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시대

중국의 역사 中國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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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문제점
3. 경제와 환경의 변화
4. 의의

1. 소개

六朝時代

221∼589

중국의 통일 왕조이던 (漢)이 망하고, (隋)가 중국을 재통일하기까지 근 370년 동안 분열과 전란이 이어진 시대강남 중심으로 규정하는 용어. 중간에 (晉)이 잠시 중국을 통일하면서 강남의 왕조가 단절되기도 했지만, 고작 30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시대가 이렇게 혼란해진 것은 왕망 이래 가속화된 유교의 형식화로 인한 실질적 윤리의 붕괴와 소빙기 도래에 따른 기후적 요건의 악화가 꼽힌다.

육조시대의 6조는 다음의 여섯 왕조를 가리킨다.

이 여섯 왕조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장강(長江)을 중심으로 강남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서도 장강 하류인 양주(揚州)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을 담당했으며, 중류인 형주(荊州)는 국방의 중심을 담당했고, 상류인 익주(益州)는 263년 촉한 멸망 이후로는 북조정권이 장악하고 있었다.

과거 강남지역은 (본격적인 개발이 진행되기 이전이라 중국의 인구-경제 중심지가 되는 남송 이후~현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고온다습하여 농업에 유리하고 그만큼 인구부양력이 높은 양주 지역이 육조 세력의 본거지였고, 강북의 세력이 이 양주 지역으로 진격해오는 길목인 형주가 근거지인 양주를 방어하는 군사적 거점의 구실을 한 것이다. 당장 삼국지연의만 보더라도 적벽대전등을 통해 형주가 강북 세력이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양주를 공격해오는 길목이었으며, 이 때문에 주유, 노숙, 여몽, 육손등 오의 쟁쟁한 대도독들이 주로 형주에 주둔하여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익주는 장강 하류의 양주가 본거지인 육조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영향권 안에 넣기에는 좀 멀다. 형주야 양주에 인접해 있으니 비교적 통제가 용이하지만, 또 그 형주 너머에 있는 익주는...물론 익주를 손에 넣으면 영토가 넓어지고 익주의 풍부한 경제력과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국력이 신장되겠지만, 대신 한중 방면에 또 하나의 전선이 열려서 방어 부담 역시 그만큼 커지게 되는 것. 물론 익주 지역은 분지라서 방어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긴 한데, 또 그런 만큼 여기를 지키는 인물이 본국에서 등을 돌리면 답이 없어진다. 이백도 촉도난에서 '지키는 이가 친하지 않으면 승냥이와 다를 바 없어진다' 고 노래했을 정도. 결국 강남의 육조 정권 입장에서 익주 지역은 있으면 좋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좀 계륵스러운 지역이었던 것. 그리하여 익주에 해당하는 지역은 독립정권인 촉한이 섰다가, 북조정권에 편입되어 조위·서진의 차지가 되고, 다시 독립정권인 성한이 섰다가, 동진에게 점령되고 이후 북조정권이 점령해서 서위·북주·에게로 이어졌다. 북조 정권 입장에서는 남조의 중심 양주만큼 파촉이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었고, 고대부터 중국의 중심지였던 관동과 가까워 익주를 먹으면 장강 상류에서 남조를 치고 내려갈수 있고 익주의 풍부한 경제력과 관동지역이 결합하면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낸다[1]. 당장 파촉과 관동을 합치면 그 옛날 전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강역이며 초한대전 당시 한나라의 강역이다. 두쪽으로 분열된 화북과 전 중국을 통일한 것도 관동+파촉을 얻은 북주와 그 뒤를 이은 수였다.

문화적으로는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시화문화가 발달했는데, 이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왕희지, 고개지, 도연명 등이 있다. 또한 유교가 윤리적인 기능을 상실한 사이에 형이상학적인 도교가 크게 번성했으며, 후한 때 전래되었던 불교도 비슷한 이유로 조정의 지지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자리잡았다. 반면 북쪽의 정권들에서는 불교가 번성하면서도 가끔씩 불교를 박해했으며, 특히 삼무일종 중 2가지 박해가 발생하였다. 북위 태무제와 북주의 무제 때였다. 달마가 중국에 와서 선종의 시조가 된 것도 바로 이 양무제 시절이다.

