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톤 세나

본명

아이르통 세나 다 시우바
(Ayrton Senna da Silva)[1]

국적

브라질

생몰년도

1960년 3월 21일 ~ 1994년 5월 1일 (향년 34세)

출신지

상파울루

레이스

162경기

월드 챔피언

3회 (1988, 1990, 1991)

그랑프리 우승

41회

포디움

80회

폴포지션

65회

패스티스트랩

19회

첫 레이스

1984년 브라질 그랑프리

첫 그랑프리 우승

1985년 포르투갈 그랑프리

마지막 레이스

1994년 산마리노 그랑프리

마지막 그랑프리 우승

1993년 호주 그랑프리

소속팀

톨만(1984)
로터스(1985~1987)
맥라렌(1988~1993)
윌리엄즈(1994)

1988년 포뮬러 원 월드 드라이버 챔피언

1987 - 넬슨 피케

아일톤 세나

1989 - 알랭 프로스트

1990년~1991년 포뮬러 원 월드 드라이버 챔피언

1989 - 알랭 프로스트

아일톤 세나

1992 - 나이젤 만셀

1. 소개
2. 초창기 생애와 F1 이전까지의 커리어
3. 포뮬러 원 커리어
3.1. 1984년, 톨맨에서
3.1.1. 1984 시즌
3.2. 1985~87년, 로터스에서
3.2.1. 1985 시즌
3.2.2. 1986 시즌
3.2.3. 1987 시즌
3.3. 1988~ 1993년, 맥라렌에서
3.3.1. 1988 시즌
3.3.2. 1989 시즌
3.3.3. 1990 시즌
3.3.4. 1991 시즌
3.3.5. 1992 시즌
3.3.6. 1993 시즌
3.4. 알랭 프로스트와의 경쟁
3.5. 1994년, 윌리엄스에서
3.5.1. 1994 시즌
3.6. 포뮬러 원 레코드
4. 장례식
4.1. 그의 죽음이 남긴 영향
5. 드라이빙 스타일
6. 인간으로서
7. 그의 헬멧
8. 미스터 모나코
9. 그에 대한 어록들
10. 트리비아

1. 소개

1984년 데뷔해 1994년까지 활동한 브라질의 F1 드라이버.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역대 최고의 F1 드라이버를 논할 때마다 반드시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로, F1에서 월드 챔피언을 3회 획득했으며, 레이싱 드라이버들이 어떤 열정과 철학을 가져야 하는지 직접 가치관을 제시하고 실천해 후대 레이싱 드라이버들과 모터스포츠 팬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2]

또한 당시 경제 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고국 브라질의 가난한 국민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 경기 외적으로도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다.[3]

2. 초창기 생애와 F1 이전까지의 커리어

1960년 철물점 주인인 밀턴 다 실바와 네이드 세나 다 실바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때문에 세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형제로는 누나이자 장녀인 비비안과 남동생인 레오나르도가 있다. 세나는 놀랍게도 4살 때부터 카트로 운전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준 단순한 카트가 시작이었다.

12세부터 본격적으로 카트 레이싱에 뛰어들었고 1977년 고교를 졸업하고 경영학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3개월만에 중퇴를 하게된다. 같은 해 남미 카트그랑프리에서 우승을 했고 이후 매년 카팅 월드 챔피언쉽 (Karting World Championship)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

(15번이 세나 49번이 퓰러튼)

F1에서 성공한 이후 세나는 이 카트 선수 시절을 아름답게 회상하며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경쟁한 선수중 가장 훌륭했던 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당시 같은 카트 선수였던 테리 퓰러튼(Terry Fullerton)을 꼽은 것. 그와의 경쟁은 돈도 정치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레이싱이라고 했다. 이후 세나는 1981년 영국으로 건너가 포뮬러 포드 1600 레이스에 출전함으로 본격적으로 프로 드라이버 생활을 시작했다.

포뮬러 포드 레이스에서 활약하던 세나는 레이스를 극심히 반대하던 부모님의 성화를 못이기고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기로 결심해 레이스를 포기하고 브라질로 돌아갔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상위 클래스인 포뮬러 포드 2000 레이스의 팀으로부터 계약 제안이 들어왔고 세나는 바로 영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때부터 그는 아버지의 성씨인 실바(silva)가 아닌 어머니의 처녀적 성씨인 (senna)로 레이스에 출전하게 된다. 그리고 1982년 포뮬러 포드 2000 레이스에서 생애 첫 챔피언을 획득하게 된다.

1983년 세나는 브리티쉬 포뮬러 3 챔피언쉽에 West Surrey Racing 소속으로 첫 출전하게 된다. 포뮬러 포드 2000이후 개인 스폰서쉽을 얻은 세나는 탄탄한 지원 속에서 메이저급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 당시 그는 전직 F1 선수였고 지금은 F1 코멘터로 유명한 마틴 브런들과 같이 F1을 바라보며 경쟁했다. 여기서 브런들은 처음 세나를 만났고 그의 잔인하리만치 무자비한 휠투휠을 처음 경험했었다고. 이 레이스에서 세나는 전체 20 라운드중 15 라운드에서 폴 포지션을 획득하며 그 비범한 퀄리파잉 스피드를보이기 시작했고 페스티스트 랩 12회, 우승 12회로 종합 132포인트로 시즌 챔피언을 달성했다. 2위는 마틴 브런들. 그리고 그 해 챔피언 자격으로 전통의 마카오 그랑프리[4]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3. 포뮬러 원 커리어

(윌리엄스에서 테스트를 받는 세나)

1983년 마카오 그랑프리 이후 세나는 F1팀들의 주목을 받아 윌리엄스, 맥라렌, 브라밤, 톨맨에서 정식 테스트를 받았다. 특히도닝턴 파크에서 치뤄진 윌리엄스에서의 테스트에서는 당시 소속 드라이버였던 케케 로즈버그와 같은 현역 F1 드라이버들보다 빠른 랩타임을 냈었다고 한다.

브라밤에서는 당시 같은 고국 선배였던 넬슨 피케보다 2초 느린 랩타임을 기록했고 윌리엄스, 멕라렌, 브라밤은 세나를 데뷔시키고 싶어 했으나 스폰서들이 반대함으로 1984 시즌에는 남는 시트가 없었고 세나는 결국 톨맨(Tolman)팀에서 모터스포츠의 정점 포뮬러 원에 입성하게 된다.

3.1. 1984년, 톨맨에서

3.1.1. 1984 시즌

1984년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데뷔한 세나는 17위로 피니쉬, 첫 포인트는 다음 경기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6위로 피니쉬하며 획득했다. 또한 이 시즌에서 세나는 숙명의 라이벌 알랭 프로스트와 첫 대결을 하게 된다. 바로 모나코 그랑프리에서였다. 폭우 속에 시작된 모나코 그랑프리는 폴시터 알랭 프로스트의 리드 속에서 로터스의 나이젤 만셀, 페라리의 니키 라우다가 뒤를 잇고 있었다. 13위에서 출발한 세나는 그 특유의 비 속에서 경이로울 만큼 그립을 잡아내는 테크닉으로 빠르게 차들을 추월하며 나이젤 만셀의 리타이어, 케케 로즈버그를 추월하며 알랭 프로스트의 뒤까지 차원이 다른 랩타임으로 따라잡았다. 그리고 29랩째, 사건이 발생하는데 알랭 프로스트가 손을 흔들며 레이스 컨트롤에 경기 중단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 알랭 프로스트는브레이크 문제를 겪고 있었다. 레이스가 32랩때 중단되면서 프로스트는 결승선 앞에서 차를 세웠다. 동시에 세나가 아슬하게 프로스트를 추월하며 1위로 통과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경기 결과는 최종 2위. 프로스트의 우승이었다.[5] 당시 경기를 중단했던 재키 익스는 레이스 심판인 스튜어트와 상의하지 않았다는 의혹과 함께 레이스를 왜 중단했는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 경기로 세나는 F1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며 팬들과 관계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동시에 알랭 프로스트와의 F1 역사상 가장 강렬한 라이벌전을 암시하게 되었다. F1에 새로운 신성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영국 그랑프리와 포르투칼 그랑프리에서 3위로 포디움에 올랐지만 그 뿐이었다. 당시 톨맨팀은 약체에 속했기 때문에 레이스카는 경쟁력이 없었다. 그렇게 첫 F1 시즌 대부분을 리타이어로 마감하게 된다.

