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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眞

1. 개요
2. 명칭
3. 상세
4. 역사
4.1. 기원
4.2. 금 건국
4.3. 원의 지배
4.4. 조선과 명의 지배
4.5. 대청 건국
5. 한국사와의 관계
5.1. 고대
5.2. 중세
5.3. 근세
6. 관련 문서

1. 개요

만주 일부지방에 거주했던 퉁구스계 종족집단.

2. 명칭

영어로는 Jurchen이라고 하는데 이는 몽골에서 여진을 가리키던 말인 주르첸(Jürchen)이 전해진 것이다. 하지만 만주 개칭 이전의 여진족도 그냥 간단하게 Manchurian(맨추리안; 만주족)으로 묶어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한문으로 제신(諸申)·주신(珠申)·주선(朱先), 주리진(朱里眞)·주리진(朱理眞)·주이진(朱爾眞), 주리차특(朱里扯特)·주아차척(主兒扯惕)·졸아찰대(拙兒擦歹)·주리흠(朱里欽), 여직(女直)·여정(女貞)·여질(女質)[1] 등을 썼는데 줄친(zulchin)-주션(jušen)을 음차한 여러 별칭들이다.

만주어로는 주션(jušen)이라고 한다. 이것을 조선과 비슷하다고 하거나 아예 쥬신이라는 사이비 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조선'이라는 단어가 처음 쓰인 상고기 중국에서 '조선'의 음은 아직 구개음화가 반영되지 않은 폐쇄음 '됵샨/됴션'인 상태였으니 초성이 ㅈ이 될 수가 없다. '주르첸'/'주션' 등의 표현은 숙신에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

3. 상세

문명의 혜택을 보지 못한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주변의 국가들은 여진을 미개한 집단으로 무시했다. 또한 통합되지 않았던 기간 만큼이나 피지배 민족이었던 역사들을 많이 남겼다. 하지만 전투력에 관한 기록으로는 한국과 중국 같은 정주문명 뿐만 아니라, 유목민족인 몽골과 거란마저도 여진족의 잠재력을 두려워 했으며[2], 간간히 통합이 가능할만큼의 외부 자극을 받았을 때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이미 충분한 교역품과 문화를 제공하는 거대한 제국 혹은 세력이 형성되고, 그들이 주변에 별다른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 거대한 문명의 외곽 지역에서는 민족주의, 통합의식을 보여줄 수 있는 집단이 잘 생기지 않는다. 여진족은 그러한 인류집단이 답보하는 사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로서, 거란족이나 중국인들이 존속에 위협을 주기 이전에는 단 한번도 만주 혹은 여진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뭉친 사례가 없다. 여진족과 가장 가까운 문명 집단은 고려와 조선 등이었는데, 이들은 가끔 적대하는 여진족 일파들만 대충 불태우고 신경끄는 등 비교적 순둥순둥했기 때문에, 여진족이 절박함을 느낄만큼의 민족적인 위기 혹은 기회를 제공하지 않아서 조직력을 키우지 못했다는 관점이 있다.

여진족이란 하나의 집단으로 보기도 애매한 지역적인 분류이다. 크게 중국 대륙과 한반도와 교류하며 상대적으로 고도의 문명 수준을 보여준 여진, 철저히 문명의 외곽지대에서 살면서 청동기 수준까지의 기록까지도 보여준 원시적인 여진, 이 둘의 중간으로 구분되는 광범위한 다수의 위성집단으로서 만주지역에 퍼져 살았다. 그중에서도 문명여진의 일파들은 한국인들과도 가장 밀접한 관계를 주고 받았다.

사실상 자신들이란 '범주'를 만들어 뭉칠 이유가 없었을 정도로 광범위한 집단으로서, 기마민족의 편제를 사용할 뿐이고 농경민족이라는 점에서도 엄청난 특이성 및 한반도와의 연관점을 보여주는 종족 집단이다. 아주 가끔 이웃지방에서 여진족을 자극하여 뭉칠만한 구실을 만들어주거나, 중국계나 한국계 문명인들이 여진족에 흘러들어가서 조직을 세우면 만만찮은 세력이 되었다. 이럴 때는 일본까지도 해적질을 하는 해양집단을 만들거나, 과자마 전술같은 충격 전술을 개발하여 주변의 강대국들을 몰락시키거나, 거의 모든 시대마다 보병+궁병+기병처럼 매우 균형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매 시대의 핵심적인 전략병기를 빠르게 도입하는 등, 야만족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외부에서 적극적인 적대세력을 만들어주거나 혹은 조직체계를 구성하면 변화무쌍한 진화를 보여주었던 집단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청나라라는 최후의 중국왕조까지 세운다.

여진족에 대한 가장 큰 오해가 이들을 유목민족으로 보는 것인데 여진족은 농경, 유목 그리고 어업을 겸업하였고 심지어 해적질로도 악명을 떨쳤다. 이들의 거주지가 초원이 아닌 삼림지대였기에 순수한 의미로서의 유목민족과는 꽤나 다르다. 이러한 민족들을 어렵(漁獵)민족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따라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나 후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유목 제국으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수렵 제국이나 어렵 제국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4. 역사

4.1. 기원

여진족의 기원에 대해선 말이 많은데, '여진'이란 이름이 문헌상으로 첫 등장하는 것은 《요사》의 902년자 기술이다. 그 전에 살던 이들의 조상에 대해선 중국 사료에는 시대에 따라 종족 이름이 모두 다르게 나타나는데, 읍루, 숙신말갈, 물길 → 여진, 야인[3] → 만주 순으로 오래되었다. 여진(女眞: Jušen)이란 이름은 1635년 이후 금지되어 만주족으로 바뀌었다.

