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유억불

1. 개요
2. 배경
3. 억불 정책의 방법과 영향
4. 예외 사례
4.1. 태조
4.2. 태종
4.3. 세종
4.4. 세조
4.5. 예종
4.6. 명종
5. 반론
6. 평가
6.1. 긍정론
6.2. 부정론

1. 개요

崇儒抑佛

억불 정책(抑佛政策) 또는 배불 정책(排佛政策). 불교 교단의 세력을 강제로 축소시키고 약하게 유지하기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의 주요 국가시책. 숭유라는 말이 들어가 있음에도 포인트는 억불에 있다는 것에 주의.

조선 초기 태조는 그 개인적으로는 불교에 매우 호의적인 사람이었지만[1] 건국 과정에서 급진적 개혁을 위해 기존 세력인 불교의 억불을 주장하는 신진사대부 세력과 손을 잡았기에 조선 건국과 거의 동시에 하나하나 시행되었다. 2대 정종은 유교나 불교 같은 것에 큰 관심 없고 재위기간이 짧아 뭘 할 수도 없었고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억불정책은 태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2. 배경

삼국시대 때 불교가 들어온 이후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불교는 약 1천년간 국교의 위치에 서서 정치권력과 많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지배계층이 불교를 동원하여 그 교리에 자신을 끼워맞추어서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 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신라는 성골 왕실을 전륜성왕, 석가모니 가문과 동일시했으며, 궁예나 견훤은 본인을 미륵과 동일시했으며 고려는 훈요 10조를 통해 불교의 입지를 대대로 공고히 하도록 창업군주 왕건이 못박아놓기도 했다. 팔관회와 연등회 같은 불교행사가 국가적으로 치러졌으며 수도에는 궁궐보다 더 크고 높은 황룡사, 흥왕사 같은 거찰이 지어졌다. 일반인의 생활에도 불교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조선 이전의 장례는 화장(火葬)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고,[2] 제사 음식도 절에서 차렸다. 명절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茶禮)라고도 말하는 것도 불교시대에 제사상에 차를 올리던 것의 흔적으로, 조선시대부터 불교색을 빼기 위해 술을 대신 올렸지만 옛 이름은 남은 것이다.

조선 이전에도 김춘추[3]나 고려의 성종처럼 불교세를 누르고 유교적 정치를 보다 추구한 경우도 있었지만 이들은 아래 조선의 억불과 그 강도에서 차원이 달랐고 목적도 달랐다. 사실 중국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신라, 고려시대까지는 유불도 삼교가 융합된 유불선삼교합일사상이 주류였지, 이 중 어떤 것을 강압적으로 배제하려는 모습은 시대별로 강경한 일부 외에는 대세가 아니었다.

고려 때는 국가 종교가 불교라고 할 만큼 불교가 성행하고 불교의 권력도 강했는데, 이를 숭불호법(崇佛護法)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려 때는 초기부터 지눌 스님 등 많은 승려가 불교의 너무 큰 권력과 패단을 막는 개혁을 계속 일으켰다. 고려 말기의 불교는 원나라의 티베트 불교의 영향으로 몽골 제국의 공주가 결혼하러 왔을 때 건축한 석탑 등 소수의 불교 석탑에 티베트 불교가 영향을 주었으나 수선사 천태종 등 토착 불교의 세력이 강해서 티베트 불교가 전파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려 초기와 무신 정권 때부터 이어지는 귀족들과 연계된 불교의 막강한 세력에 의해 고려 말기에는 사찰이 광대한 토지를 가지고 소작민들을 부렸다는 기록이 있으며[4] 승려들이 권력을 부리거나 재산을 축적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고려 초기 때부터 불교의 패단을 막으려던 지눌 ,의천 스님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세력이 강해졌고 그래서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주장하고 불교 사상은 억제하려고 하였으며 불교가 가진 토지들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정도전은 "청렴해야할 승려가 재산을 축내는 일이 많아졌다" 라는 식으로 말한 기록이 있다.

이 때문에 조선의 신진사대부는 불교의 세력을 억제하여 불교가 가진 토지 등을 개혁하였다. 불교세력을 청산하는 것이 필수적 절차인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후 조선 후기 유림 세력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서원이 자기들이 그토록 비판한 고려 말 불교 사찰 모습과 똑같은 형태로 부패했다는 점이다. 결국 흥선 대원군이 몇몇 서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원을 밀어버린 것도 선조인 태종이 몇몇 불교 사찰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찰을 밀어버린 것과 흡사하다.

