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생

고구려의 배신자

국적

고구려 ->

당 시호

양공(襄公)

이름

연남생(淵男生)

이명

천남생(泉男生)

원덕(元德)

아들

연헌충[1], 연헌성

아버지

연개소문

형제

연남건, 연남산

사망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관사(官舍)

묘지

당 낙양(洛陽) 망산(邙山)

생몰연도

633년 ~ 679년 1월 29일(만 45세)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일생
2.2. 권력 투쟁
2.3. 고구려 멸망
2.4. 이후의 삶
3. 평가
4. 가족관계
5. 묘지명
6. 창작물에서
7. 같이보기

1. 개요

논하여 말합니다:

...남생, 헌성은 비록 당실(唐室)에 명성을 알렸지만, 본국(本國)에서 말할 땐 반인자(叛人者)라 불려지는 걸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 발췌. 저자 김부식이 남생 헌성 부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고구려 말기의 권신으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한 연개소문의 맏아들.

아버지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그의 뒤를 이어 2대 대막리지가 되었으나 연남건, 연남산 두 동생과 불화가 생겼고, 권력 투쟁을 벌이던 끝에 궁지에 몰리자 당나라에 투항하여[2] 고구려의 멸망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생애

2.1. 초기 일생

남생의 고구려 관직

고구려 관등

선인(先人)
중리소형(中裏小兄)
중리대형(中裏大兄)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
막리지(莫離支)[661년]
태막리지(太莫離支) / 대막리지(大莫離支) / 태대막리지(太大莫離之)[666년]

고구려 직위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661년]

633년에 연개소문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641년에 아버지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가 되자 곧바로 이듬해부터 벼슬을 지내게 되었다.

642년에는 선인(先人) 벼슬을 얻었는데, 그때 연남생의 나이는 9세였다.[5][6] 이후에 15세에는 중리소형(中裏小兄)에 봉해졌으며, 18세에 중리대형(中裏大兄)이 되어 국정을 주도하였다.

23세에는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에 임명되었고, 24세에는 장군직을 겸하였다. 그리고 28세에는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莫離支兼三軍大將軍)이 되었다.

이후 661년 9월에는 연개소문의 명에 따라 수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수비하여 당나라군을 막았는데 당나라 장수 계필하력이 도착하면서 크게 패하여 3만 군사를 잃고 달아났다. 이후 당나라 군대는 몇개월동안 평양 근처에 주둔하였으나 이듬해인 662년 정월에 연개소문이 직접 사수에서 방효태가 이끄는 당군을 무찌르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그리고 665년, 마침내 연개소문이 죽게 되자 32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막리지(太莫離支)가 되어 군사와 나라의 업무를 총괄하는 등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2.2. 권력 투쟁

태막리지가 된 연남생은 대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맡게 된 후, 지방으로 가서 여러 성을 순시하게 되었다. 이때 두 아우인 연남건연남산 등을 수도에 남겨두어 뒷일을 맡아 보도록 하였다. 이때 연남건과 연남산의 측근들이 두 사람에게 와서는 연남생이 필시 그들을 죽이려 할 것이므로 먼저 손을 써서 선빵을 날려야 한다고 고하였다. 그러나 연남건과 연남산은 처음엔 이를 믿지 않았다.

한편 연남생 역시 두 동생들이 난을 일으켜 연남생을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하려 하려 한다는 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연남생 역시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지속적인 이간질에 의해 결국 동생들에게 의심을 품게 된 연남생은 우선 친한 사람을 밀정으로 보내서 동생들을 염탐하게 하였는데, 그만 밀정이 연남건과 연남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형을 의심하게 된 연남건과 연남산은 왕명을 칭하여 연남생을 평양으로 불렀으나 연남생은 동생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해 돌아오지 않았다.[7]

666년, 연남건과 연남산은 결국 정변을 일으켜 수도 평양성을 장악하였고, 급기야는 연남생의 아들인 연헌충마저 살해하고 말았다. 정변 직후에 스스로 태막리지가 된 연남건은 군사를 보내어 지방에 있던 연남생의 세력을 토벌하고자 하였는데, 이에 연남생은 수도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국내성에 피신해서 이를 방어하는 한편 아들 연헌성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2.3. 고구려 멸망

남생의 당 관직

당 작위

현도군공(玄菟郡公)
변국공(卞國公)