전신은 말갈이고 후신은 만주지만, 엄밀히 말해서 말갈, 만주와 여진이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이들이 살던 요동 지역은 사방이 트인 개방적인 지형이었고 수백년의 역사를 거치며 끊임없이 편입과 이탈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만주족이 1635년 이전에 여진이라 불렸고, 계승의식을 가지기는 했지만, 1635년 만주족 개명에는 소수의 야인 여진과 몽골의 코르친부와 호르친부 그리고 시버족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나나이족[4]이 만주 팔기에 소속되지 않은 야인여진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금나라 건국이전에는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으로 분류하기도 했는데 숙여진은 사실상 거란에 복속된 여진이었고, 생여진은 거란에 조공을 바치기는 했지만 독립적이었으며 흑수말갈이 이에 해당되었다, 금나라를 세우는 완안부가 생여진에 속했다.

4.2. 금 건국

11세기 후반부터 영가, 우야소 등의 지도 하에 요나라의 통제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생여진(동부의 여진 세력)이 힘을 키웠으며, 1115년 완안아골타가 최초의 통일국가인 을 건국하자 급속도로 상승세를 타서 과 동맹을 맺고 요를 박살냈고 그 다음에는 동맹국이었던 북송반박살을 내서 북중국 + 만주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아무튼 금나라는 과거 거란이 그들을 핍박했듯이 그들도 그들 아래에 있던 유목민족을 핍박하고 분열시키던 중에 자신들이 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칭기즈 칸몽골 제국과 송의 후신인 남송에 의해 비참하게 멸망당한다.(1234년) 그 와중에 비슷한 패턴으로 반씩 멸망하는 송나라

4.3. 원의 지배

금나라가 처참히 멸망했을 때, 중원에 살던 여진족 대부분은 학살을 당하거나 나중에 중원을 통일한 나라 치하에서 중하계급으로 흡수되었다. 이래저래 고려로도 많이 귀화했고, 원나라의 정동군에 별개의 여진군으로 편성되어 일본 원정에까지 참여하기도 했다. 후일까지 한족에 동화되거나 몽골인의 일부가 되지 않고 여진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남은 자들은 만주(요동)에 남아있던 소수에 불과했다. 거란과 융화되기도 했으며, 해서여진 예허부의 시조인 싱언 다르한은 본래 몽골 투메드부 사람이다.

4.4. 조선과 명의 지배

조선의 여진 정벌(建州女眞征伐)

조선의 편집증적인 여진 기록의 일례.

조선의 대여진정책과 그로인한 번호(藩胡)의 증가.

이 망하고 한족의 이 들어서자, 여진족들은 명과 조선의 강력한 영향력에 놓여 건주 여진, 해서 여진, 야인 여진의 3부류로 분류되었다.

그렇게 여진족은 분열된 씨족사회 상태로 치하에서 근근이 살아갔다. 명과 조선에 눌려 기도 못펴고 있었는데, 명나라도 이성량 같은 인물까지는 막장짓을 자주하였고[5], 여진족이 계속 노략질을 하자 변경을 접하고 있던 조선에서는 때때로 여진족 부락을 토벌하러 나섰으며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조선에 칩입한 니탕개처럼 까불다가 신립에게 바로 밟혔고, 이순신 장군 역시 임란 전에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한 경험이 있다. 이렇게 토벌된 이후에도 여진의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조선도 가만있지않고 토벌에 나섰는데 조선 측의 토벌기록을 보면 조선군 기병대가 마을에 들어가서 미적거리던 민간인은 학살 or 포로, 저항하는 자는 살해했으며, 집은 불태우고 숨겨둔 식량까지 꺼내서 뒤엎어버렸으며, 산으로 도망간 여진족들은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걸 보면서 통곡을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어쨌든 이런 토벌은 거의 누르하치의 건국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여진족이 사는 땅은 이미 답이 없었지만,[6] 여진족이 힘을 기르면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약간만 세력이 큰 부족이 나타나면 충돌을 핑계로 기병대가 가서 짓밟아 놓는 식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여담으로 여진족의 생활양식은 유목민족보다는 반농 반수렵에 가까웠다. 유목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주력 산업은 농업과 수렵. 땅이 척박해서 그런지 밭을 일굴 수 있는 곳은 모조리 개간해놔도 남쪽의 중국이나 한반도보다는 농업 생산력이 딸렸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농사를 지었다. 또 수렵으로 얻은 모피나 기타 부산물들을 팔고 식량을 확보하는 등의 교역도 중요한 부분. 누르하치 시절에는 명의 무역봉쇄 한방에 크게 궁지에 몰렸고, 그간 쌓여온 것들까지 합쳐져 전쟁까지 터졌었다. 그리고 기세좋게 무역봉쇄까지 먹이던 명은 그대로 펀치맞고 뻗었다(...)

