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그로텐디크

Alexander Grothendieck

표준어 표기는 '알렉산더 그로텐디크'지만 알렉산데 그로센딕이라는 표기도 많이 통용되고 있다.

1. 소개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파리에서
2.3. IHES 설립과 그 이후
3. 정치적 성향

1. 소개

프랑스에서 활동한 독일 태생의 수학자로, 1928년 3월 28일생. 20세기 최고의 기하학자라고 일컬어지며 함수해석학, 호몰로지 대수학, 대수기하학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수학자였지만 1960년대 후반에는 생물학, 물리학에도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주로 리처드 파인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필즈상 수상자 중 유일한 무국적자.

종이가 없으면 사고가 되지 않으며 늘 펜으로 적어가며 생각해야 연구가 진행되는 버릇이 있었다. 전형적인 야행성 연구가여서 오전에 푹 자고 밤에 일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눈만 감으면 바로 잠에 빠져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한창 연구에 매진할 때에는 길바닥이나 방바닥을 가리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자고 싶으면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유대인 수용소에서 복싱을 익혔으며 평생 복싱을 연마했다. 이 실력으로 교수 신분일 때 경찰관 2명을 때려눕혔던 전력도 있다(...).

그로텐디크가 보여준 수학적 퍼포먼스로 인해 당대에 활동하던 많은 수학자들이 본의 아니게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르네톰, 히로나카 케이스케, 데이비드 멈포드 등 여러 필즈상 수상자들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하버드의 대수기하학 학파의 수장인 자리스키마저 그보다 한참 어린 그로텐디크에게 완전히 압도당했다고 한다.

그로텐디크와 같은 연구 모임인 부르바키의 리더 격이었던 앙드레 베유는 그로텐디크를 미친 듯이 질투했다고 한다.[1] 하지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지겔 의외로 장 피에르 세르는 그로텐디크보다 앙드레 베유를 더 높이 평가한다. 그로텐디크의 놀라운 점은 만개했다는 현대의 수학에서 스킴, 에탈 코호몰로지 등 난해하면서도 보편적인 개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불가사의함이다.

평생 동안 일류 수학 학술지에 논문을 기재하지 않았다. 참고로 존 내시의 친구인 존 밀너가 편집장이었던 바로 그 학술지였다. 총 논문 수가 60개가 채 안 된다. 그로텐디크가 저술한 책들도 있는데 양이 몇 권 안 되는 반면 두께만큼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가 한창 연구에 전념하던 50~60년대에 그는 본인의 연구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구의 방향을 잡는 데도 능숙했다고 한다. 한창 때 워낙 영향력이 컸고 존 내시가 정신분열증으로 방황했던 어느 한 시기에도 그로텐디크라는 이름을 여러 번 거론했다고 한다. 사실 그로텐디크가 존 내시 내외에 굉장한 호감이 있었다고 한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으며, 우크라이나 태생의 유대인인 아버지 알렉산더 샤피로와 독일계 어머니 항카 그로텐디크 사이에서 캐어났다.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부모가 혁명적 사회주의자였으며 특히 아버지는 과격 아나키스트였다. 이는 훗날 그로텐디크의 정치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33년~1934년에 부모가 파리로 이주한 후 그로텐디크는 함부르크에서 친척의 집에 머물며 자랐으며, 이후 1939년부터는 독일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의 유대인 피난 캠프를 떠돌아야 했다. 이후 아버지는 1942년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하고, 그로텐디크 본인은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의 유대인 강제 수용소를 전전하게 된다. 이때 겪은 경험들은 후의 그의 광기 어린 작업 결과 등 생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후 르샹봉쉬르리뇽이라는 마을로 피신, 현지 학교에서 다니며 이때부터 수학적 재능을 나타냈다. 대학교 때에는 르베그의 측도 이론을 기존의 증명 자료 없이 혼자 힘으로 도출해내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는 프랑스의 몽펠리에 대학교에서 수학을 공부했으며 이 때 그의 수학적 능력에 주목한 교수들의 추천으로 프랑스 파리로 가게 된다.

2.2. 파리에서

그로텐디크는 파리에서 유망한 수학자 집단과 교류하며 수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료 수학자들의 지식의 양과 습득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 다른 수학자들과 협력연구를 하는데에 걸맞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 이유는 그로텐디크가 다른 수학자들이 '합의를 통해' 참이라고 간주하는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싫어했고, 그 개념들을 직접 증명하면서 나아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야심이 매우 커서 쉬운 길을 가기보다는 어려운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을 좋아했고 모든 것을 무척 힘들게 노력해서 얻었다.