2. 문제점

화북의 정권과 지속적으로 대립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선주하던 강남의 토착 호족 세력이 막강해 이러한 문제들이 시너지를 일으켜서 군벌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만들어진 군벌은 또 나라를 뒤엎는 일이 자꾸만 일어났다. 그렇다고 남으로 내려온 문벌귀족은 정상이냐면 이 인간들도 서진시절보단 나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들도 그다지 낫진 않았고 특히 양나라 말기쯤 되면 서진 시절의 잉여로 회귀한다.[2] 이렇게 나라가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니 이러한 현실 속에서 폭군이 난무하는 막장 정치가 벌어진 점도 공통.(...)[3] 문화의 발전은 눈부셨지만, 강남의 민중들은 허리가 끊어졌다 붙었다 난리였고 중과세에 시달렸다.

외교 면으로는 고구려백제와 친교를 유지했으며,[4] 특히 백제와 친교가 많았고 고구려와는 주로 북조에 대항한 원교근공의 일환이었다. 장강 너머 화북지역을 차지한 오호십육국 및 북조와는 내내 대립관계였다. 그 와중에 비수대전의 대승과 같은 쾌거를 거두기도 했고, 특히 동진 말기 ~ 송나라 초기에는 당대의 명장 유유의 활약에 힘입어 잠시 장안낙양을 비롯한 중원 일대를 상당 부분 회복했으나 40여 년 만에 모조리 잃어먹고, 나중에 양나라가 망하는 과정에서는 완전히 상실한다.

3. 경제와 환경의 변화

강남 지방이란 게 고대까지는 인구도 별로 없고, 땅이 습하고 더워서 열대성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 겉보기에 비해 별로 좋지도 않은 땅이었다. 그래서 춘추전국시대, 진한시대까지 사실상 버려진 땅이 었었다. 그러나 육조시대에 이르러 화북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통해 뛰어난 농업 기술을 강남에 전파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강남 지역의 경제 성장은 남송(南宋)시대 때 절정에 이르렀고, 현대까지도 중국의 경제를 선도하는 지역으로 남아있다.

당장 땅에 물기를 어느 정도 빼니 벼농사를 짓기 최적화 된 땅에 거기다가 더워서 2모작, 3모작, 그러니까 1년에 벼농사를 2번, 3번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점이 발견되어 이는 강남의 경제력을 크게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다만 남북조 내내 남조는 열세에 있었는데, 당시에는 개간이 덜 됐으며, 벼의 품종이나 농법 등의 벼농사 기술도 덜 발달했기 때문. 훗날 수의 통일 직전 진나라의 인구는 8백만을 겨우 찍은 반면, 북주 혹은 수의 인구는 4천만을 넘겼다.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행정구역을 보면 장강 이북이 절반, 이남이 절반이었다가 송대에 들어 장강 이북에 비해 장강 이남의 행정구역 수가 두 배가 되었다. 실제로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강남과 강북의 경제력은 비슷했으나 안사의 난, 황소의 난, 오대십국시대를 거치면서 장안을 중심으로 한 관중 평야는 전란으로 황폐화 되고, 장기간의 농사로 환경파괴가 일어났으며 벼농사의 발달로 벼농사와 생산력이 역전되기 시작한다. 결국 금-몽골에 의해 카이펑 등의 강북의 중요도시가 완전히 깨강정이 난 이후 남송대에 들어 완전히 강남이 강북을 압도하게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환경의 변화도 있었는데 한나라 이래 진행되어 서진 말에 이르러 대규모로 인구가 이주했던 강남에서는 특기할만한 환경의 변화가 있었다. 본시 사마천이 말했던 것처럼 '땅은 넓지만 인구는 희박했고, 죽목(竹木)이 우거진'(사기, 권 129) , 강북보다 큰 규모의 산림을 가졌던 강남에서 산림의 부족 현상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나 이러한 문제를 촉발했던 것은 후한 말~삼국시대에 걸쳐 발생한 대규모 전쟁이었다. 적벽, 이릉으로 대표되는 대규모의 화공, 장강과 한수, 회수 일대에서 발생한 수전에서 사용될 전함의 건조 등은 그 일대의 산림을 크게 훼손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면서 손오 정권[5]과 그 이후의 남조 국가들은 목재 부족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목재의 조달과 소비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가령 삼국시대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였던 동진에서는 자사가 임기를 마치고 도성으로 환도하면 소나무 100그루, 태수는 소나무 50그루를 심어야한다는 법이나 관습이 있었는데[6] 이러한 남조 국가들의 산림에 대한 관심은 제나라 말기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양서에는 회계 건덕현에서 현령의 주도하에 삼림을 조성한 기록이 보인다.[7], 그만큼 당시의 산림 부족에 대한 문제가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산림의 부족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후한 말~삼국시대에도 목재 부족과 관련된 일화가 몇 차례 소개되는데, 손권은 건업에 궁궐을 건설하면서 무창에 있는 자신의 궁궐을 헐어서 목재를 충당했으며, 손휴 시대에는 광릉에 성을 보수하면서 그 지역의 무덤들을 도굴해 목재를 마련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당시에도 현지 조달, 타지에서의 목재의 공급과 관련해 크게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무성한 수림의 미개척지 이미지를 가진 당대의 강남이지만, 실상 그 곳에 자리잡은 왕조들은 일찍부터 목재 부족에 대한 문제를 겪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서진 말에 이르러 강북의 인구가 강남으로 대규모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심화되었던 것이다.