3.2. 1985~87년, 로터스에서

3.2.1. 1985 시즌

(포르투칼에서 생애 첫 F1 그랑프리 우승을 하고 환호하는 세나와 로터스 팀원들. 오른쪽은 당시 팀 감독이던 피터 와르(Peter Warr, 1938~2010)

다음 시즌, 세나는 불만이 많았던 톨맨을 박차고 나와 테스트 때부터 자신을 원했던 로터스와 장기계약을 맺게 된다. 이 시절 로터스 팀은 2010년대에 활동한 로터스와는 다른 팀으로 키미 래이쾨넨이 달렸던 로터스는 톨맨팀이 베네통을 거쳐 로터스의 이름만 빌려 쓴 것이다.[6] 세나가 달린 로터스는 50년대부터 출전한 오리지널 팀. 당시 로터스는 V6 터보를 장착했었고 레이스카는 나름대로 괜찮은 수준이었다. 경쟁력을 갖춘 이 시즌부터 세나는 F1 드라이버로써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시작한다. 시즌 2라운드 포르투칼 그랑프리에서 세나는 F1 첫 폴 포지션을 차지한다. 기록은 1:14:007. 비에 젖은 에스토릴 서킷에서 세나는 쾌조의 스타트로 선두를 유지했다. 비는 계속 내렸고 13랩째 이미 2위와 10초 이상 랩타임이 벌어졌을 만큼 비 속에서 세나는 압도적인 스피드를 자랑했다. 여러 선수들이 스핀하며 고전하는 가운데, 재밌게도 이번엔 세나가 레이스 컨트롤에 경기 중단을 요청했다. 그러나 경기는 속행되었고 2시간 룰에 맞춰 레이스를 다 채우지 못한 채 세나가 가장 먼저 체커를 받았다. 그의 생애 첫 그랑프리 우승이었다. 당시 로터스 감독이었던 피터 와르는 세나를 극찬했다. [7] 게다가 세나는 페스티스트 랩[8]까지 기록함으로 헤트트릭을 달성했다.

이후 세나는 1985년 시즌동안 7번의 폴 포지션과 2번의 우승을 함으로 데뷔 첫 해와 비교해 상위권에서 경쟁하는 드라이버로 껑충 뛰어올랐다.

최종 성적은 38포인트 종합 4위.

3.2.2. 1986 시즌

86년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사진을 같이 찍은 세나 (88,90,91), 프로스트 (85,86,89,93), 만셀 (92), 피케 (81,83,87).[9]

(세나 뒤로 만셀이 0.014초 차이로 체커를 받았다.)

터보시대의 최전성기, 굿이어 타이어와 피렐리 타이어의 대결, 로터스-르노 조합은 멕라렌-태그 호이어, 윌리암스-혼다보단 한 수 아래의 성능을 냈었다. 그러나놀랍게도 세나는 전체 16 라운드중 절반인 7 라운드에서 폴 포지션을 잡음으로 숏런 능력이 비범한 수준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승까진 많이 연결되지 못해서 시즌 2승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스페인 그랑프리에서는 나이젤 만셀과의 치열한 배틀 끝에 0.014초로 피니쉬하는 등의 명장면을 여럿 연출했다.

디트로이트 그랑프리에서는 월드컵 8강에서 탈락한 브라질을 위해 국기를 들고 나타났었다. 이 때부터 세나는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면 항상 브라질 국기를 흔들게 된다. 또한 폴 포지션을 잡았었지만 일부러 타이어 공기압을 8분의 1을 빼가며 힘들게 포지션을 지켜 우승한 그랑프리였다. 최종 성적은 55포인트 종합 4위.

3.2.3. 1987 시즌

팀 타이틀 스폰서가 CAMEL로, 엔진은 혼다의 V6 터보로 교체되었다. 자연흡기 엔진과 터보엔진이 격돌했던 시즌. 세나는 이번에도 상위권 경쟁을 했지만 챔피언을 바라보기엔 역시나 로터스의 레이스카는 약간 부족했다. 게다가 디펜딩 챔피언멕라렌의 알랭 프로스트도 신통치 않았고 레이스카의 포텐셜이 터진 윌리엄스의 두 드라이버, 나이젤 만셀과 넬슨 피케의 정면대결인 시즌이었다. 윌리엄스 레이스카의 성능이 압도적인 덕분에 이 시즌동안 세나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폴 포지션도 한 번밖에 하지 못했고 그랑프리 우승도 여전히 2번이 전부였다. 물론 이 시즌에 세나는 이후 미스터 모나코라 불릴 시작인 모나코 첫 승을 올렸었다. 2번째 그리드에서 출발한 세나는 레이스 내내 만셀의 뒤에서 달렸으나 30랩때 만셀이 터보 이상으로 리타이어함으로 선두로 올라섰고 그대로 훌륭한 피트 전략을 수행해 타이어 스틴트의 손실 없이 모나코 첫 승을 기록했다. 마지막 그랑프리엔 호주 그랑프리에선 경기 후 브레이크 규정을 어겼다고 판정되어 실격 처리 되기도 했었다. 최종 성적은 57 포인트 종합 3위. 이후 혼다와의 연으로 세나를 눈여겨 본 론 데니스가 세나를 멕라렌에 합류 시킴으로 로터스에서의 커리어는 막을 내리게 된다.

3.3. 1988~ 1993년, 맥라렌에서

3.3.1. 1988 시즌

(스즈카에서 선두였던 프로스트를 추월하는 세나)

1988년 아일톤 세나는 당대 최고의 팀 멕라렌에 입단, 동시에 알랭 프로스트와 팀메이트를 맺었다. 1987년 윌리엄스가 타이틀을 획득하는 것을 대책없이 지켜봐야 했던 멕라렌은 당시 F1 그리드에서 최고의 터보엔진을 만든다고 평가받던 혼다와 계약을 했다. 그리고 로터스에서 활약했던 고든 머레이가 레이스카 제작 치프를 맡음으로 탄생한 MP4/4는 훗날 F1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고의 명기로 평가받게 된다. 그 이유는 이 시즌 멕라렌의 자비 없는 성적 때문. 1988 시즌에서 세나는 16 라운드중 13 라운드에서 모두 폴 포지션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그랑프리 하나만을 제외하고 모든 그랑프리를 맥라렌 드라이버 둘이서 나눠 우승했다. 지금까지도 단일 F1팀이 F1 시즌 전승에 가장 근접했던 시즌이다.[10] 정말이지 맥라렌 세상이었고 세나와 프로스트만의 대결이었다.

(모나코에서 큰 차이로 리드하다가 사고를 당한 세나의 차.)

시즌 출발은 좋지 못했다. 첫 라운드였던 브라질에서 세나는 기어 변속기 고장으로 레이스 스타트를 하지 못했고 그린 플래그 이전에 스페어카로 바꾸려 했으나 늦어버려 실격처리 되고 말았다. 이렇게 세나는 또 브라질 그랑프리 우승을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산마리노 그랑프리는 우승, 모나코에서는 리타이어하고 말았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세나와 프로스트가 여기서부터 격돌하기 시작했기 때문. 기량이 만개한 세나는 퀄리파잉에서 1:23:998로 알랭 프로스트보다 무려 1.427초나 빠른 기록으로 폴 포지션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대로 레이스를 시작해 굉장한 페이스로 치고 나가 격차를 50초 넘게 벌려놓은 상태였다. 67랩때 팀은 팀라디오로 페이스가 너무 빠르니 좀 줄이라는 오더를 내렸으나 세나는 페이스를 줄이지 않았고 이윽고 혼자서 사고를 내고 말았다. 세나는 리타이어하고 말았고 2위로 달리던 프로스트가 모나코 우승을 차지. 문제는 이후 프로스트의 인터뷰인데 그(세나)가 자신과 레이스를 하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일종의 모욕감을 주려 했다고 주장했다. 세나 또한 자신의 실수를 매우 아쉬워 했다고 하며(리타이어 직후 그의 표정을 보면 자신의실수를 참을 수 없었는지 일그러져 있다.) 그 레이스를 하는 동안 자신이 무언가 다른 차원에, 거의 무의식 속에서 달렸다고 느꼈다 했다. 이 모나코 그랑프리를 이후로 세나는 좀 더 침착해져 이후 그랑프리에서 연승을 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둘의 경쟁구도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는 것.

이후 둘의 옥신각신하는 경쟁 후에 챔피언쉽 포인트 선두로 스즈카로 오게 된 세나는 일본 그랑프리에서 우승만 한다면 프로스트의 성적과 관계 없이 월드 챔피언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그리드 또한 폴 포지션. 레이스가 시작되고 세나 또한 출발했지만 세나의 스타트는 좋지 못했다. 엔진 스톨이 생겼던 것인지 차가 멈칫했고 세나는 두 팔을 흔들었다가 극적으로 다시 출발한다. 그러나 이미 순위는 10위 밖까지 떨어진 상황. 이후 세나는 미친 듯이 달려 2랩만에 6위까지 회복하였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바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세나는 압도적인 랩타임으로 프로스트를 추격했고 메인 스트레이트에서 극적으로 추월할 수 있었다. 게다가 프로스트의 기어박스에 문제가 생김으로 선두를 굳힐 수 있었다. 그렇게 세나는 생애 첫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이 된다. 이후 그는 레이스중 신을 봤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프로스트에게 또 불편한 감정을 일으켰고 여러 사람들에게도 갸우뚱한 반응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든 세나는 최고의 스피드를 보이며 그 해 월드 챔피언에 등극하게 되었다. '''최종 성적 90포인트 종합 1위.