그는 그때의 기분을, 동료 수학자들에게 수학은 아주 손쉬운 것처럼 보인 반면 자신은 '느릿느릿 굴을 파며 산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 집단에서 매우 뛰어났던 사람들은 유능하고 저명한 수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30~35년이 지난 후 나는 그들이 우리 시대 수학에 정말로 심오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ㅡ알렉산더 그로텐디크

파리에서 그로텐디크는 앙리 카르탕, 클로드 슈발레, 앙드레 베유, 장피에르 세르. 로랑 슈와르츠 등과 어울렸으며, 로랑 슈와르츠에게 1950년부터 지도받았다. 이 때 그는 함수해석학을 공부, 위상 벡터 공간에 있어 세계적인 전문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로텐디크는 1957년부터 대수기하학과 호몰로지 대수학 방면에 뛰어들었다. 당시 대수기하학과 호몰로지 대수학은 난제와 미결 문제가 넘쳐나기로 유명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어렵다

2.3. IHES 설립과 그 이후

1958년, 그로텐디크는 수학자 장 디외도네의 지원으로 고등 수학 연구소인 IHES를 창설했다. 이 시기 1966년 필즈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동유럽에 전개되던 소련군의 군사활동에 항의한다고 모스크바에서의 시상식에 불참했다. 그나마 그리고리 페렐만과는 달리 IHES 동료인 Léon Motchane이 대리 수상을 했다만... 그러나 1970년, IHES가 프랑스 국방부의 군사용 연구 자금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그는 자신이 설립한 IHES에서 떠나며 잠시 수학 학계 자체를 떠났다.

이후 그로텐디크는 자신이 공부했던 몽펠리에 대학교에서 교수가 됨으로써 다시 학계로 돌아왔고, 이는 1988년 정년이 되어 그가 완전히 학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80년대 말에 완전히 은퇴하게 되는데, 이는 나이에 의한 자연스런 수순으로 보면 맞을 것이다. 2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환갑 때 학계를 떠났다.

은퇴 후 그로텐디크는 프랑스 남부의 농촌에서 농사로 소일하겠다며 자취를 감추었다. 이때 크라포르드상 수상도 윤리적 이유로 거절했으며, 학계는 물론 거의 모든 지인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크라포르드상 수상을 거부한 이유는 스스로 작성한 편지에서 밝혔으나, 같은 대수기하학 연구자이자 필즈상 후보자였으며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에 근무하며 그로텐디크의 제자이기도 한 피에르 들리뉴와 수상금을 나누는 것을 싫어해서였다는 추측도 존재한다.[2] 애초에 돈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싫어요

2014년 11월 13일에 사망했다. 관련기사

3. 정치적 성향

부모와 어린 시절의 영향 등으로 그로텐디크는 정치적으로 급진 좌파 및 평화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마오쩌둥 체제의 중국 공산당에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70년대 중후반부터 수학에서 점점 멀어진 이유 중 하나도 그의 정치 방면의 관심이 커졌다는 것. 환경, 반핵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링크

이런 성향 덕에 반전 시위에도 자주 참여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인데 반전시위의 일환으로 하노이 근교에서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그가 세미나를 열던 때, 미군에서는 하노이에 공중 폭격을 가하고 있었다(...)

더 알고 싶은 사람은 Allyn Jackson의 'As if summoned from the void',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 존 더비셔의 '미지수 상상의 역사' 대수기하 파트, 혹은 그로텐디크의 자서전을 살펴보길 바란다. 또한 구글을 뒤져 보면 그로텐디크의 일생에 대한 많은 글을 찾아볼 수 있으니 역시 참고 바란다.[3]


  1. [1] The Artist and the Mathematician 58페이지.
  2. [2] 원래부터 싫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로텐디크가 풀려고 무척이나 노력한 베이유 추측을 들리뉴가 해결해내서 질투했을 수도 있다고 한다.
  3. [3] https://www.google.co.kr/url?sa=t&rct=j&q=&esrc=s&source=web&cd=1&ved=0CB4QFjAA&url=http%3A%2F%2Fwww.ihes.fr%2Fdocument%3Fid%3D1723%26id_attribute%3D48&ei=DBm4U9L8MKOQ7Ab18oCgDA&usg=AFQjCNGOD68PQjWe-O7dn1hAXiy6EXgDkA&bvm=bv.70138588,d.ZGU&cad=rj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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