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언

이름

유병언(兪炳彦)

출생

1941년 2월 11일, 일본 교토

사망

2014년 5월 25일 ~ 6월 2일 사이로 추정

시신 발견지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학구리 매실밭

본관

기계 유씨

신체

160cm[1]

학력

대구성광고등학교 졸업

직업

기업인, 아마추어 사진 작가[2]

가족

부인 권윤자,

아들 유대균, 유혁기[3]
유섬나, 유상나[4]
형 유병일, 동생 유경희, 유병호

별칭

호 '아해'

거짓은 미화되어 판단을 흐려놓고 짓눌린 진실은 양심이 위로한다.

유병언(1991. 7. 15.)

1. 개요
1.1. 직접적 책임이 없다는 의견
1.2. 직접적 책임이 있다는 의견
2. 증발한 포상금
3. 기타
4. 도피기록
5. 관련 문서

1. 개요

1941년 일본 교토시 출생으로 1946년 부모의 고향인 경상북도 대구시에 정착하였다.

대구 성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독립 교회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성경학교를 마치고 신앙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이때 권신찬(權信燦)이 담임하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그에게 신임을 얻고 이후 권신찬의 딸인 권윤자와 결혼하였다.

초창기엔 대구 지역에 위치한 자신의 집 '칠성예배당'을 본거지로 삼아 활동했다. 이후 서울, 인천, 안양 등지로 영역을 넓혔다. 그러다 1971년 서울 약수동 성동 교회에서 구원파에 동조하던 미국인 선교사 3명에게 목사 안수를 받은 뒤 평신도 복음 선교회 목사가 되었다.

이 직후 유병언은 사업가로 변신하여 1974년 교인들의 헌금으로 부도 직전의 부실 무역 기업인 삼우트레이딩을 인수한다. 그리고 1976년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이제부터 나를 목사라 부르지 말고 사장으로 부르라"고 지시하여 교인들 사이에는 '유 사장'으로 통했다. 이후 1979년 세모그룹으로 상호를 바꾸었다. 세모라는 이름은 삼각형의 순 우리말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세월호 참사 이후에 언론에 성경에 나오는 인물인 모세를 거꾸로 했다는 내용의 오보가 사실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1981년 12월 기독교복음침례회가 설립되었으나 유병언은 교단 설립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했다고 전해진다.

1986년에는 선박 사업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강 유람선 사업권을 취득하여 주목을 받았으나, 1990년 선착장에 정박 중이던 세모 유람선 2척이 태풍으로 떠내려온 경쟁업체 유람선과 충돌, 표류하다가 마포대교 교각을 들이받고 침몰하여 유람선을 정박하던 세모 직원 1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기도 하였다. 순탄하던 그의 삶은 1987년 발생한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에 연루되어 1992년 징역 4년을 선고받으며 잠시 흐트러지게 된다.[5] 1997년에는 무리한 투자로 세모가 부도가 났다. 부도 이후 세모의 해운 사업은 1998년 온바다해운(2006년 경영난으로 폐업)을 거쳐 1999년 3월 그의 아들들에 의해 설립된 청해진해운으로 승계되었으며, 한강 유람선 사업은 2004년 세양선박에 매각되었고 이후 이랜드그룹으로 넘어갔다. 이후 유병언은 대외적으로 기업 활동을 중단하였고, 한동안 대한민국에서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신앙과 사업의 연계성을 강조하며 자신이 주도하는 삼우트레이딩과 주식회사 세모 등을 이끌었다. 유병언은 청해진해운의 실세이자 세모그룹의 회장으로서 세월호의 소유자라 알려졌고, 세월호 선내에 '개인 사진 전시관'을 만들기 위해 세월호를 개조한 것과 승객과 짐을 지나치게 많이 실은 것이 세월호 참사의 원인으로 지목되었으나 현재 까지도 뾰족하게 세월호 침몰 사고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공소를 당하기 전에 숨진 채 발견됨으로서 사건 속에 숨겨진 진실을 조사하기 힘들게 되었다. 단,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100% 유병언에게만 전가하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세월호 사건의 1차적인 원인과 전적 책임은 분명 유병언과 그의 휘하인 청해진해운 직원들에게 있지만 2차적인 책임은 침몰 후 구조 과정에서 정부, 언론, 해경 등에 고루 걸친 시스템적 문제에도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유병언이 데스 실드를 치는 바람에 2차적인 책임을 가진 기관들과 시스템을 지적하기가 어려워진 것.

