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푸트니크

Спутник[1]

Sputnik

1.1. 개발사
1.2. 행적
1.3. 후폭풍
1.4. 여담
2. 러시아의 국영 매체
3. 러시아의 검색 엔진
5. 라다 사마라의 내수 모델명
6. 델 XPS 13 developer edition의 개발당시 코드명

1. 인공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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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 1호의 내부 구조

우주시대의 첫 발걸음

1957년 10월 4일 소련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발사된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으로, 냉전을 심화시키고 우주경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스푸트니크 1호는 러시아 우주계획의 선구자인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 치올코프스키[2]의 탄생 100주년과 국제 지구 관측년(1957년 7월 1일∼1958년 12월 31일까지의 18개월간의 기간)의 기간에 맞추어 발사되었다.

금속구 모양의 본체에 4개의 안테나가 달려있어

"삐...삐...삐...삐..."

또는

"뿌-뿌-뿌-뿌-뿌-뿌-뿌-뿌"

라는 소리를 전세계로 송신했다.[3]

1.1. 개발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소련은 독일V-2 로켓을 기초로 해 ICBM 개발 경쟁을 시작했다. 당시 소련은 미국 사회에 먹일 '한 방'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것을 찾고 있는 상황이었다. 1947년 10월에 첫번째 소련제 V-2 로켓의 시험발사가 성공했지만, 이미 미국은 V-2를 수백 발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무언가 더 엄청난 것이 필요했다. 미국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이오시프 스탈린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의 명령을 받은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V-2 로켓의 설계를 그대로 카피해 사정거리가 278km인 R1 로켓과 사정거리가 556km인 R2 로켓을 개발했다. 그러나 R2 로켓은 V-2 로켓의 길이를 14m에서 16.9m로 늘려 연료를 더 채운 것에 불과했다.

사실, 코롤료프는 전쟁 무기 개발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저 로켓과 우주가 좋아서 연구를 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공위성우주에 올린다면 그만큼 그의 조국에 애국하는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를 위해서는 데이터 수집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의 연구팀은 곧 동물을 이용한 고고도 비행 실험을 시작했다. 탑재물은 러시아인들이 친근하게 생각하는 가 주로 이용됐다. 이러한 고고도 실험들은 우주비행이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몇 분 동안의 실험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일부 과학자들은 지구 궤도를 끊임없이 돌 수 있는 인공위성을 발사하자고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은 스탈린의 아들인 바실리 스탈린 소련 과학 아카데미 소장의 화를 돋우었다. 바실리는 인공위성 제안서를 제출한 과학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추상적인 계획을 세워 시간을 낭비할지라도 동무는 공공요원이기 때문에 국가방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하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트 전투기지 어리석은 스푸트니크(동반자)가 아니란 말이오." 그렇게 인공위성 발사계획은 잠시 잊혀지는 듯 했으나, 몇 년 뒤에 다시 빛을 보게 된다.

한편, V-2 로켓 기술의 습득을 완료한 소련의 다음 목표는 서유럽까지 핵탄두를 나를 수 있는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서방에서 'SS-3 샤이스터'(사기꾼이란 뜻)라고 부른 이 중거리 탄도미사일의 사정거리는 1,204km로, 1955년 실전에 배치됐다. 1957년 6월에는 1Mt의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사정거리 1,800km의 SS-4 샌들 중거리 탄도미사일이 완성됐다. 이로서 미국이 핵무기를 배치했던 서유럽,[4] 서아시아,[5] 동북아시아[6] 지역은 모두 소련의 미사일 사정거리 내로 들어오게 되었다.