4.5. 대청 건국

여진을 지속적으로 간섭하고 통제하던 명나라가 점점 위태해 지자 1618년 1월 1일, 여진국의 쿤둘언 한 누르하치가 수러 겅기연 한이 되어 천조제만력제를 동일시하면서 대금국을 건국해 1619년, 훌룬 4부 중 예허부를 복속함으로써 표면적인 여진 통일을 완수하였다, 1635년 10월 13일, 압카이 수러 한 홍타이지가 조서를 내려 족칭을 만주로 개칭하고, 1636년 4월 11일에 국호를 대청국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반란으로 대순국을 세운 이자성을 제압하고 후에 명조의 영토를 완전히 지배한다. 그 후의 역사와 현대 만주족의 근황은 청나라, 만주, 만주족 문서 참조.

중국 간쑤성(감숙성) 경안현 완안마을이라는 곳에는 완안성씨를 가진 여진족(정확히는 그들의 후예)들이 동족촌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감숙성으로 도망간 사연은 대략 금황실 내부 정쟁에 휘말려 완안올출의 아들이 살해당하자 몇몇 왕족들이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의 여진족 후예들은 사당도 지었고 족보가 가지고 있다고 한다. 뿌리는 같은 여진족이지만 만주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여진족을 그냥 만주족으로 취급한다고 한다.[7]

5. 한국사와의 관계

한민족계 국가와 관계가 깊다.

5.1. 고대

부여에서 읍루를 복속시키고 있었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니 한국사의 서장부터 떼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셈. 고구려, 발해시대에는 말갈이란 이름으로 피지배층으로 복속해 있기도 하였으며 신라에 내려가 9서당에 소속되어 살거나 신라에 살았고 말갈의 한 갈래인 흑수말갈이 이들과 대립하기도 했었다. 이들이 침략자의 이미지지만 꽤 오랜 시간 한민족의 피지배 민족이었던 셈이다.[8][9]

송막기문에서[10] 거란인과 발해인(고구려인)의 관계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거란은 발해인에게[11] '논밭을 주고 그 부입을 덜어주었으며 무역이 오고 가고 시장을 모두 탈취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나[12], 즉 '전쟁이 있으면 곧 앞서 말을 몰게 하기 위하여 부렸다'라고 하여 전시(戰時)를 위한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송사 송기에는 '발해의 병마와 토지는 해장에 비해 풍성하다. 비록 거란에 힘써 일하지만 주인을 죽이고 나라를 무너뜨린 원한을 품고 있다[13]'라는 언급이 나와 발해 유민들이 거란에 대한 원한이 사무쳤음을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거란은 고려나 여진족과의 전쟁에도 발해인을 강제 동원하여 선봉에 세웠다. 특히 여진족과 싸움을 붙인 이유는 후술하겠지만 여진족과 발해인이 사이가 나빠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거란국지 1116년에서 '대저 요동에는 일찍이 여진과 발해가 원수여서 전호가 곧 양민들로 하여금 여러 번 명하여 전쟁하게 했다.[14]'라고 기록하였고, 금사 호사보 열전에서 여진족 호사보가 거란에게 사신인 척 파견되어 정탐하다 발해군과 마주치자 발해군은 오랑캐를 향해 한편으로 비웃고 한편으로 말하기를 '들으니 여진이 난을 일으키고자 한다는데 너희들은 참으로 나쁘도다.[15]' 즉 '야 너네 여진족 XX들 임마 거란놈들 상대로 반란 일으키려다가 이제 와서 사신보내고 꼬리내리냐? 이런 졸렬하고 간사한 새퀴들 같으니'라고 욕한것이다. 발해인들이 얼마나 여진족에 대해서 안 좋게 보았는지 알수있는 대목.

아골타의 경우도 금사 1114년에 '발해인 양복과 알답자로 하여금 거짓으로 도망치게 하여 그 고향 사람들을 불러놓고 '여진과 발해는 같은 집 식구이니 우리가 군대를 일으켜야 (거란의) 죄를 벌할 수 있으니 함부로 망동하지 말고 우리를 따라서 죄가 없게 해야 한다.[16]'고 하여 여진과 발해를 한 집안이라고 언급을 하지만 곧 '딴 생각 말고 우리 따라와라?'라고 말하게 하여 사실 세력 흡수 목적임을 천명했다. 금사 1116년 기사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잘 드러나는데,[17] 고영창이 동경을 근거지로 삼아 발해를 다시 일으키려고 하고, 금나라에 달불야를 사신으로 보내 동맹을 제안하자, 금사 알로(斡魯) 열전에[18] 오래지 않아 달불야가 영창과 탁자를 잡아 바치니, 이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하여 요나라 남로의 계적여진(요나라, 즉 거란 국적의 여진)과 동경의 주현이 모두 항복하였으니, 알로를 남로도통과 질발극렬에 임명하여, 오준에 남아 동경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요나라의 법을 폐하고 세금을 덜어주었으며 맹안모극을 설치하여 본조(금나라)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 즉 얼마 후 고영창을 배신하고 정복 후 죽여버린 다음 그 세력을 모조리 흡수한 것이다.

