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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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의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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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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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기록관 사진[1]


공식 초상화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

이름

윤보선 (尹潽善, Yun Posun)[2]

출생일

1897년 8월 26일

출생지

조선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3]

사망일

1990년 7월 18일 (향년 92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4]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재임기간

1960년 8월 13일 ~ 1962년 3월 22일

서명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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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해평 윤씨 도재공파 22세손[7]

부모

아버지 윤치소, 어머니 이범숙

형제자매

6남 3녀 중 장남

배우자

공덕귀

자녀

윤완구, 윤완희, 윤상구, 윤동구

학력

에든버러대학교 대학원 고고학 석사

종교

개신교 (예장통합)

신체

169cm, O형

십이지

닭띠 (정유년)

약칭

해위 (海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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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 대통령
2.2. 하야 이후
3. 묘소
4. 각종 타이틀
5.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이자 헌정 최초이자 유일한 의원 내각제 대통령.

대한민국의 정치인,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한 의원 내각제 정부의 대통령을 역임하였다.[8]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내각이 사실상 무력화된 후에도 1년간 대통령직을 유지하였으며, 1962년 3월 대통령직을 하야하였다.[9] 이후 국회의원으로서 야당을 이끌었으나 1980년에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1990년 7월 18일 사망하였다.

충청남도 아산[10] 출신으로, 호는 해위(海葦)[11]이다.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 대통령

윤웅렬, 윤영렬 형제를 필두로 구한말에 유력 가문으로 떠오른 해평 윤씨 집안 출신이다. 윤영렬의 차남인 윤치소의 장남으로, 윤치호가 당숙, 윤치성윤치영은 숙부다. 해평 윤씨 문서 참고. 다만 윤치영이 매우 늦둥이라 조카인 윤보선이 삼촌인 윤치영보다 1살 많다.

1915년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잠시 활동하다가 탈퇴하고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로 유학을 다녀왔다. 당시 별명이 "영국 신사".[12]

귀국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등 요로를 통해 집요한 협조를 강요받았으나, 석왕사에서 은신하며 일체 응하지 않았다. 게다가 부인과 사별하며 여식만 남겨두고 있던 터라 일본의 협박이 잘 먹히지도 못했다. 잃을 게 없거든 심지어는 문중회의에서 결의된 창씨개명을 홀로 거부하기까지 했다.[13]

광복 직후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 활동한다. 미군정에서 농상공국 고문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공화국에서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이 독선적 태도를 견지하며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멀리하자 상공부장관을 사퇴하였다. 6.25 전쟁국민방위군 사건,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승만과 결별하고 민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4.19 혁명 이후 들어선 제2공화국에서 민주당 구파로 대통령을 역임했다. 하지만 당시는 의원 내각제 체제였기 때문에 실권을 행사했던 총리에 비해 대통령의 권력은 많이 억제되어 있었고, 9개월 정도가 지난 후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서 대통령으로서 영향력을 가진 기간도 짧았다. 당시 실권은 민주당 신파의 장면 국무총리가 행사하고 있었다.

역임 1년여 만에 박정희5.16 군사정변으로 하야하려 했는데 당시 반응은 새벽에 보고받았던 "올 것이 왔다"였다. 대규모 유혈사태로 번지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주한미대사와 UN사령군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한림 중장을 저지하고 사임의사를 밝혔다.

2.2. 하야 이후

존재감이 참 없었다.[14] 이런 이유로 최규하 하고 비교되지만 최규하보다는 많이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교과서에서도 꽤나 비중있게 다룬다. [15] 또한 박정희와 제5대 대통령 선거, 제6대 대통령 선거로 두 차례나 대통령 선거 대결을 했으며 특히 박정희 집권 전에 치뤄진 첫 번째 선거는 거의 이길 뻔 했다. 바로 박정희의 남조선로동당 전력을 들춰 낸 것. 박정희는 매카시즘 하지마라는 말을 할 정도로 당혹해했다. 하지만 결국 그 색깔몰이로 영호남과 제주도의 반발이 일어났다. 오죽하면 전남에서는 박정희에게 몰표가 쏟아졌을 지경이었다.[16] 거기다가 공약도 문제였는데 거의 무대책으로 나서서 일단 당선되고 나서 정책을 마련하겠다는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했다.[17] 매우 귀족적인 성향의 윤보선[18]에 비해, 박정희는 그 자신이 소작인 빈농의 자식임을 강조하여 농민 표가 박정희에게 많이 간 탓도 컸다.[19] 두 번째는 완패.

첫 번째 대결에서 근소한 차이로 진 다음에, 그는 스스로를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이후로 '정신적 지주' 등 '정신적'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정신승리 5.16 이후 해산된 민주당 구파(사실 5.16 직전에는 신민당)을 규합하여 민정당을 창당하고[20] 총재로서 오래 정치를 했다. 이후 민중당신한당에 몸담다가 신민당으로 통합. 1971년 신민당의 유진산 체제에 불만을 품고 탈당하여 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유신시대에도 김대중 등과 함께 사회 원로로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제5공화국에는 호의적[21][22]이어서 민주화 운동에 적극 나서던 14살 연하의 영부인 공덕귀 여사를 허탈하게 했다. 그의 비서를 지낸 조종호김정례 등이 민주정의당이 입당했다.# 말년에는 노태우를 공개 지지선언까지 했었다.#

1980년 10월 22일 열린 제8차 헌법 개정안을 묻는 국민투표에 참석하여 인터뷰하는 모습.