유병언 일가는 부정부패가 가득하였고, 이에 검찰은 유병언 체포 영장을 발부하지만 유병언과 그 가족들은 경찰을 피해 도망간다. 경찰은 도주한 유병언을 체포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 작전까지 벌였으나 구원파 신도들의 방해로 순탄치 못했으며 검찰 역시 처음에는 유병언에게 5천만 원, 그의 장남 유대균에게는 천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으나 며칠 뒤 그 10배인 5억 원, 1억 원으로 각각 인상해야 했는데 이는 한국 역대 최고 현상금이었다. 하지만 대대적인 수색과 고액의 현상금을 걸었음에도 유병언은 체포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자세한 내용은 유병언 도피기록을 참조.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유의 공원과 베르사유 미술관에서 '아해 사진전'을 개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전문가/평론가들에 의하면 그의 사진은 예술적 가치가 전혀 없는 것으로 평가되는데, 작품들 대부분이 일종의 뒷돈을 위해 겉으로는 사고 파는 것처럼 위장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의 힘이었다. 박물관 측에 거액의 기부금을 냈던 것. 이 때문에 루브르 박물관은 프랑스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세월호 사고가 터진 뒤 프랑스 측에선 유병언 전시회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1.1. 직접적 책임이 없다는 의견

현재까지 나온 유병언의 배임, 과실치사 혐의는 모두 수사기관에서 발표한 자료에 근거한다. 편향된 자료를 바탕으로 죄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살인이나 강도와 같이 인과관계가 분명한 범죄라면 모를까, 배임/횡령 행위와 승객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유병언에게 도덕적 책임이 있다면 모를까, 법적 책임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6]

주주와 경영자는 다르다. 물론 현행 상법상 회장의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 업무지시자로서 책임을 지도록 하는 규정이 있지만, 회장의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만으로는 안전관리 소홀의 책임을 대주주에게 물을 수 없다. 이와 비교할 만한 사안이 삼풍백화점 판례이다.

이 사안에서 대법원은 이준 회장이 1. 대표이사 겸 위 회사 소유의 삼풍백화점 회장으로서 이 사건 건물 신축공사 및 유지관리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자이고, 2. 당초 용도와는 달리 이 사건 건물을 신축하였으며, 3. 붕괴 위험이 있었음에도 고객 및 직원들을 대피시키지 않은 것이 업무상 주의의무를 위반하였으므로 업무상과실치사죄의 유죄라고 보았다. 96도1231.

그러나 1. 유병언은 대표이사의 직에 있지 않았으며, 단지 회장이라는 명칭만 사용하였을 뿐 청해진해운의 모기업의 경영자에 불과하고, 2. 청해진해운의 직접 경영자가 아닌 이상 사진갤러리를 위한 증축에 관해서 안전하게 증축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3. 선박 운행 중 안전관리의무는 원칙적으로 선장 및 선원들에게 있는 것이지 경영자도 아닌 대주주가 부담하는 것이 아니므로 업무상과실치사죄를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직접적인 책임이 없을 뿐 본인의 종교에 대한 운영방식 따위나 직접적인 운영은 하지 않지만 횡령과 관련된 여러가지 정황과 물증들이 발견됨에 따라 살아있었다면 그도 추궁 정도는 당했을 것이다. 또한 결국 죽어버리는 바람에 오히려 더 이슈가 돼 버려서 수사 진행 상황에 혼란을 초래했다.

1.2. 직접적 책임이 있다는 의견

만약 그냥 단순하게 주식을 소유했다 한다면 책임/처벌을 받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유병언은 그냥 주주도 아니었으며 사실상 대주주의 위치였다. 대주주는 실질적인 경영자이며, 동시에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자기 입맛대로 회사를 요리할 수 있다.

유병언 및 유병언 일가는 회사 자금 등을 횡령/배임했고 유령 회사를 세워 '자문료', '상표 사용료' 등의 명목으로 터무니 없는 금액을 책정해 청해진해운(주)의 돈을 챙겼다. 그에 비해 청해진해운 직원의 급여 수준은 다른 선사에 비해 열악했고 직원 안전 교육에 쓰인 돈은 1년에 1인당 4천원이라는 참담한 수준이었다. 그러한 행위는 그가 청해진해운(주)의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주주의 위치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그런 막장 경영으로 청해진해운의 재무 상태는 악화되었고, 선박의 안전/보수 등을 할 수 없는 상황이였다.

또한 세월호 침몰의 핵심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는 증개축(에 따른 배 안전성의 저하)을 지시할 만한 사람이 유병언밖에 없다. 사실상 '바지사장' 내지, '월급 사장' 정도의 위치에 불과했던 청해진해운 주식회사의 김한식 대표가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국내 최대 규모급 대형 여객선의 증개축을 독단적으로 기획하고 실행을 집행했을 가능성은 거의 제로다.

