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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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유래와 성향
3. 운동권과 뉴라이트
4. 비판
4.1. 학벌에 따른 차별
4.2. 시위 및 집회에서의 비판
4.3. 권위주의 문화
4.4. 편협성
4.5. 무책임함
4.6. 삐뚤어진 역사관
4.7. 종북주의와 주사파
5. 총학생회
6. 2000년대 이후
6.1. 민족주의 계열(NL)
6.2. 민중민주주의 계열(PD)
6.3. 시민운동/환경운동
6.4. 노동운동
6.5. 평화운동
6.6. 청년 당사자 운동 계열
6.7. 아나키즘
7. 참고문헌
8. 관련 문서

1. 개요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세력

대한민국에서 정치/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진보 성향의 대학생, 교수, 재야인사들 혹은 그들이 속한 단체를 통칭하는 말. 특히 교수나 재야인사보단 대학생 관련해서 많이 쓰인다. 원래는 독재정권 당시 친정부 언론에서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만든 표현이었는데, 딱히 대체할 만한 표현이 없기 때문인지 계속해서 쓰고 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스포츠와는 전혀 관련없는 용어다.[1]

이에 대비시켜 정치색 없는 비운동권, 혹은 반대되는 반운동권이란 표현이 쓰이기도 한다만, 후술되어 있듯 민주화 이후 동력이 대폭 떨어진 현재는 사실 운동권이니 비운동권이니 비권이니 반권이니 하는 표현 자체가 대학가에서 잘 쓰이지 않는다. 요즘은 비운동권 학생회가 다수다보니, 어쩌다 운동권 학생회가 세워지면 '아직도 운동권이 남아 있었어?'라는 시선을 받기도 한다. 물론 학교별로 상황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성향에 관계없이 학생회라는 조직 자체가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보니, 2000년대 초반을 풍미한 운동권 대 조직화된 비운동권간의 대립 같은 것도 이젠 다 옛말이 되어버렸다.

2. 유래와 성향

운동권이란 표현이 널리 사용된 것은 1980년대부터이다. 학생운동이 학내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점하면서부터 상술했듯 친정부 언론에서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이 표현을 즐겨 쓰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대중들에게도 이 표현이 각인되기 시작하였다.

자타공인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핵심세력이었다. 하지만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부터 노선논쟁이 본격화되는데, 다시 말해 "민주화가 되었으니 앞으로 무슨 운동을 할 것이냐?"란 논쟁이 이루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분파가 형성되고 이는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2] 당시엔 정말 무협지처럼 다양한 노선 논쟁이 있었는데(김영하 작 무협학생운동), 이 중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것은 NL-PD 논쟁이다.[3] 이는 사구체 논쟁에서 촉발된 것으로, NL-PD와 관련 된 내용은 따로 항목이 있으니 서술 생략. 물론 이 당시 NL이 지금과 같지도 않고, 이 당시 PD가 지금과 같지도 않지만 이 흐름은 아직까지도 한국사회 운동세력 내에 커다란 구분선 중 하나이다. 현재 NL-PD 구분은 거의 통일운동 vs 노동운동 대립구도를 대신하는 단어로 쓰인다고 봐도 무방하다.

NL 계열은 학생운동권내 최강 조직이자 NL의 심장[4]이던 한총련이 유명무실화되고 한총련의 뒤를 이은 한대련의 경우 적어도 겉으로는 한총련과 같은 기조를 유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2010년대를 전후해 수도권 일대의 NL계열(구 노선대. 소위 경기동부연합계)이 조직력을 이용해 주류가 되면서 다시 한총련화(...)가 진행되었다. 물론 전투력은 한총련 시절에 비할바는 못되지만...) 아무튼 현재 NL계 학생운동계 최대 정파는 한대련이며, 현재 학생운동 내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다.

PD 계열(소위 좌파)은 소련의 붕괴 이후 엄청나게 분화하게 된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전국학생연대회의(구 대장정 / 현 행진) - 전국학생대표자협의회(구 전국학생연대 / 이후 대학생 사람연대, 청년좌파로 이어짐)의 이분구도였으나 전학협이 해체하고 PD-NL을 아우르는 정파였던 21세기 진보학생연합 역시 해체하면서 그 숫자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PD 경향 정파는 연대회의를 계승하는 전국학생행진, 다함께를 계승하는 노동자연대 학생그룹[5], 전학협을 계승하는 청년좌파, 그리고 사노위,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를 계승하는 사회변혁노동자당 학생위원회, 옛 진보신당의 잔존세력인 노동당 학생 지부들과, 현재 운동권의 유일한 원내정당인 정의당 학생위원회 정도만이 남아있다.[6]

80년대 시위의 꽃이기도 했다. 시위 당시 시위대와 전경방패부대가 서로 대치하고 있으면, 양 측면에서 백골단으로 대표되는 군사독재 정권의 시위진압부대가 "야! 살(殺)!!" 이란 구호와 함께 덮쳐오는 진압전술이 자주 등장했는데, 이때 양측에서 사수대라 불리는 학생들이 백골단과 방패부대의 압박을 저지했다. 그리고 나머지 대오가 플랜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팜플렛을 길거리에 살포하거나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식의 집회가 전개되었다. 결국 후자를 위한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무력을 사용했던 것.

80년대에는 집회 대오 중 가장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유한게 학생대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당시 선도적으로 이슈파이팅을 하던 사실상의 유일한 집단이 학생운동권이었고, 당연히도 집회에서 앞장서는 역할을 맡았다.

3. 운동권과 뉴라이트

의외라고 느낄지 어떨지 모르지만, 뉴라이트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은 사실 운동권 출신들이 많다.# 애초 국내에서 뉴라이트를 주도한 세력 자체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주사파에서 우익으로 전향한 국내 정치 분파들이다 보니 이들을 포괄적으로 뜻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즉, 젊었을 때 운동권에 몸담아 열심히 좌향좌하던 사람들이 세월이 지나 방향을 180도 돌려 열심히 우향우한 결과물이 바로 뉴라이트.

다만 이걸 극우라고 단정짓기엔 좀 애매한 것이, 독재자에 대해선 남북 모두 열렬히 까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남쪽 독재자에 대해선 애매한 태도로 조용한 사람, 심지어 찬양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자유주의 보수라고 확 정의내리기도 좀 애매하고... 이 내에서도 분파가 좀 다양한듯. 지만원 같은 극단적 발언에서 호응을 얻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자폭을 당하는 안습한 처지지만(...). 독재시절 고문을 받았음에도 우익으로 전향하여 대외 이미지가 피해자로써 완전히 상반된 경우도 있다. 그래서인지 2010년대엔 여기에서도 나와 따로 활동하는 소위 운동권-뉴라이트 출신인 사람들도 많다. 반면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중에서도 김완섭이라는 친일파가 존재한다. 파벌중심의 풍토를 보여주듯 그는 경상도 혐오 감정이 강하다.

