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오밍

이름

야오밍(요명, 姚明)

생년월일

1980년 9월 12일

국적

중국

출신지

상하이

229cm[1]

체중

140.6kg

포지션

센터

드래프트

2002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휴스턴 로키츠에 지명

등번호

11번

소속팀

상하이 샤크스 (1997~2002)
휴스턴 로키츠(2002~2011)

수상내역

All-NBA Second Team 2회
All-NBA Third Team 3회
NBA All-Rookie First Team (2003)
FIBA Asian Championship MVP (2001, 2003, 2005)

상하이 샤크스 영구결번

No. 15

휴스턴 로키츠 영구결번

No. 11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야오밍

헌액 연도

2016년

1. 개요
2. 샹하이 샤크스
3. NBA 커리어
4. 짧은 전성기, 계속되는 부상 그리고 은퇴
5. 왜 이렇게 자주 부상을 당했나?
6. 명예의 전당 헌액
7. 이것저것
8. 야거장?

1. 개요

부상 없이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면 그가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센터 다섯 명에 드는 위대한 선수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2]

샤킬 오닐 . 야오밍의 은퇴식 헌사.

만리장성(Great Wall)

아시아 농구 역사상 최고의 농구선수.[3]

아시아 불세출의 센터

NBA 선수. 현 중국농구협회(CBA) 주석(회장).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인이며, NBA드래프트 역사상 최초이자, 사실상 최후의 아시아 출신 1라운드 1순위 지명자이다.[5]

참고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키가 크다. 아버지의 키는 208cm, 어머니의 키가 190cm. 두 사람 다 전직 농구선수이다.

야오밍은 이런 부모의 유전자를 받아서 태어났다. 태어날때 몸무게가 5kg이었고 10살때 키는 165cm였다. 그리고 후술 할 그의 딸은..... 그리고 그는 13세때 상하이 샤크스의 주니어팀에 입단하면서 농구선수의 길을 걷게 된다.

2. 샹하이 샤크스

야오밍은 매일 10시간씩 연습하는 강행군을 치르며 4년동안 주니어팀에서 뛴다. 17살때 성인팀으로 승격되면서 본격적으로 성인무대에 데뷔한다. 야오밍은 루키시즌에 평균 10득점 8리바운드를 기록하면서 준수한 활약을 보였지만, 다음시즌에 발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으면서 한경기도 뛰지 못했다. 이때 야오밍의 제자리점프는 10에서 15센티 정도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번째 시즌 네번째 시즌에 팀을 CBA 파이널에 올리는 등의 공을 세운다. 하지만 당시 중국최고의 농구스타 왕즈즈가 버티고 있던 빠이 로키츠(상무처럼 군인팀)에게 패배해 두번이나 준우승에 머물렀다.[6] 하지만 2001년 왕즈즈가 NBA로 진출하면서 빠이 로키츠가 약화되자 바로 그해 결승전에서 빠이를 꺾고 CBA 챔피언이 된다. 샹하이 샤크스의 현재까지 유일한 우승. 이때 야오밍은 플레이오프 기간동안 평균 38.9점 20.2리바운드 76%의 필드골 성공률을 기록하면서 맹활약했다. 여기에 2001년에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MVP까지 차지하면서 그는 NBA의 많은 팀에 관심을 받게 된다.

3. NBA 커리어

사실 왕즈즈와의 상대전적과는 별개로 야오밍에 대한 NBA의 관심은 이전부터 대단히 뜨거웠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중국대표팀의 백업센터로 참가했던 야오밍은 5반칙 퇴장을 당했음에도 짧은 시간동안 알론조 모닝, 빈 베이커가 버틴 미국 대표팀을 상대로 5블록슛을 기록하며 인상적인 모습을 알려줬다. 이 때 당시 미국 대표팀 관계자들이 야오밍을 보고 18세의 나이와 신장 그리고 풋워크를 감안하면 NBA 1순위도 노려볼 수 있을 선수라고 이야기 했다. 단 한번도 동양인이 드래프트 현장에서 지명된적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야오밍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대단히 파격적이었다. NBA는 이때부터 야오밍을 드래프트에 참가시키기 위해 작업을 시작했고, 중국농구협회는 야오밍을 뺏기지 않기 위해 팽팽한 기싸움을 벌여야 했다. 애초 야오밍은 2001년 드래프트에도 나올 수 있었지만 중국협회의 반대로 딜레이되다가 마침내 2002년 드래프트에 참가를 허락 받았다. 드래프트를 앞두고 미국에서 실시한 워크아웃에는 거의 르브론 제임스 급 언론사 취재열풍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동양인에게 있을 수 없을 1순위 픽으로 휴스턴 로케츠에 지명된다. 이때 특이 했던 점은 야오밍은 드래프트 현장에 참가조차 못하고 위성중계로 상하이 자택에서 드래프트 현장과 연결을 했다는 사실이다. 중국 농구협회가 야오밍을 뺏기지 않기 위해 얼마나 기싸움을 벌였는가 보여주는 대목이다.

야오밍은 NBA에 진출하고픈 욕망이 강했다. 1라운드 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휴스턴 로키츠역시 야오밍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중간에 CBA와 야오밍의 원 소속팀이었던 샹하이가 야오밍의 NBA진출을 막으려고도 했지만[7] 이것도 여차저차해서 해결은 되었다. 야오밍 본인은 사비를 들여서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프리 드래프트 캠프와 시카고 불스와의 워크아웃을 치뤘다. 하지만 시차적응도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의 워크아웃은 독이었고,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8]

드래프트 당일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반반이었다.[9] 하지만 휴스턴은 하킴 올라주원 시대의 재건을 꿈꾸면서 그를 1순위로 지명한다. 처음에 야오밍을 지명하는 것을 별로 탐탁치않게 여겼던 스티브 프랜시스는 막상 그가 팀에 합류한 첫날에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친한 친구가 되었다.

1순위 지명된 야오밍은 그해 9월 부산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게 된다. 예선부터 준결승까지 아시아 버전 드림팀의 위엄을 보여준 중국 대표팀은 결승에서 홈코트 어드벤티지를 가진 대한민국에게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해 준우승에 그치며 야오밍 개인에게 부산 아시안게임은 잊고 싶은 기억이 됐을지도 모른다. 한편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는 미래의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 두명이 참가했는데 하나는 야오밍이고 하나는 리빙 복싱 레전드 게나디 골로프킨 이다.

