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

1. 개요
2. 배경
3. 제 1차 아편전쟁(1840~1842)
3.1. 아편무역
3.2. 임칙서의 파견
3.3.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
3.4. 아편전쟁
3.5. 삼원리 사건
3.6. 평가
4. 제 2차 아편전쟁 (1856~1860)
4.1. 배경
4.2. 전개
5. 전쟁이 낳은 결과
6. 관련 항목

1. 개요

서양, 동양 간 최초의 해전인 천비 해전(穿鼻 海戰)의 상상화.

영어 : The First Opium War, Opium War, Anglo-Chinese War

중국어 : 第一次鸦片战争(간체자), 第一次鴉片戰爭(정체자), 第一次中英战争, 第一次中英戰爭, 通商战争, 通商戰爭

기본 정보

시기

1840년 3월 19일 ~ 1842년 8월 29일

교전 지역

홍콩, 광저우, 상하이, 난징

교전국

대청제국

대영제국

지휘관

도광제

빅토리아 여왕

임칙서

조지 엘리엇

기선

찰스 엘리엇

혁경

헨리 포팅어

참여 병력

병력 20만 명

병력 2만 명

팔기군

동방 원정군

민병대

전투 결과

사상자 : 18,000명 ~ 2만 명

사망: 69명 부상자 : 451명

우리는 귀국이 이 곳에서 6~7만여 리나 떨어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적의 배가 무역을 위해 이곳에 오는 것은, 이곳에 큰 이득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즉, 귀국에서 가져간 부는 모두 중국인의 정당한 몫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슨 권리로 중국인을 해치는 약을 사용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고의로 우리에게 해를 입힌 것이 아닐지언정, 탐욕스럽게 이득을 갈구하는 그들은 타인을 해친다 하여도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질문을 허락하신다면 묻겠습니다.

당신의 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 임칙서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1]

아편의 해악은 술보다 적습니다.

- 아편전쟁을 찬성한 파머스턴의 주장.[2]

그 기원과 원인을 놓고 보았을 때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리게 될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

- 토리당윌리엄 글래드스턴[3](William Ewart Gladstone)의 의회 연설 中

중국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인 근대사의 시작.

대영제국이라는 이름에 불명예를 준 전쟁

엄청난 과학기술력의 차이가 전쟁에서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말해주는 전쟁

이 사건을 시작으로 중국은 100여 년의 시간 동안 전방위로 휘청거리며 사회 전반에 혼란을 맞이하게 된다.

방어전이 아닌 이상 모든 전쟁에 정당함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세계사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을 논하는 데 결코 빠지지 않는 전쟁이 바로 이 아편전쟁으로, 심지어 반대파조차 "승리할 것은 자명하지만 그로 인한 위신의 실추가 더욱 더 두렵다"고 할 정도였다. 상식적으로 동네 양아치, 길거리 마약상도 아니고 초강대국이, 약소국다른 나라가 정당한 행정력을 시행하면서 자기들이 밀무역으로 파는 마약을 단속했다고 앙심을 품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명분이 없는 전쟁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1840년에서 1842년까지 2년 간 벌어진 제 1차 아편전쟁, 1856년에서 1860년까지 벌어진 제 2차 아편전쟁으로 나뉘며, 좁은 의미에서는 1차 아편전쟁만을 뜻하기도 한다.

중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평가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자세한 것은 후술.

2. 배경

"……영국이 바란다면, 물론 동인도 회사의 대반 대신, 국가 관리, 즉 이목을 파견하는 것은 그 쪽의 자유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 청국이 공향을 통해서만 이인(夷人)[4]과 접촉하는 옛 제도를 지속하는 것도 우리의 자유 아닌가."

-1834년, 양광 총독 노곤

일찍이 서양에게 중국은 미지의 이상향이었다. 이러한 시각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초기 청나라를 매우 우호적으로 묘사하며 특히 강건성세의 주인공들인 강희제옹정제를 고평가하면서 대두되었다. 게다가 당시 유럽과 달리 안정적인 하나의 정치체제가 수백 년 동안 이어진다는 것도 유럽인들에게 낭만의 대상이었다. 당시 중국의 도자기와 가구, 사상이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는 이름으로 선풍적인 인기가 끈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당대 서구가 이상적으로 바라보았던 강희(1661~1722), 옹정(1723~1735), 건륭(1735~1795)의 태평성세가 전반적인 이완현상을 겪게 된 것은 건륭 중기인 1775년 무렵부터였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 내부적으로 몇가지 사항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첫째는 행정체계의 둔화현상이다. 태평성세를 구가하는 기간동안 황제에게 권력이 집중되어서 역으로 관료의 창의성이 억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누대에 걸치면서 관료들 자체부터도 과거시험으로 인해 평균 연령층이 노년화된데다 일단 과거를 거쳐 급제된 이들은 대부분 민생과 대외정책에 있어 현실미봉책에 급급했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졌으니, 청조말엽의 행정체계의 비능률과 침체현상에 더더욱 가속화를 촉진했다고 볼 수 있다. 당대 지식인인 공자진(龔自珍)의 비유처럼 "옴에 걸린 사람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려 하지는 않고 당장 긁지 못하게 하기 위해 침상에 묶어놓은 것"[5]으로 표현한 것은 청조 말엽의 세태를 정확히 꼬집은 표현이었다.

둘째는 사회전반에 걸친 사치풍조와 부패의 만연이었다. 사치를 조장하는 풍조는 건륭제에 이르러 극에 달했는데, 황제를 포함한 황족, 고관대작과 부농, 부호에 이르기까지 사치를 일삼았으며, 이와 더불어 관료들에 대한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졌다. 단적인 예로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군기대신의 자리에 24년을 재직한 화신(和珅)의 경우 그의 사후 몰수한 가산의 추정액이 당시 정부의 12년치 세입액에 달하였다고 한다.

셋째로는 당시의 전국각지에서 청조의 타도를 외치며 들고 일어난 반란풍조를 들 수 있다. 그 중 청조의 권위가 하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1796년, 5개성에 걸쳐 약 9년 반 동안 일어났던 백련교도의 난이었다. 미륵불이 현세에 강림하여 구세제민한다는 미륵 신앙을 기반으로 한 백련교는 절대빈곤층의 현실의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정신적 지주가 된 것이다. 비록 일부 봉기지역에서는 흥한멸만을 내세웠으나 전반적으로 이들 백련교도는 통일된 정치적 강령이나 구호가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반란이 신속히 진압되지 못한 것은 청조의 전통적 군사조직인 녹영과 팔기군이 이 시기에 이미 실질적인 전투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며 그나마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한 것 조차도 정규군이 아닌 지주나 지방 신사들이 조직한 일종의 민병대인 향용(鄕勇)과 단련(團練)등에 의존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청조 말엽의 성장 둔화[6]프랑스 대혁명과 계몽주의 사상의 대두로 중국은 오히려 구시대적 동양 문명의 표본이 되면서 반(半)문명적 국가로 취급받았으며, 그 대표적인 예시로 영국의 급진주의자 존 윌크스(John Wilkes)는 "중국이 현재 소유한 모든 고대 제도와 유물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중략) 결국 중국은 어떤 새로운 것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언제나 패자의 편에 속할 것이다."이라고 평가했고 헤겔은 이러한 평가의 가장 극단적인 면모를 보였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선입관에 의해서 역사를 서술하였기에, 중국은) 자신의 역동적인 역사 발전을 위해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요소인 세계사 바깥에 존재한다."

 

중국의 백성들은 세상에서 가장 미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인간은 황제의 수레를 끌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는다.)

 

앞으로 그들의 역사는 타자의 의해 그들의 존재가 추구되고 그들의 성격이 탐구될 때만 존재할 수있다.

한편 명나라 중기부터 시작된 서양과의 교역은 청나라 중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편 서양과 전통적으로 무역을 하던 광저우의 여러 부패와 독단적 태도로 불만을 품은 동인도 회사는 광저우 북부로 무역항을 확대하려고 시도했으나 이는 청조의 관세이상으로 무산되었고 18세기 후반에는 아예 광저우를 제외한 무역항에서의 무역을 불법으로 규정해 버렸다.

