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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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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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스미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다.
미국 역사를 총망라해서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개척자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헨리 허드슨

아메리고 베스푸치

존 스미스

조반니 다 베라차노

존 뮤어

메리 웨더 루이스
윌리엄 클라크

새커거위아

키트 카슨

존 웨슬리 파월

닐 암스트롱

혁명가 & 저항가들

마틴 루터 킹

로버트 E. 리

토마스 페인

존 브라운

프레드릭 더글러스

수전 B. 앤서니

W. E. B. 두 보이스

테쿰세

타탕카 이오타케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말콤 엑스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율리시스 S. 그랜트

우드로 윌슨

에이브러햄 링컨

제임스 매디슨

앤드루 잭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로널드 레이건

조지 W. 부시

첫 여성들

포카혼타스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

힐러리 클린턴

마사 워싱턴

오프라 윈프리

헬렌 켈러

소저너 트루스

제인 애덤스

이디스 워튼

베티 데이비스

사라 페일린

범법자들

베네딕트 아놀드

제시 제임스

존 윌크스 부스

알 카포네

빌리 더 키드

윌리엄 M. 트위드

찰스 맨슨

와일드 빌 히콕

리 하비 오즈월드

러키 루치아노

존 딜린저

예술가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앤디 워홀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잭슨 폴록

존 제임스 오듀본

조지아 오키프

토머스 에이킨스

토마스 내스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안셀 애덤스

종교인들

조셉 스미스 주니어

윌리엄 펜

브리검 영

로저 윌리엄스

앤 허치슨

조너선 에드워즈

L. 론 허버드

엘런 화이트

코튼 매더

매리 베이커 에디

빌리 그레이엄

팝 아이콘들

마크 트웨인

엘비스 프레슬리

마돈나

밥 딜런

마이클 잭슨

찰리 채플린

지미 헨드릭스

마릴린 먼로

프랭크 시나트라

루이 암스트롱

메리 픽포드

제국-건설자들

앤드루 카네기

헨리 포드

존 데이비슨 록펠러

존 피어폰트 모건

월트 디즈니

토머스 에디슨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하워드 휴즈

빌 게이츠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

스티브 잡스

운동선수들

베이브 루스

무하마드 알리

재키 로빈슨

제임스 네이스미스

아놀드 슈워제네거

타이 콥

마이클 조던

헐크 호건

짐 도프

세크리테어리엇

빌리 진 킹

출처

}}}

Andy Warhol
앤디 워홀

본명

앤드루 워홀라 주니어 (Andrew Warhola Jr.)

출생

1928년 8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사망

1987년 2월 22일[1] (향년 58세) , 미국 뉴욕주 뉴욕

국적

미국

종교

가톨릭 (세례명 : 안드레아)

신장

180cm

직업

미술가, 영화 프로듀서

학력

카네기 멜론 대학교

서명

1. 개요
2. 생애
2.1. 저격 사건
2.2. 죽음
2.3. 영화, 음악
3. 평가
3.1. 의외의 진지함?
3.2. 유명해져라
4. 기타

1. 개요

An artist is somebody who produces things that people don't need to have.

예술가는 사람들이 가질 필요가 없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예술 시장의 선도자

The Economist #

미국의 화가, 영화 프로듀서로 팝아트의 기수.

본명은 앤드루 워홀라 주니어(Andrew Warhola Jr.) 체코슬로바키아인이었던 아버지의 이름이 안드레이 바르홀라(Andrej Varhola)였으나, 미국으로 이민 오면서 영어식인 Andrew Warhola로 바꾸었다. 팝 아트의 거장이며 예술가는 배고픈 직업이라는 사회의 인식과 달리 현대미술에서 예술적으로, 대중적으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예술가이다.