4. 의의

전대미문의 대혼란과 군벌의 난립으로 현실정치에서 유교는 크게 쇠퇴하고 상대적으로 도교, 불교가 주목되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문화예술의 발전이 눈부셔서 늘 북쪽의 북조 국가들을 오랑캐라고 무시했지만 얘들도 막장.(...) 당최 하루도 왕조가 편할 날이 없을 정도로 자기들끼리 아웅다웅 열심히 했다.

적어도 남조는 북방 이민족에게 망하지 않고 사직을 지켜냈으며, 일방적인 열위에만 있지 않았고 몇 차례 큰 공세를 퍼부은 적도 있었다. 남조는 양나라 이전에도 여전히 북방 오호들의 불안정한 국가들보다는 안정되어 있었는데[8] 이는 서진의 남은 기반을 긁어모은 동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치통감만 해도 삼국 시대에 대해선 무통으로 보면서도 위나라 위주로 기재하다가, 그 뒤엔 주로 동진-유송-제-양-진으로 가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한 남조 정권들의 지배층들은 국가적 역량이 쇠퇴한 것을 무작정 무기력하게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남조를 정면에서 깔아뭉개는 이들이 등장하는 건 이들을 아예 오(吳)의 무리로 비하하기 시작하는 북위 때부터지만, 그런 주장에 모두가 동의했던 건 아니었다. 서양에서는 남조 정권을 동로마 제국과 동일시해서 보는 시각이 아주 예전부터 있었다. 당장 육조시대라는 명칭부터가 성행했던 것이야 말로 남조정권이야말로 중국의 정통왕조라는 인식이 이전부터 있었음을 보여주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르주 뒤비에의 세계 지도에서 나타나는 이 시기의 중국사 지도에선 대놓고 남조만 중국(China)이라고 본다. 북조에서 이민족과 한족의 공존을 중심으로 호한체제(胡漢體制)가 성립되어 이후 중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실은 이러한 국제 변화와는 전혀 별도인 것이다. 그렇기에 남조의 폐단을 억제하기 위해 과거제 도입이나 귀족층인 관롱집단의 억제를 시행했다는 사실까지 간다고 남조 정권들이 할말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때문에 남조의 의의를 적게 볼 순 없다. 남중국을 적극 개발해서 중국의 범위를 확장시킨 점과 함께 과거의 한족 문화를 보존해서 이후의 통일왕조에게 전수한 점은 높게 평가해야 한다.

사실 육조시대는 강남의 기반을 닦았다는 의의가 있다. 중국사에서 중심지가 맨날 변하며 중국 문명을 보면 각 지역들을 돌아다니면서 세를 넓혀온 감이 있다. 사실 중원부터가 얼마 지나지 않아 상징행이 된다. 중원이라 인식되는 범위도 학설에 따라 좀 달라지기도 하지만 최소 진나라와 한나라 같은 중국 통일왕조가 중국 통일할 때부터 중원은 이미 가장 잘 나가는 지역이라는 위치를 위협받고 있었다. 당시 중국 대륙의 각 지역의 중심지들을 거점으로 삼고 출발하는 세력들부터가 대전략을 논할 때 중원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는 않았다.상징적 의미 때문에 정치적으로 점령할 필요성이 있긴 있었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한족이 아니라 유목 민족들이 중원 지역을 중심지로 살린 감도 있고 지금도 중국에서 중원의 위상은 좀 미묘하다.뭔가 상징적인 뜻들이 많기는 하지만 중원의 많은 지역들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느낌(?)