그러나 광저우에서의 무역은 매우 강한 제한과 관료들의 부패, 문화의 차이, 사법권에 대한 인식 문제[7]로 인해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영국 측에서는 지속적으로 무역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사절이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의 사절단이었다. 치외법권을 보장받는 차와 생사 생산지역 할양, 안정적인 무역량을 확보하기 위한 정식 조약 체결, 광저우의 폐단 근절 등을 골자로 한 6대 임무를 받고 출발한 그는 영국 왕실의 위엄이 손상 받지 않는 한 청나라 측이 요구하는 궁중 예의를 지키라고 명령받았다. 공식적으로는 건륭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이라 청은 이것을 조공사절로 판단하고 최상의 예우를 다했으나 곧바로 유명한 삼배구고두의 실행을 두고 논쟁에 들어갔다. 사실 이것은 만주족 전통의 황제알현의 예우였으나 매카트니는 이것을 국가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행위로 판단했고 결국 영국식으로 한쪽 무릎을 꿇는 수준으로 타협했다. 그러나 청은 이들을 단순한 사절단으로 판단했기에 이들과 외교 교섭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그들을 곧바로 돌려보냈으며, 결국 매카트니의 교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건륭제는 별도의 국서를 보내 6개항의 요구를 모두 공식적으로 거부하였다. 이에 영국은 재차 사절단을 파견하려고 했으나 사절단장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곧바로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림으로서 취소되었다. 뭐 어차피 파견되어도 청나라도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하려고 온 힘을 쏟았을 시기니 무리였을 것이다.

이후 19세기 초기에 여타 유럽 국가들이 중국에서 이런저런 분쟁을 일으켜 마카오를 점령하거나 상선을 압류하는 등 만행을 부리기 시작했고, 이에 불안해진 영국은 다시 사절단을 파견하려 노력했다. 이에 1816년에 윌리엄 피트 애머스트(William Pitt Amher)의 사절단이 도착했으나 가경제는 사절을 원하지 않아 '어조가 공손하면 북경으로 입성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천진에서 연회만 해 주고, 그래도 황제가 사냥에서 돌아오려면 몇 달이 걸린다.'며 되돌려 보낼 것을 명령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또 삼배구고두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고 심지어 사절단 내에서조차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결국 최종적으로 북경에는 간신히 입성했으나 황제를 알현하는 데는 실패하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834년 윌리엄 존 네이피어(William John Napier)가 다시 사절단으로 청을 방문했으나 그는 처음부터 영국 상인들을 총괄하는 직책이었을 뿐 별다른 외교적인 권한이 없었다. 심지어 영국은 그에게 가능한 온건하고 우호적인 양해를 유지하며 영국 신민이 중화제국의 법률과 습관을 준수할 의무를 명심하게[8] 하도록 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제멋대로 기존의 관습을 무시해 어그로를 끌었고, 이 때문에 양광 총독과 마찰을 빚자 양광 총독에게 영국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양광 총독은 어디에다 대고 신성한 우리 영해에 불질이야를 외치며 군사를 보내 상관을 포위해 무역을 강제 중단시키고 네이피어만 떠난다면 무역은 재개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결국 네이피어는 마카오로 돌아간 지 불과 한 달 만에 병사했다(...).

이렇듯 영국의 사절단과 청은 서로 갈수록 강경해지고 있었는데 정상적인 외교 활동으로는 청의 문호를 개방할 수 없다고 판단해 가고 있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고 결국 무역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당시 절정에 다다르던 영국의 군사력을 이용한 무력시위만이 유일한 정답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3. 제 1차 아편전쟁(1840~1842)

3.1. 아편무역

"외이(外夷)의 진흙과 중국의 화은(貨銀)을 바꾸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틀림없이 국내의 인민은 이리저리 유랑하며 사방에 걸식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생업을 잃을 것이다."

- 1799년 가경제

1781년부터 1810년까지 중국에 유입된 은은 무려 4,200만 냥을 넘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압도적인 무역흑자를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의 엄청난 인구를 기반으로 한 수공업이 초기 산업혁명 따위는 씹어 먹는 가격 경쟁력을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서양 측의 주력 수출품인 공업품은 아무런 메리트를 돋보이지 못했고 공예품들은 구매할 여유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9] 결국 청으로 가는 무역선은 평균 90%가 청의 화폐인 은을 담고 있었다. 은행이냐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청과 무역을 독점하는 동인도 회사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당시 인도를 정복하는 데 막대한 부채를 진 동인도 회사는 이러한 부채를 영국의 자본과 인도의 면화 청의 은을 이용한 삼각무역[10]을 통해서 돌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세기가 시작되면서 국내 시장의 침체와 면화 생산 가정의 확대로 청은 더 이상 인도 면화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고 결국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영국에서 청은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19세기가 시작되면서 중국의 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일반 가정의 월수입 중 5%가 차를 구매하는 데 사용된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의 수요를 이끌어냈고, 이로 인하여 차 하나가 대중국 무역의 90%를 독점해 영국의 한 해 지출비용은 무려 2,800만 파운드를 돌파한 상황이었다.[11] 이러한 상황은 영국과 중국 간의 무역이 지속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 대안으로 영국 상인들이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을 들여 수출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오래된 평화에 사회 분위기가 이완되었고 퇴폐적인 분위기가 자리잡아가는 추세였고 아편의 독성과 중독성에 대한 자료가 미비하던 당시에 아편의 환각 효과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냄새가 향기롭고 그 맛이 맑고 달다. 기분이 울적하고 답답할 때 마주보고 교대로 흡연하면 처음에는 정신이 맑아지고 머리와 눈이 깨끗해진다. 계속하면 가슴이 갑자기 확 열리면서 흥이 2배로 증가한다. (중략) 시간이 흘러 베개를 베고 높이 누우면 만 가지 생각이 모두 없어지고 꿈속에서 헤매는 것과 같으며 영혼이 상쾌해지니 진정한 지상낙원이다."

무슨 마약(아편)을 하셨길래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진짜 지랄들 하고 자빠졌다

당연히 청나라는 이러한 상황을 방관할 리가 없었고 1799년 최초의 단속 령이 발표되고 1816년부터는 아편 흡연까지 금지되었으나 이러한 상황은 당시 관료제의 침체와 부패로 인하여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백련교도의 난이 시작되었을 때 군인들 사이에서 아편은 남용되었고 관료들은 아편 샘플을 압류 품이라고 내놓는가하면 심지어 밀수집단과 뇌물을 주고받는 것이 일상이 될 정도였다. 심지어 도광제조차 왕자 시절에는 아편을 흡연한 적이 있었고 아편전쟁 직전에는 황자들 다수가 아편을 흡연해 신강으로 추방시키기도 했다. 게다가 아편의 진정한 효과는 인간의 도덕심과 이성의 작동을 마비시키는 효과였다. 그 때문에 빈민들은 아편을 사느라 파산하고 일가족을 팔아넘기는가 하면 상류층은 아편에 빠져서 행정 처리에 지장을 초래하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어느 사이엔가 아편문제는 대청제국이 해결해야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 당시에 중앙정부관원의 10~20%, 지방관원의 20~30% 하층 현지관리들은 무려 80~90%가 아편흡연을 한다고 추측되는 이상 이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었다. 아편 흡연은 청나라에 2가지 해악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경제적인 문제로 1834년 동인도회사의 대중국무역특권이 폐지된 이후로 아편무역은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이로 인해 중국은 한해에 3천만 냥 정도의 은을 외국에 내보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당연히 경제의 축소를 가져왔고 동전과 은의 교환 비를 2배 가까이 뛰어오르게 했는데 이는 곧 세금을 은으로 납부하는 농민들에게 실제적인 세금이 2배 가까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는 동전의 순도를 낮추는 대신 대량발행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충격을 완전히 대응하는 것은 무리였다.

두 번째 문제점은 아편 그 자체의 독성이었다. 아편의 진정효능은 단순 흡용 만하더라도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의존성을 띠게 한다.[12] 게다가 아편은 내성이 강해 흡연하면 할수록 많은 양을 투약해야 같은 효능을 보게 되는 일이 많아서 (경제적, 신체적) 의존성을 강화시켰다. 게다가 아편의 흡연은 뇌의 도덕적 기능을 파괴시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양심의 작용마저 불가능하게 만들어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진 빈민이 딸이나 아내를 팔아치우는 일마저 잦게 만들었다.


아편 저장소


1858년의 아편굴

종합적으로 사회기강의 해이, 은의 유출로 인한 재정난, 농민생활의 곤궁 등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진위여부가 우려스럽지만) 1837년 주성열(朱成烈)은 아편으로 인해 유출되는 은이 한 해에만 은자 7천만 냥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마침내 사태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된 도광제는 전국 각지의 관리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할 방책을 내놓을 것을 명령하였다.

1836년의 논쟁에서 이에 대한 최초의 의견은 대담하게도 아편의 합법화였다. 태상시(太常寺) 소경(小卿) 허내재(許乃濟)는 아편을 합법화시켜 정규 관세를 징수하고 대신 아편의 거래수단으로 은을 지불하는 것을 금지시켜 은의 국외유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아편의 원료인 양귀비꽃의 재배를 금지시키고, 일반 백성의 아편 흡연은 간섭하지 않는 대신 병사, 지식인, 관료들의 아편 흡연은 단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금론(弛禁論)을 펼쳤다. 전현임 양광총독 노곤(盧坤)과 그 후임 등정정(鄧廷楨)은 이금론을 찬성했지만, 이는 당시 동아시아 국가 체제의 핵심 이념인 인정(仁政)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는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이긴 하였으나 황제인 도광제 입장으로써 몹시 껄끄러운 주장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편의 선별적인 단속금지와 아편무역의 국가독점도 실효성이 없다는 원옥린(袁玉麟)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한편 허내제의 상소와 함께 아편에 대한 강경단속을 주장하는 엄금론(嚴禁論)이 대두되었다. 이를 주장한 것은 내각학사 겸 누부시랑(樓部侍郞) 주박(朱博)이었다. 주박은 아편 단속을 완화하는데 몹시 강경하게 반대했다. 그는 법은 마치 제방과 같아서 조금 훼손이 되었다고 없애버린다면 이를 걷잡을 수 없고, 도둑, 매춘, 도박을 법이 미처 단속하지 못했다고 한들, 법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고 하였다.

