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


신라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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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열조(烈祖)[1]

시호

원성대왕(元聖大王)[2]

존호

경신태왕(敬信太王)[3]

관등

이찬(伊飡)
각간(角干)

직위

상대등(上大等)

성씨

김(金)

경신(敬信)

왕태자

김인겸(金仁謙), 김의영[4], 김준옹(金俊邕)[5]

왕자

김예영(金禮英)

왕녀

대룡부인(大龍夫人), 소룡부인(小龍夫人)

왕후

숙정부인(淑貞夫人) 김씨

부왕

명덕대왕(明德大王) 김효양(金孝讓)

모후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 박씨[6]

묘지

봉덕사 남쪽(奉德寺 南)

생몰년도

음력

?[7] ~ 798년 12월 29일[8]

재위기간

음력

785년 1월 14일 ~ 798년 12월 29일 (13년 353일)

1. 개요
2. 즉위 전 행보
3. 치세
4. 원성왕 인사의 한계
5. 외왕내제
6. 괘릉(掛陵)
7. 삼국사기 기록

1. 개요

신라의 제38대 임금. 내물 마립간의 후손. 보통 중대 마지막을 혜공왕, 신라 하대의 첫 번째 왕으로 선덕왕을 뽑지만, 선덕왕은 모계 쪽으로 태종 무열왕의 혈통을 잇고 있으며[9] 이후 하대 왕들과도 혈통이 따로 놀기 때문에[10] 과도기적 왕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원성왕 이후에 즉위하는 모든 김씨 왕은 원성왕의 후손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신라 왕계는 그의 즉위를 기점으로 무열왕 직계[11](무열왕계)에서 무열왕 여계[12](내물왕계) 진골로 교체되었고 원성왕은 하대 왕계의 중시조에 해당한다.

그의 왕비는 숙정부인(淑貞夫人)으로, 각간 김신술(金神述)의 딸이다.

신라의 하대를 시작하는 왕인데다가 업적도 꽤 있어서 그런지 오늘날 국사 교육과정에서도 신문왕과 함께 제법 비중 있게 다뤄지는 군주이다.

2. 즉위 전 행보

복호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일길찬을 지낸 김효양(金孝讓).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朴氏)이다. 《삼국사기》에는 내물 마립간의 12세손으로, 《삼국유사》에선 내물 마립간의 10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5대조는 김마질차(金摩叱次)라는 사람으로 잡찬을 지냈다고 한다. 증조부 김의관과 조부 김위문이 두 번째 관등 이찬을 역임한 고위 진골 귀족이었다.

780년 김양상(선덕왕)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진압하고, 혜공왕을 죽이고 김양상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서 선덕왕 즉위 직후 상대등에 오르게 되었다.

선덕왕이 죽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무열왕의 차남 김인문의 원손이었던 김주원[13]이 무열왕의 사위 김의관의 원손이었던 원성왕보다 왕위에 더 근접했으나 알천 북쪽에 살았던 주원이 홍수로 인해 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고 귀족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자 이를 운명으로 여긴 신하들이 경신을 추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떤 이가 말했다.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진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동생으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원성왕 원년##

그런데 기록상의 계절은 정월 13일, 양력 2~3월인데 이 계절은 태풍도 없고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건조한 시기라 홍수가 딱 그때 맞춰 일어나는 것도 좀 무리고, 홍수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왕위가 왔다갔다한다는 그 자체도 좀 뜬금없는 이유라서, 이는 김경신과 김주원 사이의 왕위 다툼에서 주원이 패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훗날 주원의 아들인 헌창이 여기에 불복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당대에도 원성왕은 김주원을 제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달래려고 애를 쓴 것을 보면, 완벽하게 제압하진 못한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원성왕이 김주원보다 먼저 궁에 들어가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물】신라 김주원은 태종왕의 손자다. 원래 선덕왕이 죽고 후사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정의태후(貞懿太后)의 교지를 받들어,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왕족 상대장등(上大長等) 경신이 뭇사람을 위협하고 먼저 궁에 들어가서 왕이 되었다. 주원은 화를 두려워하여 명주로 물러가고 서울에 가지 않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4 강릉대도호부

이 즉위 전 김경신의 이야기에 대해 《삼국유사》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 꿈에 복두(고위 관리들이 쓰는 모자)를 벗고 소립(삿갓)을 쓰고 12현 가야금을 든 채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래서 점쟁이에게 해몽을 의뢰했는데 점쟁이는 "복두를 벗는 건 벼슬에서 쫓겨날 징조고, 가야금은 칼을 쓰게 되는 것이고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건 감옥에 들어갈 징조입니다." 라는 영 좋지 않은 해몽을 듣게 되어 멘붕에 빠진 채 집안에 틀어박혔다고 한다.

