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구

한자

新羅寇

한글

신라구

1. 소개
2. 신라구 기록
3. 출신 인물

1. 소개

통일신라 후기부터 후삼국시대 무렵 즉 일본 헤이안 시대 중반기에 존재한 한국의 대표적 해적. 통일신라 말기에는 호족들이 자립하고, 중앙정부는 정권다툼으로 정신이 없는데다, 기근이 겹쳐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웠었다. 따라서 생업을 포기하고 도적들이 된 사람이 많았는데 신라구도 이렇게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가 당시 당나라, 신라, 일본등을 오가며 날뛰던 해적들을 때려잡고 해상을 안정시켰다는 기록을 보았을때 해적질이 극심했을때 자체는 통일신라 말-후삼국시대일때지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것은 대략 9세기 초반부터인듯하다. 다만 장보고 이전에 해적질이 극심했을 때는 대다수 해적들이 당나라 출신이었던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이름을 떨쳤던 것은 아닌듯 하다.

한반도는 매번 왜구들에게 털리기만 했다고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 반대도 존재했다. 신라구 때문에 큐슈쪽은 한 때 사람이 못 살 정도가 되었고 일본 정부에서는 신라인 입국 금지 조치를 내리고 일부 지방에서 징병제를 시행할 정도였다. 일본 측 기록을 살펴보면 신라구가 흥성할 때는 천단위로 되는, 사실상 군사집단이나 다름없는 신라구들이 큐슈로 쳐들어 갔다. 이들이 큐슈로 간 것은 큐슈가 일본 본토 중 한반도와 가장 가까웠기 때문으로 보이며 신라인 이민자가 많아 정보를 얻기 쉬웠다는 점도 한 몫 했다고 보기도 한다. 한반도로부터 거리가 가장 가까운 쓰시마 섬도 주요 약탈 대상이었다.

아무래도 신라구가 날뛰는 시기는 워낙 혼란스러운 시기다 보니 한국 측의 사료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일본의 사서에서는 자세하게 나온다. 신라 말부터 전국 각지에서 도적이 날뛰어서 백성들이 힘들었다니 세상이 혼란해졌다니 하는 기록은 있는데 도적의 목록이나 일본이나 중국으로까지 가서 약탈을 하거나 무역을 했다는 식의 활약상(?)까지 일일히 나오지는 않으며 그냥 당대에 세를 떨쳤던 도적들에 대해서나 간략하게 나오는 수준이며 장보고견훤, 왕건이 해적을 때려잡아서 기반을 다졌다고는 하나, 해당 해적조직들이 일본이나 중국에까지 가서 어떻게 노략질했는지에까지 대해서 적은것은 아니다. 한국의 사료에서 기록이 소략하지만 일본 사서의 기록이 매우 상세하기 때문에 신라구의 해외 활동(?)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으며 견훤이나 왕건이 해적을 소탕한것을 공으로 내세웠을만큼 신라내에서도 해적이 상당한 골칫덩어리였던 것은 마찬가지이기는 하다.[1] 한국 고대사의 경우 동시기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사료가 너무 부족하여 교차검증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신라구는 현춘이나 능창[2]처럼 후삼국시기 해적들이 유력 호족들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일종의 사략 집단이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사실 왜구도 일본 사서의 기록보다 중국, 한국 사서에 훨씬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아무래도 피해를 입은 쪽이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왜구나 신라구가 발호해서 외국까지 원정나갈 정도면 이미 자국에서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막장 상황(일본의 남북조시대와 전국시대, 통일신라 말기의 후삼국 발호 등)이라 국내 치안 문제조차 손도 못쓰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니 사서 기록은 커녕 해적에게 신경쓰는 것 자체가 정권 능력 밖의 일이었다. 실제로 대규모 신라구가 등장한 시기와 동시대인 진성여왕 치세는 지방 통제력이 무너져 신라 내륙 지방에서 세금 걷는 길도 막힐 정도였다.

일본에서 해적질하다 사로잡힌 현춘은 자기들이 신라 왕의 명령으로 쳐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당시 진성여왕해적의 일본 약탈을 사주하거나 지원했을 수도 있고 그냥 현춘이 변명으로 왕명을 사칭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는데 기록의 간략함으로 자세한 것을 알기는 어렵다.