공식 상으로 나온 제일 말년의 모습이다. 1990년 3월 09일 김영삼 당시 민자당 최고위원이 윤보선 전 대통령의 자택으로 방문해 문병한 당시의 사진. 이후 1990년 7월 18일 향년 9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윤보선 대통령이 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을 거부해 현충원에 안장되지는 않았다.

3. 묘소

충남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에 위치한 해위(海葦)[23]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의 선영.[24]

윤보선 대통령은 다른 대통령과는 다르게 국립현충원에 묻히지 않은 대통령이다.

4. 각종 타이틀

  • 2018년 기준으로 가장 장수한 대통령. (향년 92세)
  • 일제강점기 이전에 태어난 두 번째이자 마지막 대통령.
  • 기념우표에 새겨지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25]
  • 2017년 기준 유일한 충청도 출신 대통령.
  • 조선시대 출생한 유이한 대통령.[26]
  • 전임 대통령과 가장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대통령 중 한명.[27][28]
  • 대한민국에서 2번째로 재혼 경력이 있는 대통령[29]

5. 여담

  • 서예에 능해 서예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가 쓴 글씨 중에서 "落山雲表(낙산운표)"는 단아한 기품이 느껴지고 꾸밈없고 소박하다는 평이며 정확하고 정사각형을 이룬 것과 선이 다소 약한 것은 매우 신중하고 바른 사람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휘호 중 하나인 민주구국.

  • 서울에 있는 윤보선 고택은 고택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성지.
  • 정치적으로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부분적인 영향을 주었다. YS와 DJ의 대결구도는 사실상 윤보선과 장면[31] 세력, 즉 신구파의 갈등에서 기원한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다만 김영삼이 정계에 뛰어들게 한 '정치적 아버지'는 6.25 전쟁 때 국회부의장과 국무총리를 지냈던 장택상이며, 이후 조병옥을 거쳐 유진산의 정치적 적자가 되었다. 윤보선과 친해져 민주당 구파의 후계자가 된 것은 그 뒤의 일이나, 윤보선보다는 유진산에 가까웠던 것이 사실. YS가 장면과는 초면부터 확실히 선을 그은 것은 맞는다.
  • 고향인 아산에서는 지역 알리기를 하고자 윤보선 고향임을 홍보했는데, 인지도가 듣보잡급이라 그런지 참혹하게 관광객 유치에 실패했다(…).
  • 영상물에서는 이순재가 윤보선 역할로 일세를 풍미했다. 드라마 공화국 시리즈제2공화국은 윤보선 생전에 방영되고 있었는데, 훗날 인터뷰에서 소감을 물으니, '연기를 점잖게 잘 하는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사실 실제인물 이상으로 카리스마가 넘쳤다

(아래 사진과 비교해보자)

  • 직계 가족으로는 배우자 2명(여흥 민씨, 공덕귀)와 2남 2녀가 있다. 이중 2녀는 여흥 민씨와, 2남은 공덕귀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이다.
  • 음악인 겸 방송인인 남궁연이 윤보선의 외손자라는 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다만 아주 무관한 것은 아니고, 윤보선의 동생인 윤완선의 외손자가 남궁연이다.


