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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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Sacrum Imperium Romanum(라틴어)
Heiliges Römisches Reich(독일어)
Heilige Roomse Rijk(네덜란드어)
Heilige Roomse Riek(저지 독일어)
Saint-Empire romain(프랑스어)
Sacro Romano Impero(이탈리아어)
Svatá říše římská(체코어)
Sveto rimsko cesarstvo(슬로베니아어)
Holy Roman Empire(영어)

황제기

황제 문장


13세기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절의 최대 강역[1]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분열된 영토[2]

800년[3]/962년[4] ~ 1806년

국가

황제찬가

위치

중부유럽

수도[5]

(자문 회의, 1497년 ~ 1806년)
레겐스부르크 (의회, 1663년 ~ 1806년)
베츨라어 (대법원, 1689년 ~ 1806년)

정치체제

선거군주제

국가원수

황제(카이저)

언어

라틴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저지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체코어
슬로베니아어

종교

가톨릭(국교)[6]

주요사건

800년 프랑크 국왕 카를 1세의 황제 대관식
924년 ~ 962년 궐위
962년 독일 국왕 오토 1세의 황제 대관식
1254년 ~ 1273년 대공위시대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황제 첫 선출
1356년 금인칙서 발포
1618년 ~ 1648년 30년 전쟁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1806년 레겐스부르크 제국 회의 → 제국 해체

성립 이전

프랑크 왕국 (800년 이전)

독일 왕국 (962년 이전)
이탈리아 왕국 (962년 이전)

초기 구성국

독일 왕국 (962년 이후)
이탈리아 왕국 (962년 이후)
보헤미아 (1002년 이후)
아를 왕국 (1032년 이후)

중간에 독립

교황령 (1177년)
네덜란드 (1648년)
모나코 (1648년)
밀라노 공국 (1648년)
사보이아 공국 (1648년)
스위스 (1648년)
제노바 공화국 (1648년)
토스카나 대공국 (1648년)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 (1648년)

해체 이후

라인 동맹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1. 개요
2. 역사
2.1. 카롤루스의 대관
2.1.1. 신성 로마 제국의 시초 논란
2.2. 오토 1세의 대관
2.3. 교황과의 갈등
2.4. 대공위시대와 황권의 약화
2.6. 제국의 해체
3. 국호
4. 정치
5. 영향력
6. 종교
7. 역대 황제
8. 오해와 반박
9. 각종 매체
9.1. 신성 로마 제국을 모델로 한 것들
10. 둘러보기
11. 문서

1. 개요

중부유럽에 존재하였던 제국이다. 그 성립 연도에 대해서는 800년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대제교황 레오 3세에게 '서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받은 것을 기원으로 보기도 하고, 962년 독일 왕국오토 1세가 교황 요한 12세에게 대관식을 받은 962년을 본격적 출발로 여기기도 한다.

후기에 정착된 정식 명칭은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Sacrum Nationis Germanicæ, 독일어: 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으로 1485년부터 1806년 멸망할 때까지 제국의 공식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2. 역사

(독일을 중심으로 본 신성 로마 제국의 변천사 영상, 동프랑크 왕국 ~ 독일 제국)

2.1. 카롤루스의 대관

신성 로마 제국의 시작에는 두 가지 중요한 시점이 있다. 첫번째는 800년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 대관을 받은 것이며, 두번째는 962년 오토 1세가 교황으로부터 황제 대관을 받은 것이었다.

800년 카롤루스가 교황으로 부터 '서로마 제국 황제' 대관을 받자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은 로마의 제위를 계승하는 정통 황제는 자신 뿐이라며 강하게 항의했고, 정작 카롤루스 자신도 교황의 대관으로 황제가 되는 것을 내켜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덕분에 카롤루스는 카롤루스 대제가 되고, 프랑크 왕국도 제국이 되었다. 당대의 비잔티움 황제였던 여제 이리니와 카롤루스가 혼인할 뻔한 일도 있었지만 무산되었고, 812년 미하일 1세가 카롤루스를 황제(단, 그냥 황제지, '로마 황제'는 아니다!)로 승인하면서 유럽에는 두 명의 황제가 공존하게 되었다. 이것을 니키포로스의 평화(Pax Nicephori)라고 부른다.