병부급사중(兵部給事中) 허구(許球) 역시 강경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아편 단속을 그만둘 경우 아편 흡연을 막지 못한다고 주장했고, 아편 유통에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색출해 엄벌에 처할 것을 건의하였다.

결국 도광제는 1836년 9월 엄금론에 관심을 기울이고 양광총독 등정정에게 아편단속을 강화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아편 단속의 여부가 완전히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이금론은 조정에서 주된 의견이었고 엄금론을 주장하는 신하들도 아편단속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 관료에 의해서 판가름나게 된다.

3.2. 임칙서의 파견

"사생(死生)은 운명에 달려 있고 성패(成敗)는 하늘에 달려 있다."

1839년 임칙서, 광동으로 출발하기 직전.

전통 시대의 마지막 명신

1837년에 임칙서는 호광총독(湖廣總督)으로 재임하면서서 농업·상업을 개혁하고, 아편을 강력히 단속하고 민간 자율을 존중하며 매우 높은 실적을 내고 있었다. 당시 임칙서는 엄금론을 내세워 아편을 강력히 단속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정책과 그 세부사항까지 이미 마련하고 있었다. [13] 당시 임칙서는 공자진(龔自珍)[14]과 교류하여 경세론에 깊이 관심을 갖고 있었고 때문에 아편의 존재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임칙서는 "법을 지키는 것보다 법을 만드는 마음이 중요하다"라고 했다. 이것은 곧 이금론을 향한 도전이었다. 이금론의 논리대로라면 천자의 아편중독자는 천자의 교화를 포기한 천하의 개쌍놈이라 포기하는 게 마땅했지만, 임칙서는 "모든 백성이 동등한데 어떻게 흡연한 자라고 하여 버려야하는가?"라는 라고 일갈했다. 임칙서의 이런 강경한 태도와 그가 제시한 아편 단속 정책에 설득된 도광제는 마침내 아편 무역을 작살내기로 결심한다. 1839년 12월 31일,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15]과 광동수사로 삼았다.

실은 임칙서가 광동에 내려오기 전 아편 무역은 이미 고사 직전이었다. 도광제는 등정정을 시켜 아편 단속을 강화할 것을 명령한 상태였다. 이에 1839년 5월에서 9월까지 아편 무역 금령은 일시로 해제되었는데 이것이 근본이 되는 해제로 예측한 상인들과 아편을 무리하게 비축한 서양 상인들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상인들은 아편의 가격을 매우 낮추어 처분하려 했지만 등정정의 강력한 조치로 말미암아 그것도 무리였고 결국 1840년이 시작될 무렵에 아편 무역은 이미 종언을 고한 상태였다.

1840년 3월 10일 광주에 도착한 임칙서는 아편의 폐해를 다스리지 못하면 광동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서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임칙서는 강력한 아편 단속을 실시하여 아편 금지령을 위반한 1,600명을 체포하고, 아편 2만 8천근을 몰수하였으며 부패한 관리들도 엄벌에 처했다. 그러나 이런 천하의 임칙서도 외국인 밀수꾼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임칙서는 에머리히테 바텔(Emerich de Vattel)이 쓴 국제 법(Law of Nation)을 입수해 그것을 한역하고서 영국빅토리아 여왕에게 이 문제에 간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와는 별도로 임칙서아편 문제만큼은 양보할 생각도 타협할 의지도 전무했다. 그리고 3월 18일에 영국 상인들에게 3일 내에 아편을 내놓으라고 명령했고, 아편 무역을 재개할 시에는 상품 몰수는 물론이고 사형까지도 감수할 수 있다는 서약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16] 결국 3월 21일이 지나자 임칙서는 공행의 상인 2명을 즉시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영국 상인들은 아편 1,036 상자를 자발적으로 넘겼으나, 임칙서는 그 상인들이 아편 2만 상자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공행의 상인은 체포되었고 임칙서는 3월 24일 병사들을 동원해 공행 내에 있는 영국 상관을 포위하였고 중국 하인들을 철수하게 했다. 포위한지 6주가 지나자 영국 관리였던 찰스 엘리엇은 상인들에게 아편의 소유권을 영국 정부에 양도하면 정부에서 피해를 보상해 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 다음 엘리엇은 양도 문서를 작성해 임칙서에게 전달했다. [17] 마침내 5월 16일 영국 상인들은 아편 21,306 상자(약 1425t)를 임칙서에게 양도하였다.


호문소연(虎門銷煙).

임칙서는 이 아편을 북경으로 운송하여 아편 단속의 성과를 알리고 싶었지만 운반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운송 중에 일부가 빼돌려져 단속이 무색해질 위험성도 있었다. 결국 청나라 정부는 현지에서 폐기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아편을 다시 사용하지 못하도록 바닷물과 석회를 섞은 열[18]을 가하는 방법을 쓰기로 결정한다. 아편 폐기는 6월 3일에서 6월 25일까지 지속되었다. 아편을 폐기처분하기에 앞서 임칙서는 토지신과 해신에 사죄하는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거대한 웅덩이를 파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뚝을 쌓아 인공 제방을 만들었다. 그 다음 그 속에 아편과 석회를 넣어 잘 섞고 통째로 바다에 되돌려보냈다. 이때 연금에서 풀려난 영국인들은 마카오로 도주한 상태여서 그 광경을 지켜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임칙서는 아편 무역을 제외한 모든 교역을 지속해 나아갈 생각이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엘리엇은 크게 화를 내며 모든 상인들을 철수시키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이 의사를 미국에도 타진했으나 미국 상인들은 임칙서의 요구를 받아들여 아편 무역을 철폐했다.[19] 결국, 영국 상인들만 엘리엇의 강요에 따라 강동에서 떠났다. 이윽고 영국 상인들은 본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아편 무역은 님들 사정임. 그리고 청나라가 아편 무역 금지했는데 우리가 왜 신경 써야 됨?"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1839년 7월 12일, 광동을 떠나 구룡(九龍) 반도에 정박했을 때 술에 취한 영국 수병이 중국인 임유희(林維喜)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영국인들은 유가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치외법권을 발동하게 하는 선에서 사건을 호도하려고 했으나 임칙서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영국인들에게 임유희를 살해한 사람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영국인들은 임유희를 살해한 살인범을 인도하지 않고 "영국의 법률에는 외국에서의 죄를 저질렀을 때를 대상으로 한 법이 없다" 빼애액 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임칙서는 영국 법을 가져와 그들 코빼기에 보여주어 영국인들을 데꿀멍 시킨다.

상술하였듯 임칙서는 광동에 부임하자마자 영자 신문, 영국 법, 국제법 등을 간단하게 중국어로 번역하라고 명령한 상황이었다. 이런 준비를 통해 영국의 법률상으로도 외국인 살인이 명백한 불법임을 알고 있었는데도, 영국 상인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에 빡친 임칙서는 포르투갈이 소유하던 마카오에서 식량 공급을 중단해 버렸다. 이에 엘리엇은 항의했지만 "우리는 입항을 거부한 적 없음. 배 위에서 굶어죽거나 말거나 님들 멋대로 하삼."라고 항의를 무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 사람들의 여러 상선이 식량을 밀매했지만 임칙서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묵인했을 뿐이었다.

8월 26일 임칙서는 마카오에서 영국 사람들을 추방했다. 그 사람들은 홍콩으로 가서 영국에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초조해진 엘리엇은 아편과 상관없는 영국 상선 로열 색슨 호을 포격해 광주 진입을 막으려고 했다. 이에 청군은 영국 상선을 보호하고자 공격과 수비가 바뀐 건 기분 탓이 아닙니다. 관천배가 지휘하는 수군이 정크선 29척을 내보냈지만 청나라의 군함은 급하게 상선을 개조한 배였기에 엄청난 해를 입고 말았다. 이 천비 해전(穿鼻 海戰)으로 청의 군사력이 형편없다는 것이 드러나자 임칙서는 서양식 대포와 함선을 즉시 구매하고 주민을 동원해 방어 체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인들은 무역을 재개해 달라고 요청했고 임칙서는 "아편만 취급하지 않는다면" 종래 약속을 지키겠다고 답변했지만 영국 사람들은 이 약속이 '불확실하다'고 거부하였다. 결국 북경에서는 영국과의 무역을 종결하라고 하명했고 1839년 12월 6일, 양광총독으로 임명된 임칙서는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3.3.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

중국에 대한 원정을 요구하는 영국 만평.