  1. [1] 이 사진의 윗 부분을 편집해 당시 관공서에서 사진으로 걸었다.
  2. [2] 자(字)는 경천(敬天), 별칭은 정신적 대통령, '영국 신사', '재야 대통령'이 있다.
  3. [3] 현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해위길52번길 29
  4. [4]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윤보선길 62
  5. [5] 특이하게도 한글이 아닌 영어 서명을 썼는데, Posun Yun의 앞글자만 따서 PSY라고 사인을 했다.
  6. [6] 마지막의 Y에도 점을 찍어야 맞춤법에 맞는다.
  7. [7] #, #2 참고.
  8. [8] 내각제 특성상 실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무게가 실려 있었기에, 자칫 윤보선을 잘 모르고 장면만 알아보는 사람도 허다하다.
  9. [9] 처음에는 헌법기관이 사라진다는 이유로 군부 세력과 미군을 막론하고 모두가 하야를 말렸지만, 실권을 잃고 허수아비처럼 되다가 기성 정치인의 출마를 금지한 민정이양 계획 발표에 따라 1년 뒤 하야를 사실상 '강요'당했다.
  10. [10] 아산시 둔포면에서는 그의 생가가 복원되었고, 길도 "해위길"이라고 명명되었다.
  11. [11] 해위란 호는 독립운동가 신규식상하이에서 지어준 호다. 해위란 바다 갈대라는 뜻이다.
  12. [12] 여담으로 이때 피아트 500L을 구입해서 타고다녔는데 전교생 중 유일하게 자동차를 가진 학생이라 동양에서 온 왕자님으로 오해받았다고한다.
  13. [13] 가문의 창씨는 이동(伊東, 이토)이었다. 친일행위가 존재한 윤치호는 '이동치호'로 창씨개명했는데, 사람들은 '이 똥 치워'라고 조롱했다.
  14. [14] 오죽하면 리그베다 위키 시절에 정치적 편향과 소송드립 등 각종 논란을 우려해 정치인 문서가 거의 다 사라졌어도(그나마 대통령 문서를 남기긴 했으나 사후에도 정치적인 논란 등을 우려해 기본 내용만 남김.) 이 문서는 남아있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무위키 시대가 열리고 각 대통령들의 항목이 어느 정도 내용이 채워지고 있는 와중에, 이 문서 다른 대통령은 있는 평가도 없을 뿐더러 내용 채워지는 속도는 심히 안습하다.
  15. [15] 제2공화국, 의원 내각제, 그리고 양원제가 등장하나 중학교에선 장면 내각은 나와도 윤보선 자체가 나오는 것은 보기 힘들다. (…)
  16. [16] 서부경남, 전남 지역은 남조선로동당 유격대의 활동으로 피아를 구분없이 숱한 인명이 사라진 지역이다. 특히 전남의 경우 한국전쟁 기간 정규군과의 교전도 없었는데 가장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냈다. 제주도는 4.3 사건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따라서 5대 대선에서는 이 세 지역(전남 57.2%, 경남 61.7%, 제주 69.9%)의 박정희 득표율이 경북(55.6%)보다 더 높았다.
  17. [17] 뉴욕 헤럴드 트리뷴 특파원 피터 현의 인터뷰 내용이다. 피터 현은 원래 한국의 외교관으로 일하다가 박정희가 정권 잡으면서 짤리고 기자로 취직하며 악감정을 가지게 됬는데, 윤보선을 인터뷰하고 기가 막혀서 감정은 뒤로 하고 박정희에게 유리한 기사를 썼다고 한다.
  18. [18] 지방 유세를 가면 물을 마시거나 여관에서 자는 것도 꺼렸다. 기생충이나 세균이 있을 것 같다고(…). 이건 뭐 장면도 비슷했지만.
  19. [19] 지역주의가 본격화되기 이전 선거 양상은 딱 4글자로 요약이 가능하다. 여촌야도. 때문에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는 박정희 지지율이 더 나오고, 광주, 부산, 서울에서는 윤보선 지지율이 더 나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이농현상으로 시골 인구가 급감하고, 1970년대 이후 영호남 지역주의가 노골화되자 사라진다.
  20. [20] 제5공화국민주정의당과는 전혀 다른 정당.
  21. [21] 당대에는 시대의 변절자 윤///의 대표 '윤'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윤보선 평전에서는 김대중, 김지하 등 재야인사들의 석방에도 나섰다고 하면서 신군부 협력 사실을 반박했다.
  22. [22] 이렇게 갑작스럽게 친정부적 성향으로 변화한 이유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운동권들 사이에서 빠르게 반미 성향이 퍼지면서였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미국이 전두환을 사실상 묵인해 주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면서, 그때부터 운동권들 사이에서 반미 성향이 일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시 윤보선은 운동권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져가던 반미주의를 우려했다고 한다.
  23. [23]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인 신규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바다 '해'와 갈대 '위'를 썼다. 위키피디아 참고
  24. [24] 또 역장이라고 하는데, 조상산소 윗쪽에 후손의 묘라는 뜻이다.
  25. [25] 본인이 "살아있는 사람이 어떻게 우표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며 취임기념우표에 쓸 사진을 제공하지 않았고 결국 4대 대통령 취임기념우표 대신에 새정부수립기념우표가 발행되었다.
  26. [26] 다른 한명은 당연히 이승만 전 대통령이며 둘다 고종 재위시에 출생했다. 참고로 윤보선 대통령이 출생한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건국되나, 윤보선 대통령은 같은해 8월생으로 출생시에는 국체가 조선이었다. 역대 대통령 중 대한제국 시대 출생한 대통령은 없으며, 앞으로도 추가될 가능성은 없다
  27. [27] 19대 대통령 재임시점 기준
  28. [28] 전임 이승만 대통령이 1875년생으로 22세의 나이차가 난다. 전임과 나이차가 많이 나는 또 다른 사례는 16대 노무현 대통령(1946년생)으로 전임 김대중 대통령(1924년생)과 역시 22세의 나이차가 난다
  29. [29] 1번째는 이승만 대통령, 3번째는 박정희 대통령
  30. [30] 한국사 최초의 상징적 국가원수라고도 할 수 있는데 대한제국 시기에 입헌군주제의 틀을 마련한 바 있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윤보선 대통령이 최초라고 볼 수 있다.
  31. [31] 김대중 대통령의 가톨릭 대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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