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대기근

아일랜드어: An Gorta Mór(대기근), An Drochshaol(끔찍한 시기)

영어: Irish Great Famine

1. 개요
2. 배경
3. 진행과정
4. 결과
5. 읽을거리
6. 부록: 아일랜드는 왜 옥수수를 심지 않았나

1. 개요

"물론 감자를 망친건 신이였다. 하지만 그걸 대기근으로 바꾼 것은 영국인들이다."

- 존 미첼

아일랜드의 기근은 1740 ~ 1741년, 1847 ~ 1852, 1879년으로 총 세 번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아일랜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두 번째 기근을 가리켜 '대기근'이라고 부른다.

2. 배경

The Great Famine - Part 1 of 2 (BBC 1995)

앵글로 색슨족의 침입으로 브리튼 섬에서 축출된 켈트족이 정착해 살고 있던 아일랜드는 잉글랜드가 노르만 왕조에 정복당한 후인 12세기 후반부터 헨리 2세의 주도 하에 잉글랜드의 침입이 계속되어 점차 예속화되어 갔다.

16세기 유럽을 강타한 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의 국교가 성공회로 바뀌게 되면서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인에게 성공회를 믿을 것을 강요했고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인들은 저항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1세부터 시작하여 올리버 크롬웰에 이르는 잉글랜드 지배층은 아일랜드인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다음 아일랜드 자영농들의 토지를 몰수한 다음에 아일랜드로 건너온 잉글랜드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잉글랜드인이나 성공회로 개종한 일부 아일랜드인들이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되었고 나머지 아일랜드인은 소작농으로 전락해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소작농들은 상대적으로 싸고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한때 '악마의 작물'로 불리며 거의 먹지 않았던, 당시에는 프랑스와 벨기에에서만 식용되던 감자를 대량으로 재배했고, 일년 내내 감자버터 밀크[1]만으로 버티는 수준이었다.[2] 결국 감자의 끝내주는 구황효과[3]로 어찌어찌 가난을 견딜 수 있게 된 아일랜드 하층민들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게 되었고, 아일랜드의 인구는 눈에 띄게 증가하게 되었다. 당시 경제학자였던 맬서스가 그 유명한 '인구론'에서 '곡물 생산량은 산술 급수로 늘어나는데 이렇게 기하 급수적으로 애들을 낳기만 하면 분명 인류는 망한다'라고 적은 것도 아일랜드의 상황을 보고 적은 것이었다.[4]

1801년, 아일랜드는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 즉 영국의 일부로 정식 합병이 되었고 대기근이 일어나기 직전인 1840년대 후반의 아일랜드 인구는 800만 명 정도였는데, 인구의 1/4이 무려 86%의 토지를 독점하고 있을 정도로 빈부 격차는 심각한 상태였고 그만큼 빈민의 수도 많았다.

아일랜드는 이 때 영국의 식민지영토였고, 기본적으로 영국이 필요로 하는 밀과 소, 돼지를 키우는 플랜테이션 농업 체제를 갖고 있었다. 아일랜드인 소작농들이 먹는 감자는 주로 텃밭에 심었다.

3. 진행과정

1842년 미국 동부의 감자 재배는 대규모의 감자 역병(감자마름병)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이 역병은 순식간에 북미 전역으로 확산된 뒤 다시 배를 통해 전 유럽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감자 역병균의 포자는 잎에서 증식하기 시작해 섭씨 10도 이상, 습도 75% 이상인 조건에서 이틀 정도만 있으면 작물 전체로 퍼진다. 만약 이 때 가 내리면 포자가 빗물을 타고 땅에 스며들어 식용으로 쓰이는 덩이줄기 부분까지 퍼지게 되며, 병균 포자가 바람을 타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 작물을 전염시키기도 한다. 역병에 걸린 감자는 이파리 끝과 줄기에 짙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하고, 감염된 덩이줄기는 갈색으로 변하면서 다른 세균이 침입하면서 2차 감염으로 썩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하필 이 시기, 그러니까 1845년 여름의 아일랜드는 유난히 비가 잦았던 탓에 밀과 같은 다른 작물의 작황도 엉망이었을 뿐만 아니라 감자 역병이 돌기에 최적인 환경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1845년 가을, 감자 수확이 시작되면서 대재앙이 막을 올렸다.