이 '서로마' 제국은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뒤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후엔 장남인 로타르가 물려받은 중프랑크(이탈리아)의 왕위를 얻는 자가 황위에 올랐다. 그러다 888년 분열된 영토를 잠시 통일한 카를 3세가 죽으면서 제국의 영토는 다시 쪼개졌고, 이탈리아에서는 여러 명이 동시에 군주를 자처하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이탈리아의 왕이 황제가 될 수 있으므로 제위도 이에 따라 왕조가 여러 번 교체되는 혼란을 겪다 924년 베렝가리오 1세의 암살로 잠시 끊긴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 문서 참조.)

이후 962년에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교황으로 대관을 받으면서 신성 로마 제위는 부활하게 되었다.

2.1.1. 신성 로마 제국의 시초 논란

일반적으로 오토 1세의 대관(962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으로 치는 경우가 많지만, 서양에서는 카롤루스의 대관식(800년)을 신성 로마 제국의 시작을 보기도 한다. 오토 1세가 대관을 받을 때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이 오토 1세 대관의 중요한 선례가 되기는 했지만, 카롤루스의 대관이 오토 1세에게 직접 이어진 것이기 아니기 때문에 두 제국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우선 카롤루스 대제의 제위가 중간에 단절되었다는 점이다. 카롤루스 대제의 제위는 중프랑크로 계승되다가 924년 완전히 소멸되었다.

게다가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과 오토 대제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을 같은 나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다.

그 중 하나로 영토상 차이가 있다. 비록 이후에 영토가 분할되었지만, 카롤링거 왕조 때 황제들은 명목상으로나마 프랑크 전역의 황제였다. 그러나 오토 대제 때에는 서프랑크와 아를 왕국은 황제의 영역 밖에 있었다. 아를 왕국은 후에 다시 제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서프랑크는 제국의 영역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또한 황제 선출 방식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카롤링거 왕조 시절 제위는 순수하게 혈통에 의해 상속되었다. 반면 카롤링거 왕조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제후들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물론 사실상 세습된 경우도 많았지만, 단순히 혈통에 의한 상속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실권이 달랐다. 카롤루스의 제위는 실권이 없는 완전한 명예직이었다. 카롤루스 대제의 업적은 전적으로 프랑크 왕국의 군주로서 힘에 근거한 것이었다. 카룰루스 대제 시절 그의 제국 = 그의 직할 왕국이었으므로 자신의 직할 영지와 제국의 영역이 일치하지 않은 나중의 사례와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손자인 로타르 시절에 시작된다. 즉 로타르는 명목상 중프랑크, 서프랑크, 동프랑크를 아우르는 황제였지만 그의 직할 영지는 중프랑크에 한정된 것이다. 그러나 로타르는 황제로서 전혀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명목상 자신의 제후인 동생들에게 좌우로 발리다가 결국 그의 영토는 서프랑크와 동프랑크에 흡수되었다. 반면 오토 대제와 그의 직계인 작센 왕조 시절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역시 명문화된 권한은 없었지만, 황제의 권위를 바탕으로 실제 제후들에게 영토를 빼앗거나 하사하고 작위와 통치권을 하사거나 빼앗는 등 큰 실권을 행사했다. 당장 오토 대제의 아들 오토 2세 때 제국 내 최대의 제후국인 바이에른과 마찰을 일으키다가 결국 바이에른 공국을 쪼개 분할을 명했고 이를 시행에 옮겼다. 또 카롤루스가 '서로마' 대관을 받은 것이라는 점도 거론된다. 이것은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이란 이름도 오토 1세 때부터 확립된 명칭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그 이름을 확립되었다는 반론이 존재한다. 오토 1세의 대관도 카롤링거 왕조 이후 흐지부지 되었던 프랑크 왕국의 정통성을 다시 세운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카롤루스의 제국을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과 분리하여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궁예가 고구려를, 견훤이 백제를 계승한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이들이 같은 나라가 아닌 것처럼 오토 1세가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를 자처했다는 이유만으로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과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을 지속되는 하나의 연속체(continuum)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속성만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을 설명할 수 없다. 연속성이 끊긴 대공위 시대 이전과 이후의 제국을 완전한 별개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이처럼 오토 1세 대관 이전의 공백기도 대공위 시대처럼 일시적인 계승 중단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서로마의 멸망 이후 오도아케르가 동로마 황제에게 서로마 황제의 제관 깃발과 의복 등을 갖다 바치며 자신은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고 해명하고 파트리키우스라는 칭호를 받음으로써 명목상 동로마의 신하로 들어갔으며 교황에게는 카롤루스에 서로마 제위를 수여할 권한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위조 문서를 정확하게 황제를 자칭한 것에 불과하고 동로마의 승인이 있은 다음에나 가능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오토 왕조 역시 이와 같은 동로마의 황제로부터 서로마 황제로 인정받았기에 가문의 교체만 있었을 뿐 제위는 그대로였다.

