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그리스 신화의 여신인 아테나에 대한 내용은 아테나 문서를, '하야테처럼!'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텐노스 아테네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개요
2. 아테네 도시권과 아테네
3. 지리
4. 교통
5. 명소
6. 역사
6.1. 도시국가 아테네
6.1.1. 페르시아 전쟁 이전의 아테네
6.1.2. 민주주의의 탄생
6.1.3. 그리스의 학교
6.1.3.1. 아테네 민주주의의 비판자들
6.1.3.2. 아테네 민주주의의 문제점
6.1.5. 민주주의의 귀환
6.1.6. 제국의 시대에 맞서
6.4. 현대 그리스
7. 여담

유럽 문화 수도 1985

(첫 회)

아테네

1986년
피렌체

고전~중세 그리스어: Ἀθῆναι[1]

현대 그리스어: Αθήνα(Athína)

라틴어: Athenae

영어: Athens

프랑스어: Athènes

독일어: Athen

터키어: Atina

러시아어: Афины(Afíny)

에스페란토: Ateno

1. 개요

그리스의 수도[2]이자 아티카 주의 주도. 아테네가 그리스의 수도가 된 것은 1834년부터다.

아테네라는 이름에 대해서 19세기 독일의 고전학자 로베크(Christian August Lobeck)는 그 어원이 'anthos(꽃)', 즉 '꽃의 도시'라고 보았으며, 19세기 독일의 문헌학자 되덜라인(Ludwig Döderlein)은 그 어원을 'the-(비옥한)'로 보고 '비옥한 곳'이라 해석하였다. [3]

그리스와 로마가 유럽을 주도하던 시절, 유럽의 시작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그리고 그곳의 중심지로서 게르만 이동 이후에도 이에 영향을 주었던 살아 숨쉬는 문화의 시작점이며, 로마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곳이다. 제1회 하계 올림픽 대회제28회 하계 올림픽 대회의 개최지였다. 고대에 건축된 수많은 유적이 있으며 세계적인 관광도시이기도 하다. 사실상 오늘날 아테네는 고대 아테네가 건설한 고대 유적들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아테네 도시권과 아테네

아테네라는 이름이 붙은 행정구역은 광역 행정구역인 아테네 도시권(Athens Urban Area)과 시급 행정구역인 아테네 시(Municipality (City) of Athens)가 있다. 아테네 시의 인구는 66만 명이고 아테네 도시권의 인구는 309만 명이다. 다만 행정구역의 크기에서 주의해야 하는 게 아테네 시(39km²)는 서울의 종로구와 중구 합쳐놓은 수준에 불과하고, 피레우스 등의 위성도시를 포함한 아테네 도시권(412km²)가 우리나라 서울특별시의 3분의2 규모이다. 보통 아테네하면 도시권을 뜻하는 거라 보면된다. 그리스는 한국처럼 아테네에 생활권과 경제권이 모여있다.

한편 그 배후 지역인 아테네 광역권(Athens Metropolitan Area)의 면적은 2,928km²에 인구는 2014년 기준으로 410만 명으로 추산된다.

아테네 광역권이 아티카 주의 대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아티카 주는 8개 지역단위(2010년 이전의 현(縣))를 가지고 있다. 이 중 북아테네, 서아테네, 중아테네(아테네 시가 속해 있다), 남아테네, 피레우스 5개 지역단위가 아테네 도시권에 들어가고, 여기에 동아티카, 서아티카를 더한 7개 지역단위가 아테네 광역권이다. 아티카 주에서 아테네 광역권에 속하지 않는 유일한 지역단위인 아티카 군도는 아테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섬지역들이다.

3. 지리

도시 전체가 아티카분지 한복판에 위치해 있고, 도시 사방을 산들이 에워싸고 있는 형태를 갖고 있다. 대한민국대구광역시와 가깝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서쪽에는 에갈레오 산이 있고, 북쪽에는 파르니싸 산(높이 1413m), 북동쪽에는 판델리 산이 있으며, 동쪽에는 이메토스 산이 자리잡아있다. 그리고 남쪽은 사로니코스 만이 위치해 바다로 열려있다. 도시 안에는 딱히 산이라고 부를만한 물건이 없으며, 우리 기준으로는 '언덕'이라고 불릴수 있는 곳이 몇군데 보인다. 그중 대표적인 언덕은 역시 아크로폴리스가 위치한 언덕과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리카비토스 언덕. 높이는 277m이다.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일 년 내내 따뜻한 기후를 자랑한다. 겨울날 새벽에도 5°C 밑으로 내려가지 않아 1월에 벚꽃이 필 정도이다. 그리고 여름에는 유럽에서 가장 더운 도시이다. 실제로 기록된 역대 최고 기온은 무려 48.0℃로 이 기온이 유럽 역대 최고 기온이다. 평균 기온을 봐도 7월에는 낮에 평균 34°C까지 올라간다. 다만 사하라 사막에서 올라오는 고압대의 영향으로 열대야가 없고 응달진 곳에서는 시원하다. 강수량은 414.1mm로 절반 이상이 겨울철에 집중된다.

분지 지형 특성상 대기 오염이 심각한 도시다. 이미 산성비와 이산화황 반응으로 인해 아크로폴리스의 유적들은 굉장히 위험한 상태에 있다. 게다가 여름철의 건조한 기후로 인해 산불이 자주 일어나는데 특히 2007년과 2009년에 있었던 대규모 산불로 인해 파르니싸 산의 수목들이 불타면서 아테네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새벽에 언덕위로 올라가보면 도시 전체가 스모그에 쌓여 있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다행히도 아테네 당국에서 자동차 없는 거리를 잔뜩 설정해놓고, 적극적으로 대기오염을 잡으려는 정책을 시행 중이라 호전되는 추세이다.

4. 교통

  • 도로

현대 아테네는 비교적 신도시이지만 역시 19세기에 지어진 형태라 운전하기 굉장히 어려운 도시로 손꼽힌다. 이스탄불만큼은 아니지만 도로가 굉장히 비좁고, 일방통행로가 무지막지하게 많아서 현지 주민들조차도 헷갈려한다. 게다가 그리스인 특유의 느긋함으로 인해 차가 막혀도 다들 무사태평하다.[4] 아테네는 전세계에서 교통체증 심하기로 10손가락 안에 드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사람들의 운전매너는 로마서울에 비하면 정말 좋은 편이라고 한다. 도시의 중심 도로는 항구도시 피레아스(Πειραίας)에서 신다그마 광장(Το Σύνταγμα)까지 이어지는 도로로, 이곳에서 국방성(Η εθνικήαμυνα)까지 이어지는 도로와 수니오, 코린토스 등의 이웃도시로 연결되는 도로가 시작된다. 아마 공항으로든 열차로든 아테네에 도착하게 된다면 이 신다그마 광장이 여행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아테네에는 지하철 노선이 3개 깔려 있으며, 4호선이 공사중이다. 이 곳도 땅 파면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지하철 놓는 데 상당히 애로사항이 꽃핀다고 하며, 실제 모나스티라키 역에 가보면 지하철 공사를 하다 발굴된 고대 시대의 하수관과 도로 유적을 유리판으로 둘러싸 보존해 놓았다.[5] 공사 중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만 모아놓은 작은 박물관도 있을 정도. 현재 지하철 1호선은 피레아스 역에서 아테네 도심부를 가로질러 키피시아 역까지 연결되며 지하철 3호선이 아테네 중심부와 베니젤로스 공항까지 이어져있다.

  • 철도

그리스 국토의 80%가 산지라서 그런지 이 나라는 철도가 굉장히 부실한데, 명색이 수도인 아테네의 경우 철로가 두개밖에 없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행 열차를 운행하는데, 일반 열차를 이용하면 4시간 반 걸리는 테살로니키까지 급행 열차를 이용하면 1시간 반만에 찍을 수 있다. 참고로 그리스의 기차는 가다가 지선이 나오면 일부 칸을 뚝 잘라서 역에 버려놓고 가는 식으로 운행되는데,[7] 이로 인해 자리를 잘못 앉으면 엉뚱한 곳에서 내리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5. 명소

아크로폴리스와 같은 유적지들과 몇몇 중요한 박물관들이 있지만 다른 유럽의 수도들에 비해서 관광지로서 명성이 다소 딸린다. 고대에 중요한 도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에는 그리스의 수도가 되기 전까지는 별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8] 중세나 근대의 유적지가 많지 않다. 얼마 안되는 유적지들도 제 2차 세계대전난개발로 거의 다 파괴되었다. 새롭게 건설된 시가지도 현대적인 건축물이 아닌 온통 콘크리트로 된 단조로운 건물 투성이에 무엇보다도 도로가 좁고, 아테네의 녹지대는 3퍼센트 정도로서 유럽에서 가장 녹지대가 적은 곳으로 분류된다.[9] 이 때문에 로마, 프라하, 리스본과 같은 다른 수도들과 다르게 역사적인 중심지라는 느낌을 받기 힘들다.

통합권을 이용하여 입장하며, 가격은 30유로이다.아크로폴리스만 입장할 경우는 20유로이다.[10] 통합권으로는 바로 옆의 디오니소스 극장과 제우스 신전 및 모나스티라키의 세 유적까지 커버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돌덩이 투성이라 의외로 파르테논 신전 외에는 볼 것이 없는 편. 더구나 파르테논 신전과 디오니소스 극장을 제외한 다른 곳은 모두 오후 3시[11]에 가차 없이 문 닫아버린다. 바닥이 온통 잘 닦인 대리석이라 미끄러운데, 아테네 지형 특성상 바람도 굉장히 세차므로 소지품과 안전 관리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파르테논 신전 자체도 관광객에게 친절하게 꾸며놓은 편이 아니라서 그냥 소문만 믿고 올라갔다가는 뭐가 뭔지 당최 감을 잡을 수가 없는 돌덩이만 실컷 구경하는 수가 있다. 가기 전에 미리 공부해두자.

  • 아고라

파르테논 신전 입장권과 함께 끊어서 가는 곳으로 멀쩡한 건물이라곤 복원된 아탈로스의 회랑건물밖에 없다. 다만 인근에 현지인들은 씨시오(Θησειο)라고 부르는 헤파이스토스의 신전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고, 이곳에서 자라는 월계수 덕분에 상당히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기존의 파르테논 신전 옆 구석에 자리하던 박물관을 아크로폴리 역 부근으로 이전하여 새로 지은 곳이다. 아크로폴리스 지구에서 발굴한 모든 석상이나 유물, 그리고 각종 아크로폴리스 건축물들의 재현모형까지 모여있으니 돌덩이 관람에 지쳤다면 들를 만 한 곳이다. 다만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 플라카 지구

아크로폴리스 근방에 있는 고급 거리. 아테네에서도 부촌으로 손꼽히는 곳으로 관광객들을 위한 고급식당과 카페들이 즐비해있다. 대부분 생음악을 연주하는데, 저녁에 식당 바깥에서 들리는 부주키 연주에 끌려서 들어갔다가 수프 한 그릇 사먹고 10유로씩 내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 국립 고고학 박물관

오모니아 광장에서 조금 더 들어간 곳에 자리한 박물관으로, 돌 밖에 볼 것이 없는 그리스에서도 가장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흔치않은 박물관이다. 더구나 아크로폴리스 박물관과는 달리, 사진촬영이 가능. 대표적인 유물은 아가멤논의 마스크. 입장료도 매우 저렴해서 국제학생증을 갖고 있다면 3유로에도 끊을 수 있다.

