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후삼국시대

  상위 문서: 신라

  관련 문서: 후삼국시대

한국의 역사 韓國史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11px;margin-top:-6px;margin-bottom:-7px"

청동기 시대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후삼국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구한말

일제강점기

군정기

분단

부여

고구려

발해

고려

조선

대한
제국

일본령
조선

총독부

소련
군정


인민
위원회

북한

고조선

고구려

고구려

옥저
동예

한사군

신라

태봉

진국

삼한

백제

후백제

미군정

대한민국
1 2 군정 3 4 5 6

가야

신라

신라

신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호

탐라

}}}}}}

신라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역사

문화재

인물

왕사

왕비

창작물

평가

시대 구분

사로국

신라

통일신라

신라/후삼국시대

}}}||

신라
新羅

군기[1]

인장


▲ 후삼국시대의 지도. 진파랑이 신라이다.

행정구역

900년[2] ~ 서기 936년 1월 8일[음력][4] (36년)

시대 구분

사로국

삼국시대
신라

통일신라

후삼국시대
신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진한

고려

위치

한반도 동남부 및 부속도서

역사

892년 견훤 칭왕
900년 견훤 후백제 건국
901년 궁예 고려 건국, 대야성 전투[5]
899년 원종·애노의 난, 대야성 전투
916년 대야성 전투
920년 대야성 함락
927년 후백제 서라벌 점령
936년 신라 경순왕, 고려에 투항. 신라 멸망

수도

서라벌

종족

신라인[6]

언어

신라어 (고대 한국어)

문자

한자(이두)

종교

불교[7][8]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왕)[9]

주요 군주

51대 진성여왕,(887~897),
52대 효공왕,(897~912),
53대 신덕왕,(912~917),
54대 경명왕,(917~924),
55대 경애왕,(924~927),
56대 경순왕,(927~936),

국성

(金) · (朴)[10][11], 밀양 박씨[12]

현재 국가

대한민국, 북한

1. 개요
2. 역사
3. 영토
4. 정치
5. 외교
6. 역대 군주
7. 대중매체
8. 관련 문서
9. 비슷한 사례

1. 개요

후삼국시대의 주역을 대부분 궁예의 태봉과 쿠테타로 나라를 세운 왕건고려견훤후백제에 관심이 주로 많고, 이 시기의 신라에 대해서는 대중들은 관심이 없는 편이다. 대중들 사이에 관심이 없고 매체로 다루어지는 것도 후백제-고려의 전투를 주로 다루어서 그렇지 신라가 마냥 아무것도 안하고 계속 축소된 것만은 아니다. 920년까지 대야성에서 후백제의 공격을 여러번 방어하고 신라에게 우호적인 세력들도 상당히 있었다. 후삼국시대에는 신라뿐만 아니라 후삼국 모두 호족세력을 기반으로 점차 국가로 성장해 나갔기 때문에 태봉국이 망하고도 친태봉세력이 고려에 대항한 기록도 있다. 이를 보면 후삼국 삼국간의 싸움이 아니라 후삼국 삼국의 호족세력간의 전투로 볼 수 있다.

2. 역사

후삼국통일전쟁 주요전사

889년

899년

901년

903년-914년

916년

920년

924년

925년

927년

원종·애노의 난

비뇌성 전투

제1차
대야성 전투

나주 공방전

제2차
대야성 전투

제3차
대야성 전투

제1차
조물성 전투

제2차
조물성 전투

제4차
대야성 전투

원종
애노군

신라

궁예

양길

신라

백제

태봉

백제

신라

백제

백제

신라

고려

백제

고려

백제

고려

백제

927년

928년

928년

929년

929년-930년

932년

933년

934년

936년

서라벌기습전
공산전투

삼년산성
전투

제5차
대야성 전투

백제의
나주 탈환

고창 전투

예성강 전투

사탄·자도
전투

운주성 전투

일리천 전투

백제

고려

백제

고려

백제

고려

백제

고려

고려

백제

백제

고려

고려

백제

고려

백제

고려

백제

남북국시대 통일신라8세기 후반에 들어서 국가 내에서 왕위를 놓고 권력 투쟁이 심해지고 지역 민심을 돌보지 않으면서 점차 지방의 통제력이 약해져 신라의 지배력이 쇠퇴하자, 각지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단순 도적이나 군벌에 불과하던 반란 세력들은 비뇌성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를 거쳐 크게 궁예견훤이 부상하게 되며 이들은 옛 삼국을 부흥시키겠다는 명분으로 왕에 오르고 나라를 세우게 된다. 옛 통일신라의 북쪽은 궁예태봉을 세웠고, 남서쪽에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워 신라는 진흥왕 이전처럼 다시 경상도 일부에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로 전락했다.