2. 생애

펜실베이니아피츠버그에서 슬로바키아(당시는 체코슬로바키아) 이민계의 아들로 태어났다. 카네기 멜론 대학교에 진학해 광고 예술을 배워 1949년졸업했다. 그리고 1952년에는 신문 광고 미술부문의 아트 디렉터스 클럽상을 수상했다. 이후 상업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전업 예술가로 전직했다. 유명한 자신만의 작업실인 '팩토리'를 만들어 지인들을 불러모아 사교장처럼 만들고 각종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1960년, 그는 미술의 세계로 발을 옮겨서 배트맨, 딕 트레이시, 슈퍼맨 등의 만화들을 모티브로 작품을 제작했지만, 로이 릭턴스타인의 팝 일러스트레이션을 접한 뒤에 여기서 손을 뗀다. 1961년, 33세의 그는 캠벨 수프의 캔이나 달러 지폐를 모티브로 해 팝 아트를 탄생시켰다. 언제나 대중적인 화제를 선택했는데 마릴린 먼로가 갑자기 죽자, 그걸 소재로 사용해서 작품을 대량생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앤디 워홀은 실크 스크린(silk screen)을 작업에 사용했다. 워홀이 신발 산업에서 일할 때 잉크를 종이에 묻혀서 인쇄하는 블라티드 라인(blotted line)이라는 초보적인 수준의 인쇄 기술을 개발했다. 한국 웹에서는 "브로테드 라인"이라는 국적 불명의 용어가 돌아다니는데 일본 웹에서 blotted line을 가타카나로 ブロッテド・ライン(Burottedo rain)으로 표기했고, 원 표기를 참고하지 않은 채 이를 우리식 영어 표기법으로 지레짐작한 표기가 한국어 위키백과나무위키에 그대로 실리게 되었다. 이것이 블로그와 각종 커뮤니티에 퍼진 것. 현재는 위키백과와 나무위키에서 해당 내용을 삭제하였다.

각종 일과 사정에 쫓겨 사생활, 대인관계에서는 힘들어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벌인 일만 보면 겉보기에는 상당히 난잡한 바람둥이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여러모로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지하실에서 어머니가 사준 필름 사진기와 인화기로 사진을 찍어서 인화하는 것이 취미였다고...

여담으로 워홀은 장 미쉘 바스키아후원자이기도 했는데 초반에는 서로 사이가 좋았으나 바스키아가 너무나 유명해져 버린 자신을 감당하지 못해 공동 전시 실패를 계기로 워홀과의 연락을 끊었었다. 그러나 1987년 워홀의 사망소식을 듣고 1년뒤 바스키아도 약물 중독으로 워홀의 뒤를 따랐다.

2.1. 저격 사건

1968년 6월 3일, 40세에 접어든 그는 전남성 말살단(S.C.U.M. /Society for Cutting Up Men) 소속의 극단적 여성주의자(일명 페미니스트) 밸러리 솔라나스라는 여성에게 권총으로 피격을 받는다. 이 솔라나스란 인물은 황당한 인물로 남의 집 옥상이나 호텔에서 살고 있었으며 망상에 사로잡혀 지로디아스와 워홀이 자신을 몰아내려 결탁한다고 생각하곤 그를 저격했다. 이 총격으로 인해 워홀은 흉부를 열고 심장 마사지를 해야 할 정도의 중상을 입었고, 평생 의료용 보호대를 차고 살아야하는 장애를 겪게 되었다. 이는 이후 그의 삶과 작품 활동에 큰 그늘을 드리우게 된다.

수술 직후 앤디 워홀의 모습을 당시 앨리스 닐이 작품으로 남겼다.

워홀을 쏜 뒤로 정신이상자로서 3년 동안 교도소에서 지낸 그녀는 1971년 석방 이후에도 워홀을 죽인다고 말하여 정신병원에 갇혔다. 이렇게 여러 번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하던 끝에 사회로부터 미친 여자로 무시당했다. 페미니스트 예술가 울트라 바이올렛은 늘그막 그녀를 만났는데 집도 없이 자서전과 여러 책을 낸 수익금으로 여전히 여러 호텔을 오고가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1987년 워홀이 죽고나서 그녀와 만난 바이올렛 회고에 의하면 솔라니스는 여전히 워홀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하는 통에 바이올렛이 워홀은 이미 병으로 죽었다는 말을 하자 못 믿어했다. 바이올렛도 솔라니스에 대하여 망상증이 심하여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그녀를 평가했다. 결국 1988년 한 호텔에서 돌보는 이 없이 갑자기 폐렴으로 죽는다. 죽기 얼마 전까지도 그녀는 여전히 워홀을 어찌 죽일까 소리만 했다.

