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릴 테이프

영어: Reel-to-reel tape

이런 거.[1]

릴에 감아서 사용하는 녹음 테이프.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었지만, 이것을 축소시킨 카세트 테이프 만큼의 대중적 인지도는 없는 편이다. 하지만 방송 관계자들에게는 테이프리스 시스템(2000년대 초반 이후 라디오 방송, 2010년 이후 TV방송)이나 소니 베타캠 테이프 시스템(1980년대말 이후 TV방송) 전환되기 이전인 라디오/TV의 프로그램 녹음과 녹화에 필수적인 장비 중 하나였다.

현존하는 아날로그 오디오 매체물 중에서 음질이 가장 좋은 매체이며, LP 음반은 물론이고 90년대까지 한국 대중가요 CD, 카세트 음반 제작에 사용되었던 마스터 테이프도 이 오픈릴 테이프였다.

1. 역사
1.1. 초기: 텔레그라폰과 블래트너폰
1.2. 중기 1: 마그네토폰
1.3. 중기 2: 미국의 개량 작업
1.4. 후기 1: 휴대용 8트랙 카트리지
1.5. 후기 2: 디지털 녹음
1.6. 쇠퇴
2. 이후의 취급

1. 역사

1.1. 초기: 텔레그라폰과 블래트너폰

실린더 레코드SP의 발명에는 좀 뒤지기는 했지만, 테이프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 소리를 녹음하려는 시도 역시 19세기 후반 무렵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877년에 미국의 기술자 오벌린 스미스가 자기 녹음(magnetic recording)의 가능성에 대한 논문영국의 잡지에 게재한 것이 발단이었다. 스미스는 이 논문에서 음성 신호의 강약 구조를 자성을 띈 물질에 자기 변화된 형태로 기록하고, 그것을 전기적인 방법으로 재생하는 방식을 내놓았다.

하지만 스미스는 자신의 의도를 실현하지는 못했고, 이것을 바탕으로 처음으로 녹음이 가능한 장비를 만든 사람은 덴마크 기술자인 발데마르 폴센이었다. 폴센은 피아노선을 자성체로 사용한 자기 녹음기를 만들었고, 텔레그라폰(Telegraphone)이라는 이름을 붙여 1898년 12월에 특허를 받았다. 2년 남짓 뒤인 1900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출품해 화제를 모았는데, 폴센은 당시 박람회를 관람하러 온 오스트리아-헝가리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알현하고 그의 목소리를 텔레그라폰으로 녹음했다. 이것이 역사상 가장 오래된 테이프(=마그네틱 레코딩) 녹음으로 기록되고 있다. 들어보기

이렇게 화제가 되었음에도 텔레그라폰은 이후 실린더 레코드와 SP에 밀려 한참 동안 안습 신세를 면치 못했다. 발명자인 폴센도 이후에는 전화의 개량 작업 등 다른 분야에 몰두했기 때문에 텔레그라폰은 추가 개량 등의 작업 없이 사실상 방치되었다가, 1920년대 후반 영국 기술자 루이스 블래트너가 텔레그라폰을 개량한 블래트너폰(Blattnerphone)을 만들었다. 블래트너는 폴센이 사용한 피아노선이 너무 얇고 가늘어 쉽게 끊어진다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좀 더 유연하면서도 질긴 강철 와이어를 대신 사용했다.

이 블래트너폰은 이후 BBC에서 방송용 장비로 쓰였지만, 장비 자체가 워낙 무거운 데다가 강철 와이어도 녹음 가능 시간대에 비하면 지나치게 많이 필요해서[2] 음반 제작 등에는 사용되지 못했다. 다만 방송 장비로는 세계 각지에 보급되었고, 경량화된 모델은 기자들이 들고 다니면서 짤막한 인터뷰 등의 녹음에 사용하기도 했다.

1.2. 중기 1: 마그네토폰

블래트너폰이 나오고 있던 시기에 독일에서는 와이어 대신에 테이프를 사용하는 자기 녹음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1928년에 프리츠 플로이머가 얇은 두루마리 종이에 래커칠을 한 뒤 고운 산화철 가루를 묻혀서 역사상 최초의 자기 테이프를 발명했다.