운동권이었던 그들이 이런 전향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냉전의 붕괴 과정에서 겪은 소위 멘붕 때문이었다. 흔히 운동권 소속 청년들은 운동권 선배들의 영향으로 당시 한국 사회와 미국 등에 대해선 대단히 부정적이었던 반면, 북한이라든지(NL의 경우), 소련 공산주의(PD의 경우) 등에 대해서는 이상적인 부분만을 취사적으로 받아들여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던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운동권이 최극성을 이루던 80년대 말 압도적 화력을 선보였던 이들이었으나, 1990년대가 시작되면서 소련의 붕괴, 독일의 통일, 동유럽의 몰락 등 공산주의 국가들이 일제히 몰락하고, 90년대 중반들어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고 탈북자 등을 통해 그 실상이 밝혀짐에 따라 상당수가 그제서야 "우리가 속았다!!"는 충격을 받아 멘탈붕괴했던 것이다.[7]

이 와중에 기존에 있던 한총련(한국대학생총연합회)은 시대에 제대로 변화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96년 한총련 사태1997년 프락치 오인 살해 사건,1998년 민혁당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나면서 90년대 운동권 내부에서는 통렬한 반성의식이 소용돌이쳤고 이 때 운동권 인사들 중 상당수가 우익으로 전향하는 사례도 나왔다.[8] 그러나 사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전투종족적인 강경성은 어디 가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권 특유의 저돌성을 고수하는 상태에서 방향만 180도 튼 꼴이 되어버렸고, 그것이 바로 지금의 뉴라이트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의 뉴라이트 주요 인사로 불리는 인물들의 프로필을 보면 의외로 젊은 시절 운동권 이력이 있거나 운동권과 관련이 있었던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또한 실제 운동권 경험을 해 보았던 이들이기 때문에 과거 운동권에 대해 누구보다 그 생리를 빠삭하게 꿰고 있으며, "운동권 활동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등, 운동권에 매우 적대적이 되어서 극단적인 좌향좌에서 극단적인 우향우로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다만 우향우가 되어서도 군사정권 관련해선 적대적인 기질을 드러내, 우파 내에서도 비주류로 노는 경우도 많다(...).[9] 물론 애초에 이런 전향은 좌우 가리지 않고 동서고금 이래 꾸준히 있어 온 일이긴 하다.

4. 비판

운동권이 80년대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 과정에 공헌한 바가 크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중국, 일본 등 민주주의 의식이 약한 여타 동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대한민국에 민주주의 의식이 뿌리깊게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불의에 항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운동권이라는 이름만 빌려온 채 독재세력과 별 다를 바 없는 폭력성과 악습을 새로이 개발해 사회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자신들을 선과 정의로 포장하면서 반대로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회운동가들이 아직도 일부 존재하는데다, 거기에 더해 소위 진보주의를 표방한다는 자들이 그들의 정치관, 민족주의관, 사고방식은 여전히 그 시절에 정지해있는 상태라는 문제가 있다. 당장 광화문에서 나타나는 대오 전방의 일련의 무리들, 머리띠 맨 사람들이 무기나 흉기를 들고 보여주는 폭력, 정치극단주의 등을 보면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전무한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강하게 든다. 극단적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은 선악의 대결이 아니라 그냥 그들의 적들과 같이 권력을 잡으려고 애쓰는 놈들이라고도 한다.

즉,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무력을 써서 찍어누르려는 행동, 자신이 원하는 사람만 대통령으로 인정하겠다는 태도는 그들이 적으로 간주하는 수구꼴통 세력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을 비롯한 몇몇 사건의 당사자들 주장을 보면 수구를 넘어서 고문으로 거짓자백을 받아내던 독재정권이랑도 별 차이가 없을 정도다. 비판적으로 대하는 입장에서는 필요할 때만 민주주의, 인권을 들먹이고 적대세력에는 적용하지 않는 이들은 절대 민주주의세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어쨌건간에 운동권이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당하며 자기가 생각하는 기존 사회의 악습에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강렬하게 저항하는 즉, 방향성에서 상대적 정의나 사회적 약자쪽에 위치해 있다는 포지션이 컸고, 또한 한국사회에서 경찰이 걸핏하면 악역 위치에 강제당하는 덕택에 이들이 선역에 위치되고 심지어 대중들에게 지지받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실상은 저 경찰들 역시 본인 사상에 상관없이 징병제 혹은 가정을 위해 그 자리에서 있던 것뿐이지만. 사실 연세대 사태 등 한총련이 욕을 처먹은 이유도 본인 사상 상관없이 자리만 지키던 경찰을 죽였던 이유가 크다. 후에 '그 경찰을 거기에 세운 독재정권 잘못이다!' 라고 변명했지만 한총련이 병크를 일으키던 때는 최소한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시절로 독재정권 시절이 아니었다.

하지만 민주화를 이뤄낸 후의 한국에선 예전만큼 대중의 큰 호응을 받지 못한다는 게 문제. 강경하면 폭력과 배타성으로 욕먹고, 온건하면 존재감이 잘 드러나질 않으니(...). 귀 좀 기울여주세요 이것은 사회상의 변화에 따라 기존의 운동권과 같은 세력은 필요가 없어져 자연스럽게 도태된 것에 가깝긴 하다.

특히 현재는 운동권 부모에게 시달려온 젊은이들이 인터넷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비판이 두드러지는 것도 있다. 엄마/아빠가 집안은 내팽개치고 시위를 다니거나 혹은 반미/반일 시위에 자식을 끌고 가려고 하는 등, 허구헌날 민중가요를 틀어놓거나 아직도 80년대를 살아가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무엇보다도 자유와 인권을 외치고 민주당을 찍으라고 강요하면서도 평소 생활상은 전형적인 꼰대의 모습을 보이는 등.

4.1. 학벌에 따른 차별

운동권의 주축 중 대부분은 소위 명문대학교 재학생, 혹은 그 출신들이 독점하였다. 운동권 세력판도가 NL, PD 계파로 분류되기 이전에 이미 출신 대학에 따라 서열이 갈려지는 셈이었는데, 명문대 출신과 3류대 출신이 똑같이 운동권 활동을 벌일 경우 3류대 운동권은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는 비웃음을 사고, 해당 학교 학생들의 호응도 이끌어내기 어려워서 적극적으로 운동권에 개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심한 경우에는 명문대가 주축이 된 운동권 조직이 3류대 학생회에 개입해 학내분규를 조장 혹은 학생회 자금만 유용해 버리고 발을 빼는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 학벌과 학력 덕분에 명문대 출신들은 사회에서 한 자리씩 하는 선배들의 도움을 받거나, 사상적 전향 이후에도 국가고시든 어디든 먹고 살 길과 능력이 있었지만[10], 3류대가 운동권 전력을 가질 경우 앞날이 심하게 암담했다(...). 운동권 활동한다고 성적도 좋지 못할 경우 구직에 직접적으로 지장이 가다보니, 평판도 나빠지고 낙인이 제대로 찍혀서, 따로 먹고 살 만한 능력이 없는 이상 정말 미래가 답답해지는 것.[11]

게다가 3류는커녕 아예 대학조차 나오지 못한 일부 노동자 출신 운동가들은, 위장취업했다 전향하거나 위장취업을 포기하는 등의 여러 이유로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학생 운동권들을 보며 '돌아갈 집이 있다는 말이 저런 것이었구나'라며 더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애초 386은 학생만 조명했지 노동자들은 들러리일 뿐이었다는 것.(참고영상)[12]

여담으로 이런 운동권 출신들의 악습적인 학벌 차별[13]을 줄곧 당한 인사 중엔 고졸 출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있었다. 그래서 유시민 전 장관의 경우 "일부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힌 운동권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싶었다"며 서울대 출신인 자신이 고졸인 노무현을 공개지지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영상.

4.2. 시위 및 집회에서의 비판

과거의 시위대 하면 흔히 꽃병과 파이(화염병과 쇠파이프), 그리고 바리케이트와 짱돌로 대표되는 폭력시위를 연상하는 경우가 많았다. 90년대 들어서는 폭력시위로 많은 비판을 받았고, 이게 극단적으로 폭발된 게 1996년 연대 한총련 사건이였다. 이 때를 계기로 내부적으로 "필요 이상의 폭력시위는 자제하자"는 비판이 돌았고, 2000년대를 기점으로 학생운동권의 전투력은 급격하게 감소했다. 2006년 평택 미군기지 반대 시위 정도가 학생운동권이 마지막 전투력(?)을 보여준 때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론 무기가 등장할 정도의 굵직굵직한 충돌은 대부분 노동조합 대오와 전경들 사이에 벌어졌다. 오히려 학생대오가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전투력이 하락해, 집회 때 전경 밀고 들어오는데 등돌려 도망가기 등으로 되려 시위대에게 위험한 상황을 만든다는 비판이 나올 지경이라나(...).[14] 고대 전투던 현재 전투던 이런 식의 퇴각은 최악의 전술이다. 이럴 경우 뒤에 있는 대오랑 엉켜 우르르 넘어져 부상자가 나오기 일쑤다. 지도부나 경험이 많은 참가자는 이쯤 되면 상황이 안 좋아지면 알아서 도망가지만, 뒤에 있던 일반 참가자는 그게 아니니 영문도 모르고 두들겨 맞는다.