애초에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로마와 관련 있거나 승인을 받았어야지 교회는 그 다음의 일이었다.

이러한 논란 때문에 서구에서도 카롤루스의 제국을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과 구별하여 '카롤링거 제국(Carolingian Empire)'(800–888)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2.2. 오토 1세의 대관

카를로스 대제 사후 843년 프랑크 왕국은 3분할되었다. 그중 독일 지역은 동프랑크 왕국이 차지하였다. 911년 동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4세(유아왕 루트비히)가 후사없이 죽으면서 카롤링거 왕조의 대가 끊기자 귀족들은 루트비히의 친척인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재위 911~918)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콘라트 1세 역시 후사없이 죽었고, 후계자로 당시 가장 유력한 세력을 보유했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를 지명했다. 그러나 5대 공작령 중 슈바벤바이에른이 하인리히 1세의 선출에 반대했기 때문에 한동안 하인리히 1세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정치적 협상을 통해서 슈바벤과 바이에른도 하인리히 1세를 국왕으로 인정했다. 일반적으로 하인리히 1세 시절부터 독일 왕국(Kingdom of Germany)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이후 독일왕국의 왕들은 5대 공작령 대표들의 선출에 의해 왕위를 물러받게 된다. 콘라트 1세와 하인리히 1세의 경우 이전 왕들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라 치더라도,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인 오토 1세 역시 선출을 통해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전통은 고대 게르만족으로 부터 이어온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은 오토 1세부터 시작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를 선출하는 전통으로 이어졌다.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귀족들이 선출한 것은 독일왕(로마왕)이며, 독일왕(로마왕)으로 선출된 이후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야 정식으로 황제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었다. 교황이 대관하는 절차를 없애고, 선제후들의 선출만으로 바로 황제위에 오르게 된 것은 1493년 막시밀리안 1세 황제 때 부터다.

하인리히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오토 1세(재위 936~973)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오토 1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슬라브족과 마자르족의 침입을 격퇴했으며 북이탈리아(롬바르디아)를 정벌했다. 이러한 공로로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게 되었다(962년). 교황 입장에서는 명목상으로나마 유럽 세계 전체의 지배자를 자처하는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권위로써 누군가를 내세워야 하는 판이었는데, 이때 큰 활약을 보이는 오토 대제를 (서)로마의 황제(정확히는, '로마인의 왕')로 내세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토 1세 때만 해도 신성 로마 제국, 혹은 로마 제국이라는 칭호보다는 그냥 "제국(Imperium)"으로 불렸다. 이후 오토 1세의 뒤를 이은 오토 2세(973~983. 사실 967부터 아버지와 공동황제)때부터 로마 제국이라 칭했고, 로마 제국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왕위를 받아낸 오토 3세(왕위 983~1002, 제위 996~1002)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이라 불리게 된다. 오토 1세가 황제의 대관을 받은 후 제위는 (중간에 끊긴 적도 많았지만) 대대로 계승되어갔다. 하인리히 공에 의해서 시작된 작센 왕조는 오토 1세부터 이어지다 잘리어(Salian) 왕조로 계승되었고 잘리어 왕조는 다시 호엔슈타우펜 왕조로 계승되었다.