이후 세나는 조국 브라질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환대 받으며 꿈같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전 라운드를 거의 모두 우승한 멕라렌이지만 신기하게도 몬자에서 열린 이탈리아 그랑프리만큼은 세나 10위, 프로스트 리타이어라는 성적으로 마감해야 했다. 게다가 1988년 9월 11일 열린 이탈리아 그랑프리 우승은 당시 페라리 소속의 게르하르트 베르거. 마치 페라리가 우승할 운명이었던 것 같은 경기 내용 때문에 팬들은 죽은 엔초 페라리가 라이벌 놈들이 전경기를 우승하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 하늘에서 도왔다는 얘기를 우스갯소리로 하곤 했다.[11]

3.3.2. 1989 시즌

(45랩째, 마지막 시케인에서 충돌한 세나와 프로스트)

세나와 프로스트의 경쟁이 극에 달한 89년 시즌.

여전히 멕라렌의 퍼포먼스는 압도적이었고 MP4/4만큼은 아니지만 MP4/5 또한 압도적인 스피드를 자랑했다. 엔진은 V6 터보에서 자연흡기 V10으로 변경되었다. 챔피언 등극 이후 세나의 실력은 완전히 무르익어 예전처럼 불안정한 멘탈을 보여주는 일도 없었다. 세나와 프로스트의 관계는 완전히 뒤바뀌었는데 세나의 챔피언쉽 우승 이후 프로스트가 완전히 경쟁심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세나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둘의 경쟁구도는 나날히 심해져 멕라렌 팀은 어느 그랑프리에서 누가 어떤 엔진을 쓸 것인지 공평하게 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팀 내 분위기는 매우 치열해지고 동시에 빠르게 차가워져 갔다. 프로스트는 세나가 너무 과열적이며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나에게 불만을 가졌고 세나는 반대로 프로스트에게 항상 이러저러한 이유로 경기 결과에 대해 핑계를 댄다고 불만을 가졌었다. 팀원들도 그런 둘의 주장에 둘로 쪼개지기 시작하며 팀은 더 이상 정보와 인력을 공유하지 않게 되었다. 둘 사이 반목의 주 원인은 둘의 드라이빙 스타일의 차이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나는 항상 모 아니면 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승리를 위해 위험도 서슴치 않는 스타일이었고 프로스트는 계산을 통한 레이스를 하며 우승이 힘들 것 같으면 최대한 많은 포인트를 얻는 스타일이었다. 이후 둘은 완전히 틀어져 얘기조차 하지 않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당시 서로를 쳐다보는 표정을 보면 정말 살벌하기 짝이 없을 정도. 어쨎든 세나와 프로스트는 서로 우승을 주고 받으며 챔피언쉽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또 운명적이게도 둘의 챔피언쉽 향방은 일본 그랑프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프로스트는 리타이어 3번, 세나는 리타이어 5번으로 세나가 포인트에서 많이 불리한 상황이었고 때문에 세나는 반드시 일본 그랑프리를 우승해 챔피언쉽을 끝까지 끌고 가야만 했다. 동시에 프로스트 또한 세나가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면 자신이 챔피언을 확정 짓는 상황이었다. 그리드는 세나의 폴 포지션, 프로스트가 2위였다. 하지만 스타트에서 프로스트가 세나를 제치며 스즈카 1번 코너로 들어가게 된다. 운명의 45랩째, 팽팽한 꼬리 물기 끝에 시케인 직전에 프로스트 뒤에까지 붙은 세나는 바로 메인스트레이트 직전 시케인에서 프로스트에게 추월을 시도했으나...

11분 48초부터.

두 사람은 거의 마지막 시케인에서 충돌했다.

여기서 중요한 일이 발생하는데, 둘 다 모두 시동이 꺼지고 만 것. 만약 여기서 둘 다 리타이어 한다면 프로스트의 챔피언이 확정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스트는 차에서 내려 리타이어했지만, 세나는 다시 시동을 걸어 시케인 옆 탈출구로 나와 서킷에 복귀했다. 빡친 프로스트는 곧장 심판진에게 달려갔으나, 세나는 프론트윙이 파손된 상황에서 그대로 차를 끌고 가 피트에 복귀해 윙을 교체하고 서킷에 들어왔다. 그 사이 선두를 놓쳐버리게 된 상황이라 랩타임을 끌어올린 세나는 51랩때 똑같은 시케인에서 아슬아슬하게 인을 파고들어 선두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대로 그랑프리 우승.

여기까지는 좀 찝찝해도 문제가 없는 듯 했으나 이상하게도 시상식이 한참이 지나도 시작되지 않는 일이 생겼다. 세나가 충돌 사건과 관련해서 프로스트와 같이 불려간 것이다. 그리고 면담 끝에 내려진 심판 측 발표는 "세나를 실격 처리한다." 였다. 이유는 시케인 충돌 후, 세나가 시케인을 통과하지 않고 인정되지 않는 코스를 통해 서킷에 복귀했다는 것. 그렇게 알랭 프로스트는 챔피언을 확정지었고 세나는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어야 했다. 여기에 대해선 당시 굉장한 논쟁이 이어졌는데, 시케인으로 복귀하진 않았지만 옆에 장애물이 있는 복귀용 코스를 통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멕라렌측), 세나가 이미 공간을 선점한 후 라인을 바꾸고 있는 와중에 끼어들어 사고를 일으켰다는 주장(프로스트측)이 엇갈렸다. 특히 멕라렌이 공식으로 세나의 처리에 대해 항소함으로 프로스트는 당시 팀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특히 세나는 당시 FISA[12] 회장인 장-마리 발레스트르가 같은 프랑스인 드라이버인 프로스트를 위해 레이스에 부당한 개입을 했다고 믿고 있었던 듯 하다. 물론 프로스트가 그렇게 비열한 사람은 아니지만 당시 상황을 세나는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이후 세나는 항소에서 패배했고 레이스에서 위험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추가로 10만 달러의 벌금과 드라이버 면허를 6개월간 정지당하는 중징계도 받았다.

그렇게 세나는 1989 시즌을 굉장히 불쾌하게 마감했다. 퀄리파잉을 거의 휩쓸고 우승도 많이 하며 성적면에서는 나쁠 게 없었지만 정치적으로 휘말림으로 좋지 못한 시즌이었다. 최종 성적 60포인트 종합 2위.

3.3.3. 1990 시즌

(스즈카 1번 코너에서 충돌하는 세나와 프로스트.)

1990년 시즌에는 페라리로 이적한 프로스트랑 함께 이어지는 스즈카 결투를 펼치기도 했다.

이후 알랭 프로스트는 맥라렌 레이싱의 라이벌, 스쿠데리아 페라리로 이적했다. 팀 내 반목이 사라져 온전히 멕라렌을 자신의 팀으로 가지게 된 아일톤 세나는 정신적 충격을 추스리고 그리드에 다시 섰다. 세나와 프로스트 사이 경쟁구도는 여전했고 사이 또한 이보다 최악일 수는 없어서 둘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서로를 헐뜯곤 했다. 프로스트는 페라리로 이적해 멕라렌의 위닝카를 잃은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페라리 641은 MP4/5B와 경쟁이가능한 수준이었다. 알랭 프로스트와의 3차전이기도 했지만 나이젤 만셀도 페라리에서 둘과 삼파전을 벌이곤 했다. 세나는 일본까지 6승에 2위 2회/3위 3회/20위 1회/리타이어 2회, 프로스트는 5승에 2위 2회/3위 및 5위 1회/4위 및 리타이어 2회로 당시 승점 제도[13]에 따라 3번 연속으로 스즈카 서킷에서 챔피언 향방이 결정되게 되었다.

이는 마치 둘의 대결은 숙명적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번엔 반대로 프로스트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세나의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세나는 챔피언을 확정할 수 있었다. 경기 전 드라이버 브리핑에서 위험한 행동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넬슨 피케가 그러면 오피셜들이 원하는 것은 시케인에서 이스케잎존으로 빠지면 거기서 유턴을해서 달려오고 있는 다른 경주차들과 마주하며 돌아가라는 것이냐, 그게 훨씬 위험하지 않느냐, 라며 작년에 오피셜들이 세나에 대해 내린 결정을 이해할수 없다는 언급과 오피셜들이 똑같은 말 반복하는 이유를 알수없다는 뜻을 비췄다. 이에 대해 세나는 “보아라, 나는 아무 말도 안하는데 다른 사람들 조차 이해할수 없다 하고, 모든 드라이버가 동의 하지않느냐” 라며 다시 분노하며 브리핑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세나를 힘들게 하는 일은 또 있었다. 바로 폴 포지션의 그리드에 관한 것이었다. 스즈카에서 폴포지션 그리드가 오른쪽 그리드로 변경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맨앞이지만 스즈카 서킷의 레코드 라인은 메인스트리트에선 왼쪽 끝에 붙어 달리기 때문에 오른쪽은 당연히 그립이 한참 부족한 곳이었다. 그렇게 되면 스타트에서 보나마나 불리할 게 뻔하니 폴 포지션을 차지한 의미가 없게 된다. 오히려 두번째 그리드가 더 좋은 상황. 세나는 그리드 변경을 위해 적극적으로 항의했었다.