4.3. 권위주의 문화

내부적으로 지나치게 엄격한 생활계율[15]을 적용해 내외로 비판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박노자 교수가 과거 운동권의 문화를 비판한 적도 있다. 특히 NL 계열의 경우 주체사상의 수령론 영향으로 인해 이러한 권위주의 문화가 매우 심했다.

80년대에는 선후배 간의 체벌도 꽤 많았다고 하며, 몇몇 학교들은 2010년대 중반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가령 새내기에게 똥군기 잡는다고 한 학번 위의 학생들을 집합시켜서 기합을 준다든가... 옛날 군대랑 똑같네 놀랍겠지만, 사실 80년대에 대학문화 자체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상당히 권위적이고 억압적이었다. 특히 NL 진영의 구호인 "미제와 청와대 독재 아래 신음하는 우리의 딸들..." 운운이 있다. 왜 굳이 독재 아래 신음하는 민중을 꼭 '여성'으로, 성적 표현으로 환원시켜야 했을까? 이 때문에 NL운동권들과 여학생회는 늘 대립을 하기 일쑤였다.[16]

이런 문제는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학생단체에서 여대, 여학생의 비중이 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긴 했다. 하지만 아직도 진보주의 운동에선 이런 성차별적인 윗대가리들이 꽤 남아 있어 진보마초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20세기 당시에도 권위주의적인 학생운동에 대한 비판이 PD계열로부터 제기되어 꾸준히 담론화되었다.

즉, 권위주의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자는 이들이 도리어 권위주의 노선을 들여오는 이중성이 문제. 심지어 과거에 "영어를 사용하지 말아라"[17], "프로야구를 보지 말아라"[18] 등의 계율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너졌다 카더라

단, 문제가 되는 수직적 구조는 2000년대 중반 이후로 많이 개선되어, 타 학생 동아리에 비해 두드러질 만큼 존재하진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이 사실상 권위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흘러 오히려 이상한 물을 들여 놓았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가령 집회 때 줄 맞추어 앉게 한다고 파시즘이라고 한다거나...(집회 때 줄 맞추어 앉는 것은 통행에도 좋고, 여러 명이 앉기에도 좋다.) 하지만 이는 정파나 학교에 따라 다른지라 특정 노래나 책(높은 확률로 미국 음악 또는 책)을 보지 말게 하는 괴랄한 계율이 존재하는 곳도 분명 있었다.

실제로 과거 신입생들은 멋 모르고 불렀다가 선배들한테 괜히 혼났다는 일화가 전해져오기도 하는데, 80년대 후반에는 과 학생회실에서 통기타를 치면서 존 레논의 'Imagine'을 불렀다는 이유로 선배한테 혼나는 경우도 있었고[19], 서울대 96학번이 신입생일 무렵엔 마이클 잭슨의 춤을 장기자랑 때 췄다가 "다 좋은데 양키 노래라 좀 싫다"는 말을 들은 일도 있었다고(...). 2000년대 들어서는 이런 괴랄한 계율은 많이 사라졌다. NL끼리 뭉쳐도 롤하고 힙합하고 다 하더라 물론 대학마다 선-후배로 이어지며 이런 운동권 동아리가 남아 있을 공산은 있다. 여기저기에 '미제타도' 벽보를 붙인다거나.

홍기빈이라는 칼럼리스트는 바로 이러한 운동권의 마인드를 2000년대에도 고치지 못한 사람으로써, 이러한 마인드를 2006년의 한겨레신문 칼럼에서 표출하는 추태를 보였다. 문제의 칼럼 내용을 보면 본문 중에...

예컨대 한국은 국민의 교통 안전을 위해 고속도로에서 이륜차 운행을 금지하고 이를 민주적 절차를 통해 법제화한 바 있다. 그런데 이제 자유무역협정은 한국인이 더 많은 할리 데이비드슨 오토바이를 즐길 수 있도록 그 법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소문이다.[20]

한국에서 이륜차 고속도로 운행금지는 절대로 민주적인 절차로써 법제화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미제타도라는 프레임에 갇혀 이륜차(오토바이)의 고속도로 통행 합법화를 미국이 할리데이비슨을 통해서 한국에 내정간섭을 시도하는 것이라는 뉘앙스의 소리를 해댔다.[21]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미국이라면 발끈하고 자주 빼에엑~ 외치는 양반들이 반대로 중국은 두둔하고 옹호하는 경우가 있다. 진보진영 일각의 사고방식은 리영희가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승>, <10억인의 나라 중국 백서> 등을 쓸 때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 지적받는다.[22] 때문에 적잖은 진보 매체나 정당에서 친중적인 논조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2000년 이후 여러 사건들을 계기로 반중 감정이 드세진 사람들에게 반발을 사기도 한다.

사실 중국 공산당 1당 독재는 까여도 할 말 없는 사항일 뿐더러, 오히려 한국의 독재를 타도한 운동권이라면 미국의 패권주의적 행보보다 더 비판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경제시스템도 사실상 자본주의로 바뀐지 오래됐고 또 자주 타령도 민족주의가 기반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보수가 주장할 문제지 사실 탈민족주의를 내세워야할 진보랑은 어울리지가 않는 주제다.

요약하자면 한국미국이 제공하는 단물은 빨아 먹으면서도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북한중국의 위협에 대해서는 쉬쉬하거나 외면하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에선 북한과 중국에 동조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4.4. 편협성

자칭 진보라고 하지만 앞서 언급된 대로 일부는 조선시대 수준으로 보수적인 면이 있다.[23] 전향이나 사상전환을 용납하지 않는 옹졸하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다. 그 때문에 "남들이 21세기를 사는데 운동권만 70~8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

무엇보다 이 집단은 용서나 이해, 옹호라는 단어와도 거리가 멀다. 한번 자기네와 등지면 끝까지 적대적인 마인드를 취한다. 윤석양 씨만 해도 단지 입대 후 프락치를 강요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전히 배신자 운운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이런 독선적이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인터넷 선전선동에 이용하면서 이에 물드는 네티즌들이 많다.[24] 그리고 모든 면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려 든다.

2008년 이후로 깨시민 등지로부터 흔히 문화나 서브컬처 탄압을 보수세력만 주장한다는 소문이 돌지만, 본질적으로 운동권 및 그들이 주축이 된 진보세력도 신세대 문화에 대해서 꽉 막힌 건 마찬가지다. 마초, 권위주의 성향 그대로 운동권 경험이 있는 어른들이 자식들을 굉장히 보수적으로 키우거나, 자식들이 여가문화를 즐기는 것에 대해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는 일은 정말 흔하다.

흔히 보수정당이 신세대 문화에 부정적인 스탠스가 있으니 진보정당은 안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실제로 그들도 그렇게 주장하나, 현실은 선거를 위한 네거티브 공세일 뿐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사이트에서 동성애자나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를 대할 때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걸 보면 극우와 그다지 다를 게 없다. 근데 네티즌들이 다 운동권은 아니잖아

4.5. 무책임함

연세대 사태에서 보듯이, 지휘부가 학생들 버리고 튀었다. 이런 무책임한 모습은 이전에 있었던 시위에서도 종종 일어났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불려나온 후배들을 실컷 고기방패로 써먹고 내다 버렸다. 거기다 시위나 운동권 회합을 한다고 통보도 없이 특정 대학이나 장소에 우르르 몰려가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수습도 안해 놓는다. 거기다 시위 도구나 현수막 만든다고 화학공학과미대생들 부려먹는 건 덤이고, 학과 강의 중에 대뜸 밀고 들어와서 멋대로 중지시키고, 선동을 일삼거나 순진한 애들을 운동권으로 꼬드긴다.