앞서 언급하듯 유럽에 대한 중국의 시각은 그야말로 시궁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영국 정부의 재산과 신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중대한 위협으로 판단되었다. 중국인들의 재산과 생명 따위는 씹어주는 게 영국 신사의 도리. 이것은 그들 입장에서 곧 야만인이 문명국가에 도전한 일이었고 아편 상인들의 강력한 로비는 영국 의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편전쟁에 대한 여론은 당대 영국에서조차 비판적이었다. 엘리엇조차도 아편무역에는 비판적이었고 그는 단지 화물을 보호하기 위해 온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상인들의 로비로 영국에서는 점차 중국에 군대를 파견하는 쪽으로 여론이 움직이고 있었다. 1839년 10월, 전쟁에 주동적이었던 파머스턴 수상을 중심으로 영국 내각은 전쟁을 결의하였고 1840년 2월에는 모든 전쟁계획을 마치고 군비 지출을 위한 예산안을 의회에 표결했다.

이에 대표적인 찬전파인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는 의회에서 찬성여론을 내놓았다.

"패배, 굴욕 또는 치욕이라고는 모르는 나라의 국민이며, 자국민을 위협하는 자에게는 귀를 의심할 정도의 배상금을 받아온 국가의 국민이여, (중략) 50년 공직 생활에서 영국 국기가 광동에서 당한 것과 같은 모욕을 본 일이 없습니다." 아이고 청나라도 200년 역사에서 영국 같은 돌아이 국가는 처음 봤을 것이다

영국 국기가 모욕당했다고 말한 것은 임칙서가 공행을 포위하고 영국 상인에게 아편을 내놓을 것을 명령한 것이었다.

그러나 30살의 재선의원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20]이 진정으로 국기가 모욕당할 때를 성토하자 적지 않은 의원들이 제국주의를 비판하여, 투표 결과는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에게는 아편을 금지시킬 정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아편의 무서움을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영국의 외무장관은 청나라의 정당한 권리마저 짓밟으며 이 부정한 무역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부정하고 치욕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는 전쟁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중략)

이 전쟁의 승리와 그 이득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득이 크더라도 그로 인해 영국의 국왕과 대영제국이 입을 명예, 위신, 존엄성의 손실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중국 영토에 체제하고 있으면서 그 법률에 복종하지 않는 외국인에 대해 중국이 식량과 음료 공급을 거절한 것이 어째서 중국의 죄가 되는지 본인은 잘 모르겠습니다.[21] 정부는 이 전쟁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이 작전 행동이 어느 정도까지 확대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즉, 그 기원과 원인을 놓고 볼때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리게 될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파머스턴은 자신들은 아편무역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이후의 교역과 영국 시민의 안전을 고수하는법이라는 말장난으로 논법을 바꾸어버렸다. 1840년 4월 10일 영국 하원에서 청과의 전쟁수행을 위한 예산 투표가 이루어졌고 결과는 271대 262. 비록 표차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을 멈출 수는 없었다. 표결이 끝난 후 글래드스턴은 "262. 영국의 양심의 무게가 고작 이 정도냐!"라고 한탄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반대파들이 아편전쟁에 반대한 이유는 중국을 주권국가로 존중해서만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백인의 의무'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문명국으로서 중국인들에게 문명을 전파해야 될 의무가 있는데, 과연 아편을 팔아도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반대파 일부의 '양심'이었던 것. 글래드스턴의 연설에는(위에서는 편집되었지만) '정의는 중국인들의 편에 있습니다. 저 문명화도 제대로 되지 않은 야만인들에게는 정의가 있는 반면, 우리 깨어 있고 문명화된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와 정의에 반하는 목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라는 대목 또한 들어 있었다. 어찌 됐든 영국 내부에서도 아편 전쟁이 상당한 논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3.4. 아편전쟁

"역사를 회고하면 아편은 단지 전쟁에 직결되는 원인이지 근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매뉴얼 C.Y.쉬

영국 해군 소장 조지 엘리엇이 통솔하는 영국의 동방 원정군은 대포 540문을 탑재한 군함 16척함, 증기 군함 4척, 운수함 27척, 병력 운수함 1척과 병사 4천 명으로 구성됐다. 영국군은 사기를 함양하고자 수비력이 약한 광동 근처의 주산 열도(舟山列島)를 공격하였는데 이곳의 주민 2천여 명은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고 영국군과 맞섰으나 성은 끝내 함락되었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도주하였다. 영국군 주력군이 광주에 즉시 도착했지만 임칙서의 철저한 대비로[22]로 영국군은 광저우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한 대신 영국군이 부상해서 톈진까지 접근하자 도광제는 임칙서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영국 측의 반발만을 환기했다고 오판해 임칙서를 크게 질책하였다.

"대외로 통상을 근절하게 했으나 근절되지는 못했고[23] 대내로는 범법자를 체포했으나 소탕하지는 못했다. 이것은 빈말로 어물어물 넘긴 것에 불과하다. 결국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수많은 파란을 야기했을 뿐이니 생각건대 금치 못할 만큼 참으로 분하고 답답하도다. 그대는 무슨 말로 짐에게 대답하겠는가?

이에 임칙서는 광동의 관문 1개 세금 중 10%만 사용해도 외적을 격퇴할 수 있다고 답변했으나 이미 도광제는 임칙서를 향한 신임을 완전히 철회해 허튼 소리라고 강하게 비판한 일변, 영국은 임칙서를 비난하고 아편의 배상과 억울함을 벗겨 달라고 요청했기에 그 사람들의 요청을 들어주면 곧바로 돌아가리라고 오판한 것이다.[24]

결국 도광제는 임칙서를 파면한 후 북경으로 소환하고 직예총독(直隷總督) 기선(琦善)에게 영국군과의 협상을 하명하였다. 직례총독이었던 기선은 북경을 방어할 책임이 있었기에 영국군을 다독이면서 영국군의 태도에 맞춰 주자 협상을 체결할 희망을 품은 영국군은 천진에서 퇴각하여 도광제는 고무되어 기선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천비 가조약(川鼻 假條約)

그러나 1840년 12월이 끝나갈 무렵 영국군이 홍콩의 할양과 배상금을 요구하자 그제야 기선은 자신이 보통 골치 아픈 상황에 빠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상금이야 송시기에 이미 지불한 전례가 있지만 영토 할양은 전통 시각에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사항으로 이것은 실효성 문제라기보다는 상징을 나타내는 문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산열도의 전염병으로 사상자가 생기는 영국도 그렇게 강경한 자세를 고수할 수는 없었다. 결국 양측 모두 양보하는 선에서 찰스 엘리엇과 기선 간의 천비가조약(川鼻 假條約)을 체결되었다.

1. 청에서 몰수한 아편을 은 600만 냥으로 배상한다.

2. 향항(홍콩) 지역을 영국에 할양한다. 단 세금은 그대로 중국에 귀속한다. (마카오 지역과 같은 형식의 할양)

3. 차후 청, 영국 간의 동등한 지위를 약속한다.

4. 광동 지역에서의 무역을 전쟁 이전으로 복구한다.

그러나 결과상 양국은 이 조약의 인준을 거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한 분쟁으로 인식한 청이 영토를 할양한다는 사실은 있을 수도 없을 뿐더러 평등한 관계라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영국도 원정군의 예산에도 미치지 않는 금액으로 전쟁을 종결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데다가 기선도 '임칙서의 과오를 시정할 권한'만 있었지 외국과 조약하거나 영토를 할양할 권한도 없었기에 곧바로 격노한 도광제에 의해 가산 4천만 냥을 몰수당하고 최종으로 흑룡강으로 유배되는 처벌을 받은 일변, 영국에서도 파머스턴이 '자신의 훈령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다'고 엘리엇을 비난하면서 그의 변명을 기다리지 않고 엘리엇을 해임한 뒤 헨리 포틴저를 후임 전권 대표로 임명하여 협상은 완전히 단절되고 결국엔 양국 간 무력 대결만이 남게 되었다. 청군 총사령관으로는 재상 혁산(奕山)이 임명되었으나 혁산은 전투를 회피하고 만사를 부사령관인 참찬대신(參贊大臣) 양광(楊芳)에게 일임하였다 백련교도의 봉기와 신강 지역의 이슬람 봉기군을 진압한 장수였으나 대외 관계에서는 무지했고 미신을 신봉한 양광은 영국군의 대포가 정확한 이유가 요술 때문이라는 믿은 채 대포와 상극이라는 여자의 오줌을 성벽에 바르는 행위를 방책이랍시고 내놓았으며, 북경에서는 양인(羊人)을 잡는 데는 호랑이가 제격이라면서 선발한, 호랑이 년·월·일·시에 태어난 지휘관들은 당연히 대패했는데 막상 조정에는 전투 전에 미리 작성한 승리 보고서가 도착했다고 한다.