이 때, 영국 정부는 역병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적극적인 구제 활동을 펼쳤기 때문에 문제가 커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 본토에서 정부가 직접 밀을 공급하여 1845년 겨울 동안 70만명을 구제했고, 1846년에는 곡물법을 폐기하여 밀의 수입을 자유화함으로서 식량의 유통량을 늘리는 한편 간접적으로 식량의 가격을 조정하려 했다.

그러나 1845년의 겨울을 넘긴 아일랜드 소작농들에게 이건 그림의 떡이었다. 비록 곡물법의 폐기로 밀 관세가 철폐되었으나, 당시 감자 역병으로 농사를 망친 지역은 아일랜드만이 아니었으므로 외국에서 많은 식량을 들여올 수 없었으며, 그로 인해 폭등하는 식량 가격을 안정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식량이 아일랜드로 들어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아일랜드로 들어온 식량 대부분은 항구 도시와 그 인근 지역에서 유통되었다.

사실 아일랜드 내에서도 밀을 비롯한 작물은 1845년의 흉작을 제외하면 계속해서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심지어 가축의 수출은 대기근 내내 증가하는 중이었다.[5] 문제는 환금 작물을 재배하고 남은 자투리 땅에 감자를 심어 식량을 자급자족하던 아일랜드의 빈농들이 밀과 같은 식료품을 구입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아일랜드 뿐만이 아니라 전 유럽을 휩쓸었던 대기근으로 인해 가격이 폭등했던 상황이었다. 아일랜드 내에는 제 돈 주고 밀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밀과 가축 대부분이 계속 수출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1846년의 곡물 수출은 아일랜드 자체 소비를 위해서 1/3수준으로 폭락했다. 또한 정부는 공공 공사를 시행하고 공사비 전액을 현지에서 지출함으로써 아일랜드인 노동자를 먹여 살렸다.

그러나 아직 기근이 1년차에 그쳤던데다가, 이때까지만 해도 정부가 지속적인 관심과 개입을 펼쳤기 때문에 상황이 양호한 편이었으나, 정권이 교체되고 자유당이 집권하자 자유방임주의적 원칙[6]에 따라 직접적인 개입에 제동이 걸렸다. 정부가 주도했던 밀 공급은 곡물 상인들의 반발로 중단되었고 이제 공권력은 기근에도 불구하고 식량이 어디로 유통되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1845년에 5만명이었던 아일랜드인 이민자 숫자는 1846년 10만명으로 폭증했다.

그나마 1846년에 아일랜드를 탈출한 이들은 이후에 닥쳐올 최악의 사태를 보지 않고 떠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행운아였다. 자유당이 집권한 1846년 여름부터 정부는 식량 공급을 포기했으며 아일랜드는 계속 유럽에 식량을 수출했다. 더군다나 씨감자도, 씨감자를 묻을 땅도 잃어버린 빈민들을 1846년의 기록적인 폭설과 한파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근 시대 사망자의 대부분이 1846 ~ 1847년의 겨울에 발생했다.

아일랜드인들은 입에 넣어 소화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먹어서 목숨을 부지해야 했는데, 유럽에서는 거의 식용으로 쓰지 않는 해조류까지 닥치는 대로 채취해 먹는 지경까지 갔다. 이때 많이 먹었다는 적갈색 해조류에는 '아이리쉬 모스(Irish Moss)'라는 별명까지 붙어있고, 지금도 저 해조류로 만드는 젤리나 음료수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지금은 구황식품 용도보다는 식품첨가물카라기난을 추출하는데 훨씬 많이 사용한다.