당 직위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 行軍大摠管)[8] 겸(兼) 지절안무대사(持節安撫大使)[9]
요동 대도독(遼東 大都督)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당시 당나라는 1, 2차 고구려-당 전쟁의 연이은 실패 이후 숨고르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연남생의 전갈을 받은 당고종은 사신으로 파견된 연헌성에게 벼슬과 재물을 하사하여 국내성으로 돌려보냈으며, 장군 계필하력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 연남생을 맞아들이도록 하였다.[10]

666년 6월에 연남생은 국내성을 비롯한 6개 성의 주민과 목저성(木底城)·남소성(南蘇城)·창암성(倉巖城) 등 3개 성의 백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그해 9월, 연남생은 그 공으로 당고종으로부터 특진 요동 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特進 遼東 都督 兼 平壤道 安撫大使)의 벼슬을 받고 현도군공(玄莬郡公)에 봉해졌다.[11] 이렇게 하여 한때 고구려 최고권력자였던 연남생은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의 향도가 되고 말았고, 연남생이 항복하면서 당나라에 바친 영토들은 그동안 고구려-당 전쟁에서 당나라의 골치를 썩혔던 보급 문제를 해소하고 좀 더 평양성에 가까운 곳이 주 전장이 되었다.

연남생이 국내성을 당나라로 들어다 바친 것은 고구려한테 치명타였다. 국내성이 당나라로 넘어감으로써 보급 문제 뿐 아니라 고구려 국토가 양분되었고, 이 때문에 667년이 되자 고구려 중앙에서 교통이 차단된 국내성 이북의 만주지역은 죄다 당나라로 넘어가고 만다. 667년 10월이 되자 당나라가 별다른 큰 전쟁 없이 고구려 만주 일대의 땅을 대부분 손에 넣어버렸다. 고구려는 수나라 - 당나라로부터 고구려를 지키던 만주 전선을 상실해버렸다. 만주 전선을 상실하자 현재의 북한 지역 정도만 남은 고구려는 인구가 급감하여 세수가 줄어들면서 급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668년, 당나라신라의 협공을 받은 고구려는 수도인 평양성마저 포위당해 공격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연남생의 아우였던 연남건은 끝까지 평양성을 지키며 당군과 싸우려 했지만 연남건의 심복이었던 승려 신성이 당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 주고 말았다. 이로써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2.4. 이후의 삶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연남생은 당군의 길을 터준 공을 인정받아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의 벼슬을 받았으며, 3000호에 달하는 식읍을 하사받았다. 본인의 묘지명에 따르면 고종은 연남건을 포로로 잡을 생각이 없고 바로 죽이려 했는데 남생은 그래도 형제간의 정이 조금이나마 남아있었는지 죽이지 말라고 부탁해서 결국 유배형으로 끝내게 해주었다. 이 이후로 연남생은 한동안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에 676년, 나당전쟁에서 당나라 군대가 신라와 고구려 부흥 세력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평양에 거점을 뒀던 당나라 세력은 요동까지 쫓겨나게 됐다. 이로 인하여 당나라는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고,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옛 북쪽 땅 요동에서도 다시 부흥 운동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게 되었다.

당나라 조정은 고구려 유민들을 달래기 위해 677년, 연남생을 요동으로 파견하여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관리로 임명하였다.[12] 연남생은 이후로 안동도호부에서 근무하다가 679년에 46세의 나이로 훙(薨)하였다.[13]

679년 12월 26일, 당나라는 죽은 연남생의 유해를 중국 땅으로 옮겨와 낙양북망산에 매장하였다. 사흘 동안 조회가 중지되었으며 장례식에 든 비용은 모두 조정이 냈다. 비단 700필과 쌀 200석을 내려 주고 5품 관리를 시켜 부절(符節)과 새서(璽書)를 보내주었다. 황실 악단을 시켜 노래를 연주하게 시켰고 황실 호위대가 관 운반을 호송했다. 또한 연남생의 일생과 관직, 가계도 등에 대해 기록한 묘지명을 남겼는데, 이 묘지명은 1923년에 발굴되었다.