다만 플로이머가 사용한 종이는 찢어지거나 구겨지기 쉬웠기 때문에, 이후 BASF의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테이프 재질의 개량을 진행했다. 동시에 AEG에서는 에두아르트 쉴러가 이 테이프를 이용한 녹음 장치를 고안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첫 자기 테이프 레코더가 마그네토폰(Magnetophon)이라는 이름으로 1935년에 베를린의 방송기술 박람회에서 첫 선을 보였다. 1년 뒤에는 독일에 연주 여행차 방문한 토머스 비첨 지휘의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BASF[3]의 당시 모회사였던 화학 업체 IG 파르벤의 루트비히스하펜 본사 강당에서 공연을 했는데, 이 실황이 자기 테이프로 녹음되어 세계 최초의 음악 녹음 테이프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실용화된 시기가 나치 집권기였던 탓에 자기 테이프 녹음 기술과 장비는 독일 바깥으로 퍼지지 못했는데, 오히려 이것을 역이용해 나치의 선전선동 전문가 괴벨스는 독일 각지의 방송국에 이 마그네토폰을 배치해 방송에 사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마그네토폰도 대당 무게가 300kg이나 되었고, 테이프와 장비 모두 생산 비용이 비쌌기 때문에 괴벨스의 의도대로 완전한 방송국 상비 장치가 된 것은 2차대전이 개전되고도 몇 년 지난 1941년 후반~1942년 초반이었다. 방송국 상용화 직전이었던 1940년에는 독일 제국방송 소속 기술자 발터 베버가 테이프의 잡음과 뒤틀림을 현저히 줄여 음질을 개선한 AC 바이어스 시스템을 개발했다.

다만 전쟁 중의 제한된 물자 보급 상황은 독일 방송국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새 매체를 팍팍 쓸 수는 없었다.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주로 히틀러를 비롯해 나치의 최고위층이 임석한 중요 정치 집회, 클래식 오케스트라 연주회나 오페라, 연극 공연 등 1시간 이상 진행되는 이벤트의 실황녹음이 필요한 프로그램 정도였고, 짤막한 연설이나 낭독, 음악 위주의 프로그램 등 기존의 아세테이트 디스크 포맷으로 만들어도 문제가 없는 경우에는 계속 디스크를 사용했다.[4]

어쨌든 독일의 제국 방송국들은 전쟁 중에 국내 방송이든 적국에 대한 비방이나 선동 방송이든 대부분 이 마그네토폰으로 제작해 단파방송으로 중계했는데, 연합국 방송 전문가들은 이 방송이 자신들이 아세테이트 디스크나 와이어 레코더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소리가 깨끗하고 방송 시간도 길다는 점을 수상하게 여겼다. 전쟁이 독일의 열세로 돌아선 뒤에도 녹음 기술과 장비 개량은 계속 진행되었는데, 1944년에는 스테레오 녹음과 재생이 가능한 마그네토폰까지 선보였다.

1.3. 중기 2: 미국의 개량 작업

독일이 패전한 뒤 각지의 방송국을 접수한 연합군 당국에서는 마그네토폰과 자기 테이프를 압류해 본국으로 보냈고, 특히 미국에서는 암펙스가 재빨리 이 마그네토폰의 개량형 테이프와 녹음기를 1946년 봄부터 시판하기 시작했다. 이 장비에 처음 주목한 유명인이 빙 크로스비(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최초가창으로 유명한 가수/배우)였는데, 크로스비는 당시 라디오 쇼를 진행하면서 가뜩이나 넓은 미국 땅의 동부와 서부 사이에 생기는 시차 때문에 양쪽의 주 시청 시간대를 맞추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크로스비는 시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콜럼비아에서 제작한 대형 SP인 브로드캐스트 트랜스크립션 디스크로 자신의 쇼를 녹음한 뒤 재방송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도 잡음이 심하고 녹음 가능 시간대가 한정되어 있다는 결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암펙스의 테이프 녹음기는 녹음/재생 가능 시간이 훨씬 길었고 편집 작업이나 더빙도 자연스럽게 진행할 수 있었다.

결국 크로스비는 1947년에 사비를 털어 이 암펙스제 녹음기를 구입한 뒤 방송 제작에 사용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미국의 여타 라디오 방송국들도 테이프 녹음기를 도입했다. 더불어 자기 테이프의 미국 제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3M과 여타 제작사들이 테이프의 대량 생산 체계를 재빨리 갖추고 마구 뽑아내기 시작했다.