이후 밸러리 솔라나스를 남성우월주의의 희생자이자, 이에 저항한 영웅으로 그리는 작품들이 다수 발간되었다. 이 중 일부는 솔라나스 본인이 쓴 것이다. 대표적으로 밸러리 솔라나스를 미화한 영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2]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미화와는 달리, 전형적인 정신병 환자의 망상으로 일어난 불행한 사건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2.2. 죽음

1987년 2월 21일, 뉴욕의 코넬 의료센터에서 담낭 수술을 받은 다음 날 상태 악화로 58세라는 나이에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수술을 받은지 얼마 안 되어 간호사와 농담을 하거나 동료와 전화 통화를 하는 등, 금방 호전되는가 싶다가 갑작스레 사망하였다.

죽고나서 워홀의 침실이 공개된 적이 있는데, 그의 기행과 명성에 걸맞지 않게 독실한 신자 할머니네 방같이 검소했다고 한다.

본래 그는 예술은 대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대량 생산해서 저렴하게 팔았다. 허나 정작 그가 죽고나서 그의 작품이 세계에서 제일 비싼 예술품이 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

2.3. 영화, 음악

그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도 있는데, 하나같이 실험적이어서 대중적이지 않다. 먹는 장면, 자는 장면[3], 펠라치오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4]의 모습 등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면을 '수십시간동안' 찍고 그대로 틀기도 했다고.[5] 후대의 평론가들은 이를 두고 편집에 의해 흥미로운 부분만 발췌되는 영화나 방송의 실태에 반대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참고로 이 영상은 맥컬리 컬킨이 패러디했다.#

**** 이라는 제목(또다른 제목은 별 네개(Four Stars), 24시간 영화)의 영화를 1967년에 만들었는데 총 러닝타임은 18시간 20분.

1974년에 앤디 워홀의 프랑켄슈타인(원제는 Flesh For Frankenstein)을 제작했는데 3D로 제작됐다. 토니노 게라[6] 등이 각본을 썼고, 카를로 폰티 등이 제작을 맡기도 했다.

BAD라는 제목의 범죄물 영화를 1977년에 제작 총지휘를 맡기도 했는데, 한 여자가 전화를 받는데 귀찮게 했다고 아기를 고층빌딩에서 던지는(그것도 잠깐이지만 피와 시체를 보여준다!) 충격적인 장면이 나오는 괴작 아닌 괴작이다.

1974년 <Blood For Dracula>가 '앤디 워홀의 드라큘라'로 개봉되었다. 디자인이나 미술쪽으로 참가했다고. 처녀만 먹고사는 드라큘라가 어느 한량과 정력 대결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황당하게도 비토리오 데 시카가 배우로 나온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앤소니 버제스 원작의 문제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스탠리 큐브릭보다 먼저 영화화했다. 제목은 비닐.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명작이자 음악사의 명반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의 프로듀서이기도 하며 해당 앨범의 특이한 자켓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리더였던 루 리드는 워홀을 매우 높게 평가했고,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다른 멤버인 존 케일과 1990년 재결합하여 앤디 워홀 헌정 앨범인 Songs for Drella를 내기도 했다.

3. 평가

하나만 찍어도 예술로 인정받는 상당히 매니악한 현대미술을 비꼬기 위해 일부 사람들이 '앤디 워홀이 하면 천재라는거냐'라며 비꼬곤 하는데, 선구자라는 점에서 천재 맞다. 특히 워홀의 작품은 이렇게 해석해도 맞는 것 같고, 저렇게 해석해도 맞는 것 같은 면이 있어서 굉장히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현대미술에서는 이렇게 작품 하나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이를 해석해낼 수 있는 걸 더 가치있는 것으로 치기 때문에 워홀이 인기가 있는 것이다.

