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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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베를린 올림픽

1988 서울 올림픽 당시

그의 발자국

젊은 시절의 손기정, 그리고 최승희(왼쪽)

이름

손기정(孫基禎,Sohn Keechung)

국적

대한민국

생몰년도

1912년 8월 29일,평안북도 신의주~
2002년 11월 15일,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1]

학력

양정고등보통학교
보성전문학교 중퇴
메이지 대학

종목

육상

주종목

마라톤

신체

170cm

종교

천주교(세례명: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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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선수 경력
2.1. 초년 시절
2.4. 지도자·체육행정가로서의 활약
2.5. 영웅의 영면
3.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
4. 수상 기록
5. 기타

1. 소개

"식민지 청년으로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달리고 또 달리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 1988년 당시 손기정 단독 인터뷰

한민족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한국 체육의 기틀을 다진 진정한 국민영웅.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까지 활약했던 육상 선수다.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체육계 전체를 상징하는 전설이자,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2. 선수 경력

2.1. 초년 시절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이며, 신의주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은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매우 가난했다. 소년 손기정은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옥수수참외 장사를 하기도 하고 우동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집과 학교가 2km 거리에 있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그 거리를 매일 달려 다녔다고 한다. 심지어 노는 시간에도 압록강변을 달려 다녔을 정도로 뛰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 때 막연하게 운동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고. 손기정의 어머니 김복녀 씨는 어린 아들을 보며 운동보다는 공부로 성공하길 바랐고, 아들이 달리지 못 하도록 잘 벗겨지는 여자 아이 고무신을 신겨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손기정은 고무신을 새끼줄로 묶어서 달렸고(...) 새끼줄에 발목이 쓸려서 피가 나도 아랑곳 않고 달려 다녔다고 한다.

이런 손기정의 재능을 눈여겨본 담임교사 이일성 씨가 손기정에게 육상 선수를 권유했고, 약죽보통학교 5학년 때부터 육상선수로 활약했다. 고향 신의주에서 열린 육상대회 장거리 종목에서 1,2위를 다툴 정도로 실력 있는 선수였다. 하지만 보통학교 졸업 후 생계가 막막해져서 육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1932년 이일성 선생이 그를 일본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고된 노동으로 도저히 학업을 이어갈 수가 없자, 6개월 만에 고향 신의주로 돌아왔다.

이때 어느 회사의 점원으로 취직하여 학업과 육상을 병행할 수 있었는데, 그 회사의 사장은 당시 신의주에서 동익상회를 하던 공병우 박사의 부친 공정규 사장이었다. 손기정은 이곳에서 일을 하며 쉬는 날에는 압록강변을 달리며 연습했다. 그리고 1932년 서울에서 열린 제 2회 동아 마라톤에 출전했는데 서울의 복잡한 지리를 몰라서 삼각지 로터리에서 길을 잃었고(...) 아쉽게 2위를 한다. 그러나 이때의 레이스로 인생이 바뀌는데 당대의 걸출한 마라토너들이 배출된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된 것이다.[2]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자 더욱 훈련에 매진했고, 그 결과 이듬해 제3회 동아 마라톤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935년에 도쿄 메이지 신궁대회에서 마라톤 풀코스에 처음 출전하여, 2시간 26분 42초이라는 비공인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이 기록은 비공인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 마라톤 풀코스에서 최초로 2시간 30분의 벽을 깬 사례이다.[3] 그리고 이듬해 열린 조선육상경기대회에서도 역시 1위를 차지하며 단번에 장거리 육상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이 당시 13개의 대회에 출전하여 10번의 우승을 차지한 것은 흠좀무.[4]

2.2. 1936 베를린 올림픽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출발 당시 사진이다. 맨 왼쪽에서 달리는 선수가 손기정이다.

이후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동갑내기이자 양정고등보통학교 동기였던 남승룡[5]과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 참가하게 된다. 일본 육상계에서는 당연히 순수 일본인을 뽑고 싶어했겠지만, 실력자라는 것에 이견이 없는 손기정과 남승룡을 떨어뜨리기엔 눈치가 보여서 대표팀으로 발탁한다.[* 그러나 손기정 투구의 반환 문제가 국제 사회에 퍼졌을 때, 일본 분카 방송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베를린 올림픽 일본 대표팀 명단에 손기정 이름이 빠져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 일본 선수에 비해 넘사벽이었던 손기정의 실력을 일본 대표팀에서 탐탁치 않아했다. 그리고 손기정 선수는 대회 이후 자신의 이름을 서명할 때, 한글로 '손긔졍'(당대 표기)이라고 썼다. '孫基禎'이라고 한자로 썼다면 한국인은 '손기정', 일본인은 '손 키테이'라고 각각 달리 읽을 수 있다. 당시에는 일본어만이 공용어였으므로 공식적으로는 '손 키테이'로 읽게 된다. 그러나 손기정은 굳이 일본인이 읽을 수 없고 오로지 '손긔졍[손기정\]'이라고만 읽히는 [[한글]]로 이름을 쓴 것. (일본식 성명 강요, 즉 [[창씨개명]] 정책은 [[베를린 올림픽]] 이후인 1939년에 시작하여 1940년에 본격화되었다.) 일본 대표팀은 이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손기정의 이름을 삭제한 것이다.] 헌데 일본 육상계는 4년 전 1932 LA 올림픽 당시 일본 국적으로 출전했던 조선인 선수 김은배, 권태하가 일본 선수의 페이스 메이커를 해주려던 전략을 무시하고 각각 6위, 9위에 랭크되었던 악몽이 있어서, 일본 육상팀은 이 대회에서는 반드시 일본 선수를 많이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대표 선발전에서 1위에 남승룡, 2위에 손기정이 랭크되자, 일본 대표팀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 둘을 탈락시키려고 한다.