이렇게 실컷 부려먹고 어지럽혀 놓고 윗대가리들은 정치한답시고 나가 버리고, 내부에서 밥그릇 싸움하다 패배한 일부 상층부와 투쟁이란 단어밖에 모르는 골통들은 방치되었다가 먹고 살기 위해 뉴라이트로 전환했다.

거기다 운동권 인사들이 권력을 잡은 노무현 정부 당시 시위 진압은 아주 강경했다. 이 시기 구속당한 노동자 수가 김영삼 정부의 2배였다. 2005년 WTO반대 시위에선 농민 2명이 맞아죽기도 했다.

4.6. 삐뚤어진 역사관

반미 성향을 가진 자들은 대한민국미제의 식민지로 인식한다. 또한 한국의 건국은 미국을 등에 업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주도했기 때문에, 이승만이 주축이 된 정부 수립 진영이 분단을 주도했으며, 한국 자체가 탄생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시각을 가진 자들도 많다.

이 때문에 일부 NL계열 운동권 출신 중에는 종북이 아니라면서도 남북간의 문제에 대해서 북한을 두둔하는 이들이 많은데, 북한이 친일파를 청산하고 미제 문화에 오염된 한국과 달리 왕조 문화를 전통적인 언어나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운동권 일각에선 북한이 더 민족적인 정통성이 있는 국가로 보고 있는 것.

또 이들 중에선 박정희 정권의 이순신 성역화에 반발해 원균을 옹호하는 뻘짓을 저질렀으며, 굴곡진 근현대사에 혐오감을 갖고 환빠적인 역사관을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이들에게 있어 기존의 강단사학자들은 친일 식민사관을 가진 반동에 불과하다.

운동권, 특히 전교조에서 이렇게 삐뚤어진 역사 인식을 가진 자들이 활동하면서 10~20대에게 잘못된 역사관이나 편향적인 근현대사의 관점, 극단적인 자국 혐오인식을 심어놓는데 악영향을 끼치는 데 한몫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 진행 중인 심각한 문제다.

4.7. 종북주의와 주사파

독재정권 치하라서 누명을 썼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실제 누명을 쓴 사람도 많긴 했지만, 주사파 문제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당시의 사안들이 당시 정권의 공안조작 등으로 이미지가 희석되어서 그렇지, 분명히 소수이긴 하지만 주사파가 실재했다. 기본적으로 운동권에 사회주의 옹호론자들이 많다 보니[25], 북한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사회주의 국가라고 생각한데서 오는 호의적인 착각도 이런 주사파들을 양산하는데 한 몫 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런 흐름 속에 탄생한 주사파들은 한국 운동권의 이미지에 적잖은 타격을 주었다.

여담으로 사실 해방 이후에는 오히려 사회주의가 인기가 많았다. 심지어 당시 지식인들은 정치 체제는 자유주의 내지는 시민민주주의로 가야 하지만, 경제 체제는 사회주의식 계획경제로 가는게 옳다고 보는 경우도 많았다.[26][27] 그러나 신탁통치 오보사건과 수년 뒤 벌어진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 이후 남한은 완전히 반공으로 돌아선다. 이 시기 이후 한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지하에서 긴 세월을 보내게 된다.

이 부분은 사구체 논쟁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60~70년대에 종북주의자들이 없던 것은 아니다. 조총련과의 커넥션이 있던[28] 일부 소수의 그룹과 한국전쟁 후 지하에 숨어있던 김일성주의자들은[29] 어떻게든 당국의 눈을 피해 조직을 만들거나 민주화 운동으로 위장한 그룹을 만들어 다른 민주화 운동 단체와 연합을 하거나 꼽사리를 껴서 움직였다. 그만큼 김일성주의(이하 주체사상)은 금기였고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조직을 만들었다가 연대한 다른 그룹까지 간첩 혐의로 줄줄이 딸려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통일혁명당 사건.[30] 유신 체제가 끝날 때까지 북한 노선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거의 활동을 못하고 천천히 늙어갔다. 아니, 북한 노선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와 관련된 사람들은 하나도 활동을 못했다고 보는게 맞다. 유신 시대에 적발된 "최대규모의 맑스주의자 그룹"인 김정강 그룹 사건[31]의 리더 김정강도 1960년대부터 10년 넘는 세월을 그냥 공장 숙련공으로 잠입만 하고 있었다고 한다(...). 혁명하러 갔는데 모범사원이 됐다.

그러다가 80년대가 되고 나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이 지식인과 학생 사회를 강타한다. 그 이전까지는 미국을 이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바라보는 지식인들도 많았고, 운동권 중에는 순수 민족주의자들이나 반공주의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분단과 학살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는 시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즉 미국이 통수(...)를 쳤다는 배신감이 생기면서 그 전까지는 없었던 "양키 고 홈"이라는 구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이후, 정확히는 80년대 중반부터 자생적 주체사상파가 생겨나기 시작한다.[32] 이들은 남북통일민족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학생사회와 운동권 사이에서 세력을 불려나갔다. 특히 이들은 노동문제와 사회 구조문제에 포커스를 맞춘 PD계열과 다르게, 한국인이라면 어릴 때부터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마냥 배워온 민족주의적 가치를 내세웠기 때문에, 대중적 반향을 얻을 수 있었다.[33]

물론 이들은 민주화가 되기 전까지 공개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와 민족, 애국을 내세웠다. 애초 이것도 탈민족주의가 모토인 진보가 내세울 가치는 아닌 것 같지만 넘어가자 그래서 80년대에는 "한참 운동권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데모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NL이 되어 있더라"는 사례가 꽤 많이 있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반공개적으로 주체사상을 논하기 시작한 것은 89년 이후부터다.[34] 그리고 주체사상을 논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점점 일반 대중과 멀어져갔다.

요약하자면, 80년대 중후반까지 주체사상파는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당시 6월 항쟁이라는 시민혁명을 견인한 것은 분명 운동권들이지만, 여기에는 시민사회 및 종교단체, 재야 정치권, NL부터 CA까지 다양한 정파들이 섞여 연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NL보다 훨씬 강력한 공개 대중조직이었던 신한민주당 당원들과 지지자들 및 이들의 일부가 결성한 민주화추진협의회의 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35]

하지만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마치 민주화를 자신들의 공산주의 사상 실현의 시대로 보며 폐쇄적인 환경에서 자기들만의 우물안 개구리식 아전인수격 인식을 하던 주사파 그룹들은 공개적으로 대중 앞에 나서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타 정파들로부터의 고립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반 시민들이 이들을 인간쓰레기로 간주한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고.

5. 총학생회

학생회의 태생자체가 당시 군사독재정권의 어용기구였던 학도호국단에 반대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연히도 90년대 초반까지 학생회는 학생운동을 위한 기구였다. 하지만 학생운동이 쇠퇴하면서 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비운동권, 더 나아가 운동권을 반대하는 반운동권 세력들이 수권한 총학생회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과거보단 덜하지만 현재도 꽤 많은 학교에서 총학선거가 이루어지면 운동권 vs 비운동권 or 반운동권의 구도가 이루어지는듯.