세나는 폴 포지션을 차지했고 프로스트는 바로 뒤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레이스 당일 우려대로 폴 포지션의 그리드는 오른쪽 첫째 자리였다. 그대로 레이스는 시작되었고 프로스트는 스타트에서 세나를 제쳐 선두로 올라섰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1번 코너에서 세나와 프로스트가 충돌한 것이다! 두 사람의 차는 바깥 그래블로 날아갔고 둘 다 리타이어하고 말았다. 세나의 챔피언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스타트 첫 코너에 들어선 순간이였다.

자료를 보면 프로스트가 선두를 차지한 후 1번 코너에 들어가면서 인을 닫으려 하자 세나가 그대로 프로스트의 리어 타이어와 충돌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미 프로스트는 차 한대 거리 정도 앞서 있었기 때문에 저런 경우라면 진입 속도를 줄여 세나쪽에서 몸을 사리려 했을텐데 전혀 그런 움직임 없이 바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세나는 폴 포지션 위치가 변경된 이후부터 첫 코너에서 감속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세나는 당시 폴 포지션 그리드 변경에 대해 공공연히 발레스트르를 비난하면서 모두 그가 벌인 일이라 한다. 물론 정말 그랬는지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전혀 자기 레이스카를 지키려 하지 않은 듯한 움직임을 보면 정황상 프로스트와 FIA에게 제대로 엿을 먹이려 했던 것 같다. 실제로 FIA는 세나가 그럴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경기를 그냥 속행시켜 버렸고 세나의 챔피언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리타이어 직후 인터뷰에서 세나는 폴 포지션 그리드가 바뀐 것 때문에 그렇게 했냐는 질문에 욕까지 사용하며 전혀 거리낌 없이 인정하며 경기의 부조리함을 비난했다.

프로스트는 인터뷰로 세나에게 죽빵을 갈기고 싶다고 하며 치를 떨었으며 세나도 전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가 세나와 프로스트 경쟁의 최정점이었으며 F1이 상업적으로 폭발적 인기를 얻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최종성적 78포인트 종합 1위.

사실 이쯤되면 발레스트르 회장의 행동의 의도가 다분히 느껴지긴 한다. 물론 프로스트가 그와 적극적으로 협조해 스포츠의 형평성을 훼손했는지는 모르지만 발레스트르 회장이 당시 권력을 사용해 프로스트를 간접적으로 도우려 했다는 의도는 프로스트가 세나와 경쟁을 하는 동안은 다분히 느껴진다. 또한 프로스트도 그러한 정치적 이점을 분명 십분 활용했을 것이다. 때문에 세나는 누구보다 발레스트르 회장에 대한 분노가 컸다고 볼 수 있다. 프로스트와의 경쟁은 이후 93년을 끝으로 끝나지만 그때까지 세나가 프로스트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프로스트가 윌리엄스로 복귀했을 때는 나의 친구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그와의 새로운 경쟁을 매우 기뻐했다.

3.3.4. 1991 시즌

멕라렌에서의 4번째 시즌. MP4/6는 여전히 강력했지만 세나는 혼다의 신형 V12에 썩 만족하지 못했다. 라이벌 알랭 프로스트가 처참한 퍼포먼스의 페라리 때문에[14] 세나와 경쟁하지 못했고 세나와 그나마 경쟁구도를 형성한 것은 윌리엄스의 나이젤 만셀이었다. 사실 나이젤 만셀과는 예전부터 여러 차례 맞붙었으나 제대로 환경이 조성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1991 시즌에서 세나는 오랜 꿈과 같은 일을 해내게 된다. 바로 조국 브라질 그랑프리에서의 우승이었다. 세나는 지난 F1 커리어동안 한 번도 조국에서 우승을 해본 적이 없었다. F1에서 브라질을 알리고 열렬한 애국심에 브라질의 영웅이었던 세나로썬 정말이지 반드시 하고 싶었던 우승이었다. 인터라고스 서킷에선 '올레! 올레! 세나! 세나!'를 외치는 수만의 브라질 국민이 있었고 여유롭게 폴 포지션을 차지한 세나는 조국 동포들의 응원을 받으며 힘차게 출발했다. 세나는 매우 쉽게 레이스를 이끌어 갔고 이대로라면 염원하던 브라질 그랑프리 우승을 해낼수 있을 것만 같았다.

때는 54랩, 세나의 기어박스가 고장나버렸다. 설상가상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져 경기 말미엔 2위가 거의 다 따라잡은 상황[15]이었다. 여기서 세나는 포기할 수 없었기에 오직 6단 기어만을 사용해 남은 7랩을 돌기로 결심한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상황인가 하면 애초에 자동차가 6단 만으로 저속과 고속을 넘나 들며 달릴 수도 없거니와 당시에는 스티어링 휠조차 파워 스티어링휠이 아니었고 쉬프트 패들이 아닌 일반적인 H 쉬프터 였기 때문에 6단의 엄청난 토크와 힘을 맨 손으로 모든 코너마다 견뎌내야 한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세나는 그것을 해내고야 말았고, 비가 경기 후반 내린 덕분에 결국 모두의 환호 속에서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우승했다. 단 7랩이지만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그는 경기 직후 팔도 들어올리지 못할 정도로 근육에 무리가 가 있었다. 서킷 한가운데 차를 세웠고 자력으로 장갑을 벗지도 못했다.[16] 그는 비명을 지를 정도로 좋아했고 포디움에서 브라질 국기를 간신히 들어올리며 브라질 국민과 기쁨을 나눴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영웅적인 순간이었다.

이후 세나는 그야말로 시즌 내내 날아다녔다. 그를 향한 정치적 억압도 극심한 팀 내 갈등도 없이 그는 8번의 폴 포지션, 모나코 폴 투 윈, 시즌 7승이라는 성적을 기록했다. 만셀과 타이틀 경쟁을 했지만 만셀이 시즌 첫 3경기를 내리 리타이어하고 분수령이었던 일본 그랑프리마저 허무하게 그래블 속 먼지 속으로 사라지면서 세나는 여유롭게 시즌 챔피언을 획득했다. 그의 세번째 월드 챔피언 타이틀이었다. 최종성적 96포인트 종합 1위.

시즌 중 사고도 있었는데 멕시코 그랑프리에서였다. 그는 그랑프리 전 제트 스키를 타다가 경미한 부상을 입었었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페럴타다 코너에서 그래블에 빠지고 타이어월에 부딛힌 다음 차가 그대로 공중회전을 해서 머리부터 바닥에 꽂혀버렸다. 물론 세나는 의식을 잃는 일 없이 자력으로 탈출했지만 그가 처음 겪어보는 꽤 심각한 사고였다.

이 시즌 중 알랭 프로스트가 페라리로부터 해고당했다. 그는 결국 시트를 구하지 못해 1992년을 쉬어야 했고, 1993년에 다시 복귀했다.

3.3.5. 1992 시즌

[17]

1992 시즌은 F1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기술이 등장한 시즌이었다. 사실상 자동차 경주의 판도가 바뀌는 정도로.

바로 액티브 서스펜션의 등장이었다. 액티브 서스펜션을 장착하면 차량 안에 탑재된 컴퓨터가 달리는 동안 서스펜션을 조정해 차의 지상고를 자동으로 조정하게 된다. 그렇게 각 상황에 맞는 최적의 그립을 만들어내 어느 코너에서도 가장 빠른 속도를 얻게 하는 기술이었다. 드라이빙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어쨌든 규정 내 허용 범위였고 이를 장착하지 못한 레이스카는 매우 불리한, 경쟁이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안타깝게도 세나의 멕라렌에는 액티브 서스펜션이 탑재되지 못했다. 그 이외에도 멕라렌은 레이스카 업데이트가 자주 지연되었고, 여러 신뢰성 문제도 있었으며 이미 1992년 시즌을 끝으로 F1에서 철수할 예정이었던 혼다의 V12 엔진은 더 이상 특출나게강력한 엔진도 아니었고 MP4/6와 MP4/7은 더 이상 위닝카가 아니었다. 그러나 세나는 모나코에서 전설적인 경기를 연출하는 등 몇몇 그랑프리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 물론 거의 모든 폴 포지션은 FW14B를 탄 나이젤 만셀의 차지였고 우승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액티브 서스펜션이 드라이빙의 의미를 해치고 있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절망시킨 액티브 서스펜션.

벨기에 그랑프리에선 퀄리파잉에서 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고 서킷 한가운데 반파된 채 있었던 리지에의 에릭 코마스를 구하기 위해 차에서 내려 서킷 한가운데를 가로질러[18] 드라이버를 구출하기도 했었다. [19] 이후 2년 뒤 세나가 사망하자 코마스는 충격에 빠져 레이스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외에 Indycar 테스트를 받고[20] 브라질 그랑프리에선 당시 루키였던 미하엘 슈마허와 말싸움을 하는 둥 여러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타이틀 방어에는 실패해 총 3승, 최종 성적 50점, 종합 4위에 머물렀다.

3.3.6. 1993 시즌

'

(도닝턴 파크에서 우승한 세나, 모두가 인정하는 레인 마스터였다.)

