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희

<span style="text-shadow: 0 0 10px #ffffff; color: #fede58;">건국훈장</span> 대한민국장(重章)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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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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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초대-
2대 2기

3대 1기-
4대 1기

4대 1기-
5대 민의원

5대 참의원

6대 1기-
7대 2기

8대

9대 1기-
9대 2기

10대 1기

권한대행

이승만

신익희

이기붕

곽상훈

백낙준

이효상

백두진

정일권

백두진

민관식

11대 1기

11대 2기

12대 1기-
12대 2기

13대 1기

13대 2기-
14대 1기

권한대행

14대 1기

14대 2기

15대 1기

15대 2기

정래혁

채문식

이재형

김재순

박준규

황낙주

이만섭

황낙주

김수한

박준규

16대 1기

16대 2기

17대 1기

17대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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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2기

권한대행

19대 1기

19대 2기

20대 1기

이만섭

박관용

김원기

임채정

김형오

박희태

정의화

강창희

정의화

정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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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축구협회 회장

하경덕(5대~6대)

신익희(7대)

홍성하(8대)

신익희 / 한자: 申翼熙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생몰년도

1892년 6월 9일 ~ 1956년 5월 5일 (63세)

출생지

조선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
(現 대한민국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서하리)

사망지

대한민국 충청남도~전라북도 호남선 열차

국적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

본관

평산 신씨(平山 申氏)

별칭

자(字)는 여구(如耉), 호(號)는 해공(海公), 해후(海候)
별칭(別稱)은 왕해공(王海公), 임방호(壬邦乎)

직업

독립운동가, 정치가, 중화민국 국민당 육군 중장

종교

유교(성리학)

가족

신현(증조부), 신명호(조부), 신단(부), 신식(백부)
풍양 조씨, 전주 이씨(적모), 정경량(모), 신재희(형)
이승희(사별),김순이(재혼)
신정완(장녀), 신하균(장남), 차녀요절
김재호(사위), 신기현(손자), 김낙양&김유생(외손자)
신보희, 신규희, 신필희, 신정희(이복형)

학력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학사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folding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내역 ]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제 30대 내무부장

임기

1944년 4월 22일 ~ 1948년 8월 15일

전임

조완구

후임

폐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초대 내무부차장

임기

1919년 4월 10일 ~ 1919년 4월 23일

전임

신설

후임

현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부 비서부 임시서리 비서장

임기

1921년 1월 25일 ~ 1921년 3월 30일

전임

오영선

후임

오영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부 비서부 제 6대 비서장

임기

1921년 5월 7일

전임

김여제

후임

?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대리 외무부장 겸 외무부차장

임기

1920년 9월 27일 ~ 1920년 11월 30일
1920년 12월 1일 ~ 1921년 5월 7일

전임

이동휘

후임

이희경(대리)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제 18대 외무부장

임기

1933년 3월 6일 ~ 1933년 6월 22일

전임

조소앙

후임

김규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제 6대(서리) 외무부차장

임기

1920년 9월 1일 ~ 1920년 9월 19일

전임

정인과

후임

본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제 13대 외무부차장

임기

1933년 3월 6일 ~ 1933년 12월 30일

전임

김석

후임

차이석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제 13대 외무부차장

임기

1943년 3월 4일 ~

전임

차이석

후임

페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 임시서리 법무부부장

임기

1919년 8월 18일 ~ 1919년 9월 11일

전임

안창호

후임

신규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 제 4대 법무부차장

임기

1919년 8월 5일 ~ 1920년 2월 23일

전임

김응섭

후임

안병찬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제국 제1대 법제국장

임기

1920년 1월 13일

전임

신설

후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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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경기광주군 제 2·3대 국회의원

2대 임기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3대 임기

1954년 5월 31일 ~ 1956년 5월 5일(사망)

후임

신하균

1. 개요
2. 유년시절
3. 일제강점기
4. 해방 이후
5. 대통령 후보 출마와 사망
6. 사후
7. 미디어

"나라는 완전 독립되어야 하고(國家須完全獨立;국가수완전독립).

민족은 철저 해방되어야 하며(民族須澈底解放;민족수철저해방).