NBA 적응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2002년 6월 말에 드래프트 되어 4개월 동안 NBA 준비를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중국 국가대표로 뛰느라 NBA 적응할 시간을 날릴 수 밖에 없었으며, 국제대회의 경험은 어느정도 있었지만 NBA의 거칠고 빠른 농구를 경험해보지 못한 야오밍은 NBA에 빠른 적응을 못했다. 드래프트때부터 야오밍을 씹어대던 찰스 바클리는 그것보라는 듯 TNT방송의 Inside The NBA에서 "만약 야오밍이 한경기에서 19득점 이상을 하면 내가 케니 스미스 엉덩이에다 키스를 하겠다." 폭탄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10]

하지만 2002년 11월 17일 LA 레이커스와의 경기에서 야오밍은 9개의 야투를 모두 성공시키고 자유투 2개까지 포함해서 20득점을 올린다. 이에 찰스는 빼도박도 못하고 케니의 엉덩이에 키스를 해야 될 판. 근데 케니 스미스는 이를 아주 잘 이용해먹었고, 스튜디오에 당나귀 한마리를 끌고와 당나귀 목에 KENNY라는 팻말을 걸고 찰스에게 "내 엉덩이에다 키스할건지 아니면 이 당나귀 엉덩이에다 키스할건지 알아서 해 ㅋㅋㅋ" 라고 약올렸고, 결국 찰스는 당나귀 엉덩이에 키스했다.[11]이 장면은 경기를 끝내고 락커룸에 있던 야오밍도 지켜봤다.

이 사건 이후 야오밍은 서서히 NBA무대에 적응해 나갔다. 2002년 12월과 2월에는 이달의 서부신인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시즌 종료때 13.5득점 8.2리바운드 1.8블록슛 야투율 .498 자유투 .811을 기록해 피닉스 선즈아마레 스타더마이어와 치열하게 경쟁해서 아쉽게 13표차로 2위에 만족해야 했다.[12] 03-04시즌에 새롭게 감독으로 부임한 제프 반 건디에 의해 팀의 중심으로 낙점되었다. 시즌 성적은 17.5득점 9.0리바운드 1.9블록슛으로, 대부분의 기록치가 상승했고 오랜만에 플레이오프에도 올라갔다. 1라운드 상대가 전당포 라인업 LA 레이커스였고, 1승4패로 탈락하긴 했지만.

04-05시즌에는 새로운 파트너로 올랜도 매직에서 온 득점머신 트레이시 맥그레디가 합류했다. 맥밍콤비의 탄생. 물론 처음에는 티맥의 부상과 처음으로 손발을 맞는거라 생각만큼의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시즌이 흐르면서 점차 호흡도 맞아떨어져 가면서 휴스턴 로키츠는 서부의 무시할수 없는 팀이 되었다. 야오밍의 시즌 성적은 18.3득점 8.4리바운드 2.0블록슛.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댈러스 매버릭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패했다. 물론 7차전의 경우 너무 압도적인 차로 패배하긴 했지만,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치는 높았다. 그러나...

4. 짧은 전성기, 계속되는 부상 그리고 은퇴

05-06시즌 야오밍은 부상으로 시즌아웃되며 57경기 출장에 그쳤다. 이 시즌에 처음으로 더블더블을 기록하면서 상승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대목. 그러나 그는 이 시즌에 예전과 달리 공격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엘리트 빅맨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06시즌 초반까지 로켓츠는 엘리트 득점원인 트레이시 맥그레디에 지나치게 의존했고 야오 역시 2옵션 역할이 편한 듯 보였다. 수치상으로 12월에 큰 부상을 입기 전까지 19.9점 9리바운드로 높았으나 득점욕심을 크게 내진 않았던 것. 그러나 한달 이상 부상으로 결장하고 1월 말에 복귀한 이후부터는 보다 적극적으로 공격을 시도하며 복귀 이후부터 35경기동안 평균 23.8점 10.9리바운드란 엘리트급 기록을 낸다.

이때 시즌 통틀어 22.3점 10.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샤킬 오닐(20점 9.2리바운드)보다 뛰어난 기록을 냈는데, 이때 야오가 57경기에만 출장하고 팀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해 올 NBA세컨팀으로 밀렸으나 만약 플레이오프에만 올랐다면 충분히 퍼스트팀이 유력한 상황이었다. 앞서 언급됐듯 퍼스트팀 센터 오닐은 이때 커리어 로우 성적을 냈고 출장경기수도 야오랑 비슷했기 때문에 동부 2위란 팀성적 버프와 네임밸류만 아니었으면 야오를 제치기 힘들었을 것이다.

06-07시즌에는 한층 더 성장해 11월에 NBA 이 달의 선수로 선정되는 쾌거를 거둔다. [13] 특히 11월에 있던 히트와의 경기가 정점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33점을 올리며 생애 최초로 오닐과의 매치업에서 그를 압도하며 승리를 거둔다.[14] 이전까지 1옵션이었던 티맥은 첫 두달동안 20점 언저리에 그치고 야오가 팀의 1옵션이로 25점을 넣으며 명실상부 최고의 센터로 자리를 잡는 듯 했으나....역시 부상으로 48경기 출장에 그쳤다. 이때문에 퍼스트팀 센터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를 경기력과 기록 양면에서 압도했음에도 [15] 써드팀에 그쳤다.

07-08시즌에는 평균 22득점 10.8리바운드로 커리어 두 번째 더블더블을 기록했으나 55경기 출장에 그쳤다. 이렇게 부상이 잦아지면서 중국 팬들과 휴스턴 팬들을 안타깝게 했는데, 특히 07-08시즌 그가 부재중인 기간에 휴스턴이 22연승을 달성하자 "이제 휴스턴에는 야오밍이 필요없는 거 아님?" 이라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 물론 보스턴 셀틱스에게 패해서 연승행진이 끝났을때 그 말은 쏙 들어갔다. 보스턴의 골밑이 막강했기 때문에 야오의 부재가 너무 눈에 띄었던 것. 사실 야오밍가 있을때와 없을 때의 경기력 격차를 생각하면 저 소리는 애초에 농구를 잘 모르거나 휴스턴 농구에 대해 잘 모르는 인간들의 헛소리에 가깝다. 야오가 없을 때 2미터도 안되는 수비전문 척 헤이즈의 근성과 40대 노장 디켐베 무톰보의 노장투혼에 기대며 골밑의 공백을 겨우겨우 메꿨는데, 하프코트 오펜스 비중이 큰 로켓츠 특성상 이 정도 골밑과 믿을만한 득점 옵션이 티맥 하나 뿐인 상황에서 야오없이 서부에서 뭘 할 수 있겠는가?