그러던 중 아찬 벼슬의 '여산'(혹은 '여삼')이라는 사람이 김경신을 만나기를 청했는데 처음에 이를 만나지 않다가 재차 청하자 결국 만났다. 여산이 무엇이 고민이냐고 묻자 김경신은 일전의 꿈과 해몽 이야기를 했고 여산은 "그건 길몽입니다. 만약 한 자리 차지하고도 저를 잊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신다면 해몽을 해 드리지요"라고 말하자 김경신은 주위를 물리치고 해몽을 들었다. 여산의 해몽은 이랬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거하는 다른 사람이 없다는 뜻이고, 소립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며, 12현금을 든 것은 12대손까지 왕위를 전한다[14]는 조짐이며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징조입니다."

전에 점쟁이에게 들은 해몽과는 정반대였다. 이 꿈을 들은 김경신은 위에 김주원이 있는데 내가 어찌 왕위에 오를 수 있겠냐고 물었고 여산은 은밀히 북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말했고 그 말을 따랐다. 이후의 이야기는 위에 서술된 북천이 넘쳐서 회의에 김주원이 참석하지 못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후 김경신이 왕위에 오를 무렵에 여산에게 답례를 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여산은 이미 죽고 없어 그의 자손에게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3. 치세

원성왕은 경덕왕선덕왕의 아버지 개성왕, 외조부 성덕왕의 사당을 허물었다. 대신 불국사에 자신의 아버지와 조부를 모시고, 시조대왕(미추 이사금)에 불천위태종 무열왕, 문무왕 2명, 그리고 조부인 흥평대왕(추존)과 부친인 명덕대왕(김효양, 추존)을 신라 시대의 종묘인 국가 5묘에 지정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경신의 가계는 무열왕 - 의관(義寬)의 아내 - 위문(魏文) - 효양(孝讓)으로, 일설에는 무열, 문무왕의 묘를 헐지 않은 것을 보아 문무왕의 방계 태생이라는 설도 있지만, 단순히 국가의 중간 시조로서 모셨다라는 견해와 충돌한다. 혜공왕 때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신위는 삼한일통의 업적 때문에 절대 옮길 수 없는 불천지위라고 천명했는데, 아예 다른 나라를 새로 차린 것도 아닌 이상 이것을 번복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컸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서 능력있는 신진 인재를 시험을 쳐서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인 독서삼품과(788년)를 시행했다. 이 독서삼품과는 한국사에서 최초로 유교 지식에 대한 시험을 치러 그 시험결과에 따라 관리를 등용한 제도로 훗날 고려 광종 때 시작한 과거 제도의 전신이 된다. 한편 벽골제[15]를 재공사하여 농업 생산량을 늘리려고 시도했다. 국사를 선택한 수험생들이나 국사 공부하는 고시생은 독서삼품과와 벽골제를 잘 알아두자. 시험에 잘 나온다.

즉위하자마자 장자 인겸을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791년에 죽었고 곧바로 차자 의영을 태자로 책봉했다. 하지만 의영이 793년에 죽자 장손 즉 인겸의 아들이었던 준옹을 태자로 책봉하였다.[16] 여러모로 신라의 세조? 아들이 먼저 죽어 손자(소성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가 1년 만에 사망하여 증손자(애장왕)가 13살에 즉위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략 70대까지 장수한 듯하다.