3. 억불 정책의 방법과 영향

아래는 여러 가지 사례를 언급한 것이다. 어떤 것은 여러 임금에 걸쳐 꾸준히 지속되었고, 어떤 것은 한 임금 때에만 시행하였다.

  • 산지로 사찰 강제 이전/도시 내 사찰 폐쇄
조선 이전에 절은 산기슭만이 아니라, 지금의 성당이나 교회와 같이 도시의 길거리에 흔히 있는 시설이었다. 경주시에 있는 황룡사니 분황사니 사천왕사니 하는 큰 절 유적은 대부분 평지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절들을 산중턱으로 보내면 접근성이 떨어져 자연히 신도가 줄고 시주도 줄어들어 규모가 쪼그라들고 세력확장이나 정치세력과 야합하기가 어려워진다.[5] 이렇게 남은 산사들은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의 불교와 다른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고,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었다. 유네스코의 설명에서도 한국 특유의 산사 형성 과정에서 조선왕조의 도시사찰 제거 등 숭유억불 정책을 언급하고 있다. 도심지역 사찰 건물과 부지는 대개 향교로 재사용되어서 고령향교나 부여향교의 경우 향교 건물에 불교 특유의 연꽃무늬가 새겨진 삼국 시대 주춧돌을 쓰고 있는 것읅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낮아진 지위와 함께 산에 산다는 이유로 선비들이 행차할 때 산에서 잡일 일꾼이 필요하면 승려를 강제로 차출했는데, 조선시대 문인들이 금강산 등 명산을 유람하면 그 산에 있는 승려들을 가마중으로 차출해서 선비들이 앉아있는 가마를 어깨에 지고 산을 올랐다.[6]
  • 불교종파의 강제 통폐합
태종은 불교 종파를 11종단에서 7종단으로 줄였고, 세종은 더 나아가 2종파로 줄였다. 본시 시초는 고려 광종 시절이고, 이후 고려 숙종 시절로 의천과 숙종이 주도했다.
  • 사찰의 숫자와 승려의 숫자를 강제로 줄이기. 이는 고려 성종 시절 성종과 최승로가 첫 삽을 떴다. 단, 성종은 고려 왕 중 특별히 유교적인 케이스에 가까웠고, 팔관회 폐지 등은 2대를 못 가 현종이 되돌렸다.
  • 도성 내의 절은 불태우거나 가정집 등으로 전환. 세종 대에는 조선 전국에 선종 18개소, 교종 18개소를 합쳐 총 36개 절만 인정하였다.
    • 승려들은 환속을 강요받았다. 초반기엔 도첩이 없는 승려에 한해 강제되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다시 승려가 된 사람들이 속출한 것을 보면 가끔씩 한번 휘몰아치고 잊어버리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 과거 시험에서 승과를 폐지
승과는 중기 문정왕후가 다시 시행했다가 그가 죽자 다시 폐지되었다.
  • 사찰이 가진 모든 토지와 노비 등을 국유화. 승려들 보고 스스로 먹고 살라는 소리다.
  •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
다른 억불정책이 오래 가지 않아 엎어지거나 완화된 것과 달리 이 정책만은 구한 말에야 해제되었고, 이런 오랜 억불정책 청산의 상징으로서 지금의 조계사가 조선시대 이래 처음으로 사대문 안에 지어졌다.
  • 여성의 사찰 출입 금지
고려 말에는 1361년 어사대에서 몇몇 승려 무리들이 과부나 외로운 여자를 꾀어 비구니로 만들고 음욕을 행하며 불사를 행한다고 하여 교정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정도전이 불씨잡변을 써서 불교를 비판한다. 고려 시대 때 승려가 음욕을 행하려고 했다는 기록은 이것 뿐이다.[7]
  • 승려를 양인이 아닌 천민으로 대우함.
  • 왕릉에 쓰일 혼유석(왕릉 앞에 놓여있는 커다란 돌) 운반을 승려들에게 맡김.
  • 도첩제
나중에 금승법으로 대체되나 오래 가지는 않았다.
  • 경국대전의 도승조(度僧條)폐지
  • 국사(國師), 왕사(王師) 폐지
  • 사찰에 조상 제사 대행 금지
고려 시대에는 조상의 위패를 절에 맡겨서 제사를 대행시킨 경우가 많았다. 조선이 망한 후 현대에 들어 다시 절에 제사를 맡기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하는데, 5만 원만 내면 대신 지내 준다고. 500년만의 전통 부활
  • 국가적 불교 행사 폐지
팔관회는 건국되자마자 폐지되었고 연등회는 규모가 줄어들었다. 신라 때부터 열렸던 팔관회와 연등회는 고려 성종이 일시적으로 폐지한 적이 있었으나 이후 현종 시절 다시 부활해 고려시대 내내 번창했던 행사였으며, 고려 태조가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었다.
  • 면세 혜택 금지
지금으로 치면 종교인 과세와 비슷한 것인데, 조선 초에는 승려들이 조세는 물론 공물도 제공했어야 했다. 정작 유생들은 오랜 기간 면세 혜택을 받아서 이후 호포법 등을 통해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 사찰 재산 몰수
절을 부숴서 승려는 군인으로 바꾸고, 남은 땅은 향교에 붙이기도 했고 절에 걸려있는 범종은 떼어내 녹여서 승자총통 등으로 만들었다.

