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성 마립간


신라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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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실성 마립간(實聖 麻立干)

별호

실주왕(實主王)

성씨

김(金)

실성(實聖) / 보금(寶金)

왕후

아류부인(阿留夫人)

왕녀

아로부인(阿老夫人)

아버지

김대서지(金大西知)

어머니

이리부인(伊利夫人) 석씨

생몰연도

음력

? ~ 417년 5월

재위기간

음력

402년 ~ 417년 5월 (16년)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전
2.2. 재위
3. 평가
4. 삼국사기 기록
5. 창작물

1. 개요

신라의 제18대 왕. 김알지의 후손(예손)으로, 아버지는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 이사금의 동생 이찬 대서지(大西知)[1], 어머니는 아찬 석등보(昔登保)의 딸인 이리부인(伊利夫人)이다. 같은 김씨 왕족이지만 전왕 내물이나 다음 왕 눌지와는 먼 친척관계. 내물 마립간의 뒤를 이어 3번째 김씨 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칭호는 삼국유사에서는 마립간,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마지막 이사금인데, 광개토왕릉비 등 다른 사료와 종합해 봤을 때 전왕 내물 마립간 때부터 마립간이라고 불렀다고 여겨지므로, 주로 삼국유사를 따라 실성 마립간으로 불린다. 그런데 학자들은 그가 '이사금'이라는 호칭을 쓴 것이 선왕 내물계 김씨 일족과의 의도적인 차별화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마립간에 비해서 '이사금'이라는 왕호는 연륜 있는 연장자의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 실제로 실성이 왕이 될 당시에 내물의 아들들은 아직 너무 어려서 국정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위에 올렸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왕의 연륜을 강조키 위해 마립간보다 이사금 왕호를 더 선호했을 가능성이 있다.[2]

2. 생애

2.1. 즉위 전

내물 마립간 재위 후반, 신라는 백제 - 가야 - 왜 연합 사이에 끼어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태였고 북방에서 전성기를 맞고 있던 고구려의 힘을 빌리기로 해 392년 정월 고위 귀족인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다. 400년 백제, , 가야의 삼국 연합군이 대대적으로 신라를 쳤을 때 광개토대왕이 5만의 지원군을 보내 격퇴했고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린 대가로 고구려군이 신라 땅에 주둔하면서 정치적 간섭을 받는 반속국으로 떨어지게 된다. 실성은 401년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돌아왔고, 402년 내물 마립간이 승하하면서 즉위하게 된다.

그가 왕위에 오른 과정은 석연치가 않다. 내물 마립간이 죽었을 때 그 아들들이 어려서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고는 하지만, 비록 어리다고는 해도 내물에게 버젓이 아들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타지 고구려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신라 내부에 정치 세력이 굳건하지 않았을 실성이 401년 귀국하자마자 402년에 왕에 올랐다는 점은 실성의 등극 뒤에는 고구려의 입김이 작용했을 개연성을 보여준다.[3] 실성도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고구려의 유력자들과 접촉하면서 차기 왕권을 노렸을 것이고 고구려 또한 인질 시절 인맥을 터 놓아 자신들의 말을 잘 들을 듯한 실성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거기다 실성의 어머니는 석씨다. 한마디로 내물의 즉위로 왕위를 잃어버린 석씨가 자신들의 영향력을 다시금 확보하기 위해서 석씨 왕실의 피가 섞인 실성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실성 이후 석씨는 신라 왕계에서 그야말로 사라져버린다. 석씨 이전에 왕위에 올랐던 박씨의 경우 일단 왕위는 잃었어도 중대와 하대까지 쭈욱 주요 귀족 가문으로 계속 왕실에 남아있으며, 거기다 먼 미래에는 왕위에도 잠깐 다시 오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때 당시 석씨가 실성을 밀었기 때문에, 나중에 실성을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한 눌지에 의해 석씨 일족도 같이 신라 왕실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4]

