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

1. 개요
2. 북방의 맹장
4. 가족
5. 평가
5.1. 지휘관으로서의 평가
6. 전설
7. 대중 매체에서의 신립

1. 개요

申砬

(1546년 10월 23일 ~ 1592년 4월)

본관은 평산(平山)이다.[1] 자 입지(立之). 시호 충장(忠壯).

여진족 토벌로 용맹을 떨친 맹장이지만, 지략이 부족해 임진왜란탄금대 전투에서 패전하고 자살한 것으로 잘 알려진 무장이다.

2. 북방의 맹장

1567년(선조 즉위년) 무과에 급제한 이래 여러 무관직을 거쳤다. 1583년 함경북도 온성 부사로 있을 때 북쪽 변경에 침입해온 여진족 니탕개를 격파하는 등 야인 토벌에서 큰 두각을 나타냈다.

적호(賊胡)가 다시 경원부를 포위하였다.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이 경병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구원하여 성에 들어가니, 적이 3겹으로 포위하였다. 신립의 군사가 결사적으로 싸웠는데 적장 중에 백마를 탄 자가 의기양양하게 보루로 오르는 것을 신립이 한 개의 화살로 쏘아 죽이니 적이 마침내 물러갔다. 적이 또 건원보(乾原堡)를 포위하였는데 부령 부사(富寧府使) 김의현(金義賢)이 힘껏 싸워 물리쳤다. 적이 또 안원보(安原堡)에 침입하였는데 병력이 매우 강성하여 지키는 장수들이 모두 굳게 지킬 뜻이 없었다. 신립이 바야흐로 아산(阿山)을 구원하러 가다가 안원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성을 넘어 도망하는 자를 발견하고 즉시 목을 베어 깃대에 매달아 군사의 마음을 진정시키니, 적이 그 사실을 알고는 감히 침범하지 못한 채 물러갔다. 그 후에 병사(兵使)가, 안원은 성이 작고 병력이 약하다고 하여 철수시켜 본부(本府)로 들어가게 하니, 적이 마침내 안원보에 들어가서 곡식을 약탈해 갔다.

선조 수정 실록 선조 16년 2월 1일 기사

적호(賊胡)가 훈융진(訓戎鎭)을 포위하고 충교(衝橋)를 만들어 사면으로 성을 공격하니, 첨사 신상절(申尙節)이 밤낮으로 항거하며 싸웠으나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성이 장차 함락될 지경이었다. 그때 온성 부사 신립이 유원 첨사(柔遠僉使) 이박(李璞)과 황자파(黃柘坡)에서 사잇길로 달려와 포위를 뚫고 들어가 한 개의 화살로 적의 추장을 쏘아 죽였다. 이에 신립의 얼굴을 알아보는 호인들이 서로 놀라며 말하기를 ‘온성(穩城)의 영공(令公)이다.’하면서 활을 휘두르며 물러갔다. 상절도 문을 열고 나와 공격하면서 신립과 합세하여 기세를 타고 적을 추격해서 70급을 베고, 곧바로 그들의 부락까지 쳐들어가 소굴에 불을 지르고 돌아왔다. 이때 경원(慶源)·종성(鍾城)·회령(會寧) 등 진(鎭)의 번호가 모두 배반하였으나 온성의 번호만은 배반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신립의 무용(武勇)에 승복했기 때문이었다. 신립은 평소에 철기(鐵騎) 5백여 명을 훈련시켜 사냥을 하며 전술을 익히게 하고 연안에서 치돌(馳突)하는 연습을 시켰는데 그 빠르기가 귀신같았다.

선조 수정 실록 선조 16년 2월 1일 기사

적호의 대추(大酋)인 율보리(栗甫里)와 니탕개(尼湯介)가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길을 나눠 종성(鍾城)의 요새지에 들어왔다. 우후 장의현(張義賢), 판관 원희(元喜), 군관 권덕례(權德禮) 등이 기병과 보병 1백여 명을 거느리고 강 여울을 지키며 한참동안 대항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인데다가 권덕례가 피살되자 나머지는 모두 도망해 돌아와 성으로 들어가니, 적호가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병사(兵使) 김우서(金禹瑞)가 군사를 거두어 성을 지켰는데, 해가 저물어 적이 물러가자 부사(府使) 유영립(柳永立)이 나가 공격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영립이 몰래 원희에게 영을 내려 기병장(騎兵將) 김사성(金嗣成)을 인솔하고 동문(東門)을 열고 나가게 하여 적의 머리 5급을 베어 왔는데, 김우서는 오히려 명령을 어겼다고 하여 원희 등에게 장형(杖刑)을 가하였다. 이튿날 적이 또 와서 포위하였는데 해가 질 무렵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이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자 적이 허둥지둥 도망갔는데, 강까지 추격하고 돌아왔다. 김우서가 사람을 시켜 성으로 맞아들여 서로 만나보자고 하였는데, 신립이 응하지 않고는 북치고 피리 불면서 성을 지나쳐 가버리니, 김우서가 크게 부끄럽게 여겼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 5월 1일 기사