2.3. 교황과의 갈등

오토 1세는 늘 분열의 위험성을 안고 있던 제국을 안정시키고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황제가 성직자를 영주로 임명하는 소위 "제국교회정책"을 시행하였다. 황제가 임명하는 고위 성직자가 각 지역의 영주를 겸하는 구조로서 이는 황제가 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는 서임권을 전제로 한 구조였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하인리히 4세(독일 왕위 : 1056~1084, 제위 1084~1105)와 서임권 분쟁에 들어가고 뒤이어 카노사의 굴욕(1077) 사건이 일어난다. 서임권 논쟁으로 촉발된 분쟁은 보름스 협약(1122)으로 수습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독일의 각 지역 영주들과 도시들이 각자의 영지의 지배권을 강화하여 분열의 길로 나아갔다. 이를 영방국가 체제라 부른다.

2.4. 대공위시대와 황권의 약화

수십년간 단절되었던 제위를 계승한 호엔슈타우펜 왕조(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1세(1152년 즉위, 제위 1155~1190)는 이에 맞서서 "신성 제국"을 칭하며, 황제이면서 동시에 남독일을 중심으로 영지를 확장하는 황제영방국가 정책을 취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프리드리히 1세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낳아 도리어 황권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254년 프리드리히 2세(왕위 1112~1220, 제위 1220~1250)의 죽음으로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단절되고, 1256년 대립왕 홀란트 백작 빌헬름(재위 1247~1256)이 죽자 제국의 정세가 불안해지게 된다. 이에 라인 지방의 영주들은 영국왕 헨리 3세의 영향으로 핸리 3세의 동생인 콘월 공작 리처드(재위 1257~1272)를 황제로 추대하고, 다른 세력은 프랑스왕의 지지 아래 카스티야알폰소(재위 1257~1275)를 옹립하여, 제위가 비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를 대공위시대(1254~1273)라고 부른다. 대공위시대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요청으로 열린 프랑크푸르트 선제회의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제위 1273~1291)를 황제로 뽑음으로써 종식된다.

대공위시대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영주들의 투표에 의해 뽑히게 되었고 황제는 자기 영지 외에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돼버린다. 특히 1356년 카를 4세(1346년 즉위, 제위 1355~1378)에 의해 공포된 "금인칙서(Goldene Bulle, 금인장으로 내린 칙서)"는 황제를 투표에 의해 선출하고, 선제후(選帝侯. 쾰른 대주교,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라인 궁중백,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왕(카를 4세의 것이었다)들에게 사실상 자신의 영지를 독립국가처럼 다스릴 수 있도록 특권을 부여했는데, 선제후들에게 부여된 특권은 나중에 가서는 모든 영주들과 도시들에게 적용되어 결정적으로 독일의 분열을 가져오게 된다.

2.5. 합스부르크 왕조

15세기 중반에 가서는 여러 행운들이 겹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황제위를 계속 이어받는다. 막시밀리안 1세의 혼인동맹정책의 결과 최전성기인 16세기의 신성 로마 제국의 판도는 스페인이탈리아까지 포괄하며 역대 최대를 자랑하였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이건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이 넓어진 건 아니다. 그냥 카를 5세랑 합스부르크의 땅이 늘었을 뿐, 카를 5세는 황제위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작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 그래서 카를 5세 사후에 황제위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해외 식민지나 스페인 왕위는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가 찢어진다. 하여튼 카를 5세 시절 황제의 권위는 대단해서 사코 디 로마 등의 수난으로 인해 교황조차 그 권위 밑에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였다. 동시에 이때부터 독일 정체성이 성립되었다.[7]

하지만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제국은 대내적 분열과 대외적 충돌로 홍역을 치르게 됐으며 그 결정판인 30년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각 지역의 영방들이 독립국가에 가까운 자립이 허용됨에 따라 합스부르크 왕조는 남독일과 오스트리아 외에는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17세기 이후 이렇듯 부침을 겪는 모습에 볼테르는 형식밖에 없는 이 제국을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다라고 평할 정도로 위상이 추락했다. 16세기만 해도 프랑수아 1세가 신롬 황제 선거에 출마한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 볼테르가 살았던 18세기의 독일 지역내 영방국가들은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세계국가적인 분위기가 자신들의 존속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제국을 지탱한 것은 제국대법원(Reichskammergericht). 제국대법원은 권한의 행사에 일부 제한이 있긴 했지만 제국의 유지 및 로마법의 확산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2.6. 제국의 해체