다만 1940년대 후반 까지는 이렇다할 관련 규정이 정비되지 않아서 회사마다 제각각의 테이프와 녹음기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정확한 규격이 마련된 것은 1950년대 초반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방송국 뿐 아니라 음반사들도 음반 제작 때 번거롭고 삑사리 수정도 안되는 원판 마스터 제작 방식을 버리고 테이프 녹음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가장 보수적이었던 EMI 같은 음반사도 1950년대 초반에 LP를 내면서 본격적으로 테이프 레코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LP의 발명과 거의 비슷하게 들어온 테이프 녹음은 장시간이 필요한 오페라교향곡 같은 대곡 등의 녹음에 매우 요긴하게 쓰였고, 방송 프로그램의 방송 시간도 훨씬 늘어나게 되면서 수요가 급증했다. 심지어 몇몇 음반사에서는 나치 독일의 제국 방송국들이 음악 프로그램용으로 녹음한 이런저런 테이프를 무단으로 복제해 음반으로 내놓는 바람에 저작권 문제로 난리가 나기도 했다.

또 이 매체의 보급 덕에 전자음악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프랑스 작곡가이자 음향 기술자 피에르 셰페르는 테이프로 녹음한 여러 잡다한 소리를 더빙하고 변조시킨 구체 음악을 창안했는데, 이는 음악이 기존의 성악/기악 같은 연주 형태에 의존하지 않고 리듬과 박자, 빠르기, 음정 등에도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였다.

셰페르 이후 에드가 바레즈, 피에르 불레즈, 칼하인츠 슈톡하우젠 등의 신진 작곡가들이 이 흐름에 영향을 받아 전자음악 혹은 전자음악과 생음악을 결합한 작품들을 선보였고, 이후에도 현대음악계의 한 축을 이루면서 이어지고 있다.

1.4. 후기 1: 휴대용 8트랙 카트리지

이렇게 오픈릴 테이프와 테이프 레코더는 방송국과 음반사의 필수요소가 되었지만, 방송과 음반의 주 소비층에서는 이 매체를 쉽게 접할 수 없었다. 애초에 저런 목적으로 이용되는 테이프와 장비는 너무 크고 비싸서 가정에 상비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특히 자동차 운전자들은 라디오 외에 음반도 차 안에서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다.

이 때문에 1950년대 초반부터 크고 무거운 릴 테이프를 경량화해 가정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하는 시도가 있었지만, 제대로 성공한 것은 1964년에 가서였다. 리어 제트라는 항공사를 운영하는 기업가이자 발명가였던 빌 리어는 테이프 제조 업체 암펙스, 음반사인 RCA 빅터, 자동차 업계들인 포드제너럴 모터스, 통신 업체 모토로라와 자신의 리어 제트 항공사로 구성된 컨소시엄의 지원을 받아 개발에 성공했는데, 제품 명칭은 '스테레오 8' 로 정해졌다. 다만 이후에는 저 명칭보다 8트랙 카트리지 같은 다른 명칭으로 많이 불렸다.

카세트 테이프는 트랙이 2개라 스테레오 기준으로 1곡만 녹음이 가능하지만 8트랙 카트리지는 동시에 4곡이 녹음이 가능하다. 그래서 버튼 조작만으로 4곡을 서로 교대로 들을 수가 있다. 각 2개의 트랙은 프로그램(1~4)로 불리우며 카세트 테이프는 곡을 시간만으로 표시하지만 8 트랙 카트리지는 시간과 프로그램을 동시에 표시해서 구분했다.

이 8트랙 카트리지 테이프는 기존 오픈릴 테이프보다 훨씬 작아서 들고 다니기도 쉬웠고, 또 자동차 업계들과 협력해서 개발했기 때문에 상용화되자마자 곧장 라디오와 함께 카 오디오의 기본 장비로 장착되기 시작하면서 빠르게 보급되었다. 1970년에는 RCA에서 기존 2채널 스테레오 시스템을 확장시킨 4채널 쿼드로포닉 사운드의 재생이 가능한 카트리지까지 선보이면서 리즈시절의 정점에 섰다.

하지만 8트랙 테이프는 결점도 많았는데, 경량화시킨 것은 좋았지만 먼지 등에 약하고 잡음이나 떨림 현상이 심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테이프도 자주 씹히는 경우가 많았고, 열에 약하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결국 8트랙 테이프는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1963년에 네덜란드필립스에서 발명한 카세트 테이프에 밀리기 시작했고, 1970년대 후반에는 카 오디오의 8트랙 테이프 시스템도 카세트 테이프 시스템으로 거의 대체되었다. 그리고 CD가 등장한 1980년대에 가서는 소매점들도 시판을 중단했고, 1990년대 초반 무렵 거의 전멸했다.