진강을 공격하는 영국군

1841년 8월, 영국군 1만 명은 청 동남부를 초토화하고 양쯔강으로 진입했으나 입구 영파(寧波)를 지키는 장수 여보운(余步云)은 도망하고 말았다. 그 후 영국군은 닥치는 대로 강간과 약탈, 방화를 자행하면서 양자강에 진입하였으며, 1842년 3월에 혁산이 이끄는 정규군 1만 2천 명과 민병대 3만 3천 명의 대군이 영국군 불과 천여 명에게 격파당하고 혁경은 단기필마로 겨우 도망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6월에는 상하이가 함락되고 7월에는 영국군은 청의 제2 도시인 난징(南京)을 지키는 요충지이자 대운하의 핵심 기지인 진강(鎭江)을 공격하였고 수비병 1,400여 명은 전원 전사했으며 지휘관 해령(海齡)은 자결하였는데 그 이유는 한인 민중을 불신해 협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남경의 함락이 기정사실화되자 청은 전쟁을 지속할 의지를 상실하고 결국 협상 2주만에 중영광녕조약(中英江寧條約) 체결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다. '남경조약(南京條約)'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조약과 이듬해에 맺은 오구통상부점선후조약(五口通商附粘善後條約), 호문조약(虎門條約)과 내용을 요약하면, 자유무역이라는 영국의 숙원이 해결됐다는 사실을 잘 알수가 있다. 남경조약 전문

남경조약 체결을 보고받은 청 조정은 이것을 바람직하게 받아들었다. 전쟁 이전보다 높은 관세를 거둘 수 있으며 (실제로는 폭락한 상태였다.) 양자강과 주산 열도에서 영국군이 철수한데다가 영국이 할양을 요구한 영토마저도 전략상·경제상 가치가 전무한, 당시로서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홍콩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기존 중국의 대외질서관의 틀 내에서 볼 때, 남경조약은 오히려 청 조정에게 있어 긍정적으로 해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사재판권과 치외법권에 대해서는 오랑캐인 서양이 중국 고도의 예법(오륜)을 이해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소한 분쟁에 휘말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으며, 협정관세권과 관련해서는 조공 국이나 호시 국에게도 기존에 시혜적인 입장을 취해 온데다가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오히려 높은 관세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청국 측에서 보면 남경조약은 천자가 오랑캐[夷狄]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지 청국은 이것을 조약 체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설령 조약이라고 표현했더라도 청국에게 있어선 전혀 다른 맥락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출처] 다만 남경조약에서 시혜적인 입장을 취했던 청이 이의를 제기한 것은 오직 배상금 액수와 경제상 요충지인 복주의 개항 문제였을 뿐이었으나 과거 영국은 부패한 공행에게[26] 뇌물 일정량을 바쳤는데 이것이 폐지된 것을 계산해 보면 오히려 영국 측의 이득이 큰 셈. 게다가 영국인들이 다른 국가처럼 청을 예속화하는 조약을 강요하지 않은 것은 장기에 걸친 이득을 계산한 것이기도 했다. 무려 인구 4억에 달하는 광대한 시장을 섣불리 건드려 잃는 것보다는 살려두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는 더 큰 이득을 가져다주리라 여겼던 것이다.

영국이 내세운 아편전쟁의 표면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영국의 자유무역 권리 수호'로 아편의 무역 유지를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 때문에 전쟁 승리 후 체결한 조약들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사달의 핵심이면서도 근본인 아편을 다룬 언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아편 무역은 외면상으론 불법이 되었고 청은 이것을 단속했으나 결과적으로 아편 수입량은 폭증하게 되었다.

조약 체결이 전해지자 여타 열강도 즉시 교섭을 요구했고 청 조정도 이런 열강을 이용해 영국을 견제할 수 있으리라 판단해 교섭에 협력했다. 1844년에 미합중국과 망하조약(望厦條約)을 체결하고 프랑스와 황포조약(黃埔條約)을 체결하고 조계를 인정받았고 1858년에 러시아와도 애혼조약(愛琿條約)을 체결하였다. 그 이후에도 서양 다수한 열강과 통상 장정을 체결하였으나 후대의 '중국 근대사의 시작'이라는 평가와 달리 아편전쟁은 중국에게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이 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무역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2차 아편전쟁 단락에서 서술하겠다.) 개항장에서도 역시 이전과 다른 사회/경제적 변화를 찾아보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왜냐하면 애시 당초 '중국 근대사의 시작'이라는 평가 자체가 '정체된 사회에게 가해진 서구의 충격'을 당연시한 과제라는 전제를 깔고 역사를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중국이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면 여전히 큰 충격이 한 번 더 필요한 상태인 일변, 과거에는 광주에서만 무역이 허가되어 수출품·수입품이 모두 광주로만 오가던 탓에 그곳으로 가는 교통 관련 사업이 자연스럽게 발달했고 그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남경조약을 위시하여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과의 조약 체결 이후 서양과의 교역 출구는 늘어났고 교통로도 자연스럽게 다양화 및 단축되었다. 즉, 남경조약에서 파생된 가장 직접적인 변화는 교통로 발달에 따른 인구이동과 유랑민의 증가였다. 무역 경로가 다변화되면서 자연스레 그에 의지하던 많은 사람이 이동하기 시작했고 혹은 항구 근처로 이주하여 기존 농민들과 대립하는 일도 잦아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양상은 특히 양자강 하류에서 빈번히 나타났고, 이는 곧 청 황조의 양자강 이남에 대한 통치력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청 황조가 궁극적으로 외국과의 관계에서 이권을 양보한 이유도 바로 인구 이동과 유랑민 증가에 따른 국내 불안에 대한 경각심 때문이었고, 이런 유랑민 문제는 결국 태평천국이라는 극도에 도달한 사태로 폭발하게 된다.

3.5. 삼원리 사건

아편전쟁이 한창이던 1841년 5월 29일, 중국 광둥 삼원리(三元理)에서는 영국군과 청 민중과의 충돌인 이른바 삼원리 사건(Sanyuanli Incident)이 벌어진다.

당시 상황도

당시 6,000여명의 영국군은 광저우 시 교외의 요새(Western fort)를 점령하여 주둔하고 있었고 그 서쪽 심해(沁海)항에 수송선이 머무르고 있었다. 원래 영국군은 군기가 잘 잡혀져 있는 군대였다. 하지만 원래 예정되었던 추가 공격이 어른의 사정[27]으로 취소되어 병사들은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고 소규모의 분견대가 우란강(牛栏岗)이라는 마을을 약탈하는 도중에 한 굶주린 영국병이 중국인 위소광(韋紹光)의 아내를 강간해버리고 말았다. 격분한 군민들이 순식간에 부대를 에워싸니 영국군은 데꿀멍하여 급히 퇴각하였는데 강간 소식을 들은 인근 마을의 사람들이 속속 당도하여 10,000명이 넘었고 삼원리에서 영국군을 포위하였다. 이들은 단순히 칼, 낫, 망치, 창, 갈고리 등으로 무장하였고 화기는 없어서 숫자만 많지 일견 영국군의 우수한 화기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 같지만 문제는 하필이면 그날 폭우가 쏟아졌다는 것이다. 당시 포위된 영국군 주력은 세포이였는데 이들의 무장은 플린트락 머스킷이었다. 플린트락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플린트락 머스킷은 그 구조상, 비가 내리면 뇌관 역할을 하는 화약 접시에 물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그러면 화약이 젖어 총을 쏠 수가 없다. 중국인들은 영국군들을 논으로 유인, 분리시켜 각개 격파하여 결국 세포이 4명이 전사하고 20명이 부상했다.

God damn 플린트락 머스킷!

Western fort의 영국군 본진에서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비가와도 발사가 가능한, 당시로서는 최신형 무기인 퍼커션 캡 머스킷으로 무장한 해병대를 급파했고 결국 2시간 만에 본진으로 철수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군민들은 본진으로 또 따라와 포위했다(...). 이대로 가면 영국군이 대패할 수도 있었으나 영국군 사령관은 상황을 간파하고는 머리를 굴려 광저우 총독 여보순(余葆纯)에게 전갈을 보냈다. "여보. 포위를 풀지 않으면 영국군 주력이 도착하여 광저우를 초토화시킬 것이다." 여보순은 형세 판단은 할 줄 아는 인물이었던 것 같은데, 이대로 가다가는 영국군 증원 병력이 당도하여 분노의 보복이 펼쳐질 것이라고 예상하고는, 총독의 권한으로 군민들을 협박하였다. 이미 며칠 전에 천비가조약(川鼻假條約)의 연장선인 '광동 협약'이 맺어져 청이 영국에게 6백만 달러를 배상하도록 결정되었는데 이 엄청난 금액의 전액을 광저우 주민들이 배상하도록 할 것이라는 것이다.참고 결국에는 주민들은 포위를 풀었다.