3. 영토

후삼국시대 지도에서는 보통 신라가 통일 이전 영토 정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이건 후삼국이 막 생겼을 때다. 후삼국시대 시기별로도 꽤 차이가 나는데, 우선 경상도를 다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대강 지금의 경상남도 대부분 지역은 후삼국시대 초기부터 신라 조정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울산 지역에는 호족 박윤웅이 반독립상태였고 김해의 김인광은 가야의 부활을 기도했으며 진주왕봉규는 아예 중국에 독자적으로 조공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적고적의 거점도 있었으니 경남 지역은 전부 사실상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13]

후백제의 공격을 막을 요충지 대야성과 경북지역 대부분은 그나마 신라의 충신들이 남아있어 후백제의 공격을 수 차례나 자력으로 막아내고 왕건에게 원군을 보내기도 할 정도로 아직 완전히 영향력이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920년 대야성이 함락당하고 927년에 후백제군에게 서라벌이 함락당하고 경애왕이 살해당하는 과정을 거쳐 우호적인 제세력도 궤멸당하거나 고려와 후백제에 줄지어 항복한다. 이후로는 후백제고려신라는 황실로서 대우를 하며 10여년 정도 그래로 두었다가 고려의 압박으로 고려에 투항해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사실 경애왕 시절에도 지금의 영천인 고울부가 고려에 귀순을 청할 정도로 엉망이긴 했다.

견훤에게 경남 합천의 대야성을 잃고, 고창 전투(930) 이후 안동 주변부까지 고려 땅이 된 이후엔 신라의 영토는 신라 건국 초기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삼국사기만 봐도 왕건이 직접 일어진으로 행차해 성을 쌓고, 경순왕은 경주와 그 주변만 겨우 다스린다고 할 정도였다. 일어진은 지금의 포항으로, 경주시에서 차로 30분이면 간다. 고려군이 맘만 먹는다면 대군을 이끌고 바로 오늘이라도 내 눈 앞에 나타날 수 있는, 말 그대로 내 앞마당까지 남의 땅이 된 것.

4. 정치

여느 나라들의 말기가 그렇듯 상당히 혼란했다. 나라가 무너지는 시기에 진성여왕효공왕은 기록상 사치향락을 계속했으며, 이후 박경휘가 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이후 8대 아달라 이사금 이후 728년만에 박씨 왕조가 부활했다.[14] 김씨들도 당연히 가만 있지는 않아서, 918년에는 김씨의 복위를 주장하는 김현승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즉 다들 신경쓰지 않고 있을 때 서라벌 조정에서는 열심히 김씨 vs 박씨로 나뉘어서 싸우고 있었다는 것. 박씨 왕조의 마지막 왕 경애왕포석정의 삽질로 암군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정황상 균형외교를 하면서 나름대로 망해가는 국운을 살려보려고 애썼던 왕으로 재평가받는 편이다. 경애왕 문서 참조. 태조 왕건 등 창작물에서는 견훤서라벌 기습공격도 김씨 일부 간신들이 왕위를 되찾기 위해 박씨 왕을 해치워달라고 사주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식으로 연출하기도 했다.

5. 외교

태봉와의 관계는 궁예태봉국이 시종일관 신라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귀순해오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고 할 정도로 상당히 적대적으로 대해왔던 만큼 교류는 사실상 없었다.

태봉을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즉위한 왕건고려는 비교적 신라를 떠받들어주고 시종일관 존중하며 우호적으로 대한 편이었다. 다만 신라가 여력을 완전히 잃고 서라벌로 축소된 시기에 가서는 대등한 위치, 혹은 관계가 역전되어 버린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후백제와의 관계는 견훤후백제도 내내 신라를 공격했던 것이나 경애왕을 잔혹하게 처단한 사례 때문에 극단적인 반신라파로 여기기 쉽지만, 의외로 신라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삼국사기의 견훤전에 실려 있는 견훤과 왕건이 서로간에 주고받은 국서의 내용에서 간접적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견훤왕건은 '존왕의 의(義)', '왕실을 높인다'는 식으로 신라 왕실을 형식적이나마 주군과 같은 위치에 놓고 있다. 칭왕하고도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신라도 대왕, 제(帝) 같은 형태로 표현되는 부분적인 외왕내제적인 면모를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애왕 처단 후 그것이 신라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김씨 왕 경순왕을 다시 세운 것도 견훤의 목적이 무조건적인 반신라정책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과는 당나라 멸망 이후 5대10국과도 관계를 유지했는데 후삼국시대 말기 영토들을 다 고려에게 빼앗기고 서라벌만 지배하는 소국으로 전락해 점점 약화되어가고 있는 과정 속에서도 후당 등 중국의 5대10국에 사신을 보내는 등 무엇이든 해보려고 했다. 다만, 후당은 신라를 망한 나라로 인식하고 책봉사를 신라에 보내지 않았고 오히려 신라가 아닌 고려를 한반도의 합법 정부로 인식했다. 여담이지만 후당은 후삼국시대가 끝이 나는 같은 시기에 멸망하였다.