현지에서 컨디션 조절을 하고 쉬어도 모자랄 판에, 일본 육상팀의 억지로 전대미문의 2차 선발전 현지 테스트가 열린다. 일본 측에서는 이 둘을 탈락시키기 위해 일본 선수 2명을 더 후보로 추가시킨다. 그러나 레이스 내내 일본 선수 2명이 이 둘을 따라잡지 못 하자 일본 선수들은 몰래 코스를 이탈하여 지름길로 갔고, 이를 본 손기정과 남승룡은 이 둘을 반드시 이기겠다고 다짐하며 달렸다고 한다. 결국 2차 선발전에서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사이좋게 1,2위를 나눠 가졌다. 그리고 지름길을 이용해 뒤늦게 들어온 일본 선수들은, 분노한 남승룡 선수에게 따귀를 쳐맞았다고(...) 한다. 사실, 시원시원하고 활달한 손기정에 비해 남승룡은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랬을 정도면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다.

당연히 일본에선 "조선인들이 대일본 제국의 대표라는 것이 말이 되냐"고 반발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워낙에 실력이 좋으니까 반발은 곧 사그라들었다. 이후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로 당시 올림픽 신기록을 기록하며[6] 금메달을 획득했다. 같이 출전한 남승룡도 동메달을 획득했다.[7]

당시 골인 직후 모습

당시 받은 1936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의 모습. 현재와 같이 메달에 목걸이를 달아서 목에 걸 수 있게 만든 것은 1960 로마 올림픽 때 시작되었고, 당시에는 큼직한 동전 형태로 상자에 넣어 주었다. 아래 시상식 사진을 보면 선수들 손에 들고 있는 게 메달상자이다.

손기정은 금메달을 받은 다음 날 아돌프 히틀러와 만났다. 손기정은 이 순간을 '160cm인 내 키에 비해 그의 손은 크고 억셌으며, 체구는 우람했다. 그리고 독일을 이끌어가는 통치자답게 강인한 체취를 풍겼다.' 라고 회고했다. 아돌프 히틀러와 직접 만나본 몇 안 되는 한국인이다. 어깨 너머로 본 것이 아닌 정식으로 소개받는 석상이였다면 아마도 유일한 한국인일 것이다.

체육인으로서는 최고의 영광이라 할 수 있는 올림픽 금메달을 땄지만, 당시 일제 치하의 조국의 현실을 생각한 것인지 그가 올림픽 경기 직후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는 "슬프다"[8] 라는 석자가 쓰여 있어, 많은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시상식 사진을 보면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 모두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손기정 선수는 묘목[9]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고 있다. 은메달을 수상한 영국 선수[10]의 밝은 표정과 대조적이다. 남승룡 선수는 "손기정 선수가 묘목을 받아 그것으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가슴에 있는 일장기가 지워진 사진이 신문에 실려서 동아일보가 정간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도 유명하다.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은 손기정의 우승을 기리는 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 를 짓기도 했으며, 이 시는 심훈이 같은 해인 1936년 9월 갑작스럽게 장티푸스에 걸려 병사하면서 마지막 시가 되어 버렸다.

위 사건 등으로 인하여 조선총독부는 엄중한 통제 속에 그를 귀국시켰고, 손기정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임에도 범죄자 인도받는 것마냥 밧줄에 묶여서 들어왔다. 올림픽 영웅에 걸맞는 환영 인파는 없었다. 하지만 올림픽 금메달-일장기 말소사건을 통해 일제 치하 조선의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 당시 국내의 신문광고, 특히 의약품, 식품 광고는 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담는 광고가 많았다. 특히 어린이 대상 과자 광고에는 '이 과자를 먹고 쑥쑥 커 손기정 선수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라는 카피라이트가 유독 많았다.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은 당시 일본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던 조선인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시골의 아낙들도 올림픽이 뭔지 알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장기 말소사건을 통해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 강화를 경계하던 조선총독부는 손기정에게 사복경찰을 붙여서 감시했고, 이때 손기정은 심적으로 무척 괴로웠다고 한다.