  • 비잔티움 그리스도교 박물관(Byzantine and Christian Museum, Βυζαντινό και Χριστιανικό Μουσείο)
  • 리카비토스 언덕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으로 꼭대기에 카페가 있다. 이른 아침에 이곳에 오르면 환상적인 아테네의 스모그를 감상할 수 있다.

  • 제우스 신전

아크로폴리스나 리카비토스 언덕에서 바라볼 때 유난히 눈에 띄는 광장 같은 곳이 있다면 십중팔구가 이곳이다. 넓직한 터에 반쯤만 남은 신전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돌덩이로 둘러싸인 곳. 아테네에서 파르테논 신전 다음으로 괜찮은 유적지이며,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거닐면 만족하게 볼만한 곳이다. 아크로폴리스 통합권을 이용하여 입장 가능.

  • 신타그마 광장 주변부

신다그마 광장에 위치한 '무명용사의 무덤' 앞에서는 매 정각마다 위병교대식이 열린다.

아테네 관광의 중심지이며, 가장 깨끗한 동네. 남쪽으로 가면 에르무 거리(Οδος Ερμου)가 나오는데, 서울의 명동같은 곳으로 고급 부티크와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기념품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있다. 신다그마 광장 앞에는 전통적인 부촌인 플라카(Πλάκα)지구와 콜로나키(Κολονάκι)지구가 펼쳐져 있으며, 신다그마 광장 남쪽의 길로는 우리나라의 명동정도의 위상을 갖는 에르무 거리(Οδος Ερμού)가 이어져있다. 신다그마 광장을 중심으로 웬만한 고대유적지들은 다 걸어서 구경할 수 있는데다가 모나스티라키(Το Μοναστιράκι)역 주변에는 분위기좋은 카페와 타베르나(식당), 기념품가게, 그리고 맛있는 기로스가게가 있다. 거리 한쪽에서는 매일 낮동안 벼룩시장이 열리는데 보기 드문 물건들도 구할수 있으니 가보길 추천한다. 특히 추천할만한 명소는 모나스티라키 광장에서 바로 첫눈에 보이는 초록색 천막지붕이 있는 곳으로 2009년 가격으로 기로스를 단돈 1.80유로에 어마어마하게 큰 사이즈로 준다. 게다가 그리스어를 할줄 알면 보너스도 준다!

  • 오모니아 광장 주변부

모나스티라키와 신타그마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광장으로, 오모니아 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온갖 할렘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관광지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하지만 아테네의 진풍경을 볼 수 있는 곳. 현지인들도 치안이 나쁘기 때문에 저녁 이후의 출입은 도시락 싸갖고 말리는 판이다. 그리스는 매춘이 합법이기 때문에 해질 무렵이면 직업여성들도 많이 서성거린다.

  • 새벽시장(Η Λαϊκη Αγόρα)

고대에는 아고라 유적지가 시장역할을 했지만 현대 아테네인들의 재래시장은 바로 이곳이다. 오모니아 광장과 신타그마 사이에 형성되어있는 시장으로 아테네인들의 주된 먹거리들을 저렴하게 살 수 있다. 다만 현지인 시장이라 영어는 잘 통하지 않으며 여느 재래시장이 그러하듯 흥정은 필수다. 상인들이 친절해서 사진찍을 때 포즈도 취해주고 궁금한 걸 물어보면 이것저것 친절하게 대답해준다. 또한, 시장에서 사방간데에서 뿜어나오는 담배연기와 근처 식당에서 나는 음식 냄새를 동시에 맡을 수 있는 진귀한 체험도 할 수 있다.

  • 모나스티라키 주변부

위 본문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카페와 타베르나(식당), 기념품/골동품 상점들이 모여있는 나름대로 활기찬 거리이다. 파르테논 신전과 헤파이스토스 신전이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 아테네에서도 분위기가 그나마 괜찮은 편. 특정 날에는 헤파이스토스 신전 부근에 길거리 시장이 들어서기도 한다.

  • 수니오(Το Σούνιο)의 포세이돈 신전

아테네에서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곳으로, 오모니아 인근의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정도 가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신전이 덩그러니 올라 있는 그림 같은 광경에다가 해질 무렵에 가면 정말로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다. 이곳은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기 위해 출항할 때 "자신이 살아서 돌아오거든 흰 돛을, 죽으면 검은 돛을 하고 오겠다." 라고 말하고 출발했는데,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귀환할 때 깜빡 잊고 돛을 바뀐다는 것을 잊어버렸다가 검은 돛을 본 그의 아버지, 혹은 부인이 이곳에서 투신해 죽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인근에 고대 아테네의 돈줄이었던 라브리오(Το Λαύριο) 은광이 있는데, 아직도 이곳에서 자원을 캐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생선요리가 유명하기 때문에 아테네인들이 자주 찾는다.

6. 역사

그리스의 역사
Η ΙΣΤΟΡΊΑ ΤΗΣ ΕΛΛΆΔΑ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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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top:-4px;margin-bottom:-4px; margin-left:-11px; margin-right:-11px;"

선사

고대

미노아 문명

미케네 문명

암흑시대

고졸기

아테네

헬레니즘 제국
(안티노고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로마 제국

스파르타

마케도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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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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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라틴,
이피로스, 트라페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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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공화국

그리스 왕국
글뤽스부르크 왕조

제2공화국

그리스 왕국
글뤽스부르크 왕조

그리스국

현대

그리스 왕국
글뤽스부르크 왕조

군사정권

제3공화국

}}}}}}||

6.1. 도시국가 아테네

"그들을 이끌어가는 이는 누구이며, 그들의 군대를 지배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들은 노예로 불리지도 않고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사옵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아이스킬로스, <페르시아인> 중에서}}}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국가.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이자, 철학의 도시, 고대 그리스 문명의 꽃이자 유럽 문명의 요람이다. 아테네에서 절정을 이룬 그리스 문명은, 이후 로마와 중세유럽, 근현대 유럽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계몽주의자들이 그리스의 유산을 망각했다고 신나게 디스하던 중세인들도, 실은 극렬한 아테네빠들이였다.

6.1.1. 페르시아 전쟁 이전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모든 것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겠지만, 오로지 ‘나무 성벽'만은 파괴되지 않으며 그대들을 지키리라.”

{{{#!wiki style="text-align:right"

델포이의 신탁, 아테네인들에게}}}

아테네의 고대 그리스어 도시 명칭은 아테나이(=아시네)[12]로 아테나 여신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테베, 미케네, 델피처럼 문법상 복수형으로 되어있는 것. 신화에 따르면 이 도시가 생길 때 포세이돈과 아테나가 각자 수호신이 되고자 했는데, 둘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자 한 신이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주는 쪽이 수호신이 되도록 하자고 제안하여 두 신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포세이돈은 시민들에게 호수를 하나 선물해줬는데, 짠 물이라 마실 수가 없었다.[13] 반면에 아테나는 시민들에게 올리브를 선물했으며 결국 아테나가 이겨서 도시 이름이 아테네가 되었다는 신화가 있다. 오늘날에도 아테네와 주변 지방은 올리브와 포도로 유명하다.

그리스 신화에는 테세우스가 왕이 된 도시로 언급되고 다양하게 등장할 정도로 미케네 문명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유서 깊은 도시. 하지만 실제로 미케네 문명 시기에 아테네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듯 활약했을 가능성은 극히 미미하다. 아테네의 극작가들은 그리스 신화를 각색해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거나 자신들이 칭송하고 싶은 것의 명성을 드높이는 것을 일상적으로 수행했고, 특히 아테네와 민주주의에 관련되어서는 더더욱 그러했기 때문. 덕분에 그리스 신화에서의 테세우스의 행적은 아무리 계산해도 다른 영웅들에 관한 행적에서 시간대가 도저히 안 맞는다거나 하는 식의 설정구멍이 유별나게 많다. 이런 것들 중 압권은 역시 아테네의 평등과 민주주의는 테세우스시절부터 비롯되었으며, 테세우스는 왕인 동시에 민주주의의 창시자이며 수호자이고 아테네 해군의 창시자라는 칭호를 얻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어쨌든 트로이 전쟁 관련으로는 언급이 거의 없을 정도로 미케네 문명 시기에는 중소도시였으나,[14] 미케네 문명이 몰락한 후의 이른바 그리스 암흑기 무렵에는 쫄딱 망했다가 고전기에 들어와 재건된 스파르타, 테베 등 다른 도시와는 달리 암흑시대에도 도시가 붕괴하지 않고 유지된 특이한 케이스. 그래서 고대 아테네인들은 여기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15] 서기전 7세기 정도에 사실상 귀족정인 왕정이 시행되었느나 왕의 존재가 거의 의미가 없어 곧 9명의 집정관이 통치하는 귀족정으로 변모했다. 관습법 체제로 귀족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던 국정에 불만을 품은 아테네 민중들의 정치개혁 요구에 드라콘이 서기전 621년 성문법 체제를 갖추었으나 이는 사형을 남발하는 가혹한 법이라서 민중들의 불만을 더욱 샀다. 그러던 중 조정자 솔론이 집정관이 되어 금권정치를 시작하여 평민들에게도 일부 참정권을 주는 등 정치개혁을 하였으나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불만을 사고 결국 물러났다. 이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곤봉잡이라 불리는 정치깡패들을 거느리고 권력을 잡아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적 제전과 토목공사를 통해 민중영합적인 정치를 펼쳤다. 이 시기를 참주정이라 부르는데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은 이후 그의 아들이 히파르코스와 히피아스가 권력을 물려받았으나 히파르코스는 암살되고 히피아스는 축출당했다. 다시 귀족과 민중 간의 갈등이 이어지다 서기전 508년클레이스테네스가 집권하여 기존의 4부족 체제에서 데모스라 불리는 10부족 중심의 행정을 개편하고 500인회와 민회를 설치하였으며 도편추방제를 도입하는 등 정치 개혁을 실시했다. 솔론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의 7현인 중 한 명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하지만, 보다 중요한 민주정의 기틀을 마련해준 클레이스테네스는 덜 유명한 편으로 그의 정확한 생몰년도도 알려져 있지 않다.[16]

다만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다른 그리스 폴리스의 정치체계와 그렇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당시 그리스에서 병사의 대부분이던 호플리테스(Όπλητης, 그리스 중장보병)들의 참정권이었다. 원래 전쟁터를 독무대로 삼던 귀족 출신의 기마병(Ίππεῖς, 히페이스, 그리스어로 '기병')과는 반대로 호플리테스들은 중산층인데, 그 수가 많다보니 전쟁에서도 기마병을 압도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시민들의 권위가 귀족에 꿀리지 않게 되어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것이 그리스 전체의 추세였다. 이런 추세의 극단적인 사례가 아테네와 정 반대로 언급되는 도시국가 스파르타이다.[17] 그래서 이 시점까지는 아테네의 정치는 돈이 있어서 중장보병의 무장을 갖출 수 있는 중산층만이 참여 가능한 것이었으며, 아테네 군사력의 핵심과 사회의 핵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시대의 아테네를 대표하는 전투가 바로 마라톤 전투이다.