여진족도 발해인을 상당히 안 좋게 보거나 매우 경계한 듯한데, 송막기문의 내용을 살피면 대요, 대송 전쟁의 선봉으로 발해인을 사용하는데, 무려 발해군 3만을 동원하고 북송 전쟁이 끝난 후 산동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다.[19] 거란국지에서도 해당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이에 발해인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20] 금사 병지의 기록에도 한족과 발해인을 맹안모극에서 강제로 탈퇴시켜 차별대우했으며, 그 혜택을 국인/내족, 즉 자신들에게 몰아주게 된다.[21] 금사 희종(熙宗) 본기에서는 거란인과는 달리 그냥 한족 취급을 해서 한족의 글자를 강제한다[22]. 금사 병지에서는 여진, 거란, 한인의 통혼을 허락하면서도 발해인은 아예 기록을 하지 않아 대놓고 없는 취급 내지는 배제를 하며[23] 금사 세종(世宗) 본기에서도[24] 발해인들은 여진, 거란과는 다르게 형사취수를 금지당하고, 양자를 들이는 것 또한 차단당하며 한족의 풍습을 강제당하는 등 한족과 똑같은 취급을 당했다.[25] 이를 보면 북방에서 꽤 많은 숫자를 유지하며 살고 있던 한민족을 사라지게 만든 것은 바로 거란과 여진족이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몇백 년 뒤에 하나하나 자신들도 똑같은 꼴 당하게 되지 다만 그럼에도 고려 말에 원나라에서 요동지역을 관리하는 심양왕 자리에 고려 왕족을 임명했다는 기록이나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요동정벌을 계획했던 것을 보면 많은 수가 한족에게 동화되었음에도 적어도 15세기 무렵까지는 요동으로 이주해서 동화되지 않은 고려인들이 적지 않게 살았던 듯[26] 하지만 이들도 결국 한족이나 만주족에게 동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2. 중세

고려시대에는 고려거란 사이에 끼어서 고려나 거란의 제후국 노릇을 하기도 했다. 고려는 외왕내제를 하려면 명분상이라도 제후국이 필요했는데, 탐라국이 비슷한 역할을 했고[27] 여진 제부족들도 고려에 형식상 복속되기도 했다. 물론 요나라서희로 대표되는 고려의 합의에 의해 영역을 빼앗기는 시절도 있었지만 그 직전인 983년 고려가 먼저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가려다가 여진에게 참패를 당하는 등 결코 만만하지만은 않은 상대였다.

이 중에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신라인 내지 고려인[28][29]을 조상으로 삼고 고려에게 숙이고 들어갈 때마다 '아 우리 생각해 보니까 옛날에는 잘 지냈져 그져' 하면서 족보를 읊는(...) 이들도 있었는데, 문제는 이들이 후에 금나라를 건국하는 완안부가 된다는 점. 이 때문에 이게 고려사에만 실려 있는 것이 아니라 금사 등 중국 측의 정사서에도 실리기까지 한다(...).[30] 이게 유사역사학계의 손에 넘어가서 여진족 신라인설로 발전하고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출판하기까지 하는 등 온 난리를 쳤지만, 이는 후에 여진족 내에서 성공 신화를 이룬 단 한 명만이 신라인 출신이었다는 것일 뿐 여진족의 민족 구성이 뒤바뀌었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김함보가 무슨 씨뿌리기 폭탄 쓴 것도 아니고[31][32][33]

여진족이 유명했던 또 다른 분야는 의외로 해적질인데, 특히 한반도의 동해 방면에서 유명했다. 한반도 북쪽의 이민족은 다 말 타고 뛰어다닌다고 생각한다면 충격일 수 있겠지만, 의외로 읍루 시절부터 해적질을 자행한 탓에 옥저 사람들이 산에 가서 숨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 시대 지방행정제도에서 군사적 성격이 강한 행정 구역인 양계 중 동계가 남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이 여진족 해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고,[34] 이 해적질이 기승을 부렸던 시기에는 일본의 규슈지역까지 원정을 나갔다. 일본에서는 이들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는데, 고려와 접촉한 후 이들이 이 족속을 '도이(刀伊)'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되놈'이라고 할 때의 그 '되'가 맞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외'를 '오ㅣ[oj\]'라고 이중모음으로 읽었다가, 후대에 발음이 단모음화되었다.] 자신들이 해적질당한 사건을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라고 부르게 된다. 그 스탠스는 가히 일본판 왜구. 사실 여진족들의 활동 지역인 만주에는 평야 지대도 있었지만 숲과 큰 강도 있었기 때문에[35] 초원에서 방목만 하는 다른 유목민족들과는 생활방식이 크게 달랐고 물고기잡이 역시 여진족들의 주업 중 하나였다. 즉, 원래도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민족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 역시 동여진 해적과 숱한 전투를 치뤘다. 특히 1009년에 현종이 즉위 하자마자 등주에 75척의 과선을 배치하여 여진족 해적들의 노략질에 대비하게 하였다. 하지만 1011년 6월 동여진 해적이 100여척의 배를 이끌고 경주를 침략하였다. 1011년 1월 2차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1018년에는 동여진 해적으로부터 일본인들을 구출했는데 이때 일본측의 기록인 소우기(小右記)에는 고려의 군함이 거대하여 해적선을 전복시켰고 그 안에는 온갗 무기들이 가득하였다고 한다. 사실상 현종은 거란뿐만 아니라 여진과도 전쟁을 수행한 것이었다.