소련이 인공위성 개발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탄도미사일 개발에 한참 자신감이 붙던 1955년이었다. 그 해 1월 소련은 중앙아시아 지역(현 카자흐스탄)에 위치한 퇴레탐에 대륙간 탄도 미사일 시험장을 건설하고, 마침내 1957년 8월 3메가톤의 수소폭탄을 7,000km 떨어진 곳까지 나를 수 있는 세계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인 R-7을 시험발사하는데 성공했다. 9월 두 번째 시험발사는 당 제1서기였던 니키타 흐루쇼프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졌다. 평소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싶어했던 코롤료프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소련이 한창 발사체 개발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을 즈음, 미국은 공군에서 개발하고 있던 아틀라스 시험이 계속 실패, 개발 일정은 하염없이 지체되어 있었다. 이를 안 코롤료프는 흐루쇼프에게 미국을 엿먹이기 위해 R-7(위성을 쏠 때는 A로켓이라고 부름)을 이용해 인공위성을 발사하자고 설득했다. 게다가 미국이 최초의 인공위성으로 준비하고 있던 뱅가드 위성을 쏘아올리기로 약속한 날이 불과 몇달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흐루쇼프는 인공위성 발사계획을 승인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코롤료프의 기술자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이 임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코롤료프는 결국 팀 멤버들을 하나하나 설득시켰다. 당시 코롤료프가 그의 팀 멤버 중 한명이었던 유리 실라예프(Ю́рий Сила́ев)에게 스푸트니크는 가능하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말한 것 중 명언이 하나 있다.

코롤료프: 달을 보곤 하는가?

실라예프: 예, 봅니다.

코롤료프: 스푸트니크가 그것처럼 보일 거야, 조금 작은 별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BBC 다큐 'The Planets' 中

발사전 정비중인 스푸트니크 1호

팀을 수습한 후, 그는 바로 인공위성 제작에 착수했다. 그 전에도 비밀리에 제작하던 모델이 있었지만, 복잡한 과학탐사를 위해 설계된 그 모델을 테스트하여 쏘아보내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더 큰 문제는 해당 모델을 납품하던 제작사들이 규정 설계를 단 한곳도 안지켜서 모듈이 서로 안 맞고 중량은 초과되는 등 이걸 수정하고 테스트하여 제기간에 쏘아올리는게 불가능했다. 이에 빡쳐도 단단히 빡친코룔료프는 방향을 선회, 송신기와 간단한 측정기만 장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7] 모양은 천체 모양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코롤료프는 또한 인공위성이 지상에서 육안으로 보일 수 있기를 바랬다. 인공위성은 몇 달도 안 되어 준비되었고,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스푸트니크 1호는 라디오 송신장치를 단 지름이 58cm인 공 모양의 인공위성이었다. 무게는 83.6kg. 그리고 코롤료프는 그의 아들같은 첫 인공위성에 ''동반자'라는 뜻의 '스푸트니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인공위성의 발사준비는 몇 주 내로 완료되었고, 흐루쇼프는 발사명령을 하달했다.

그리고 1957년 모스크바 시간으로 10월 4일 오후 10시 28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A로켓 엔진이 불을 내뿜으며 스푸트니크를 우주로 올려보내기 시작했고, 5분 후 인간이 만든 최초의 은 궤도에 자리를 잡고 최초의 메시지를 지구로 보내왔다. 흐루쇼프가 인공위성 발사계획을 승인 했을때 프로파간다의 목적으로 위성이 발신하는 신호는 암호화하지 말라고 연구팀에 명령했고, 전세계의 사람들은 우주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삐...삐...삐..." 소리의 첫 신호를 들을 수 있었다.[8]

같은 시기 워싱턴 D.C.의 소련 대사관에서는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이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월요일부터 시작된 '국제지구관측해'(IGY)를 기념한 '로켓과 인공위성'이라는 학술세미나였는데, 당시 양국의 과학자들이 만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세미나 후에도 이야기를 나누며 즐기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자신들의 우주계획을 1급 비밀에 부치고 있었기 때문에, 서방 과학자들은 저마다 소련 과학자들 옆에 붙어 진척 상황에 대해 묻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에 취한 듯한 한 러시아 과학자가 "우리는 조만간 인공위성을 발사할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조만간'이 대체 얼마냐?"고 미국 과학자가 묻자 그는 "1주일 아니면 한달."이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장내는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1주일이라고?" 미국 과학자들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작 농업국가 밖에 안 되는 소련 따위가[9] 어떻게 우리 미국보다 먼저 인공위성을 발사하겠어?"라고들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우주에 인민의 감자를 쏘아올려 농업국가의 져력을 보여주었다[10]

한편, 연회를 즐기고 있던 과학자들 틈바구니에는 뉴욕타임스기자인 월터 설리번도 끼여 있었다. 파티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그는 신문사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내용은 러시아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오늘 발사했다는 뉴스가 타스통신(소련의 국영언론)으로부터 들어왔으니 확인해보라는 것이었다. 설리번은 파티장으로 헐레벌떡 뛰어들어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게 정말로 올라갔어!" 소련이 미국의 뱅가드 로켓계획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자신들의 R-7 미사일을 개조한 A로켓을 이용해 미국을 엿먹인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옥상으로 올라가 인공위성을 보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너나없이 대사관 지붕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작은 인공위성인데도 불구하고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스푸트니크 1호는 그들이 파티를 벌이고 있는 동안 그들의 머리 위를 2번이나 지났다.