율보리와 니탕개가 많은 무리를 이끌고 와서 재차 방원보를 포위하였는데, 최호가 조방장 이발(李) 등과 함께 성에 올라 힘껏 싸웠고 우후 장의현(張義賢)과 판관 윤담(尹湛) 등이 종성부(鍾城府)에서 와서 구원하여 안팎으로 합세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 크게 공격하니, 적이 마침내 패하여 물러갔다. 이때에 정예로운 장졸(將卒)들이 변방 진에 많이 모였는데, 신립을 대장으로 받들기를 희망했으나, 조정에서 미처 발탁하여 등용하지 못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 5월 1일 기사.

위 기록들은 이일이 정리한 제승방략에서 수록된 전훈들을 수정 실록에서 재수록한 것이다.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일신의 용맹과 무예만큼은 당대 최고였다. 실록에선 "포위된 상태에서 화살 한 발로 적장을 사살해 적들이 물러가게 했다." "혼자서 수십 명을 쳐죽였다." "신립의 용맹이 무서워서 감히 적들에게 항복하지 못했다." 등의 서술로 신립의 용맹을 칭찬하고 있으며 백마에 탄 적장을 일격에 쏘아죽여 적을 물러가게 한거나(경원진 전투) 아군을 포위한 여진족 기병 1만 명에게 돌격해 적장을 사살하고 퇴각하는 적 수십 명을 쏘아 죽이는 (훈융진 전투) 무시무시한 무용을 볼 수 있다.

특히 신립은 기병의 달인이었는데, 마치 조아킴 뮈라마냥 신립이 을 타고 적진을 돌격하면 그대로 길이 생길 정도였다.

이 당시 신립이 이렇게 싸우고 이기자 포상을 위해서 한성에 입성했는데, 선조가 어찌나 놀라고 감동했는지 자기가 먼저 신립을 마중나갔고, 심지어는 자기가 직접 곤룡포를 벗어서 신립에게 입혔을 정도그런데 이순신에게는?[2] 신립의 공훈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공을 인정받아 1584년 3월 북도병사(北道兵使)에 임명되었고 1587년 흥양에 왜구가 침입해 녹도 만호 이대원이 전사하는 피해가 발생하자 우방어사가 되어 군사를 인솔, 토벌에 나섰으나 이미 왜구가 철수했으므로 돌아왔다. 이 시기 양가의 처녀를 으로 삼았다고 삼사(三司)가 탄핵하여 파직되었지만 여진족 토벌에서 워낙 용명을 쌓았던지라 동년 12월 함남 절도사에 다시 등용되었다. 이듬해 적호부락(賊胡部落)을 공격해 20명과 말 3필을 참획하는 공을 세웠으나 하극상을 일으킨 수졸을 독단적으로 참한 죄로 파직, 중추부동지사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3] 이에 대해 조헌은 '잘못이 없다고 할 순 없으나, 몸사리지 않고 세운 공이 한의 이광에 비할 만하니 형벌이 과하다.'고 주장했다.

탄핵되기는 했지만 여진족 토벌에서 워낙 용명을 쌓았던지라 당대 조선 최고의 맹장으로 칭송받던 인물이었다.[4]

3. 임진왜란

니탕개의 난 이래 죽 전시상황이던 조선은 다시 왜침에 대한 대비를 시작했다. 1591년 7월 비변사에서 국방에 관한 논의가 있었고, 비변사에서는 "왜적은 수전에는 능하지만 육지에서는 민활하지 못하다. 그러니 육지 방비에 주력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 때 신립은 한술 더 떠 "왜적들은 수전에 강하고 육전에 약하니(?) 아예 수군을 폐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는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 이순신이 "바다로 침입하는 왜적을 저지하는데는 수전이 제일이므로, 수군을 폐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극력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비변사와 신립이 이런 주장을 한 배경에는 을묘왜변의 경험이 있었다. 을묘왜변에서 왜군은 바다에서는 맹선을 주력 전선으로 삼은 조선 수군을 농락했지만, 이어진 지상전에서 조선군의 궁시에 전멸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조선은 신형 전함 판옥선을 개발했으나, 흥양 왜변에서 판옥선은 만족스러운 전과를 내지 못했다. 물론 이는 녹도 만호 이대원에게 사사로운 원한을 품고 지원을 해주지 않은 전라 좌수사 심암(沈巖)의 탓이 컸지만 결과적으로 수군 전력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원래 조선의 왜구 대응은 원래 해상에서의 요격과 기병을 동원한 토벌로 정리할 수 있었다. 진포에서 황산까지 이어진 고려 말 왜구 토벌을 보면 이런 점이 잘 드러나는데, 황산대첩에서 승부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이성계가 거느린 가별초의 기병들이었다. 신립은 왜군이 특성상 기병을 동원할 수 없다는 것까진 그런데로 잘 예측하고 기병 전력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좀 더 강화하자는 취지에서 이런 의견을 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시점에서는 아무도 몰랐지만, 1592년 조선에 처들어온 적은 옛날 고려 때처럼 약탈이 목적인 오합지졸 해적왜구가 아니었다. 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전란으로 단련되었고 병법을 익힌 무사들이 지휘하는 일본군 정규군이 영구적인 조선 점령을 목적으로 침략해오는 전면전 상황에서 전혀 맞지 않는 대책이었다.