경제적으로는 솔론의 개혁 전에는 무식하게 산지에다가 농사를 지으려고 했다가 후에 상공업으로 분야를 바꾸며 번창해갔다. 여기는 땅 파면 돌이 나오는 동네다. 하지만 아테네를 대표하는 해군이 대규모로 편성되고 당대 세계 최고의 해운국가가 된 것은 테미스토클레스의 함대 구축과 페르시아 전쟁 이후. 본래 아테네는 내륙의 육상국가였고, 이 시기 라이벌이었던 아이기나 섬의 해군에 탈탈 털리던 수준이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해군력 증강을 계속 주창했으며, 아테네의 외항인 피레우스 항구의 항만 시설을 확충하고 아테네를 함께 보호하는 장성을 쌓는 것을 주장하는 등 끊임없이 노력했으나 실패해왔다. 하지만 아테네 인근의 라우리움 은광에서 갑작스럽게 대박이 터지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자금으로 아테네 함대를 건설하자고 제안한다. 델포이의 신탁에서 아테네를 마지막까지 수호하리라 예언된 나무 성벽이 이렇게 건설된 아테네 목제 갤리선 함대를 의미한다는 것. 이 제안이 민회에 받아들여져 200여 척으로 편성된 아테네 함대가 탄생하게 된다. 이것은 크세르크세스 1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다시금 그리스를 공격하는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6.1.2. 민주주의의 탄생

"우리의 정체가 민주주의로 불리는 까닭은 권력이 민중 모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도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합니다. 누군가를 다른 사람에 앞서 공직자로 뽑는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특정 계층의 일원인지보다는 실제적인 능력을 중시합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페리클레스.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몰자 추도연설 中}}}


"감히 말하건대 빈자와 평민이 명문거족을 눌러 이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함선들을 추진시키고 도시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평민이 아니던가?"

{{{#!wiki style="text-align:right"

크세노폰.}}}


사실상 강자는 그들이 할 힘이 있는 것을 하는 것이며, 약자는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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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스의 대화아테네의 발언.}}}

이렇게 편성된 아테네 함대는 페르시아 전쟁의 진정한 주역이 된다. 아테네 함대는 아르테미시아 해전에서 효과적으로 페르시아 함대를 저지했지만, 육상의 테르모필레 전투의 패전 이후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로 진격, 요새화된 아크로폴리스를 제외한 아테네 전역을 초토화한다. 하지만 이미 아테네인들은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한 상황이었다. 그리스 연합함대의 실질적인 사령관 테미스토클레스는[18] 크세르크세스 1세를 유인, 페르시아 함대를 살라미스 섬으로 끌여들여 격멸시키는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를 이끌어낸다. 이후 아테네 함대는 미칼레 해전에서 승리해 제해권을 장악하고, 스파르타를 위시한 여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플라타이아이 전투 이후 페르시아 전쟁에서 사실상 이탈했음에도 아테네 단독으로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을 지속해 나간다. 아테네는 이오니아의 도시국가들을 모두 페르시아로부터 해방시켰고, 그들을 아테네 중심의 군사동맹인 델로스 동맹에 가입시켜 영향력 아래에 두었으며, 막강한 해군력으로 페르시아를 위기에 몰아넣는다.

일개 도시국가가 페르시아 제국을 위기에 몰아넣는다는 것이 과장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의 의미다. 아테네 함대는 흑해와 동지중해 전역을 제압하다시피 했으며, 크레타 섬, 키프로스 섬, 아나톨리아 해안가 전역, 심지어 이집트까지 공격했다. 이집트는 키루스 대제와 달리 캄비세스 2세가 폭압적으로 점령한 이후로 계속 페르시아 제국에 적대적인 땅이었고, 아테네 함대는 이집트의 반란군과 연합해 페르시아를 이집트에서 몰아내기 직전까지 밀어붙이기까지 한다. 결국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이이제이의 전략으로 스파르타를 매수해 아테네를 격퇴하려고 시도한다. 결국 페르시아와의 전쟁 와중에 스파르타와 그에 내통한 아테네의 귀족, 부유층과 스파르타의 해상 동맹국들이 승천하는 아테네를 경계해 아테네를 공격하나, 아테네는 그들 모두를 격퇴하고 승리하는 가공할 포스를 보여준다.[19]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이런 이이제이를 통해 시간을 벌어 이집트의 반란을 제압하고 아테네의 이집트 원정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하지만, 스파르타를 격파한 아테네 함대가 다시 이집트로 돌아와 또 페르시아 함대를 궤멸시켜버린다. 결국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더 이상의 소모를 피하기 위해 에게 해, 헬레스폰토스 해협, 마르마라 해,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테네 제해권을 인정하고 페르시아 함대를 파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는다. 페르시아 전쟁은 이렇게 아테네의 승리로 끝났다.

아테네는 제해권을 바탕으로 하여 그리스를 통틀어 최대, 최강의 도시로 발돋움하게 된다. 아테네의 상공업은 이러한 제해권을 바탕으로 급격히 팽창했으며, 지중해 전역에 아테네의 상업 교역망이 미치고 수공업 제품이 팔려나갈 정도의 발전을 보였다. 이런 경제적 팽창을 기반으로 아테네의 인구는 급증해 흑해 북쪽의 현재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곡물을 수입해 올 정도의 거대 도시로 성장한다. 또한 아테네 무적함대는 아테네가 역사상 처음으로 그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20]이 참정권을 얻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를 이루는 근간이 된다. 이유는 당시 해군을 구성하는 갤리선 함대를 운영하려면 테테스라 불리는 무산자, 빈민들 역시 노잡이로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테테스들은 해군력 유지에 끼치는 공적을 내세워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넓혀 갔고, 참정권을 얻는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시행해간다.

이 이전까지의 아테네는 평민들은 실질적으로 아콘(=집정관)과 장군 등의 고위직이 될 수 없었다. 중장보병 수준의 소득을 가진 이들조차 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재산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무산자 테테스들은 500인회에 소속될 수조차 없었다. 실질적으로 아테네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극소수 부유층뿐이었고, 중장보병이 될 수 있는 중산층조차 제한적인 영향력이 있었으며, 무산자 테테스들은 입법, 행정, 사법 등의 모든 영역에서 사실상 배제된 상태였다. 실질적으로 아테네를 지배하는 것은 아콘을 역임한 부유층 시민으로 구성된 아레오파고스 300인 귀족 과두의회였다. 이러한 현실은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 군사력의 중핵이 된 무산자 테테스들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들은 에피알테스를 중심으로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 무혈혁명을 추진해나간다. 에피알테스는 아레오파고스 의원 개개인에게 직권남용죄를 고소해 법정에 세워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귀족회의의 권한과 특권을 500인회, 민회, 시민법정으로 분산시켜나갔다. 또한 아크로폴리스의 격리된 곳에 숨겨져 있던 아테네 법률의 석판을 공개된 아고라로 옮겨 모든 시민이 법률을 읽고 참조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법치주의적 시도를 일으킨다. 결국 아레오파고스 귀족의회는 살인사건과 아테네의 신성한 올리브나무에 관한 범죄에 대한 재판권만 갖는 유명무실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렇게 인류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무혈 혁명을 이끈 에피알테스는 귀족들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암살로 최후를 맞는다.

하지만 에피알테스가 죽었어도 민주주의는 죽지 않았다. 에피알테스를 이어받은 페리클레스는 배심원과 공직에 대한 보수지급을 통해 부유층이 아니더라도 공직을 수행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만들었으며[21] 아테네의 민회, 500인회, 시민법정 등에서 재산을 통한 제한을 철폐시켜, 모든 시민은 단 한푼의 재산도 갖지 못한 무산자 테테스라 할지라도 아테네의 모든 민주적 시스템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또한 다른 시민들의 투표를 통해 아콘과 장군이 될 자격을 보장받게 했다.[22] 이를 통해 아테네 민주정이 완성되었으며, 민주정으로 인해 아테네는 다른 국가와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민주주의 시스템을 통해 아테네의 정치는 여론과 시민의 지지를 통해 이뤄지며 다른 국가와 차별화되었다. 또한 민주주의로 확립된 시민 모두가 아테네의 주인이라는 인식은 아테네인들의 긍지가 되었고, 전장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6.1.3. 그리스의 학교

"아테네 전체가 그리스의 학교이며, 사람들은 그곳에서 제각기 아주 다양한 형태의 삶을 펼쳐 가며 매우 품위 있고 유연하며 자족적인 시민으로 길러져 사회로 배출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 행동으로 이루어낸 진실이라는 것은 우리의 자유로운 삶의 방식들을 통해 획득한 아테네의 힘이 바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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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클레스,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몰자 추도연설 중.}}}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하고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로 이어지는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아테네는 황금기를 맞는다. 아테네는 인구 20만~30만에 달하는 당대 최대이자 최고의 도시였으며, 그 중 4~5만명의 성인 남성들이 시민권을 인정받아 자산규모와 상관없이 민주주의에 참여하고 아테네의 국력의 혜택을 얻었다. 아테네 함대는 흑해의 우크라이나에서 이집트, 리비아에서 나폴리에 이르는 영역까지 제해권을 지니고 활발한 물류 유통을 이끌었다. 아테네인들은 우크라이나의 밀을 주식으로 삼았고, 리비아의 약초로 병을 치료하며, 상아와 가죽으로 몸을 치장했고, 이집트의 파피루스에 글을 적고 범포로 옷을 지었으며, 크레타 섬의 삼나무로 신상을 조각하고 시리아의 향수를 쓰며 카르타고의 카펫과 방석에 몸을 기대고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의 청동 램프로 불을 밝혔다.

이러한 물적 자산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아테네는 최고조를 달리고 있었다.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등의 그리스 3대 비극작가들이 아테네를 빛냈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을 통해 모든 무지와 미신을 풍자했다. 최초의 역사가들로 언급되는 헤로도토스가 아테네로 찾아왔으며 투키디데스가 성장해가고 있었다. 소피스트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회의론적 접근과 상대주의를 주장했다. 종교의 자유가 있었고 어떤 신을 믿든 관용을 베풀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역사상 처음으로 과학적인 접근을 의학에 시도했으며, 밀레토스의 히포다모스는 피레우스의 외항에 계획도시를 설계해 건설했고, 피디아스원근법을 이용해 파르테논 신전의 외견을 보다 완벽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페리클레스는 아낙시고라스로부터 일식의 원리를 배워 일식에 두려워하는 선원들을 달래며 과학미신을 이겨야 한다는 신념으로 동료 아테네인들을 이끌었다. 아테네 정부는 정치학, 수사학, 철학과 여타 학문들을 시민들에게 거의 무료로 제공했다. 심지어 다소 노골적일 수도 있는 아테네와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견해 역시 자유롭게 발표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젊은 시절부터 노인이 될 때 까지 어린 플라톤을 비롯한 제자들과 어울리며 남긴 대화로 증명된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말처럼 그리스의 학교였을 뿐 아니라 서구 문명의 요람이었다.