여담으로 NASA에서 1977년에 쏘아 올린 탐사선 보이저 1, 2호에 내장된 기억장치가 이 8트랙 테이프다. 물론 앞에서 말했지만 이미 그 시기(70년대 후반)에도 8트랙 테이프는 점점 사양길을 걷고 있던 저장매체였다.

1.5. 후기 2: 디지털 녹음

오픈릴 테이프도 여타 매체와 마찬가지로 녹음 기술의 발전 때문에 역으로 그 단점이 점차 두드러지게 강조되었다. 특히 더빙을 많이 하는 대중음악 녹음에 있어서 결점이 있었는데, LP 만큼은 아니지만 이것도 테이프가 헤드와 접촉해 녹음과 재생을 하는 방식이라 그 과정에서 잡음이 섞여들어가거나 마모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특히 반주를 녹음해놓고 그것에 맞춰 노래를 부르거나, 여러 트랙별로 녹음을 하고 합치는 식의 멀티 트랙 작업을 할 경우 잡음의 증가가 현저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6년에 미국의 기술자 레이 돌비가 고안한 돌비 노이즈 리덕션 시스템이 등장했는데, 돌비는 잡음을 유발하는 고음역 주파수를 일부러 올려서 녹음하고, 재생할 때는 그 주파수 대역을 낮추는 식으로 잡음 제거를 꾀했다. 덕분에 멀티 트랙이나 더빙이 많은 음악을 만들 때 잡음의 비율이 현저히 감소했지만, 이것도 녹음 이퀄라이저의 트랙 수가 수십개로 늘어나면서 결국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결국 아날로그 방식의 녹음과 재생에는 잡음과 마모가 필연적으로 따라다닌다는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디지털 방식에 의한 녹음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해결되지 못했다. 1970년대 초반 일본NHK 기술 연구소에서는 소리의 신호를 이진법 코드로 양자 처리하는 펄스 부호 변조(Pulse-code modulation. 약칭 PCM)에 의한 녹음 기술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일본 콜럼비아라는 음반사를 갖고 있던 음향기기 전문 회사인 데논에서 관심을 보이면서 1971년에 PCM 방식의 녹음으로 제작된 첫 음반을 내놓았다.[5]

물론 NHK/데논이 갓 선보인 이 디지털 방식 녹음도 테이프를 쓴다는 점에서는 아날로그 방식의 녹음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녹음된 소리의 음질과 현장감 면에서는 기존 아날로그 녹음을 바르고 남는 우수함을 갖고 있었다. 다만 이것도 초기에는 녹음 장비의 무게가 500kg이나 되고 2인치 쿼드러플렉스 비디오 릴테이프를 녹음 테이프로 사용하는 등, 지금 관점에서는 상당히 무식한 크기와 방식을 갖고 있어서 상용화에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데논은 이 녹음기를 일본 뿐 아니라 해외까지 갖고 가서 녹음을 하는 등의 근성을 보였고, 소니 같은 다른 업체들도 이에 자극받아 디지털 녹음 연구에 뛰어들었다.

1.6. 쇠퇴

1980년대 초반에 이 디지털 녹음을 담는 가장 이상적인 포맷으로 CD가 나왔지만, CD든 LP든 카세트 테이프든 간에 일단 음반이나 방송 제작에 쓰이는 마스터 소스는 여전히 릴 테이프였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초반까지 라디오 방송국에서 아날로그 방식 릴 테이프를 사용했고,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도 1980년대 후반에 소니 베타캠(아날로그) 테이프가 나올 때까지 이런 테이프가 쓰였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들어 테이프 대신 하드디스크 등에 녹음/녹화하는 방법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마스터 테이프로 활용되는 빈도도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다. 결국 방송국 뿐 아니라 음반사의 테이프 의존도도 급격히 하락했고, 관련 장비도 테이프리스 시스템으로 전환된 뒤에는 오래된 녹음이나 영상 자료를 재생할 때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 녹음 스튜디오에서도 기술진이나 아티스트가 특별히 아날로그 효과를 내기 위해 요청하지 않는 한 사용하지 않고 있다.

아날로그 오픈릴 테이프는 '아날로그' 매체라는 특성때문에 아직도 일부 분야에서나마 활용되고 있는 반면에 디지털 방식의 오픈릴 테이프는 하드디스크 기반의 디지털 녹음장치의 등장으로 완전 퇴출당한 상태.