4. 원성왕 인사의 한계

장손인 준옹 같은 경우에는 790년에 시중으로 임명이 되었고, 794년에는 준옹의 동생이었던 언승도 시중에 임명이 되었다. 즉 왕의 손자들이 시중이란 주요 직책에 임명되었던 것을 비추어보면 원성왕계는 왕과 태자를 중심으로 매우 좁은 왕가의 친척들이 상대등, 병부령, 시중 등의 주요 직책을 독점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어린 왕족이 아는 것이 적어 능률은 떨어지고, 직책이 남발되어 권력이 분산되며, 또 왕족들이 소소한 권력이라도 잡으면 그것을 휘두르려고 하는건 필연이었다. 나라는 점점 막장화 된 건 필연적이었다. 당장은 아니었어도. 후대에 나타나게 되는 왕위 쟁탈전의 모습들은 이미 원성왕 대에 어느 정도 만들어놓은 것이라 봐도 무방하겠다. 즉 왕이 어리거나, 왕위를 이을 후사가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고위관직을 역임했던 왕족들이 그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펼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5. 외왕내제

원성왕 때 신라 내부적으로 황제국처럼 행세하는 외왕내제 체제를 한 것이 많이 보인다.

경덕왕 때 건립되고 원성왕 때 글이 새겨진 갈항사 석탑기(葛項寺 石塔記)에는 원성왕이 '경신대왕(敬信太王)'[17]으로, 그의 어머니가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로 기록돼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돼있는 문성왕의 유언에는 헌안왕을 '선황(先皇)의 영손'이라고 부르고 있다. 모계이든 부계이든 헌안왕의 조상에서 왕이었던 사람은 원성왕이 유일[18]하므로 여기서 '선황'은 원성왕이고 원성왕은 '황제'로 불렸다는 주장이 있다. 그가 재위기간 중 5묘를 만들고 왕권강화를 했던 것으로 보아 황제를 칭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동사강목 등 몇몇 기록에서는 786년에 원성왕이 자신이 왕위를 뺏은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책봉하고 그에게 명주 일대를 식읍으로 주어 다스리게 라 읽고 달랬다고 읽는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주원과 그의 후손은 '명주군국'이라는 국호를 쓰며 4대 37년간 그 일대를 다스렸다고. 이는 원성왕이 황제국에서 하는 것처럼 일종의 제후국을 둔 것이다. 훗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난을 일으키자 명주군국은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위의 내용들에 대한 관련 논문

6. 괘릉(掛陵)

원성왕릉 항목 참조. 아랍, 페르시아 등 서역 출신으로 추정되는 무인상으로 유명하다.

7. 삼국사기 기록

一年春一月 원성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二月 선조를 추봉하다

一年春二月 오묘를 정비하다

一年春二月 관작을 한 계급씩 더하다

一年春二月 충렴을 상대등으로, 세강을 시중으로 삼다

一年春三月 전 왕비를 외궁으로 내보내다

一年春三月 패강진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다

一年春三月 총관을 도독으로 고치다

二年夏四月 우박이 내려 뽕나무와 보리가 상하다

二年夏四月 김원전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 방물을 바치다

二年秋七月 가뭄이 들다

二年秋九月 왕도에 기근이 들어 진휼하다

二年冬十月 또 다시 진휼하다

二年冬十月 무오에게 굴압현령 직을 주다

三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年春二月 친히 신궁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二月 대사면을 하다

三年夏五月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

三年秋七月 황충이 곡물을 해치다

三年秋八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四年 독서삼품과를 신설하다

四年 사자를 파견해 가뭄, 황충, 도적 피해를 안무케 하다

五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五年春一月 한산주의 기근을 진휼하다

五年秋七月 서리가 내려 곡식이 상하다

五年秋九月 자옥을 양근현 소수로 삼다

二十三年 논하여 말하다

六年春一月 종기를 시중으로 삼다

六年春一月 벽골제를 증축하다

六年春一月 웅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다

六年春三月 백어를 발해에 사신 보내다

六年春三月 크게 가물다

六年夏四月 태백성과 진성이 동정에 모이다

六年夏五月 한산주와 웅천주의 기근을 진휼하다

七年春一月 왕태자가 죽다

七年春一月 제공이 반란을 일으키다

七年春一月 웅천주에서 한 번에 남자아이 셋이 태어나다

七年冬十月 경도에 눈이 내려 동사자가 나다

七年冬十月 시중 종기가 물러나고 준옹이 시중이 되다

七年冬十一月 경도에 지진이 일어나다

七年冬十一月 김언이 삼중아찬이 되다

八年秋七月 당에 미녀 김정란을 바치다

八年秋八月 왕자 의영을 태자로 삼다

八年秋八月 상대등 충렴이 죽어 세강이 상대등이 되다

八年秋八月 시중 준옹이 물러나고 숭빈이 시중이 되다

八年冬十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九年秋八月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벼가 쓰러지다