여보순은 그 이후 대대로 매국노로 찍혀버렸으며 과거 시험 부서의 한직으로 좌천되었고 학생들이 얼굴에 먹물을 뿌리는 등 사람들에게 수시로 곤욕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도 삼원리 사건은, 중국이 말도 안 되게 쳐 발린 아편전쟁 기간 동안 외세에 대항한 유일한 민중 봉기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대부분이 중국인이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배우고 있다. 그 위상은 미국에서의 알라모 전투나 벙커힐 전투 정도라고 한다.

3.6. 평가

아편전쟁을 단순히 아편 단속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으로 보는 것은 전후 갈등과 시각 격차를 무시한 채 바라보는 무지의 소산이다. 아편전쟁을 두고 중국사의 대가인 존. 킹.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는 이 사건을 통해 중국사가 근대로 나아갔다는 충격·반응 패러다임을 주창했으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여러 학자에게 많이 비판받는 소수설이 되었다. 현대 중국에서는 아편전쟁 그 자체로 벌어진 변화는 그렇게 크지 않아서 아편전쟁이 중국 근대 기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설도 여럿 제시되고 있다. 항구 5개는 극소수의 외국인만이 거주하였고 그중의 대다수는 선교사들이었던 데다가 영국 측의 자유무역도 이미 아편으로 청 경제가 크게 황폐화 상황에서 영국의 수출품을 구매는 불능한 일변, 영국 측도 수출품이랍시고 가지고 오는 게 피아노포크 같은 쓸데없는 것들이었다. 오히려 자유무역 탓에 청의 수출 제한이 해제되면서 폭증하는 차 수입을 아편 무역으로 간신히 막아야 할 정도였다.

한편, 아편전쟁 후에도 청 황조의 아편 단속 책은 강화됐으나 근본을 때려잡지 못하고 소비자만 제압하는 정책이 결국 큰 실효를 거둘 리는 만무했고 제2차 아편전쟁 직전에는 아편 수입이 몇 배로 증가했다. 흔히 이러한 면모를 보고 도광제의 정책이 우유부단하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도광제는 재위 기간 내내 대(對)아편 강경책을 포기한 적이 없었고, 심지어 아편전쟁 직전에는 황자들을 아편 흡연을 이유로 신장으로 내보낼 정도로 초 강경론자였다. 다만 정책 방향이 발본색원과 거리가 멀었을 뿐, 위에서 언급했듯 단속 책은 지속이고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영국 내에서는 오히려 이 전쟁을 너무 쉽게 끝냈다는 비판이 튀어나왔다. 전쟁을 1년만 더 지속해 청 황조를 궁지로 몰아넣었다면 더 많은 은을 챙겼으리라 애석해 했다는 것. 이런 불만은 남경조약과 아편 판매에도 불구하고 청과의 차 무역 수지가 나아질 기미가 없자 더 강하게 나타났다. 즉 제1차 아편전쟁의 끝은 문제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4. 제 2차 아편전쟁 (1856~1860)

영어 : The Second Opium War, Arrow War, Second China War, Second Anglo-Chinese War, Franco-British expedition to China

프랑스어 : La Seconde guerre de l'opium

중국어 : 第二次鸦片战争(간체자), 第二次鴉片戰爭(정체자), 英法联军之役, 英法聯軍之役

4.1. 배경

영국은 제1차 아편전쟁의 승리로 개항과 무역 독점권을 얻었지만 생각보다 큰돈이 되지 않았고, 여전히 대중국 수출은 아편에 의존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 백성들이 아편을 몰래 자체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의 무역적자가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유무역 덕분에 청의 차 수출량이 급증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맞은 것이다...

마침 청 선박이 영국인 선주 소유의 중국선박 애로호를 단속하였다(애로 호 사건). 소유주만 영국인일 뿐, 모든 승조원은 중국인이었으며 이들은 해적임이 분명했기에 청의 정당한 공무집행이었으나 영국은 단속 과정에서 명예로운 자국 국기가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전쟁을 선언했다.[28] 안 그래도 무력 개입의 핑계거리가 없어서 고민하던 영국이 말도 안 되는 사유로 전쟁을 일으킨 것. 하도 황당한 개전사유에 영국 하원마저도 개전 안을 부결시켰고 글래드스턴은 아예 정부 불신임안까지 내놓았으나 당시 수상이었던 파머스턴[29]하원을 해산하고 투표를 통과시켰다. 잘도 이런 미치광이 짓을![30]

여기에 프랑스도 자국 선교사가 중국에서 처형된 것을 구실로 전쟁을 선포, 청은 졸지에 유럽의 강대국 2개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야 했다. 제국주의 앞에서는 원수도 하나가 된다[31] 여기에 미국러시아도 참전은 안했지만 여차하면 개입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등, 제국주의 열강의 청 다굴 수준에 가까운 상황이 초래되었다.

4.2. 전개

태평천국의 난으로 국가적 역량이 크게 쇠퇴되었던 청은 침공의 위협에 노출된 광둥성 일대 등 남부지방에서 제1차 아편전쟁과 같은 조직적 저항이 어려운 상태였다.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손쉽게 청의 지방군대를 격파하고 광저우를 비롯한 광둥성 일대를 점령, 통치에 나서는 한편, 지난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압도적인 해군력을 이용해 중국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양쯔강 일대에서 분탕질을 저지르고 다시 북상하여 마침내 청으로선 용인할 수 없는 발해 만까지 진출했다.

계속되는 패전과 전쟁수행능력의 부족, 국가적 역량 한계와 수도 함락 위험 등을 느낀 청은 1858년 6월 배상금 지불, 개항항구의 확대, 베이징에 외국외교관 상주 허용, 기독교 공인, 장강 통행 및 외국인의 중국 내륙여행 자유 등을 골자로 하는 톈진조약을 체결했다. 그걸로 전쟁이 끝나나 싶었는데…

이전 서술에선 패배에 분노한 청군이 대고 포대에서 발포해 전쟁 끝내기로 해놓고 공격을 하는 행동에 엄청나게 열이 받은 영국과 프랑스가 다시 침공한 것처럼 서술했지만 실제는 이와 다르다. 청과 각국은 천진 조약을 체결하고 1년 뒤에 비준하기로 했다. 북경에 가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긴 영국, 프랑스 군은 조약 체결이 이뤄진지 1년이 되는 1859년 6월에 북경에서 비준을 하기 위해 북상하였는데 북당으로 상륙하라는 청국 정부의 요청을 무시하고 대고로 와서 해변의 장애물을 제거하다 승격림심이 지휘하는 대고 포대의 포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영국 언론은 중국이 조약을 파기했으며 보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칼 마르크스가 지적하듯이 프랑스 공사가 런던에 주재할 권리가 있다고 해서 프랑스 공사가 군대를 이끌고 템즈강을 침공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천진조약에는 장강 및 각 항구에 군함의 진입권을 명시했으나 '백하'에 대한 진입권은 명시하지 않았고 '군함이 위협행위나 해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자유로이 진입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으므로 청군이 설치한 장애물을 자기 마음대로 제거하려한 것은 엄연한 위협행위이자 도발이었다. 이것은 영국이 조약을 먼저 파기했다는 것이고 외무장관 러셀이나 조약을 비준하러 온 특명전권대사인 브루스 역시 이 사실을 인정했었다. 반면 미국은 북당에 상륙하라는 청국 정부의 요청을 수용하고 북경으로 가 대통령의 친서를 전하고 북당에서 비준서를 교환했었다.

아무튼 청과 영국, 프랑스의 갈등은 폭발해 1860년 2월에 예비 병력에 본국 증원 병력까지 추가하여 영국은 지상군 약 20,000명에 173척의 병력을 동원했고 프랑스는 병력 6,300여명과 군함 33척을 동원했다. 이들의 목표는 바로 수도 베이징.

베이징으로 진격하기에 앞서 발해만의 주요 항구를 모조리 초토화시키고 점령한 연합군은 러시아 공사 이그나티에프의 정보를 받아 방어시설이 없는 북당에 상륙해서 문제의 대고포대를 후면에서 공격해 청군을 섬멸하고 포대를 초토화 시켰다. 이에 협상을 다시 재개했으나 협상은 부결되었고 마침내 8월 3일 톈진에 상륙하여 수비하던 청군을 격파하고 베이징으로 진격했다.

공포에 질린 함풍제와 주전파는 일제히 열하로 튀었고, 팔기군을 완파한 연합군은 결국 베이징을 함락시켰다. 베이징이 외적에 함락된 것은, 1644년 명의 멸망 이후 무려 200년만의 일이었다. 당장 청도 베이징을 함락하지 않았고 그냥 투항한 명군의 안내를 받아 입성했을 뿐이었기에 충격은 컸다.