풍문에 따르면, 의지의 승리를 찍은 영화 감독 레니 리펜슈탈심지어 아돌프 히틀러까지도(!) 손기정에게 상당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까닭은 손기정이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경박하게 굴지 않고 일견 우울한 듯 보일 정도로 과묵한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 올림피아에서 손기정이 꽤 비중을 차지하는 걸 봐선, 리펜슈탈이 이 동양인 선수에게서 정말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정작 올림피아의 주제는 아리안족 킹왕짱이란 게 함정 그리고 이 둘은 1956년에 다시 만나게 된다. 한편 아돌프 히틀러가 손기정을 '동맹인 일본의 국민' 으로 간주해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말도 있는데, 어쨌든 히틀러는 손기정이 한국계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우승하자 독일 방송들은 이렇게 보도했다.

(..)wo der japanische Sieger Son kommen muss, der Koreanische Student, er hat die Streitmacht der Welt zertrummert, mit asiatischer Fähigkeit und Energie ist der Koreaner durch(..)

(..)일본의 우승자 손기정이 옵니다, 한국 대학생 손기정은 전세계의 경쟁자들을 아시아의 능력과 에너지로 눌렀습니다(..)

# 심지어 손기정 선수의 우승을 축하하는 행사의 사진에는 태극기도 걸려 있다.

1936 베를린 올림픽 우승 이후 일본에서 우승 소감을 녹음한 내용이 레코드로 남아 있다. 여담이지만 손기정 선수의 고향인 신의주 억양이 배어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11]

저는 손기정입니다. 24년간의 숙망을 달성하려고 우리들은 중대한 책임을 지고, 8월 9일 오후 3시에 스타트에 나섰습니다.

이때 나는 신궁대회 때 스타트와 같은 가벼운 기분이었습니다. 이 정도이면 반드시 우승하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쟈바라가 먼저 뛰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내 페이스대로 달렸습니다. 나는 침착한 태도로 달리었습니다. 그러면서 앞에서 달리고 있는 외국인들을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영국인 하파가 곧 내 앞에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32km를 앞두고 하파와 함께 전 회의 우승자인 아루젠친[12]의 쟈바라를 따라버리었습니다. 그리고 하파와 함께 나는 한동안 똑같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파를 따라버리기에는 무한히 어려웠습니다. 내 전신에 아직도 힘이 가득하였으므로 능히 우승할 자신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인제 즉 문제의 언덕에 다다르니 우리나라 일장기가 나를 응원하여 주는 것이 보이었습니다. 좌등 코취 역시 응원 중의 한 사람이 되어 큰 기를 흔들면서 '인제는 6km가 남았다' 고 큰 고함을 지르는 소리에 일층 더 나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2번째 언덕에 도달하였을 때도 역시 이곳에 나를 응원하여 주는 우리나라 일장기가 날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수많은 응원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인제는 1km 반이 남았다'고 고함치는 소리가 내 귀를 울려주었습니다. 나는 무의식 중에서 죽을 힘을 다 하여 더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기었습니다. 기록의 시간은 2시간 29분 19초 2의 올림픽 신기록이었습니다. 하파가 나보다 2분 4초 지나치어 들어왔습니다. 그 뒤를 이어 남 군이 원기있게 달려들어왔습니다. 이때의 반가움은 내 입으로서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오후 6시 15분 나는 하파와 남 군과 함께 표창대에 올랐습니다. 장엄한 우리나라 국가가 엄숙하게 내 귀를 울려줄 뿐이었습니다. 이때의 기쁨은 내 일생을 통하야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이 승리는 결코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전 우리 일본 국민의 승리라고 할 것..(크게. 크게 해라.)이외다.[13] 이 승리야말로 내 개인의 달린 힘보담도 우리나라 동포 여러분들의 열렬한 응원의 결정(結晶)인줄 생각하는 바입니다.

금메달 수상 소감. 그러나 이는 일본이 써준 대본에 불과하다.

아직까지 베를린 올림픽 슈타디온의 수상자 명패에는 '손기정' 대신 '손 키테이(SON, Kitei)' 란 일본식 표기가 남아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사건으로 1970년에 신민당 국회의원이었던 박영록이 야간에 베를린 올림픽 기념관에 불법 침입하여 기념비에 새겨져 있던 손기정의 국적을 훼손하여 불법침입, 절도 및 공공재산파손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으나, 체포되기 전에 한국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박 의원이 무엇을 훔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서독 경찰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JAPAN이라는 글자를..." 국적을 한국(KOREA)으로 고치기 위해 이 5개 문자를 다른 우승비에서 떼어모았으니 엄연한 기물파손이며 도려낸 일본(JAPAN)의 문자는 그대로 들고 도망갔으므로 절도 혐의도 적용됐지만 시대가 시대이다보니 송환되어 벌을 받는 일은 없었다.[14]

그 당시야 일본 소속으로 뛰었다지만 광복된 후에까지 일본 이름으로 남은 것은 아쉬운 일이나,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선수 시절과 은퇴 후의 국적이 달라졌다고 해서 이름이나 국적을 은퇴 후 기준으로 수정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식민지 출신 선수가 종주국 대표로 나와서 메달 딴 건 손기정, 남승룡 말고도 많으며 그들 역시 종주국 선수로 기록에 남아있다. 혹시라도 은퇴 전에 독립해서 독립국 선수로 나오는 경우도, 독립 전후의 국적을 다르게 기록할 뿐이다.[15][16]