그가 벌인 맥라렌 레이싱에서의 마지막 시즌. 명경기를 남기고 떠나기 직전이었다.

멕라렌은 F1에서 철수한 혼다를 대체할 엔진 업체로 르노와 협상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동시에 알랭 프로스트가 나이젤 만셀이 은퇴한 자리에 윌리엄스를 통해 복귀했지만 문제는 계약 조항에 얘랑 팀메이트 안함이라고 걸어놔 그것과 연관이 있지 않냐는 추측이 있었다. 멕라렌은 포드의 V8 엔진으로 엔진을 교체했고 뒤늦게 액티브 서스펜션 또한 탑재할 수 있었다. 시즌 5승을 할 정도로 차는 경쟁력을 되찾았으나 윌리엄스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몇몇 인상적인 경기를 펼쳤는데 대표적으로 도닝턴 파크에서의 유로피언 그랑프리였다. 4번째 그리드였던 세나는 스타트에서 밀려 5위로 밀려나고 말았다. 앞에는 윌리엄스 듀오와 슈마허등이 있었다. 그러나 레인 컨디션이었던 도닝턴 파크에서 세나는 단 한 랩동안 4명을 모조리 추월해 선두로 올라섰다.

이후 서킷이 잠시 말랐다가 다시 비가 내리면서 각 팀의 타이어 전략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세나는 거기서 웻타이어가 아닌 슬릭 타이어로 도박을 걸어 많은 랩타임 이득을 보았다. 동시에 우승. 당연하지만 이런 전략은 세나니까 수행 가능했던 전략이다. 이 외에도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는 등 커리어에 남을 만한 경기를 해냈다. 그렇게 자신의 전성기를 보냈던 멕라렌에서의 커리어는 막을 내렸다. 세나에게나 멕라렌에게나 아쉬운 이별이었지만 챔피언쉽에 대한 세나의 열망은 어쩔 수 없었다.이미 세나는 시즌중 꾸준하게 윌리엄스와 계약 협상 중이었다.[21] 결국 프로스트가 가져간 챔피언쉽은 승리하지 못했다. 최종성적 73포인트 종합 2위.

(프로스트와 같이 인터뷰를 하고 있는 세나. 이 당시 둘의 관계는 예전처럼 험악하지는 않았다.)

시즌 중후반부터 세나는 멕라렌과 재계약을 하지 않고 그랑프리별로 계약을 하며 레이스에 나왔다. 바로 윌리엄스와 계약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세나를 데려오지 않는 조건으로 프로스트를 데려왔기 때문에 쉽지 않은 계약협상이었다. [22]

3.4. 알랭 프로스트와의 경쟁

1988, 1989시즌 동안 세나와 프로스트가 펼쳤던 경쟁은 F1 역사상 최고의 경쟁으로 여겨진다. 세나와 프로스트 모두 역대 최고 수준으로 평가되는 기량을 가졌지만 그와 동시에 서로 대비되는 기질을 가지기도 했다. 그런 두 드라이버가 한 팀에서 동등한 머신[23]으로 경쟁했던 것이다.

머신의 성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 이상적인 주행을 보여야 하는 퀄리파잉에선 세나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안정적인 운영으로 포인트 관리가 중요했던 본선 레이스에선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다. 두 사람이 경쟁했던 두 시즌 동안 우승 횟수에선 세나가 앞섰지만 포인트에선 프로스트가 앞서는 양상을 보였다.

세나

vs

프로스트

17

레이스 승리

13

28

퀄리파잉 승리

4

14

그랑프리 우승

11

26

폴 포지션

4

154

포인트

186

3.5. 1994년, 윌리엄스에서

3.5.1. 1994 시즌

사고로 박살난 세나의 경주차.

1993년 세나를 놓칠 수 없었던 윌리엄스는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설득해보려 했다. 시즌 중 휴가를 보내고 있었던 프로스트는 당연히 불쾌해 했지만 제안을 받아들여 94년에 받기로 했던 페이를 미리 받는 조건으로 팀을 떠나기로 결정하게 된다. 그 시즌에 프로스트는 4번째 월드 타이틀을 획득하고 F1에서 은퇴하게 된다. 동시에 윌리암스는 세나를 영입해 데이먼 힐과 함께 팀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1994 시즌부터 액티브 서스펜션이 전면 금지됨으로 사실상 세나가 윌리엄스에 가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은 영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었다. 설상가상 액티브 서스펜션이 없어진 후 FW16은 밸런스가 엉망진창이 되어 코너를 돌 때 언더스티어가 나다가도 갑자기 오버스티어가 나는 둥 성향을 종잡을 수 없는 마물같은 차가 되고 말았다. 당연히 세나는 극도의 불편함을 느꼈으며 시즌 첫 두 경기를 모두 리타이어하고 말게 된다.[24]

그 와중에 세나는 첫 두 경기를 모두 이긴 미하엘 슈마허의 베네통에 불법적인 전자장치가 달려있다고 의심했다.[25]그리고 그는 그런 상황이 암암리에 묵인되고 있다고 생각해 큰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26] 그리고 이어진 3라운드 산 마리노 그랑프리. 퀄리파잉에서 같은 브라질 후배 드라이버인 루벤스 바리첼로가 사고를 당하게 된다. 고속으로 달리던 중 코너 출구에서 차가 붕 떠서 그대로 날아올랐고 베리어에 정면 충돌해 빠른 속도로 굴러버린 것이다. 비록 바리첼로는 큰 부상은 없었지만 세나가 직접 메디컬 센터에 찾아오는 등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그랑프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고 만다. 심텍 소속의 롤란드 라첸베르거가 퀄리파잉 도중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라첸베르거는 시속 200키로가 넘는 상태로 코너에 진입했으나 프론트 윙이 부러져있던 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 코너에 진입해 프론트 윙이 차체 밑으로 들어가 콘크리트 베리어에 정면 충돌하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라첸베르거는 의식을 잃었고 구급차가 투입돼 현장에서 응급처치를 하는 장면이 그대로 방송을 타게 되었다. 세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불안해 했고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라첸베르거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거기서 사망했고 레이스 컨트롤의 발표가 이어지자 이몰라 서킷 안은 패닉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세나는 요동치는 마음을 다잡고 힘들게 차에 올라 다시 폴 포지션을 획득했다.

레이스 당일 많은 드라이버들이 레이스 기권을 고민했으나 아일톤 세나는 그리드에 서있었다.[27] 그는 여느 때처럼 레이스카에 탑승한 채 짤막한 기도를 하고 바이저를 내렸다. 그리고 시작된 레이스 스타트에서 일어난 큰 사고로 세이프티 카가 투입되었다. 세이프티 카가 너무 느린 나머지 세나는 옆으로 달려와서 빨리 달리라고 손짓을 했다.[28] 그리고 다시 시작된 레이스에서 세나는 전속력으로 달리며 뒤에서 압박을 가하는 슈마허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는 만약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면 라첸베르거를 위해 오스트리아 국기를 흔들 예정이었다.

6랩째 선두를 유지하던 세나의 레이스카가 완만한 곡선 코너인 탐부렐로에 진입했을 때였다. 차가 순간적으로 그립을 잃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그대로 돌진해 방호벽과 부딛히고 말았다. 옐로 플래그가 발동되고 마샬들이 달려갔지만 세나는 머리를 축 늘인채 의식이 없는 것 같았다. 바로 구급차가 투입되어 세나에게 응급조치를 실시했다. 그 때까진 세나가 단지 기절했을 뿐 큰 부상은 없었을 거라 예상되었고 레이스는 속행되었으나......

그것이 세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사망 원인은 구동축의 두부 강타였다. 그것이 조금만 스쳐 지나갔어도 그는 멀쩡하게 차에서 내렸을테지만 그 쇳덩이가 머리를 강타한 것이 심각한 두부 손상을 일으켰다. 실제로 그는 그 외에 여타 다친 곳이 없을 정도였다.

왜 세나의 레이스카가 갑자기 그 코너에서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며 충돌 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윌리엄스팀은 FIA의 조사를 받았고, 여러 관계자가 처벌 받거나 F1을 떠났지만 정확히 무엇 때문에 세나가 거기서 그립을 잃었는가는 알 수 없었다. 텔레메트리도 모두 정상으로 나왔기 때문.

몇몇 추측으로는 당시 온보드캠에 근거 이미 탐부렐로 코너에 진입할 때 스티어링 컬럼이 부러져 있었다는 것.[29] 최근에는 당시 온보드캠을 바탕으로 3D 모델링을 해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코너 진입에 이미 스티어링 축이 흔들린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순간적인 다운포스 상실로 차가 붕 떠버렸다는 것등이 있는데 실제로 앞/뒤에 장착되어 있는 윙보다 다운포스를 많이 제공하는게 차 밑에 장착되는 언더바디 페널이다. 관내유동에서 관의 직경이 높아지면 압력이 낮아지고 유동의 속도가 빨라지는데, 자동차 아랫면을 낮추게 되면 관의 직경이 작아지듯, 공기가 흘러가는 통로의 크기를 줄일 수 있다. 이 원리를 이용한 다운포스 생성에는 일반 차로는 상상할수 없는 단점이지만 F1 차량에서 일어날수 있는 단점이 있는데, 바로 언더바디가 바닥에 닿아버릴때 일어나는 순간적인 다운포스의 급감이다. 실제로 이 사고가 일어날 당시의 F1 차량들을 보면 달리는 도중 바닥에서 불꽃이 굉장히 많이 튀는데, 이는 F1 차량이 가능한한 최대한 낮게 만들어 지기 때문이다. 이몰라 써킷의 안좋은 노면때문에 언더바디 페널이 바닥에 닿았고, 차 밑의 저기압이 사라지며 그립이 금감하여 그대로 코너 바깥으로 밀려나갔다는 가설이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에 F1 차량의 차고높이에 대한 레귤레이션이 많이 바뀌였다.