九年秋八月 김뇌가 흰 을 바치다

十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十年春二月 태자 의영이 사망하다

十年春二月 시중 숭빈이 물러나고 언승이 시중이 되다

十年秋七月 봉은사를 창건하다

十年秋七月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치다

十年秋七月 망은루를 세우다

十一年春一月 준옹을 태자로 봉하다

十一年夏四月 가물어 죄수를 심사하니 비가 오다

十一年秋八月 서리가 내려 곡물이 상하다

十二年 기근과 역병이 돌아 진휼하다

十二年夏四月 시중 언승을 병부령으로 삼고, 지원을 시중으로 삼다

十三年秋九月 황충으로 곡물이 해를 입다

十三年秋九月 홍수로 산이 무너지다

十三年秋九月 김삼조가 시중이 되다

十四年春三月 궁 남쪽 누교가 불타다

十四年春三月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치다

十四年夏六月 가뭄이 들다

十四年夏六月 석남오의 처가 한 번에 남자 셋, 여자 하나를 낳다

一四年冬十二月二十九日 왕이 붕어하다

원성왕부터 삼국사기 10권이 시작된다.


  1. [1] 최치원의 초월산 숭복사(崇福寺) 비문에서 발췌. 링크.
  2. [2] 삼국유사와 경주 숭복사비의 기록.
  3. [3] 이름을 그대로 사용. 갈항사 석탑기 중 발췌.
  4. [4] 병에 걸려 사망. 시호 헌평태자(憲平太子)
  5. [5] 김인겸의 아들.
  6. [6] 어머니 사후 추존함. 갈항사 석탑기 중 발췌.
  7. [7] 증손자인 애장왕이 788년 생이며, 손자인 흥덕왕이 777년생이라면 그 형들인 소성왕과 헌덕왕은 그 보다는 나이가 많다. 아들이 있을 나이를 최소한 10대 중반으로 잡으면 애장왕의 아버지인 소성왕은 770년대 초반생. 원성왕의 아들인 인겸과 의영,예영을 최소 750년대 중후반으로 추측하면 원성왕은 최소한으로 잡아도 740년 전후생이다. 역산하면, 죽을 당시 나이는 최소한 60대 전후로 추측됨.
  8. [8]삼국사기》에 각주로 첨가된 기록에 의하면 "《당서》에는 798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었고, 《자치통감》에는 800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하면 《자치통감》이 잘못되었다."고 되어 있다.
  9. [9] 단 원성왕의 증외조부(증조모의 아버지)가 태종 무열왕이라 멀게 보면 태종 무열왕의 후손은 맞다. 안승 항목 참조.
  10. [10] 무열계(혜공왕)와 원성왕 이후의 신라 왕들은 태종 무열왕부터 갈라졌지만, 선덕왕은 그 이후인 성덕왕 때 갈라졌다.
  11. [11]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의 후손
  12. [12] 무열왕의 사위인 김의관의 후손
  13. [13] 무열왕의 3남 김문왕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14. [14] 혹은 내물왕 12세손의 상징. 실제로 전자의 예언은 들어맞지 않았다. 효공왕은 그의 7세손이며 경순왕은 9세손이나 경순왕의 족보가 지나치게 댓수가 빠르다는 지적을 보면 후자가 그럴 듯하긴 하다.
  15. [15] 전북 김제시 부량면 포교리에서 월성리에 이르기까지 제방이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저수지. 우리나라 최대의 고대 저수지이다.
  16. [16] 엄밀히 따지면 준옹은 원성왕의 친손자이니 '태손'이라 부르는게 더 정확하다.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태자로 기록하고 있으니
  17. [17] 대왕(大王)이 아니라 태왕(太王)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대왕, 태왕의 호칭은 황제와 비슷한 의미로 쓰였다.
  18. [18] 한참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내물왕이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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