오래된 불상들을 보면 머리가 없거나 훼손된 불상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대부분이 조선 유학자들의 불상 훼손에 의한 것으로 본다.조선판 홍위병 지금까지 파괴된 채로 유물로 남은 사례로 남산 삼릉골 소재 불상군, 용장계 용장사지 미륵장육상, 보리사 석조여래좌상, 금강산 굴불사지 불상군, 분황사 경내 우물 속에서 발견된 목이 잘린 불상 20여점 등이 있다. 불상뿐 아니라 고승의 행적을 기록한 고승비 등 불교와 관련이 있는 다른 종류의 문화재들도 조선 전기에 다수가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의 목표는 교단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세력을 억압하고 교세를 강제로 축소하는 것이지, 부처의 가르침 자체를 금지하고 불교 신앙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뿌리뽑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진짜로 그럴 목적으로 시행된 것이라면 금승법 정도. 내세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는 유교만으로는 대중들의 종교적 욕구를 모두 충족하기가 어려웠으므로, 불교에 대한 수요는 사라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불교가 난잡해서 규율이고 뭐고 없는 토속신앙이였다면 모를까 엄연히 체계와 규모를 갖춘 종교였기 때문에 뿌리를 뽑는다는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불씨잡변을 쓴 정도전처럼 불교 혐오 성향이 짙은 강경파 사대부들도 그런 현실을 무시할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았는데, 가령 태조가 무학대사를 왕사로 임명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반대를 표하지 않았다. 따라서 민간신앙으로서 불교는 접근성을 낮추는 간접적인 조치만 취하고 놓아두되, 교단에서 현실정치에 영향을 부릴 만한 힘은 뺏은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무엇보다도 불교와 지배층의 야합이 가장 경계되었고, 결국 사대부들과 관료들 사이에서는 불교를 멀리하고 불교를 맹렬히 공격할수록 개념인이라는 풍조가 정착했으며, 경연이나 국가 시책에 대한 회의에서 역대 왕조에 대해 평가하면서 '이게 다 불교 때문이다' 란 식으로 책임을 돌리는 사례도 많았다. 특히 고려 왕조가 멸망한 이유가 하나도 둘도 불교였다는 건 거의 레퍼토리 수준.

또한 비록 불교신앙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으나, 혹세무민이나 기복신앙과는 담쌓고 부처의 가르침 자체를 가까이하는 사대부조차도 사대부답지 못하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율곡 이이 같은 당대의 거물 유학자도, 생전은 물론 사후 100년 가까이 지난 현종 시절에 이르기까지 한때 절간에 들어가서 불경 좀 외우고 다녔다고 비난받은 바 있다.