묘지명에 기록된 당에서 내려준 시호는 양공(襄公). '도와준(거들어준) 공작' . 정말 연남생에게 어울리는 시호이다. 증손자 연비의 묘지명엔 '변국 양공(卞國 襄公)'으로 나오는데, 생전의 봉국을 시호에 붙혀 쓴 것.

3. 평가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은 사론에서 연남생을 아버지인 연개소문이나, 아들인 연헌성 등과 더불어 반역자라고 무자비하게 깠다. 그나마 연개소문은 당나라가 인정할 정도로 나름 재능 있는 선비인데 왕을 죽인 죄가 큰 것이라고 조금 봐줬지만 연남생과 연헌성은 그대로 당나라에 투항해버린 것에 대해서는 '남생, 헌성은 당나라 입장에선 공신이어도 우리 입장에서는 반역자'라고 딱 잘라 평가하였다.[14]

이런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고구려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고구려가 멸망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하여 대개 매국노로 평가되었다.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때는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였던 사람이 결국 자기 나라에서 도망쳐나와 망하게 만들었으니 일생 자체는 꽤 기구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또한, 연남생이 두 동생들과 권력 투쟁을 벌이느라 고구려를 망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당시 당나라도 이미 거하게 말아먹은 원정만 해도 전신 수나라 때부터 수차례였기 때문에 국력이 남아도는 형편이 절대 아니었고, 내부적(측천무후)으로든 외부적(토번)으로든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결과와 상황을 알고 보는 현대인들의 시각에서 만약 이 시기만 잘 넘겼으면 고구려는 망하지 않고 그대로 남북국시대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 연남생이 죽은 후에 남긴 묘지명에는 기존의 사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연개소문 가문의 가계도와 집안에 대한 내력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고구려 후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이유가 기구했다쳐도 어쨌든 고구려와 당은 서로 다른 나라인데 고구려 최고권력자가 권력투쟁 중에 모국을 멸망시키는데 일조한 것은 고구려 입장에서 매국노이다. 그나마 7세기 사건이고 대중의 인지도가 윗세대인 연개소문에 맞춰져 존재감이 미비했기에 이렇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삼국지에서의 원소의 장남 원담과 그 행적이 상당히 비슷하다.

4. 가족관계

아버지는 그 유명한 막리지 연개소문. 어머니는 관작이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존재는 보인다.

남생의 아들 헌성 묘지명에 '조모(祖母)'란 인물이 등장한다. 682년에 사망했으며 당에서 죽었다. 헌성의 조모는 당연히 남생의 어머니, 연개소문의 아내를 의미한다. 이를 보아 남생은 당으로 도망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간 걸로 보인다. 아니면 고구려 패망 후 따로 모시고 왔던지.

형제론 동생 남건, 막내동생 남산이 있다. 삼형제가 조국 멸망 끝에 당에서 다시 만났는진 의문이다. 본인, 남산 묘지명엔 형제의 재회를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본인 묘지명엔 남건을 죽이지 말고 살려달라고 당고종에게 부탁한 기록이 남아있다.

남생에겐 두 아들이 있었으니 분명히 아내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특이하게 남생, 헌성 묘지명에 일언반구도 없다. 사망년도라도 남은 남생의 어머니에 비해 어떠한 언급도 없는 걸 보면 일찍 죽은듯 싶다.

아들은 연헌충(淵獻忠), 연헌성(淵獻誠)이 있다.

손자는 연현은(淵玄隱), 연현정(淵玄靜), 연현일(淵玄逸)이 있다. 세 손자 모두 연헌성의 아들이다.

증손자는 연현은의 아들인 연비(淵毖)가 있다. '천비(泉毖) 묘지명'이 있다. 보장왕의 외손자인 '왕위(王暐)'의 딸과 결혼했다.

5. 묘지명

죽은 후에 중국 낙양 북망산에 묻혔고 거기에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기록된 묘지명을 남겼다. 덕분에 고구려의 인물들 중에서도 드물게 전반적인 생애에 대한 기록이 잘 남아있는 인물이다.

연남생의 묘지(墓誌) 뚜껑돌과 묘지명.

왕덕진(王德眞)이 비문을 쓰고 구양순의 아들인 구양통(歐陽通)이 글씨를 썼다.묘지 뚜껑돌에 적힌 글은 '대당고특진천군묘지(大唐故特進泉君墓誌)'. '당나라의 특진된 고(故) 천(泉) 군의 묘지'란 뜻이다.

