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비사

1. 몽골 제국의 역사서
2. 코에이의 게임 징기스칸 시리즈의 3번째 작품

1. 몽골 제국의 역사서

원조비사(元朝秘史), 즉 왕조의 비밀 역사. 몽골비사라고도 불린다. 몽골인들은 칭기즈 칸 때나 돼서야 문맹을 벗어난데다가 칭기즈 칸 생전엔 그에 대한 역사나 초상화를 그리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1] 그가 죽고 난 뒤에 쓰여진 사서로 칭기즈 칸의 부흥과 죽음을 다루고 있는 현재 몇 안되게 남아있는 몽골측 사료이다.

사료로서의 가치는 학계에 알려진 초반에는 다른 기록과 상치되는 부분이 많아서 그 진실성이 의심을 품는 사람도 있었지만 연구가 깊어지면서 다른 사서들은 전부 데꿀멍해야 할 정도로 절대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다른 사서들에 기록된 칭기즈칸의 승리가 사실은 패배였다는 점이나 칭기즈칸 개인의 약점들 가령 형제 살인, 보르테의 납치, 주치의 출생 문제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서 다른 사서들과는 차원이 다른 칭기즈칸 연구의 가장 근본이 되는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원조비사가 너무나 중요한 사료이기 때문에 비사학(秘史學)이라는 원조비사만 연구하는 학문이 따로 존재하고 있을 정도다. 또 칭기즈칸과 몽골제국의 역사라는 점 외에도 유목민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한 자료라서 유목민의 역사 연구에도 굉장히 중요한 자료다.

원조비사는 처음 기록될 때는 위구르 또는 파스파 문자 등으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원나라의 멸망 등으로 인해 위구르 또는 파스파 문자로 적혔을 원본은 이미 산일되었으며, 황당하게도 명대에 몽골어 교육용으로 만들어진 '한자로 된 음차표기+대역+총역'본이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유통되는 버전이다. 다만, 발음에 대한 표기나 의미 대응이 대단히 엄밀하여(중국어에는 없는 q와 k의 구분, r과 l의 구분을 하기 위해 中이나 舌과 같은 소첨자를 넣어 구분하였을 정도), 이것을 고전 몽골어로 환원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듯 하다. 또한 비슷한 내용이『황금사』에도 전하고 있어, 비교 및 대조가 가능한 것 또한 특징이다. 현재 사부총간본(四部叢刊本), 섭덕휘본(葉德輝本), 영락대전십오권본(永樂大典十五卷本) 등의 판본이 전해지고 있으며 내용은 거의 차이가 없이 대동소이하다.

저자가 누군지는 전해지지 않고 딱히 누구라고 확정할만한 증거도 없지만 내용을 보면 칭기즈칸을 굉장히 가까이에서 직접 목격했던 인물임은 분명해 보인다. 혹시 칭기즈칸의 어머니 후엘룬이 주워다 키운 칭기즈칸의 의제들 중 하나인 시키 후투후가 아닐까 하는 설이 있다. 시키 후투후는 칭기즈칸 일족 중에 가장 먼저 문자를 익힌 인물이고 칭기즈칸에 의해 야사의 관리자로 임명되었고 원조비사에 그와 관련된 일화가 여러 번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확정할만한 증거가 아니기 때문에 그저 유력 후보의 하나일 뿐이다.

이전 문서에는 80년도에 와서야 영문 등으로 번역되어 비밀스러운 역사라는 이름의 "비사"라는 말이 붙었다고 되어있지만 아니다. 영문 번역도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고 비사라는 제목도 책 제목에서부터 내부 항목에까지 떡하니 원조비사(元朝秘史)라고 한문으로 적혀있다.

사서의 대부분은 테무진의 몽골 통일에 할애하고 있으며 호라즘 왕국제베, 수부타이러시아 정벌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난다(…).[2] 마지막은 오고타이 칸이 자신의 행적을 돌아보는 것으로 끝난다.

특기할만한 점이 있다면 사서내에서 칭기즈 칸의 활약은 별로 없고(오히려 칭기즈 칸이 두려워하거나 분노를 참지 못해 주변 사람들이 진정시키는 장면이 많다.) 사준사구야율초재등의 활약이 더 돋보인다.

읽어 보면 문체가 사서라기보다는 서사시에 가깝다. 인물들의 대사도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 많이 나오며 시적 표현도 상당히 많이 나오는 편이다. 허영만 화백의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에서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보면 체감해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사계절 출판본의 원조비사의 표현이 그대로 인용된다. 그런데 제베음슴체와 원조비사 원본의 시적 표현을 믹스한 것을 보면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2. 코에이의 게임 징기스칸 시리즈의 3번째 작품

해당 문서 참조.


  1. [1] 이에 대한 근거 추가바람. 칭기즈칸은 피휘조차 금지할 정도로 이런 방면에 전혀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었다. 실제로 몽골이 중원을 정복한 이후에도 피휘 풍습은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몽골 대칸들의 이름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사용되었다. 다만 피휘라기보다는 아마도 존경심 때문에 몽골 역사에서 칭기즈칸의 이름 "테무진"과 쿠빌라이칸의 이름 "쿠빌라이" 딱 두 개의 이름만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2. [2] 그도 그럴만한 게, 수부타이와 제베는 무함마드 샤를 잡으러 가다 보니 러시아 애들이랑 마주치게 된 상황이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긴 원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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