증개축은 안전 문제는 전혀 고려 없이 진행되었다. 화물과 사람을 더 많이 싣기 위한 탐욕과 자신의 자랑을 위한 사진 전시 갤러리 등 전부 자신의 이기심과 허영을 채울 목적으로 증축되었다. 유병언은 세월호의 실질적 소유주이자 청해진해운의 실질경영자로서 지위계통상 최고경영자로서의 도의적 책임, 회사 경영을 부실하게 한 간접책임 뿐 아니라 사고의 핵심 원인을 제공한 자로서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

다른 사업 부분의 예를 들어 책임을 묻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하는 반대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해운업은 다른 사업 부분과 다르게 운행부터 상당한 위험부담을 가지는 업종이다. 때문에 현재의 과학 기술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 부분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도록 경영상 노력을 했다면 책임이 없다. 항공업의 경우 사전예방체계가 워낙 잘 되어있어, 사고가 난다 하더라도 경영진이 형사상 책임을 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청해진해운이 경영상 사전 예방 의무를 충분히 이행했는가? 비상 탈출용 보트가 모두 불량이었다는 사실과, 승무원들의 안전교육 예산이 사실상 0원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그리고 승무원들은 가장 먼저 배에서 승객들을 내팽개치고 도망갔다. 즉 경영상 면책 특권은 예방과 주의 의무를 충분히 이행했을 경우 보장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책임이 없고 스스로 떳떳했다면 왜 사건이 터지고 나서 잠적하고 도주를 했는가? 이를 두고서 구원파 측에서는 대통령이 처음부터 유병언 책임이라고 해서 그랬다라고 변명을 하는데, 대한민국은 3권이 분리되어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유병언 정도면 비싼 변호사를 사서 승소하면 그만이다. 법정 다툼을 생각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도망갔다는 것부터가 문제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은 유회장이 과거 오대양 사건 당시 검찰에서 일단 와서 조사만 받으라는 말에 그냥 쫄래쫄래 따라갔다가 바로 구속크리를 맞고 교도소 직행 루트를 탔던 경험에 일단 튀고 보자는 결심을 하게 한 것 같다는 의견이 있다. 어찌됐건 도망간 건 나쁘지만.

세월호의 선사(船社) 청해진해운의 '인원 현황'에는 분명히 유병언이 '회장 유병언'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청해진해운의 회장이자 1호 사원이 유병언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최고 문제는 유병언이 지옥으로 도피해버리는 바람에 세월호 침몰 사고의 사후 처리 과정이 난해해졌다는것이다.

2. 증발한 포상금

기사 : 날아간 유병언 포상금 5억

매실밭의 주인이던 박모 씨는 발견 당시 시신 훼손이 너무 심해서 알아볼 수가 없어 신원미상 시신으로서 유병언을 발견했기 때문에 결국 포상금 지급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상식적으로 상당히 납득하기 어려운데, 국과수가 그 시체를 유병언인 것으로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설령 발견순간엔 신원미상이었다 하더라도, 판명 순간 포상금을 지급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시신의 신원은 유병언이라고 결론 내렸으면서도 발견자에게 포상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정부 스스로 이 시체의 신원이 유병언이 아니라고 눈가리고 아웅 한다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다.

포상금 지급 규정상으로는 최초 신고자의 '의도'가 중요시되고, 결과보다는 이 의도에 따라 포상급 지급여부가 결정된다. 박모씨가 최초로 신고한 내용은 유병언을 발견했다는 제보가 없는 '단순 변사체 신고'였기 때문에 포상금 지급을 받지 못한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이 때문에 국과수 감정결과도 유병언의 시신이라고 판명했는데도 정부에서는 5억이란 돈을 지급하기 싫어서 이런 억지를 부린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따지고 들면 맞는 말이지만 신고자에 한해 소정의 보상이라도 취했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하는 뒷담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른 후, 2017년 8월에 법원마저도 국가의 손을 들어주면서 포상금 지급의 희망은 사라졌다.

2018년 1월, 2심이 기각 당해버렸다.#

3. 기타

2014년 10월, 청해진해운은 항로반납권을 두고 소송에 들어갔다.

하지만 계속 위에도 설명하고 있듯이 유병언만의 문제는 아닌데, 이런 상황이 되도록 유병언의 암세포들을 그냥 두거나 밍기적거리는 진행으로 인해 중요한 기회를 많이 놓친 관련 부처들의 문제 또한 적지 않다. 결과적으로 이 밍기적거리는 태도 덕에 유병언 키즈라는 유병언 장학재단의 도움(장학금)으로 공직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인원들의 음모라는 소리까지 떠돌게 되었다.

4. 도피기록

유병언 도피기록 참조.

금수원을 나가 도피한 것으로 알려진 유병언은 끝내 사체로 발견되었다. 2014년 6월 12일경 전남 순천 송치재 인근 매실밭에서 발견된 시체는 사체 부검 결과 유병언과 일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5. 관련 문서


  1. [1] 1991년 안양교도소 수형기록에 적혀있다.
  2. [2] 루브르 박물관에 사진전을 한 적이 있고 그 외에도 사진전을 여러 차례 가졌다.
  3. [3] 유대균이 셋째, 유혁기가 막내다.
  4. [4] 유섬나는 첫째, 유상나는 둘째다.
  5. [5] 이듬해 오대양 대표 박순자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부분에는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기독교복음침례회 신도들의 헌금을 상습 횡령하였다는 혐의는 유죄로 인정되었다.
  6. [6] 업무상 횡령/배임은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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