페리클레스는 델로스 섬에 있던 델로스 동맹의 금고를 아테네로 이전했고, 동맹국들의 공납금을 통해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완전히 파괴되었던 아크로폴리스를 재건했다. 여기서 파르테논 신전과 아크로폴리스의 성문 프로필라이아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적인 건축을 남겼다. 이러한 건축은 예술적인 측면 외에 실용적인 면도 갖추고 있었다. 피디아스가 파르테논 신전과 함께 만든 금과 상아로 만든 아테나 여신상은 신전 건물 서쪽의 특실에 보관된 델로스 동맹의 금고를 지키는 역할을 했다. 페리클레스는 필요하다면 녹여서 함선이나 무기 구입에 쓸 수 있도록 여신상과 신전의 금도금도 제거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아테네와 외항 피레우스는 장성을 통해 견고하게 둘러싸져 방어되었으며, 이 강력한 성벽은 아테네 무적함대가 외부로부터의 식량 공급을 지켜내는 한 무너지지 않을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를 통틀어 장기간의 공성전을 수행할 역량을 가진 국가는 아테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아테네 시민 모두가 소소한 나랏일에 이르기까지 참여했다. 이러한 투표는 에클레시아(=민회)라고 불리는 대규모 집회[23]에서 치뤄졌는데, 국가의 중대한 사항은 전부 이 집회에 회부되었고 이 모든 것이 투표를 통해 결정되었다.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은 수준 이하의 법안이 통과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과거의 귀족적 제도라도 필요하다면 존속시키는 관용을 발휘했다. 에클레시아에 법안이 통과되기 이전에 불레라고 불리는 500인회의에서 법안을 준비했고, 준비된 법안이 평가된 이후에 에클레시아에 제시되는 심의과정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 했다. 민회와 500인 회의가 입법권을 관장했다면, 행정권은 10인의 스트라테고스[24]내각을 구성해 빠르고 효율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사법권 역시 시민 배심원들 600명으로 구성된 시민법정이 관할했다. 그리고 독재를 막기 위해 스트라테고스를 제외한 모든 관직은 추첨을 통해 배분되었으며, 행정을 관할하는 10인의 스트라테고스는 실력에 의해 선출했지만 그 임기는 1년이었다.

아테네의 부와 강력한 해군,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통해 얻은 명분, 화려한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아테네가 당대 그리스의 헤게모니를 쥐는 근본적인 요인이 되었다. 페르시아 전쟁 초기의 경우 그리스 도시국가 중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스파르타가 연합군 총사령관직을 맡는 등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지만, 플라타이아이 전투 이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사실상 방관하고, 오히려 홀로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아테네를 공격하기까지 한 것에 반해 아테네는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가면서도 페르시아가 페르시아 전쟁의 발발 원인이던 이오니아의 도시국가들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승인할 때까지 전쟁을 수행했으며, 이는 아테네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성장과 함께 자연스럽게 헤게모니가 아테네로 옮겨가게 된 요인이었다. 초기 동맹국들이 아테네와 함께 군사력을 부담하던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 함대의 질이 압도적으로 상승함에 따라 동맹국들이 전쟁비용을 부담하는 형태로 바뀌어갔고, 이런 변화를 통해 아테네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더욱이 아테네의 민주주의 체제는 다른 도시국가들의 중산층과 빈민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아테네를 본받아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도시국가들은 아테네의 충실한 동맹국이 되었으며, 그렇지 않은 과두정 지배자들도 아테네와 정면으로 적대했을 경우 자국의 중산층과 빈민의 반란을 각오해야만 했다.

6.1.3.1. 아테네 민주주의의 비판자들

"요새에서 내려온 당신들에게 조언하겠습니다. 당신들이 누구인지 똑똑히 아십시오. 당신들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이유조차 내게 기대하고 있다면, 당신들은 스스로가 누구인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당신들은 무슨 이유로 우리를 다스리려 하는 겁니까? 당신들은 더 정의로운 주장을 할 수 있습니까? 민중(데모스)은 비록 그들이 당신들보다 가난할지라도, 한 번도 돈을 위해 당신들에게 정의롭지 못한 일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우리들 중 누구보다도 부유한 당신들은 이익이 된다면 우리 민중들을 희생시키면서 어떤 파렴치한 짓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정의는 당신들 편에 서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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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시불로스, 민주주의를 되찾고 반민주주의자와 스파르타 지지자들에게.}}}

하지만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해 극렬히 반대하고 저항하는 이들 역시 존재했다. 그들은 아테네와 민주주의에 대한 수많은 비난을 기록들 속에 남겼고,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비난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의 전진은 이전까지 아테네를 지배하던 귀족계급을 붕괴시켰고, 귀족들은 신분적 특권을 모두 상실하며 그저 부유할 뿐인 일개 시민으로 무산자들과의 평등을 감내해야 했다. 귀족의 후예임을 자부하며 스스로의 별 근거 없는 우월성을 믿는 부자들은 아테네의 빈민 테테스들이 자신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도저히 견디지 못했다. 그들의 공격 목표가 된 것은 민주주의와 해군이었다.

과거에 귀족이었던 부유층이 민주주의에 대해 적대감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해군에 대한 증오도 당연했는데, 이미 그 시점에 테테스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증하는 것이 아테네의 해군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아테네 함대의 총기함 파랄로스 호[25]의 선원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열렬한 민주주의자로 군주참주, 과두정의 기미가 보이는 어떤 제안에도 반대했으며, 이 때문에 파랄로스 호민중의 몽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페리클레스가 둘째 아들의 이름을 파랄로스로 지어 해군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보여 줄 정도였다. 부유층들은 물질적인 이유로도 함대를 증오했는데, 선박 건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공적 기부제(leitourgia)는 일종의 누진세로, 테테스가 함대 승무원으로 복무하고 함대 비용은 부유층이 납부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테네의 함대와 해운업의 발달로 인해, 아테네 주변의 소작농들은 얼마든지 아테네의 테테스가 되어 노잡이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아테네 인근지방의 토지를 소유한 부유층은 이전처럼 소작농들에 대한 인신적 지배를 시도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부자와 구 귀족층들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제공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해군증강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한 아리스테데스는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당해 악명 높은 도편추방을 당한 바 있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다시 아테네로 복귀해 테미스토클레스 이후의 아테네 함대사령관에 취임하기도 했고, 테미스토클레스를 몰아붙여 도편추방으로 복수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키몬, 니키아스, 알키비아데스 등은 아테네 정계에서 얼마든지 활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테테스들은 부자들이 원하는 것처럼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고, 에피알테스, 페리클레스, 클레온, 트라시불로스 등으로 이어지는 민주파 지도자들은 역량에서 과두정을 원하는 지도자들을 압도했다. 또한 부유층이 주장하는 별 근거 없는 엘리트, 귀족, 부자 우월론은 아테네의 대중들에게 당연히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고, 대중적 영향력이 필요한 극작가, 웅변가, 교사, 정치가 등은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테네는 전근대 사회에서는 극히 예외적일 정도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고, 부유층들은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공격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부유층이 저술활동을 통해 후일 아테네를 대표하는 철학자역사가들을 배출해냈으며, 그들이 한 비난이 지금껏 아테네에 돌아가게 된 것. 대표적으로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민주파 지도자였던 클레온을 맹렬하게 비난하고, 자신이 지지하던 니키아스를 찬양했지만, 사실 클레온은 스파르타의 지상군과의 정면 승부에서 승리하고 전설적인 스파르타 정예군을 다수 포로로 잡아 스파르타를 굴욕적인 평화협상으로 이끌어냈고, 니키아스는 아테네를 거의 망하기 직전까지 몰아넣은 시라쿠사 원정의 변명할 여지없는 최대 최악의 책임자. 물론 투키디데스가 가치판단과는 별개로 사실에 대해서는 정확한 서술을 했으니 이런 재평가도 가능한 거지만. 플라톤은 아테네 시민들을 보고 "정치가 오락이라도 되는 양 즐겨본다"고 비난하고, 철인정치를 지지하며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아테네 민주주의에 있다고 몰아붙였지만, 사실 소크라테스는 늙을 때까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고, 플라톤이 열렬히 옹호하는 그의 외삼촌 카르미데스와 당숙 크리티아스가 매국노 독재자가 아니었다면 소크라테스는 죽기는커녕 재판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플라톤 본인도 아테네가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가 있어서 마음껏 아테네를 깔 수 있었다.

사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당대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별달리 부족한 면을 보인 적이 없다. 물론 큰 오판도 여럿 저질렀다지만, 과두정 지배하의 다른 도시국가나 전제군주정 페르시아 제국 역시 큰 오판을 여럿 저지른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테네 민주주의의 장점은 당대의 다른 국가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잘 드러난다. 아테네가 민주주의를 통해 얻어낸 소속감으로 말 그대로 멸망 직전의 위기에서 모든 시민이 모든 것을 헌신해 아르기누사이 해전의 승리를 얻어낸 것과 같은 성과는 다른 국가들은 보여주지 못한 것이었다. 아테네가 제해권을 쥐고 동맹국들에게 패권주의를 강요했다는 비난은 많지만, 아테네의 이오니아 지배는 당대의 다른 국가들보다는 분명히 관대하고 효율적인 것이었다. 페르시아의 지배는 이오니아의 반발로 인해 붕괴되었고, 스파르타는 그 폭압적인 지배로 인해 아테네를 굴복시키고도 이오니아를 얻지 못했지만, 아테네는 몇 번이고 붕괴한 델로스 동맹을 재건시킬 수 있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가 동맹국을 제압할 군사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델로스 동맹은 유지될 수 있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현대 민주주의와 비교할 경우 의미를 갖지만, 이 역시 과다한 경우가 많다. 물론 아테네가 여성참정권이 전혀 보장되지 않았고, 이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는 점은 분명한 아테네 민주주의의 한계라고 볼수도 있다. 그러나, 빈민 및 무산자 계급이 민주적 권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은 아테네 힘의 핵심이였던 해군에 합당한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였다.[26] 여성참정권은 산업혁명으로 기계문명이 발달하여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담당했던 집안일등의 부담이 줄어들어 여성들도 사회에 참여할수 여지가 생긴 20세기에나 겨우 얻어낸 성취라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한계라기보다는 당대 기술의 한계로 봐야 할 것이다. 또한 노예제도 역시 아테네 민주주의의 한계이나, 이는 일반적으로 과장된 비난이 많다. 우선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노예주들의 민주주의라는 비난이 있으나,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무산자 테테스, 당연히 노예도 소유하지 않은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리고 아테네는 아르기누사이 해전 이후에 참전 노예들을 해방하고 시민권을 지급했으며, 트라시불로스는 민주주의를 회복한 이후 아테네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모든 노예들을 해방하고 시민권을 지급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다수의 노예를 소유한 부유층의 반발로 트라시불로스의 구상은 실패했지만, 아테네 민주주의 역시 노예를 당연시한 것도 아니고, 이를 개선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쉽게 무시되는 부분이다.