소비에트, 인공위성을 우주로 발사
지구를 시속 18,000마일로 공전중
미국 상공을 4회 가로지른 것이 포착됨

- 뉴욕 타임스, 1957년 10월 5일 헤드라인

그리고 그 날, 세계는 완전히 변했으며 우주시대가 시작된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1.2. 행적

스푸트니크 1호는 인류 최초로 92일 동안 지구를 돈 후에 대기권에 돌입해서 소멸되었다.

스푸트니크 2호는 1957년 11월 3일에 세계에서 두번째로 발사되었다. 여기에는 개 한 마리가 탑승했으며 이 개가 그 유명한 라이카이다. 그러나 재돌입 기술의 부재로 라이카는 지구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2호는 발사 162일 후인 1958년 4월 14일 대기권에 돌입해서 소멸하였다.

스푸트니크 3호는 1958년 2월 3일에 발사 실패 이후 5월 15일에 성공한 위성체로 1,327kg에 달하는 무거운 위성[11]이었다. 같은 시기의 미국 위성과 비교하면 넘사벽.[12] 정식으로 '스푸트니크 #' 형태로 발사된 위성은 이게 마지막.

스푸트니크 4호는 이때부터 소련에서 스푸트니크가 아닌 korabl-Sputnik란 이름으로 발사된다. 1960년 5월 15일에 발사되었다. 최초의 보스토크 프로그램을 위한 테스트 발사였으며 유인우주비행을 위해 재돌입장비를 탑재하여 실험하였으나 유도장치의 오류로 더 높은 궤도로 튀어올라가 버린다. 1962년 9월 5일에 대기권에 진입. 잔해 중 일부는 미국 위스콘신 주 매니토웍 시가지에 떨어졌다.

스푸트니크 5호는 1960년 8월 19일에 발사되었고, 두 마리의 개가 탑승했으며 이들은 모두 무사히 귀환했다. 이 개들의 이름은 벨카스트렐카이다.

스푸트니크 6호는 1960년 12월 2일, 프첼카와 무쉬카라는 두 마리의 개를 태우고 발사되었다. 안타깝게도 대기권 진입 도중 역추진 로켓이 제대로 점화되지 않아 높은 각도로 진입하였다가 폭발하여 산화하였다. 6호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같은 달 22일 담카와 프라사바카라는 두 마리의 개를 태운 스푸트니크가 발사되었으나, 로켓 결함으로 준궤도 비행만 수행한 후 귀환한다. 결국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소련 당국에 의해 스푸트니크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스푸트니크 7호는 1961년 2월 4일에 발사되었다. 금성탐사를 위한 관측기를 탑재하고 있었으나 분리에 실패한다.

스푸트니크 8호는 1961년 2월 12일에 발사되었다. 베네라 계획의 첫 탐사선인 베네라 1호를 성공적으로 분리하였다. 베네라 1호는 금성에 10만km 이내의 근접 비행에 성공하였으나 데이터 전송에는 실패하였다.

스푸트니크 9호는 1961년 3월 9일 무게를 맞춘 우주인 모형과 개 체르무쉬카, 그리고 생쥐기니피그를 싣고 지구 궤도를 한바퀴 돈 뒤 성공적으로 귀환하였다. 오오 인간보다 빠른 우주관광

스푸트니크 10호는 1961년 3월 25일에 발사되었으며 우주인 모형과 개 즈베도쉬카, 그리고 촬영장비와 과학장비를 싣고 발사되었다. 역시 지구 궤도를 한바퀴 돈 뒤 무사히 귀환했다.

이후 소련은 보스토크 계획을 실현,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지구 궤도에 오름으로서 미국을 다시 한 번 엿먹이며, 그 후로도 우주 경쟁을 독주하면서 미국을 계속 엿먹인다.