당시 아일톤 세나 바로 뒤에서 달리고 있었던 슈마허는 세나의 사망 이후 세나를 무리하게 압박했다는 등의 비난과 세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많은 질타를 받았다.[30] 때문에 수년간 죄책감과 심적 고통을 겪었는데 그로부터 6년 뒤 2000년 이탈리아 그랑프리 에서 우승해 세나의 생전 통산 승수와 타이를 이루게 되었음을 경기 직후 기자회견에서 축하 받자 그의 생각에 말 없이 흐느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인터뷰 영상 같이 포디움에 오른 미카 하키넨 역시 당시 세나와 같이 달렸었기 때문에 하키넨 역시 울먹이며 인터뷰를 넘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31]

3.6. 포뮬러 원 레코드

역대 승수 종합 5위 (162 레이스, 41승, 25.31%)

역대 최다 모나코 그랑프리 우승자 (6승)

역대 폴 포지션 획득 종합 3위 (162 레이스, 65 폴 포지션) [32]

역대 최대 연속 폴 포지션 (8연속, 1988 스페인 그랑프리~1989 미국 그랑프리)

이 외에도 85~94년동안 산 마리노 그랑프리 폴 포지션을 모조리 쓸었다거나하는 기록이 몇가지 있다.

4. 장례식

세나! 이 곳에서 우리와 함께 해 줘!

(Senna... aceleramos juntos, o tetra e nosso!)[33]

세나의 죽음 이후 브라질은 3일간 국가 추모 기간을 선포했다.

그의 죽음에 브라질 전국이 슬픔에 잠겼었다. 심지어 세나 곁에 묻히고 싶다며 자살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그의 시신은 바리그 여객기로 이송되어 성대하게 장사를 치뤄줬고, 브라질 국기가 관을 덮는 최고의 영예 속에 상파울루 무롬비 공원 묘지에 묻혀졌다. 사실상 국가가 할 수 있는 모든 예우를 다한 것. 온 국민이 슬퍼한 그의 죽음은 장례식이 TV로 생중계되고 300만명의 시민들이 상파울루 거리로 나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야말로 구국의 영웅과도 같은 모습. 비슷한 시기 당시 FIA 회장이었던 맥스 모즐리는 같은 그랑프리 도중 사망한 롤랜드 라첸베르거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아이르통 세나 다 시우바

1960년 3월 21일 ~ 1994년 5월 1일

아무도 하느님과의 사랑에서 나를 갈라놓을 수 없으리라.[34]

(Nada pode me separar do amor de Deus.)

4.1. 그의 죽음이 남긴 영향

[35]

롤랜드 라첸베르거와 아일톤 세나의 죽음 이후 다시 한 번 포뮬러 원 레이스카의 안전성에 대해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에 FIA는 이후 포뮬러 원 레이스카의 안전 기준을 유래가 없는 강도로 끌어올리고 레이스카 디자인에 혁명적인 변화를 넣게 된다. 300톤이 넘는 충격에도 드라이버를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서바이벌 쉘, 목 골절을 방지하기 위한 헤드레스트와 HANS의 도입이 추진된 것이다.

실제로 이런 노력 덕분에 서킷 위에서 사고로 즉사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는 드라이버는 20년간 없었다.

5. 드라이빙 스타일

(세나의 차는 코너에 들어갈 때나 탈출할 때 리어가 흔들리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마치 삼바 댄스를 추는 것 같은 이 동작은 사실 그립 잃어 주춤거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립을 붙잡고 있는 움직임이다. 세나는 평소에 이런 그립을 감지하거나 만들어내는데 재능이 있었고 그런 재능은 비가 오는 상황에 특히 빛을 발했다.)

세나가 두각을 드러냈던 레이스는 비가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만큼 세나는 레인컨디션에서 최강의 위력을 발휘하는 드라이버였다. 최근 레인마스터라는 말이 너무 쉽게 쓰여서 퇴색된 감이 있지만, 요즘 쓰이는 용례처럼 비가 올 때도 잘 하는 드라이버라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비가 오는 날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세나는 비가 올 때 더 강력했으며, 불가능한 레이싱을 했으며, 비만 오면 차의 성능을 극적으로 극복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레인마스터라고 불릴 수 있는 드라이버는 세나 이외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일톤 세나가 동시대 경쟁자들보다 단연 뛰어났던 영역은 퀄리파잉이었다. F1은 서킷을 최단시간에 일주하는 퀄리파잉 기록으로 예선을 치루기 때문에 드라이버들마다 퀄리파잉에 강하거나 레이스에 강한 특성이 있지만 세나는 이 부분에서 당대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다. 보통은 빠른 차를 타는 드라이버들이 퀄리파잉 기록이 좋은데,[36] 그러나 세나의 퀄리파잉 능력은 차를 뛰어넘는 것이어서 1986년 윌리엄스-혼다보다 현격히 느렸던 로터스를 타고 16개의 그랑프리에서 7번이나 폴 포지션을 차지했다. 또한 F1에서 다른 드라이버들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같은 차를 타고 얼마나 차이를 보이느냐, 인데, 1988년 멕라렌으로 이적한 첫 해 모나코에서 프로스트와 같은 차를 타고도 무려 1초가 넘는 랩타임을 기록하면서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증명했다. 밸런스가 매우 불안정했던 94년 윌리엄스를 타고도 폴 포지션은 놓치지 않았을 정도. 단순히 말해서 소위 말하는 원랩, 숏런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던 선수였다. 이는 위에서 언급된 코너에서 그립이 어디에 있는지 직감적으로 감지하고 그립이 부족한 곳에서 그립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크게 발휘된 덕도 있다.

세나의 통산 65회 폴 포지션은 미하엘 슈마허가 2000년대 들어서 갱신하기 전까진 차원이 다른 수준의 기록이었다. 심지어 루이스 해밀턴이 F1 통산 최다 폴 포지션을 갱신한 지금도 역대 3위를 기록하고 있다. 겨우 162경기만을 치뤘고 25년이나 된 기록인데도. 그리고 이들의 폴 포지션 기록은 대부분 가장 숏런이 빠른 차로 기록한 것으로, 세나처럼 느린 차로 폴 포지션을 밥 먹듯 기록한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프로스트와의 경쟁 기간에도 다른 기록에선 프로스트가 앞서도 퀄리파잉만큼은 세나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레이스에서도 세나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는데 바로 불타협적인 휠 투 휠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빠른 속도로 뒤섞여 달리는 모터스포츠에서는 나란히 달리게 되는 휠 투 휠 (Wheel to Wheel)은 가장 치열한 경쟁의 순간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위험한 순간이기도 하다. 나란히 달리는 와중에 접촉해서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 이런 기본적 리스크가 큰 휠 투 휠에서 세나는 이전 세대의 드라이버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세나 이전 세대의 드라이버들은 서킷 환경이나 레이스카의 안전장치 같은 것이 상대적으로 열약했기 때문에 보통 이런 휠 투 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은 드물었다. 분위기 자체가 그런 방식의 경쟁이 지나치면 위험을 조장한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세나가 처음으로 고카트 방식의 레이스를 선보였던 것. [37] 물론 세나가 고카트에서 처럼 컨택도 불사하는 레이싱을 했다기 보단 그 기조를 포뮬러 원 레이싱에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맞다. [38] 때문에 이런 세나의 성향에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프로스트와는 팀메이트 기간 내내 상극이었고 재키 스튜어트 같은 6,70년대 드라이버들과도 가치관에서 충돌이 있었다.

또한 그는 팬들이나 드라이버들에게 레이싱 드라이버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써 매력적인 면들이 있었다. F1 특유의 정치적인 환경에 대해 불편함을 공개적으로 나타내고 최대한 정치색이 배제된 순수한 의미에서의 경쟁을 추구했다는 점, 모터스포츠가 가지는 태생적 위험을 인식하고 사고로 다친 드라이버들을 챙기는 등 직업정신과 동업자 정신이 투철했다는 점, 당시 국제무대에서 밝히기 꺼려지던 브라질이라는 국적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브라질의 가난한 아이들을 아꼈던 점, 그리고 자신 스스로가 F1 레이싱에 엄청난 열정을 보여줬다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점들이 후세대 드라이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6. 인간으로서

자신의 조국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영웅.