08-09시즌에는 모처럼 건강하게 77경기를 뛰었다. 평균 19.7득점 9.9리바운드로 기록은 다소 감소했지만, 그래도 야오밍이 모처럼 많은 경기를 소화해주면서 휴스턴은 트레이시 맥그레디의 시즌아웃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 2라운드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야오밍은 라운드 진행 도중 또 부상으로 아웃되었다. 이 때 휴스턴은 레이커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치뤘고, 그가 있었으면 상황이 달라질수도 있었다고 아쉬워하는 팬들도 있었다. 레이커스와의 1차전 도중 그가 부상을 입었음에도 만류하는 코치진과 싸우고 돌아와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부상투혼을 보여주었는데, 멋진 모습이지만 이후 그의 커리어가 사실상 끝났다는 걸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장면. 물론 부상 내용과 누적된 피로를 생각하면 복귀와 상관없이 이미 커리어는 끝난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09-10시즌에는 아예 한 경기도 뛰지 못해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수술했던 부위가 아물지 않아서 골절이 재발한 것. 결국 야오밍은 클리블랜드의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가 받았던 발에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수술을 받았다. 실제로 이 수술을 받기 전에 일가우스카스의 조언을 받기도 했다.

10-11시즌에 팀은 야오의 출전시간을 평균 24분 안팎으로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결국 다섯경기만에 다시 부상이 또 재발해서 시즌아웃되었다. 야오는 인터뷰를 통해 복귀에 대해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예전에 비해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이 때 그의 나이 겨우 30세. 한창 전성기를 달려야 할 선수가 부상으로 잇달은 불운을 맞이하면서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5. 왜 이렇게 자주 부상을 당했나?

일단 체격조건 그 자체가 문제다. 과거 휴스턴 로키츠에서 하킴 올라주원과 트윈타워로 대활약했던 223cm의 랄프 샘슨이나 231cm의 초거인 게오르그 무레산,마누트 볼이 그랬듯 220cm를 넘는 초거대 선수들이 NBA같이 82게임 풀시즌이라는 초 빡센 스케줄에 공수전환이 빠르고 운동량이 장난이 아닌 리그에서 오래 살아남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이들도 채 10년을 제대로 뛰지 못했다. [16]

그러나, 그가 이렇게 자주 부상을 당한 진짜 이유는 NBA의 하드한 일정에 여름에는 중국대표팀 일정까지 소화하다보니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NBA팬들과 중국팬 그리고 중국농구협회는 야오의 부상 책임을 누구한테 있느냐에 대해선 의견이 달랐다. NBA팬들은 중국농구협회가 야오밍의 몸상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무리하게 국가대표로 차출시켜서 오늘날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야오밍은 잇단 국가대표 차출로 인해서 과부하가 걸린 상태였고, 결정적으로 자국에서 열린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한 것이 독이었다. 이때 야오는 부상에서 회복된지 얼마되지도 않았고 컨디션은 당연히 좋을 리 없었다. 아무리 자국에서 열리는 첫 번째 올림픽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참가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그것이 부상을 더 키우고 말았다.

반면 중국농구협회와 중국팬들은 야오밍의 부상이 휴스턴 구단의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야오밍의 백업요원만 영입했더라면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 이는 맞는 이야기이면서 틀린 얘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야오밍을 받쳐줄 백업요원은 팀내에서 디켐베 무톰보 정도였지만 그는 이미 불혹을 넘긴 노장이었다. 또 당시에는 NBA 리그 자체가 쓸 만한 센터가 많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척 헤이스가 있었다곤 하지만 그는 센터로써는 부적합에 가까운 198cm였고, 그나마 데려온 센터들은 10분을 맡기기에도 힘든 선수들이었다. 1차적인 책임은 야오밍 하나에만 의존한 중국농구협회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근시안적인 대표팀 운영으로 인해 정말 전성기를 달려야했던 야오밍은 그렇게 30세가 되기도 전에 은퇴하고 말았다.

사실 위의 조건이 전부 다 적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7피트6인치, 310파운드가 넘는 거구는 태생적으로 신체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약 그가 숀 브래들리급은 아니더라도 중국팀이건, 휴스턴이건 어느 정도 관리를 해줬더라면 그래도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큰 책임은 국보급 스타를 별 쓸데없는 국제대회마다 차출해서 부려먹은 중국농구협회에 있겠지만, 그렇다고 휴스턴 로켓츠가 책임이 완전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별다른 백업이 없는 휴스턴에서 야오는 출장시간과 별개로 공수에서 엄청난 부담을 져야했다. 또한 05시즌까지 29~32분으로 출장시간 관리가 잘 되었으나 06시즌부터 야금야금 출장시간이 늘어나더니 08시즌엔 평균 37분까지 늘어났다. 사실 07시즌도 시즌 전체 수치만 보면 33.8분으로 관리가 어느 정도 된 것처럼 보이지만, 경기당 기록을 자세히 보면 초반 26경기동안 35.7분동안 뛰게 하다가 부상 당한 이후 출장시간이 줄어든 것이다. 당시 기록[17]을 보면 40분 넘는 경기도 종종 보이고, 48분 뛴 경기까지 보이는 등, 야오가 거인센터라는 걸 전혀 감안하지 않고 그냥 뛰게 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부상위험이 큰 선수를 일반적인 7푸터처럼 기용하면서 위 세 요소가 어우러져 야오의 선수생명을 깎아먹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6. 명예의 전당 헌액

그리고 미국 현지시간으로 2016년 9월 9일, 샤킬 오닐, 앨런 아이버슨과 함께 미 프로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때 쓴 스피치가 자신의 성격을 보여주는 위트있고, 유머러스한 성격을 보여줬는데, 초장부터 딸은 농구 대신 축구를 선택한 벌로 안데려왔다고 하고[18], 자신이 처음으로 나간이유를 모르겠다며 그 자리는 아이버슨에게 줘야하는데 그 이유가 자신은 연습이 더 필요하다는 농담을 시작으로, 자신의 전성기 때 가장 큰 라이벌중에 한명인 샤킬 오닐에게는 "좋은 손 덕에 저놈보다 10000개 이상의 자유투를 안놓침 ㅋㅋㅋ" 하며 재치있는 디스전도 장착했고, 자신이 오늘에 있게 해준 자신의 부인, 부모님, 중국농구계 관계자들, 자신의 비즈니스팀[19]에게 감사를 표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7. 이것저것

야오밍의 키 때문에 벌어진 착시효과인데, 가운데 부인은 키가 190cm다.[20] 배경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자. 왼쪽 딸은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지만 3세 여아다. 키가 110cm... 태어나보니 아빠가 야오밍 왜인지 부인에게 혼나고 있다...