스푸트니크 11호~18호는 소련 당국에 의해 그 존재가 은폐되었으며, 서방의 관측자들에 의해서 순서대로 이름이 붙여졌다. 18호 이후 스푸트니크는 25호까지 발사되었으나, '마스 1호'로 명명된 23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기권 밖으로 떠나지조차 못했다. 그 마스 1호조차도 화성에 접근하기 전에 파괴되었다. 25호 이후 소련 당국은 위성에 스푸트니크라는 이름을 더 이상 붙이지 않았고, 대신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우주시대의 지평선을 연 소련이 스푸트니크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이 공중분해된 뒤였다. 1997년 10월 5일 바이코누르에서 다른 몇 개의 위성과 함께 소유즈 로켓에 실려 발사된 스푸트니크 40호는 11월 3일 미르 우주정거장에서 조립되어 궤도에 안착하였다. 스푸트니크 40호는 PS-2, Radio Sputnik 17(RS-17)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위성은 사실 스푸트니크 1호 발사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러시아와 프랑스 학생들이 만든 스푸트니크 1호의 1/3 사이즈 피규어축소 위성이었다. 스푸트니크 40호는 1997년 12월 29일 연락이 두절되었고, 1998년 5월 21일 대기권에 진입하여 소멸하였다.

발사까지 우여곡절이 있었고 당시 최첨단 기술이 총동원되었을 스푸트니크 1호를 비록 축소형이지만 40년이 지난 후 학생들이 뚝딱뚝딱 만들어내어 기념으로 우주에 올리는 모습이 참으로 감개무량했을 것이다.

1.3. 후폭풍

이 위성이 발사되었던 당시, 미국과 소련은 냉전이라 불리던 준-전시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 국민들은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 패닉에 빠졌다. 자신들이 세계 최고인 줄 알았던 조국 미국이 세계 최고가 아니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는데, "소련이 우주에 인공위성을 올릴 수 있다면, 거기서 핵무기를 우리 머리 위에 떨어트릴 수도 있지 않은가?"가 그 이유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꼼짝도 못하고 소련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걸 실현시킨 병기가 바로 ICBM.

스푸트니크가 성공적인 발사가 이루어지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충격을 받고 2개의 국가 기구를 설립하라고 지시했는데, 이 기관들이 DARPA[13]NASA이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3일, 미국은 다시 한 번 패닉에 빠진다. 소련이 세계 최초로 우주로 생명체를 보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게 사람이 아니고 개(라이카)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소련과 미국의 기술력 차이를 세계 만방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미군은 더이상 소련과의 우주경쟁에서 밀릴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고 대대적으로 로켓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그 결과 미 해군은 뱅가드 로켓계획을 급속히 진행시켜 그해 12월 6일에 뱅가드 TV3을 발사했지만 로켓은 1m도 못 올라가고 발사대에서 터졌다. 그 장면은 TV로 생중계되었고, 미국은 전세계적으로 굴욕을 맛보았다. 뱅가드 인공위성은 회수되었지만 재사용은 불가능했기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뱅가드의 실패를 두고,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끝장난 니크!"라고 미국을 깠다. 미국 언론도 결딴난 스푸트니크라는 뜻의 카푸트니크(Kaputnik),[14] 자빠진 스푸트니크라는 뜻의 플롭니크(Flopnik), 웁스니크(Oopsnik), 땅에 주저앉은 스푸트니크라는 뜻의 스테이푸트니크(Stayputnik)[15] 등의 말을 써가며 풍자했고, 전 세계가 미국을 비웃기 시작했다.

뱅가드가 폭발하고 며칠이 지난 후, 소련은 공식적으로 조문을 보냈다. 무인 로켓이라 죽은 사람도 없는데 조문을 보낸 의미는 당연히 미국을 놀리려고 보낸 조문이었고 실제 조문에는 흐루쇼프의 '뱅가드(전위부대)라고 부르지 말고 리어가드(후방부대)로 부르는게 좋겠다'는 통렬한 조롱까지 실려있었다. 미국은 그런 개발도상국의 조문 따위는 안 받는다며 귀를 틀어막고 뱅가드 TV3 BU(Backup)의 발사를 준비했지만, 설상가상으로 다음해 2월 5일 두번째의 뱅가드 로켓도 점화한지 57초만에 뱅(bang)!리어가드에서 PX 솔져로 다행히 무인 인공위성 로켓이라 사상자는 없었고, 3월 17일 3번째 발사는 성공했지만. 미국의 자존심은 이미 박살이 나버렸다. 그 뒤로도 해군의 뱅가드 로켓은 11번의 발사시도중 8번이 실패하며 미국의 자존심을 벅벅 긁어 놓았다.