또한 그의 왕비 아류부인(阿留夫人)이 미추 이사금의 딸이라는 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다. 미추 이사금의 시기는 실성의 활동시기에서 약 90여년 전의 일이니, 미추 이사금의 딸은 이 시점에선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로 그의 왕비가 미추 이사금의 혈통이라면 딸보다는 손녀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 사실 실성이 아류부인을 미추 이사금의 딸이라고 한 것은 삼국시대 초기 기록이 으레 그렇듯 기년이 잘못 기록되었다는 설도 있고, 혹은 일종의 프로파간다일 가능성이 있는데, 아마도 내물의 아들들이 있음에도 내물과 가까운 친척이 아닌 실성이 왕이 된 것에 대한 세간의 비판을 잠재우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거의 왕에서 연줄을 끌어온 것으로 보인다.[5]

2.2. 재위

왕위에 오른 후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삼고 국정을 맡겼으며 즉위년(402년)에 내물 마립간의 3남 미사흔와 화해하기 위해 인질로 보내고, 412년엔 2남 복호고구려에 인질로 보내 외교관계를 개선하려 제스쳐를 취한다.

그가 타국에 볼모로 보낸 미사흔과 복호는 전왕의 친아들들이니 실성의 최대 정적이었다. 사실 인질을 보내는 이유는 '너희에게 거슬리는 짓은 하지 않겠다'라는 약속이고, 만약 이걸 어긴다면 보내놓은 인질은 죽을 것이다. 보통 인질은 죽으면 곤란한 중요 인물을 보내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실성 입장에서 복호와 미사흔은 고구려와 일본에서 죽어버려도 별로 손해가 아니다. 오히려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니 이득일지도 모른다. 고구려와 일본에 고위 왕족을 보내 신라가 명목상 고개를 숙이며 선심 쓰는 '척'도 하고, 전왕의 아들들을 신라 밖 이곳 저곳으로 퍼트려 보내서 세력을 약화, 즉 사실상 숙청시키려는 목적이었던 듯. 참고로 미사흔과 미사품은 이름이 비슷하지만 다른 인물이다. 복호를 고구려에 보낸 것은 친고구려 노선을 재확인시키는 목적. 그리고 소싯적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온 실성 본인의 후임이기도 하다.

백제(403년)와 왜(405년)의 침략이 있었지만 격퇴시켰다. 왜에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음에도 왜가 쳐들어온 건데 기록상 왜 이렇게 되는지 부연 설명은 부족하지만, 왜국 측도 미사흔이 말만 왕족이지 인질로서 제대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던지 해서 뭔가 상황이 꼬인 것으로 보인다.[6] 특히 405년의 싸움은 4월에 왜병이 침범하여 명활성(明活城)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갈 때, 왕이 친히 기병을 이끌고 독산 남쪽에서 왜병과 두 번 싸워 이기고, 왜병 3백여 명을 죽였다고 한다. 405년에는 신라가 승리했지만 407년 3월에 또다시 동쪽 변경을 침입하더니 6월엔 남쪽을 침범해 백성 1백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한편으로 이런 기록도 있다.

7년(서기 408년) 2월에 왕은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병장기와 군수품을 저축하여 신라를 침범하려고 준비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왕은 우리가 먼저 정예병을 뽑아 왜인들을 쳐부수자자고 하였다. 그러나 예불감 벼슬에 있는 일본통 미사품은,

"신이 들으니 병사는 흉기요, 싸움은 위험한 일이라 하였습니다. 하물며 넓은 바다를 건너 남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험한 곳에 요새를 설치하고, 적이 쳐들어오면 막아서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 싶사옵니다. 만약 우리 쪽이 이로우면 나아가서 적을 사로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유인하는 것은 좋지만, 남에게 유인당하는 것은 가장 나쁘다는 교훈으로 가장 좋은 계책인가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옳다 하였다.

14년(서기 415년) 7월, 왕이 친히 혈성원에서 군사들을 열병하고 또 금성 남문에 나아가서 군사들이 활 쏘는 모습을 보았다. 이 해 8월에 풍도에서 왜병과 싸워 이겼다.