큰 키에도 불구하고 그 신장대에서는 가장 뛰어난 기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게오르그 뮤레산이나 숀 브래들리와는 비교가 거부되는 선수. 슛 범위도 넓고, 포스트업 능력도 좋았으며[21] 패싱 능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골밑에서는 다양한 공격옵션을 기대할 수 있었다. 수비능력은 많이 부각되는 편은 아니지만 탄탄한 하체를 바탕으로 버티는 힘이 있고, 블록능력도 수준급이라 할수 있다. 패싱능력은 기록치에서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좋은편에 속한다. 자유투 능력은 센터들 중에서는 상위 탑 클래스에 들 정도로 뛰어나다. 통산 83.3%. 더 설명이 필요한가?

일각에서는 야오밍이 너무 느렸기 때문에 최근 달리는 농구가 트렌드가 된 이후에는 위력이 없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지만 이는 한쪽만 바라본 시각이다. 야오는 현역시절에도 NBA에서 가장 느린 선수 중 하나였고 이는 빠른 팀들을 상대로 할 때 큰 약점으로 작용했다.(야오가 전성기 때에도 피닉스 선즈나 뉴저지 네츠 등 속공을 중시하는 팀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위력적이었던 것은 그 약점을 커버할 정도로 장점이 극명했기 때문이다. 228cm에 파워와 기술을 겸비한 야오는 1대1로 막는게 거의 불가능한 선수였고, 실제로 206cm의 벤 월러스, 211cm 드와이트 하워드[22]는 둘다 수비왕급이었음에도 야오를 1대1로 못 막아 털리곤 했다. 또한 수비력이 1급은 아니었고 발도 느렸지만 워낙 큰 덩치 덕분에 rim protector로서 역할을 준수하게 해냈다. 달리는 팀이 더욱 많아진 2010년대에 그 약점이 더욱 부각되긴 하겠지만 센터진의 높이가 전체적으로 더 낮아지고 수준급 1대1 빅맨 수비수가 줄어든 지금 그를 막긴 더욱 힘들 것이다. 또한 당시 휴스턴은 야오의 느린 코트왕복 속도를 보완하기 위해 속공시 야오를 제외한 네 명이 공격을 빠르게 전개하던가, 같은 팀이 자유투 당시 야오를 공격리바운드에 참여시키지 않고[23] 상대편 코트 근처에서 대기시키는 등 다양한 전술을 활용했다. 즉, 앨런 아이버슨과 마찬가지로 활용하기가 까다로운 선수긴 하지만 잘만 활용한다면 굉장한 위력을 낼 수 있는 선수.

다만 NBA시절 숨만 쉬어도 파울콜을 줘버린 심판들 덕에 인종차별 이야기까지 들었을 정도이다. 오죽했으면 경기도중 해설진이[24] "파울이잖아!"라고 소리지를 정도였다. 편파판정이 극에 달한 경기 장면인데, 이 때 야오밍의 매치업은 벤 월러스, 그리고 헐리우드 액션으로 유명한 바레장이었다. 두 선수가 파울유도 액션을 하면 어김없이 파울을 선언하는가 하면 리바운드를 잡고 세컨샷을 시도하는 도중 바레장이 대놓고 야오의 손을 두 차례나 갈겼는데도 파울을 안 줬다. 위에 언급된 "파울이잖아"가 이 플레이에서 나온 멘트. 이후 이 해설자는 "장난해요? 심판이 도대체 뭘 보고 있는거죠?? 15미터 밖에서도 잘 보이네요."라고 했으며 그의 파트너는 "그냥 두들겨맞고 있네요.(Just hammered)"라고 했다. 이후 리플레이에서 한번 더 파울성 플레이가 있었던게 드러났으나, 바로 앞에서 보던 심판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참고로 야오밍은 NBA선수치고 심판에게 항의를 안하는 축에 속하는데, 이 경기에서는 항의가 잦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자리 잡으면서 양손을 머리 위로 쭉 들고 전혀 밀지 않았는데도 공격자 파울을 불 정도로 말도 안되는 콜이 계속 나와서 누적된 파울로 인해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

하지만 불리한 파울콜에도 불구하고 공격력은 NBA 최상위권 수준이라 드와이트 하워드와 함께 센터의 최고를 다투었고 [25] 국제무대에서는 적수가 없었다는 평가가 지배적. 중국의 한 쿼터 득점을 혼자 한적도 있었다. 물론 다른 중국선수들과의 수준차가 있었지만, 아딜잔 은퇴후 한국 가드들에게도 탈탈 털리던 중국 국대의 식물 가드진을 밖에 두고도 그렇게 활약하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2000년대 들어 센터진의 높이가 전체적으로 낮아진 이후 7피트 미만 센터들에겐 재앙이나 다름없던 존재였다. 당대 최고의 수비수 드와이트 하워드는 수비왕을 휩쓸던 시절에도 야오밍을 만나기만 하면 털렸으며, 알론조 모닝은 전성기 시절 7피트 센터들과 대등하게 매치업하고 말년에도 출전하는 짧은 시간만큼은 확실하게 활약하는 선수였음에도 야오밍에게 많이 고전했다. 벤 월러스는 2년차이던 야오에게 생애 최초 20득점 20리바운드 이상을 허용하기도 했다. 사실 야오가 키가 큰데다 손끝감각이 대단히 좋아 점프슛, 훅슛, 골밑슛 모두 훌륭하고, 탄탄한 하체 덕분에 포스트업 능력도 좋았으므로 1대1로 막기 정말 힘든 선수긴 했다. 다만 샤킬 오닐같은 경우 워낙 신체적으로 강인하다보니 초반에는 야오가 좀 활약을 해도 몸싸움하다가 체력이 다 빠져버리고[26] 후반으로 가면 발리는 경우가 많았다. 야오가 오닐을 상대로 1대1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 시점이 07시즌인데, 이때 야오는 히트전에서 무려 33점을 퍼붓는 초반에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였다.[27]

반대로 수비에서 골밑존재감은 있었지만 몸놀림이 둔하다보니 중거리슈팅력이 있고 민첩한 빅맨들에게 약했다. 대표적으로 플옵에서 만나 털린 카를로스 부저. 초창기에는 워낙 말라서 피지컬한 센터들을 상대로 고전했지만, 2년차때부터 꾸준히 파워를 키우면서 그런 모습은 사실상 없어졌다. 샤킬 오닐의 쇠락 이후 야오를 고전시킬만큼 피지컬이 강한 센터가 거의 없기도 했고...