또한 외국인미성년자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도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외국인의 경우 지방자치제도의 일환으로 거주민에게 지방선거에서 투표권을 주는 정도이며, 미성년자의 기준은 점차 내려가는 추세지만 어쨌든 일정 연령 미만의 인구를 성인이 아닌 것으로 취급하여 투표권을 주지 않는다는 원칙은 어떤 나라에서도 불변이다. 아테네의 경우 아테네 시민권자의 요건을 부모가 모두 아테네 시민일 경우에 한정시킨 페리클레스의 법률을 들어 외국인에게 폐쇄적이었다고 비난하는 경우가 잦지만, 이는 극히 짧은 기간에만 적용되거나 사실상 적용되지 않은 법률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테미스토클레스만 해도 어머니가 아테네 시민이 아니었고, 페리클레스의 시대에도 아테네로 귀화한 외국인 철학자, 예술가는 많았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반기에는 아르기누사이 해전에 참전한 이들은 외국인, 노예를 불문하고 시민권을 지급했고, 아테네에게 마지막까지 동맹의 신의를 지킨 모든 사모스 섬 주민 전원에게 아테네 시민권을 지급하는 등의 일이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모든 성인 남성 자유민에게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준다는 것 만으로도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19세기 후반의 미국이나 유럽의 민주주의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27]

6.1.3.2. 아테네 민주주의의 문제점

하지만 이러한 옹호와는 별개로, 아테네의 민주주의에도 근본적인 약점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통치에 적합한 능력'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이었다. 이는 플라톤의 비판점이기도 하다.

통치자를 뽑는 아테네의 방식을 살펴보면 이 문제점은 명백해진다. 플라톤의 관점에서든 현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든, 통치자는 능력에 따라서 판별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어린 시절부터 똑같은 출발선에서 개인들을 교육시켜, 성장한 후에 적합한 소수를 판별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또한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선거를 통하여, 능력이 있는 소수를 판별해내려고 한다. 선거는 물론 간접민주주의를 잘 보여주는 제도이지만, 동시에 명백하게 통치에 적합한 소수를 긍정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현대 민주주의는 '능력의 긍정'이라는 점에서는 플라톤주의적이다.

이번에는 아테네 민주주의를 살펴보자. 아테네는 '소수가 가지고 있는 통치 능력'을 극단적으로 배격하였고, 통치자를 추첨으로 뽑았다. 모든 시민이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추첨을 통하여 공평하게 돌려먹자는 것이다. 플라톤이 비판하는 것도 이것이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중우정치로 변형될 위험이 있는 차원을 뛰어넘어, 중우정치라는 개념을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 있는 사람을 판별하여 권력을 맡기겠다는 의지도 없었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와의 비교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이 아니라, 당대의 기준에서도 명백한 문제점이었다. 아르기누사이 해전 이후의 광기는, 비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라고 변호할 수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아르기누사이 해전처럼 그로기 상태의 도시에서 시민들이 최후의 힘을 짜내어 기적을 만들어낸 사례는 비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있다. 당장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 시민들의 사례를 보자.[28] 이 반론이 부당하다면, 같은 원리로 아테네가 해전 이후 장군들에게 보여준 광기도 아테네 민주주의의 특성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물론 아테네 민주주의가 현대 민주주의와 비교할때 가지는 장점도 있기는 있다. 아테네는 성인 남성 시민의 수가 30,000명 밖에 안되었으며 도시국가였다. 때문에 현대 국가와 비교한다면, 직접 민주주의의 요소가 상대적으로 더 드러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도시국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한 도시의 공간적 한계에 얽매일 수 밖에 없었다. 아테네 시민들 역시도 인구가 늘어날수록 모든 시민의 의견을 일일이 반영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때문에 오늘날의 대의 민주주의처럼, 아테네 역시도 소수의 개인들에게 권력을 부여하려는 시도하여 이를 보완하기는 했다. 그러나 '통치 능력의 차이'라고 하는, 인간에게 분명히 존재하는 사실들을 부정하였기에, 통치자들을 시민 중에서 추첨으로 뽑는다는 (당대 기준으로 볼때도) 논란이 일어나는 결론이 도출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아테네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를 몰랐다는 점에 문제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통치 능력의 차이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문제점을 보여주었다.[29]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하여 공격할때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오류는, 현대 민주주의와 비교하여 아테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는 점이다.[30] 하지만 반대로 현대의 옹호자들은, 현대 민주주의와 연결하여 아테네의 문제점을 덮으려 하는 오류를 쉽게 범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아테네는 '통치 능력'의 차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이 차이점을 무시하는 것은, 마치 전제군주정과 입헌군주정을 '군주정'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억지로 묶는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현대 민주주의는, 아테네 민주주의를 계승하되 성문화된 헌법을 도입하고 플라톤의 비판(타고난 재능에 차이가 있으므로 예술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거나 과학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거나 하는 것과는 달리 정치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을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아테네 민주정은 '단순 다수정'의 의미인데 반해, 현대 민주정은 '혼합정'을 지지한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즉 국가권력을 삼등분하여, 행정부는 군주적 성격의 1인 지도자가, 입법부는 (고전적 의미에서) 민주적인 국민 대표들이, 사법부는 철저한 검증을 거친 소수 엘리트들이 이끈다는 점에서 아테네식 민주정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즉 행정부는 군주정에, 입법부는 아테네식 고전 민주정에, 사법부는 귀족정에 바탕을 둔 것이 현대 민주정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이러한 혼합정은 로마 공화국이 아테네의 체제를 보완하여, 정치 체제를 민주정 요소(민회), 귀족정 요소(원로원), 군주정 요소(집정관)로 구성한 것에 기원을 둔다.

6.1.4. 펠로폰네소스 전쟁

사람으로 태어난 몸은 조심스럽게 마지막 날을 기다릴지니, 그 어떤 괴로움도 당하지 않고 삶을 끝내기 전에는 세상의 누구도 행복하다 부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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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 코러스 중에서.}}}

페르시아 전쟁으로 성립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동맹은 파탄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페르시아 전쟁 도중 아테네가 스파르타의 공격을 격퇴한 이른바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후 30년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고,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각자의 세력권을 존중한다는 평화조약 속에서 어느정도 평화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에피담노스 분쟁(기원전 436~ 433)으로 이러한 평화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서북쪽 변방에 위치한 식민도시 에피담노스의 두 파벌을 코린트와 코르키라(코르푸 섬)가 서로 지지하면서 발생한 이 분쟁에서 아테네는 소극적이나마 코르키라의 편을 들었고, 그 결과 코린트는 다시 원한을 품게 된다. 또한 이전 전쟁에서 마지막에 아테네를 배신했던 보복으로 메가라에 대해 경제적 금수조치를 취하자 스파르타도 본격적으로 개입, 아테네에 이러한 조치를 취소할 것을 요구한다. 아테네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스파르타는 다시 전쟁을 결의한다.

페리클레스가 이끄는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비해 국력과 동맹의 견고함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고, 이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전략을 세운다. 성벽으로 보호받는 아테네와 외항 피레우스에 인근 지역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아테네는 지상전으로는 수성전으로 일관해 강력한 스파르타 육군과의 정면 승부를 피하며, 아테네 해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봉쇄, 스파르타의 취약한 경제력을 압박하고, 스파르타 동맹국들을 고사시켜 스파르타의 동맹을 무너뜨리고, 전쟁 수행능력을 상실시킨다는 전략이었다. 아테네에 밀집한 인구는 우크라이나에서까지 식량을 수송해 올 수 있는 아테네의 함대가 얼마든지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론상 최강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의 합리주의와는 별개로, 그 시대에는 전염병과 방역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부족했다. 페리클레스의 전략에 따라 아테네 인근의 인구는 모두 성벽으로 보호받는 좁은 곳에 밀집했기 때문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 대역병으로 발전하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점을 알지 못한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식량을 수송해 온 함선에서 흑사병으로 추정되는 대역병이 아테네로 퍼지기 시작했고, 이 역병의 결과 아테네는 주민의 1/3 가까이(대략 7~8만의 시민들)를 상실하는 끔찍한 타격을 입는다. 더 이상 아테네는 압도적인 재정의 힘을 믿을 수 없었고, 인력을 동원하는 것조차 위태로웠으며, 그들을 이끌던 페리클레스 역시 자신의 전략의 실패로 실각하고 역병으로 사망한다. 그리스 비극의 최대 명작이라 불리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이렇게 위기에 처한 아테네를 그려내고 있다고 평해진다. 합리주의의 신봉자였던 페리클레스를 오이디푸스에 비기고, 대역병에 신음하던 아테네는 오이디푸스로 인해 역병이라는 징벌에 처해진 테베에 비긴 것. 또한 페리클레스는 이렇게 계속된 견제로 스파르타를 협상으로 이끌려고 했지만, 스파르타는 전혀 그러지 않았고 이 와중에 자신들의 논밭이 불타는 것을 본 시민들에게 계속해서 공격받았다[31].

아테네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전쟁을 계속 해 나갔다. 육상의 공격은 계속 해서 성벽으로 방어하면서 함대를 보내 펠로폰네소스 반도 각지를 타격한다. 스파르타 입장에서는 바닷가에 가까운 지역이면 어디를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지만 스파르타의 억압받던 농노 헤일로타이들이 봉기할 수 있다는 것도 위험 요인이었다. 아테네 함대는 역병 등으로 규모가 줄었음에도 당시 세계 최고의 선원들과 항해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은 77척의 함대로 포르미온이 이끄는 20척의 아테네 함대와 나우팍토스 해전을 벌이나, 아테네의 노련한 승무원들을 적극 이용한 충각돌격 전술에 휘말려 괴멸된다. 이를 계기로 아테네는 제해권을 되찾고 스파르타를 강타하기 시작한다. 명장 데모스테네스는 스파르타 동맹국이었던 암브라키아에 괴멸적인 타격을 가하여 전쟁에서 철수시켰고, 또한 스파르타를 상시적으로 괴롭힐 수 있는 위치(필로스)에 기지를 구축했다.이를 무너뜨리려고 접근한 스파르타 군을 상대로 클레온은 데모스테네스와 함께 경보병 전술로 승리를 거두어 스파르타 정예 중장보병 3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무적으로 여겨졌던 스파르타 군이 무기력하게 항복한 사실은 당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일으켰다.

그러나 테베를 굴복시키고자 했다가 델리온 전투에서 소크라테스가 부상을 입는 등 참패를 당하고,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가 트라키아 일대로 파견되어 암피폴리스를 포함한 그 지역 도시들을 제압하면서 성공적으로 보였던 아테네의 공세는 위기에 처한다. 이 일로 트라키아 지역의 책임자였던 투키디데스가 추방당한다. 이후 이 지역을 다시 제압하고자 파견되었던 강경파의 수장 클레온이 브라시다스와 같이 전사하면서 양측 강경파는 힘을 잃고 온건파인 니키아스의 주도로 평화협정(니키아스의 평화)를 맺는다. 공식적으로는 평화협정을 맺고 동맹까지 맺었지만 이는 표면상의 것이었고, 양측은 전쟁으로 얻은 성과를 포기하고자 하지 않아 평화협정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간접적으로 서로를 공격하고자 한다. 이 시기에 바로 악명 높은 멜로스 공격이 있었다. 소규모 중립국인 멜로스를 '정의는 힘 있는 자가 정하는 것'이며, '약자는 힘 있는 자가 만든 정의에 순응할 때 행복과 안정을 얻을 수 있다.'라는 식의 논리로 굴복시키려 들었지만 이를 거부하자 도시를 점령한 후 모든 남자를 죽이고 여자와 아이를 노예로 팔아버렸다. 이 때 아테네 사절과 멜로스 대표단이 협상한 내용이 바로 유명한 멜로스의 대화이다. [32]

멜로스의 대화는 투키디데스를 통해 전해지는데 그야말로 걸작이다.