사회는 필히 평등하여야 한다(社會必須平等;사회필수평등)." [1]

1. 개요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민주당계 정당의 아버지, 그리고 해방정국 백색테러의 배후조종자

대한민국정치가·독립운동가.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여구(汝耉)이며 호는 해공(海公)이다. 현재 표기되는 이름은 '신익희(申翼熙)'지만 광복 직후에는 한자 독음이 완전히 확립되지 않아서 이름이 '신익히'로 표기되기도 했다.[2]

2. 유년시절

경기도 광주군 출생. 임진왜란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의 후손이다. 조선 후기 때 판서를 지낸 신단(申檀)과 그의 넷째 부인인 동래 정씨 정경랑(鄭敬娘)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단의 여섯 아들 중 막내였고, 동복 형제가 2명 있었다.

어렸을 때는 한문에 능통했으나[3] 1908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했다. 이때부터 우파적인 성격을 띄어 "영국 젠틀맨"이란 조롱을 당했다.

3. 일제강점기

1913년 일본 유학을 가서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벌며 고학을 했다.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평의회장·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여 학생운동을 하였다. 1915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고향에 동명강습소를 열었으며,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3.1 운동에서 독립선언서 작성에 관여했으며,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후 내무차장·외무차장 등을 지냈다. 이때 백의사의 단장 염동진(본명은 염응택)이 남경중앙군관학교에서 교관들을 폭행하려는 폭동에 가담했다가 쫓기자 그를 숨겨주었던 것이 백의사와의 인연이 되었다.[4] 그외에도 중국 국민당의 육군 장성으로 복무했다가 한국 광복군에 뛰어든다. 임정과 국민당의 관계를 보면 알지만 이는 당시엔 흔한 일이었다.

4. 해방 이후

광복과 더불어 귀국했는데, 처음엔 한민당송진우 등을 친일반민족행위자라며 강경하게 비판했지만, 해를 넘기면서 김구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정치공작대·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신탁통치 반대에 앞장서고 단독정부를 주장하며 이승만과 행보를 같이했다. 백의사를 이끌었고 심지어 김일성을 죽이기 위해 백의사를 북에 보냈다고 한다. [5][6] 이런걸 보아 해방정국에서 세력을 모으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는듯.

사실 적극적이란 말로도 부족한 과격파다. 빼도 박도 못할 백색테러 행위니까. 정치공작대나 이후 지청천의 대동청년단과 합세하여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임정 내무부장에 있을때 경위대라는 사설 친위대를 만들려 한것을 보면 상당히 파시스트적인 면모가 보인다. 아니, 사실 후대에는 "독재에 대항한 야당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 1950년대 이후의 야당 지도자나 핵심인물들을 보면 알게 모르게 다들 극우 단체나 파시즘적 행보와 연관이 있다. 이유는 대부분의 중도파가 몰락하고, 대부분의 좌파가 죽거나 월북한 다음 남은 사람들이 이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46년 이승만파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학장, 대한체육회 회장 등을 겸했다. 그 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일종의 국회의원격) 대의원에 피선, 1947년 의장이 되었다. 1948년 7월에는 초대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최연장자라는 이유로 선출된 국회의장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자 국회의장직을 계승했다.

대한국민당을 창당할 때 앞장섰으나 독선적인 이승만과 부딪치면서 1949년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김성수, 조병옥, 장면, 윤보선, 박순천과 함께 야권을 이끌었다. 다시 1950년 다시 국회의장에 선출되어 부의장 장택수, 조봉암과 함께 이승만을 불신임까지 밀고 나갔으나 (당시 대선은 국회 간선제) 6.25 전쟁이 터지면서 이승만은 위기를 모면했고 발췌 개헌을 통과시킨다.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대관식 때 대한민국 정부의 축하 사절로 영국을 방문했다.