위에 기술된대로 찰스 바클리에게 온갖 까임을 받았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찰스의 생일날 축하메세지를 보내주기도 하는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28]

샤킬 오닐이 자신을 도발하는 발언을 할때도 "샤크의 팔꿈치는 물렁해서 아플것 같지 않다."라고 대답하는 등, 무뚝뚝한 얼굴과는 달리 상당히 위트가 있다. 또한 NBA에 진출한 중국선수 중 유일하게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왕즈츠, 이지엔리엔, 순 유에 등 대부분의 중국선수들은 필요한 의사소통은 통역을 통해서만 하고, 영어도 적극적으로 배우지 않으며, 이동시에 헤드폰끼고 자기 할 것만 하는 걸로 악명이 높다. 반면 야오는 영어를 거의 못 하는 상황에서 미국에 온 것은 마찬가지지만, 루키시즌부터 떠듬거리는 영어로 주변 사람들과 농담도 하고 얘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4년차부터는 아예 전담 통역사를 쓰지 않았으며 인터뷰나 방송출연도 혼자서 영어로 했다. 영어 실력을 평해보자면 목소리가 낮고 발음이 좋진 않아 (th를 완전히 S로 발음한다. 생큐, 아이 싱크(i think) 등) 알아듣기는 조금 힘들지만, 꽤나 유창한 편이다. 이때 야오의 전담통역사였던 콜린 파인은 당시 초짜 통역사였는데[29] 그러나 그를 고용한 로키츠 구단은 경험이 전무한 파인을 못 미더워했었는데, 실제로 파인은 어린 시절부터 중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야오보다 훨씬 더 불안해했다. 야오의 루키시즌을 다룬 다큐먼터리 "The Year of Yao"에 보면 한번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파인이 깜빡 잊고 휴대전화를 안 꺼놔 전화벨이 울렸는데, 죄송하다며 버벅이는 파인을 보고 야오가 씨익 웃으며 어설픈 영어로 "All rookies, huh (우리 둘 다 초짜네요)?"라고 농을 던지자 파인이 두 손을 들며 "초짜입니다!(Rookie!)"라고 받기도 했다. 당시 기자회견장은 웃음바다가 됐지만 단 한 사람 웃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로키츠 구단 관계자. 그는 여러 번 야오에게 통역을 바꿔줄 수 있다고 건의했으나, 이미 파인과 친해진 야오는 이를 거절했다. 한번은 휴스턴의 기자가 야오에게 "NBA 생활하면서 가장 감사한 게 뭐냐?"고 묻자 야오는 웃으며 말없이 파인을 가리킨 적이 있다.#, 이를 계기로 야오와 친해졌으며 지금도 종종 연락한다고 한다. 지금도 야오가 가끔 통역을 부탁할때도 있다고...#

휴스턴과의 재계약 협상 때 휴스턴이 처음 제시했던 계약을 한번에 수락하기도 하는 쿨한 모습도 보여주었고, 또 자신의 원 소속팀이었던 샹하이 샤크스가 경영난으로 허덕일 때 구단을 사들여 구단주가 되기도 했다. 은근히 자신이 속한 팀에 대한 의리도 남다르다.

은퇴 후에는 상하이의 구단주로 지내다가 최근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와인사업에 뛰어들었다. 또한 상어요리에 반대한다는 발언을 해서 몇몇 중국의 호텔에서 상어요리가 없어지게 하는 등의 공도 있다. 영화에도 나오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모국에서 개최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에서 중국 선수단의 기수를 맡았다. 그의 국내외적 명성을 반영한 모습.[30]

2012 런던 올림픽 중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고의패배로 탈락한 중국 여자 배드민턴 선수들을 '희생양'으로 표현하며 심정적으로 옹호하였지만, 이들을 실격처리한 국제배드민턴연맹의 조치에 대해서는 지지하는 입장을 표했다.

휴스턴 로키츠 후배인 제레미 린뉴욕 닉스 시절 뉴욕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매 경기가 끝나고 그에게 조언을 얻는다고 했는데, 실제로도 제레미 린의 롤모델은 야오밍이라고 한다. 덕업일치

야오밍은 8살 때 왼쪽 귀의 청력을 상실하는 사고를 겪었다. 야오가 8,9살 때 병을 앓았고 약을 먹었는데, 알고 보니 야오는 이 약에 알레르기가 있었고 이 부작용으로 왼쪽 청력의 60%을 잃은 것. 이 사실은 야오의 2년차 시즌이 끝나고 나온 자서전 "Yao: A Life in Two Worlds"에 나와 있다. NBA 관계자들 뿐 아니라 팬들 사이에서도 한참 전부터 유명한 얘기였고 야오가 딱히 숨긴 적도 없다. 일단 자서전에 떡하니 적어놨구먼 아래 기사는 야오의 2년차 시즌 초반에 나온 기사인데, 야오의 루키 시즌에 치르던 경기 도중 한 심판이 야오가 자기 얘기에 반응이 전혀 없자 휴스턴 벤치로 가서 "저 친구 왜 저래요?"라고 묻자, 코치진이 "왼쪽 귀가 안 들려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야오 본인은 "좀 영향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문제가 되진 않아요"라고 답했다. 재밌는 것은 그의 동료이자 당시 로키츠의 스타 포인트가드였던 스티브 프랜시스 역시 02시즌 당시 겪었던 극심한 편두통으로 인해 왼쪽 청력이 좀 안 좋았다는 것. 이로 인해 로키츠는 수신호를 자주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읽어보면 짐작하겠지만 성격이 매우 점잖고 유쾌한지라 미국 내에서도 팬들이 많다. 휴스턴에 처음으로 도착해서 한 첫 마디가 "저를 보러 많은 분들이 와주셨는데 다 싸인을 못 해드려서 죄송합니다."니 팬들이 호감이 갈 수 밖에. 높은 인기와 유니크한 스타일 덕에 야오밍의 현역시절 미국에서 키 큰 동양인은 백이면 백 야오밍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최희섭의 경우도 그를 야오밍으로 착각한 미국 어린이에게 싸인을 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트래쉬토킹이나 비매너 플레이도 안하고, 자주 부상을 당하는 몸에도 엄청난 노력파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냥 순둥이만은 아니라서 커리어 중반기로 가면서 자신감을 쌓기 시작하자 매치업 상대에게 득점을 먹이고 "넌 씨x 날 막을 수 없어!(You can't fuxxing stop me!)"라고 소리지른 적도 있다. 또한 09년 레이커스와의 서부 준결승 1차전 당시 심한 부상을 입고 코치진이 뛰지 말라고 만류하는데도 코치진과 싸우고 억지로 나와서 경기를 승리로 이끈 적도 있다. 다만 안타깝게 야오는 이때 부상 이후 결국 예전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은퇴하고 만다.