이후 금나라북송과 전쟁할때 송흠종이 고려에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고려는 이를 거절하였고 대신 여진과의 싸움에 잔뼈가 굵은 고려는 송에게 "걔네 물에서도 잘싸우더라"라는 나름의 조언(...)을 해주었다.

고려 전기엔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섬기며 조공 했으나 힘이 강성해져서 고려 측에서는 윤관의 지도하에 동북 9성을 세우기도 했지만 겨우 2년 만에 반환해야 했다.[36][37] 여진족이 급속도로 흥기하여 금나라를 세워 화북을 정복하자 고려는 이런 금나라를 보고 매우 놀란다.[38] 하지만 여진은 고려의 제후국에서 금나라를 세울 때까지 성장한 뒤 이전 거란이나 이후 몽골과 달리 고려와 굳이 전쟁을 하려고까지 하지는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북중국을 제압했으므로 여요전쟁 때보다는 더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고려 측에서 압록강을 건너와 존재한 요의 영토였던 보주 등을 회복하겠다고 했을 때 완안아골타는 우리 정신 없으니까 당신들이 알아서 접수하시오이라고 얘기하고 끝냈다.

금나라를 세운 후 충돌을 피하고자 고려가 금을 상국으로 대우해준다.

5.3. 근세

금나라가 깨지고 고려 말에는 이성계에게 꽉 잡혀 있었다. 이후 조선을 위협하는 최대 세력인 건주 야인 이만주[39]동맹가첩목아 등이 죄다 이성계 부하출신(...).

동북면 1도(道)는 원래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 되어, 야인(野人)의 추장이 먼 데서 오고, 이란 투먼(移闌豆漫)[40]도 모두 와서 태조를 섬기었으되,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潛邸)에 들어와서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었고, 동정(東征) · 서벌(西伐)할 때에도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진(女眞)은 오도리 투먼(斡朶里豆漫)[41]갸온멍거터물(夾溫猛哥帖木兒) · 할아[42] 투먼(火兒阿豆漫)인 고론 어허츄(古論阿哈出) · 타온[43] 투먼(托溫豆漫)인 가망 불어(高卜兒閼) · 하란 도다루가치(哈闌都達魯花赤)인[44] 히탄 하랑캐(奚灘訶郞哈) · 삼산 밍간(參散猛安)인[45] 고론두란터물(古論豆闌帖木兒) · 이란 투먼 밍간(移闌豆漫猛安)인 푀모 월쥬(甫亦莫兀兒住) · 해연 밍간(海洋猛安)인[46] 골야 쾻터물(括兒牙火失帖木兒) · 어두워 밍간(阿都哥猛安)인 아툰 원져(奧屯完者) · 샨춘 밍간(實眼春猛安)인 히탄 타사(奚灘塔斯) · 갸쥬 밍간(甲州猛安) 운 강고(雲剛括) · 홍긍 밍간(洪肯猛安)인[47] 골야 오난(括兒牙兀難) · 해툰 밍간(海通猛安)인 쥬후 퀴툰(朱胡貴洞) · 툴우 밍간(禿魯兀猛安)인[48] 갸온 부허(夾溫不花) · 위허 밍간(幹合猛安)인 히탄 서러(奚灘薛列) · 울후리 밍간(兀兒忽里猛安)인 갸온치후리(夾溫赤兀里) · 아샤 밍간(阿沙猛安)인 쥬후 인다호(朱胡引答忽) · 닌추커시 밍간(紉出闊失猛安)인 쥬후 원져(朱胡完者), 오롱소 밍간(吾籠所猛安)인 넌투 구루(暖禿古魯) · 히탄 보야(奚灘孛牙), 투먼 밍간(土門猛安)인 고론 보리(古論孛里) · 아모라(阿木刺)의 당고 히탄 구유누(唐括奚灘古玉奴)[49]이며, 우량캐(兀郞哈)는 투먼(土門)의 골야 발소(括兒牙八兒速)이며, 혐진 우디거(嫌眞兀狄哈)은 구쥬(古州)[50]의 골야 키무나(括兒牙乞木那) · 다비나(答比那) · 컬덕거(可兒答哥)이며, 남돌 우디거(南突兀狄哈)인 슈핑강(速平江) · 남돌 아라카 바얀(南突阿刺哈伯顔)이며, 콜칸 올적합(闊兒看兀狄哈)은 얀춘(眼春) · 골야 투칭개(括兒牙禿成改) 등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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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총서[51]

이지란같은 경우는 아예 이성계를 따라서 조선으로 넘어와서 후손을 남겼다. 오랫동안 역사학자들 일부에서는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성계를 비롯한 선조들은 우리는 고려인이라는 정체성과 핏줄이 뚜렷했으며, 결정적으로 여진족이 이성계 일족을 동포가 아닌 앙숙 취급한지라[52] 곧 틀린 주장이 됐다. 다만 아직 혐한 및 환빠 유저들이 이런 내용으로 영상을 올린 사람이 있다.#(일본어) 반론