아테이인 사절단: 우리는 지금 이를테면 우리가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쳤으니 우리에게는 지배할 권리가 있다든가, 또는 여러분이 우리에게 불의한 짓을 해서 응징하러 왔다든가 하는 따위의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지 않을 것이오. 그런 말을 아무리 장황하게 늘어놓아도 여러분을 설득하지 못할 테니까요.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여러분은 라케다이몬의 이주민이지만 이 전쟁에서 라케다이몬 편을 들지 않았다든가, 우리를 해롭게 한 적이 없다는 말로 우리를 설득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 마시오. 대신 여러분은 우리 양쪽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감안하여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도록 해보시오.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쯤은 여러분도 우리 못지않게 아실 텐데요.

멜로스인 의원들: 여러분이 정의를 도외시하고 득실에 관해서만 논의하자고 하니 하는 말인데, 우리가 보기에는 보편적인 선(善)이라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익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위기에 처한 사람은 누구나 공정한 처우를 받아야 하며, 다소 타당성이 결여된 소명에 의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원칙이 여러분에게도 이익이 될 것입니다. 귀국이 넘어졌을 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심하게 보복하는 것인지 당신들이 남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줄 날이 올 테니 말입니다.

(중략)

멜로스인 의원들: 여러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익이 되듯 우리가 여러분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떻게 우리한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테나이인 사절단: 여러분은 항복함으로써 무서운 재앙을 면하고, 우리는 여러분을 살육하지 않고 살려두는 것이 이익이니까요.

멜로스인 의원들: 여러분은 우리가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적대적이 아니라 호의적인 중립 국가로 남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단 말입니까?

아테나이인 사절단: 용인할 수 없소. 여러분의 호의가 여러분의 적대감보다 우리에게 더 위험하오. 여러분의 호의는 우리가 무력하다는 징표로, 여러분의 증오심은 우리가 강력하다는 증거로 우리 속국들에게 받아들여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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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5.89-95.}}}

또한 알키비아데스아르고스와 아테네의 동맹, 그리고 아르고스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만들어 이를 통해 스파르타를 무력화시키고자 한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중부 도시들인 만티네아, 엘리스 등이 이에 응했고, 스파르타는 북쪽의 다른 동맹국들과 고립되는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라도 스파르타와 동맹인 아테네는 적극적인 지원을 할 수 없었고, 아르고스-만티네아-엘리스 동맹군은 만티네아 전투에서 스파르타에 참패, 새로운 동맹을 통한 스파르타 공략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에 아테네는 다시 시라쿠사를 공격, 스파르타를 고립시키고자했고, 160척의 아테네 직속 함선을 포함한 총 216척의 함선과 4만에 달하는 인력, 4천 5백 탈란트[33]에 달하는 막대한 비용과 데모스테네스, 라마코스, 니키아스, 에우리메돈, 알키비아데스 등의 아테네 최고의 지휘관들을 투입하나, 여러 실책과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의 트롤링 덕에 완벽한 참패를 당한다. 아테네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고,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약화를 노려 아테네가 먼저 휴전을 깼다 주장하며 다시 군대를 일으켰고, 페르시아는 스파르타에 재정과 지상군을 지원한다. 시라쿠사 원정의 실패로 약화된 아테네에서 반항적인 종속국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약화된 민주주의를 전복하고 과두정을 세우기 위해 부유층들이 스파르타와 결탁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테네는 모든 것을 잃었고, 모든 그리스인들은 아테네가 곧 멸망할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테네는 굴복하지 않았다. 쿠데타를 일으킨 과두정 세력에 맞서 사모스 섬에 주둔한 아테네 함대는 민주주의를 지켜낼 것을 결의하고, 아테네 내의 중도파가 이에 호응해 쿠데타 세력을 다시 추방한다. 그리고 아테네는 다시 한 번 반격에 나선다. 가장 중요한 식량공급로를 다시 되찾기로 결의한 아테네는 모든 함대를 동원해 헬레스폰토스로 파견해 스파르타와 맞선다. 키노세마 해전아비도스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는 페르시아의 자금과 지상군 지원까지 받는 스파르타 해군을 연파, 키지코스 해전에서 완전히 전멸시키고, 페르시아군까지도 몰아낸다. 이후 이 지역의 반란 종속국들을 다시끔 제압해 식량수송로를 다시 뚫는다. 그리고 이오니아 일대를 남하하면서 대부분의 반란 종속국들을 제압해 전황을 다시금 유리하게 뒤집는다. `하지만 리산드로스는 스파르타인의 자존심을 굽히고 페르시아 키로스 왕자의 마음을 사는 데 성공, 막대한 지금지원을 약속받고 그 힘으로 우수한 뱃사람들을 끌어들이며 대규모 함대를 구축, 노티온 해전에서 승리해 다시금 아테네를 위기에 몰아넣는다. 이제 아테네는 뛰어난 지휘관들도, 그리스 제일로 불리던 부유한 재정도, 세계 최고로 여겨지던 선원들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제야말로 아테네는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지원 없이도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리산드로스를 귀환시켰다.

하지만 아테네는 이번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아테네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반격에 나선다. 페리클레스 시절 건설한 신전들의 금박까지 긁어모아가며 자금을 모으고, 가능한 모든 인력을 총동원, 노예들에게 자유와 아테네 시민권을 약속해가며 승무원들을 모았다. 결국 지휘권 통일에는 실패했고 질적으로는 형편없이 떨어진 함대였지만, 아테네는 110척의 함선을 건조해 도합 155척의 함대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아테네 최후의 함대는 질적으로 압도적으로 우세한 스파르타 함대를 궤멸시키고 바다를 완전히 지배했으며, 엄청난 타격을 입은 스파르타는 마지막으로 아테네에게 평화 협정을 요청한다. 하지만 니키아스의 평화 이후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를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이를 거부한다. 그리고 아르기누사이 해전은 전후처리가 미흡했고, 이와 관련된 장군들의 재판에서 아테네인들은 장군들을 처형해 지휘관들을 많이 잃어버린다. 스파르타는 정치적으로 몰려 있던 리산드로스를 다시 투입하고, 다시 페르시아의 지원을 이끌어내 함대를 재건한다. 그리고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의 패배로 아테네 해군은 함대를 상실하고, 아테네는 식량 공급이 끊긴 상태로 최후까지 아테네와의 동맹을 지킨 사모스 섬과 함께 6개월간 절망적인 저항을 벌이나, 결국 스파르타에 항복한다. 굴욕적인 항복으로 아테네는 장벽을 파괴해야 했고, 함대를 모두 폐기해야 했으며,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민주주의마저 버리며 30인 참주를 받들 것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아테네의 숨통은 끊어졌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6.1.5. 민주주의의 귀환

"당신들은 견고한 성벽과 무기들, 그리고 자본과 강력한 동맹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들은 이런 것들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한 우리에게 이미 패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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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시불로스, 민주주의를 되찾고 반민주주의자와 스파르타 지지자들에게.}}}

하지만 아테네는 이번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항복 이후 민주주의에 적대적이던 아테네 부유층-귀족 30명은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아 30인 참주정을 세운다. 30인 참주정은 부유한 시민 3천명에게만 투표권과 공직의 권리를 주고, 기존 수만명의 시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으며, 정적들에게 불법적으로 빈번한 사형 선고를 내렸다. 아테네 민중의 저항이 거세지자, 그들은 스파르타 군대를 아테네에 주둔시킬 것을 요청했으며, 스파르타군의 지원을 받아 반대파를 축출했다. 하지만 그들은 채 1년도 지배할 수 없었다. 겨울, 트라시불로스와 70명의 민주주의 세력들이 필레의 군사 기지를 점령했다. 30인 참주들의 군대는 이를 공격하려 했으나 눈보라로 인해 실패한다. 70명으로 시작된 민주주의 저항세력은 이내 세력을 불려, 1000여명이 되었을 때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를 탈환한다. 이어진 몇 차례의 전투에서 그들은 승리했고, 30인 참주들의 수뇌부들은 죽었다. 마침내 민주주의 저항세력은 아크로폴리스에 이른다. 트라시불로스는 여기서 참주들이 부유한 시민들로만 만든 3천인 의회를 소집해 민주주의의 부활을 알린다.

스파르타는 1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아테네의 30인 참주정을 포기하며, 참주정 세력들의 범죄행위에 대한 사면불기소만을 조건으로 아테네 주둔 스파르타군을 철수시킨다. 이로서 스파르타의 패권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스파르타는 이오니아 도시국가들의 민주주의를 전복하고 과두제를 강요하며 아테네가 이전에 요구했던 것의 두 배가 넘는 공납금을 강요하고 온갖 전횡을 일삼았으며, 전쟁 자금의 대가로 페르시아에 아시아의 도시들을 넘겨 최소한의 명분마저 상실했다. 페르시아는 그들에게 큰 위협이었던 아테네를 쓰러뜨리기 위해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지만, 오만한 스파르타인들을 좋아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페르시아는 코논이 이끄는 8척의 아테네 망명 함대를 지원해 스파르타를 공격한다. 페르시아 자금이 끊기자마자 취약한 스파르타의 경제 구조는 붕괴해버렸고, 다시 아테네인들은 열렬히 호응하며 코논의 함대에 합류한다. 스파르타 함대와 제해권은 재건된 아테네 함대의 공격에 공중분해되었다. 아테네 함대와 함께 이오니아 일대에서 폭압적인 스파르타와 과두정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혁명이 잇달아 일어났으며, 그들은 다시 아테네와의 동맹에 가입하는 것을 원했다. 그리하여 제2차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제2차 델로스 동맹은 이전과 달리 공납금, 아테네의 동맹시 토지 소유, 이주민 파견 등의 제국주의적 색체가 지워진 것이었다. 아테네는 1,200명의 부유층들에게 함대 편성비용을 부담시키는 심모리Symmory 제도를 도입해 함대 유지비를 충당한다.