모범적인 사생활, 불평을 안하는 성격, 노력파, 국가대표 소집을 거절하지 않고 매번 참석한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박지성을 여러모로 떠올리게 한다. 다만 재미없는 인터뷰로 악명이 높은 박지성과 달리 야오는 의외로 빵 터지는 유머감각을 소유하고 있다. 그의 유머감각을 알 수 있는 좋은 예로 기자가 그에게 "좋아하는 미국 노래가 있나요?" 라고 하자 "미국 국가(anthem) 죠" 라고 대답하면서 "1년에 적어도 82번 (정규 시즌 게임이 82경기이고 매 경기 시작마다 국가가 흐른다) 은 듣거든요" 라고 하면서 기자들이 다 빵 터졌다.

2017년 2월 23일, 만장일치로 중국농구협회 주석(회장)에 선임되었다. 이때 나이는 불과 37세.야오밍 중국농구협회장 만장일치 선임

시진핑 정권의 축구굴기로 인하여 시진핑에게 아첨하려는지 중국 학교들이 무리한 학원축구를 시도하며 농구하던 학생들에까지 축구를 강요한 것에 대하여 비난하는 인터뷰도 했다. 왜 억지로 농구하고픈 아이들에게 축구를 시키느냐? 라는 비난이니 시진핑 정권에게도 뭐 정치적으로 얽매일 아무 것도 없고 저렇게 억지로 축구시켜봐야 유망주 죽이기 밖에 되지 않기에 중국에서도 야오밍의 비난이 맞다고 동조하며 이런 학교들을 비난하는 여론이 많았다.

8. 야거장?

국내에선 소수 NBA매니아들이 붙인 별명이나, 해외에선 의외로 많이 알려진 야오밍의 코믹한 사진 모음. 그 어떤 미남미녀라도 순간 캡처하면 카오게이급 장면이 나오긴 하나 야오밍은 유독 이런 코믹한 사진이 많이 알려져 있다.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유명한 사진 몇개들

VS 코비 브라이언트: 한눈에 봐도 미스매치.

할짝

딥키스

이 얼굴표정은 4chan 필수요소(meme)인 Bitch Please의 원본으로 더 유명하다[31].


