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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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왕세자빈
2.1. 삼간택
2.2. 반론
2.3. 왕세자비
3. 황/왕태자비
4.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된 왕세자빈들
4.1. 실존 인물
4.2. 가공 인물

1. 개요

王世子嬪

왕위를 계승할 왕자인 세자정부인을 이르는 말이다.세자가 먹는 아니다 줄여서 세자빈. 황태자의 아내는 황태자비(皇太子妃), 태자비라고 불렸다.

영어로는 Princess Consort라고 한다. Crown Princess라는 명칭은 앞뒤 설명 없이는 왕세녀라는 뜻이니 주의. 사실 서양권에서는 왕세자 자체가 별도의 작위를 가지기 때문에(예: 웨일스 공 등) 왕비나 공비 등 작위를 가진 군주의 아내에게 사용하는 명명법을 그대로 사용한다. 이렇게 작위를 가진 사람의 아내를 지칭할 때는 그 작위명의 여성형을 쓰기 때문에, Prince의 경우에는 그 아내에게는 여성형인 Princess를 사용한다. 따라서 우리말로 번역할 때 '공주'와 혼동하는 때가 있다. 프린세스 메이커를 포함하여 여러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프린세스들이 이렇게 '공주'가 아닌 '왕자의 아내'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프린세스 참조. 얘네도 이게 헷갈리는 걸 알아서, 정확한 구분이 필요한 법률 등에는 작위를 가진 쪽을 Regnant를 붙여 구별하고, 그 배우자에겐 Consort를 붙인다.

2. 왕세자빈

조선에서는 빈궁(嬪宮), 동궁빈(東宮嬪), 춘궁빈(春宮嬪)이라고도 불렀다. 여기서 동궁과 춘궁은 모두 세자를 뜻하는 말. 경칭은 세자와 같은 '저하(邸下)'이다. 간택이 확정되면 책봉의 가례를 거행하며, 임금의 교지가 전달된다. 세종 때까지 세자빈들은 무조건 봉호를 받았는데, 이후로는 과부가 된 세자빈들만 봉호를 받았다.

지칭어로는 조선 말기 기준 "마노라"라고 불렀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마마는 왕, 중전, 세자, 대비에게만 허용되는 호칭이기 때문에 세자빈에게는 절대 붙일 수 없다.

세자빈이 낳은 딸은 군주(郡主)라 한다.

2.1. 삼간택

의외로 조선시대에는 딸이 세자빈이 되는 것을 꺼렸다고 하는데, 실제로 세자가 왕이 되는 경우가 드문데다 자칫하면 가문이 망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외척이 되면 그순간 사헌부의 집중 사찰 대상이 되어 툭하면 탄핵을 먹을 수 있고 세자빈이 왕실의 분란에 휩싸일 경우 세자빈을 직접 족칠 수 없는 만큼 대신 끌려가 처벌을 당하는 동네북이 되기 쉬웠다. 더군다나 이미 내정자가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인데, 혹시나 최종 간택까지 올라가면 딸이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했기에 간택단자를 내는 것 자체를 꺼렸다.

세자빈을 간택할 때에는 삼간택을 거치는데, 대부분 내정자가 정해져 있었다. 마지막까지 올라온 후보자들은 떨어지더라도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만 했다. 왕실의 며느리가 될 뻔 하였으므로 다른 혼처는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과 왕세자의 아내가 될 뻔 했으니 재가는 불가하다는 이유. 간혹 이들을 후궁으로 들인 경우도 있었다. 영친왕의 약혼녀였던 민갑완이 파혼 후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2.2. 반론

헌데 삼간택 정절설은 속설에 불과하며, 사실과는 다르다고 한다. 당시 삼간택 후보자들을 족보 등으로 추적해 보니 어지간하면 다들 시집갔다고 한다. 사실 삼간택에 올라갈 정도면 상당한 수준의 명문가 여식일 텐데 그런 전통이 있었다면 당시 최상류층의 반발이 심했을 것이고 아무런 반발 없이 그런 전통이 존재하거나 유지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전통 없었다면 삼간택 들었었다는게 오히려 미스코리아처럼 자랑거리였을지도 오히려 삼간택까지 간 규수라는 것이 프리미엄이 되어 오히려 굉장히 좋은 조건의 혼처를 찾을 수 있게 되는 일종의 출세의 보증수표 같은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있고, 민갑완의 경우는 이후에도 혼담이 들어와 결혼기회가 충분히 있었고, 영친왕 약혼녀가 독신인 것이 부담스러워 일제 측에서도 결혼을 종용했다. 때문에 일제에 대한 항거의 의미로 독신을 지켰다는 말도 있다. 즉, 민갑완이 독신으로 산 것은 전통 때문이라기보단 스스로의 의지. 물론 민갑완은 '약혼'이었으므로, 조선시대 기준으로 보면 삼간택에 든 게 아니라 최종간택이 되었다가 강제 폐빈을 당한거나 다름 없다. 삼간택 정절설이 사실이 아니라도 최종간택 되었다가 폐빈 된거면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당연히 재혼을 못한다. 자신의 의지로 전통을 지키기 위해 독신으로 살았다 해도, 삼간택에 든 것으로 간주하여 독신을 지켰다기보단 최종 간택된 진짜 세자빈으로서 독신을 지켰을 듯.