이러한 아테네의 회복 과정에서 주목할만한 사건은 두 가지가 있었다. 우선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회복시킨 트라시불로스는 이방인과 노예를 비롯하여 민주주의를 복원하기 위해 싸운 모든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것을 주장했으나, 끝내 실패로 돌아간 사건이다. 두 번째로 소크라테스의 처형이다. 소크라테스 개인은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인물은 아니었으나[34] 최소한 수없는 트롤짓의 결과로 거진 반역자가 된 알키비아데스나 30인 참주를 이끌고 스파르타에 붙은 매국노가 되어 반민주적 만행을 자행한 크리티아스 등이 소크라테스의 제자임은 명확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주변에 반민주주의 귀족-부유층-과두정 지지자들이 결집해 있었다는 것 역시 명확했다. 아테네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왔고 소크라테스는 노년기까지 이를 향유해 왔지만, 아테네는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할 수 없었다. 스파르타와 공식적으로 사면과 불기소를 약속했기에 명목상으로는 반역죄나 내란죄로 소크라테스가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반역 혐의로 소크라테스에게 침묵하거나 아테네를 떠날 것을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죄를 변호하는 데 실패하자 침묵하거나 추방당해서 사느니 순교를 택하고 배심원들을 도발했으며, 결국 원하는 대로 사형을 얻어낸다.[35]

어쨌든 아테네는 다시 함대를 재건하고 제해권을 장악한 강대국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문화적으로도 다시 전성기를 맞이해, 안정을 되찾은 아테네는 아테네와 민주주의, 해군에 관한 모든 것들에 대해 늘상 폭언을 내붓는 플라톤을 보호하는 관용 역시 되찾았다. 플라톤은 자신의 폭언과는 별개로 아카데미아를 아테네에 건립했고,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에서 활동하며 리케이온을 아테네에 건립했다. 이소크라테스크세노폰이 다양한 저술을 남겼고, 데모스테네스가 고대 최고의 연설가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동시대 스파르타가 에파미논다스가 이끄는 테베신성부대에게 레욱트라 전투에서 단 한번 대패한 것만으로 메세니아가 해방되어 농노 헤일로타이들을 잃고 2류 국가로 추락해 다시는 강대국의 반열에 오를 수 없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아테네는 수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다의 최강자였고, 육지의 테베와 함께 그리스 최강의 도시국가였으며, 그리스 문화의 정수였고,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있었다.

6.1.6. 제국의 시대에 맞서

"필리포스는 부하들에게 전쟁의 가장 유리한 점으로 꼽을 수 있는 절대권을 행사합니다. 또한 전쟁에 대비하여 병사들을 일 년 내내 무장시키기도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필리포스는 재정이 풍부하여 결정된 모든 사항을 즉각 실행에 옮길 수도 있습니다. 포고령을 발표할 필요도, 악랄한 자들에게 고발당해 시도 때도 없이 법정에 불려 다닐 필요도, 불법 혐의에 대해 자신을 변호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우두머리이자 지배자인 자신에게만 책임을 지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는 어떻습니까? 제가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뭐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정책에 대해 발언할 때조차, 필리포스의 부하들이나 여러분이 제게 똑같이 부여해준 것이 유일한 특권 -아니, 특권이라기 보단 공유권이라고 해야 맞겠지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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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스테네스, 필리포스 2세와 투쟁하는 것의 어려움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호소하며.}}}

특기할 점은 저 데모스테네스가 얼마 후 벌어진 마케도니아와의 지상전에선 방패를 내던지고 도망을 쳐서 그 자신조차도 크게 부끄러워할 오점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웅변실력과 달리 뇌물을 받은 적도 있었다. 장점과 더불어 단점도 뚜렷한, 어찌 보면 아테네라는 도시 자체를 축약한 것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와중, 필리포스 2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팽창하고 있었다. 필리포스 2세는 테베에 인질로 잡혀 있으면서 군사 개혁을 구상한다. 아테네는 함대를 편성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목재를 마케도니아로부터 수입하고 있었고, 필리포스 2세는 이 자금으로 구상한 군사 개혁을 실현해나갈 수 있었다. 우선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식 시민 중장보병과 달리 장비를 국가에서 마련하고 1년에 12번 월급을 주고 일하는 직업 군인을 마련해 상비군을 편성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리사라는 장창을 가진 밀집대형 팔랑크스를 편성했다. 팔랑크스의 약점인 기동력과 측면 공격의 취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맞서 아테네가 했던 것처럼 보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투창병, 궁병등의 경보병을 대폭 강화했다. 그리고 기병의 비율을 크게 늘렸고, 그 중 왕을 호위하는 헤타이로이 중기병을 왕의 친구들과 혹은 가까운 인척, 또는 유난히 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용맹한 병사로 구성하여 정예 기병 중의 정예로 육성해나간다. 이렇게 탄생한 마케도니아의 막강한 군대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아테네에서는 데모스테네스가 등장한다. 말더듬이었던 그는 유산상속분쟁에서 이기기 위해 웅변과 연설을 다듬어 이윽고 아테네 최고, 고대세계 제일의 웅변가로 자리매김한 인물이었다. 데모스테네스는 수차례의 필리피카이라 불리는 필리포스 2세 탄핵 연설을 통해 마케도니아의 위협을 경고했다. 데모스테네스의 각고의 노력 끝에 아테네는 반 마케도니아 동맹군에 참전했으며, 무적에 가까운 마케도니아의 육군이라도 아테네의 해군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데모스테네스는 비잔티움[36]을 아테네에 끌어들이고, 아테네 함대는 필리포스 2세가 공격한 비잔티움을 방어해 내는 데 성공하며 마케도니아의 팽창을 일시적으로 저지한다. 데모스테네스는 부유층에게 보다 많은 비용을 부담시키는 심모리Symmory 제도 개편을 통해 아테네 해군을 개혁하고 함대를 확충해 마케도니아에 맞선다.

하지만 바다에서의 아테네의 힘과는 별개로, 육지에서는 달랐다.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네와 매우 오랜 적대관계였던 테베와의 동맹을 체결하는데 성공해내고, 그리스 연합군을 편성,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에 맞선다. 하지만 필리포스 2세가 개혁하고 총지휘한 마케도니아 육군의 강력함과 헤타이로이를 지휘해서 연합군의 약점을 강타한 젊은 왕자 알렉산드로스 3세는 카이로네이아에서 그리스 연합군을 괴멸시킨다. 아테네는 다시 한 번 농성전을 각오했지만, 페르시아 공격을 계획 중이던 필리포스 2세는 매우 우호적인 평화조약을 제안한다.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코린토스 동맹의 일원으로 아테네가 참여하되 기존의 아테네 해외 영토권을 인정하고, 아테네는 해군으로 페르시아 원정을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아테네는 이를 받아들인다. 필리포스 2세가 죽고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에 저항하고 테베가 알렉산드로스 3세에 의해 파괴되는 와중에서도 아테네는 안전했으며, 알렉산드로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에서도 아테네 함대는 수송함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죽자, 아테네는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이끌고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 디아도코이들을 상대로 자유와 독립을 위한 해방전쟁을 일으켰다. 지주와 부자들은 이를 반대했지만, 대다수의 아테네 시민들은 자유를 원했다. 아테네가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은 안티파트로스에 맞서 테르모필레 협곡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고, 이에 안티파트로스는 그리스 연합군을 압도하지 못하자 아시아의 디아도코이들에게 지원군을 요청한다. 이미 알렉산드로스 3세 이래로 마케도니아의 해군은 대폭 팽창해 있었고, 클레이토스크라테로스가 지휘하는 240척의 마케도니아 함대가 전설적인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가득 채운 체 진격해왔다. 아테네는 4단노선 200척과 3단노선 40척으로 증강된 함대를 파견해 맞섰다. 하지만 에우에티온이 지휘하는 아테네 함대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패배했고, 아테네는 다시 함대를 재편성해 170척의 함대를 출진시킨다. 하지만 아모르고스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 사령관 에우에티온은 함장들과 함께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해버린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래 외세를 등에 업고 아테네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부유층들이 아테네를 결정적으로 배신한 것이다. 이윽고 테살리아의 크란논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 육군이 패해한 이후, 그리스 연합군은 안티파트로스에게 무조건 항복한다. 안티파트로스는 아테네에게, 무엇보다 아테네의 무산자 테테스들에게 가혹한 평화조건을 강요한다.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데모스테네스를 위시한 반 마케도니아 인사들을 인도할 것,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를 마케도니아에 넘길 것, 마지막으로, 부유층을 제외한 모든 아테네 시민들을 추방시킬 것이었다. 아테네 시민의 60%가 안티파트로스가 제시한 자산을 가지지 못했고, 이때문에 아테네의 무산자이자 함대와 민주주의의 등뼈였던 테테스들은 트라키아로 강제 추방당했다. 데모스테네스는 마케도니아군에 끌려가기 전 자결한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이렇게 무너져 내렸다.

6.2.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 시기에

"그대들은 죽어 마땅한 죄를 되풀이해서 짓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때마다 눈부신 업적을 남긴 조상들 덕분에 용서받는 걸로도 유명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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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항복해 죄를 비는 아테네인들에게.}}}

아테네에 과두정을 강요한 안티파트로스가 디아도코이 전쟁의 결과 쓰러지고, 데메트리오스가 아테네를 정복한다. 그는 그리스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리스의 자유를 주러 왔다고 자처하고 아테네의 민주정을 복권시켰지만, 시민의 60%인 무산 계급 시민 전체가 잘려나간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회복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아테네는 그리스의 도시국가들 가운데서는 상당한 힘을 발휘했지만, 해군은 기대할 만한 것이 아니었으며 민주주의는 공고하지 못했고 과두정 세력과 각축을 벌였다. 이후, 아테네는 피드나 전투를 거쳐 로마 제국의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고, 폰투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의 편을 들었다가 술라에게 항복했다. 기원전 88년, 술라의 강요로 아테네는 민주주의를 완전히 포기한다. 이후 아테네는 또 지는 편인 폼페이우스의 편을 들었다가 파르살루스 회전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항복하고 위의 빈정거림을 듣기도.

이렇게 아테네는 로마 제국의 지방도시가 되었으나, 여전히 아카데미아리케이온을 중심으로 학술과 예술의 중심지였으며,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대규모 신시가지가 세워지는 등 그럭저럭 번창하였다. 성경에서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떠나 방문한 여러 도시들 중에서 '아덴'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아테네.

하지만 로마 제국의 쇠락과 함께 아테네 역시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아카데미아를 폐쇄할 시점에는 이미 아카데미아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중세시대에는 파르테논 신전과 헤파이스토스 신전 등이 교회로 바뀌고 동로마 제국의 항구도시로 나름대로 이름을 날렸다가 4차 십자군 침입 당시 점령되어 아테네 공국이라는 라틴 제국계 국가의 수도가 된다. 중세시대에도 아티카 지방의 중심지였다.

6.3. 오스만 제국

동로마 제국 정복 이후 메흐메드 2세에 의해 정복당한다. 메흐메드 2세는 아테네가 맘에 들어서인지 이곳에 모스크와 조그만 별궁을 지었다.

하지만 아테네는 인근의 코린토스와 북부의 테살로니키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베네치아 공화국오스만 제국의 전쟁에 휘말려 화약고로 쓰이던 파르테논 신전이 폭파당하는 참사를 겪기도 한다.