1846~1847년 겨울의 참사 이후, 아일랜드에서는 빈농과 지주가 모두 몰락하기 시작했다. 1847년 2월 뒤늦게 자유당 정권은 구제소를 마련하고 무료 식량 공급을 시작하였으나, 자유주의에 따르자면 정부가 그 책임을 도맡아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해당 지역 납세자들이 모든 책임을 떠맡도록 6월에 법제화해버렸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전국민이 거지떼로 변한 상황에서 이 말은 토지 소유주들, 즉 지주들이 구제소에 의존해 목숨을 잇고 있던 아일랜드인 300만명의 구호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막대한 구제 비용을 감당해야 했던 아일랜드 지주들은 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기 토지에서 굶어 죽어가는 소작농들을 쫓아내기 시작했지만, 이렇게 쫓겨난 소작농들을 대신해 농사를 짓고 지주들에게 지대를 낼 사람은 이미 아일랜드에 존재하지 않았다. 주 소득원을 자기 손으로 내쫓아버린 지주들은 줄줄이 빚더미에 올라 서로 땅을 떠넘기며 무너졌다. 오히려 이들의 땅과 농장을 영국인들과 친영국파인 아일랜드 신교도들이 헐값에 대거 매입하여 아일랜드의 구교도와 신교도간의 경제적 격차는 더욱 심해졌고 반영 감정은 증폭되었다.

그리고 아일랜드의 빈민 구제를 위해 영국의 종교단체들이 아일랜드에 들어갔는데, 순수한 성격의 자선-구제 사업을 시행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게는 빈민 구제를 핑계로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성공회로의 개종을 강요하는 작자들이 대부분이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1849년 아일랜드를 방문했는데, 이때 여왕이 방문한 항구도시인 코브(Cobh)는 이를 기념해서 도시 이름을 '여왕의 도시'란 뜻의 퀸스타운(Queenstown)으로 바꾸었다.[7] 당시만 해도 빅토리아 여왕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의 감정은 나쁘지 않았고, 비교적 호의적으로 여왕을 환영했다. 여왕의 방문을 통해서 아일랜드의 참상이 더 잘 알려지고 영국 정부는 보다 효과적인 지원 정책을 추진했다...면 해피 엔딩이었겠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여왕은 퀸스타운과 그 근교만 방문했고, 당연히 이 곳들은 여왕의 방문을 앞두고 사전에 지원을 받아서 윤택해 보이는 아일랜드인들의 모습만 목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빅토리아 여왕은 아일랜드의 현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아일랜드를 떠났고, 그나마 아일랜드에 대한 관심도 오래가지 않았다.

4. 결과

퀸스타운(Queenstown) 항구에서 미국 뉴욕으로 떠나는 아일랜드 주민들.

결국 아일랜드인들은 고향을 뒤로 한 채 머나먼 이민길에 올랐다.

'당시 아일랜드 감자의 종이 한 종류 뿐이라서 병이 돌자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는 말이 있고,[8] 실제로 아일랜드 대기근은 식물 병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진균류가 식물병을 일으킨다는 최초의 입증인 동시에, 한가지 품종만 심는 것이 어떤 재앙을 불러일으키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하지만 아일랜드 대기근의 가장 큰 원인은 종 다양성의 문제가 아니다. 아일랜드 섬의 기후 자체가 극히 불안정하여 현대 기술 없이는 곡물 경작이 극히 어려웠기 때문에 인구가 불어난 아일랜드인들은 감자만 먹을 수 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역병으로 감자가 다 사라지고 구제마저 끊기면서 재앙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아일랜드에서 밀과 호밀이 경작 가능한 곳은 더블린 주변의 영국인 거주지역뿐이었고 당연히 이 지역은 기근을 피해갔다.[9]

이 사건은 아일랜드 반영 감정의 기원 중 하나로 당당히 꼽히고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미국으로 가는 이민이 급증, 그리고 도착 후에는 이탈리아계, 아프리카계들과 함께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북군에 동원,[10]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심지어 보스턴에는 이 당시의 이주를 기념하는 공원까지 있다. 참고로 2010년 통계에 의하면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수는 3,467만 명에 달하는 수준으로 아일랜드 공화국 인구의 7배를 넘기는 수준이다.[11]

그리고 아일랜드는 이때 인구가 줄어든 이후 현재까지 기근 전의 인구 수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대기근 직전 800만이었던 아일랜드 인구는 대기근 쇼크 후, 이민으로 인한 인구 감소가 이어진 끝에 아일랜드가 독립하기에 이르렀을 때에는 400만명으로 내려 앉았으며 현대에 이르러서야 700만명까지 회복했다.