훗날의 송위 전쟁기에도 북위가 자만하고 함부로 너무 이남으로 대군을 밀어넣었다가 제대로 박살나는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던 만큼, 늘상 북조에게 열위에 있지만은 않았다.[9] 또한 남조 정권의 "지배층"들이 서진 시대부터 내려오는 바로 그 귀족공경들로만 계속 이어졌다고 생각한다는 건 지나치게 단순화된 견해다. 동진 시기에 하북에서 피난을 온 귀족들이 강남의 토착호족들과 연합을 하였음에도 오히려 피난귀족들이 권력의 중심이 되고 토착호족들은 시선에서 Out되는 경우는 동진 이후 군사력을 장악한 한문들이 세력을 키우면서 문벌귀족을 견제하는 정책을 펴고 피난 온 문벌귀족에 대항할 만큼 토착 호족들의 목소리가 커짐으로서 해결을 보기 시작했으며 결정적으로 북조와의 군사적 대결, 내부 권력투쟁이 지속되면서 후기에 들어선 이런 문벌귀족들이 상당히 와해되고 한문 출신들에게 상당 부분 실권이 넘어왔음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벌귀족들이 완전하게 힘을 잃지는 않았다. 최전성기가 지나가 버린 당나라 시기에도 황제 가문인 농서 이씨조차 벼락출세한 한미한 가문이란 소리를 들었고 후대 왕조들에 들어서서도 문벌귀족들의 후예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 북방과 중원의 백성들도 살육과 약탈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황족 다툼이나 파벌 다툼으로 남조를 한심하게 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걸핏하면 그렇다고 좀만 기분이 나쁘면 관료 목을 막 치거나 배신을 밥먹듯 하며 이합집산이 잦았던 화북 왕조들의 형편이 남조보다 늘상 나았던 건 아니다. 심지어 제도나 문물은 북조도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물론 통일은 북위의 바통을 이어받은 북주 그리고 수나라가 이루게 되지만, 수나라가 정작 많이 참고한 관료제는 북위나 북주보다는 남조의 그것이었다. 그나마 수나라-당나라가 북조로부터 이어받은건 균전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10]

전진이 잠깐 놀라운 융성을 자랑했지만 그건 잠깐이었고, 화북 일대는 다시 후진과 후연이 들어선다. 남조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서진 정권이 매우 실망스러운 형태로 붕괴했고 이후 전중국은 마땅한 정통통일왕조 없이 혼란의 상태에 접어들었지만 그래도 동진이 과거 통일왕조의 저력을 이어받았던 것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석륵과 석호의 후조는 가장 강성할 때도 회수 일대를 지키는 옛 서진 군단의 후예라고 볼 수 있는 유민 군사 집단에게 막혀서 회수 이남으론 손을 뻗지 못했으며, 적어도 석륵 이상은 될 부견의 전진에게 한참 밀릴 때도 영토들을 그렇게 호락호락 내줬던 건 아니었다. 남북조의 대치는 꽤 오랜 기간을 두고 이뤄졌으며, 북위는 결국 북제와 북주로 짜개져 한동안 북방 야만족들에게도 일시 수세였던 기간에도 남조의 양나라는 번영을 자랑했다. 남북조의 대치 상황이 완전히 확고하게 북강남약으로 굳어지는 건 후경의 난 이후 부터인데, 이때는 이미 남북조가 거의 끝나갈 때 시점이다.