정부 차원에서 억불을 행하기는 했어도, 그나마 한양이 지방보다는 덜 심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대체로 왕은 불교를 그나마 옹호하려고 하고 성리학자 대신들이 주로 비판는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태조 이성계조차 잠저 시절부터 독실한 불자였고, 효령대군 같이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왕족도 있었으며, 이후로 간간히 왕이나 왕실인사가 불교를 보호하는 경우가 잦았다. 정부에서도 두부 제조나 공사 등에 승려들을 동원했고, 동서활인원에서 일하는 이들도 노비와 승려였고, 매골승이라고 해서 한양과 성저십리에서 버려진 시체를 매장하는 것도 승려가 맡았다. 또한 유생들이 너무 승려들을 핍박하면 유생들을 처벌하기도 했고, 유생들이 절에 올라가서 행패를 부리는 걸 알고는 절에 가는 것을 금하는 상서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런 풍조 속에서 지방 유생들이 회암사나 분황사 등의 절에 직접 테러를 가한 정황이 보이기도 한다. 회암사의 경우는 아래에 서술되어 있으며, 분황사는 근처 우물[8] 안에서 목이 잘린 불상 수십 좌가 나왔다. 불상은 비록 넘어지면 목이 쉽게 부러지는 구조이지만, 목 잘린 불상이 우물에 가득 쳐박혀 있는 건 반 불교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작정한 반달리즘일 가능성이 높다. 이 불상들은 건져서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관에 줄 세워 놓았다. 경주 남산에서도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의도적으로 파불(破佛)됐던 불상과 조각의 안면과 목을 다시 몸체에 붙여놓은 것을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극단적인 사례들은 일부 유교 극단주의자들이 주도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 조정의 공식 입장은 이 정도로 강경하지는 않았다. 또한 사찰에 이 짓을 하려다가 오히려 처벌받은 사례도 있다. 특히 아래에 나온 것처럼 왕실과 직접 연관된 사찰이나, 실록 보관 등 조정의 일을 맡은 사찰을 테러하면, 억불의 문제가 아니라 조정과 왕실에 도전한다는 의미가 되므로 엄히 처벌했다.

임진왜란에서 불교계가 활약하면서 약간 억압이 완화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 예로 승려의 묘비라고 할 수 있는 고승비는 신라, 고려 시대에는 활발하게 제작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막 건국된 이성계 대에 세워진 것을 제외하고 15,16세기 200여년 동안에는 억불정책에 의해 단 하나도 건립되지 못했는데, 임진왜란에서 활약해 광해군의 배려를 받은 사명당을 기점으로 우후죽순처럼 세워져 19세기까지 170여 개가 세워졌다.

이는 인조대를 지나면서 왕실 후손 특히 아들의 숫자가 급속도로 적어진 것과도 연관이 있는데, 어떻게든 후사를 보아야겠기에 왕실 여성들이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고, 왕들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조선 후기에 들어온 서학처럼 대놓고 박해를 한건 아니라서 조선시대 동안 불교는 그럭저럭 명맥은 이었으나 숭유억불이 약 500년간 계속되면서 조선 말엽에는 한국 불교가 고사하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데, 불국사와 같이 조선 중기에는 전라도에서도 신도가 찾아가던 대찰이 다 무너져가는 상태로 사진이 남았고 이 때쯤이면 제대로 구족계를 이어받은 승려도 나오기 힘들어졌다. 밀교 같은 소수 종파는 조선 중기까지 명맥을 잇다가 끝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갑오개혁을 전후해 억불정책이 끝나고, 천민 대우를 받았던 승려들이 서울을 출입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 억불정책은 일제강점기에도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 불교가 친일을 행하게 된 것도 이 억불 정책의 잔재라는 해석이 있다. 오랫동안 한국 불교가 억압당했다는 걸 알던 일제가 불교에 대해 회유책을 사용하고,[9] 불교계도 여기에 넘어가서 친일 성향이 강해졌다는 것. 그 외에도 승려나 불교단체를 천시하는 풍습이 유교계에서 여전히 남아 있었다.

4. 예외 사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대체로 왕은 불교를 나름대로 변호하려고 하고 성리학자 대신들이 비판하는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즉 왕실은 불교계에 그나마 온정적, 우호적이었던 편이다.

4.1.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되기 전부터 원래 불교를 독실히 믿는 전형적인 고려인이었고 특히 무학대사를 왕사로 임명한 것이나[10] 그와 교류를 나눈 것을 보면 조선 최고의 친불 군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교 국가 조선의 설계자이며 극렬 혐불주의자인 정도전조차도, 이성계에게 '왕위에 오르려면 불교 신앙을 포기하라.'고 강요할 순 없었다. 그러나 신앙심과는 별개로 불교를 억눌러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4.2. 태종

태종 8년에 당시 태상왕이었던 태조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궁궐 안에 승려 백여 명을 불러들여 기도를 올리게 했고, 스스로 향을 사르고 팔뚝에 연비까지 했다. 또 궁 안에서 기도 올려도 되느냐는 물음에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한 것이니 무슨 해가 되오리까' 라는 황희의 진언은 덤.