거기다가 신립 본인의 자만심이 문제였다. 징비록의 기록을 보면, 류성룡이 왜군의 조총을 언급하며 걱정하자 신립이 조총이라는게 어디 쏘는 대로 맞는답니까 하며 거들먹거려 류성룡이 혀를 차며 패전을 걱정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멀지 않아 변고가 생기면 공이 마땅희 그 일을 맡아야 할 텐데 공이 생각으로는 오늘날 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가 충분하오?"

물음에 신립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예전에는 왜적이 창, 칼만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과 같은 우수한 병기가 있으니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요."

신립은 황급히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시 말했다. "태평세월이 너무 길었소. 그래서 병사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매우 걱정스럽소."

징비록 중에서

일찌기 신립이 조총을 주제로 류성룡과 설전을 벌였을 때 신립이 "조총, 그까짓거 쏘면 맞습니까?"라며 조총을 폄하한 일이 있었다. 이 대화를 볼때 신립은 조총 존재는 알았으나 궁시를 훨씬 능가하는 조총의 갑옷 관통능력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었던 걸로 보인다.

이 기록 이외에도 신립의 오만함과 거친 성정에 대한 기록은 그 외에도 굉장히 많다. 신립이 난폭하고 아랫 사람을 함부로 다룬 것은 징비록, 상촌집, 기재사초, 난중잡록, 계갑일록 등 여러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그 기록들까지 감안하면 조총에 대한 이 발언은 결코 경험 문제가 아니었다.

대장(大將)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제도(諸道)에 보내어 병비(兵備)를 순시(巡視)하도록 하였다. 이일은 양호(兩湖) 로 가고, 신립은 경기(京畿)와 해서(海西)로 갔다가 1달 뒤에 돌아왔다. 그러나 순시하며 점검한 것은 궁시(弓矢)와 창도(鎗刀)에 불과할 뿐이었으며 군읍(郡邑)에서도 모두 형식적으로 법을 피하기만 하였다. 신립은 본래 잔포(殘暴)하다고 일컬어졌으므로 수령들이 두려워하여 주민들을 동원하여 길을 닦고 공장(供帳)하는 비용도 대신의 행차와 같이하였다. 당시 조야(朝野)에서는 모두 신립의 용력과 무예를 믿을 만하다고 하였고, 신립 자신도 왜노(倭奴)들을 가볍게 여겨 근심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는데, 조정에서는 그것을 믿었다.

선조 수정 실록 임진년 2월 1일 기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원해 나섰다. 삼도 순변사로 충청북도 충주로 출진했는데 이때 선조 임금으로부터 조선 최고의 명검이자 임금의 권한을 상징하는 상방검을 하사받고 출진했다.

회전이 벌어진 달천 평야의 모습.

신립이 투신 자살한 구초대의 모습.

신립은 조령의 지세를 보고 지세가 좋지 않다며 왜병을 넓은 들판에 끌어내 기병으로 무찌르려 한다. 문제는 조령은 해당 항목에도 나왔듯이 병사 하나로 천 명을 무찌를 수 있는 천혜의 요새로, 함정을 파놓으면 왜병들을 전부 묻어 버릴 수 있는 곳이었다. 여기를 버린 것은 실로 큰 실책이었다. 당시 병사들이 오합지졸이라 조령에서 싸우면 군사가 흩어질수 있었다는 오랜 변론이 있는데 신립 본인은 우리가 기병이 강하니 싸우면 된다고 했지 그런 말을 한적도 없거니와 상식적으로 훈련도가 떨어지면 지형의 이점이라도 빌려야지 오합지졸 이끌고 평야에서 정면대결을 하는 장군이 어디 있단 말인가? 왜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은 웅치 전투이치 전투가 그러했고 가장 성공적인 의병장인 곽재우는 왜군과 정면 대결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 밖에 없다. 결정적으로 탄금대는 산줄기를 타고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게 가능해 완전한 배수진도 아니었다. 결국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신립이 여기다가 진지를 구축한 건 그냥 자기가 장기로 하는 기병들을 활용하기 좋은 곳이 평야이기 때문, 그 이상으로 보기가 힘들다.