6. 역대 군주


신라 국왕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border:0px solid; margin:-11px; margin-top:-8px; margin-bottom:-16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혁거세 거서간

남해 차차웅

유리 이사금

탈해 이사금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파사 이사금

지마 이사금

일성 이사금

아달라 이사금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벌휴 이사금

내해 이사금

조분 이사금

첨해 이사금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미추 이사금

유례 이사금

기림 이사금

흘해 이사금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내물 마립간

실성 마립간

눌지 마립간

자비 마립간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소지 마립간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태종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효소왕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성덕왕

효성왕

경덕왕

혜공왕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선덕왕

원성왕

소성왕

애장왕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헌덕왕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효공왕

제53대

제54대

제55대

제56대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

경순왕

추존

태조 성한왕 김○○ · 문흥왕 김용수 · 흥무왕 김유신 · 개성왕 김효방 · 현성왕 김법선 · 신영왕 김의관
흥평왕 김위문 · 명덕왕 김효양 · 혜충왕 김인겸 · 익성왕 김헌정 · 선강왕 김충공 · 혜강왕 김예영
성덕왕 김균정 · 의공왕 김계명 · 혜성왕 김위홍 · 흥렴왕 박문원 · 선성왕 박예겸 · 의흥왕 김실홍 · 신흥왕 김효종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가야 발해 후삼국
고려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

7. 대중매체

8. 관련 문서

9. 비슷한 사례

삼국시대(중국)후한 정부에 빗대기도 하는데,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차이점은 삼국지의 후한 정부는 꼭두각시인 기간이 대부분이었지만 신라 정부는 도적떼나 후백제의 침공으로부터 방어전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경애왕처럼 독자생존을 위한 외교노선을 견지하기도 했다. 이 시기 신라는 국력이 심각하게 약해지면 약해졌지 후한의 헌제 때처럼 아예 황제의 직할령이 소멸하고 권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사는 꼭두각시 역할은 하지 않았다. 고려왕건 역시 경순왕을 강압이 아니라 회유로 일관했으며 결국 귀순 선택도 신라 조정이 내부의 찬반회의 끝에 스스로 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보면 후한말보다는 춘추전국시대의 주나라의 상황이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1. [1] 링크 참조. "신라 사람들의 휘직은 띠를 푸르거나 붉거나 하는 등의 색깔로 구분하였고 모양은 반달의 형상을 취하였다. 계(罽) 또한 옷에 다는 것인데 그 길이의 길고 짦음에 대한 제도는 분명하지 않다."
  2. [2]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며 통일신라의 시대가 끝난 해.
  3. [음력] 3.1 을미년 (서기 935년) 12월 12일
  4. [4] 신라의 멸망연도를 일반적으로 935년이라고 하지만, 고려사에 의하면 사실 왕건이 공식적으로 신라 합병을 결정하고 경순왕과 신라 왕족이 이웃나라의 손님 신분에서 고려의 신하로 편입된 날은 음력 935년 12월 12일, 양력으로 환산하면 936년 1월 8일이다. 즉 신라가 공식적으로 멸망한 날은 따지자면 양력으로는 936년이다. 그러나 실제 항복과 경순왕의 개성 입조는 935년 11월에 이뤄졌고 이게 936년 1월까지 미뤄진 건 경순왕이 귀순을 요청하고 왕건이 거절하기를 반복하는, 보여주기식 선양쇼를 한 달 동안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935년에 사실상 멸망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5. [5] 후삼국시대의 대야성 전투는 총 5번 일어났다.
  6. [6] 현대 한민족의 원류.
  7. [7] 그 외 도교, 샤머니즘
  8. [8] 비록 불교 이외의 다른 신앙을 탄압하지는 않았지만 국교는 불교였다. 애초에 불교 문화재의 양과 질을 비교하면 어떤 시대도, 심지어 현대까지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
  9. [9] '황왕' 이라는 군주 칭호는 사서에는 안 나오고 오직 신라의 금석문에서만 나온다. 황제와 왕의 복합어로 외왕내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영어로 직역하면 'emperor-king'.
  10. [10] 신라 왕조 초기에는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돌아가면서 왕을 했지만 통일신라기에는 경주 김씨의 독점 세습이 고착화되었다. 하지만 신라가 후삼국으로 다시 쪼개진 뒤 박씨가 다시 왕에 오르기도 했는데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이 그들이다.
  11. [11] 경애왕(박위응)이 후백제 견훤에 의해 죽고 56대 경순왕(김부)이 왕이 되면서 국성이 되었다
  12. [12] 53대신덕왕~55대 경애왕
  13. [13] 다만 김인광 세력은 지나치게 독립노선을 걷다가 소충자 소율희 형제에게 밀려났고, 소씨 형제는 신라 조정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남쪽은 다시 신라 세력권에 들었다.
  14. [14]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김씨 왕조가 나라 분열의 책임을 지고 영향력이 떨어졌는지 이후 계속 박씨가 왕위를 잇게 된다.
  15. [15] 후삼국의 시작은 효공왕대 시작되었다. 후백제는 900년, 태봉은 901년.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130.43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