결국 미국은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 등 나치 독일에서 회유한 전범 과학자들에게 로켓 개발을 맡길 수 밖에 없었고, 뱅가드가 터지는 사이 브라운 박사와 미 육군은 주피터C 로켓을 개발 1958년 1월 31일 제트추진연구소(JPL)가 만든 익스플로러 1호 위성을 쏘아올려 지구궤도에 올리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미 뱅가드 로켓의 실패로 미국의 자존심과 로켓기술의 격차는 악화되었고 더불어 쏘아올린 인공위성의 무게도 같은시기 스푸트니크가 1톤을 넘긴데 반해 미국의 익스플로러는 15kg, 뱅가드는 겨우 2kg에 불과해 무기로 활용하기는 매우 어려웠다.흐루쇼프는 익스플로러를 스푸트니크와 비교하면서 "작은 오렌지만하군" 하며 비웃었다고 한다. 익스플로러 1호의 성과라면 지구 밖에 있는 방사선띠인 밴 앨런대를 발견했다는 것.

소련은 스푸트니크에 이어서 최초의 유인 우주선인 보스토크 계획을 추진해 유리 가가린을 우주로 보내고 귀환까지 성공하여 미국을 더더욱 엿먹인다. 이후 미국은 국가적 수치를 씻기 위해 아폴로 계획을 추진했고, 이 계획이 성공해서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할 때까지 '스푸트니크 쇼크'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으며, 미-소간의 우주 경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후 약 50년간, 인류사상 최고의 과학기술발전을 맛보게 된다.

또한 이 스푸트니크 쇼크는 미국 교육에 대한 비난 및 자성을 불러 일으켰으며, 지금까지 환영받던 진보주의자들 대신에 본질주의학파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상 자성 수준이 아니라 그간의 패러다임이 싹 물갈이당했다.[16]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학문중심 교육과정. 1959년 9월 미국에서 우즈홀 회의(Woods Hole Conference)가 열리며 기존 교육계에 대한 반성 및 대안을 위한 계획이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기존의 교육학자(교사 + 진보주의 교육학자)들은 찍소리도 못하거나 아예 초청받지도 못했다. 어느 정도였느냐하면 우즈홀 회의에는 총 34명의 학자들이 모였는데, 그 34명 중 교육학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교육학자들이 만든 교육 때문인데, 어디서 교육학자가 끼냐는 것이 당시의 논리. 교육학자들은 나름대로 항변을 해봤지만, 여론은 냉담하기 그지없었고 몇몇 이들은 아예 소련의 스파이가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만큼 미국 교육계에 준 쇼크가 대단했다.[17] 이를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한다.

또한 스푸트니크 쇼크를 받은 미국 DARPA에서 인터넷의 전신인 알파넷을 개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4. 여담

당시에 발매된 기념우표. 같은 공산권 국가인 베트남쿠바[18]에서도 비슷한 우표가 나왔다.

독일이 통일된 후 구 동독 국영방송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중부독일방송이 인수한 청소년 대상 채널에 대인배의 기상을 가지라고 스푸트니크 계획에서 이름을 따와 MDR 스푸트니크(MDR Sputnik)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시트콤 '프렌즈(Friends)'에서, 괴짜 과학자인 로스 겔러가 할로윈 파티 때 코스프레하기도 했다. 사실은 감자모양 코스튬에 안테나를 꽂은 것 뿐이었지만. Spud에 감자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이용한 말장난. 모두가 코스튬으로 오인했지만 당시 로스의 애인이던 모나는 한 눈에 스푸트니크라고 알아보는 신기를 발휘했다.

2. 러시아의 국영 매체

3. 러시아의 검색 엔진

주소. 위의 국명 매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4.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3 소련군의 유닛

스푸트니크(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 참고.