명나라 구원군으로 온 이여송조차도 "조령과 같은 천혜의 험지를 지키지 않다니, 신 총병은 참으로 꾀가 없는 장수로다." 라며 신립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5] 여하간 신립은 이일김여물의 만류에도 사방이 인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쳐서 탄금대 전투를 펼친 채 정면으로 맞섰다가 패했다.

패색이 완연해지자 홀로 기를 휘둘러 조선군을 지휘하면서 탄금대에 올라가 활을 당겨 일본군을 쏘아죽였는데, 하도 쏴대서 깍지를 낀 손에 열이 나자 남한강에 뛰어들어 식히고, 다시 올라가 쏘고 하는 식으로 수십 명 가까이 되는 일본군을 죽인 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남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이때 이 손을 식히러 강에 몸을 던지고 나오는 것을 총 9번 했다 하여 그 곳을 구초대(九超臺)라 불렀다고 한다.[6]

다만 이때 식히려 했다는 것이 깍지손이 아니고 수십 수천 번을 맞부딪히느라 뜨겁게 달궈진 칼이었다는 얘기도 있고, 탄금대의 지형상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7]

이후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남한강에서 잡은 큰 잉어의 배를 가르다 발견한 옥관자를 발견했는데, 달천강에서 죽은 사람 중 망건에 옥관자를 달 만한 사람은 계급이 아주 높은 양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옥관자의 주인은 신립으로 밝혀지고, 신립의 자손은 그 옥관자를 찾지 못한 시신 대신에 묻었다고 한다.

4. 가족

선조서자들 중 하나인 신성군의 장인으로, 선조와는 사돈지간이 된다. 게다가 임란 전까지만 해도 죽은 공빈 김씨의 아들인 광해군과 3살 차이밖에 안 나고, 어머니 인빈 김씨 역시 총애를 받았던지라 신성군은 그야말로 차기 세자로 점쳐지고 있었다. 차기 국구였다는 이야기.[8]

여동생은 구사맹(具思孟)에게 시집갔는데, 이 여동생이 낳은 딸은 선조와 인빈 김씨의 아들 정원군에게 시집가 능양군을 낳았다. 훗날 능양군은 인조반정을 일으켜 즉위했고, 자신의 친부모를 '원종'과 인헌왕후로 추숭했다. 즉 신립은 인헌왕후 구씨의 외삼촌이 된다.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의 사위이자 오성 이항복과는 동서지간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는 야사의 잘못된 기록이다. 이항복 항목 참조.

신립의 아들이 바로 인조반정의 공신 중 한 명인 신경진이다. 재미있게도 탄금대에서 같이 죽은 부장 김여물의 아들이 바로 인조반정의 주모자인 김류다. 이 두 집안은 대를 이어 생사를 같이 한 셈으로 탄금대에서는 신립이 대장, 김여물이 부장이었지만, 인조반정 때는 김류가 주모자 역이었고 신경진은 행동 대장역이었다. 이 아들 덕에 신립도 영의정 평양 부원군에 봉해졌다. # 그밖에도 신경유, 신경인이 있고 딸 하나는 광해군 때 권신 이이첨의 장남 이대엽의 아내였다.[9] 3형제는 아버지가 전사한 국가 유공자라 혜택을 입고 무과 급제하고 반정에도 참여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신경진은 무인임에도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러나 부전자전이라고 신경진과 신경유는 아버지처럼 탐욕스럽고 포악했다고 기록되있으나 막내 신경인은 두 형과 달리 실무직을 지내면서 묵묵히 일하고 청렴해 칭송을 받았다. 여담으로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급서한 해공 신익희의 13대조다.

또한 탄금대에서 전사할 때, 외조카도 참전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외조카가 전황이 불리한 것을 알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주하려고 하자, 신립은 외조카의 머리칼을 붙잡고 "네가 어찌 살려고 하느냐"고 꾸짖고 함께 빠져 죽었다고 한다. 선조 수정 실록 권26 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16번째 기사

5. 평가

5.1. 지휘관으로서의 평가

혹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지극히 성대하니 그 예봉에 직접 맞서기는 어렵다. 조령에 나아가 협곡 안에 군사를 매복하고 적이 골짜기 입구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우리가 양 쪽 언덕에 의거하여 높은 곳에서 활을 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하였으나, 신립은 말하기를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鐵騎)로 짓밟아버리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다.

신흠, 상촌집, 제장사난초함패지

그 뒤 명나라 도독(都督) 이여송(李如松)이 조령을 지나다 탄식하기를 ‘이와 같은 형세가 있는데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 총병(신립)은 지모가 없다고 말할 만하다.’ 하였다.