  1. [1] 그런데 휴스턴의 한 코치에 의하면 더 자라서 실제 맨발키가 7 ft 5.75 즉 228cm이며 신발을 신으면 232cm까지 됐다고 한다. 실제로 신발 신고 216cm인 샤킬 오닐과 섰을 때 차이가 상당했다.
  2. [2] 샤킬 오닐은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매우 프라이드가 강한 인물이다
  3. [3] 차범근과 그에 근접하는 박지성, 손흥민 같은 아시아 선수들이 있는 축구, 이치로와 그에 근접하는 추신수, 노모, 박찬호, 마쓰이 같은 선수들이 있는 야구와 달리 아시아 농구계에서 야오밍의 위상은 근접하는 선수 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다. (대만계 미국인제레미 린은 아시아 선수가 아니다. 린을 아시아 선수로 치면 마이클 조던을 아프리카 선수로 치는 셈. 그리고 솔직히 제레미 린을 포함한다고 해도 린 커리어가 야오한테는 절대 안 된다.) 야오는 2000년대 최고의 센터 중 한 명이었고, 명예의 전당 헌액자였다. 그러나 야오밍 다음으로 뛰어난 아시아선수인 이지엔리엔은 NBA에서 5시즌동안 뛰다가 점점 롤이 줄어들어 실력부족으로 결국 퇴출수순을 밟았던 선수에 불과했고, 왕즈츠 역시 커리어 통틀어 한 한 게임 주전으로 뛴 선수였다.
  4. [4] 유망주 레벨에서는 2~3살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크다. 어릴 수록 성장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받기 때문.
  5. [5] 참고로 다른 아시아계 NBA 선수였던 하승진, 타부세 유타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승진은 불과 두 시즌, 그것도 가비지타임 위주로 뛰며 1~2점씩 넣다가 방출되었고 유타는 이보다 못해 한달 반만에 쫓겨났다. 그나마 하승진은 팀에서 "시간을 두고 키워볼 만한 장기 프로젝트"로 봤지만 냉정하게 말해 타부세 유타는 일본 내 마케팅 때문에 계약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승진은 기술은 꽝이어도 NBA에서도 손꼽히는 축복받은 신체조건(맨발키 221cm)이 있었지만 타부시는 175cm의 단신에다가 운동능력도 기술도 NBA급에 못 미쳤다. 애초에 NBA급으로 클 가능성이 사실상 없던 선수. 나이도 드래프트 당시 19세였던 하승진과 달리 23세였다.[4] 이건 두 선수의 대접만 봐도 알 수 있는데 하승진은 포틀랜드가 2라운드 지명권을 써서 뽑았고 3년 계약에 2년은 보장해줬지만 타부세는 아예 지명을 못받고 피닉스 선즈가 단기계약으로 데려온 것. 한 가지 추가하자면 하승진 지명 당시 미언론 중 한 매체가 "하승진은 키가 커서 지명됐을뿐 2년 안에 퇴출된다."라고 언급했고 그대로 실현됐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하위권에 뽑힌 선수들 중 대부분은 NBA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그리고 지노 빌리, 드레이먼드 그린, 아이재아 토마스 같은 드래프트 하위권 출신 스타 선수들과 비교하자면, 이들과 하승진, 타부세 유타는 아예 기대치부터가 다르다. 하승진, 타부세 유타는 명백하게 그 실력과 가능성보다도 배후의 출신 국가에서의 상품성을 노린 드래프트였다. 다만 위에 언급됐다시피 둘 다 폐급에 가깝더라도 하승진은 그나마 큰 키 덕분에 로또급 유망주는 된다고 할 수 있지만 유타는 진짜 티셔츠팔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6. [6] 야오의 자서전에 보면 그가 왕즈츠에게 초창기에 계속 열등감을 가졌다는게 드러난다. 실제로 왕즈츠는 야오보다도 더욱 뛰어난 슈팅터치, 슛거리, 볼핸들링 능력까지 갖춘 다재다능한 선수인데다 운동능력까지 갖췄다. 야오가 어린 시절에 팀 관계자들은 그가 엉덩이가 너무 커서 굼뜨기 때문에 대성하긴 힘들다고 평했다고 한다. (왕이나 후배 이지엔리엔은 하체가 늘씬하고 호리호리한 체격이다) 그러나 둘이 NBA에 진출하자 상황은 완전히 역전된다. 왕이 자랑하던 스피드나 볼핸들링은 그보다 훨씬 빠르고 다재다능한 NBA 선수들 앞에선 무용지물이었고, 중국에서 상당한 수준이던 공밑 장악력도 체격이 빈약해 별 볼일 없었다. 결국 그는 장신 슈터 겸 백업 골밑요원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야오는 NBA에서 가장 느린 선수이긴 했지만 어차피 그는 골밑장악력으로 먹고사는 선수라 기동력이 딸리다는게 그렇게까지 큰 타격은 아니었다. 게다가 7피트6인치, 310파운드를 상회하는 그의 거대한 체격, 특히 튼실한 하체로 밀고들어가면 NBA의 운동능력 만빵인 센터들도 막기 힘들어했고 NBA에서 손꼽히는 빅맨으로 성장했다. 결국 왕즈츠가 야오보다 우월했던 건 중국시절이 마지막이었다.
  7. [7] 막았다기보다는 리그의 탑스타이자 자신의 팀의 대스타를 그냥 보내주기는 뭐했던지 이적료 비슷한 걸 원했다.
  8. [8] 이때 한 스카우터는 "그는 7피트6인치고 페이더웨이를 쏠 수 있다. 그렇지만 페이더웨이를 쏠 수 있는 6피트9인치 선수가 넘쳐나는데 왜 그가 필요하단 말인가?"란 말을 남겼다. 실제로 야오는 데뷔 당시 소프트하다란 평을 받았다. 그가 레이업을 하려다가 마찬가지로 신인이었던 네네 힐라리오에게 블럭당하자 한 해설자가 "여긴 국제무대가 아닙니다. 저건 덩크해야죠"라고 말을 하기도. 야오가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인유어페이스를 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상대방을 도발하는 행위를 하면 상대방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다소 얌전히 플레이하는데 익숙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NBA에서 적응하기 위해 이런 거친 플레이에 익숙해지고자 노력했다. 결국 야오는 루키 시즌 도중 블럭슛의 달인 테오 래틀레프의 면상에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먹이고 괴성을 지르다가 "도발"로 생애 첫 테크니컬 파울을 받았는데, 이를 두고 그에게 "터프해져라"고 신신당부하던 로키츠 선수단은 잔치 분위기가 되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9. [9] 이 때 드래프트를 중계하던 찰스 바클리는 "내가 만약 1순위 지명권이 있다면 캐런 버틀러나 제이 윌리엄스를 지명했을 겁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바클리는 야오의 루키 시즌에 그를 저평가하던 전문가 중 하나였는데, 야오가 실력으로 모든 걸 입증하자 그를 높이 평가했다.
  10. [10] 사실 NBA수준에서 1대1로 먹힐만한 기술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던 그 하승진도 받아먹기로 13점을 기록한 적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드래프트 1순위 지명선수가 19점도 못 넣는다고 한 건 야오밍이 완전히 망할 것으로 봤던 얘기다. 실제로 이 방송이 될 당시 야오밍은 데뷔 후 네 경기에서 0점-2점-8점-0점을 기록 중이었으며, 후술될 20점 경기 전까지 평균 4.3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훗날 데뷔한 다르코 밀리시치의 경우 2번으로 뽑혔음에도 데뷔 후 3년간 평균 5점을 못 넘긴 걸 생각하면 당시 NBA에서 하승진급으로 헤메고 있던 야오를 두고 이렇게 생각하는게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야오밍은 바클리의 호언장담 이후 열흘 뒤에 20점을 기록하며 이때까지의 부진이 오직 적응문제였음을 증명했고, 두 경기 뒤에는 야투 12개 중 10개를 적중시키며 무려 30점을 기록하며 바클리를 민망하게 했다. 30점 경기 이후 바클리는 방송에서 "그 친구가 잘할 거란 걸 알고 있었어. 근데 이렇게까지 빨리 잘하게 될 줄은 몰랐던 거지"라고 태세전환을 시도했다(...)
  11. [11] 미국에서 kiss my ass(내 엉덩이에 키스해라)는 엿먹어에 해당하는 fuck off의 순화(?) 버젼이며 굴욕의 상징이다. WWE빈스 맥마흔부자나 방송에서 시전할만한 것. 굳이 다른 남자의 엉덩이에 키스를 하는 괴상한 벌칙을 택한 이유가 여기 있는 것. 또한 케니의 당나귀 대타 역시 엉덩이를 뜻하는 속어가 당나귀(donkey)의 속어도 된다는 걸 이용한 언어유희. 내기에서 이긴 상으로 뚱보 아저씨가 내 엉덩이에 뽀뽀하면 그게 상이냐 벌칙이지 재밌는것은 훗날 오픈코트에 출연한 케니가 "당나귀가 ass 니까 그냥 당나귀한테 키스하면 되는거지, 당나귀 엉덩이에 키스할 필요는 없었어. But you kissed an ass(당나귀) on the ass(엉덩이)ㅋㅋㅋㅋㅋ"하면서 비웃었다.