저기 나온 이름들 중에 아합출(어허츄)과 갸온멍거터물(아이신기오로 먼터무)이 건주위, 청나라 황실의 조상이 된다. 아합출(어허추)은 이만주의 할아버지고, 맹가첩목아(아이신기오로 먼터무)는 누르하치의 6대조이며 이들의 후손이 15세기 말까지 건주3위를 지배했다. 만주왕 이성계의 위엄 여진족 주요 3부족 중 하나인 건주 야인이 이성계에게 복속된 것은 거의 확실하고 야인 여진은 확실하진 않지만 목단강과 동해 연안지역이 핵심 지역이 이성계에게 복종한 듯. 이렇게 이성계의 영향력이 매우 높았지만 조선의 건국 이후 명나라가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이성계가 죽기 전부터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명나라가 초기에 우량카이나, 건주야인 등에게 조공을 요구하자 이에 대한 대책회의가 조선에서 열렸다. 왜냐고? 이때 여진족은 아예 조선 속국 취급이었기 때문(...). 하지만 이성계 이후 여진족에 대한 조선 왕실의 영향력은 사실상 사라져 조선은 명나라 와의 충돌을 거부하고 여진족 통제권을 사실상 포기하여 명나라에 넘긴다. 그리고 명나라는 관리 못 해서 중원을 청나라가 먹었다[53]

특히, 조선시대에는 야인, 오랑캐, 되놈 등으로 불리며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충돌했다. 지금 한국 북쪽 국경선인 압록강, 두만강세종 대에 이들과의 투쟁(4군 6진)에서 얻어냈다. 세력이 약해지면 조공을 바쳐왔으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백그라운드로 여진족 출신이 많았다.[54] 일제 이전 조선의 주 까임 대상[55]떡밥. 또한 끊임없이 싸우는 와중에도 여진족의 많은 수는 조선으로 계속 귀화했다.

조선 전기에는 여진족의 세력을 방치했다가 금나라가 세워져 안보에 위협을 받았던 고려시대의 교훈을 삼아서 빈번하게 명나라 및 조선에 침입해오는 여진족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지속적으로 예방전쟁을 펼쳤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의 여진 정벌(建州女眞征伐)을 참조. 태종 때부터 시작된 조선의 여진정벌은 특히 세종 이후 부터 본격적으로 토벌전을 펼쳐 세조 때에는 남이 장군의 활약으로 그야말로 건주여진을 중심으로 여진은 가루가 되도록 갈린다. 이후 여진에는 청나라 만주족 통일 전까지 100년간 강력한 추장이 나타나지 못할 정도.[56]

한반도 북동부에 살던 재가승이란 민족종교집단이 여진족의 후예라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이에 관해서는 논란이 다소 있으며, 설령 여진족의 피가 약간 섞였을지라도 재가승은 기본적으로 토종 한국인이며 단순한 지역적 풍습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다.