其後, 皇朝都督李如松行過島嶺歎曰:"有如此形勢, 而不知守, 申摠兵可謂無謀矣。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4월 14일 기사#

신립의 지휘 능력 문제는 충주 탄금대 전투 문서에서 더욱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단적으로 용맹성은 있었으나 지략, 계획성은 굉장히 부족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흠은 신립과 동행하며 탄금대에서 조선군이 무너지는걸 직접 본 인물이다. 즉, 저 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신립이 직접 한 말이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등장한 온갖 신립 옹호론에선 갖은 이유를 거론하며 신립의 의도가 이랬을 것 이라 추정하지만 기록에 남은 신립의 실제발언은 적은 보병이고 우린 기병이니 들판에서 돌격하면 이긴다는 너무나도 단순하고 안일한 발언 뿐 이다. 앞서 상주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이일이 분명히 일본군은 종래의 왜구나 여진족과 다르다고 강조했음에도 일절 듣지 않았다.

신립의 능력 중에 인정할 만한 것은 뛰어난 무예와 용맹, 기병 지휘다. 신립이 굉장한 맹장이었음을 부정할 사료는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절대 대군을 이끄는 사령관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신립은 뛰어난 기병대장이자 현장소장으로 남았어야지, 대국을 읽고 전략을 짜는 최고 지휘권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조정의 대신들과 가솔이 다 짐싸들고 도망가려던 분위기에서 홀로 자청해 승산이 낮은 전선에 나가고, 패전의 책임을 죽음으로 진 점은 최고 지휘권자이자 무인으로서 높이 평가할만하다. 전투에 불리해지면 제 한몸 건사하려고 주군과 부하들을 버리고 도주하는 장수들이 동서고금에 얼마나 많은가? 허나 그와는 전혀 별도로 지휘관 신립의 자질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굉장히 힘들다.

신립은 철저하게 일신의 무용과 소수의 궁기병들을 활용한 개인 전술로 승리했을 뿐 전략 전술을 활용해 이긴 적이 없다. 니탕개의 난여진족은 최대 만 단위의 병력을 동원했으나 체계를 갖춘 정규군이 아니었기에 대규모로 몰려와 진을 노략질, 포위하다가 조선 측 원군이 도착하면 이내 포위를 풀었다. 경원부 전투에서는 신립이 지휘관을 저격하자 물러났고, 안원보 전투에서는 신립이 결사 항전 의지를 보이자 역시 그냥 물러났으며 가장 큰 승전이라 할 수 있는 훈융진 전투에서조차 신립의 원군이 도착하자 즉시 포위를 풀고 물러나는 걸 추격해서 전과를 올렸다. 신립이 수백 규모가 아닌 수천 이상의 대군을 지휘한 건 탄금대 전투가 처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립은 적을 왜구 정도로 깔보고 "지금의 왜병은 전날의 왜구와 다르니, 이들과 평지에서 상대해선 안 된다"는 이일의 조언과 조령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틀어막아야 한다는 김여물의 조언을 모두 무시했다.

임란 이전까지 국가 간 전면전이나 대규모 국지전이 없었던 조선[10] 야인 토벌과 왜구의 준동이라는 한정된 경험하에 최대한 검증된 장수를 기용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신립은 그 제한된 상황 하에서만 유능한 인물이었다.

신립이 탄금대를 선택하여 전멸한 사건은 이후 경기도 용인에서의 조선군의 와해와 선조의 요동 귀부 의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신립이 탄금대가 아닌 곳에서 전투를 펼쳤다면 훈련된 병력이 패배할지언정 모두 죽지 않았을 것이다. 각개 전투에서 패배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섬멸'되어 패잔병조차 남지 않게 되면 후일을 도모할 수가 없으므로 현대전에 이르기까지 '수색 섬멸'은 중요한 작전 목표이다. 탄금대 전투 한 번으로 신립의 생애가 모조리 평가 절하된 이유는, 후일을 도모할 수 없도록 아군을 모조리 죽게 만들 전장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신립의 부대가 패배하였어도 병졸과 장수들이 생존해 있다면 후일 다시 전투에 참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전장에 투입되는 병사들을 웬만해서는 살아 돌아오게 해야만 다른 모든 병력의 사기가 저하되지 않는다. 희망없는 전투를 강요하여 병력을 소모하고 남은 모든 군대의 사기를 꺾는 것만큼 어리석은 지휘가 없다는 것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의해서 잘 증명된 바 있다. 신립의 전멸은 용인 와해에 비하여 비교적 작은 규모의 조선군이 패배한 것이지만 전쟁 초반 훈련된 병력이 모두 죽어버려 조정은 물론 각 지방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는 원인이 된 반면, 용인 와해는 말 그대로 사분 오열 줄행랑 쳤던 병력들이 이후 충청, 전라, 경상 각지에서 소기의 군사적 성과를 얻고 일부는 대승을 거두는 공을 세워 치욕을 씻었다. 같은 치욕이지만 향후 전황까지 감안한다면 탄금대 전투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최악의 졸전으로 평가되는게 당연하고, 용인 와해는 병력을 보전한 채로 철수한 각군 지휘관 덕분에 후일을 도모한 것에 대하여 재평가할 여지가 있다. 게다가 조령 등의 요지에서 왜군을 맞았다면 왜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거나 진군을 저지, 지연시켜 조선 각지에서 방어 태세를 갖출 시간을 더 벌어주었을 것이다. 물론 신립이 다른 전장을 선택하였다 하여도 용인 전투 수준으로 와해되어 왜군의 진군 속도를 늦추지 못했을 가능성도 상존하므로 무의미한 가정일 수 있다. 실제 역사는 그렇지 못하였다. 신립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탄금대 전투 한 번으로 조선의 남부로부터 북부까지 팔도가 왜군에게 유린되는 데에 적잖이 기여해 버린 것이다.