그렇게 명맥을 이어오던 중 프랑스가 대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필두로 호기롭게 프랑스를 침공하였으나 역으로 털려버리고 라인 강 서안의 제국 영토를 몽땅 잃어버린다. 그와중에 나폴레옹이라는 코르시카 촌놈이 프랑스 권력을 잡고 여러 차례 대프랑스 동맹군을 박살내버리면서 그 결과 1801년 뤼네빌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은 라인 강 서안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였다. 더군다나 나폴레옹에 줄선 제국 내 군소 국가들이 황제를 지지하는 주요 세력인 주교령 및 기사단령을 갈라먹으면서 황제 프란츠 2세는 제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데다가 1804년 레겐스부르크에서 나폴레옹이 선제후 자리가 대거 비었다는 이유로 나폴레옹에 충성하는 군소 위성국들을 선제후로 대거 임명하면서 유사시 황제위는 나폴레옹이 찬탈하거나 나폴레옹의 하수인에게 넘어갈 위험이 생겨버린다.[8]

이에 프란츠 2세는 자신의 유고시 후계자가 황제 선거에서 당선될 가망이 전혀 없어지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는 여러 영지의 집합체일 뿐, 법적으로 하나의 나라도 아니고 대표 작위인 오스트리아는 '대공국'에 불과 하기 때문에 나폴레옹이나 프랑스의 괴뢰인 독일 듣보잡 제후의 신하가 될 위험에 쳐했다. 이에 합스부르크 여러 영지의 작위를 아우를 수 있는 대표 타이틀이 필요했고,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해서 보험으로 삼은 것. 1806년 6월 나폴레옹은 제국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이 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방해물로 여겼기에 오스트리아에 3개월 안에 제국 해체를 하지 않으면 선전포고한다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7월 파리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의 16개 영방이 나폴레옹을 동맹의 보호자로 삼는 라인 동맹을 결성하였다. 라인 동맹의 영방들은 8월 1일 동시에 제국을 탈퇴하였고 더이상 버틸 수가 없던 프란츠 2세는 8월 6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위 및 제국에서의 기타 지위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서 840여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신성 로마 제국은 공식으로 소멸하게 된다. 후일담으로 이 시기 제국의 해체를 두고 괴테는 "나의 마부가 언쟁을 벌이는 일보다 더 관심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전직 판사이자 프로이센의 총리였던 카를 폼 슈타인은 빈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제안할 정도로 무늬만 제국이었던 체제에 대한 독일인들의 애착은 대단했던 듯하다. 훗날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재통합을 완수한 후 이를 계승한 독일 제국을 선포하였을 정도였다.

3. 국호

신성 로마 제국은 제국이기는 하지만 독특하게도 전신이었던 동프랑크 왕국의 국명 'Regnum Teutonicus', 즉 독일 왕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작센 왕조 당시 국명은 독일 왕국 이외에는 그저 알레만 왕국이었다. 800년대 프랑크의 카롤링거의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에서 교황에 의해 서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았다가 동로마 제국의 항의로 인해 타협의 결실로 임페라토르바실레우스의 칭호를 받고 서로마 제국이 아닌 서유럽의 최고자로 인정해준 예가 있기에 그저 '독일인과 로마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것이다. 오토 3세 때 잠시나마 로마 제국과 로마 황제를 자처했으나 오토 3세의 사망으로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잘리어 왕가 이후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가 역전되었다. 동로마 제국이 서유럽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은 이탈리아로 배타고 넘어가서 교황을 협박하는 정도 밖에는 없게 되었다. 독일 영토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도 결국 불가리아 왕국도 넘어가지 못할 정도로 안습이 되고 오히려 독일 제국이 심심치 않게 동로마를 겁박한 현시창된 상황에서야 '로마 제국 (Römisches Reich)'(독일어 reich는 라이히 문서에서도 보듯이 용어의 혼란이 있으나 관습적으로 '제국'이라고 번역한다.)의 국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1157년 이후 호엔슈타우펜 왕가 이후로는 프리드리히 1세 바바롯사가 공식적으로 국명에서 로마를 빼고 신성을 대신 넣어 '신성 제국(Heiliges Reich)'이라 명명했다. 그러다가 1254년이였던 대공위시대 때 대립 왕 중 한명이었던 홀란트 백작 빌헬름(빌렘) 3세가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을 사용해 비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1442년 합스부르크 왕가 때 '독일 국민의 로마 제국'을 사용하다가 1485년 프리드리히 3세에 의해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라는 국호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국호는 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에 의해 1512년 쾰른의 제국 의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어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공식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다.