아무리 대학생들이라지만 정치판은 정치판인 것인지(...) 다양한 말들이 많다. 일부 지방사립대의 경우 조폭학생회에 관여하는 경우도 존재하며, 정치깡패 이처럼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항상 1년에 몇 곳에서는 금권선거나 부정선거 얘기가 나오기도 하며 네거티브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심지어 몇 년간 선거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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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000년대 이후

총학생회 항목에서 보듯이 연세대 사태 이후 입지가 많이 줄었다. 여기에 대해선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 보는 쪽이 맞을 듯하다. 운동권이 주로 목적으로 삼는건 정권교체와 비판이었는데 한총련 사태 이후 운동권에 대한 인식이 크게 나빠졌고[36] IMF 외환위기 이후 정권교체가 되면서도 한동안 고리타분 명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작 학내 문제에 대해 별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게 가장 큰 원인이다. (물론 21세기 진보학생연합 처럼 이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한 단체도 있었지만 크게 성과를 내진 못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학생들의 생각이 변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암울했던 70~80년대에는 학생들에게 공감을 살 수 있었으나 글쎄, 지금 정부 정책을 운운하며 어디서 모이자고 하면 모일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문이다. 즉 학생들이 운동권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데다가 등록금과 관련된 학교의 횡포가 심해지면서 학생들이 학생회에게 원하는 건 "정부 말고 학교와 맞서 싸워줄 학생의 대표인 학생회가 되어 달라"는 쪽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에서 대학생의 입지가 많이 줄어들고 정부를 비판하는 시민사회, 시민단체가 성장하면서 굳이 학생이 저항의 주축이 될 필요가 없어졌다. 무엇보다 경제현실이 암울하다 보니 고리타분하고 추상적인 정부 비판보다는 일단 자기 앞가림부터 하려는 사람이 늘기도 했고. 실제로 옛날에는 운동권 하다 잘 안 돼도 취직이 쉬워서 잃을 게 없었는데 요즘은...

또한 덧붙이자면 학생 동원의 방식 또한 많이 바뀌었다. 8~90년대는 워낙 엄혹한 시절이어서 학생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경우도 많았고, 어느 과의 어느 선배 밑에 들어가면 그대로 정파가 결정되는 방식이었다. 과거 운동권 출신 배우 안내상씨가 NL이었다는 이야기에 &quot;그때는 그냥 선배들 따라서 그대로 정파가 결정되는 것이었다.&quot;고 말한 바 있다.[37] 실제로 NL들 중에는 자신들이 NL이 된 줄도 모르고 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구호가 자주통일, 민족단결이다 보니 워낙 어릴 때부터 민족은 소중한 것이라고 학습받아 온 것도 있고,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뭔가 급진적인 구호가 나오더라"하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군부독재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정파와 상관없이 반독재 학생운동이 상식이자 정의였던 시절이다. 그 시절에는 종북좌파란 개념도 없었고, 학생운동 세력이 정치권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종북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행적을 무조건 종북좌파 프레임으로 낙인 찍는 종북몰이의 행태는 그 시대에 대한 고찰이 빠진 것이다.#

반면 CA(훗날 PD)는 운동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이론적으로 공부하다가 운동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경우는 없지만, 워낙 노선 가지고 서로 논쟁을 하는 통에[38] 의장이 수시로 바뀌고 조직이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래서 나온 말이 "NL은 착한데 대가리가 비었고, PD는 머리는 좋은데 싸가지가 없다"(...)

게다가 90년대까지는 대학 자체도 상술했듯 굉장히 권위주의적인 분위기여서 선배가 하자고 하면 대충 따라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대규모 집회에서 일반 학생들을 대충 동원할 수 있었다. 어차피 싸움은 사수대가 하니까, 일반 학생들은 뒤에 서 있다 집에 갔다 90년대 후반이나 2000년대에는 이게 안 통하자, 선배들이 "시내에 놀러 가자"고 후배들을 속여서 동원하는 사례도 있었다. 선배가 술이라도 한잔 줄 줄 알고 따라갔는데, 막상 나가보니까 마스크와 장갑을 나눠주더라는 경험담도 있다(...).

결국 현재 들어서는 NL이건 PD건 계열별 정파를 분류하는게 큰 의미가 없기도 하다. 일단 운동권 자체가 극소수로 전락했고, NL은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사회운동과 생활운동의 의제를 꽤 많이 받아들이고 있고, PD는 예전 같았으면 수정주의라고 욕 먹을(...) 수준의 사회민주주의적 방식이나 협동조합 운동까지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밖에서 대충 보면 그냥 다 운동권인 게 함정

6.1. 민족주의 계열(NL)

자세한 정보는 NL(정파) 항목 참조.

민민련,국민회의-민통련-전민련의 후신인 전국연합은 90년대 초반 가장 강력한 NL계 연합체였는데, 90년대 중반 지도부가 대거 김대중을 따라 보수야당으로 가버린 이후 지지부진하다가 2000년대 후반 해체한다. 그 후신인 진보연대는 활동은 유명무실하나, 형식상으로는 국내 NL계열 단체들의 총 연합체 격이다. (아래 단체들이 대부분 여기 가입되어 있음)
과거 NL 운동권의 본류(아래에 서술된 범민련, 한총련 자주계열)는 반미제 반파쇼 운동으로 남한 정부를 전복하고 북한과 통일하여 자주민주정부를 세우자는 노선이었다.90년대 시작한 학생운동의 퇴조와 함께 2000년대 등록금 문제 등 학생들의 이슈를 중심에 놓는 분위기로 바뀌면서 한총련 혁신계열이 주도하는 한대련으로 NL운동의 주도권이 넘어간다. 한대련의 2011년 반값등록금 운동은 인상적이었지만 그때가 마지막 불꽃이 아니었나 싶다. 한대련 출신들은 대부분 통합진보당 학생위원회를 통해 사회운동으로 진출하였으나,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2016년 20대 총선을 즈음해서 새로 창당된 민중연합당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 한국대학생문화연대
문화운동, 계열별 학술모임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부 조직에서 비민주적인 운영방식이 비판을 받은 바 있다.# 2016년 현재 한의계 진료모임 길벗, 약대동아리 늘픔, 스무살의 자격, 에코로드, 사실 위의 진실 IMFACT, 교양공동체 쿰(CUM), 인권더하기법률, 이공계 지식공동체 CUBE가 소속되어 있다. 2011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사[39] 를 받았던 '자본주의 연구회'도 이곳에 소속되어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프로젝트 동아리 네트워크. # 집행위원장이 통진당 학생위원회 출신으로 현재 민중연합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사건을 쉴드치던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
  • 청년하다
대표가 전 전 통합진보당 구청장 후보, 현 민중연합당 국회의원 후보. 페이스북 페이지
2000년대 들어 학생회 운동이 퇴조하자 다양한 관심사별로 그룹이 조직된다. 위의 연합 동아리들의 활동은 다양한 부분에 걸쳐 있어 회원들 중에는 단순히 학술, 봉사목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단체 자체를 NL 운동권 단체로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각 조직의 운영진이나 이들을 지도하는 선배 라인은 대부분 NL(중에서도 경기동부연합 계열) 출신으로 통합진보당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 한국청년연대 #
민청련(1983~1988)-전청대협(1988~1992)-한청협(1992~1998/2001~2009)의 후신으로 과거 한총련, 한대련에서 활동하던 졸업생들이 지역 활동을 위해 조직한 청년회들의 연합체. 간부 대부분 20대 총선에 민중연합당으로 출마
  • 민주주의자주통일대학생대표자협의회(민대협)
한총련 몰락후 한대련이 등록금 문제 등에 집중하는 것에 반발('조합주의'라고 비판)하며 한총련의 전통(?)을 지키려는 서울지역 대학들이 모여서 만들어졌다. 이들의 구호가 "공동선언[41] 이행투쟁! 반미투쟁!"인 것에도 한총련 강경파(소위 자주대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을 알 수 있다. (구 애국학생연대(애학련)[42]을 비롯한 서총련 자주계열)
  • 6.15 학생위원회
  •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위의 단체들은 소위 NL 자주계열(강경파, 주사등으로 불리는)의 단체들로, 최근에는 거의 활동이 미미하다. 이들은 대부분 진보정당운동에도 무관심하다. 한반도의 당은 하나이기 때문에..흠좀무
전형적인 통일운동 단체. 북한과의 교류, 협력 확대를 목표로 한다. #
그동안 정의당 내 인천연합은 노유진의 정치카페등을 듣고 자발적으로 가입한 리버럴-사민주의 당원들이나 지속적으로 대학생위원회나 생활도서관과 같은 진보성향의 동아리, 전국학생행진내 인맥을 통해 세력을 포섭해왔던 PD들과는 달리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 이후 후배 조직원들을 포섭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이후 인적자원부족을 타계하기 위해 권중도 서울시 청학위장을 중심으로 청년둥지사업단이라는 신 인천연합 재건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꿈꾸는 고래라는 정의당 밖의 신 인천연합 외곽조직을 조직하는데 성공하였다.