  • 연남생의 성이 연(淵)이 아니라 천(泉)으로 씐 것은 '연’자가 당고조의 이름 '이연(李淵)'과 같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관습을 피휘라 부른다.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았고 고구려에서 죽었다면 본인 성을 그대로 사용했을텐데 당나라에서 죽었기 때문에 성이 바뀌었다.
  • 이 문서의 대부분 내용이 여기서 나왔다. 남생의 나이, 생몰년도, 3대조, 후손, 관직, 사망지, 묘지, 장례식 등등. 아들 헌성과 증손자 비의 묘지명에도 조금씩 등장한다.
  • 특이하게 묘지명에서 남생의 출신지를 '요동군 평양성인(遼東郡 平壤城人)'이라 했다. 요동군은 당이 옛 고구려 땅을 부를 때 쓴 말이고 중요한건 '평양성인(平壤城人)' 즉 남생은 평양 귀족 출신이란 걸 드러낸다.
  • 남생의 죽음은 졸(卒)이나 사(死)가 아닌 '훙(薨)'으로 표현됐다. 이는 당이 엄청난 우대를 해준 것이다. 동생 연남산, 고려 최충헌, 최항도 자신들 묘지명에 훙으로 죽음이 표현됐다.
  • 봉국인 '변국(卞國)'은 '변한(卞韓, 弁韓)'이다. 삼한 문서에서 설명되어 있듯 삼국시대 후반기쯤 가면 마한, 진한, 변한이 한반도 남부의 나라들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 각각 대입하는 것으로 의미가 변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옛 변한으로 간주해 봉국으로 붙었다. 조선의 변한 소경공과 같은 국가가 봉해졌다. 동생 남산은 요양군(郡)에 봉해져 한단계 낮았다.

6. 창작물에서

아무래도 인물의 행적이 행적인지라 주인공으로는 거의 나오지 않으며, 고구려 말기를 다룬 매체에선 그래도 비중있게 자주 등장한다. 거기에 순수하게 매국노 악역으로 묘사되기 보다는, 왠지 열폭형 캐릭터가 흑화된 경우가 많다. 열폭의 대상은 당연히 극중 주인공들.

6.1. 연개소문

안재모가 연기했다. 모친은 젊은 시절 연개소문의 부인이었던 이화.[15]로 동생인 연남건, 연남산과는 이복형제지간이다.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친아들처럼 생각해주는 소연[16]을 친어머니처럼 모시며 두 동생을 잘 보살펴줄 것을 맹세하는 한편 소연은 서토의 여인이 낳은 남생만을 챙기고 생각한다며 울분을 토하는 남건 남산에게 "다시 한번만 더 그런 소리를 하면 두 번 다시 너희를 보지 않을 것이다." 라며 엄포를 놓는다. 물론 소연은 형제끼리 사이좋게 잘 지내라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지만 이 삼형제의 갈등은 끝내 고구려의 멸망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심하게 무능하거나 찌질하거나 인성이 개판인 인물로는 나오지 않지만[17] 이 드라마에서 거의 초인과 같이 묘사된 아버지와 비교하면 능력에서 영 떨어지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연개소문도 연남생이 자기 뒤를 이을 만큼 유능하진 않음을 알면서도 '제놈이 자리를 못 지킬 정도로 무능하면 그에 걸맞은 인물이 나타나 대막리지 자리를 알아서 차지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대막리지 자리를 넘겨줬는데, 그 직후, 서토의 여인[* ]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평소부터 연남생에게 불만이 많았던 연남생의 [18]들이 변란을 일으켜 형 가족을 몰살하고 고구려도 뒤엎으면서 망했어요[19]. 이후 행적은 역사와 비슷하다. 그래도 이 쪽에서는 고구려 멸망의 책임을 연남생보다 그 동생들에게 훨씬 크게 묻고 있다.[20] 연개소문도 연남생은 못난 자식이라고 까고 말았지만, 연남산과 연남건은 직접 죽이려고 했다. 재미있게도 연남생을 맡았던 안재모는 연개소문을 맡았던 유동근과 각자 태종과 태조의 역할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항목에 나오는 자신의 분신을 살해하게 되는(...) 훌륭한 배우개그를 달성하게 된다.