4. 정치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는 대대로 황제와 제후들간의 대립, 대외적으로 타국의 국왕이나 아니면 교황과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다. 신성 로마 제국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로는 제국 의회와 국가교회정책, 작센 왕조 시기의 동유럽 및 이탈리아 반도로의 진출, 황제 선출과 선제후,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많은 작위와 영방국가들이 특징이다.

5. 영향력

탄생 배경과 오해 문서에서 보다시피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에게 인정받은 서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서유럽에 알려졌다.(다만 근거가 되는 문서(콘스탄티누스 기진장)가 위조였기에 교황의 권위로 찍어누를 수 없는 정교회/이슬람 문화권에선 이 나라를 로마 제국의 후예로 보지 않았다. 지리적으로 바로 인접한 곳에 (동)로마 제국이 수백년 전부터 멀쩡히 살아 있던 판에, 교류도 뜸한 처음보는 민족이 멀리 떨어진 곳에다가 세운 신생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식할 리가 없다.) 그에 따라 서로마의 모든 땅을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권이라고 주장했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명분상의 권위에 불과했다. 구 서로마 영토에 있는 국가들 모두가 이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로 치부해 버렸다. 뒤이어 영국과 프랑스, 에스파냐에서는 종교법 학자들을 동원해서 "왕은 그의 왕국에서는 황제다", 즉 동양 버전으로는 외왕내제식의 이론을 펼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되, 자신들의 나라에 그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막아버렸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도 이런 무리한 발언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의 권역은 자연스럽게 독일플랑드르, 북부 이탈리아로 좁혀졌다. 물론 서방 세계에서 공적이거나 외교적인 담론 자리에서는 유럽의 중심축이자 황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및 황제를 상석에 앉히는 등 괜찮은 예우를 받았다. 프랑스마저도 나폴레옹 이전까지는 감히 군주가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이는 단순히 실제적인 힘의 문제라기보다는 역사적 전통 및 명분상의 권위 혹은 관습상의 문제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동로마 제국의 경우 이 국가의 군주를 '서방(인)의 황제'로서는 인정하였으나 '로마인의 황제'로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 문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듯이 이 나라는 당연히 '로마'라고 불렸으며, 다른 국가들도 이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었다. 주변 나라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단지 자기네들이 스스로를 '로마'라고 일컬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잔티움 제국과 로마 제국을 같은 국가라고 말하는 게 절대로 아니라는 얘기.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로 대표되는 정교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슬람 세력 또한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헤라클리우스를 '로마의 군주'라고 지칭한 편지, 경전 쿠란의 여러 챕터들 중 하나인 '로마장'의 존재, 룸 술탄국이라는 국명, 콘스탄티노플 함락오스만 제국 메흐메트 2세의 '로마 황제(룸 카이세리)'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비잔티움을 '로마 제국'으로 여기고 있었다. 오히려 정교회 국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신성 로마 제국의 로마 제국 계승 정통성의 근거가 되는 문서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또한 교황의 영향력 바깥이었기에, 신성 로마 제국은 단순히 옛 로마 서부 지역에 새로 생겨난 제국일 뿐이었다. 그래서 당시 (동)로마 제국도 신성 로마 제국이 '새로운 제국'일 수는 있어도 '로마 제국'일 수는 없다는 스탠스를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상황이 잘 전파되지 않은 이슬람권의 사람들도 파르티아사산 왕조의 지배 시절부터 수백년 간 자신들과 투닥거린 로마/동로마 제국을 당연히 '로마 제국'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동)로마 제국이 아닌 자기네 신성 로마 제국이 정통 로마 제국이라는 서방 세력의 주장을 이례적이라고 여겼다. 게다가 라틴 제국의 정식 국호인 '로마니아 제국('로마인들의 땅'의 제국, '로마 땅'의 제국)' 및 황제의 직함(임페라토르 로마노움, 로마 황제), 이탈리아인이 제작한 요안니스 8세 메달의 문구('로마인들의 왕이자 황제')에서 볼 수 있듯이 서유럽인들마저 비잔티움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식하기도 했음을 보여 주는 사례들도 버젓이 존재한다. 다만 서유럽인들의 경우 서로마를 독일 군주가 계승하였다고 본 사례들도 분명히 존재하기에(로마 코무네의 폭동 당시 폭도들의 반응 등), 비잔티움'만'이 로마를 독점한다고 해석하지는 않은것으로 보인다.