5. 라다 사마라의 내수 모델명

라다 사마라 문서를 참고바람.

6. 델 XPS 13 developer edition의 개발당시 코드명

델 XPS 문서를 참고.


  1. [1] 러시아어로 &quot;위성&quot; 을 뜻하지만 '동행자', '동반자' 라는 뜻도 함께 갖고 있다.
  2. [2] 1857~1935. 어릴적 성홍열에 걸려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하는 장애인임에도 노력하여 학교 선생이 된 사람이다. 쥘 베른이 쓴 달나라 탐험을 보고 완전히 엉터리라고 비난하기도 했다.(거대한 대포로 사람이 속에 탄 포알을 달로 쏴서 간다는 줄거리인데, 실제로 그렇게 쏘면 엄청난 압력으로 포알 속 사람은 달로 가는 도중 끔살당한다.) 그리고 달로 가자면 바로 로켓이 필요하며 로켓 이론은 19세기 말인 1897년에 고안하고 이를 과학적으로 가능함을 설명했으며 1903년에는 인류 최초 로켓 디자인까지 그린 그야말로 우주계획, 로켓 이론의 아버지인 셈이다. 하지만 생전에 직접 로켓을 만들어 발사할 기회가 없었고, 이후 최초의 액체 로켓 발사를 성공시킨 고다드(1882~1945)에 묻혀 한국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구는 인류 문명의 요람이다. 그러나 누구도 요람에서 평생을 살 수 없다.'는 우주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한 유명한 말을 남겼다.
  3. [3] 이게 문명 4의 '인공위성' 기술에 등장하는 명언이 되었다. 또한 가장 인기있는(…) 명언이기도 하다. 그리고 감동적인 명언이기도 하다. 이에 관해서는 문서 참고.
  4. [4] 독일. 다량의 중거리 핵미사일이 배치. 핵이 배치된 미군 기지들은 1960~70년대 내내 반전반핵운동의 표적이 되었다. 압도적인 물량의 소련군이 서유럽을 침공하면, 소형 전술핵으로 저지하고 그 사이에 미 본토에서 증원군을 실어온다는게 냉전기 미군의 전략이었다.
  5. [5] 터키. 1961년 쿠바 위기 당시 쿠바에 있는 소련 핵무기와 맞교환 조건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미국은 터키를 달래기 위해 지중해SLBM을 스리슬쩍 배치했다
  6. [6] 바로 대한민국(!). 오산과 군산의 미군 기지에 다량의 전술핵이 비축되어 있었다. 1991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함께 모두 철수.
  7. [7] 이 간략화 이전의 모델은 후일 스푸트니크 3호가 된다.
  8. [8] 단단히 엿을 먹은 미국에서는 이런 농담이 돌았다. "스푸트니크는 하루에 두번 신호를 바꾼다. 워싱턴 위를 지나갈 때 삐...삐... 대신 크하하하" 웃는 소리로 바뀐다고.
  9. [9] 당시 미국은 인구의 4~5%만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소련은 인구의 20% 이상이 농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
  10. [10] 스푸트니크의 스푸(Spud)는 감자의 영어 사투리 중 하나이다.
  11. [11] 사실 업체들이 부품들을 잘만 만들었다면 이게 스푸트니크 1호였겠지만 그렇지 않아서 계획이 밀렸다.
  12. [12] 그해 7월 26일에나 쏘아올린 익스플로러 4호가 25.50kg였으며, 그 이전의 미국 위성들은 이거보다도 무게가 덜 나갔다.
  13. [13] 인터넷의 전신인 알파넷을 만든 곳이다.
  14. [14] 영문 위키피디아에서 Kaputnik라고 쳐보면, 뱅가드 TV3으로 곧바로 연결된다(...).
  15. [15] 이것은 훗날 2015년 KSP 게임의 무인조종모듈로 나오게 된다.
  16. [16] 이 과정에서 랠프 타일러를 비롯해 존 듀이조차 신뢰받지 못하는 지경이었으니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이런 경향에 조셉 슈왑은 "교육과정학 분야는 죽어가고 있다."라며 흥분하기도.
  17. [17] 미국 교과서진화론이 다시 등장했고, 1967년이 되자 테네시 의회까지 반진화론 법을 폐기했다.
  18. [18] 이건 좀 나중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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