유례 이사금 때와 비슷하게 선제 공격 이야기가 있었는데, 비록 미사품의 반대로 무산됐지만 이러한 기록들을 볼 때 실성 개인적으로는 직접 전선에서 군대를 통솔할 능력도 제법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전쟁에 있어서도 꽤 호전적인 성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사위이자 전왕 내물의 장남인 눌지가 나이가 차고 점점 정치적으로 부상하자, 417년 실성은 눌지를 제거하려고 마음먹게 된다. 실성은 고구려에 있던 시절 알고 지내던 사람을 몰래 불러 "눌지를 보거든 그를 죽여라"라고 부탁한 뒤에, 그 고구려 사람과 눌지가 밖에서 우연히 만나도록 상황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고구려 사람이 눌지를 만나보고 외모가 시원하고 군자의 풍모가 있음을 알고 오히려 눌지에게 암살 계획을 실토해 버리고, 눌지가 실성을 원망해 그를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것이 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유사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는데, 삼국사기와 달리 실성이 암살을 사주한 게 '한 고구려 사람'이 아니라 '고구려군'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는 눌지가 스스로 실성을 죽이고 임금이 됐다고 했지만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군이 눌지를 임금으로 앉혔다고 되어있다. 기록에는 눌지가 덕이 있어서 그렇다는 식으로 나왔지만 대체로 학계에서는 눌지가 사전에 고구려 측과 손을 잡은 뒤 실성을 암살하고 그의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보고 있다.

왕은 전왕의 태자인 눌지(訥祗)가 매우 덕망이 있는 것을 꺼려하여 그를 해치려고 하였다. 그래서 고구려에 군사를 청하고 거짓으로 눌지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군사들은 눌지가 어진 행실이 있는 것을 보고, 곧 창을 거꾸로 돌려 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삼은 뒤 돌아갔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제18대 실성왕

실성은 친고구려파였음에도 정작 고구려에 의해 숙청당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실성보다 눌지의 정치적 가치를 더 높게 쳤기 때문이라는 설이 중론이다. 실성은 겉으로는 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지만 이는 정적 제거용으로 실질적인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었다. 그리고 415년 혈성 벌판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했는데 이것이 고구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해석도 있다. 더군다나 눌지는 고구려에 이미 인질로 있는 복호의 친형이다. 눌지를 왕위에 앉히면 복호의 인질로서의 가치가 올라가고, 신라의 행동 제약은 더 커지는 것이니 눌지가 왕이 되는 게 고구려한테도 더 이득이었던 셈.

한길사판 이강래 역주 삼국유사 실성왕조에서는 호우총 출토 청동 호우명 그릇을 근거로 들어 이 시기 신라의 정치 격변에 고구려가 깊숙이 관여했음을 고고학적 근거까지 더해 강조하고 있다. 실성 vs 눌지의 대립 구도 또한 집안 싸움에 고구려가 끼어들어 정치 공작을 펼쳤다는 이야기.

3. 평가

잇다른 백제와 왜의 공세를 안정적으로 막아내고 기병대를 이끌고 직접 친정하는 모습까지 기록된 것으로 보면 내정은 차치하고서라도 군사적 능력 만큼은 꽤 준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실성왕은 키가 7척 5촌이나 되고, 사람됨이 똑똑하고 빼어나서 미래를 볼 줄 알았다."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다. 實聖이라는 것도 성왕이라는 상당히 좋은 의미이므로 만약 그가 폐위되었다면 쉽게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아니다.[7] 내물계와의 지나친 갈등이 결국 화가 된 듯 하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실성 이사금 본기

一年春二月 실성 이사금이 즉위하다

一年春三月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내다

二年春一月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삼다

二年秋七月 백제가 변경에 침입하다

三年春二月 시조묘를 배알하다

四年夏四月 왜병이 퇴각하는 것을 매복하여 물리치다

五年秋七月 누리가 곡식을 해치다

五年冬十月 서울[8]에 지진이 일어나다

五年冬十一月 얼음이 얼지 않다

六年春三月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입하다

年夏六月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입하다

七年春二月 대마도에 군영을 정벌하려다 그만두다

十一年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다

十二年秋八月 낭산에서 구름이 일어나다

十四年秋七月 혈성의 들판에서 사열하다

十四年秋八月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 이기다

十五年春三月 동해 바닷가에서 뿔이 있는 큰 고기를 잡다

十五年夏五月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물이 3장이나 솟아오르다

十六年夏五月 왕이 죽다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음에도 왜가 쳐들어왔다는 기록이 4개나 보인다. 사실 왜라고는 해도 이 시기는 일본열도에 통일 정권 하나만 있었는지도 불분명해서 서로 다른 세력일 수도 있다.