한편, 직접 앤디 워홀을 알던 사람들은 앤디 워홀이 다른 사람들의 재능에 기생해서 유명세를 탄, 생각에 깊이가 없는 사기꾼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3.1. 의외의 진지함?

일반인들은 팝아트를 그냥 당대 사회에서 유행하는 것들을 추려다 작품으로 만들면 되는 것 정도로 취급하지만, 의외로 워홀의 팝아트는 더 심층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워홀이 한 작품 중에는 <13명의 수배자들(thirteen most wanted men)>같이 당대의 흉악범죄자들을 벽화로 만들거나, 언론에 보도된 인종범죄 사진을 <마릴린 먼로>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러번 병치해서 프린트 하기도 했다. 이런걸 보면 단순히 가벼운 흥미거리로 당대 사회 유행을 취급한 건 아닌 모양이다. 일부 평론가들은 비슷한 프린트들을 반복하는 워홀의 수법이 기술발전으로 이미지가 대량 복제되면서 정작 개별 사건이나 인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 현대사회를 풍자한 것이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나치 독일 때문에 진지할 수밖에 없는 독일에서는 의외로 이렇게 워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확실하진 않다. 워홀 자체가 자기 작품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지 않았기 때문. 기자가 '이 작품은 어떤 의미인가요?' 하고 물으면, 되레 역으로 기자에게 '당신은 이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라고 묻고, 기자가 자신은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하면, 그것도 일리가 있군요 하고 끝내는 식이라고.[7] 말투 자체도 뭔가 나른해서 정작 워홀이 정확히 뭘 의도하고 저런 짓을 한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근데 또 그 모호한 그리고 기묘한 스탠스가 사람들의 논쟁과 관심을 끌어들여 예술적으로 성공한 것이기도 하다. 은근히 워홀은 그런 면에서 이미지 관리를 잘한 편이다.

3.2. 유명해져라

"미래에는 누구나 15분간 유명해질 수 있다.[8]"라는 말로 유명하지만 이 말은 워홀 본인이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찍은 사진사가 한 말이었다고 워홀이 직접 언급하였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성행하고, 인터넷의 발달로 누구나 쉽게 UCC를 이용해 자신을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줄 수 있는 오늘날에 진정으로 어울리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본래 의미는 방송에 범죄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보도되는 것을 보고 한 말이다. 즉 누구나 범죄를 저지르면 방송에서 15분간 유명해지는 당시 미국 사회의 세태를 비꼰 말인 셈이다. 뭐 현대사회란게 사가와 잇세이처럼 자기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을 내는 시대이니 이는 미국에만 해당되는 사례는 아닐 것이다. 테드 번디강도얼짱 같은 사례도 마찬가지.

한국에서는 "유명해져라. 그러면 당신이 을 싸도 사람들은 박수를 보낼 것이다(Be famous, and they will give you tremendous applause even when you are actually pooping)"란 앤디 워홀의 어록으로 유명한데, 한국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관련 포스팅. 이는 러시아식 도치법 똥을 싸라. 그러면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박수를 보낼 것이다[9]라고 알려졌기도 하다(...) 다들 납득한다. 길거리 같은데서 똥을 싸면 정말 유명해지니까. 특히 인터넷에서. 하지만 박수를 보내 줄지는... 박수를 쳐라, 그러면 유명한 사람들이 똥을 쌀 것이다 이 발언은 현대미술의 현실(자질 검증 부족, 버블, 부정 부패 등)을 비판할 때도 자주 인용되며, 반대로 현대미술을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말이라는 평도 있다.

위에 서술했듯 워홀은 모호하게 말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단정적이고 직설적인 어록을 남기지는 않았다.