측근들의 말에 의하면 굉장히 사려깊고 정의감이 강했다고 한다. 도덕적으로 타격을 입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고. 그런데 이건 레이스카 밖에서의 얘기규 레이스카에만 올라타면 전혀 딴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레이스카가 달려오는 목숨이 위험한 서킷 한 가운데를 달려가 부상당한 드라이버를 구출하고 후배 드라이버들을 위해 진심을 다해 조언하고 챙겨줄 만큼 자신의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항상 하느님 얘기를 할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다. 레이스에서 우승하면 꼭 하는 얘기중 하나가 신에 대한 감사. 그는 항상 레이스에 나서기 전에 차에 앉아서 기도를 하곤 했다.

그의 조국에 대한 사랑은 남달라서 항상 브라질 국기를 들고 다니며 레이스마다 흔들곤 했다. 또한 그는 당시 막장의 끝을 달리던 브라질의 국가상태와 거기에 고통 받는 아이들을 항상 안타까워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아일톤 세나 재단. 빈민층 아이들에게 교육과 지원을 베풀고 여러 꿈을 가진 아이들[39]을 뒷받침 해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그는 항상 이 세나 재단을 홍보하는 티셔츠를 입고 그리드를 돌아다녔으며 틈만 나면 요트에 가득 먹을 것과 생필품을 실어서 시골의 아이들에게 가곤 했다. 또 그는 자선 기금을 위해 F1 드라이버들을 불러 모아 돔 구장 안에다 카팅 서킷을 만들어놓고 팬들을 불러다 친선 카팅 경기를 열기도 했다. 사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생전에 익명으로 사재[40]를 털어 빈민층 아이들을 위해 기부했다고 한다. 그의 사후 세나 재단은 누나인 비비안느 세나가 맡아서 관리하고 있다.

때문에 그의 죽음 이후 브라질 정부가 3일간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막장도 그런 막장이 없던 브라질의 나라 상태를 생각하면 그의 인간적인 모습과 불안정한 조국을 아끼고 국제 무대에서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은 브라질 국민에게 뜨거운 애정을 불러일으켰다.

7. 그의 헬멧

레이싱 드라이버들은 저마다 특유의 디자인을 한 헬멧을 하는데 빠르게 달리는 서킷 안에선 쉽게 드라이버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눈에 띄게 위함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자신의 상징으로 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일즈 포인트. 아일톤 세나는 조국 브라질 국기의 색상인 초록색과 파란색 노란색을 혼합한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강렬한 노란색 헬멧은 어딜가든 눈에 띄였으며 그의 사후엔 완전히 세나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때문에 모든 드라이버들의 존경을 받는 세나여서 그의 헬멧 디자인을 오마쥬하는 드라이버들이 매우 많다. 대표적으로 루이스 해밀턴. 그리고 그의 조카인 브루노 세나[41]. F1을 오랫동안 봐온 팬이라면 왠지 모를 애틋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세나 재단을 위해 세나의 헬멧과 사진을 찍은 슈마허와 프로스트)

8. 미스터 모나코

F1 드라이버들은 저마다 하나쯤 유난히 강한 면모를 보이는 서킷이 있는데 세나는 모나코 서킷이 그러했다. 키미 라이코넨이 스파-프랑코샹 서킷에서 유난히 빠른 스피드를 보이는 것과 비슷한 것. 그러나 비교가 힘든게 세나 현역 10시즌동안 통산 6승을 했을 정도로 모나코에서 세나는 절대적이었다. 경쟁력있는 차를 가지지못했던 후기 로터스 시절이나 전성기 멕라렌 시절, 마찬가지로 느렸던 멕라렌 후기 시절에서도 세나는 우승을 놓치지 않았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퀄리파잉에 목숨거는 모나코 특성상 세나가 퀄리파잉에서 무적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맞아 떨어진 것이 가장 크다. 일례로 1988년 모나코 예선에서 그는 같은 차를 타는 알랭 프로스트와 1.427초 차이로 폴 포지션을 획득했다. 같은 차를 탔는데 1초가 넘게 차이난다! 게다가 알랭 프로스트는 월드 챔피언 4회의 레전드 오브 레전드 드라이버다. 이 차이가 얼마나 큰 거냐면 F1에서 1.427초 차이는 거의 7위 밖까지 밀려날 수 있다. 실제로 2017년 모나코 예선에서 폴 포지션과 1.3초 정도 차이 나는 기록은 무려 8위다!

또한 단순히 퀄리파잉에서 앞섰기 때문에 우승을 많이 한 것이 아닌 것이, 1992년과 1993년에는 예선 3위에서 출발했음에도 기어이 제일먼저 체커를 받아내고는 했었다.

우승을 놓친 1988년은 프로스트를 크게 앞서다가 스스로 사고를 내 리타이어한 경우였고 1992년에는 한참 닳은 타이어를 끼운 채로 새타이어를 끼운 만셀을 상대로 수십랩 동안 막아내 만셀의 모나코 우승을 기어코 저지하기도 했다. 이렇게 세운 통산 6승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그레이엄 힐이나 슈미같은 본좌정도나 5회 우승을 기록했을 뿐이며, 최근에는 로즈버그 정도가 3회 우승을 했을 정도였다.

세나가 요절한 것 때문에 커리어 면에서는 최강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가장 위대한 드라이버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가장 어려운 드라이빙 스킬이 요구된다는 서킷인 모나코에서 역대 최강의 마스터 오브 마스터로 군림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른 드라이버들과는 달리 빠른 차를 타서도 아니었으며 만약 같은 차를 탄다면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

9. 그에 대한 어록들

"당신에겐 누가 최고의 드라이버 인가요??

"저에게 물어보신다면, 저에겐 언제나 아일톤 세나가 넘버 원입니다."

미하엘 슈마허


"당신은 그 위대한 시대에 모든 드라이버들 중 가장 빛나는 사람이...세나가 꼭대기에 있군요."

"세나가 꼭대기에 있어요."

루이스 해밀턴[42]


그하고 견줄 수 있는 드라이버는 아마 판지오 밖에 없을 것이다.

(He got to a position where he was only equalled probably, by Fangio.)

스털링 모스


그는 그랑프리 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계 최고의 레이서이다.

(The best driver in Grand Prix racing, the best driver in the world by a long way.)

제임스 헌트


솔직히 말해서, 전 세나의 팬은 아니었어요. 난 항상 질 빌르너브가 세계 최고의 레이서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저는 프로그램을 찍을 때마다 몇 시간 분량의 영상물들을 몇 번씩 보는데요, 빌르너브는 여러 차례 멋있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세나는 - 경주차에 오를 때마다 정말 멋졌습니다.

제레미 클락슨


아이르톤은 생전에 다수의 챔피언 트로피를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여러 관중분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더욱 특별한 트로피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명예, 존경, 우상, 그리고 사랑으로 만들어진 트로피였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립니다.

비비안느 세나, 1994년 일본 그랑프리

10. 트리비아

혼다의 명차 NSX 개발에 참여해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출시 후 테스트를 하면서 스즈카에서 한계까지 성능을 끌어올리는 모습이 압권. 본인도 마음에 들었는지, 개인적으로 한대 소유 했을 정도다.

한국 애니메이션 트랙시티의 등장인물 세나의 이름은 이 인물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사고가 일어나기 불과 1달 전에 출시된[43]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ZERO에서 카자미 하야토에게 일어난 사고가 세나의 사고 상황과 비슷해서[44] 제작진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하야토 역의 카네마루 준이치와 카가 역의 세키 토시히코는 세나의 사고 소식을 듣고 '사이버 포뮬러 녹음 현장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라고 했다고. 하야토의 경우 세나의 행적을 많이 차용하기도 했다.

2010년 그의 출생 50주년을 기리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공개되었으며 그 이전에 2010년 10월에 일본에서 먼저 공개되었다.[45] 한국에는 「세나:F1의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2011년 10월 20일에 개봉했다.[46] 고급 시계 브랜드인 위블로에서 아일톤 세나 기념모델을 발매했을 정도.[47]

자동차 드라이버면서도 이륜차 브랜드인 두카티바이크를 좋아해서, 당시 연인과 함께 두카티 타고 시내를 달리던 그의 모습은 꽤나 유명했다. 그래서 PPL 효과를 톡톡히 봤는지 F1과는 별 관계 없는 두카티에서 세나를 기념하는 모델을 출시 하기도 했다.

]

포뮬러 원 브라질 그랑프리가 열리는 서킷인터라고스의 1~2번 코너는 세나의 이름을 딴 '세나 S'로 불린다. [48]직선 주로 끝에 있는 급격한 내리막 시케인으로 서킷 내 최고의 추월 포인트인 동시에 상당한 고난도의 코너로 유명하다. 마지막 코너에서 메인 스트레이트까지 슬립스트림으로 붙은 뒤 세나 S에서 추월을 시도하는 방식. 모멘텀이 약간 모자라면 전부 탈출할 때까지 난타전이 벌어진다.

혼다에서 제작한 브랜드 CM, "Sound of Honda". 아일톤 세나가 달렸던 코스와 속도를 빛으로 재현하였다. 세나팬들에게 포풍 감동을 선사하는 명작 CM.