이보다 앞서서는 손녀가 병에 걸리자 개성의 연복사에서 기도를 올리게 했으며, 원경왕후의 병중에도 역시 궁 안에 승려들을 불러들여 기도를 드리게 하고[11] 사찰에 토지를 기부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입장과는 달리 사찰을 철폐하고 불교 종파를 통합하는 등 억불 정책에도 힘을 썼다.

4.3. 세종

세종 6년에 불교 종단을 통폐합하여 선교 양종만 남겼고, 태종의 폐불정책 이후 전국에 남아 있던 사찰들을 다시 무너뜨려 오직 36개만 남겼다. 그리고 승려들의 도성 내 출입을 금지했다.

그러나 비록 무산되기는 했지만 모후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 근처에 사찰을 지으려고 했으며, 차후 내불당을 설치하고 승려 신미를 총애하고 승과를 실시하는 등 상당한 친불 정책을 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보급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친숙한 부처의 이야기를 석보상절로 낸 것을 보면 당시 백성들의 불교 신앙을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작은형 효령대군과 차녀 정의공주도 독실한 불자로 유명했다.

4.4. 세조

세종 대에 이미 왕명을 따라 부처의 이야기를 책으로 냈다.

불교를 옹호하는 발언을 많이 남겼는데, 몇 가지만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가 병상에 있을 때, "궁궐에 법당을 지어 심신을 달래야 한다"
  • "불교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배척하는 망령된 자이니, 나는 절대로 그딴 놈을 취하지 않겠다!"
왕자 시절의 발언인데, 이게 왕이 된 것마냥 한 발언이라서 문제가 되었다.
  • "공자보다 석가모니가 훨씬 낫다"
  • "나는 호불(好佛)의 군주다!"

또한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 왕위에 오르기 전 사헌부에서 도첩이 없는 승려를 잡아가자 멋대로 풀어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권력에 대한 야심 표출이라는 해석이 있으며, 본인도 월권행위라는 걸 인식해 바로 다음날 해명서를 제출했다.
  • 원각사, 간경도감(불경을 간행하는 국가기관) 설립. 원각사를 짓기 위해서 집이 200채나 철거되고 많은 재물이 쓰였는데 그런데도 신하들은 "원각사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났습니다"라고 해야 했다.
  • 친필로 부처에게 봉안할 문서 작성

4.5. 예종

성종 때 도첩제 폐지 안이 나왔을 때 신하들이 "예종께서도 불교 좋아했지만 명이 짧았습니다."라고 했는 걸로 보아, 불교를 신봉한 듯.

4.6. 명종

중종의 중전이자 명종의 모친인 문정왕후[12]이 불교 보호에 힘썼다.

본인도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이를 금지했다.[13]

하지만 본인이 불교를 신봉했다기보다는 문정왕후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실제로 문정왕후도 유서에 왕이 친불교 정책에 반대하더라도 대신들은 자신의 뜻에 따르라고 당부했다.

5. 반론

조선시대에 불교를 강력하게 억압했다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조선시대 불교 쇠퇴설은 대표적인 식민사학자 다카하시 도오루의 <이조불교>에서 확립된 것이다.

최근에는 조선시대에 불교가 쇠퇴한 게 아니라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현존하는 사찰 대부분이 조선 후기에 중창·중수되었고 불서가 빈번히 간행되었으며, 수행 체계와 법통이 정립되고 강학이 성행하고 교학이 전수되는가 하면 사원 경제의 기반이 확대되고 염불 정토 신앙이 성행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조선 불교의 쇠퇴론이나 멸절론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손성필도 최근 <보조사상> 제40집에 게재한 ‘조선시대 승려 천인신분설의 재검토’에서 “조선시대 승려는 천인 신분이 아니었다. 승려 천인 신분설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아직 정설은 아니며, 지금도 교과서에 실린 정설은 조선시대의 승려는 천인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이전 신라, 고려 때에 비해서 그 화려하고 창대했던 귀족적 세력과 지배층적 성격이 크게 줄어든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특히나 돈줄이 되어 줄 수 있는 당대의 사대부 권력층이 워낙에 불교를 멀리하는 바람에.[14] 당장 조선왕조실록에서 불교나 승려 같은 단어를 검색하면, 불교를 공격하는 기사들이 한 트럭 쏟아지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많은 사찰이 중수됐지만 폐허가 된 조선 후기 불국사 사진처럼 또 많은 사찰이 망해서 없어진 것도 사실이다. 줄어들었는데 쇠퇴한 게 아니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6. 평가

6.1. 긍정론

숭유억불의 실상이 무조건 정치적 보복 및 숙청 행위였다고 보기에는 진짜로 불교가 저지른 폐단이 꽤 많았다.