6.4. 현대 그리스

1831년 독립 이후 나플리오에서 아테네로 수도를 옮겨 그리스의 수도가 되면서 다시 번성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고대명칭인 아시네(Ἀθῆναι)[37]로 부활했다가, 1970년대 그리스 정부가 카사레부사 그리스어(Καθαρεύουσα, 순수 그리스어)의 사용을 포기하면서 아시나(Αθήνα)가 공식 명칭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

7. 여담


  1. [1] 고전 그리스어 기준으로 '아테나이'로 읽지만 코이네 그리스어에서는 '아테네'로 읽는다. 한국어 표기는 가장 잘 알려진 코이네식 발음에서 따온 것이다.
  2. [2] 몇몇 극우들은 그리스의 진짜 수도가 지금은 터키 땅인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3. [3] 도서 - 도시로 보는 유럽통합사 : 영원의 도시 로마에서 EU의 수도 브뤼셀까지
  4. [4] 하루는 출퇴근시간이 아님에도 교통 정체가 심하게 일어나서 다들 뭣땜에 막히는지 궁금해하고 있는데, 저 앞에서 트럭운전사가 일방통행로 한복판에다 차를 세워놓고 친구들이랑 주사위놀이(그리스어로 '타블리'라고 하는)에 몰두해있는 것.
  5. [5] 한국에도 수안역이 비슷한 이유로 같은 처리를 해놓았다.
  6. [6] 반면에 피레아스 항은 어마어마하게 크다. 걸어서는 도무지 항구 전체를 돌아볼 수 없기에 배에서 내리면 피레아스 역까지 무료 셔틀 버스를 이용할 것을 권장한다.
  7. [7] 특히, 메테오라 수도원으로 유명한 칼람바카로 가는 기차의 경우.
  8. [8] 주변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아드리아노폴리스, 테살로니키 등 크고 중요한 도시가 산적해 있었기에 그당시에는 변방 느낌이 강했다.
  9. [9] 출저 - 도서 : 도시로 보는 유럽통합사 : 영원의 도시 로마에서 EU의 수도 브뤼셀까지
  10. [10] 학생 할인(50%)은 유럽 연합 소속 대학교의 학생만 가능하다. 국제학생증과 여권 등이 일절 통하지 않으니 포기하는 게 차라리 편하다. 국제학생증 등의 경우 할인이 가능하고 유럽소속 학생증의 경우는 무료입장이 가능! 단 매표소에서 무료권을 받아와야 입장이 가능하다.(14년 11월 기준)
  11. [11] 서머타임이 적용되는 경우도 마찬가지.
  12. [12] 자음 Θ와 이중모음 αι를 어떻게 발음하느냐의 차이. 고전 그리스어에서는 각각 /tʰ/와 /ai/로, 현대 그리스어에서는 /θ/와 /e/로 발음한다.
  13. [13] 을 주었다는 전승도 있다. 혹은 둘 다 주었다는 전승도 있다. 짠 물이 아니라 소금기둥, 혹은 소금으로 해석하는 역사연구도 있다.
  14. [14] 테세우스미노타우로스 이야기에서 보듯 아테네는 약소국이라 억지로 남녀를 제물을 받쳐야 했다.
  15. [15] 아테나 자체도 사실 도리아인의 신이 아닌 원래부터 거주하고 있던 비유럽인들의 신이다. 도리아인들은 전통적으로 남성 신만을 믿었으며 원주민들은 크레타에서 믿던 뱀의 여신과 같이 여신을 믿었다.
  16. [16]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의 귀족 가문인 알크마이온 가 출신이었으나, 아테네에 민주정을 확립시키려는 목적과 알크마이온 가문이 오만함으로 악명을 높였다는 것을 피하려는 본인의 겸손 탓으로 추정된다.
  17. [17] 호플리테스들로 짜는 팔랑크스 대형은 지휘관, 장교의 구분 없이 모두가 창을 들고 일렬로 서서 싸우는 형태이기 때문에 이로써 귀족들이 전공을 가져 그들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이는 로마와는 상반되는데, 그 이유는 로마엔 장교와 사병의 구분이 뚜렷하였고 이 장교의 역할은 로마의 귀족들이 맡았기 때문이었다.
  18. [18] 공식적으로는 스파르타인이 그리스 연합함대의 최고 사령관이었지만, 함대 대부분이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아테네 함대였다.
  19. [19] 다만 스파르타 육군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것은 아니다. 육상전에선 스파르타가 미세하게 승리했지만, 아테네를 공략하기엔 역부족이라 물러났고, 그 동안 아테네 함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 곳곳을 강타해 그곳의 반 스파르타 세력을 봉기시켜 스파르타가 꼼짝도 못하게 만든 것.
  20. [20] 20세기 이후에야 도입된 여성참정권이 없었다는 점을 논외로 둔다면
  21. [21] 의외로 보이지만, 이것은 고대 아테네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적 개혁 중 하나다. 공직자들의 임금은 도덕주의적 선동으로 비난하기 쉬워 취약한 지점이지만, 공직자가 임금을 받지 않는다면 부패하거나 부유층이 공직자를 독점하게 되기 때문. 페리클레스의 개혁이후 2천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선출직 공직자의 임금을 줄이거나 없애려는 반민주적 선동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엄청난 업적인지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22. [22] 이는 흔히 아테네와 함께 화자되는 고대 로마의 정치제도와 비교했을 때 확연히 차이점이 드러난다. 로마의 켄투리아 민회에서 무산자 프롤레타리이는 전원이 합쳐서 단 한 표만을 행사할 수 있었고, 이것은 귀족 수십명이 행사할 수 있는 한 표와 같은 수준에 불과했다. 이런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트리부스 민회가 별도로 존재했지만, 트리부스 민회를 통한 입법은 언제나 원로원과 승리하기 힘든 정면충돌을 각오해야만 했다.
  23. [23] 한번에 대략 8천 명에서 만 명 정도의 시민이 모였다. 아테네의 전체 시민권자 인구는 거의 언제나 몇 배나 많았지만, 엄청난 규모의 해상활동을 하던 아테네인들이 아테네에 전부 모일 수는 없었으니 일부만 모일 수밖에 없었다.
  24. [24] 보통 장군으로 번역되지만, 내각의 일원이라는 성격이 매우 강하다.
  25. [25] 갤리선을 처음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진 포세이돈의 아들 파랄로스의 이름을 땄으며, 뜻은 '해변의 사나이'였다.
  26. [26] 다만 이는 빈민 및 무산자 계급이 공헌을 했기에 대가를 받았다기 보다는 공헌을 한 대가를 요구한 결과라고 봄이 옳다. 어딜 가나 전근대 국가 아니 심지어 현대에서조차 모든 국민은 의무를 진다. 단지 의무에 대한 대가의 차이만 있을 뿐 즉 어딜가나 지는 의무는 있다. 의무 즉 공헌만이 민주주의 쟁취의 요소라면 진즉에 타국에서도 민주주의 최소한 과두정이라도 달라고 했을 것이다.
  27. [27] 미국 남부같은 경우 선거인 등록 세금이라든가 가난한 백인 하층민과 흑인의 선거권을 봉쇄하는 법들(소위 짐 크로우 법)이 20세기까지 남아있었다.
  28. [28] 단 이 경우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상황에서 한 거지 뭔가 희망을 갖고 한 일이 아니다.
  29. [29] 통치 능력의 차이에 대해서는 사실 아직도 논란적인 문제긴 하다. 현대의 기초가 된 근대 사회계약자들이 아무리 싸워도 전부 다 동의하는 것은 인간의 통치 능력에 대해서는 개개인에게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현대의 능력주의는 개인이 개인을 통치하는 능력에 대해서 차이가 없으므로 참정권은 동일해야 한다는 식이고, 다수를 상대하는 정치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에서 인간의 개성이나 재능에 차이가 있으므로 차이가 난다. 플라톤 역시 인간의 능력이나 재능은 개각기 별개라는 것을 인정한 바 있다.
  30. [30] 대표적으로 여성 등 타 계층의 참정권 배제다. 모든 시민이 동등하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 시민의 범위는 아테네의 남성 성인으로 제한되었다는 것. 물론 이는 현대 기준으로 보면 민주주의의 기본적 요건조차 만족하지 못할 중대한 사항이지만, 당대 시대적 배경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사항을 뒤집지 못했다고 아테네 민주주의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여성이나 타 계층에 참정권이 배제된 이유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인류의 원시 민주주의 특징을 보면, 전쟁에 대한 참여와 의무수행, 공동체에 대한 충성과 희생에 대한 대가와 결과물로서 정치권력이 차등적으로 분배되었으므로 자연히 남성들에게 참정권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먼 훗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의 여성참정권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영국의 참전을 지지하면서 여성참정권운동을 잠정 중단하고 여성들에게 전시체제에 협력할 것을 독려한 후에야, 전쟁이 끝나고 전시기간 동안 여성들의 협조가 인정되어 영국은 1918년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참정권을 허용하였다. 사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아테네는 달리 보면 혁신적인 면도 있었는데 무산자, 즉 가지지 못한 자에게도 권리를 주었다. 아테네 이후 공화국이나 민주주의를 채택한 국가가 많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가진 자에게만 주어졌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권리행사에 있어서 소득을 배제하게 된 것,
  31. [31] 페리클레스는 이때 온갖 변명과 눈물로 시민들에게 호소해야했는데, 사실 이것이야말로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잘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예이다. 지도자급 시민이 탄핵받는데, 이 지도자는 뒷공작이나 권위가 아닌 언변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했던 것은 아테네의 민주주의 아래에선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32. [32] 이는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통해 결정된 일이므로 모든 시민이 이 결과에 책임이 있는,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가 저지른 최악의 만행이라고 볼 수 있다.
  33. [33] 전쟁 전 아테네의 수입은 1년에 약 1천 탈란트였다.
  34. [34] 그를 화자로 한 저술 대부분을 남긴 플라톤은 극렬 반민주주의자였으며 국가 등에서 소크라테스의 반민주주의적 발언이 꽤 많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어쨌든 본인이 민주적 절차에 따른 공직에 참여한 경험이 있으며, 제자들이 주축이 된 30인 참주에도 적극적 협력 하지 않았고 대화편 중에선 민주주의의 장점을 찬양한 부분도 있다. 문제는 소크라테스 본인이 남긴 저술은 없다는 것. 아예 소크라테스의 반민주적 언행은 모두 플라톤의 조작이라고 강변하기까지 한 칼 포퍼 같은 인물도 있다.
  35. [35]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성실하게 자신을 변호하던 소크라테스는 적은 표차로 유죄 선고를 받자, 자신의 행적과 가르침에 외려 상을 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배심원들을 도발했고, 이 어그로는 그 가르침을 받아 두 번이나 스파르타와 결탁한 쿠데타를 일으키며 민주주의를 전복한 그의 매국노 제자들을 기억하고, 스파르타나 매국노 과두정 세력들에게 가족 한명쯤은 다들 잃어 본 배심원들에겐 매우 효과적이었다. 덕분에 소크라테스의 무죄에 투표했던 배심원들마저 기소된 추방이나 침묵 대신 사형에 표를 던지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중우정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결과지만, 사실 그 어떤 재판관이라도 이런 종류의 도발을 참아내긴 힘들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크라테스가 대단한 것뿐.
  36. [36] 후대의 새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 시절이 아닌 일개 그리스 식민도시였다.
  37. [37] 로마자로 표기하면 Athênai. 기원전 5세기경에는 '아태나이' /atʰɛ́͜ɛnă͜ɪ̆/, 기원전 1세기경에는 '아테내' /atʰéːnɛ/로 발음되다가 동로마 제국 시기 중세 그리스어부터는 '아시네' /aθíne/로 발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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