하지만 죄인의 자식이라고 낙인을 찍어 개망신을 주며, 성종 승하 직후 연산군의 즉위마저도 저지시키려는 모습을 보인다. 오죽하면 연산군을 즉위시킬 바에야 차라리 제안대군을 옹립하겠다고 할 정도.

반면 <인수대비>의 인수대비는 어린 연산을 매우 귀여워하고 어린 연산의 장난을 스스럼없이 받아주며 같이 잠을 자며 보살필 정도로 각별한 정을 보여주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폐비 윤씨를 죽이려고 마음먹었음에도 어린 연산까지 목숨을 잃을 것이 우려되어 못내 망설여 한명회에게 방법을 묻기도 한다. 아마 연산군과 인수대비의 관계에 대한 평가가 왕과 비 방영 당시와 어느 정도 달라진 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다보니 <왕과 비>를 본 시청자 입장에서 <인수대비>를 본다면 가히 충격과 공포를 느낄 정도 내가 생각하는 그 인수대비가 아니야

40대 이후 세대들은 MBC 대하사극 조선왕조 오백년에서의 고두심장녹수에서 말년의 인수대비를 연기한 반효정이 가장 기억에 남고 연기력이 훌륭했다 평가하는 반면 30대 초반 혹은 이하 세대들은 인수대비 하면 채시라를 주로 떠올리며 그녀의 연기에 대해 호평한다. 참고로 채시라는 같은 작가의 2번 항목의 드라마에 출연함으로써 다시 한 번 인수대비 역할을 맡았다. 이외 한명회(드라마)에서는 김영란이 연기했고,[16] 2017년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선 배우 문숙이 연기했다.

왕의 남자에선 노년의 모습으로 잠시 등장한다. 갑자사화 당시, 경극을 공연하는 과정에서 공길이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고 숨지는 황후, 즉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씨와 매우 비슷한 역을 연기하자, 감정에 북받친 연산군이 분에 못이겨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직접 칼로 살해했으며 인수대비는 그 충격으로 쇼크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4. 관련 항목


  1. [1] 음력 9월 8일. 공교롭게도 음력 9월 8일은 소혜왕후의 시아버지 세조의 기일이다. 때문에 소혜왕후가 인수왕비로 책봉된 성종 1년부터, 그녀의 탄신 하례는 다음날인 9월 9일에 올리게 되었다.
  2. [2] 음력 4월 27일.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숭하는 의식을 치르기로 한 바로 전 날이다. 드라마 왕과 비 등에서 이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
  3. [3] 훗날 인현왕후도 여기서 승하한다.
  4. [4] 왕의 부인인 왕비가 아니라 추존 의경왕의 비(妃)라는 뜻으로 왕비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5. [5] 문정왕후 또한 인수대비와 이 점에서 비슷하다.
  6. [6] 4살이던 장남 월산대군, 2살이던 명숙공주, 생후 5개월 갓난아기였던 차남 자을산군(훗날의 성종)
  7. [7] 그 당시 월산대군(月山大君)이라는 호칭은 후에 자을산군이었던 성종이 왕위에 즉위하고 나서 '대군'이라는 호칭을 붙여줬기 때문에 세조~예종때는 월산군으로 불리었다.
  8. [8] 그러나 해양대군 본인이 즉위한지 1년만에 사망함으로써, 자기 아들 제안대군이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물먹게 된다.
  9. [9]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자문을 구한 유일한 예다.
  10. [10] 왕비의 자리를 곤위라고 한다.
  11. [11] 의경세자는 왕세자일 때 사망하였으니 당시에는 왕세자의 예로 장례를 치를 수 밖에 없었으나, 인수대비가 죽었을 때는 이미 의경세자가 왕으로 추존된 이후다. 그러므로 인수대비의 장례를 세자빈의 예로 치른다면 의경세자까지 도로 격하시키는 일이 되며, 그렇게 되면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 대부터 족보가 꼬이게 된다.
  12. [12] KBS 대하드라마 왕과 비에서 이 장면을 자세히 묘사해냈다. 극 중 연산군은 그동안 자신의 할머니와 벌였던 갈등으로 인해 마지막까지 조정대신들에게 윽박을 지르며 인수대비는 '수빈 한씨'에 지나지 않았다며 며칠동안 시신도 방치해놓은 채 장례도 치르려고 하질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해 최측근인 신수근이 겨우 설득해내어 장례를 치르긴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생전에 대왕대비가 맞나 싶을 정도로 조촐하게 치루어지고, 게다가 상주인 연산군인수대비의 빈전에 올리는 술잔에 대놓고 침까지 내뱉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한다.
  13. [13] 배우 견미리의 전 남편이기도 하다.
  14. [14] 저 당시에 30대 초반이었다.
  15. [15] 하지만 연산군이 작심하여 선비들을 제대로 족쳐내려고 하자 죄 없는 선비들은 함부로 죽이지 말고 더 이상의 사화를 일으키지 말라고 말리기도 한다.
  16. [16]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원경왕후, 용의 눈물에서는 신덕왕후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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