세가메가드라이브게임기어레이싱 게임 '아일톤 세나의 수퍼 모나코 GP 2'에서 감수를 맡았다. 그는 게임 내에서 얼굴마담 겸 플레이어에게 조언자이자 최고 클래스 레이싱 팀 MADONNA의 레이서로 등장한다.

아일톤 세나 사후 20주기 년도이자 아일톤 세나 생일인 2014년 3월 21일, 구글 측에서 아일톤 세나의 탄생을 기념하는 메인화면 로고를 올렸다.

아일톤 세나 사망 20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세나 재단에 관한 것으로 세나가 생전 빈민 아이들을 위해 세운 사회 구호 재단으로 그가 사망한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브라질의 많은 아이들을 돕고 있다.

또한 레이싱 시뮬레이션 게임 그란 투리스모 6에서는 그의 사후 2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카트 시절부터 F1 입문까지를 돌아보는 아일톤 세나 트리뷰트가 특별 이벤트로 등장했으며, 몬차 서킷브랜즈 해치 서킷의 1980년대 레이아웃과 세나가 타고 우승했던 카트, F3, 로터스 F1이 추가 컨텐츠로 수록되었다.

한국의 인디 포스트 락 밴드인 로로스가 2014년 가을에 발매한 2집에서 헌정곡을 만들어 수록하였다. 리더인 도재명이 세나의 엄청난 팬이라고.

브라질 국적자 답게 축구에도 애정이 많았으며, 몇몇 대표팀 축구선수들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 우승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우승 기념 사진 촬영 때 세나를 추모하는 플래카드와 함께 찍기도 했다.

맥라렌은 세나에 대한 기념으로 맥라렌 세나를 출시했다. 발표가 됐을 때에는 이미 499대가 완판된 상태였다.


  1. [1] 포르투갈식 이름에 따라, 첫 번째 성인 '세나'는 외가쪽 성, 두 번째 성인 '다 시우바'는 아버지의 성이다. 즉 흔히 알려진 '세나'는 외가쪽 성씨인 것.
  2. [2] 2009년경에 전현직 F1 드라이버 217명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세나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드라이버로 선정된 바 있다.#
  3. [3] 세계적으로 봤을 때 브라질 스포츠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축구와 펠레지만 정작 브라질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스포츠 선수를 선정하면 세나가 펠레를 앞서기도 한다. 마라도나는 자국으로 한정해도 세나보다 뒤떨어지면서 어떻게 나보다 낫냐는 식으로 펠레를 자극하기도 했다.
  4. [4] 포르투갈령 마카오에서 1954년 처음으로 시작된 레이스. 전세계 F3 레이스 챔피언들이 모여 시가지서킷에서 경주를 치룬다. 여기서 우승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F3 세계 챔피언.
  5. [5] 레이스가 중단된 상황에서는 중단된 랩의 전 랩 상황을 경기 결과로 사용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6. [6] 현재는 르노 F1팀이다.
  7. [7] 나이젤 만셀이 로터스에 있을 때도 탐탁치 않아 했다.
  8. [8] 15랩째
  9. [9] 기록을 보면 알 수 있 듯이 80년대 초부터 90년대 초까지 이 4명이서 끊임 없이 경쟁하며 챔피언쉽을 사이좋게 나눠가졌다. 루이스 해밀턴과 제레미 클락슨이 말한 위대한 시대란 보통 이들의 전성기 시절인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를 말한다.
  10. [10] 16라운드 중 15라운드 우승, 승률 93.8%
  11. [11] 공교롭게도 엔초 페라리가 죽은 날은 이탈리아 그랑프리가 열리기 약 한달 전인 1988년 8월 14일이었다
  12. [12] F1 대회를 운영하는 현 FIA의 전신
  13. [13] 9-6-4-3-2-1
  14. [14] 프로스트가 페라리의 개떡같은 성능에 대해 항의하자 프로스트를 쫒아내버렸다.
  15. [15] 2위와 2.9초 차이로 간신히 우승.
  16. [16] 그 와중에 마샬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고 세나의 핼멧을 들어올리며 환호했다.
  17. [17] 가장 유명한 모나코 그랑프리. 그는 닳아버린 타이어로 새 타이어의 만셀을 20랩 넘게 막아냈다.
  18. [18] 심지어 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19. [19] 에릭 코마스의 차는 반파된 채로 스트레이트 한 가운데에 있었고 에릭 코마스 본인은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게다가 서킷에 먼지까지 나부껴 자칫하면 뒤에서 달려오던 차와 정면 충돌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세나는 여기다 차를 세우고 직접 뛰어가 그를 구출한 것!!
  20. [20] 당시 멕라렌의 타이틀 스폰서였던 말보로의 주선으로 역시 말보로가 타이틀 스폰서였던 펜스키팀의 머신을 테스트했었다
  21. [21] 이때 멕라렌에서 세나의 후임으로 영입했던 드라이버가 앞서 언급했던 마틴 브런들이다
  22. [22] 물론 이 때까지도 알랭 프로스트의 세나 거부 조항은 유효했다. 때문에 윌리엄스는 프로스트에게 방출 의사를 내비쳤고 프로스트는 다음 시즌 연봉을 받는 조건으로 은퇴했다.
  23. [23] F1 드라이버 최고의 라이벌은 팀 동료다. 다른 팀 드라이버에게 졌을 땐 머신과 팀을 탓할 수 있겠지만 동료에게 진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24. [24] 그러나 폴 포지션은 3라운드인 산마리노 그랑프리까지 모두 획득했었다. 차는 분명 빨랐지만 극도로 불안정했다는 얘기.
  25. [25] 물론 확정적 증거는 발견된 것이 없다.
  26. [26] 사실 데뷔때부터 F1의 특유한 정치적 상황에 대해 불편해 하는 그였고 커리어 기간 내내 그런 상황에 시달리고 FISA와의 관계가 무척 안좋았기 때문에 그런 의혹에 대해 큰 절망감을 느낀 것으로 보여진다.
  27. [27] 이 때 세나와 친했던 F1 닥터 시드 왓킨스는 그에게 이제 그만 F1에서 은퇴하라는 얘길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나의 대답은 할 수 없다는 것.
  28. [28] 우습게도 이 당시 이몰라 서킷은 돈이 없어서 고성능 스포츠카도 아닌 일반 승용 세단을 세이프티카로 투입했다고 한다.
  29. [29] 온보드캠을 보면 스티어링휠의 중심축이 틀어진다.
  30. [30] 물론 슈마허와의 경쟁이 세나의 사고 원인은 결코 아니다.
  31. [31] 당시 이몰라 그랑프리 우승은 슈마허 3위는 하키넨이였다.
  32. [32] 그가 사망한지 20년이 지났는데 그 위로 있는 사람은 슈마허와 해밀턴 둘 뿐이다...
  33. [33] 브라질의 공용어인 포르투갈어이다. 1994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꺾고 결승전에서 우승한 브라질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트로피를 손에 넣으며 세나를 추모했다.
  34. [34] 로마서 8장 39절이다. 생전에 그는 독실한 가톨릭교도 였다고.
  35. [35] 1년 뒤인 1995년에 이몰라에서 찍은 사진이다. 좌측부터 나이젤 만셀, 장 알레시, 하인츠하랄트 프렌첸, 미하엘 슈마허, 데이먼 힐, 스즈키 아구리
  36. [36] 그 때문에 F1이 차빨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37. [37] 고카트는 바퀴가 노출된 오픈 휠 방식이지만 차량간 컨택이 포뮬러 레이싱보다 훨씬 자유롭다. 속도도 느리고 무겁지도 않아 상대적으로 크게 다칠 위험이 적어서 이기도 하지만.
  38. [38] 세나는 카트를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탔다. 그리고 프로 레이서가 된 이후에도 카트 레이싱의 환경을 매우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기도 했다.
  39. [39] 가난한 아이들의 안정적 사회 진출을 돕는다.
  40. [40] 사망 당시 4억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41. [41] 누나인 비비안의 아들이다.
  42. [42] 참고로 해밀턴은 세나의 광팬이다.
  43. [43] ZERO 1화는 1994년 4월에 출시되었다.
  44. [44] 좌회전 코너에서의 충돌, 같이 사고를 당한 사람이 오스트리아인인 등
  45. [45] 2010년 10월 7일 열린 F1 일본 그랑프리에 맞춰 일본 미에현 스즈카 서킷에서 월드 프리미어를 거행.
  46. [46] 참고로 일본 개봉이 먼저 이뤄진 것은 일본에서 세나의 인기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세 차례의 F1 월드 챔피언쉽 타이틀 중 두 차례를 일본 GP에서 확정지었다.
  47. [47] 위블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기념 시계를 만들기도 했으며, 마라도나 아르헨티나 국대 감독이 양손에 하나씩 두 개 차는 시계로도 유명하다.
  48. [48] 세나가 현역이었을 당시 인터라고스는 대대적인 개보수를 하게 되는데 그 때 그가 직접 이 코너의 설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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