6.2. 대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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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전문 배우임호가 연기했다. 이 쪽도 능력이 아예 없는 정도는 아닌데, 아버지인 연개소문에게 더 좋은 평가를 받은 대조영에게 열폭하는 캐릭터로 등장. 초반에는 부기원 못지않게 대조영을 괴롭혔다. 물론 부기원과 달리 이 쪽은 순수하게 악인이라기 보다는 열폭형 인물에 가까운데다, 연개소문이 연남생을 도와달라고 유언을 남긴 것도 있어서 대인배 대조영은 다 용서하긴 했다. 결국 매국노가 되긴 했으나 그냥 순수한 악에 가깝게 묘사되는 부기원 세력과 달리 세밀한 감정 묘사 및 상황묘사 때문에 동정의 여지가 없진 않다. 착하면 착하고 나쁘면 나쁜 평면적인 인물이 많은 이 드라마에서 그나마 복합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캐릭터 중 하나이다.

연개소문의 사후에는 대막리지의 자리를 이어받지만 부기원 세력이 연남건을 밀면서 동생과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이후 책사 신홍의 반대에 불구하고 측근들만 남기고 요동을 순찰하다가 그대로 연남건에게 대막리지 자리를 빼앗겼고 우여곡절 끝에 당나라에 투항, 요동정벌의 선봉이 된다. 처음엔 별로 싸울 생각도 없었으나, 신홍이 새 고구려를 세울려면 당나라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조언하면서 선봉에 선다. 요동 전투에서는 활약하긴 했으나, 평양성 공격때는 죄책감 때문에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막사에 틀어박혀 있는다. 연남생의 언급에 의하면 평양성에 도달하자 매일 아버지가 통곡을 하는 악몽을 꾼다고. 이와중에 사신으로 파견된 부기원을 따라온 대조영이 옥에 갖히자, 자신의 직위를 내세워 대조영을 풀어주고선, 대조영으로 하여금 평화협정을 막게 한다. 아무리 적이라고 하지만, 무작정 성문을 열면 평화가 찾아올거라 믿는 어리석은 매국노들에게[21] 조국이 그냥 멸망당하는걸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던 것. 평양성이 함락되자 남건은 고구려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자결을 시도한다. 그 직후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동생 연남건을 보자마자 놀라 끌어안고 울부짖는데 남건은 '형님,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형님이 안 계신 고구려의 대막리지 자리가 너무나도 무서웠습니다'라며 '이 고구려는 우리 형제가 망하게 했습니다...!!!' 라며 울자 남생은 '네 잘못이 아니다. 모든 게 이 못난 형의 잘못이다' 라며 눈물을 흘린다.

고구려 멸망 직후 안동도호부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압송하는 직책을 맡았는데, 연남생도 좋아서 그런 짓을 하는게 아니라 신홍의 의견대로 안동도호부를 손아귀에 넣고선 새로운 고구려를 건국하기 위해 당나라에 협력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양심에 찔리는지, 대조영이 대당운동을 주도하자 그를 고구려 유민을 호송하는 군대에 잠입시켜주는 등, 소극적이나마 도와준다. 이후 대조영이 안동도호부를 빈집털이하자, 유민 목록 문서들을 챙기지도 못하고 그대로 도주해야 했으며, 결국 그 책임으로 당나라로 소환된다. 이때 책사 신홍이 추천받아 연남생을 떠나 이해고에게 간다.

이후 안동도독부가 창설되면서 부도독으로 임명되는데, 도독인 보장왕이 주색잡기에 빠진 모습을 보이자 보장왕에게 정신 차릴 것을 계속 주장한다. 물론 보장왕은 겉으로 타락한 척 하며 뒤로는 동명천제단(東明天帝團)을 지원하고 있었고, 대조영 측이 일부러 보장왕 암살시도를 할 때쯤 연남생도 보장왕이 동명천제단을 이끌고 있다는걸 알아챈다.