이런 사례를 공식 인정할 경우 국적 변경을 요구하는 다른 사례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각국은 외국 대표 선수라도 조금이라도 자기 나라와 관련이 있는 선수는 자기 나라로 고쳐 달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크며, 이럴 경우 국적 분류는 완전히 흔들린다.[17] 이게 이해가 안 간다면, 1988 서울 올림픽 주 경기장 앞과 올림픽공원에 서있는 종목별 우승자 명단이 새겨진 명판을 확인하면 알 것이다.[18] 멀리 갈 필요 없이 러시아빅토르 안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딴 메달이 러시아로 바뀌는 일도 없으며, 영원히 한국안현수가 딴 메달로 기록된다. 더욱이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 탈북자도 있는데, 역시 남아 있는 기록은 대한민국이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현재 IOC에서는 공식적으로 각주와 같은 이유 때문에 'Kitei Son, Japan' 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신 약력에는 꽤 비중 있게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2.3. 1937년~1945년


보성전문학교 시절의 손기정

그 뒤 손기정은 1937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상과(商科)에 입학했다. 당시 보전에는 재정학을 가르치는 홍성하(洪性夏) 교수가 체육부장을 맡고 있었다. 홍 교수는 뜨거운 민족주의자여서 학교 스포츠를 장려하여 학생들의 사기를 진작시키자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 지론으로 김성수(金性洙) 교장을 설득, 1937년에 전조선의 중등학교를 졸업하는 우수 운동선수들 다수를 뽑아 상과에 수용하였다.[19]

손기정은 보성전문학교 육상부를 대표하여 1937년 봄에 조선학생육상연맹이 주최하는 2개 대회에 출전, 보성전문의 우승에 기여하였다. 그 대회 중 하나는 4월 25일에 거행된 조선학생 수원~경성간 역전경주대회. 당시의 학제는 3월 졸업, 4월 입학이었으니까 입학한 지 며칠 되지 않아 5명이 이어 달리는 보전팀 최종 주자로 시흥~서울운동장 간을 역주, 참가 7개팀의 최선두를 달려 보전을 우승케 했던 것이다. 그리고 6월 5~6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조선학생육상대회가 거행되었는데 첫날엔 1,500m, 이튿날엔 5,000m에서 우승하였다. 당시 보전엔 박찬규, 백승욱, 인강환 등 장사들이 즐비했다. 이들이 포환, 원반, 해머던지기 등에 활약한 데다 손기정의 장거리 우승을 더하여 보전은 종합 우승하였다.

이렇듯 손기정이 보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골치 아프게 생각하였다. 당시 1930년대 중반에 조선인 학생이 진학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 가운데 조선인이 교장인 학교는 보전뿐이었고, 교수들 가운데엔 창문을 닫게 하고 우리말로 강의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학교에 손기정이 재학하면서 육상대회에서 활약하자 그는 하루 아침에 영웅이 되어 보성전문에는 그를 중심으로 서클이 형성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손기정이 보전에 다니는 것을 꺼려했고, 조선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총독부의 관헌은 손기정을 주야 감시, 감독하였고, 손기정은 그 눈을 견디지 못해 1937년 2학기에 보전을 퇴학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편입학하였다.

그런데 도쿄에서도 일본 관헌은 손기정이 마라톤을 달리고 육상경기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막았다. 해마다 양력 정초엔 도쿄~하코네 간 대학대항역전대회가 거행되었다.[20] 손기정을 맞은 메이지대학은 그 역전에서 성적을 올리게 되었다고 좋아했으나 그는 달릴 수가 없었다. 일본 관헌이 공중 앞에서 손기정이 달리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다. 결국 손기정은 메이지 대학 법대를 졸업한 후 1944년까지 조선저축은행에서 은행원으로 일해야 했다.

2.4. 지도자·체육행정가로서의 활약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의 체육계에 큰 공헌을 했다. 1948년에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1948 런던 올림픽부터 1964 도쿄 올림픽까지 마라톤 대표팀 감독으로 역임했고, KOREA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참여한 올림픽에서 개막식 기수로 당당히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였다. 이후 1963년에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66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대표단장으로 참가하였다.

1971년에는 올림픽 위원회(KOC) 위원,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1988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을 역임하였고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최종 봉송 주자로 뛰기도 했다.[21] 당시 손기정은 가슴에 당당하게 태극기를 달고 정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펄쩍펄쩍 뛰며 성화봉송을 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대목이다. 나라도 없이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우울한 금메달을 받아들어야 했는데 이제 조국이 올림픽을 유치한다고 하니 그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영상으로 기록이 남아 있으니 여기서 확인해 보자. 성화가 꺼질 기세로 펄쩍펄쩍 뛰는 손기정을 볼 수 있다.[22]

그는 각각 1947년과 1950년에 감독으로서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서윤복[23]과 함기용을 훈련시켰고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은 황영조는 손기정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이 끝난 직후 경기장에서 지켜보던 손기정을 찾아 금메달을 손기정의 목에 걸어주었다고 한다.[24][25] 1983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통해 베를린 올림픽 당시의 상황과 심정을 밝혔다.