각설하고, 1978년에 그는 실제로 오줌을 싸서 작품을 만든 적이 있다.(...) 뭐, 다른 예술가 이야기로 자신의 대변을 깡통에 밀봉하여 친필 서명과 시리얼 넘버까지 매겨 출품된 작품도 세상에 실존하긴 한다.

4. 기타

  • 출생지인 피츠버그에는 앤디 워홀 미술관과 앤디 워홀 다리가 있다. 워홀이 제작에 참여한 영화를 정기적으로 상영해준다. 근데 한 작품 복사해서 여러개로 파는 예술을 했던지라 MoMA테이트 모던에 오히려 유명한 작품이 많다. 격한 빠심이 돋지 않는다면 굳이 가볼 필요는 없다.
  • 위 사진 속 워홀의 저 머리, 가발이다(...). 현재는 앤디 워홀 미술관의 소장품. 워홀은 대머리였다. 20대에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했고, 20대 후반부터 은발 머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은발 가발을 썼다. 그래서 젊었을 적 사진을 보면 얼굴은 젊은데 머리는 하얗다. 이는 머리색이 항상 흰색이면, 늙는 것을 인지 하기 어려워 늙지 않기 위함었다고도 한다.
  • 여러 여자와 염문을 뿌리고 다녔지만 게이였고 평생 동정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끔찍한 효자라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바로 어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서 모시고 살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가 아버지 사후에 혼자 성당에 다니시기 불편할까봐 성당을 같이 다녔다. 오죽했으면 그 당시 사람들이 일요일 새벽까지 문란한 파티에 있던 워홀이 몇 시간 뒤에는 어머니하고 성당에 있다고 까댔다.
  • 데이비드 보위가 영화에서 앤디 워홀로 나온 적이 있는데[10], 얼굴은 그리 닮지 않았지만 평소 파격과 기행을 일삼던 보위인지라 분위기는 많이 닮았다.


  1. [1] 1996년작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에서는 사고 후유증으로 1978년에 사망한 거로 되어있지만 틀린 말이다.
  2. [2] 참고로 이 영화의 음악 담당은 앤디 워홀이 후원한 록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멤버 존 케일이다.(...)
  3. [3] 원래 브리지트 바르도가 출연하기를 원했는데, 대신 그의 애인 존 조르노를 찍었다. 그것도 나체로. 1964년 1월 17일에 첫 상영을 했는데 9명이 관람하고 2명은 1시간 정도가 됐을 때 나갔다. 이 영화를 상영했을 당시에는 무성영화라서 계속 록 음악을 틀었다고 한다. 이 영화에 평론가들은 관심을 나타냈고, 처음에는 500명에 달하던 관객 수가 상영 도중 한 사람이 일어나서 무대로 올라가 큰 소리로 "일어나라!"고 소리치며 사람들을 선동하자 약 200명 가랑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극장측에 돈을 물러달라고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영화를 끝까지 관람한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들도 약 50명 정도 있었다.
  4. [4] 총 8시간 5분 짜리다. 대략 새벽 3시에 찍었다고 한다.
  5. [5] 여담으로 유명 고전게임 리뷰어 AVGN사막 버스 리뷰를 할때 이 영화를 언급한적이 있다. '앤디 워홀이 죽음에서 살아나기라도 한겁니까?!' 라는 대사는 덤. 저 사막 버스는 8시간 동안 운전만 해야 하는 게임이다.
  6. [6]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페데리코 펠리니,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작품 등등 다수의 각본을 썼다. 2012년 3월 21일에 항년 92세로 타계했다.
  7. [7]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의 흔한 스탠스이기도 하다. 작품과 작가를 분리해내는 과정에서 작품자체가 자신을 정의하도록 하는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가치관이다.
  8. [8] In the future everyone will be world-famous for 15 minutes.
  9. [9] 바리에이션으로 똥을 싸면서 박수를 쳐라. 그러면 유명해질 것이다. 도 있다.
  10. [10] 장 미쉘 바스키아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바스키아에서 앤디 워홀 역으로 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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