2.3. 왕세자비

특이한 점은 세자빈이 조선시대에만 보이는 명칭이란 것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 친왕의 지위를 잇는 세자의 아내 명칭은 세자비였다. 친왕을 잇는 사람은 세자이고 그외 친왕의 다른 아들은 군왕이었으며 세자가 군왕보다 높았다. 군왕의 아내가 비(妃)를 쓰니 군왕비보다 높은 세자의 부인 역시 비(妃)를 쓰지 않으면 이상하다. 한편 조선같은 제후국을 자처한 정씨왕국에서 세자비라는 명칭을 썼다.

왕실 부인의 지위는 후(后)-비(妃)-빈(嬪) 순인데, 외왕내제를 행한 고려 중기까지는 임금의 정비를 '왕후(王后)'라 부르고 왕태자의 아내에게는 '왕태자비'나 '태자비'로 불렀다. 그러나 원 간섭기인 충렬왕 때 왕실 칭호가 격하되는 동시에 이전 방식과 혼재되서 나타난다. 임금의 정비이었던 몽골의 공주는 본래 왕비로 불리었어야 하나 고려가 부마국임을 강조해 원나라에서 공주로 부르고 시호를 올렸다. 고려에서 제국대장공주에게 태후의 시호를 올렸으나 원나라에서 다시 ㅇ국대장공주로 시호를 올린다. 그리고 다른 정식 아내들이나 후궁들은 예전처럼 'ㅇ비(妃)'라 불렀다. 이 과정에서 세자의 정부인을 '비(妃)'를 사용해 '세자비'라 불렀다. 고려사에 의하면 세자이 아닌 세자가 등장한다.

조선에 오면서 임금의 정부인이자 내명부의 최고 수장인 왕비에게만 '비'를 사용케 하고, 세자비는 후궁과 같이 '빈'을 사용케해 '세자빈'이란 용어를 만든것이다. 다만, 세자빈은 후궁인 정1품의 '빈'과 달리 품계를 초월한 무품의 지위였다.

3. 황/왕태자비

왕태자비, 황태자비 모두 같은 지위이다. 차이가 있다면 왕태자비는 자주국, 황태자비는 황제국, 왕세자빈은 제후국 세자의 정궁이라는 것. 태자비의 경우 비궁(妃宮)이라 한다. 경칭은 전하(殿下)이다.

참고로 서양권 왕족을 조선의 왕실 봉작 기준으로 지칭할 때 왕세자빈과 왕세자비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비(妃)는 제후와 태자(자주국의 후계자)의 아내를 말하고 빈(嬪)은 세자(제후국의 후계자)의 아내를 말한다.[1] 영국처럼 왕(king)이 통치를 하지만 자주국인 군주국에서는 왕세자비가 아니라 엄밀히 번역하면 왕태자비로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4.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된 왕세자빈들

  • 여기서는 황태자비도 왕세자빈에 포함한다.
  • 왕세자와 마찬가지로 현역 세자빈이거나 왕비가 되지 못한(추존 제외) 왕세자빈만을 적는다.

4.1. 실존 인물

4.2. 가공 인물

※ 남편이 제·왕위를 계승해 왕비가 된 경우는 굵게 표시.

※ 모종의 이유로 왕비가 되지 못한 경우는 ◇ 표시.


  1. [1] 자세한 내용은 참조
  2. [2] 애매한 경우다. 트로이의 제1왕자 헥토르의 아내로 왕비가 될 운명이였지만 전쟁으로 인해 나라를 잃는다. 하지만 전리품으로 끌려간 후 에페로이스의 왕비가 되거나 네오프톨레모스와 결혼해 아이아키다이의 왕비가 되기도 한다.
  3. [3] 결혼 전의 이름은 파나 델 모랄이고 레밤은 황가의 성이다. 레밤령 구 아마츠카미 영토인 샨 마르틸리아를 통치하는 공작의 딸로, 아름다운 외모에 반한 황태자가 청혼한다.
  4. [4] 아직 공주라는 확실한 언급은 없으나 현재 고아 왕국의 왕이면서 그녀의 남편인 스테리가 원래 왕족이 아닌 귀족 출신이였기 때문에 그녀가 고아 왕국의 공주였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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