6. 종교

신성 로마 제국에게 있어서 가톨릭은 단순히 국교 '따위'의 레벨이 아니며 동로마의 정교회처럼 국가 정체성의 한 축을 이루는 핵심 요소다. 오히려 동로마의 경우 나라의 중심이 되는 국교라는 입장일 뿐이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애초에 나라의 시작부터가 교황이 (서)로마 황제관을 준 것이 계기이며, 심지어 이 당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했던 문서가 위조임이 발각되었기에 교황이 없으면 신성 로마 제국이 더 이상 정당한 로마 제국의 후예로 인정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가톨릭과 신성 로마 제국의 관계는 가톨릭이 우위인 관계였다. 현대인의 시각이야 어떻든, 당시 서유럽인의 인식 속에서 신성 로마 제국은 서로마의 후계자이며, 동방의 정교회 제국인 동로마 제국과 대비되는 서방의 가톨릭 제국이었다. 그리고 개신교가 출현하여 제국의 신앙이 분열되는 순간, 제국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다.[9]

7. 역대 황제


신성 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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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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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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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프란츠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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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 문서 참조.

8. 오해와 반박

"Ce corps qui s’appelait et qui s’appelle encore le saint empire romain n’était en aucune manière ni saint, ni romain, ni empire."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딱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

볼테르, 나라들의 풍습과 정신에 관한 글(Essai sur les mœurs et l’esprit des nations)(1829) 2권, 238쪽

볼테르가 한 이 유명한 디스 때문에 뭔가 안습한 나라로 잘못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엄밀히 말하면 볼테르의 평가는 신성 로마 제국 입장에서는 꽤나 부당하기 짝이 없는 평가이다. 말기에는 개신교의 출현과 교회의 분열 등으로 빈사 상태에 이르러 볼테르에게 이런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말기를 제외하면 '교황이 로마 황제관을 주었다'는 정통성 때문에 서유럽인들의 인식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물론 교황이 서로마 황제관을 줄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는 근거인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가 위조문서로 들통난 데다가 (동)로마 제국의 지속적인 항의로 로마 제국 계승이라는 부분은 초반부터 삐걱거렸고, 결국 제국을 참칭한 건 맞지만, 적어도 성지인 로마를 보호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성했고, 로마인들을 통치했던 것도 사실이니 신성한 것도 로마인을 지배한 나라인 것도 맞다.

사실 볼테르의 디스는 어디까지나 18세기의 껍데기만 남아 다 쓰러져가던 신성 로마 제국을 가리키고 한 조롱이었으며 볼테르 뿐만이 아니더라도 근세의 안습한 신성 로마 제국 때문에 중세의 초기 신성 로마 제국과 건국 정통성 자체의 이미지까지 나빠지고 근대학자들에게 조롱받은 경향이 있다. 물론, 위에 서술한 것처럼 신성 로마 제국도 100% 떳떳하고 정통성 있는 작위 형성 및 계승과정을 거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다만 이 문구의 경우 볼테르 역시 다른 학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오해 문서 참조.)