1996년 촬영된 사진. 1996년 가을 강형구(56·손기정기념재단 공동이사장) 화백의 작업실을 방문한 손기정이 강 화백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강 화백은 캔버스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젊은 손기정의 얼 굴을 담았다.

의외로 축구계와도 접점이 있다. 1950년대에 조선방직 대구공장(대구방직)의 상무이사로 재직했었는데, 대구방직이 1951년 1952 헬싱키 올림픽 선수 선발을 겸해서 열린 전국축구선수권 대회에서 당시 한국 축구의 최강팀이었던 육군 특무대를 이기는 파란을 일으키자 특무대의 김창룡 특무대장이 성질이 뻗쳐서 조선방직의 단장이 누군가 호출했더니 바로 손기정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 외에 축구 관련 이야기

2.5. 영웅의 영면

1997년부터 다리의 동맥경화증 때문에 잘 걷지 못하여 바깥 출입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남북대표팀 공동입장, 2002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에 이어 2002 부산 아시안 게임까지 지켜보았지만 그가 바라던 조국의 통일을 끝내 보지 못한 채, 2002년 11월 15일에 지병이던 만성 신부전증과 폐렴으로 인한 숙환으로 타계했다. 사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으며, 체육훈장 청룡장이 추서되었다. 모교인 양정중학교양정고등학교[26]의 옛 터가 있는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27]에는 손기정 기념공원이 만들어졌다.[28] 손기정공원에는 손기정기념재단도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79년 5월 손 선수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 의사에 따라 기념품 1,500여 점을 국가에 기증했고, 육영재단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의 어린이회관에 '손기정 전시관' 을 지어 2005년도 기념품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2005년 한 독일인손기정에게 헌정하는 앨범을 만들었다고 한다.

3.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

대한민국의 보물

903호

청자 상감매죽학문 매병

(靑磁 象嵌梅鳥竹文 梅甁)

904호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

(古代 그리스 靑銅 투구)

905호

김성일 종가 전적

(金誠一 宗家 典籍)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 (古代 그리스 靑銅 투구) [29]

그리스의 한 신문사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부상(副賞)으로 고대 그리스의 청동 투구를 기증하기로 하였다. 손기정 선수가 받은 이 투구는 현재 보물 90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보물 중 외국에서 제작된 3번째 보물이며[30][31] 우리나라 지정문화재 중 유일하게 서양에서 제작된 문화재다. 이후 손기정이 1994년 국가에 기증해서 국립중앙박물관 2층 기증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청동 투구는 "아마추어 우승자에게 메달 이외의 부상을 수여하지 않는다"는 IOC의 원칙에 따라 손기정 선수에게 전달되지 못했고, 일본 역시 식민지 출신 선수의 권리를 주장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에 베를린의 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손기정 선수 본인도 이 투구가 자신에게 수여되었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귀국했는데, 1975년에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제패 40주년 기념전시회를 열기 위해 자료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베를린 올림픽 이후에 일본 임원으로부터 받은 사진첩을 보게 된다. 거기서 자신에게 수여되어야 했던 투구를 보게 된다. 그렇게 되어서 이 투구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고, 당시 독일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던 노수웅 씨가 1년 6개월의 탐문 끝에 이 투구가 베를린 샤로텐부르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투구를 반환받기 위해서 10년의 시간이 걸린다. 결국 1986년에 이르러서야 베를린 올림픽 개최 50주년을 맞아 손기정 선수 본인에게 전달되었다.

돌려받았을 때 찍은 사진#을 보면 투구를 한번 써보려고 덮어써 보기도 했다. 근데 손기정의 두골이 고대 투구의 주인보다 커서 그런지 머리가 들어가지 않았다.(…) 아마도 장두형인 서양인과 단두형인 동양인의 두상 차이 때문인 듯.

참고로 이 투구는 기원전 8세기 경의 코린토스 양식으로 제작된 투구로, 우승자를 위해 IOC에서 제작한 리플리카가 아니라 1875년에 제우스를 모신 신전 유적지에서 출토된 것이었다. 그것도 코린토스 양식 중 가장 초기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손기정에게 이런 투구가 부상으로 주어진 것에는 배경이 있었다. 본래 1900 파리 올림픽 때부터 마라톤 우승자에게 고대 그리스의 유물을 부상으로 주는 관행이 있었다.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40km를 달려온 병사 페이피데스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 관행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시기까지 계속 되었는데, 고대 유물 반출 금지령이 떨어진 후에야 폐지되었다. 그런데 하필 이것이 베를린 올림픽 직전에 폐지되었기에 손기정에게 제때 전달되기 매우 애매했던 것.