2. 신라구 기록

  • 811년 8월 일본 다자이후에서 조정에 올린 공문에 의하면 신라인들이 자신들이 살던 지방의 곡식을 운반하던 도중 바다에서 해적을 만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고 김파형(金巴兄), 김승제(金乗弟), 김소파(金小巴) 세 사람만 겨우 살아 일본 땅에 도착해 신라로 돌려보내줬다고 한다.
  • 811년 12월 6일 쓰시마 섬 서쪽 바다에 신라 배 3척이 나타나고 다음날 또 20여 척이 나타나 횃불로 서로 연락하는데 그 모양을 보아 해적선이었다고 한다. 쓰시마에서 신라 쪽을 바라보니 매일 밤 여러 곳에서 불빛이 빛나[3] 일본 조정은 신라에서 쳐들어올까 우려해 요충지에 군사를 배치해 경계하도록 했다.
  • 813년 2월 신라인 110명이 작은 배 5척에 나눠타고 지금의 나가사키현 오지카시마(小値賀島)[4]에 상륙해 현지인과 맞붙어 9명은 죽고 101명은 붙잡혔다.
  • 869년 5월 22일 신라 해적이 두 척의 배를 타고 하카타(후쿠오카)에 상륙해 부젠국(豊前国)의 공물을 약탈해갔다.
  • 893년 5월 11일 신라 해적이 히젠국(肥前国, 지금의 사가현, 나가사키현)을 습격하려 했으며, 같은 해 윤5월 3일에 히고국(肥後国, 지금의 구마모토현)을 습격해 민가를 불태우고 도망갔다.
  • 894년 2월 22일, 3월 13일, 4월 14일에 신라 해적이 변방의 섬을 약탈했다.
  • 894년 9월에 대규모 신라구가 침입했는데, 9월 5일 45척의 배를 타고 쓰시마 섬을 습격했고, 9월 17일에 일본 조정에서 파견된 장군 훈야노 요시토모(文室善友)가 이끄는 군대와 격돌해 302명이 죽고 11척의 배를 빼앗기고 10월 6일 퇴각했다. 이 때 사로잡힌 자로 현춘이 있었는데, 그는 자신들이 신라 왕의 명령으로 쳐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그들의 본거지에는 2500명의 병사와 100여척의 배가 있다고 주장했다. 저 규모가 사실이라면 후삼국시대 고려후백제의 수군 규모와도 맞먹을 정도인데, 현춘의 과장이거나 대호족의 후원을 받는 세력이었을 것이다.[5]

이와 별개로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720년에 신라가 서일본 변방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단,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다.)

신라구는 930년대까지도 존재했지만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한 뒤로는 사회가 안정되고 중앙정부의 통제력도 어느 정도 강화되면서 신라구의 존재는 사라진다.

하지만 후삼국이 통일한 뒤에도 일본에선 여전히 신라구가 공포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11세기 동여진 해적들이 일본을 약탈했을때 동여진 배후에 고려가 있을 것이라 의심했다. 그러나 고려가 일본인 포로 259명을 다시 일본에 송환하면서 그 오해가 풀리고 처음으로 고려와 일본 간의 국서가 오고가기도 했다.

3. 출신 인물


  1. [1] 당시 당나라도 막장 상황이라 동아시아에서 당나라 해적들도 골칫거리였다. 장보고가 특히 당나라 해적들을 많이 소탕했다. 마찬가지로 13세기 이후 왜구 또한 일본 본토에서도 커다란 골칫거리여서 막부정권에서도 왜구를 소탕하기위해 꽤나 노력을 하였다.
  2. [2] 견훤에게 종속된 해적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독자적인 세력이었다는 설도 있어 좀 애매하다.
  3. [3] 지금도 대마도에서 육안으로 부산, 거제 지역이 보인다.
  4. [4] 당시 표기는 小近島. 발음은 같다.
  5. [5] 훗날의 왜구 역시 지방 영주의 후원을 받는 세력도 있었다.
  6. [6] 신라구 출신중 유일하게 전해지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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