5. 창작물

마립간 시대의 신라 왕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한국 사극에 등장했다. 광개토태왕근초고왕인데, 광개토태왕에서는 조재완이, 근초고왕에서는 김하균이 연기했다.[9] 그러나 두 드라마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신라는 병풍이었기 때문에 큰 비중은 없었다.


  1. [1] 그러나 미추 이사금의 사망년도와 실성 마립간의 즉위년도의 차이가 100년이 넘으므로 대서지의 아들보다는 손자나 증손자일 것으로 추청된다. 혹은 대서지가 미추 이사금의 동생이 아닌 동생의 아들이나 손자일 가능성도 있다.
  2. [2]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큰 문제가 있는데, 눌지가 실성의 사위라는 것이다. 실성이 내물왕의 아들들과 왕위경쟁을 통하여서 즉위하였을 경우라면 즉위 이후에 아들들, 특히 가장 위협되는 눌지를 그냥 두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혹자들은 복호와 미사흔이 고려와 왜에 볼모로 갔다는 것으로 해결했다고 하지만, 둘은 눌지보다 동생들이고, 복호가 간 고려는 실성이 즉위 전에 볼모로 갔던 곳이다. 가장 위협되는 자를 사위로 삼으면서 그냥 두었다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기록상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성의 부인이 내물의 부인과 자매<혹은 母女?>관계에 있기에 즉위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3. [3] 9대 벌휴 사후 즉위한 내해이사금은 벌휴의 아들인 이매의 아들이지만, 벌휴의 장남이였던 세신갈문왕의 딸아마도 장녀였던 것으로 보인다.을 마누라로 가진 덕분에 즉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로와 이음이라는 아들들이 이었음에도 세분갈문왕의 아들인 조분이사금이 후계를 이어간다는 것으로 알 수 있는데, 비슷한 예로 13대 미추는 조분의 사위미추의 부인인 광명부인이 조분의 장녀였던 것으로 보인다.이고, 14대 유례는 조분의 아들이며, 15대 기림은 조분의 아들인 걸숙의 아들이고, 16대 흘해는 조분의 딸인 명원부인의 소생이다. 이렇게 조분이사금으로 연결되는 왕위계승이 돌고나서 13대 미추의 첫 사위인 내물이 즉위하였다면, 이후에 둘째 사위인 실성이 즉위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4. [4] 이후 석씨는 일본 기록 속일본기에 기록된 723년 8월 8일 일본에 갔다온 사신단 중 부사가 한나마(=대나마) 석양절(昔楊節)인 것을 봐서 석씨가 먼 훗날인 통일신라 시기에도 최소 5두품 이상의 귀족이었던 것은 확인된다. 그러나 한때 왕을 배출했던 것에 비하면 비중이 매우 낮아진 것이다.
  5. [5] 재미있는 사실로는, 미추 이사금의 딸과 혼인했다는 사람은 실성 마립간만이 아닌데 그 다른 사람이 내물 마립간이라는 것. 내물 마립간이든 실성 마립간이든, 둘 다 이건 억지로 끌어온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 추정을 확실히 할 수 있는 기록은 없으므로, 일반적으로 내물 마립간의 왕비 보반부인과 실성 마립간의 왕비 아류부인은 자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6] 사실 왜라고는 해도 이 시기는 일본열도에 통일 정권 하나만 있었는지도 불분명해서 그냥 한반도의 백제와 신라마냥 서로 다른 세력일 수도 있다.
  7. [7] 다만 휘가 실성이라면 의자왕의 경우처럼 이름만 그렇고 실제로는 폐위되었을 수 있다.
  8. [8] 원문은 京都로 당연히 월성이 위치했던 현재의 경주시를 말한다. 서울을 뜻하는 京은 한강에 있는 서울이 아닌 수도를 뜻하는 우리말 '서울'을 뜻하는 단어다.
  9. [9] 참고로 두 배우는 징비록에서는 각각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명나라 장수 양호 역을 각각 맡아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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