여담이지만 손기정의 외손자인 이준승 現 손기정기념재단 이사장에 의하면 원래 이 투구가 반환되었을 당시 손기정이 이 투구를 집에 보관했다고 한다. 설령 도둑이라도 들어서 훔쳐갈까봐 투구를 애지중지 여겼다고 하는데 이를 본 가족들의 의견에 따라 국가에 기증하게 되었다고 한다.

4. 수상 기록

올림픽

금메달

1936 베를린

마라톤

5. 기타

  • 1984 LA 올림픽의 성화봉송 주자로 발탁되기도 했다. 이 때 손기정으로부터 성화를 넘겨받은 인물이 바로 새미 리. 둘의 우정은 생각보다 오래 됐는데, 1947년에 손기정이 보스턴 마라톤에 제자들을 이끌고 참가했을 때 처음 만났다고 한다.
  • 1988 서울 올림픽의 성화도입 주자로 발탁되었다. 그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기정이 성화 최종 주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성화도입주자로 선정하였고, 임춘애에게 성화를 전달한 뒤 최종 점화는 체육 관련 3명의 일반인이 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 일제강점기의 올림픽 우승자라는 사실이 부각되어서 정작 실력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사실 12년 동안 세계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실력자이기도 하다. (공식 세계신기록은 1936년 2시간 26분 42초, 비공식 세계신기록은 1935년 2시간 25분 14초) 이 기록은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손기정의 제자인 서윤복이 2시간 25분 39초의 기록으로 깼다. 올림픽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였는데 당시 올림픽 마라톤에서 처음으로 2시간 30분의 벽을 깼다. 훈련법도 무척이나 독해서 발에 무거운 추를 달고 달리기도 했고, 일본 대표팀이 전부 자고 있을 때 새벽에 일어나서 혼자 훈련을 강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 의외로 가족 관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가정사는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아버지 손인석 씨는 베를린 올림픽 개최 1년 전인 1935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 김복녀 씨는 1941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1939년에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이자 단거리 육상 선수출신인 약혼녀 강복신[32]과 결혼했지만 5년 뒤 부인은 간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둘의 사랑 이야기는 2016년 7월 10일 방송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강복신 씨 사이에서는 자녀가 2명이 있는데 딸 손문영(1940년생), 아들 손정인(1943년생)이 있다. 손정인 씨는 재일교포거류민단 요코하마지부 사무총장으로 일하였고, 2002 한일 월드컵 때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또한 외손자 이준승 씨는 現 손기정기념관의 관장이기도 하다.
  • 육상 선수로 최고의 영예를 누리긴 했지만, 본인은 "어릴 적에 스케이트를 살 돈만 있었으면 스케이트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으로 죽을 때까지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았으며, "죽기 전에 남북통일이 된다면 신의주 - 부산 간 역전경주 대회에 나가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만 했다.
  • 북한 정권에는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1946년 평안북도 체육회 창립 당시 체육회 측에서 참가를 끈질기게 종용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서울로 도망친 일화는 유명하다. 이 때문에 괘씸죄에 걸려서 통일원에 방북 신청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고립되었는데 이 때 북한군의 감시를 받아서 한국군이 서울을 탈환할 때 까지 숨어지냈다고. 북한에서도 자국의 체육 역사를 이야기할 때 그 동안 손기정에 대해서 거의 다루지 않았으나, 21세기가 되면서부터 손기정이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뛰어서 우승하였고 당시 일장기 말소사건 등이 있었음도 언급하게 되었다. 로동신문에서 손기정의 우승을 이야기하면서 '나라 잃은 체육인의 금메달은 그 자신에게도 민족 성원들에게도 기쁨과 자랑보다 눈물과 치욕을 더 뼈아프게 자아낸다'라고도 하였다.
  • 생전에 여기저기서 정치 입문을 많이 권유받았는데, 이를 전부 뿌리치고 열악하기 그지없는 한국 스포츠계의 진흥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 점에서 오늘날에도 순수한 스포츠 영웅으로 칭송받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야말로 한국 근대체육사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은퇴 이후에도 꾸준히 달리기를 하여 건강을 유지했기 때문에, 거의 한 세기를 살다시피 장수할 수 있었다.
  • 성품은 시원시원하고 활달하고 농담도 곧잘 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가 손기정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이후 황영조의 막장 행보에 따른 구설수를 생각하면 손기정에게 실례이긴 하다
1956년 레니 리펜슈탈과 함께. 손기정은 평소 정치랑 스포츠는 별개라 생각했으며 리펜슈탈은 결백하다 생각했다. 참고로 리펜슈탈이 손기정보다 10살 많은데 90세에 사망한 손기정보다 1년 후에 사망하였다.
  • 정말 뜬금없는 사실이지만 항상 마라톤하면서 얼굴이 반쪽이 된 사진만 찍혀서 그렇지 알고 보면 상당한 미남이다. 인터넷에서 중년시절 사진을 찾아보면 꽤나 잘생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젊었을 때도 꽤나 훈남이다.추성훈 닮았는데? 안성기 닮은 것 같기도 하다.
  • 자서전으로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베를린에서의 우승, 해방 전후의 사건들에 대해서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한가지 아쉬운 부분으로는, 이 자서전은 1983년에 출판되어서 그 이후의 일인 1988년 서울올림픽 때의 성화 봉송이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의 이야기 등은 없다는 점이다.