걸리버 여행기를 쓴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지은 겸손한 제안이 이 기근을 두고 쓰여진 것[12]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100년 전에 쓰인 글이다. 하지만 당시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에 대한 참고자료는 될 것이며, 한편으로 100년이 넘도록 이러한 비참한 현실이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자료일 것이다.

여담으로 이 기근을 주제로 아일랜드인들을 모욕하는 'Famine Song(직역:기근 노래)' 곡이 만들어졌는데, 영국 축구 경기장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절대 금지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래 내용이 영국에서 잉글랜드와 나머지 3개 지방(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간의 지역감정을 직접적으로 자극하기 때문에, 훌리건들이 난동을 피우며 이 노래를 즐겨 부른다. 사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기타 2개 지역과의 역사적·지역적 대립은 현재진행형이니... 그 밖에 IRA(아일랜드 해방전선) 쪽에서도 이 노래를 부를 때 잉글랜드와의 역사적 대립을 상기한다 IRA 지지자들이 부르는 것은 아일랜드 저항노래(Rebel Song)다.

파고들어가보면 잉글랜드가 굉장히 자기 중심으로 영국을 만들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웨일스는 애초에 13세기 중세에 일찍 잉글랜드에 흡수된 이후 문화적인 시시콜콜한 부분은 대충 놔뒀지만 정치적으로는 잉글랜드에게 완전히 종속되었다. 웨일스 기반으로 활동한 봉건시대 귀족이나 근대 부르주아 정치인들도 따로 없고... 때문에 웨일스 사람들 스스로 자기네들이 웨일스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만큼은 대단하지만, 스코틀랜드처럼 분리 독립을 하려는 움직임은 약한 편이다. 웨일스 고유의 경제적 기반도 약한 것도 있다. 단지 웨일스인이라는 문화적 정체성과 우리는 잉글랜드인들하곤 다르다는 자부심으로만 구분되는 것이다.

한편 스코틀랜드는 그렇게 압도적으로 잉글랜드에게 후달리는 건 아니었고, 근세 개신교 종교 개혁과 근대 산업 혁명의 중심지라는 나름의 역량도 있었으니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을 하고 파트너의 형식으로 통합이 되었다. 이런 반면 독자적 가톨릭 정체성이 강했던 아일랜드는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양쪽에게 핍박받으면서 너무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흔히 스코틀랜드는 특히 현대 들어 '우리도 같은 잉글랜드의 핍박을 받는 켈트족 형제임'하면서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는데, 애초에 북아일랜드의 친영파 개신교도들 다수는 영국 국교회가 아닌 스코틀랜드 장로회 소속이었다. 1640년대 킬케니 연맹의 봉기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진압군으로 보낸 언약파 군대가 저지른 만행, 현대 아일랜드계 이주민 노동자들과 현지 장로교 노동자들이 서로 축구장 등지에서 험악하게 싸우는 글래스고의 종파 갈등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역사학자들은 대영제국이 이이제이 전략을 통한 현지 정치체 해체 후 플렌테이션을 강제한 제국주의의 첫 실험장이자 희생자로서 아일랜드에 주목한다(북아메리카, 인도 제국, 중동 등에서 이 전략의 행진은 계속되었다). 이만큼 영국이 아일랜드에서 한 짓에 한에 맺혀 있으니 이런 노래가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아일랜드 가수 패디 라일리의 노래. 가장 잘 알려진 버전이다.

2000년대에 스코틀랜드 출신이면서 아일랜드 혈통의 가수 수잔 보일이 리메이크.