9. 각종 매체

중세를 다루는 역사/전쟁 게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세력이기도 하다. 당연하지 프랑스랑 같이 중세 서유럽 투탑이었는데 많은 게임 커뮤니티 안에서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같은 짧은 이름들에 비해 너무 긴 국호 때문에 "독일"로 불리거나 "신롬" 혹은 가짜 로마, 같은 약칭으로 지칭된다.

이름 자체가 '신성'이 붙은 게 왠지 간지를 더해줘서(...) 그런지 보통 서브컬처, 특히 판타지물에서 신성 ○○ 제국이 주구장창 나오는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을 패러디한 명칭이 아닐까 한다.

예)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5신성 그리핀 제국, 코드 기아스신성 브리타니아 제국

워해머 판타지의 주인공 팩션인 제국이 신성 로마 제국을 모티브로 했다.

9.1. 신성 로마 제국을 모델로 한 것들

다만 이름만 따온것들도 있다는 것을 염두해둘것.

10. 둘러보기

독일의 역사
Die Geschichte Deutschlands

고대

중세 ~ 근세

근대

현대

로마 제국

서로마

프랑크 왕국

독일 왕국

독일 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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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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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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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 근세

근대

현대

로마 제국/
게르마니아

서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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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독일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나치 독일

연합군 군정기

오스트리아

11. 문서


  1. [1] 이미지를 확대해 보면 네덜란드 해안 지역에 색칠이 어긋나 있는데 이는 지질 작용과 간척 등으로 지형이 변질되어 현재의 땅 모양과 차이가 생긴 것을 반영한 것이다.
  2. [2] 네덜란드스위스, 이탈리아를 잃었다.
  3. [3] 카롤루스의 대관 기준
  4. [4] 오토의 대관 기준
  5. [5] 15세기 이전에는 공식적인 통치기구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수도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냥 황제가 사는 곳이 곧 수도였으므로 황제가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 그에 따라 수도도 같이 따라다니던 셈이었다. 그래도 고정적인 수도 역할을 했던 도시들을 들자면 아헨, 뮌헨, 프라하, 프랑크푸르트가 있다.
  6. [6] 지방 제후 차원에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루터교가 허용되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칼뱅파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제국 차원의 국교는 언제나 가톨릭이었으며, 가톨릭은 국교 정도가 아니라 제국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7. [7] 단, 이때가 교황 권위가 추락한 시점이란 것을 잊어선 안된다.
  8. [8] 팔츠 선제후는 18세기에 바이에른에 통합되면서 이미 소멸하였으며 친합스부르크인 쾰른, 마인츠, 트리어 선제후는 영지를 프랑스가 먹어치우면서 소멸했고 반프랑스파인 영국 국왕이 가지고 있는 하노버 선제후는 프로이센이 하노버를 먹어치우면서 사라져버렸다. 얘들을 대신하여 나폴레옹이 선제후로 임명한 애들이 바로 친프랑스파인 레겐스부르크, 헤센-카셀, 바덴, 뷔르템베르크, 잘츠부르크이다. 남아있는 선제후들도 친합스부르크인 것은 아니라서 바이에른은 프랑스 편으로 갈아탔고 프로이센은 프랑스와의 밀약으로 하노버를 먹어치운 후 입 딱 다문 상태이며 작센은 어디에 붙을까 눈치만 보고 있다. 때문에 보헤미아 선제후 딱 하나만 가지고 있는 프란츠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다.
  9. [9]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오스트리아는 지금도 가톨릭 신자의 비율이 매우 높다.
  10. [10] 다만 이름만 따왔고 딱히 신성 로마 제국이 연상시키는 부분은 없다
  11. [11] 독일 제국나치 독일이 각각 제2제국, 제3제국으로 불리는 것처럼 신성 로마 제국도 제1제국(제1라이히)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만 이것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이후의 분류로, 본토에서는 잘 쓰지 않는다.
  12. [12] 엄밀히 말하자면 제국 참칭으로 시작하여서 제국을 포기하던지 나중에 동로마랑 합의한걸 토대로 로마를 포기하던지 해야한다. 신성은 가톨릭 신앙상 맞다.
  13. [13] 신성 로마 제국 최후의 제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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