나중에는 대조영이 이끄는 비밀 조직인 동명천제단이 안동도호부를 공격할 때 안에서 호응해주기로 약속한다. 연남생을 믿지 말라는 의견이 많았지만, 이 직전에 부기원을 암살할때도 연남생이 대조영의 제안을 받아들여줬는데다 어차피 별다른 방법도 없었기에 대조영은 연남생을 끌어들인다. 마지막으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였으나 하필이면 동명천제단에 이문이 보낸 부하들이 잠입하여 비밀을 모두 알아버린 관계로 결국 신홍,이해고와 협력해 동명천제단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고구려 유민들이 보장왕이 유폐되었다는 말을 듣고 구하기 위해 보장왕이 갇혀 있는 관저로 쳐들어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이해고를 비롯한 당나라 군사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막아선다. 유혈진압이 벌어지기 직전, 연남생은 백성들을 구하고자, 보장왕에게 찾아가 이를 막을 방법을 질문하는데, 이에 보장왕은 방법을 말하는 대신,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를 막으라는 최후의 명령을 내린다. 그 뜻을 이해한 연남생은, 백성들 앞에서 스스로를 대역죄인이네, 버러지 같은 목숨이네 라며 자신을 비하한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고 그대들의 아까운 목숨을 아끼라며 눈물로 호소하자, 백성들이 진심을 알고 스스로 물러난다. 이 광경을 본 이해고와 대조영이 놀라는 건 덤.

설인귀는 이 모든게 연남생 덕이라면서 안동도호부 절도사 자리를 연남생에게 넘겨주면서 당나라로 떠나고 이후 연남생은 등장하지 않았다. 10여 년 뒤 대조영이 요동을 공격할 때는 양소위가 안동도호부 도독으로 등장한다.

재미있게도 여기도 위의 연남생과 같이 배우개그가 있는데 자신의 아버지와 후세에 만나서 절친이 되면서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을 만나는데 이 둘은 숙부와 조카라고 불릴 정도로 친하게 지냈지만 결국 뜻이 달라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암살당하면서 자신의 분신에 죽는 일을 달성하게 된다.

6.3. 칼과 꽃

노민우가 연기했다. 꽃미남인 배우 덕분에 역대 연남생 중에선 가장 외모가 뛰어나지만, 역시 주인공이자 연개소문의 서자인 이복형 연충에게 열폭하는 캐릭터로 등장. 상찌질이로 등장했다.

6.4. 평양성

윤제문이 연기하였다. 여기서는 연개소문이나 대조영과는 다르게 연남생이 온건파에 가깝다. 처음부터 당나라와의 협상을 주장하였으나 주전파인 연남건에게 투석기로 날려진다. 근데 하필이면 떨어진 곳이 당나라 이적 장군의 막사였고, 그대로 당나라에 '정치적 망명'을 해버린다.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고구려와의 연계를 꾀하던 중 연개소문 아들이 왔다고 히히덕대며 들어온 김유신만 골 아프게 된다.

고구려의 신무기와 보급품 테러로 사기가 오른 남건의 성격을 잘 알던 남생은 퇴각하는척 하며 동생의 기마부대를 유인하여 괴멸시키고 남건에겐 부상을 입힌다. 그리고 형제끼리 싸우는걸 싫어하던 연남산에게 접촉, 남건의 신변을 보장해준단 조건으로 평양성 성문을 열어주겠노라 약속받는다.

마지막 전투에서 평양성이 함락되고 남건이 몸에 창이 박힌 채로 죽어가자 '그러게 형 말 들으랬잖아 새끼야!'라고 울부짖는데, 비록 생각은 정 반대였어도 그래도 동생을 아끼기는 했던 모양. 게다가 요동일대를 넘겨받기로 했는데 당나라가 직접 통치한단 선포에 이적에게 항의했다가 계필하력에게 얻어맞곤 이마가 깨져 피가 흐른다. 이후에는 등장은 없는데, 아마도 실제 역사대로 흘러갔을 소지가 크다.

연남건, 연남산이 김유신이 보낸 쌀가마니의 글을 읽지 못하는 와중 연남생은 쌀가마니의 글을 전부 읽음으로 봐서 두형제와는 다르게 똑똑하고 머리는 좋은거 같다.