6. 관련 문서


  1. [1] 이 3개의 별칭은 주리진이 와전되어 탄생한 여진(女眞)에서 파생된 것이다. 여직의 경우에는 거란 흥종을 피휘하기 위해서 진을 직으로 바꾼 것이다.
  2. [2] 요나라 때에는 '여진족이 만 명을 넘으면 대적할 수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3. [3] 야인시대의 그 야인과 한자 철자가 같다. 여진족시대 다만 의미는 좀 다르다. 여기선 들판에 사는 사람들, 문명(중원)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이라는 의미.
  4. [4] 중국명은 허저족 혹은 혁철족.
  5. [5] 특히 조선이 국경을 건너 여진 토벌에 나서는것을 명에서는 일부러 묵인하고 방관했다.
  6. [6] 고구려발해 시절에 농사가 이루어졌고 현대에 와서는 석유도 발견되고 석탄도 매장되고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추웠던 데다가 지금보다 날씨가 추웠다고 추정되고 몽골군이 침입해오면서 이 일대의 인구를 개박살내서 황폐화된 여파도 있어서 농업생산량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여진족들이 농사만 지었던 게 아니라 수렵도 병행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고.
  7. [7] 실제로 금나라 황족계 후손들 중 또다른 일부는 팔기군에 편입되어 진짜로 만주족이 되기도 했다.
  8. [8] 단, 유목민 특성상 진짜 피지배를 당하고 있는것인지 아닌지 미묘하기는 했다. 동아시아만이 아니라 이집트, 페르시아 등 역시 자기 영토 혹은 영향권 안에 있는 유목민들을 피지배층으로 여기기도 했으나 거기 살던 유목민들 중에는 딱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반란(?) 혹은 침략을 벌여서 그러한 나라들을 멸망시킨 유목민들도 많았다.
  9. [9] 일본에서는 정반대로 해석해서 나온 것이 만선사관이다. 이쪽에서는 고구려를 여진계열의 만주족이라고 주장하며, 만주족이 한민족을 지배했다고 주장하며 더 막가는 일본의 사이비 역사학 부류는 아예 고대 한민족과 지금의 한민족은 만주의 민족에 의하여 교체된 민족이었다는 개드립을 친다.
  10. [10] 당고종대인 648년에 이 거란 지역에 설치한 기미주의 이름이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로, 이후 거란의 추장들은 당 조정으로부터 현지 기미주 수령 자격으로 송막도독(松漠都督)에 임명되었다. 발해의 개창으로 이어진 유명한 이진충 역시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송막도독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11. [11] 給以田疇, 捐其賦入, 往來貿易, 關市皆不征
  12. [12] 有戰則用為前驅
  13. [13] 渤海兵馬土地, 盛於奚帳, 雖勉事契丹, 俱懷殺主破國之怨
  14. [14] 蓋遼東夙與女真, 渤海有讎, 轉戶則使從良, 庶幾效命敢戰
  15. [15] 遇渤海軍, 渤海軍向胡沙補且笑且言曰: 聞女直欲為亂, 汝輩是邪
  16. [16] 召渤海梁福, 斡答剌使之偽亡去, 招諭其鄉人曰: 女直, 渤海本同一家, 我興師伐罪, 不濫及無辜也
  17. [17] 閏月, 高永昌據東京, 使撻不野來求援
  18. [18] 未幾, 撻不野執永昌及鐸刺以獻, 皆殺之. 於是, 遼之南路系籍女直及東京州縣盡降. 以斡魯為南路都統, 迭勃極烈, 留烏蠢知東京事. 詔除遼法, 省賦稅, 置猛安謀克一如本朝之制.
  19. [19] 金人慮其難制, 頻年轉戍山東, 每徙不過數百家, 至辛酉歲盡驅以行。
  20. [20] 至辛酉歲, 盡驅以從, 其人大怨
  21. [21] 迨夫國勢浸盛, 則歸土地, 削位號, 罷遼東渤海, 漢人之襲猛安謀克者, 漸以兵柄歸其內族, 熙宗皇統五年, 又罷遼東漢人, 渤海猛安謀克承襲之制, 浸移兵柄於其國人, 凡漢人, 渤海人不得充猛安謀克戶。猛安謀克之奴婢免為良者, 止隸本部為正戶.
  22. [22] 天眷元年 六月 乙未, 詔百官誥命, 女直, 契丹, 漢人各用本字, 渤海同漢人
  23. [23] 迨夫國勢浸盛, 則歸土地, 削位號, 罷遼東渤海, 漢人之襲猛安謀克者, 漸以兵柄歸其內族, 熙宗皇統五年, 又罷遼東漢人, 渤海猛安謀克承襲之制, 浸移兵柄於其國人, 凡漢人, 渤海人不得充猛安謀克戶。猛安謀克之奴婢免為良者, 止隸本部為正戶.
  24. [24] 丙戌, 制漢人, 渤海兄弟之妻, 服闋歸宗, 以禮續婚者, 聽
  25. [25] 다만 같은 고구려 유민에 의해 세워졌고 발해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던 고려에서조차 한족의 글자인 한자를 썼던 데다 형사취수 같은 풍속은 애초에 사라져 있었고(서옥제 즉 데릴사위 풍습은 조선 중기까지도 남아 있었다) 송나라나 몽골 사람들이 고려인들을 두고 "글도 알고 불교 믿고 하는 것이 꼭 한족들 같아 다름이 없다"고 한 것을 감안하면 이를 달리 생각해볼 여지도 있다. 여기서 '한족들의 풍습을 강제당했다'는 말을 꼭 1930년대 민족말살통치와 동치시켜 볼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
  26. [26] 발해인들이 산둥 지역으로 강제이주된 뒤에도 고려 방면에서 북쪽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다. 요동 지역에 살게 된 고려인들의 경우 몽골과의 전쟁으로 포로가 되거나 몽골군에 항복한 배신자 사람들이었고, 그들 가운데는 훗날 조선 왕조를 세우게 되는 이성계의 고조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몽전쟁 및 대몽항쟁을 지속한 삼별초 역시 기존의 좌우 야별초에 몽골에 잡혀갔다가 도망쳐 돌아온 포로 출신들만 모아서 구성한 부대인 신의군이 더해져서 삼별초를 이루었다.
  27. [27] 탐라인들은 고려에서 외국인으로 취급되어 예를 들어 과거 제도에서도 빈공과에 응시해야 했다. 다만 어떨 때는 또 고려의 일부처럼 대하기도 하고 고려 시대의 제주도 인식은 이랬다 저랬다 애매한 편이다.
  28. [28] 문헌에 따라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데 대충 한반도 방면에서 왔다는 뉘앙스로 적어 놓은 듯 하다.
  29. [29]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인 금사와 고려역사를 기록한 정사인 고려사 모두에 금나라의 시조가 한반도(신라 내지 고려)에서 왔다는 내용은 엄연히 실려있다. 엄연히 있는 사실마저 부정하면 그것이 역사왜곡이다. 민족주의가 싫다고 아예 있는 사실마저 부정하면 안 되는 것이다.
  30. [30] 단, 금사는 원나라가 작성했는데, 몽골인들은 사실이 아니거나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들도 자주 기록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 부정할 수만은 없지만.