원균이 통제사직을 무리하게 얻어 조선 함대를 궤멸시킨 덕분에 수백 년 동안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능력에 비해 과도하게 중요한 자리에서 섰음에도 시종일관 오만하게 굴다가 심각한 패배를 당하여 본인의 명예 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인명을 희생시킨 책임은 신립 본인에겐 애석하게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론을 종합하면 토벌 대장에 최적화된 개인의 한계와 전면전에 적합한 인사를 가려낼 방법이 없었던 당대 조선의 체계 자체의 한계가 겹쳐, 한때는 명장으로 활약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몰락하고 수많은 군민(軍民)의 희생과 국치를 초래한 인물이다.

6. 전설

신립을 두고 전하는 전설도 있다. 신립이 무과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상경하는 중에 어느 산 속에서 길을 잃었다. 산길을 헤매다가 큰 기와집을 발견하고 들어갔는데, 아름다운 처녀가 혼자 우는 모습을 보고는 사연을 물어보니 이러하였다.

"본래 이 집은 가족들과 하인들 수십 명이 사는 집이었으나, 어느 날 요괴가 나타나 주기적으로 사람들을 잡아먹었습니다. 그 탓에 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요괴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오늘 밤 요괴가 저를 잡아먹기 위해 온다는 것을 알고 슬퍼서 울고 있습니다."

신립은 분노하여 처녀를 안심시키고 요괴를 물리쳐주기로 한다. 그는 병풍 뒤에 숨어 있다가 요괴가 나타나자 바로 칼로 목을 쳐 처녀를 구하고 처녀의 원수를 갚아주었다. 처녀가 감사해 하면서 자신을 아내로 맞아달라고 청하였지만 신립은 거절하였다. 신립이 떠나자 처녀는 신립을 크게 부른 뒤 신립이 보는 앞에서 자살하였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조선의 대표적인 장군이 된 신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을 격퇴하기 위해 부대를 이끌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꿈 속에서 죽은 처녀가 나타나 (혹은 처녀의 유품인 방울에서) '탄금대에 진을 치면 크게 이길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신립은 그 말에 따라 탄금대에 진을 치고 적을 맞이하였으나 크게 패하였고, 자신에게 한을 품고 죽은 여인의 말을 믿었음을 후회하며 자살하였다고 한다. 얀데레 결과적으로 은혜를 원수로. 비슷한 전설이 남송의 장수 악비에게도 있으므로 민담계에서 당시 유행하던 레퍼토리였던 듯하다.

7. 대중 매체에서의 신립

소설에서 가장 중립적인 시각에서 나오는 작품은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과 이번영의 왜란 소설 징비록. 비록 소설이지만 여기서는 조령을 버린 이유에 대해, 탄금대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에 평지에 진을 쳤는데 이날 밤 다수의 병사들이 사라지자 "평지에서도 이 정도인데, 조령에 진을 쳤다면 더욱 많은 병사들이 도망갔을 것"이라며 결국은 평지에서 적을 맞기로 결정했다는 묘사가 나온다.

이우혁의 소설 왜란종결자에서는 역대급의 상향을 받고 출연한다. 탄금대에서 전사하는 건 역사와 같지만, 그곳을 전장으로 택한 것은 마수늘의 농간이었다. 원래 왜란을 조선의 승리로 이끌 사람, 즉 왜란 종결자는 신립이었으나 마수들의 농간으로 전장을 탄금대로 정했던 것이다. 결국 신립이 전사하자 대타로 왜란 종결자가 된 사람이 바로 이순신. 즉 설정상 신립은 이순신급 활약을 했어야 했다. 그야말로 역대급 떡상향.