한편 북경 외부에는 별궁인 원명원이 있었는데 전국 에서 청 황제에게 진상된 각종 보물들과 진기한 동물들이 서식했던 동양 최고의 정원이자 보물창고였다. 다시 말하면 황제의 콜렉션 보관소이자 놀이터. 이 사실을 안 연합군은 이곳에 쳐들어가 집중적으로 약탈했고, 그 후 죄다 불태워버렸다.[32] 도망간 황제에게 보내는 연합군의 경고였다.

결국 청은 저자세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결국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여, 톈진 조약에다가 추가로 개항장을 더 개항하고 배상금도 늘어났으며 홍콩에 접한 구룡반도까지 추가로 할양해야 했다. 여기에 통상/포교의 자유와 중국의 내륙수운인 양쯔강에서의 군함 항해까지 인정하는 등 온갖 굴욕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러시아에게는 이 조약을 중재했다는 명분으로 연해주를 내줘야 했다. 게다가 말이 좋아 중재지 러시아도 여차하면 연합군에 합류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즉, 협박이었다.

5. 전쟁이 낳은 결과

이때까지만 해도 서양 열강들은 청에 대해 대국, 잠자는 사자 등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으나 이후 중국은 세계 강대국에서 서구 열강[33]의 호구로 전락한다. 베이징 조약을 맺은 이후 중국은 서구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놓이게 된다.

또한, 아시아에서는 중국 대빵의 질서가 무너지고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은 청의 조공 국[34]이었지만 청의 정보 전달도 늦고 부정확했다. 조선은 청국의 관영에서만 제한적인 정보를 받았고, 그러한 정보는 당연히 제대로 된 것일 리가 없었다. 조선은 되려 제1차 아편전쟁을 영국이 토벌된 것으로 받아들였고 후에 전라도 지방에 떠밀려온 프랑스 배가 "너희들 알고 있는 것과는 다름 ㅇㅇ"이라고 전했는데도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북경이 함락된 제2차 아편전쟁은 당시 조선에도 전해져 적잖이 충격을 안겨 주었지만 단순히 양이들의 분탕질로 황제가 북쪽으로 잠시 피신한 걸로 해석해 전혀 대외 관에서 변화가 없었다.

"양이와 억지로 화친하였지만 외구(外寇)가 점점 치성하여 황가(皇駕)가 북수(北狩)하기에 이르렀으니, 천하가 어지럽지 않다고 이를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궐(城闕)·궁부(宮府)·시창(市廠)·여리(閭里)는 편안하기가 옛과 같고, 장병이 교루(郊壘)에 주둔해 있는데 기색(氣色)은 정돈되어 태연하며, 적이 근성(近省)에 숨어 있는데 방어함이 침착하고 여유가 있으니, 이는 민심이 일에 앞서 소란스럽게 하지 않고 조정의 계략도 기한을 주어 군색하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기사]

중국 또한 이에 충격을 받고 서구의 것을 배우자는 양무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세계사 교과서에 나온 것만큼 중국인들이 받은 충격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고 한다. 워낙 땅덩어리가 크기 때문에 저 멀리 최남단에서 벌어진 전쟁에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었고(...) 예전부터 중국은 중화사상이 팽배했기에 아편전쟁의 패배는 "에이, 재수 없이 똥 밟았다."라는 수준. 진짜 청 정부가 심각하게 생각한건 아편 전쟁이 아니라 태평천국의 난이었다. 실제로 아편전쟁 이후에도 중국의 국내 정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냐면, 아편전쟁으로 개 털리고 난 후에도 서양 기술을 받아들일 생각은 별로 없었기에 꽤 오랫동안 무인시험에서 여전히 '말을 타거나 활을 쏘는 기술'을 시험과목으로 유지했을 정도였다. 결국은 청일전쟁 패배... 근데 이건 사실 유목민족인 만주족의 영향이 컸다. 후에 난을 일으키는 한족 지식인 출신 군벌들에게 이 사건은 매우 충격적이라 상당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자국 문물을 까는 중까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한편 서양식 화기와 훈련을 도입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방식의 차이가 나는데, 중국은 서구의 조선 기술이나 군사 기술 등으로 만들 수 있는 것들만 받아들이기 시작한 반면, 일본은 이런 기술뿐만 아니라 대량생산 체계, 그 기술, 그것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근대식 교육과정 또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정작 중국이 근대화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1860년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천자가 피난 가는 사태에까지 치달은 제2차 아편전쟁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이듬해 청국은 총리아문을 발족한 뒤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국제 조약에 관심을 가지고 1864년 마틴에 의해 만국공법(만국율례)이 번역되기에 이르지만, 만국공법 소개 이후 난리법석이라고까지 표현되던 일본과 달리 정작 청국은 여기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청국의 외교 정책은 만국공법을 서양을 견제하는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등, 일본이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불평등 조약 개선에 나섰던 것과 달리 방어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결국 이 결과가 나타난 것이 바로 청일전쟁(1894)으로, 따지고 보면 중국이 제대로 충격을 먹은 것은 아편전쟁 때가 아니라 청일전쟁(1894)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어떻게 동쪽 오랑캐가 우리 따칭[大淸]한테!

다만, 본의 아니게 조선은 아편에 찌든 청으로부터 덕을 봤는데, 아편 중독으로 건강을 해친 중국인들 사이에서 이전부터 명약으로 알려져 있던 조선 인삼의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 마침 이 때 조선에서는 18세기 후반 이후 인삼 재배가 성한 이래로 홍삼 가공이 흥하던 시점이라, 18세기 중반 미국 백삼의 중국 유입과 일본의 인삼 재배로 적자로 돌아섰던 무역 수지가 크게 개선되었다. 물론, 세도정치의 폐해와 19세기 후반의 무역 개방으로 얼마 안 가 상황이 더욱 크게 악화되어 버렸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계기로 중국을 뜯어먹고 엄청난 이익을 얻는다. 또한, 러시아도 이때 영불과 중국을 중재하면서 슬금슬금 중국을 등쳐먹기 시작했다. 당연히 아편이 퍼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고 중국 전역이 마약 중독에 시달렸다. 다만 중국에 아편이 급속도로 퍼진 것은 맞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득은 줄어들었다.[36] 이유는 이젠 중국인들이 스스로 아편을 제조하기 시작해서이다(...).

이 전쟁은 중국이 지금까지 마약 범죄에 극도로 민감해진 계기가 되었다. 아편전쟁으로 유례없는 치욕을 당한 뒤 광서신정 때부터 아편단속을 꾸준히 강화해온 결과, 중화권 국가(중국대륙, 대만,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의 마약 정책은 엄격하다. 특히 중국본토의 마약 정책은 주변 국가들과 비교해도 유달리 엄해졌으며 일정량 이상 제조, 유통까지 가게 되면 최소 종신형에 사형이 선택 옵션이다. 심지어 외국인이라도 얄짤 없어서 한국인 마약사범이 체포되자 바로 사형 때리고 실제로 집행한 일이 2014년 말에도 있었다. 참고로 이 당시 한국인 마약사범을 체포하고 바로 한국 정부에게 사형을 집행할 것이라고 통보를 날렸으며, 이를 접수한 한국 정부 측에서 형을 집행하지 말고 당장 한국으로 양도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중국은 이를 쿨 하게 씹고 형을 집행한 다음에 집행 끝났다고 통보를 날리고 끝. 지금 북한이 중국에도 마약을 팔고 있는데, 당장 중국 국민들, 특히 중국 청년들이 북한을 사실상 내놓은 자식 취급하며, 남한이 먹든 말든 대륙과 반도의 경계인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오지만 않으면 그냥 내버려두자고 하는 이유가 북한의 마약이다. 영국인이 마약 범죄 저지르다 걸리면 영국 정부에 사형 집행 끝났다고도 안 알릴 듯. 싱가포르는 아예 입국신고서 서류에 마약 밀수는 사형이라고 경고문구가 써져 있다. 다만 이에 대해 과장된 면도 없지 않은데 옛 버전에는"실수건 의도건 투약만 하면 5~10년을 기본으로 때린다"는 서술이 있었으나 실제 성룡의 아들인 방조명은 반년 징역살이에 그쳤다.

한편 아편 무역에 정면으로 맞섰던 임칙서는 마약과 싸운 것 말고도 원래 청렴결백에 능력까지 겸비한 인물이라 현재 중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사족으로 이 아편전쟁 때문에 영국에서 나온 약을 빨았다고 일컬어지는 각종 기행이나 해괴한 물품, 작품들을 일컬어 홍차에 아편을 탔다 는 글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또 사족으로 학교대사전에서는 담배를 둘러싸고 교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사투를 아편전쟁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담배도 아편과 마찬가지로 마약류에 속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비유인 듯.