6.2. 민중민주주의 계열(PD)

자세한 정보는 PD(정파) 항목 참조.

  • 전국학생행진(구 대장정학생연합, 전국학생연대회의) - 사회진보연대 - 학회학술네트워크

84년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촉발되어 87년 민주화 이후에 NLPDRPD가 본격적으로 분리된다. 행진 계열은 지속적으로 학생운동내 PD 진영에서 최대 정파로 활동해왔다. 전성기에는 수도권 웬만한 대학 문과대학(또는 인문대학) 학생회는 다 행진에서 수권할 정도였다. 대학 내 페미니즘 학회 중 다수가 이쪽 계열이기도 하다. 또한 NL 제외하고는 지방대학에 의미있는 활동회원 수를 보유한 유일한 정파다. 서울대 성폭력 대책위 사건의 가해자[44] 편에 서서 흡연을 성폭력이라고 주장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입장을 철회했다. 이 사건 직후에 서울대 행진은 박살이 났다고 한다

  • 청년좌파(구 전국학생연대, 전국학생회협의회)# - 알바노조(알바연대) - 청년초록네트워크 - 노동당(청년학생위원회, 사회당 계열) - 연꽃아래 - (구) 인권네트워크 사람들 - 청년녹색당

전국학생행진과 더불어 PD의 양대 정파라고 하면 꼽히는게 청년좌파이다. 실제로 이들은 사회당 시절 02, 07 대선운동을 치룬 적이 있으며 12년 무소속 김순자 후보캠프를 뛰었다. 전통적 사회주의가 노동자계급(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을 중시하는 반면 이들은 기성 노동조합에 포함되지 않는 기간제, 알바 등 불안정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프레카리아트) 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가만히 있으라 운동 등으로 최근 가장 확장세를 보이는 조직이라고 한다. 최근엔 기본소득과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해결, 알바노동자 계급 운동에 집중하고 있다. 페미니즘과 퀴어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세력 중 하나다.

  • 사회변혁노동자당 학생위원회(구 학생사회주의정치연대, 사노위 학생모임, 학생변혁모임)

극좌파 사회주의 정당이자 마르크스주의를 당 이념에 채택한 유일한 정당. 이름에는 당이라고 하지만 실제 등록된 정당이 아니다. 정당 등록을 일부러 안 하는 것. 민주노총 한상균 집행부가 이쪽 계열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한데, 정확히는 민주노총 내 좌파 활동가 모임인 노동전선 계열이다.

  • 노동자연대 학생모임(구 민주노동당 학생그룹, 다함께 학생모임)

흔히 트로츠키주의로 오해받지만 사실은 정통 트로츠키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단체이다. 굳이 따지자면 '클리프주의'라 할 수 있다. 학술행사로 맑시즘을 매년 개최한다. 엄밀히는 PD와는 전혀 다른 IS라는 ISIL이 아니다 독립적 정파이다. 90년대 초반 소련 및 동구권 붕괴로 소련식 모델을 이상향으로 하던 PD운동이 퇴조에 접어들었을 때, 남한 국제사회주의자 그룹(International Socialists of South Korea)라는 조직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느슨한 연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념적으로는 프로페셔널 했으나, 현실적으로는 능동적이지 못해서 학생운동권 내에서도 소외된 이념적 엘리트 운동권들이었다. 대학가 서점에 그들만의 팸플릿을 만들어 파는 정도의 활동을 하다가, 문민정부 때 전원 검거당했다.# 이후 꾸준한 신문 판매와 2003년 이라크 전쟁 파병반대운동 등을 통해 다시 성장하여 현재는 '노동자연대'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고 있다. 2011년의 다함께 대학문화 성폭력 사건 이후로 페미니즘 운동 측으로부터 욕을 많이 먹고 있다고. 그럼 잘한다는 뜻 아닌가

현재 정의당의 3분의 1 이상이 PD계열 운동을 해온 경력이 있는 당원들이고, 대표진과 당 중앙도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노심조) 등 PD 좌장들로 포진해 있다. 사회민주주의 계열과 온건 NL계인 인천연합도 대거 존재하기 때문에 정통 PD계라고 보기에는 살짝 애매한 감이 있지만, 아예 당 붕괴테크를 타고 있는 노동당보다는 확실히 PD조직이 살아 있는 나름 원내정당 휘하의 단체다. 메갈리아 사태에 개입한 이유도 PD들 중 여성주의자가 많기 때문이다.

이곳이 진정한 8-90년대 PD 이론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좋게 말하면 정통 나쁘게 말하면 화석 본인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스탈린주의에 가깝다. 물론 단어 자체의 의미와는 다르게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관용구 자체로서 스탈린주의적 정치경향을 지칭하기도 하기에 언어적 오류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다. 실제 이곳에서 출판한 책들을 보면 이런 책이나 이런 책 등 소련을 변호한 책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읽는 책들 역시 구소련의 러시아과학아카데미에서 나온 철학사나 자본론 등으로 친소 성향이 강하다. 여담으로 흑석동에 있는 연구소에 마르크스엥겔스 사진이 걸려 있다. 존영?! 주말에는 영화도 보여준다

6.3. 시민운동/환경운동

90년대 이후 운동권의 분화로, 기존 운동권에서 다른 노선을 모색하던 부류나 운동권과 거리가 있던 단체들이 결집한 케이스. 일일히 열거하기는 힘들지만 상기한 두 계열과는 확연히 다른 편이다. 때에 따라서 NL이나 PD랑 연합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독자노선으로 분류해야 한다. 2000년대 중반에는 참여정부의 정책에 따라 제도권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엄연히 재야세력이고 사회혁명을 이야기하는 세력과는 다르다.

6.4. 노동운동

아마도 이 문서를 읽는 위키러 중에서는 다른 운동권 계파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 여기도 사정이 복잡하다. 기본적으로 정권 친화적이고 코포라티즘적인 한국노총부터, 보다 강성한 노동계급 운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민주노총도 있으며 그 외의 자잘한 지역노조, 일반노조 등 여기도 다양한 정파들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노동운동은 다른 운동권들과 상당히 차이가 있는 편이다. 태생적으로나 운용면에 있어서나 노동조합의 사회운동화를 꾀하는 쪽이라 보면 된다. 민주노총 안에서도 국민파(NLPDR), 현장파(PD), 중앙파(민주당, 정의당 라인) 등 다양한 정파가 존재한다.

6.5. 평화운동

  • 전쟁 없는 세상#

90년대까지 한국의 평화운동은 NLPDR이 주도해 오며 주한미군철수라는 의제가 중심이 되어, 보편적인 평화운동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하나의 독립된 평화주의/반군사주의 운동으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휴전국가로 징병제 중인 한국에서는 여러모로 현실은 시궁창안습한 처지지만, 그래도 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병역거부 수감자들을 지원하고, 비폭력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대량살상무기 거래 반대운동을 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인상깊은 문구가 존 F 케네디미국 대통령의 "전쟁은 오늘날 전사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명성과 특권을 병역거부자가 누릴 수 있을 때 끝나게 될 것이다."라는 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엠네스티랑 여러모로 방향성이 닿기도 한다.