조선왕조 5백년에서는 연극 배우 김영인이 열연했다.[11] 실록의 기록에 충실한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휘하 장졸들을 손수 찔러죽이는 역으로 나온다. 여기서는 문경 새재에서 장졸들이 도망가는 바람에 배수진을 친 것으로 나오고, 제작비의 문제인지 탄금대 전투는 나레이션과 함께 스스로 배를 찔러 사망하는 장면만으로 처리되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차기환이 열연했는데, 조금 어리석은 맹장으로 나온다. 기병 우월론을 설파하다가 이 처박히는 바람에 전멸. 어차피 비중은 별로 없다. 소 요시토시조령이 텅 비었다는 보고를 듣고 그런 천혜의 요새를 버릴 바보 멍청이가 어디있단 말이냐라고 말한 후 바로 장면이 바뀌어 신립이 조령은 버린다라고 말하는 것이 나름 백미다. 조선군 다 죽게 생겼다, 이놈아! 조령을 버리는 것에 반대하는 군관 이운룡에게 명령 불복종으로 곤장을 때리곤 밤에 그를 불러내 위에 나온 낮은 훈련도 때문에 조령을 선택하긴 곤란했다는 변명을 한다.[12] 마지막에 홀로남아 이도류(二刀流)로 일본군에게 선전하다 자살하는 장면은 굉장히 비장미가 넘치게 다루어졌다는게 위안.

징비록에서는 사극 한정 사망 전대 배우 김형일이 맡았다.[13], 대표적인 장면이 임란 전, 대마도로부터 바쳐진 조총의 위력을 조선 조정에서 테스트 하던 자리에서, 조총 재발사를 준비하는 동안 화살 3대를 쏘아 보임으로써, '조총은 연사력이 떨어지므로 순간이 급한 전장에서는 활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왕을 안심시킨다. 곁에 있던 류성룡이 '허나 그 살상력이 활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반론을 제기하자,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겠지만 지레 겁먹어서도 안 된다'며 재반박. 실제 징비록의 '조총이 어디 쏘는 대로 맞는답니까' 기록을 나름대로 현실성 있게 해석한 대목인 듯. 캡처 포스팅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지휘 하에 3단 연사를 훈련 중인 아시가루들이 나온다. 1열이 발포하는 동안 2열, 3열은 화약 넣고 총알 재는 재사격 준비 동작을 하게 함으로써 연사력을 크게 높인 것. 이후로는 죽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정당성만 자상하게 설명하는 설명충으로 전락한다. 배우 버프다. 신립이 이렇게 진중할 리 없어.

결과적으로 대대로 무능하게만 나오던 신립을 나름 합리적인 인물로 재해석해 보려던 시도가 돋보였지만, 실제 신립과는 한참 동떨어진 역사왜곡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원균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합리성 따위는 밥말아먹은 무개념 똥별들도 역사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 신립이 굳이 재해석될 필요도 없었다. 정작 원균 명장설 등 오류가 넘치는 불멸의 이순신은 신립의 최후만은 사실에 가깝게 그려냈고, 같은 방송사에서 10년 뒤에 만든 징비록은 징비록에서 묘사하는 신립과는 일억만 년 동떨어진 작가만의 신립을 그려내었다.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나. 뭐긴 뭐야, 작가가 자기 읽고 싶은 것만 읽어서 그렇지.

고전 전쟁 소설 파이어 데이에선 금강 지역에 대규모 기갑 부대가 도강할 수 있는 다리로 신립대교가 등장한다. 일본 육상 자위대(!)의 북상을 막기 위해[14] 다른 다리는 전부 파괴했지만 신립대교는 자위대의 진격 방향에서 떨어진데다 나중에 반격용으로 쓰려고 파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길 지키는 한국군 부대가 2선급 부대임을 간파한 자위대가 기습해 넘어가고 서울까지 위험할 정도로 전황이 심각해진다. 다행히 한국 해군 특수 부대가 폭파하는데 성공해 보급을 차단시키고 한국군의 역습으로 자위대가 패하게 된다.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호랑이 병마사라 불리며 신립이 떴다는 말만 들려도 수만 여진족들이 모랄빵을 치는 북방 최종병기다. 임진년보다 2년 앞서터진 경인왜란이 터지고 삼랑진 근처 하남벌에서 친정을 한 오다 노부나가를 상대로 노부나가의 어깨에 화살을 꽂을 정도로 처절하게 싸웠으나 패배했고 포로로 잡힌다. 노부나가의 귀순 요구를 거부하던 중 설득을 시도한 임해군[15]의 귀를 물어 짝귀로 만들었다. 결국 처형당하나 노부나가는 그의 시신에 정중히 예를 갖춰주고 왕인 주인공도 애통해하며 국장에 버금가는 장례를 치뤄준다.