대신 아일랜드 쪽 축구팬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는 피터 세인트 존(Peter St. John)이 작사, 작곡한 <The Fields of Athenry>인데, 듣는 사람 입장에선 이건 이거대로 눈물바다. 무슨 노래인고 하니, 아이가 굶어죽게 생기자 절박해진 남성이 높으신 분[13]의 옥수수 창고를 털었다가 붙잡혀서 오스트레일리아로 끌려가기 전날에 아내와 생이별하는 노래다. 이건 뭐 레 미제라블이 따로 없다(...). 대놓고 훌리건 짓을 하기에는 가사가 너무 슬프기도 하고 축구장에서 이걸 부르는 사람들도 꽤 얌전하기 때문에 축구장 금지곡은 아니며 오히려 아일랜드의 각종 스포츠 대표팀이나 관련 성향을 가진 팀(셀틱 FC라든가...)이 뛰는 경기에서 단골 메들리로 불리는 노래다. 대신 가사가 너무 슬퍼서 분위기가 처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간혹 가다 Our love was on the wing~ (Sinn Féin![14]) We had dreams and songs to sing (IRA!)처럼 가만히 듣다보면 무서워지는 추임새를 넣기도 한다.[15]

여담인데 아르메니아 학살을 비난하던 영국에게 터키가 비웃으며 꺼내들던 게 이 사건이었다. 사망자는 아르메니아 사망자 이상일지도 모를 인재이고 지금까지도 아일랜드가 이를 갈고 있다. 헌데 터키는 똑같이 비난하던 덴마크에게 1783년 라카기가르 화산이 폭발하면서 가축의 80%가 죽고 이 여파로 기근이 오면서 아이슬란드 인구의 4분의 1 가량이 사망했던 일을 가지고 당시 아이슬란드를 지배하던 덴마크를 비난하다가 오히려 역관광(덴마크도 이 기근으로 약 8만에서 20만명이 사망했고 영국이랑 달리 이건 인재도 아니기에 덴마크가 욕먹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당한 일도 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황제였던 압뒬메지트(Abdülmecit)가 아일랜드에 식량과 금화를 지원했는데, 지원 자체는 사실이고, 아일랜드인의 감사 편지, 그리고 아일랜드 일부 도시에서 오스만 제국의 상징인 초승달을 도시 문장에 추가하는 등,[16] 지원 자체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압뒬메지트가 구호를 위해 1만 파운드를 보내려 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이 자기는 2천 파운드만 보냈다며 1천 파운드만 기부해 달라고 요구했고, 터키 선원들은 영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에 이를 전달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각색된 일화일 가능성이 높다. 아일랜드, 압뒬메지트의 도움에 163년만에 감사를 표하다. (터키어)

5. 읽을거리

100만 명 굶어 죽은 대기근…19세기 아일랜드에 무슨 일이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

&quot;전국민이 거지인 나라, 아일랜드밖에 없을 것&quot;

6. 부록: 아일랜드는 왜 옥수수를 심지 않았나

이런 감자의 참상을 보고 있자면 단위 면적당 뛰어난 생산력을 자랑하는 옥수수를 왜 키우지 않았냐는 의문이 생길 법도 한데 그 당시 아일랜드 소작농들은 옥수수 종자를 살 자본이 없었을 뿐더러, 아일랜드에서의 생산 효율은 옥수수보다 감자가 높았고, 당시 아일랜드인 사이에 유행했던 부업 중 하나였던 돼지 사육에 필요한 부수물[17]을 낼 수 있는 감자가 월등히 나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기근 중에 영국이 옥수수 가루를 배급했고 아일랜드인들이 이걸 유황 가루로 착각해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아일랜드는 이스터 섬 마냥 나홀로 고립된 절해고도가 아니다. 당연히 외부에서 여러 수단을 통해 식량이 유입되었다. 이미 많은 아일랜드 사람들은 미국에 진출해 있었고, 이런 해외로 진출한 아일랜드 사람들 덕에 상당한 식량이 아일랜드로 유입되었다. 다만 당시 낙후된 수송능력 때문에 식량을 보내도 제때 도착하기 어려웠고 아일랜드 항구에 도착해도 그 구역에서 다 소모되었다. 드넓은 아일랜드 전역을 담당하기는 불가능했다. 알려진 것처럼 옥수수를 유황 가루로 인식해서 사람들이 감자를 찾으며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은 루머에 불과하다. 옥수수 가루라도 제대로 공급됐으면 대기근이라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량조차 채우지 못한 배급량 덕에 사람들은 옥수수를 아주 멀겋게 끓인 조차 먹기 힘들었다. 게다가 설령 죽을 받더라도 위에서 말한 이유로 그냥 물에 가까운 무언가. 받기도 힘든데 겨우 받은 것도 엉망,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 혼란 와중에 잉글랜드 놈들이 우리에게 유황을 먹이려 든다!라는 소문이 돈 것이다. 출처