  1. [1] 또한 남조의 중심지인 형-양주보다 북조의 중심지인 관동/관중이 익주(파촉)와 더 가깝다는 것은, 만약 남조가 파촉(익주)을 장악할 경우 북조의 입장에서는 아주 골치아픈 제 2 전선이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촉의 생산력은 충분히 십만 단위의 대규모 병력을 부양할 수 있고, 이 병력이 한중을 넘어오면 북조의 중심지인 장안이 위협권 내에 들어가게 되는 것.(물론 이것이 바로 제갈량과 강유가 줄기차게 시도한 북벌의 핵심이다) 결국 남조의 입장에서 보면 <파촉을 장악하고 한중 루트로 장안 직격을 시도하는 것>은 "할 수 있으면 좋긴 좋지만 그러다 파촉을 다스리라고 보낸 인물이 본국에서 등을 돌려버리면 괜히 죽써서 개 주는 꼴이 될 수도 있는" 좀 애매한 면이 있는 전략인데 비해 북조의 입장에서 보면 파촉에서 한중을 넘어 장안을 노리는 저 놈이 양주에 있는 그 놈 부하든 반독립 세력이든 여튼 누구에게든 관중을 뺏기면 나라가 거덜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
  2. [2] 때문에 양말에 벌어진 후경의 난으로 인해 이런 잉여들이 정리되어서 육조를 통틀어 최약체인 진나라는 오히려 내부적으로는 그런대로 건전한 편이었다.
  3. [3] 폭군도 그냥 폭군이 아니라 사극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사건을 일으키거나 행동을 저지르는 폭군들이 한무더기로 나왔다. 그게 아니면 대게 꼭두각시, 그 두가지가 아닌 정상인은(물론 꼭두각시 중에서도 정상인이 나왔지만) 대게 재위기간이 짧거나(빨리 병사하거나 꼭두각시라 얼른 교체되거나) 불운하게 죽는다.
  4. [4] 물론 고구려, 백제는 남조하고만 관계를 맺지는 않고 북조와도 관계를 맺었다. 북조에서는 이들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했는지 북위의 경우 사신이 머무는 숙소의 크기를 남조의 사신의 것을 가장 크게 짓고 다음으로는 고구려의 사신의 숙소를 크게 지었다고 한다.
  5. [5] 손호가 2천석 이하 관리까지 직접 보내서 벌목을 감독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6. [6] 《금릉지기(金陵地記)》에서 이르길 : 장산(蔣山)은 본래 수목이 적었는데, 동진 때에 임기를 마치고 도성으로 귀환한 자사에게 소나무 100그루, 군수(郡守)에게는 50그루를 심게하였다. (태평어람)
  7. [7] 영태(永泰) 원년, 건덕(建德)현의 현령이 백성 1정(丁)마다 15그루의 뽕나무, 4그루의 감나무, 배나무, 밤나무를 심게하고 여성에게도 절반을 심게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였고 얼마 뒤 숲이 조성되었다.(양서)
  8. [8] 북방국가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이합집산을 반복했고 그나마 안정된 시기가 북위 시절인데 그마저도 또 동서로 분열된다.
  9. [9] 사실 보면 방어전에서는 남조도 북조에 반드시 꿇릴 이유는 없었다. 물론 북조가 기본적으로 문 보다는 무에 더 가깝긴 했지만 북조를 구성한 국가들도 5호 16국 시절로 보면 이미 여러 민족으로 나뉘어 있었고 그 민족 중에서도 또 여러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반면 남조는 어쨌거나 한족만의 국가였기에 적어도 나라가 조각조각날 확률은 그나마 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만큼 뭔 일이 터져도 북조가 쳐들어오면 "아무리 그래도 오랑캐에게 나라를 내줄 순 없지!" 라는 심정으로 나섰을테고... 실제로 남조도 물론 국가가 막장이기는 했지만 나라가 찢어지는 사태까지는 후경의 난 같은 경우를 빼면 벌어지지 않았으나 5호 16국 시절에는 모였다 흩어졌다가 반복되었고 북조 시절에도 한번 분열과 재통일이 있었다. 남조는 나라는 안 쪼개지는데 북조는 나라가 쪼개졌다 합쳤다가 반복될 정도로 응집성이 낮았던 것 이런 상황에서는 북조가 온 역량을 쏟아 남조를 공략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북조에서는 전진이 비수대전 한방에 모랄빵나 망했지만 남조는 송의 경우 40여년에 걸쳐 천천히 회복한 영토를 잃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나라가 분열되지는 않았다.
  10. [10] 균전제를 그대로 시행한건 아니지만 어쩄든 그 밑바탕은 균전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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