6.6. 청년 당사자 운동 계열

  • 청년유니온 - 민달팽이유니온[47]

2000년대 후반 새롭게 등장했다. 전통적 운동권은 민족주의사회주의건 좌파적 사회주의건 이념적으로 사회주의를 뿌리로 해서 출발하였으나 이들은 복지국가를 추구하기 때문에 거시적인 사회 변혁을 얘기하지 않는다. 전체 운동 하에서 청년학생운동을 위치 짓는게 아니라 당사자로서 청년운동을 하기에 청년수당, 주거환경개선 등 세세한 정책들에 집중하는 편. 복지국가 수립이 목표인 정의당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청유에서 활동하던 유명인 조성주 소장이 대표적. 청년유니온 출신의 진보 인사들이 정의당으로 정치에 입문하는 것은 덤.

6.7. 아나키즘

  • 국민문화연구소#

생각보다 오래된 사회단체다. 1945년 해방 이후 서울에 모인 아나키스트들이 모여서 "자유사회 건설자 연맹"을 조직하였고, 여기서 분화되어 1947년 국민문화 연구소가 조직되었다. 혁명이나 급격한 변혁노선 보다는 생활 개선, 지역 자치를 통한 자유사회운동을 해 왔기 때문에 군사정권 하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현재까지도 존속되고 있다.[48] 그러나 현재로서는 아나키즘 서적 출판 및 아나키즘 계열 독립운동가 기념사업 외에는 딱히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 아나클랜#

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결집된 조직. 조약골이란 사람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현재는 거의 활동이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 한국 자주인 연맹#

스스로 근원을 해방 이후 아나키즘/조합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독립노동당에 두고 있지만, 정작 둘간의 연속성이 불분명하다(...). 일단은 독립노농당 해산 후 결집한 아나키스트들의 모임인 '조선무정부주의 운동사 편찬위원회'가 발전한 것은 맞는데, 그 사이에 이합집산이 워낙 많았고, 단체로서 활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계승한다고 보기는 좀 뭣하다. 일단 해방 후 가장 활발히 활동한 아나키스트 하기락[49] 선생이 관여하긴 했으나, 사회운동 단체라기보다는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의 성격이 강했고, 현재는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의 성격을 띄고 있다. 심지어 명색이 아나키즘인데 의장이라는 사람이 수꼴스러운 글을 게시판에 자주 올리곤 한다(...).

7. 참고문헌

  • 이재오[50], 해방후한국학생운동사, 형성사, 1984
  • 이명준,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 바오출판사, 2012
  • 김재엽,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연극과 인간, 2013