사사오입 개헌이 터지자 호헌동지회를 구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당(1955년)을 창당했다.[7]

5. 대통령 후보 출마와 사망

이후 민주당 구파의 수장으로 장면을 이기고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30만이 운집한 한강 백사장 연설 등에서 선전했지만, 5월 5일 선거를 열흘 남기고 전주로 가기 위해 전라선 열차를 타던 중 호남선 구간인 함열역 부근에서 뇌일혈로 졸도했고 이리역에 급히 내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열차 안에서 이미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8]

사실 60을 갓 넘긴 상황이었고 전국순회유세로 건강이 우려되는 시점이라 아주 놀랄 일은 아니었다. 조병옥 등도 그의 수행을 자처할 정도였다. 신익희는 선조들이 조선시대에 60세 이상 장수한 점을 자랑하며 자신의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고 강조했지만 그 역시 63살에 죽었다. 죽기 이틀전인 5월 3일 한강백사장 연설에서 너무 흥분해서 효자동 자택에서도 흥분이 가시질 않아 정말 위험했다고 한다.

넥타이를 매다 졸도한 뒤, 깨어나 홍차를 마시고 종손이자 비서인 신창현에게 뒤지(휴지)를 달라고 말한 것이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되었다. 이승만의 독살설도 있지만 정황을 보면 음모론으로 봐야할 듯 하다.

6. 사후

그가 죽은 직후 ""비 내리는 호남선""(남행열차는 아니다)이란 노래가 유명세를 탔다. 종로6가 효자동의 자택에 묻혔다.

그의 사후 진보당조봉암은 단일화를 주장했으나 민주당은 거부했고, 이에 5월 15일 선거 당일 대량의 무효표가 "추모표" 격으로 던져졌다. 그 숫자가 무려 185만표에 달해 단일화(조봉암 210만)를 했다면 부정선거의 의혹에도 불구하고 이승만(500만)을 위협할 정도였다고.

그의 사후 지역구인 경기도 광주군에서 재보궐선거가 치러졌는데 아들 신하균이 당선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비서였던 유치송은 전두환 정권 때 관제야당인 민주한국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되었다.

국민대학교는 설립자이자 초대학장인 그를 기리기 위해 매년 추도식에 총장을 비롯한 교직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캠퍼스에는 신익희 동상이 건립되어 있고. 박물관에 신익희 기념관을 조성하였다. 장학금이나 단체명에 그의 호인 '해공'을 따서 명명하는 경우도 많다.

더불어민주당민주당 창당 기념일인 9월 18일에 경기도 광주의 신익희 생가에서 창당 기념식을 매년 열고 있다.

7. 미디어

해방직후터 제1공화국시기를 다루는 현대사 드라마에서는 높은 확률로 출연한다.

제1공화국에서는 전운무풍지대에서는 김기종이 담당하였다.

야인시대에서는 진봉진이 담당하였다.[9] 실존인물과 싱크로가 비슷하다.

서울1945에서는 박영록이 담당하였으나, 복장고증 오류나 안경 미착용 등으로 자막에 신익희라고 달지 않는 이상 모를 정도.(...)


  1. [1] 여기서 수(須)는 '반드시'의 의미이다. 흔히 알려진 해석 가운데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해석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2. [2] https://namu.wiki/w/%ED%8C%8C%EC%9D%BC:external/img.sbs.co.kr/200590950_700.jpg
  3. [3] 심지어는 삼국지연의를 잘 못읽는 청나라 사람에게 대신 삼국지를 술술 읽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4. [4]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 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은 김구에게 불만이 많았다. 국민당에게도 그렇고. 여담으로 김구는 백의사를 만주에 파견하고, 만주를 폭격할 계획까지 세웠었다. 흠좀무.
  5. [5] 백의사와 정치공작대는 1946년 3월 1일 평양의 3.1절 기념식에서 김일성에게 수류탄을 던진다. 그러나 이 수류탄은 김일성 옆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주워서 던지려다가 노비첸코의 손에서 폭발한다. 그는 한쪽 손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이 실명되지만 김일성은 무사했다.이때 뒤졌어야 했는데
  6. [6] 심지어 미군정을 물러나게 하기 위할 쿠데타에 가까운 중경 임시정부 추대운동을 주동했던 적도 있었다고. 하지 중장은 그에게 사살 위협만을 하고 풀어주었다. #
  7. [7] 이때 조봉암을 참여시키는데 미지근한 태도를 취했다.
  8. [8] 다음 선거(1960년)에 출마했던 민주당 구파의 리더였던 조병옥도 선거 중 급사했다.
  9. [9] 89화에 첫 등장할때는 다른 배우가 신익희 역할을 맡았다. 국회의장 역할이었지만, 별다른 대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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