  12. [12] 둘이 워낙 개인성적이 비슷해서 소속팀 성적으로 갈릴것이란 예측도 많았다. 이 때 이 둘의 소속팀 로켓츠와 선즈는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두고 막판까지 치열하게 경쟁했는데, 시즌 내내 우세하던 로켓츠가 루디 탐자노비치의 갑작스런 사임 (건강 문제) 이루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결국 탈락하고 만다.
  13. [13] 각 컨퍼런스당 한명만 뽑으므로 엘리트 선수가 아니면 노리기 힘든 기록이다. 이때문에 이 상을 받는 선수는 이 시점에서 MVP후보에 거론되는 게 대부분이며 실제로 야오도 (약한 후보였지만) 이때 MVP 얘기가 돌았었다.(유일한 예외는 14년이었는데 이때 동부1위로 돌풍을 일으키던 애틀란타 호크스엔 스타가 없었으나 팀워크로 똘똘 뭉친 케이스였는데, 이례적으로 주전 5명을 공동으로 동부 이 달의 선수로 뽑았다) 야오밍의 선정은 로켓츠 선수로서는 95년 하킴 올라주원 이후 11년만에 처음이었으며, 동료인 멕그레이디도 로켓츠에서 한번도 선정못됐다. 야오는 08시즌 초반에 한번 더 선정.
  14. [14] 선수로서 넘어선 시점은 06시즌 후반이라고 할만하지만 이때까지 그는 오닐과 매치업에서 그를 압도하진 못했다. 워낙 피지컬에서 밀리는지라...
  15. [15] 스타더마이어는 20.4점 9.6리바운드에 그쳤으나 전경기 출장 및 소속팀이 서부 2위란게 컸다.
  16. [16] 유일하게 12년이라는 긴 커리어를 보낸 228cm의 초장신 숀 브래들리는 매우 마른 체격(가장 무거웠을때가 125kg이었는데, 이는 그와 키가 비슷한 야오밍의 초창기 몸무게보다 15kg이나 가볍다. 게다가 이는 말 그대로 "가장 무거웠을 때"이고 데뷔 당시에는 불과 106kg이었는데 이는 201cm의 스몰포워드스카티 피펜랑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으로 신체에 오는 부담을 최소화한데다가 평균 출장 시간이 30분이 넘은 시즌이 세 번 밖에 없을 정도로 관리를 받았다. 게다가 커리어 후반의 세 시즌은 경기당 15분 미만으로 뛰었다. 애초에 그는 수비 전문 선수라서 팀 내에서 맡는 역할이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커리어 내내 부상에 시달렸다. 그러나 야오밍은 브래들리보다 훨씬 육중한데다가 팀의 기둥으로서 막중한 역할을 맡았고, 루키 시즌과 5 경기 만에 아웃된 마지막 시즌을 제외하고는 줄곧 평균 30분 이상을 뛰었다.
  17. [17] https://www.basketball-reference.com/players/m/mingya01/gamelog/2007/
  18. [18] 이건 페이크고, 사실은 학교 첫주라서 결석을 못했기때문...
  19. [19] 이분들은 야오밍이 NBA 신인일때부터같이 했는데 이분들한테 한말이... "우리 처음 만난 날보다 다 늙었고 다 살쪘네 ㅋㅋㅋ"
  20. [20] 이름은 예리. 역시 중국 국대출신으로 농구선수였다. 야오밍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첫 눈에 반해서 끈질기게 구애를 했는데 이 둘이 정식으로 사귀게 된 때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끝난 후로 야오밍이 폐막식 때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서 얻은 뱃지를 모아서 예리에게 선물로 준 걸 계기로 예리도 야오에게 반했고 2007년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21. [21] 사실 상체는 NBA기준으로 좀 부실한 편이었다. 야오밍 본인은 엄청난 노력파라 오프시즌 중에 근육을 붙여오긴 했지만 체질인지 플레이오프 쯤 되면 다시 빠지곤 했다. 그러나 워낙에 덩치가 좋고(비슷한 신장의 숀 브래들리보다 40파운드 정도 더 나갔다.) 하체힘이 좋아 막상 밀고 들어가면 막을 선수가 거의 없었다. 특히 2000년대에는 힘과 기술을 겸비한 센터가 드물어서 더욱 그렇다. 다만 거구 때문에 비교적 느린 편이라 빠르고 기술이 좋은 빅맨은 막기 힘들어했는데, 대표적으로 유타 재즈카를로스 부저에게 플레이오프에서 털린 적이 있다. 재밌는건 야오밍이 NBA 커리어 초반에 낸 자서전 A life in two worlds에 보면 어린 시절 중국의 전문가들이 야오밍의 신체검사를 하고 "(왕즈츠와 달리) 엉덩이가 너무 커서 굼뜰 것"이라며 농구선수로 대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막상 NBA에서는 그 튼실한 하체를 이용한 골밑플레이로 최정상급 빅맨이 됐다. 정작 야오보다 기동력이 월등하고 슛이나 드리블도 더 좋았던 왕즈츠는 골밑플레이가 약해 NBA에선 그저그런 선수에 그쳤다는 걸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
  22. [22] 하워드와 월러스 둘 다 실제 신장은 거의 5cm 정도 작다.
  23. [23] 통상적으로 자유투 시 양팀에선 리바운드를 잡을 확률이 가장 높은 빅맨들을 골밑에 대기시킨다. 하지만 수비팀을 골대 가장 가까이 배치시키는 룰이 있어 공격팀은 어차피 자유투 리바운드를 잡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24. [24] 심지어 휴스턴 지역방송도 아니었다.
  25. [25] 공격력이 강한 야오와 수비력이 강한 하워드의 기량은 백중세지만 (물론 선수가치는 더 젊고 부상도 훨씬 적은 하워드가 더 높다.) 유독 매치업에서 야오가 하워드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사실 하워드는 포스트업도 못하고 미드레인지도 없는 관계로 닥돌이 안먹히는, 자기보다 월등히 큰 선수와의 1대1 매치업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하워드보다 거의 20cm 가까이 차이나고 기술까지 뛰어난 야오를 막는건 특히 어려웠을 것. 참고로 하워드는 1대1 수비보다 팀수비에 강한 선수인데 (물론 1대1 수비도 특급이다.) 만약 지역방어가 허용되지 않아 맨투맨 수비가 주로 이뤄졌고 훌륭한 센터가 많았던 90년대에 활동했더라면 파워포워드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높다.
  26. [26] 야오는 커리어 내내 체력적 문제가 있었다. 물론 워낙 장신인데서 오는 태생적인 문제라 노력으로 극복이 안되는 부분.
  27. [27] 이때가 기량상 전성기인데, 비록 부상 때문에 48경기밖에 못 뛰어 써드팀에 그쳤지만 33.8분을 뛰며 25점을 넣는 엄청난 위용을 보였다. 게다가 이것도 부상 후 복귀할때 관리받으며 약간 깎아먹은 수치. 이때 퍼스트팀 센터 아마레 스타더마이어가 평균 20점 약간 넘었다는 걸 생각하면 야오가 건강히 시즌을 소화했으면 생애 최초 퍼스트팀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
  28. [28] 사실 바클리의 경우 현역시절이나 은퇴 이후에나 생각나는데로 막 말을 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지 야오밍을 그렇게 깐 건 아니었다. 위의 야오밍 폄훼 발언도 야오거 루키시즌 초반에, 별로 뛰어난 센터가 아닌 션 브래들리르 상대로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자 까면서 한 것. 오히려 야오가 적응을 하고 좋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높게 평가했는데, 이는 픽앤롤, 픽앤팝에 특화된 2000년대 대부분 센터들과 달리 야오밍은 포스트업을 포함해 정통센터플레이를 할줄 아는 몇 안되는 선수기 때문. 바클리와 마찬가지로 현역시절 막강 포스트업 플레이어였던 샤킬오닐도 정통센터를 높게 평가하는데, 오닐의 경우 바클리보다 더 막무가내로 말하는 성격이라 포스트업이 뛰어난 앤드류 바이넘을 드와이트 하워드보다 더 뛰어난 센터라도 했다가 다른 패널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29. [29] 파인은 당시 법대를 갓 졸업한 20대 후반의 청년이었는데, 유창한 중국어 실력 덕분에 통역사 자리를 얻었다.
  30. [30] 안 그래도 큰 키인데 맨 앞에 있으니 원근감 때문에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이 죄다 미니어쳐로 보일정도(...)
  31. [31] 해당 표정때문에 대한민국 배우 최성국과 일본의 여자 성우 하나자와 카나와 같이 호쾌한 웃음의 표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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