  1. [1] 일반적으로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실만 부각되다 보니 일제강점기 시절 사망한 사람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은데, 손기정은 90세의 나이로 2002년에 사망하였다. 조국 광복도 보고 1988 서울 올림픽 때 성화 봉송도 하였으며,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차지했을 때 일제강점기일장기를 달고 달려야 했던 자신을 되돌아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진출했던 것도 지켜봤고, 그해 열린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도 성화 점화자로 검토되었을 정도였다. 그때 손기정은 이미 1990년대 말부터 건강이 악화되었던지라 성화 점화나 봉송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부산 아시안 게임까지 지켜보았다. 하지만 손기정은 늘 "남북 통일이 되어 고향 신의주부산 간 역전 경주에 한 번 뛰어 보고 싶다"고 언급했음에도, 끝내 통일은 보지 못했다.앞으로도 할 가망이 안 보인다.대체....
  2. [2] 당시 양정고등보통학교 육상부 중장거리팀은 한반도 내에서만 유명했지만, 기록만 보면 세계적 수준이었다고 한다.
  3. [3] 왜 세계 신기록이 되지 못했냐면, 당시 서구 외 지역에서 열린 대회는 대회 운영이나 코스 길이를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시아 지역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4. [4] 여담으로 메이지신궁대회 마라톤 종목은 손기정을 시작으로 이후 3개 대회 연속으로 조선인들이 1위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1935년 손기정-1937년 유장춘-1939년 오동우가 그 주인공들이다.
  5. [5] 前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 2001년 사망.
  6. [6] 세계 기록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올림픽 기록이 맞다. 하지만 어차피 당시 세계 기록도 손기정이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 마라톤은 신기록 개념이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고 최고기록으로 표기한다. 마라톤은 기온과 습도, 바람 등의 여건이 대회마다 다르고, 급경사코스, 직선코스가 다르고 거리에서도 오차가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다른 육상 종목 기록이 갖고 있는 엄밀성은 없다. 그래서 마라톤에서는 ‘신기록’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최고기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코스 거리, 출발지와 결승점 간 표고차, 출발지와 결승점 간 직선거리 등을 규정함으로써 나름대로 기록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
  7. [7] 손기정의 우승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남승룡도 이때 막판에 스퍼트를 내서 30명을 추월하여 3위로 골인했다. 흠좀무
  8. [8] 당시 한글 표기로는 '슬푸다'.
  9. [9] 1982년 서울시기념물로 지정될 때 밝혀지길 이 묘목은 월계수가 아니고 대왕참나무이다. 모교인 양정중학교양정고등학교 교정에 심어졌으며, 양정중고가 목동으로 이전한 후 만들어진 손기정 공원에 남아있다. 현재는 거목으로 자랐고 서울시기념물 5호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로 보호받고 있다.
  10. [10] 이름은 어니스트 하퍼. 이 사람도 꽤나 대인스러운 일화가 있다. 이 대회 마라톤 경기의 우승 후보는 이전 대회 마라톤 우승자였던 아르헨티나의 후안 카를로스 자발라였는데, 마라톤 경기 도중 선두를 달리고 있는 자발라를 제치려고 손기정이 무리하게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같이 달리던 하퍼가 손기정에게 "그는 어차피 금방 지칠거니깐 무리하지 말라."며 충고를 해줬다. 이 충고를 받아들인 손기정은 1위, 하퍼는 2위를 차지했고, 자발라는 이내 기권했다. 하퍼의 충고가 없었다면 아마도 손기정도 무리해서 자발라를 추월하다가 뒤쳐졌을 수도 있으니, 손기정에게도 나름대로 은인인 셈.
  11. [11] 다만 본문에서도 나와있다시피, 손기정 선수의 자발적인 발언이 아닌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형태로, 손기정 선수의 진심이 담겨 있다고 보긴 어렵다.
  12. [12] アルゼンチン{亞爾然丁} ; 아르헨티나.
  13. [13] 이 부분에서 소리가 작아진다.
  14. [14] 가이드가 붙는 베를린 올림피아 슈타디온 투어를 하면 박의원이 너무 정교하게 바꾼 나머지 한참 나중에서야 일본사람이 지적해서 알아냈다는 얘기까지도 들을 수 있다. 가이드가 혹 감정 상할까봐 일본사람 한국사람 없는지 확인까지 하고서 해준다.
  15. [15]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소련에 있던 15개 국가나,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있던 7개 국가와 구 동독 국적의 선수였던 통일 독일이 이런 경우이며 1948년 이전에 중화민국 국적으로 뛴 선수들이 1952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소속이 바뀐 경우도 이와 같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첫 출전은 1980년 동계라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소속을 바꾸어 참가한 선수는 없겠지만. 다만 대륙 출신으로 대만으로 넘어가 지내다가 대륙으로 돌아감으로써, 양쪽 대표를 다 해보고 메달도 양쪽 대표로 다 따본 선수는 있긴 하다.)