또한 당시 대부분의 아일랜드인은 맷돌이 없었다. 한국에서 흔히 먹는 옥수수는 sweet corn으로 그냥 삶아먹으면 되지만 당시 주식으로 먹던 옥수수는 아주 단단해 맷돌로 갈아 옥수수 가루로 만들어 먹어야 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밀가루도 먹어야 하므로 맷돌이 동네마다 있었는데 아일랜드는 감자밖에 먹을 게 없으니 맷돌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영국 정부가 급히 미국 옥수수 화물선을 아일랜드로 보냈지만 단단한 옥수수를 먹을 수가 없었다. 영국에서 맷돌까지 급히 보내주고 나서야 옥수수 가루를 내 죽을 먹을 수 있었고, 아일랜드인은 난생 처음 맷돌로 옥수수 가루를 내며 '영국 총리의 유황 가루'라 투덜거렸다. "아일랜드인들은 감자 외에는 요리할 줄 모른다"는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던 셈.

참고로 아일랜드에서의 생산 효율이 옥수수보다 감자가 더 높았던 또 다른 이유는 옥수수가 C4식물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강한 빛에서 광합성 효율이 높은 작물이라는 점인데, 아일랜드의 날씨는 영국보다 덜하지만 맑은 날이 적은 편이다. 따라서 아일랜드의 기후에서는 옥수수가 감자에 비해서 효율이 크게 높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오해 내지는 착각을 하는 경향이 있는 데 영국의 위도는 모스크바보다 비슷하거나 더 높다. 기후가 온후한 건 편서풍과 멕시코 난류 덕분이기 때문에 연평균 기온 대비 일사량 자체가 적다.

여기에 옥수수는 지력을 소모시키는 경향이 강해 비료의 존재가 없다면 계속해서 농사를 짓는 게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 시기 유럽에서 옥수수를 주식으로 먹은 이들 사이에서는 펠라그라 병마저 돌았다. 옥수수에는 필수 아미노산과 비타민 B의 니아신 성분이 부족해서, 옥수수만 주식으로 섭취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일종의 영양 결핍증이다. 19세기까지 원인도 발견되지 않았고, 특히 1870년대 중반 이탈리아의 빈농층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유행했다. 아일랜드 대기근이 발생하고 불과 20년 뒤의 이야기다. 이런 병을 막기 위해 요즘에는 주식이 되는 식자재나 식품에 비타민을 첨가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비싼 돈 들여가면서 옥수수를 심을 이유가 없었다.