고려시대 이전처럼 매년 국가 예산을 펑펑 들여서 팔관회를 열고 고래등 같은 절간에 화려한 가사 장삼을 두른 귀족 승려들이 활개치며 소작민을 부리고 사병을 키우며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불교 본연의 시각에서 불교의 발전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본에서 전국시대까지의 오랜 폐단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싹쓸이를 시전했던 승병단이 바로 이들이다. 그런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중생들 속으로 뛰어들어간 석가모니의 가르침 자체가 필요가 없고 불교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특히가 불교가 말하는 윤회론은 불교 내에서도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실제로 부처가 이것을 말했는지 논란의 여지는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 신자들끼리도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간, 그리고 대승불교 내에서도 선종과 교종간 논란은 불교 신자들 사이에서 숱한 알력과 불신과 상처를 남길 정도였다. 선교 통합론이냐 아니냐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불교를 싫어하거나 안믿는 사람들 입장에선 밥그릇 싸움 그 자체이다.

후대의 입장에서는 유럽의 성당이나 일본의 사찰처럼 외국에 자랑할 수 있는 크고 화려한 문화재를 남겨주지 않아 비난하기도 하지만[15], 불교의 진정한 발전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얼마나 잘 파고들며 가련한 중생들의 번뇌를 얼마나 잘 달래주느냐에 있을 것이다. 이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번역에 문제가 생겼고, 계율에 의거하여 자질없는 승려들을 쫓아내는 노력이 필요했으나 삼국시대나 발해와 신라왕조나 고려왕조의 경우는 이것에 대해 게을렀던 감이 많았다. 현재도 불교 탄압이 사라지고 오히려 기독교의 타락에 대한 반감으로 불교에 호감을 갖는 사람이 좀 늘어나면서 고려시대만큼은 아니라도 불교를 우대하자 다시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져나오고 있다. 조계종 승려들이 범죄에 연루되어 불교 종단은 매우 엉망이 되었고, 이전에는 천성산 공사에 무리하게 반대하여 불교가 받는 지탄도 거세졌다. 결국 몇 년 뒤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여 마침내 종교인 과세를 단행하게 되었다. 종교인 과세 문제를 놓고 생각해보면 나름 이해갈 만한 대목이다.

6.2. 부정론

불교 측에선 유학자들도 실은 불교를 믿었고 도교를 남몰래 믿고 좋아했다고 불교에 대해 폄하한 유학자들에 대해 높은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까기도 한다. 불교가 오랑캐가 믿는 국가라고 했으나 정작 유교에서 추앙받는 요순 또한 이민족 출신이었다. 유교를 좋아했던 북위의 효문제나 북주의 무제도 이민족 출신이라고 했다. 즉 이민족 출신들도 유교를 믿었다는 것으로 반론할 수 있다. 이것은 유교 정책을 펼친 금 세종과 비슷했다.

불교도 사실 고려 성종이나 최승로에 대해서 높은 평을 하기도 했는데 그들도 본시 불교 신자였고 최승로도 실은 절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주장했다. 김부식도 불교를 믿었고 정도전 역시도 승려와 접촉해 불교 지식이 꽤 높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을 했다. 다시 말해서 숭유억불은 불교 자체에서 불교의 업보라 인정했고, 그리고 동책정수에선 이런 점을 참작해서 불교를 미워하는 것은 좋으나 정치를 하는 유학자들이 유학자 노릇을 하지 못하면 백성들이 불교를 믿는다면서 깠다. 우리가 흔히 알던 유교는 이미 쇠락하여 그 유교의 장점들을 불교, 개신교, 천주교 3대 종교가 대부분 흡수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보면 숭유억불 자체도 초기면 모를까 중기나 후기에 이걸 적용하기란 무리수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불교와 유교는 함께해왔고 조선왕조에서도 여러 민중들이 믿었기 때문에 일일이 다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유교 역시 지금은 유대교와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강요, 권위주의, 문자주의로 비판받고 있는데, 변질된 유교적 전통의 영향이 크다. 일반인들에게도 매우 욕먹고 있는 게 지금의 유교이며 불교나 천주교 측에선 유교=유대교=개신교 공식으로 싸잡아 욕먹고 있다(...). 특히 현각 스님이 불교를 깔 때 유교를 상명하복이라 깐 것을 봐도 불교에서 유교에 대한 반감은 굉장히 높다.