  16. [16] 외국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기록에서 손기정의 국적을 한국으로 나타낸 경우가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기록 작성/편집자의 자의적인 생각이 강하며, 국제 올림픽 위원회가 공식 인정한 것은 아니다.
  17. [17] 1936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이후 1948 런던 올림픽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선수도 몇 있다. 이들이 두 번 다 메달을 따지 못해서 알려지지 못했을 뿐이다.
  18. [18] 이 명판은 잠실야구장잠실실내체육관을 잇는 길 중간에 있다. 올림픽공원의 경우 국기광장에서 호수쪽으로 내려오면 반원형으로 명패가 쭉 있다.
  19. [19] 3년제 보성전문학교 상과의 한 학년 정원은 100명 가량이었는데, 농구, 축구, 럭비, 육상 등 종목에서 선수를 뽑았더니, 과장된 표현을 섞어 전후 좌우로 한 학생 건너 운동 선수가 배치되었다고 한다. 남자프로농구 삼성 조승연(趙勝延) 단장의 부친 조득준(趙得俊)은 손기정과 함께 그 해에 상과에 입학했는데, 1938년부터 1940년까지 3대회 연속 전일본종합농구선수권대회를 평정하는 보전 농구부의 주력센터였다.
  20. [20] 하코네도쿄에서 서쪽으로 200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명승지인데 그 사이를 각 대학팀이 왕복하며 겨루는 역전경주는 일본의 한해를 여는 풍물시(風物詩)였다.
  21. [21] 사실 손기정은 성화 최종 점화자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단지, 문제는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한 덕분에 극비에 붙여져야 할 최종 점화자가 너무나 쉽게 예상되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손기정이 경기장으로 성화를 들고 들어오는 역할을 하고, 이후 임춘애가 넘겨받은 뒤, 최종적으로 3인의 일반인이 성화를 점화하였다. 손기정의 외손자인 이준승 씨의 회고에 따르면 손기정은 본인이 당연하게 최종 성화 점화자로 선택될거라 생각했는데 대회 직전에 이게 뒤집히자 의자까지 집어던지며 격노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체육계에서 손기정의 위상을 생각해본다면 무척 자존심 상했을 만한 일이었다.
  22. [22] 0:14~0:47 경기장 입장에서 넘겨주는 부분까지
  23. [23] 2017년 타계
  24. [24] 공교롭게도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한 날과 손기정 선수가 우승한 날은 8월 9일로 똑같으며, 이때 황영조의 두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손기정의 사진은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다. 당시 은메달이 일본, 동메달이 독일 선수라 폐막식 때 태극기 양 옆으로 일장기독일 국기가 나란히 올라갔는데, 이걸 보고 손기정은 "56년 전 그날, 한국인인 내가 일본 국기를 달고 독일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그 3개의 국기가 나란히 올라갔다"고 감격하기도.
  25. [25] 이걸 본 한 독일인의 뜻 깊은 감상이 담긴 편지도 있다고 한다. '손기정 독일인' 으로 검색하면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2001년도에 독일 언론인 슈테판 뮐러가 작성한 글이라는 듯. 참조 하지만 슈테판 뮐러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실명인지 가명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또한 그가 독일어로 썼다고 하는 글은 인터넷에서 알려져 있는데(현재 원문은 사라졌으며 일부 한국인들의 블로그에 그 글을 퍼온 게 남아있음) 이 내용의 한국어판(처음 한국에 알려진 것 기준. 저 독일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글 말고)과 비교를 해보면 원문이 독일어고 번역문이 한국어라고 판단하기엔 의심스러운 부분이 굉장히 많다. 한국어가 원문이고 그것을 독일어로 번역했다고 하면 설명이 되는 부분도 있다.
  26. [26] 1918년부터 1988년까지 만리동에 있었다. 1988년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
  27. [27] 서울역 뒷쪽
  28. [28] 베를린 올림픽 때 받은 금메달과 상장은 육영재단이 가지고 있었는데, 유족들이 장례식 때 잠시 빌려 달라고 했지만 육영재단은 거부했다. 으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29. [29] 대한민국 보물중 유일하게 서양에서 제작된 고대 유물이다.
  30. [30] 첫번째 보물은 보물 393호 전등사 범종. 원래 태평양 전쟁일본 제국이 녹여서 사용하려던 철제품(중국 종이라 철로 된 종) 중 하나였는데 해방 후 부천 병기창에서 발견되었다. 1097년 주조된 중국 하남성 숭명사의 종이었다는 사실이 명문으로 밝혀지고 있지만 어떻게 한국으로 건너왔는지 자세한 경로는 알 수 없으며 전등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31. [31] 두번째 보물은 보물 668-4호인 권응수 장군 유물 장검으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장수를 죽이고 노획한 검으로 일본에서 제작된 검이다.
  32. [32] 1938년에 신문에서 이 둘의 로맨스가 보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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