  1. [1]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우유는 버터로 만들어져 영국으로 수출되었고, 소작농들은 찌꺼기마냥 남은 버터 밀크만 먹어야 했다.
  2. [2] 으깬 감자와 버터 밀크로 만든 요리는 현대에도 콜캐넌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아일랜드 요리 문서 참조).
  3. [3] 농담 아니라 감자구황작물의 끝판왕이다. 단위 면적당 칼로리는 쌀보다 약간 낮지만, 생장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일정 기간 동안의 칼로리 생산량이 매우 높아 연간 생산량으로 따지면 최대라고...
  4. [4] 불행인지 다행인지 맬서스는 대기근이 시작되기 전에 죽었다.
  5. [5] 그러나 곡물 생산량과 수출량은 폭락했다. 농가의 소작농들이 땅값을 내지 못하고 토지에서 쫓겨나거나 도망치고 식량을 구할 수 있는 항구나 구빈소가 있는 도시로 향했기 때문에 더 이상 농사를 짓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6. [6] 쉽게 말해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는 논지인데, 사람이 당장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물고기를 주기는 커녕, 물고기를 잡는 법도 안 가르쳐줬다는게 문제다. 요약하면 니가 알아서 하세요 주의
  7. [7] 이 곳은 아일랜드가 독립한 이후 원래 이름인 코브로 바뀌었다.
  8. [8] 국내의 한 학습 만화에선 아일랜드인들이 감자가 제일 많이 나니까 감자만 심으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며 아일랜드 대기근의 원인이 아일랜드인들의 탐욕인 것 마냥 적어놓기도 했다. 심지어 기근이 일어난 후에 아일랜드인들이 '다양하게 심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장면까지 나오는데, 후술하겠지만 당시 아일랜드인들은 애초에 감자 외에 다른 곡물을 심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건 그 만화뿐만의 문제만은 아닌 게 영국의 부정 등으로 아일랜드 대기근의 자세한 원인과 참상이 세계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탐욕 운운은 정말 말이 안 되는 게 감자 문서를 보아도 알겠지만 감자는 운송의 어려움 등의 이유로 어디까지나 구황작물일 뿐 팔아서 돈을 벌기 위한 작물이라기엔 무리다.
  9. [9] 헨리 홉하우스 저, 역사를 바꾼 씨앗 5가지 참조.
  10. [10] 영화 갱스 오브 뉴욕의 시대적 배경이 된다.
  11. [11]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은 유독 자신들의 혈통을 중시해서 조상 중 한사람만 아일랜드계인 사람도 자신을 아일랜드계라고 당당히 주장해서 유난히 수치가 높게 잡힌다. 반면 영국계 이민자들은 미국 백인 인구의 태반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데도 딱히 혈통에 집착하지 않는 탓인지 통계에서 수치가 매우 낮게 잡힌다. 참고로 아일랜드계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혈통에 큰 자부심이 있는 이민자들의 후손은 이탈리아계다.
  12. [12] "이럴 바에 다 죽을테니 소수를 희생시켜 다수를 살리자. 아일랜드에서 수출품은 감자뿐이고 감자도 지금 흉작이니, 갓 낳은 아기를 잉글랜드에 수출하는게 어떻겠냐. 진미 좋아하는 귀족들에겐 이만한 고기가 없을테고, 아기 하나 가지고 최소한 3인분의 고기가 나올테니 만찬으론 그만이다. 내가 알기로는 겨울에 아기를 갈라 소금에 절여 눈 속에 식히고, 후추를 좀 뿌리면 최고의 진미가 된다더라." - 본문 중.
  13. [13] 잉글랜드계 박사 찰스 트리벨린 경. 아일랜드의 기근 문제를 해결한다고 미국에서 옥수수를 들여왔으나, 이건 가축 사료용 옥수수라서 맛이 없었다. 그런데 그거라도 먹겠다고...
  14. [14]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좌파 개혁주의)가 결합된 아일랜드의 좌파 민족주의 정당으로, 아일랜드 독립전쟁 시기까지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Sinn Féin이라는 말 자체가 아일랜드어로 we ourselves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아일랜드에서는 한동안 한자릿수 의석을 차지하는 군소정당이었으나 나름대로 탄탄한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이 정당의 과격파가 바로 IRA와 연결된다. 2016년 총선에서 양대 보수 정당과 노동당이 싸그리 폭망하는 가운데 158석 중 무려 23석을 쓸어담으며 압승을 거두었다.
  15. [15] 다만 국내 축구팬들은 사실 이 가사보다는 리버풀 FC 팬들이 자뻑스러운(?) 개사 버전(The Fields of Anfield Road로 알려져 있다)으로 부르는게 더 익숙하다. 리버풀 FC 자체가 셀틱 FC와 친하게 노는 팀이기도 하고 아일랜드에도 팬이 꽤 있기 때문에 쓸데없이 신명나서 그렇지 어색한 버전은 아니다.
  16. [16] 터키의 국기는 오스만 제국 시절인 1844년 제정된 것이다. 공화국 수립 이후 규격만 좀 더 확실히 정해서 계속 사용 중.
  17. [17] 먹고 남은 감자 찌꺼기, 감자 잎, 감자 뿌리(우리가 먹는 감자 부위는 뿌리가 아니고 덩이줄기다)를 돼지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당시 아일랜드인들이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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