  31. [31] 하지만 금사는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다. 그런 금사에 아골타의 7대 조상인 함보가 고려에서 왔다는 구절이 실려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32. [32] 그리고 기껏해야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탈민족주의적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지난 역사를 멋대로 재단하는 일이야말로 역사왜곡이 아닌가? 그것은 19세기에 등장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학을 맹신하는 중국 공산당이 중국 역사에서 일어난 무수한 농민 반란들을 죄다 계급 해방 투쟁이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차원의 역사왜곡이 될 수 있다.
  33. [33] 단, 민족 개념에 대한 비판이 있는 것은 탈민족주의 관점이라기보다 과거 민족에 대한 실체가 생각보다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만주족 같은 경우도 영문 위키 청나라 문서에서는 원래 있던 여진족이 아닌 인공적으로 탄생한 민족으로 보며 팔기만주씨족통보에서도 조선·몽골·한족 등 본래의 여진족이라는 민족과는 다른 인간들이 만주족 취급을 받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사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고구려인은 무덤지기 같은 천한 일을 하다 몰락할 것을 염려하면서도 자신이 약취한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은 무덤지기나 하라고 명령하는 것처럼 뭔가 근현대에 정립된 민족 개념(과거에는 삼한 민족끼리는 동질의식이 있어서 차별 등이 거의 없었을 것이라 추측했다.)과는 다른 경우가 발견되고 있다. 특히 그러한 일을 맡는 사람들은 아예 고구려인인 구민들과는 사회에서의 격차도 컸다. # #
  34. [34] 심지어 이웃에 있던 우산국은 1018년 여진족 해적의 침입을 받고는 사실상 나라로써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전까지는 고려의 속국 수준으로나마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 공격 한번에 망했어요.
  35. [35] 여진족들이 거주하던 지역 가운데 하나인 흑룡강만 해도 폭이 454,800㎢에 달한다.
  36. [36] 학교에서는 동북 9성을 '고려의 영토 확장'이라고 가르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예종아버지의 유지를 따른다는 이유로 무리해서 여진족을 공격했고, 결국 동북 9성을 차지한 지 2년 만에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참패(갈라수 전투)하게 된다. 또한 동북 9성으로 인한 재정 부족이 날로 심해지자 고려는 결국 동북 9성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동북 9성의 책임자인 윤관은 중앙에 복귀하지 못하고 파직당하는 등 국가 사업으로서는 완전한 실패였다. 즉, 영토든 뭐든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는 것.
  37. [37] 하지만 아예 소득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여진은 이후 금나라로 발전하면서 요나라보다 더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며 중국대륙의 북쪽을 집어 삼키기까지 하는데도 고려를 단 한 차례도 침공하지 않았다. 2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금나라도 고려 군사력을 만만하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아예 근거가 없지는 않다.
  38. [38] 당장 여진족은 이전까지만 해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부르며 윤관에게 패배한 이후에는 고려 쪽으로 기와 한 장 던지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39. [39] 이만주 할아버지 아하추는 실록에는 아합출(阿哈出) 혹은 어허추(於虛出)로, 중국기록엔 아합출로 나오고 해당 목록의 두 번째이다.
  40. [40] 이란(일란)은 '3', 투먼은 ‘1만(萬)’을 의미하는 만주어로 이란두만은 곧 삼만호(三萬戶)를 이른다.
  41. [41] 오도리(吾都里)라고도 불렸던,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군 인근 두만강 유역. 이하 '투먼(두만)'이라는 건 만호(萬戶) 즉 만호장이다.
  42. [42] 만주어로 후르하(虎爾哈)라고 부르며 지금의 무단강(목단강) 유역이다.
  43. [43] 알타리와 후르하, 타온 셋을 합쳐서 이란 투먼(삼만호)라고 부른다.
  44. [44] 합란은 함주(咸州)로 지금의 함경북도 함주군이다.
  45. [45] 삼산은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지역으로 고려에서는 이곳에 영주(英州)을 설치하였고, 공양왕 2년(1390년) 길주에 합쳐졌다.
  46. [46] 해양(해연)은 지금의 함경남도 길주군이다. 밍간이란 천호장(千戶長)을 뜻한다.
  47. [47] 홍긍은 고려의 웅주(雄州)로 훗날 길주에 합병되었다.
  48. [48] 독로올(툴우)은 단주(端州)로 지금의 함경남도 단천군이다.
  49. [49] 당고(唐括, 당괄 씨)는 과거 금나라의 황후 가문이었으며, 금 태조 아골타의 황후였던 성목황후 역시 당고 씨였다.
  50. [50] 지금의 영고탑 일대.
  51. [51] 여진 추장들의 각 이름의 한글 표기는 용비어천가를 따랐음을 밝혀 둔다.
  52. [52] 이성계의 증조부인 이행리(추존 익조)가 이것 때문에 여진족들에게 죽을 뻔했다. 항목 참조.
  53. [53]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상실된 것은 아니다. 일부 조선에 우호적인 여진족들은 선조 때까지 조선에 복종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조선에서는 번호(蕃戶)라 불렀다. 실재로 선조 때 일어난 니탕개의 난에도 조선을 공격했던 우을지의 선동에 호응한 니탕개를 비롯한 여진족들의 추장들의 경우 처음부터 조선에 적대적인 인사들이 아니라 오히려 벼슬까지 받은 자들이었다.
  54. [54]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 이 때문에 '이성계 여진족설'도 생겨났으나, 그냥 어거지로 조선 까는 수준이라(...).
  55. [55] 명과 조선이 몽골 제국 이후 모든 오랑캐에 대한 경계가 노이로제급이 된 이유도 있다.
  56. [56] 당장 임진왜란 때 전사한 신립부터 니탕개 등 여진족을 아작낸 명장이다. 아마 조선 전기 때 당시 조선인들은 나중에 이 여진족이 반란으로 작살난 명나라를 접수하는 청나라까지 세울 정도로 성장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임진왜란, 이괄의 난, 이자성의 난, 흉년 등 정말 천운스럽게 후금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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