  1. [1] 일단 불교가 국교이던 고려 사람임을 차지하고서라도, 무인 출신이라서 별다른 공부 없이도 열심히만 살면 누구든지 부처가 되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불교(정확히는 선종)의 교리가 좋을 수 밖에 없었다.
  2. [2] 21세기에도 화장 비율이 늘고는 있지만, 조선시대부터 20세기까지는 매장이 대부분이었다. 고대부터 매장을 일삼았다면 지금 전국에 남는 땅이 없었을 것이다.
  3. [3] 김춘추가 사실상 실권을 쥐었던 진덕여왕 재위기 포함
  4. [4] 하지만 승려가 재산을 축내고 패단이 심했다는 것은 고려 초기부터 기록이 있다. 그래서 지눌 등이 수선사를 통해서 개혁을 하려고 했던 것
  5. [5] 대신 승려들의 수행에는 도시보다 산 속이 오히려 도움이 되므로, 조용히 수행하고 싶은 승려들은 오히려 환영(?)했다고도 한다.
  6. [6] 정선의 회화 백천교에서도 이런 가마중을 그리고 있다. 조선 조정에서는 선비들이 절에 올라가 행패를 부리는 걸 좋지 않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산사금지령을 내렸으나 실효는 없었다.
  7. [7] 네이버지식백과
  8. [8] 경내에 있는 돌우물이 아니라, 분황사 북쪽 담에서 약 33 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신라시대 우물이다.
  9. [9] 물론 이는 불교를 아직 깊게 신봉하던 일본의 문화적인 이유 또한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친일파를 늘리려는 정치적인 이유 또한 있었다.
  10. [10] 이로써 무학은 조선 시대에 왕사 칭호를 받은 유일한 사례가 된다.
  11. [11] 이 때 승정원 관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불교 교리 그거 헛소리인 줄 잘 알지만 부인이 불교를 믿고 있어서 이렇게 기도 드리는 거다' 라 했는데, 요즘 말로 츤데레 소리 듣기 딱 좋은 발언이다.
  12. [12] 명종 즉위 당시에 수렴청정을 함.
  13. [13] 그런데 그걸 기록한 사관은 "왜 밖에서 그런 소문이 왕한테까지 들어가서 일을 못하게 되었냐?"는 식으로 써 두었다. 한마디로 불태웠어야 한다는 것인데, 얼마 가지 않아 실제로 불타고 말았다.
  14. [14] 특히 조선 후기의 지배층이 된 사림파가 더더욱 멀리했다. 더군다나 호불군주인 세조에 의해 형성된 훈구파 또한 불교에 관대한 것과 별개로 기본적으로는 유교를 숭상했다.
  15. [15] 조선은 유교적 가르침에 따라 정부가 나라를 비교적 검소하게 운영했기에, 한국에서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원색적이고 화려한 문화재를 보기 어렵다. 사실 이러한 문화재들은 대부분 중간에 자연재해로 박살나고 다시 중건한 것들도 꽤 많다. 예를 들어 일본의 오사카 성 천수각 같은 경우는 19세기에 한번 벼락으로 박살났다가 1931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복구되었고, 이전에도 몇 번 박살난 적이 있다. 중국에서도 만리장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번 훼손되었다. 자금성도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박살이 날 뻔 했으나 저우언라이가 군대를 보내 보존되었고, 베이징 성은 혁명의 여파로 아예 사라졌다. 그리고 애당초 크고 화려한 문화재는 당시의 기술로는 인력으로 지을 수 밖에 없으며 그 동원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대가는 없다. 그러면서도 자재를 마련하는 등의 일에 막대한 금전적, 시간적, 인적 손실이 발생하니 후손인 우리 입장에서야 왜 그런 걸 안 지었냐고 아쉬워하겠지만 조상들이 들으면 기가 막히고 어이를 상실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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