7. 같이보기


  1. [1] 연남건이 헌충을 죽임.
  2. [2] 비슷한 시기 연남생의 작은아버지이자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는 남쪽 신라에 투항했다.
  3. [661년] 3.1 3.2 莫離支 兼 三軍大將軍.
  4. [666년] 4.1 태막리지는 본인 묘지명, 대막리지는 삼국사기, 태다막리지는 아들 헌성 묘지명.
  5. [5] 비록 선인은 조의와 더불어 고구려에서 상당히 낮은 직책이었지만 당시 연남생의 나이를 고려해보면 관직 생활은 엄청나게 빨리 시작했다.
  6. [6] 둘째 아들 연헌성도 9살에 선인 벼슬을 받았고 정황상 첫째 연헌충도 똑같을 듯 하다.
  7. [7] 참고로 《일본서기》에는 성밖을 둘러보던 중 동생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8. [8] 평양도는 고구려의 수도, 행군은 임시 군부대란 뜻이며 대총관은 당국 군대 계급이다.
  9. [9] 지절은 임금의 임명을 받았다는 뜻이고 안무대사는 고정 직위라기보단 일종의 특별 인사 같은 직위다.
  10. [10] 계필하력은 당태종 시절부터 수차례 고구려 공격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최대의 적이었던 연개소문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출정했다니 참 기분이 묘했을 것이다(...).
  11. [11] 구당서, 신당서 등을 비롯한 중국 측 사서에서는 사지절 요동 대도독 상주국 현토군 개국공(使持節 遼東 大都督 上柱國 玄菟郡 開國公) 식읍 3,000호에 봉하였다고 되어있다.
  12. [12] 아마도 실패했을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 입장에서는 나라 팔아먹은 인간을 곱게 보진 않았을 것이다.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고 나서 조선 총독부 자리에 이완용을 앉혔다고 가정해보라 어차피 이완용은 합병 전에도 욕먹었다. 연남생이라고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13. [13] 천남생 묘지명엔 남생의 죽음을 훙으로 표현했다. 훙은 제후 중 왕급에만 붙여주는데 당이 얼마나 남생을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14. [14]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을 맹목적 친중 사대주의 성향의 유학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중국의 입장이 아닌 고려의 입장에서 쓰인 이러한 서술이 반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김부식은 대외적으로는 사대주의를 표방했을지언정 실제로는 한반도 고유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큰 인물이었고, 삼국사기에서도 이런 점이 잘 드러난다. 김부식을 비난하는 데에선 삼국사기가 쓰여진 시대가 명분상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시대였던지라 더욱 평가가 박했던 것도 있었다.
  15. [15] 서토, 즉 수나라의 여인으로 나오며 작중에서는 손태영이 연기했다. 연개소문이 젊은 시절을 신라와 수나라에서 보내는 판타지물 답게 연개소문이 섬기던 이밀의 조카라는 설정.
  16. [16] 연개소문의 현 부인으로 연남건, 연남산의 어머니이며 안재모의 전 연인이였던(...) 이세은이 연기했다. 전 연인들이 모자간의 역할을 맡은것. 게다가 이세은이 1살 어리다.
  17. [17] 전쟁에 참여해 승리한 적도, 패배한 적도 있다. 명장 급은 아니었지만 전쟁에 나서기만 하면 백전백패를 기록하던 태조 왕건신검 같은 녀석과는 달랐다. 또 최소한 연남생 쪽에서 먼저 동생들을 괴롭히거나 제거하려고 하는 면모는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남생 입장에서는 새어머니라 할 수 있는 소연에게 동생들을 잘 보살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맹세까지 한다.
  18. [18] 이 드라마에선 설정상 쌍둥이 형제로 나왔다.근데 생긴건 쌍둥이가 아니다
  19. [19] 이후 연개소문이 이 사실을 알자, "어리석은 놈, 자신의 역량이 모자라 일이 그리 되었으면 마땅히 혀 깨물고 엎어져야 하거늘..."이라며 한탄하였다.
  20. [20] '물론 연남생도 잘 한 건 아니지만 동생놈들이 형 가족을 도륙내고 형도 쫓아내 갈 곳 없게 만들었으니 연남생이 어딜 가겠냐? 길에서 객사하거나 동생들 손에 죽을 수는 없으니 당나라에라도 투항해야지.' 딱 이런 식으로 묘사했다. 심지어 연남생의 투항도 본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당나라의 힘이라도 빌려서 가족들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아들 연헌성의 강권에 하는 수 없이 가는 것으로 나온다.
  21. [21] 부기원 측은 당나라에 항복하면 단순히 고구려를 속국으로 삼겠지 하고는 망상했지만, 당나라는 아예 처음부터 고구려를 완전히 멸망시켜버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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