천하제일상 거상에서 조선의 장수로 등장한다. 기마궁수(천하제일상 거상) 항목 참고.


  1. [1] 고려 개국 공신인 신숭겸이 시조인 가문. 신립은 신숭겸의 20세손이다.
  2. [2] 선조임진왜란 이전까진 이순신의 능력을 높이 사서 챙겨줬다. 녹둔도 전투 때 구명해주고 대간의 반발을 무시하면서까지 쾌속 진급시켜주는 등 여러모로 잘해줬지 박대한 적은 없다. 선조가 이순신을 견제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자신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는데 이순신의 위상은 너무나도 커졌기 때문으로, 개인감정이 아니라 정치적 문제였다.
  3. [3] 이것은 졸개가 보장을 상대로 하극상을 일으켜 신립이 처형한 것이다. 하지만 신립이 조정에 보고를 올리자마자 그 날로 사간원에서 선참 후계, '전시가 아닌데 보고도 하지 않고 먼저 참형하였다.'고 3차례씩이나 태클을 거는 바람에 파직되었다. 다만 사헌부가 신립을 잡아 국문하겠다고 요청하자, '양대수의 행동이 지나치기는 하나, 사실 수졸의 죄는 당연한 것이다.' 하며 윤허하지 않았다.
  4. [4] 니탕개의 난은 그 시점에서 조선 건국 이래 최대급 외침으로 조선 전국이 전전시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 전란에서 으뜸가는 전공을 세웠으니 대접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립의 전투 방식은 그야말로 맹장형으로 일신의 무예를 활용한 개인 전술로 적진에 과감히 돌격하는 것이라 눈에 확 들어왔다.
  5. [5] 이여송은 만력 3대정 중 하나인 보바이의 난 진압에 큰 공을 세운 장군이고 임진왜란 때도 벽제관 전투 이전까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벽제관 전투를 앞두고 명군이 겪은 군마 폐사 문제와 보급문제, 남병과의 갈등 및 타국에서 벌어지는 전쟁 특성 필연적인 정치적 문제까지 고려하면 대군 지휘력 자체가 없던 신립 따위와 비교될 장군은 아니다.
  6. [6] #
  7. [7] ‘열두대’에 얽힌 세 가지 이야기 중 진짜 유래는?, 통플러스, 2016년 7월 8일
  8. [8] 정철이산해의 책략에 걸려들었던 이유도 선조가 신성군을 더 아꼈기 때문도 없지 않다. 물론 임란이 터지고 광해군이 급히 세자로 정해지고, 신성군이 난중 요절하면서 신립 가가 외척이 될 일은 물 건너간다.
  9. [9] 반정 직전 신경진 형제가 인조에게 매부 이대엽은 살려달라는 밀조를 했으나, 형 신경진이 조사를 받느라 정작 반정을 설계해놓고 참여못해 입지가 좁아졌다. 게다가 이대엽도 폐모론에 동조했으니 죽이라는 탄핵을 받아 인조가 입을 싹 닦고 처형하라는 명을 내렸다. 처형 소식을 듣고 이대엽은 옥중에서 자결한다.
  10. [10] 이에 반해 일본은 센코쿠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가지 전략과 전술에 익숙해진 데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도 전투를 하는 등 그야말로 병법과 야전능력이 절정을 달렸다.
  11. [11] 이 배우는 무풍지대에서 김두한을 열연했고, 여인천하에서는 극 초반부에 박원종으로 열연했다. 연극계에서는 꽤 유명한데, 친분이나 생계의 목적상 영화에서는 항상 깡패나 건달 등의 악역을 맡았다. 내가 고자라니김영인과는 동명이인이다.
  12. [12] 이건 사실 배수진으로 유명한 한신의 논리였기도 하지만... 한신은 신립처럼 대책없이 어중이 떠중이들을 절벽을 등지게 하고 전장으로 떠밀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신립 본인은 한신이 아니다. 실제로 한신이 배수진을 쓴것은 딱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역할을 해야하는 부대의 효율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사용한 감이 있고, 여기서 나오는 신립의 배수진은 그냥 목적이 배수진인, 노빠꾸 전술이나 다름없다.
  13. [13] 재미있게도 김형일은 태조 왕건에서 이 신립 장군의 실제 가문 시조인 신숭겸을 맡기도 했다!
  14. [14] 1990년대 기준으로도 말도 안 되는 고증이긴 한데, 극중에선 질적은 넘어가고 양적으로 어떻게 키워놨다는 설정. 즉, 무인 전차만 존재하는 대체 역사나 그려놓은 꼴. 미사일 러시는 왜 넣었는지 의문인 졸작이기도 하다. 어설픈 반전 사상만 들어 있는 덕에 일부에서는 명작이라 부르지만 말이다.
  15. [15] 현실에서도 망나니였는데, 여기선 아예 매국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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