참고로 CD 초창기에는 녹음 자체는 아날로그 오픈 릴 테이프로 하고 저장만 CD로 하는 경우도 많았다. CD 탄생 이전에 녹음된 음악을 가지고 만든 CD야 당연하겠지만 CD 탄생 이후에도 많이들 그랬다. 그래서 그당시 CD(주로 클래식 음반)에는 AAD, ADD, DDD 같은 표기가 있었는데 처음 A/D는 녹음 소스, 다음 A/D는 마스터링(편집 등 저장 직전의 여러 작업)을 의미한다.[6] AAD라면 오픈 릴 테이프에 아날로그로 녹음하고 마스터링도 아날로그 소스로 한[7] 것을 의미하며 ADD는 녹음만 아날로그로 하고 모든 후처리를 디지털로 한 경우다. 물론 최초 녹음과정부터 디지털로 진행되는 경우는 DDD인데 최근의 CD 음반은 리마스터링 복각판이 아닌 이상 당연히도 올 디지털이므로 이런 표기는 사라졌다.

2. 이후의 취급

SP나 LP와 달리 일반 애호가가 이 물건을 만질 기회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애초에 전문가용 장비로 만들어지고 유통되었기 때문에, 방송국이나 음반사 자료실 관리직이 아닌 이상 이걸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다만 경량화한 8트랙 카트리지 테이프나 일부 가정용 오픈릴 데크의 경우 아직도 벼룩시장이나 중고음반 판매점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또 음향자료 보관소 등지에서는 이런 자료들을 마모 위험이 적은 CD나 DVD 등의 매체에 옮겨담고 있기 때문에, 이 작업이 끝난 마스터 테이프들은 순차적으로 폐기되고 있다. 1940년대에 만들어진 오픈릴 같은 경우 상태가 양호한 물건을 찾아보기 힘들며, 있다고 해도 파손 등의 위험 때문에 재생은 물론 꺼내보는 것도 제한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만 한국과 달리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는 아직도 뿌리깊은 애호층이 존재하며, 수는 적지만 신제품이 계속 개발되고 있는 중이다.

음향의 믹스/마스터링에서 플러그인 등으로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아날로그 매체인만큼 오픈릴 테이프로 녹음되면 음질의 변화가 생기기 마련인데, 이러한 변화가 음악적으로 소리를 두껍고 탄탄하게 만들어주거나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효과를 내 주기 때문에 주로 소프트웨어 플러그인으로 음향작업에 사용되고 있다. 다만 장비가 매우 비싸고 디지털로 활용하기 힘들기 때문에 하드웨어로 많이 사용되지는 않는다.

유재하사랑하기 때문에 2014년판 앨범에 경우 가족들이 마스터 테이프를 소유하고 있어 디지털 고음질 마스터링을 한 뒤 다시 오픈릴 테이프로 녹음하고 보관한 사례가 있다.


  1. [1] 사진은 소니의 TC-630이라는 모델이다.
  2. [2] 겨우 30분 가량 녹음하기 위해 필요한 와이어는 3km 가까이 되었고, 무게도 25kg에 달했다.
  3. [3] 독일의 화학 회사로 자기테이프 분야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카세트 테이프, 비디오 테이프, 플로피 디스크 등도 BASF의 이름으로 생산했었다. 당연히 Made in W. Germany 물론 지금은 생산하지 않는다.
  4. [4] 연주곡의 대부분이 3~4.5분 정도였던 대중음악 프로그램들이 이 방침 때문에 손해를 봤는데, 괴벨스가 창단 명령을 내린 대중음악 전담 빅 밴드였던 독일 춤과 오락 악단의 방송 녹음에 오픈릴 테이프가 사용된 것은 밴드가 폭격을 피해 베를린에서 프라하로 거점을 옮긴 1943년 3월 이후였다.
  5. [5] 사실 PCM이라는 디지털 변환 이론은 20세기 초반에 구미에서 먼저 만들어졌다. 당시의 전자기기로는 구현을 하지 못해서 사장되었지만.
  6. [6] 마지막 D는 저장 소스를 의미하는데 CD에 아날로그로 저장할 수는 없으므로 당연히 100% D다.
  7. [7] 그러면 여기까지는 LP와 별 차이 없다. 물론 CD에 저장되기 위한 마스터링이므로 다이나믹 레인지 등에서 LP와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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