8. 관련 문서


  1. [1] 농담삼아 운동하는 사람들이라고 체대생들을 이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sports와 MOVEMENT의 차이이다. 반대로 인터넷 커뮤니티 DC인사이드의 헬스갤러리 등에서는 운동권을 헬스권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한다.
  2. [2] 그 이전까지는 노선논쟁이 있었어도, 일단 민주화 운동이란 구심점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표면화되진 않았다. 다만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론이니 반봉건매판자본이니 하는 정말 어려운 용어들로 노선논쟁이 이어졌다고(...). 대부분 국제정세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며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맑스주의, 자유주의, 마오주의를 연구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3. [3] 물론 후술되어 있듯 이들 외에도 다양한 분파가 존재한다.
  4. [4] 초창기엔 PD파도 참여했지만, 96년 이후 점차 떨어져나갔다. 그 이후에도 남아있는 곳도 있었긴 했다. (대표적으로 서울대. 다만 이쪽은 90년대 이후 NL이 한 번도 석권한 적은 없다.) 물론 지금은 일부 극단적인 NL들 빼고 다 떨어져 나갔지만.
  5. [5] 정확히 말하면 PD는 아니고 IS라는 별개의 정파이나, NL과 대비하여 범좌파로 분류한다.
  6. [6] 다만 정의당 학생위원회는 사실 사회민주주의자도 다수 존재하고, NL들도 일부 포진해있어 완벽한 정통 PD는 아니다.
  7. [7] 당시엔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또 이 점 때문에 국가보안법을 비판하는 입장이 그들 내부에서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1980년대에 학생운동권이 떠들던 주장은 정작 서구권에서는 1970년대에 논파되었고, 1980년대에는 소련, 혹은 적어도 냉전이 붕괴될 것이라는 전망이 팽배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국가보안법이 정보를 너무 차단한 결과 소련북한이 붕괴해가고, 그 이론이 틀렸다는 정보까지 죄다 틀어막아 버린 것이다. 이런 정보만 들어왔을 수 있다고? 그러면 선동용 거짓정보로 몰려서 부정당하게 된다.
  8. [8] 이 때 한총련 산하단체였던 전북총련이 한총련을 탈퇴하고 나중에 수천 명이 집단전향했다는 얘기가 있다.
  9. [9] 대표적인 예가 새누리당 비주류계인 하태경 의원이다. 2016년엔 "임을 위한 행진곡김일성과 무관하니 종북 딱지 그만 붙이라"는 말을 하기도. 정작 본인도 과거 운동권엔 종북 딱지 많이 붙인 게 함정
  10. [10] 운동권 시절 사상학습 과정에서 배운 논파력으로, 이후 대학입시에서 논술이 강조될 때 논술강사로 많이 갔다고도 한다. 스타 강사들 중에서도 운동권 출신이 제법 많다.
  11. [11] 이 경우 강인한 정신력이 없는 이상 전향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다가, 전향한 이후 운동권에 대한 적대감도 높아진다. 운동권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건 기본이고, 운동권을 타도할 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참여하는 등, 운동권에 엄청나게 잔인하게 대응한다. 욕 먹는 거야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자신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때려잡는 쾌감과 복수심 충족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출세를 포기하면서까지 맞서 싸웠더니, 믿었던 사람들에게 이중으로 버림받는 현실 속에서 제대로 빡친 셈.
  12. [12] 386의 8이 80년대 학번이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386은 당시의 대학생, 넓게 잡아도 대학 중퇴자에 한정된 용어라는 비판이 존재한다.
  13. [13] 같은 명문대 출신이 아니라면 철저하게 배격하였다.
  14. [14] 특유의 전투력(...)으로 전경 여럿 전역시킨 대규모 노동조합은 안 그럴 것 같지만, 의외로 이런 경향이 있다. 대규모 시위 참여시 앞에 노동조합이나 학생들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15. [15] 국풍81이 열리던 때는 군복무 중이던 학생들이 강제로 공연을 했는데, 그 행동도 변절자라고 취급해 학생사회에서 제명시켰던 흑역사가 존재한다.
  16. [16] 이와 별개로 민주화 이후 일부 남성의 비뚤어진 권위적 측면을 대표하는 일화로, 80년대 후반인가 90년대 초반인가쯤 대학가에서 여학생이 담배 핀다고 남학생이 싸대기 날린(...) 사건이 유명한데, 이때도 정치적 민주화는 이루었지만 정작 그 민주운동의 핵심보루였던 대학가의 권위주의(혹은 남녀차별)는 청산하지 못했다는 비판사설이 있기도 했다. 물론 건강을 위해 남녀 모두 금연하자, 다 필요없고 담배 피면 피부에 안 좋다
  17. [17] 다만 국내 운동권 말고도 이런 주장은 많았다. 실제로 에스페란토 운동에 참여한 인물 중에도 영어, 불어제국주의 국가의 언어를 쓰는데 반대해서 참여한 인물도 많았다.
  18. [18] 프로야구를 만든 그 분의 목적이, 국민들이 정치에서 눈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였기 때문.
  19. [19] 이게 왜 골 때리냐면,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존 레논의 Imagine은 아나키즘 사상을 표현한 대표곡으로 반전시위 때 자주 불리웠던 애창곡이다. 비틀즈 탈퇴 후 그가 히피 무브먼트에 탐닉한 말기에 나온 곡이라서 엄숙주의와 정부 비판적인 느낌이 매우 강한 곡인데 이런 노래를 했다고 혼내니(...). 사실 무슨 노랜지도 모르고 그냥 팝송이니 혼냈을 확률이 높아보인다만.
  20. [20] [야!한국사회] 대추리, FTA, 그리고 민주주의 / 홍기빈
  21. [21] 참고로 홍기빈은 1968년생으로,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대학교에서 운동권에 발을 담궜을 가능성이 높다.
  22. [22] 리영희가 저작할 때는 시대적 한계도 있고, 리영희 본인도 그 점을 훗날 인정하기도 했으나(대표적으로 문화대혁명 부분) 문제는 리영희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책의 업데이트가 안 되다 보니, 그 책을 읽은 독자들도 거기서 업데이트가 안 된다는 것(...).
  23. [23] 당연한 말이지만 운동권별로 다르긴 하다. 여성운동(페미니즘)도 운동권이고, 성소수자 운동도 운동권이니. 이주노동자 운동도 운동권.
  24. [24] 그런데 사실 인터넷 토론 중에 안 그런 데가 별로 없다. 운동권이 인터넷 영향을 받은 건지, 인터넷이 운동권 영향을 받은 건지...
  25. [25] 실제 당시 386 운동권 일각에서 냉전시대에 사회주의 혁명을 말하기도 했다. 참고영상
  26. [26] 제헌국회에는 이익균점권이, 제헌헌법에는 통제경제조항이 명시되어 있었고, 친일파 중의 친일파 윤치호도 해방 직후에 "경제는 사회주의식 개발이 적합할 것"이라고 일기에 쓴 바가 있을 정도. 심지어 당시 헌법을 만들어서 미군정에게 갖다줬더니 "너무 사회주의적이다"라고 뺀찌를 먹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27. [27] 이런 풍조는 군사정권 시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경제개발 5개년이니 어쩌니 하는 것들 자체가 죄다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식 계획개발 정책이다. 빨갱이 때려잡던 시대에 빨갱이 경제정책을 펼쳤으니 참으로 아이러니.
  28. [28] 여담으로 60~70년대 민청학련 사건을 비롯한 공안 사건들 중에는 조총련일본 공산당을 대충 뭉뚱그려서 "일본에서 한국으로 마수를 뻗치는 공산무리"로 조직도를 꾸며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 공산당은 북한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 오히려 일본 사회당이 북한과 사이가 좋았다.
  29. [29] 주체사상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시기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1950년대 중반이다. 그 전까지 김일성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냥 김일성주의자라고 불렸다. 티토를 따르는 사람들을 티토주의라고 불렀고 트로츠키를 따르는 사람들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논리.
  30. [30] 이때 통일혁명당과 관계가 있던 것으로 알려진 잡지 청맥에 관여하다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한 사람이 바로 신영복 교수다.
  31. [31] 그래봤자 20명도 안 되었다고 한다
  32. [32] 사실 한국에서는 종북주의자와 주사파를 뭉뚱그려 한데 묶어 이야기하는데, 70년대까지 북한과 직간접적(또는 조총련과의) 연계가 있던 집단과 80년대의 자생적 주사파와는 세대도 다르고 지향하는 바도 달랐다.
  33. [33] 여담으로 신해철의 자서전에 따르면, NL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서 데모하다가 최루탄만 터지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기 바빴는데, CA(PD의 전신)는 좀 더 조직화된 강인한 투사들이었기 때문에 최루가스를 헤치고 짱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전투력이 있었다고 한다. 신해철은 그쪽이 더 괜찮아보여서 CA 그룹을 따라다녔다고 한다(...).
  34. [34] 이 시기에 NL에 대항하여 "현실과 과학"이라는 무크지를 만들어서 PD그룹의 이론적 원천이 되고, 주체사상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사회주의 그룹이 바로 서울 사회과학 연구소다. 이들 중에는 지금도 유명한 조국, 진중권, 이진경 등이 있었다. 키워의 여명기
  35. [35] 이들은 기성 정당의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만큼,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고 자주 반목했다. 1986년 4월 29일, 김대중 당시 민추협 공동의장은 "소수 학생들의 과격한 주장은 지지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 이는 결국 5.3 인천사태를 낳는다. 해당 항목 참조.
  36. [36] 물론 이전에도 운동권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선은 많이 있었지만 지지세력도 꽤 있다보니 유지가 되었다.
  37. [37] 기자 : 엔엘(NL·민족해방 계열) 쪽 정파였던 거 같다.
    안내상 : "그렇다. 근데 그게 그때 당시에 어떤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어떤 선배 밑에 가면 어떤 정파고, 어떤 선배 밑이면 어떤 정파로 결정되는 구조였다. 4학년 때 한 친구를 만났는데 대화가 안 되는 거다. 그 친구가 "너 왜 거기 가 있냐?"면서 이상한 눈빛으로 보더라. 그런 눈빛은 처음 봤다. 서로 대판 논쟁을 벌이고 그 이후로 안 보는 사이가 됐는데, 그때부터가 이미 마지막을 걷고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내가 뭐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
  38. [38] 이것을 "사상투쟁", 줄여서 사투라고 부른다.
  39. [39] 수사 과정에서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맨 마지막 리플에 당시 사건 관련자가 달아놓은 리플이 있다.
  40. [40] 대표가 통합진보당 활동가 출신으로 이번에 20대 총선에 민중연합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함.
  41. [41] 6.15 남북공동선언
  42. [42]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한총련 내 강경파.
  43. [43] 지금은 없어진 정파. 주체사상 노선을 버리고 PD(정파)세력과 손잡아 대중진보정당을 건설하려는 운동을 하였다.
  44. [44] 언론에서 담배녀로 호칭되던
  45. [45] 2004년 공식적으로 해소하여 지금은 없어진 정파. 혁명노선을 버리고 합리적인 NL세력과 손잡아 진보정당을 건설하려는 운동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 함께한 것이 PD계열 노동운동 최대정파였던 인민노련을 계승한 노회찬의 진보정당추진위원회이다. 학생회 수권을 버리고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 활동에 집중하고자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조직 약화의 결과로 귀결되었다, 그래도 비주사NL과 개량 PD세력의 합작의 결과 민주노동당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지만, 이후 합리적인 줄 알았던 파트너가 사실은 별로 합리적이지 않았는지 민주노동당의 분당, 통합진보당의 난리 등을 거쳐 현재는 정의당에 일부 남아 있으며 일부는 박주민, 강병원 의원들 같이 더불어민주당으로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현역 당시에도 서울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90년대에 격년에 한번 총학생회를 수권하였으나 전국 캠퍼스에는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46. [46] 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해체했다(...).
  47. [47] 연세대학교 제47대 총학생회(이 계파를 전면에 내세우며 수권한 총학생회로는 최초라고 알려져 있다) 내 TFT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규모에 이르게 되었다.
  48. [48] 사실상 해방 후 친정부 노선을 견지했고, 창립자인 우관 이정규의 동생 이을규(역시 아나키스트)는 이승만 노선에 합류하여 독립촉성 국민회 중앙위원, 이승만 정권 하의 감찰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좌파에 친화적이거나 혁명적 무정부주의 노선을 견지한 세력은 한국전쟁 발발 전과 전쟁 중에 대부분 월북했기 때문에 남한에는 반공주의적인 무정부주의자들만 남았다. 4.19 혁명 이후 혁신동지 총연맹에 참여한 아나키스트들도 더러 있었으나 이들은 사실상 5,60년대에 전향한다.
  49. [49] 해방 후 크로포트킨의 저작을 번역했으며, 칸트 철학에 관한 권위자 중 한명이었다. 단주 유림의 측근이었고 아나키즘 운동을 어떻게든 이어가려고 작고할 당시까지 고군분투 했던 분이다.
  50. [50] 우리가 잘 아는 새누리당 출신 정치인 그 이재오가 맞다. YS가 있던 당시 신한국당으로 가면서 전향했지만, 원래는 원조 거물급 운동권 출신으로 매우 유명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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