6. 관련 항목


  1. [1] 이 편지는 1840년 1월에 영국에 도착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영국 정부는 이 편지를 정식 외교문서로 인정하지 않았다
  2. [2] 사실, 당대 유럽마약의 위험성을 아직 제대로 모르고 있었기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자가 당시 중국의 아편 재배는 합법이라는 헛소리를 덧붙였다는 것이다.
  3. [3] 이후, 총리가 되며 이후 1889년 인도 아편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제정한다.
  4. [4] 중국에서 오랑캐라는 것은 중국식, 즉 유교 이데올로기 식의 통치를 하지 않는 국가나 사람들을 통칭하여 이르는 명칭이었다. 중국 측에서는 현재의 외국인과 같은 의미의 명칭으로 썼으나 서양 측에서는 이 명칭을 매우 혐오하였고 결국 2차 아편전쟁 이후 폐지되었다.
  5. [5] 龔自珍, <明良論>, 1814, 閔斗基 外編 , 1981, p.178
  6. [6] 이러한 성장 둔화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요인이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정설이 나오지 않고 있다. 과거에는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이로 인한 토지의 과밀화로 만들어진 고차균형의 함정(high-level equilibrium trap)이 제기되었으나 이후에도 인구가 완만하게 상승하고 토지의 과밀화가 농업기술의 발전과 토지의 개간으로 감당이 가능하다는 연구가 나온 이후에는 유야무야되었다.
  7. [7]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중국에서는 살인자를 무조건 사형했다. 물론 청나라 측도 이미지 관리(...)의 필요성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으므로 처벌을 상대방 국가에 위임하거나 혹은 대상자를 줄이는 것으로 대체하였지만 문명국이라고 자칭하던 서양에서는 기겁할 노릇이었다. 한편 중국인들은 처벌이 너무 관대하다(...)고 불만을 품었다. 헌데 여담이지만 당시 영국에서는 1실링 이상의 절도 행위는 사형으로 다스렸다.
  8. [8] 유독 이 문장을 강조되는 이유는 하단의 임칙서 파견 부분을 참고.
  9. [9] 명, 청시기 중국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세는 생산 비용에서 임금의 비중이 극단적으로 낮아지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낮은 인건비가 중국 입장에서 기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어 결국 산업혁명 진행을 가로막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거기다 기껏 뚫어 놓은 광동 항을 통해 들어오는 모직물들은 중국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유통되었는데, 당연히 아열대 지방인 이 지역에서는 땀 흡수나 통풍 기능이 떨어지는 모직물이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이를 대체해야 할 상품은 인도산 면을 사용한 면직물(캘리코)이었지만, 앞서 언급되었다시피 모직물이고 면직물이고 남아도는 인력을 갈아 넣어 만드는 대륙의 공장제 수공업이 뿜어내는 위엄 앞에서는 영 좋지 않았다. 게다가 이러한 기계 면직물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2차 아편전쟁 파트에서 후술.
  10. [10] 흔히 교과서에서 배우는 삼각무역은 아편전쟁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으며 2차 아편전쟁이 종결되고 난 이후에나 활성화되었다.
  11. [11] 사실 이는 영국 입장에서도 손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엄밀히 말해 비용은 민간 상인이 지불하는 것이었고 오히려 차가 수입되는 과정에서 이득을 보았기 때문이다. 당장 당시 영국 왕실의 전체 수입 중 17%가 차의 관세로 확보된 마당에...
  12. [12] 다만 이건 개인의 편차가 심해서 오늘날 일반인이 담배 피듯 아편을 흡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서 청나라 말기의 관료 유곤일은 하루에 아편을 100g이상 흡연하면서도 공무 처리에는 어떠한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13. [13] 일설에 의하면, 임칙서는 전도유망하던 형이 아편 중독으로 목숨을 잃은 것을 계기로 아편을 적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14. [14] 청나라의 사상가. 경세론에 깊이 관심을 갖고 사회 기강을 이완할 것을 주장하고 서구 열강의 침략을 경고했다. 공자진의 시 기해잡시(己亥雜詩)의 125(혹은 220번째 수)는 청 말기의 혼란상을 논할 때 종종 인용된다.
  15. [15] 청에서 특정한 일에 전권을 위임하는 임시 벼슬. 3품 이상은 흠차대신. 이하는 흠차관원이라 한다.
  16. [16] 대신 임칙서는 아편 1상자 당 차 5근을 줄 것을 약속했으나 턱없이 적은 양이었고 실질로 몰수나 마찬가지였다.
  17. [17] 즉 청나라 자체의 행정 집행을 양국 간의 외교 분쟁으로 비화하게 하겠다는 얄팍한 속셈이면서 향후 영국 정부가 아편을 보상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했다.
  18. [18] 석회가 물과 접촉하면 끓어오르는데 아편은 열에 약하다.
  19. [19] 당시 미국오스만 제국에서 만든 아편을 취급하고 있었다.
  20. [20] 이후 글래드스턴은 영국 수상까지 오르게 되는데 외교 정책에 있어서 평화주의의 방침을 취하고, 내정 면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하층 계급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많은 개혁을 단행,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의회 정치가로 알려진다. 윈스턴 처칠과 함께 가장 위대한 영국의 수상으로 여겨진다.
  21. [21] 재차 언급한다. 당시 영국 법률은 타국에 체류할 경우 타국의 법률을 준수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22. [22] 병선 60척과 서양식 대포 200문을 확보하고 쇠사슬로 광저우로 올라오는 강을 막아 버렸으며, 민병대를 소집했고 서양인에게 상금을 걸어 내통자를 차단하였다.
  23. [23] 이것은 영국인들이 미국 상인을 자처하면서 계속 무역했기 때문이었다. 북경에서는 아편 무역을 완전히 단절된 게 아니라고 파악했다.
  24. [24] 즉 청 조정은 천진의 군함을 군사 시위가 아니라 하소연하고자 온 집단이라고 오판한 것이다.
  25. [출처] 25.1 강상규,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 2007, 논형, p.30~31
  26. [26] 물론 공행도 건륭제 시기부터 청 조정에게 반강제로 뇌물을 바쳐야만 했다. 심지어 남경조약 배상금조차 이 사람들이 일부를 감당해야 했다.
  27. [27] 청 조정과 협상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28. [28] 그러나 그 배에 영국 국기가 달려있었다는 증거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29. [29] 1차 아편전쟁 당시에는 외무장관이었다. 참고로 이 사람,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책 등에서는 어느 날 나라일로 바쁜 와중에 짬짬이 시간을 내서 산책을 나갔다가 우유를 배달하다가 우유 통을 엎지르고 깨뜨린 소녀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 소녀를 위로해주며 우유와 우유 통 값을 자기가 대신 주려다가 하필 지갑을 두고 나와서 내일 다시 만나면 값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다음날 내각회의로 바쁜 와중에도 소녀와의 약속을 생각해서 장관들에게 굳이 말하지 않고 소녀와 약속한 곳에 다시 만나서 우유와 우유 통 값을 지불하고 다시 회의실로 돌아와서도 그런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라는 훈훈한 이야기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자국 어린이는 끔찍이 생각하는 이런 좋은 사람이 다른 나라에 대한 예의는 생각하지도 않는 모양
  30. [30] 사실 영국 측에서는 전술한 것처럼 1차 아편전쟁이 너무 일찍 끝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당시 1차 아편전쟁을 지휘한 페리 제독은 "1년만 더 전쟁 했어도 중국을 확실히 밟았을 건데..." 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후술에서 볼 수 있겠지만 이 전쟁에 완전히 패배함으로써 청나라는 제국의 위상을 잃어버리고 덩치 큰 국제 호구가 되었다.
  31. [31] 사실 루이 나폴레옹은 큰아버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영국과 적대한 것이라고 보고 영국과 협조 관계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다고 서유럽의 양대 강국인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오랜 경쟁과 갈등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해관계가 상충되지 않는 아편 전쟁이나 크림 전쟁 등의 사건에서는 그럭저럭 협력할 수 있었다.
  32. [32] 여기서 털린 각종 보물 또는 유물들이 오늘날 가끔 경매에 나오기도 한다. 중국 입장에선 속 터질 일.
  33. [33] 영국의 아편전쟁 이후 미국, 프랑스, 러시아까지 이삥 뜯기에 가담해서 중국을 삥 뜯기 시작했다.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 이후엔 독일도 이에 합류.고만해, 미친놈들아!
  34. [34] 단 여기서 조공을 속국의 관계로 봐선 곤란하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조공은 속국관계가 아니라 외교 관계를 뜻하였다.
  35. [기사] 35.1 조선왕조실록 철종 13권, 12년(1861년, 신유년, 청 함풍(咸豊) 11년) 3월 27일(을묘) 첫 번째 기사
  36. [36] 다만 1851년경의 아편 수입은 1840년의 두 배에 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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